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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인연살해

2010.09.15 18:37

이웃집드로이드 조회 수:353 추천:2

extra_vars1 미친 빌과 귀신늑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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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상업도시 투키의 하역부두는 늘 그렇듯 오늘도 외국인과 다양한 선박으로 붐볐다. 그 중에서도 특이한 건 다소 구식의 북부 군선들이었다. 가늘고 긴 모양새를 가졌고 갑판은 없으며 한 척에 서른 명 정도가 탑승한 이 배들은 모두 세 척. 전부 하나 같이 노란 세로줄무늬가 그려진 녹색 돛과 깃발을 걸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 배들이 누구의 소유인지 금방 알아챘다.
 미치광이를 뜻하는 색깔 배합의 돛을 단 그 선박들은 용병이자 도적이며 상인인 미친 빌의 무장상선대였다.
 상선대라고는 하지만, 미친 빌의 배들은 흘수선이 얕아 많은 양의 짐을 싣기가 글러먹은 구조였다. 때문에 그 안에 실린 교역품은 작아도 비싼 물건들, 또는 약탈품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하역장의 사람들은 약간 불쾌하면서도 호기심 섞인 눈빛으로 무장상선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처음엔 북부 상선을 보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물건들만이 쏟아져 나왔다. 대륙 중부의 마법왕국에서 만든 공예품과 판화들, 화약과 총, 증류주, 장로들이 엄선한 약초 꾸러미…….
 사람들이 불쾌해하면서도 은근히 보길 바랐던 것들은 미친 빌과 함께 나타났다.
 다른 신발과 달리 튼튼한 굽을 달아놓은 가죽 장화가 나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시선은 곧 소리가 난 곳으로 몰렸다.
 허리춤에 장검을 찬 다섯 사내가 짐을 내리는 선원들과 인부들을 지나쳐 도시 방향으로 걸어갔다. 제일 뒤에선 흰 피부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전형적인 북부 사나이 둘이 커다란 가마를 짊어졌다. 그 가마에는 황금빛이 새어나와서,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던 죽은 자의 황금임을 알 수 있었다. 주인 잃은 보석과 황금의 찬란한 빛.
 가운데에서 나란히 걷는 둘은 대머리 노인과 중년사내였다.
 노인은 늘어진 주름살과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백발수염, 그리고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대머리를 가졌다. 갖가지 보석반지를 손가락마다 둘씩 꼈는데, 펑퍼짐한 흰색 로브와 그 위에 걸친 갈색 가죽 가방들은 대개 낡아서 색이 바랬다. 그 불균형적인 모습은 그가 청렴을 강조하면서도 별나게 반지만은 광적으로 좋아하는 북부 장로회의 한 사람임을 알려주었다.
 그 옆의 사내는 짧은 붉은 머리와 사각턱수염을 갖고, 주먹코에 남자치곤 약간 큰 눈을 가져 다소 순박해 보이는 인상을 가졌다. 하지만 어지간한 용병대의 간부들이 그러하듯 살벌한 무기들로 무장했다. 건장한 체구 위에는 원형 고리를 무수히 엮은 사슬갑옷과 둥그스름한 투구를 착용했으며 전형적인 양손 전투도끼와 북부製 총을 들었다. 사슬 갑옷 위에는 왼쪽 어깨부터 허리띠 오른쪽까지 가죽 띠를 둘렀는데, 그 가죽 띠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화약통이 줄줄이 매달렸다. 겉보기엔 평범한 북부 총병이지만, 그가 걷는 위치를 생각해볼 때 그는 대장이 가장 신임하는 부하다.
 가운데 두 사람보다 두 걸음 앞에 서 걷는 흰 수염의 노인이 바로 상선대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코가리개가 달린 뾰족한 투구를 쓰고, 팔꿈치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사슬갑옷과 검은 개가죽 망토를 입었다. 그 사슬 갑옷의 몸통 부분은 납작한 고리를 대갈못으로 박아 연결해놓았는데, 소매와 허리 아래 부분은 평범한 원형 고리를 그냥 엮어놓았다. 갑옷소매 밖으로 나온 팔목은 가늘고 긴 철판 몇 개를 가죽보호대 위에 고정시킨 방어구로 보호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게 파손되었다. 손에는 장갑까지 끼워져서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피부는 별로 없다. 흉흉한 두 눈과 덥수룩한 백발수염만이 그의 전부처럼 보였다. 갑옷에 파묻혔다는 말이 어울린다.
 “빌 대장님, 오랜만입니다.”
 긴 검은색 옷을 멋지게 차려 입은 남자가 이 오인조의 앞에 서면서 입을 열었다. 자유도시 상인들의 전형적인 정장으로, 그의 자리를 상징하는 옷이었다. 빌은 그를 보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기일은 지켰다.”
 “그래야죠. 요즘 남부 제국이 화약을 많이 찾거든요. 물론 황금도 중요하지만.”
 “화약 외에도 팔 게 있다. 지점장은 어디 있나?”
 “지점에 계십니다.”
 빌은 몸을 반쯤 돌려 황금이 가득한 가마로 시선을 돌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자.”


*
 투키 시의 치외법권인 북부인 거주구역은 투키 시 안의 다른 지역과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다만 북부재단에서 고용한 남부 흑인 용병 몇 명이 커다란 투창과 2연발총을 들고 진입로를 지킬 뿐이었다. 하지만 도시민들은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새겼거나 세워졌다는 해골조각상들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 구역에 쉽게 접근하질 못 했다.
 죽은 자의 왕이 축복한 자들이 사는 곳.
 30년 전 이디아 대륙 북서부에 아무런 예고 없이 나타난 죽은 자의 왕은 한 반도 국가를 저주했다. 그 나라는 곧바로 멸망했고, 왕은 영향력을 그 밖으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륙 전체의 시체를 일으켜 세워 각지를 피로 물들였다. 그의 저주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땅에선 작물들이 시들었고, 우물마다 독이 끓어 넘쳤으며, 독충이 하늘을 뒤덮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그 저주는 잦아들었건만, 그 사건은 추억되기도 끔찍해 그저 대학살이라고만 불려졌다.
 북부인의 파롤 왕국은 진원지로부터 가장 가까운 왕국 중 하나였지만, 죽은 자의 왕이 그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던지 그 와중에도 무사했다. 때문에 북부인 중 일부는 죽은 자의 왕을 질병과 의학의 신이자 행운과 재물의 신으로 추앙했다. 북부인의 서해 진출에 방해가 되던 반도 국가가 멸망하면서 황금어장과 해로를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구과잉에 시달리던 파롤 왕국은 저주가 잦아들자마자 빈 땅으로 개척민과 모험가, 귀족들을 떠나보내면서 그 영향력을 하루가 다르게 늘렸다. 
 끓어 넘치던 증오가 잦아들고 어느 정도 이성을 찾자, 죽은 자의 왕은 새 주민이 된 북부인들에게 주목했다. 그는 처음부터 북부인들을 친구로 대하기로 작정했는지, 천지를 격동시키는 검은 가루약을 가르쳐주고 멸망한 국가의 재산 중 적잖은 양을 북부에 선물로 안겼다. 그에게 돈은 많았다. 그 어떤 시체도 빈 손일뿐이니까. 이젠 이런 배경을 등에 업어 떼돈을 벌고 금융업으로까지 진출해 북부 편력상인의 편의를 봐주는 북부재단이란 단체까지 등장했다.
 남의 죽음이 곧 나의 기회.
 다른 지방 사람들은 북부인들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장로님, 대장, 다들 오랜만입니다.”
 “그 소리, 스물네 번 들었다.”
 빌은 자신을 마중 나온 사내와 똑같은 차림새를 한 투키 시의 젊은 북부재단 지점장 그라스 모리의 인사말에 볼멘소리로 답했다.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동료들이 킥킥 웃어버렸다. 모리 지점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을 아는 사람들은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했을 테니 말입니다. 대장은 반갑지 않습니까?”
 “별로.”
 모리 지점장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금이 실린 가마를 곁눈질하곤 말했다.
 “앉으시죠. 예정대로 가져오셨습니까?”
 장로가 고급스런 장식으로 치장된 긴 나무 의자에 먼저 엉덩이를 붙이자 빌은 그 옆자리이자 가운데 자리를 차지해 앉으면서 답했다.
 “그래. 배달하기로 되어 있던 화약을 뺀 화물 나머지. 그리고 미리 얘기한 죽은 자의 황금 약간.”
 모리 지점장은 부대장이 의자에 앉을 때까지 뜸을 들이다 질문했다.
 “예. 죽은 자의 황금은 밀알그릇을 통해 들었죠. 나머지 화물은 뭐가 있습니까?”
 “종류는 미리 전해준 이야기와 별로 차이 없다. 북부 증류주와 중부 판화, 호박 약간. 자세한 수량이나 품질은 네 부하한테 물어봐라. 말하기 귀찮다.”
 장사하는 사람의 언행이라고는 좀 생각하기 어려운, 짜증 섞인 말투였지만, 모리 지점장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대한 사이가 아닌데다, 무장상선대를 이끌고 있다지만 빌 대장은 상인이라고 하기엔 몇 가지가 결여되어 있으니까.
 그의 공식적 신분은 파롤 왕국의 準상비군 총병중대장이었고, 본질은 떠돌이 약탈자에 가깝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물품은 대개 위탁판매로 팔린다. 모리 지점장이 빌의 고객은 아니다. 오히려 빌이 모리 지점장의 고객이라 봐야 한다. 게다가 미친 빌은 질서 밖으로 한 발을 걸친 사람이다. 질서 안 사람에겐 위험한 폭탄과 같다. 빌은 신경을 써서 다뤄야 한다. 그라스 모리 지점장은 빌의 파손된 방어구를 곁눈질했다.
 ‘또 무슨 일 있었군.’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증류주는 좀 팔기 어렵습니다.”
 “왜?”
 “신대륙에서 값 싼 럼주가 대량으로 들어오고 있으니까요. 가격 경쟁력에서 밀립니다.”
 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격경쟁력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북부 증류주가 다른 경쟁상품에  밀린다는 사실은 익히 아는 이야기다.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서 우리도 가격을 확 깎지 않았나. 세금을 피해서 밀조하고, 중고 술통을 재활용하고…….”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서양 놈들이 대체 무슨 재주를 부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대가 안 됩니다.”
 빌은 자신답지 않게 꽤 긴 푸념을 늘어놨음에도 불구하고 모리 지점장이 고개를 젓자 믿기 힘든 결론에 도달했다.
 “설마 그 사이에 럼주 가격이 더 떨어진 거냐?”
 “예.”
 빌은 애꿎은 천장으로 시선을 돌린 채 잠깐 동안 침묵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빌어먹을 서양 놈들.”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고 남은 폐당밀로 만든다는 럼주는 파괴적인 증류주였다. 그것은 이디아 대륙에 상륙하자마자 그렇잖아도 ‘술에 취한 사회’였던 대륙을 더욱 술독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곡류가 원료인 북부 증류주나 과일이 원료인 타 지역 증류주를 가격에서 압도했다.
 “이주민 덕택에 꾸준히 팔리긴 합니다만, 신대륙 럼주와 경쟁하려면 더 낮은 가격을 부르셔야겠습니다. 원가 이하로 팔더라도.”
 “알았다.”
 “이제 북부 증류주는 갖고 오지 않으셔야겠습니다.”
 “그건 안 돼. 술 빼면 북부는 화약이나 양모, 호박 빼곤 정말 팔만한 물건이 없으니까. 이익이 적어도 반쯤 빈 배로 내려오는 것보단 낫겠지.”
 “이익이 적어도? 그쪽 원가도 상당히 내려간 모양이군요.”
 빌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정보를 밑바닥까지 보이진 않는다. 위탁판매 수수료와 운송비를 제하더라도 이익이 조금은 남는다는 이야기만이 지점장의 손에 쥐어졌다. 지점장은 어느 동네 양조장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용 절감에 목을 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큰 이익 이야길 하지.”
 빌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오른손을 들어 뒤의 부하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황금 가마가 단번에 앞으로 튀어나왔다. 모리 지점장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순간적으로 떴다가 사라졌다. 빌은 그의 눈치를 보곤 웃으며 말했다.
 “이건 어떤가?”
 “역시 멋지군요.”
 모리 지점장은 영업용 미소로 그 말만 했다. 약간의 해골 몇 개가 섞였다고는 하지만, 상자 하나가 금은보화로 가득 찬 모습은 엄청난 단위의 돈을 수시로 움직이는 북부재단 지점장조차 보기 어렵다. 금화 수천을 장부에서 움직이는 것과 같은 양의 금화를 직접 보는 것은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 저주 받아 죽은 자들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불길한 재산이란 점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메티오즈 백작령을 뒤져서 건졌다.”
 “그 동네, 아직도 나옵니까?”
 “실은 도굴꾼 패거리도 좀 털었지.”
 “도굴꾼? 설마 북부 개척민을 공격한 겁니까?”
 “아니. 대학살의 생존자 놈들, 그 머저리 병신들 말이야. 웃기게 생긴 주제에 실낙원기사단 문장을 가졌더군. 놔두면 개척민이나 시체들을 공격할 것 같아서 박살내버렸어.”
 “잘 하셨습니다. 생존자들은 죽은 자의 왕만이 아니라 우리까지 증오하니까요. 거기다 실낙원기사단은…….”
 빌은 모리 지점장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 덕택에 왕의 대리인이 황금을 더 얹어주더군. 개척귀족 놈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자네가 봤어야 했어.”
 “아쉽군요. 여하튼 저건 위탁판매가 아니라 북부재단에서 매입하겠습니다.”
 “왜?”
 “귀금속과 보석의 시세가 오를 테니 황금을 비축해두라는 명령이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순간 빌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귀금속 시세가 오르는 상황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당황스러운 이유는 바로 분쟁이다. 북부 군인으로서 분쟁을 기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슬슬 선원을 보충하려는 그에겐 분쟁이 안 좋은 소식이란 것이 문제다. 재단이 주목하는 이번 분쟁은 꽤 크리라. 그렇다면 적어도 이 근방은 선원이든 병사든 몸값이 크게 뛴다.
 “안심하십시오. 분쟁이 터질지 안 터질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터진다는 소문만으로도 가격은 춤추니까 미리 귀금속을 비축해둘 뿐입니다. 그리고 약속한 석궁병 10명은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다들 북부인 자치구 출신입니다.”
 몇 수 앞을 읽어본 모리 지점장의 말에 빌은 입가를 씰룩였다. 그에게 남쪽 상인의 약삭빠름은 익숙하지 않다.
 “좋아. 그리고 매입 건 말인데.”
 “예.”
 “아직 남쪽으로 갈지 북쪽으로 갈지 못 정했어. 적당히 싸고 잘 팔리는 걸 먼저 사둘까 하는데.”
 “결정 못 하셨다고요?”
 모리 지점장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밀알그릇에서는 이야길 못 했다. 이번 겨울엔 남쪽으로 가서 제국총독의 용병 노릇이나 한 1년 하며 보내고 싶군. 헌데 아직 그럴듯한 구인 소식은 안 들려.”
 “대장의 명성이라면 큰 문제는 없을 텐데요.”
 빌은 손사래를 쳤다. 지점장의 말은 전형적인 아부였다. 빌이 그런 말에 혹할 리가 없다.
 “명성은 얼어 죽을. 제국에선 동네 강아지 취급도 안 해준다. 거기다 느닷없이 달려가서 고용해달라고 조르기도 이상하잖나. 자네가 말한 대로 분쟁이 터진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그렇군요.”
 “여하튼 당분간 이 근방에서 머무르다 항로를 정할 거다. 이도 저도 못마땅하면 대륙 서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돌아가던가.”
 “그렇다면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잘 팔리는 교역품을 먼저 구매해둬야겠군요.”
 “값 오르기 전에 시세 낮은 것부터.”
 “그럼 양홍으로 염색한 적색 직물, 대청으로 염색한 청색 직물, 상티부스 염전의 소금, 서양 성냥과 방한구…….”
 지점장이 읊는 목록을 듣던 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그 정도는 금방 준비하겠지?”
 “물론입니다.”
 “좋아. 서적도 이 종이에 적힌 대로 준비하게.”
 종이는 빌 대장의 주먹 속에서 나왔다. 모리 지점장은 구겨진 종이쪽지를 받아들어 펼쳐보았다. 품속에서 코걸이 안경을 꺼내 낀 그는 잠시 뒤 말했다.
 “건강법, 양생훈 보론, 외과대요 비판본, 삼각법 전서, 기하학 원론, 문명의 역사, 시간의 승리, 상상세계……신간정보를 귀신 같이 알아내셨군요.”
 “장로회가 신간정보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선원들 주게 럼주도 좀 챙겨둬.”
 “럼주는 재단에서 만든 놈들로 채워도 되겠습니까?”
 지나치게 단순한 질문이었다. 빌은 모리 지점장이 원하는 대답을 건네줬다.
 “서양 럼주를 이 도시에서 사려면 관세가 붙잖나. 그렇잖아도 이 도시는 럼주에 매긴 관세를 미친 듯이 올린다던데.”
 “사실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모를 게 뭐 있어. 여기 놈들도 자기네 증류주가 럼주에 밀릴까봐 겁먹은 거지.”
 “그런 것 치곤 좀 극단적으로 높은 관세입니다. 투키는 예속도시들이 증류주를 소량 만들뿐인데 말이죠. 여하튼 저희야 좋죠. 저희 럼주도 그럭저럭 경쟁력을 얻으니까요.”
 “그래. 기왕이면 같은 북부인끼리 거래해야지.”
 “세금이 때론 득이 되는군요. 빌 대장과 거래하는 밀주양조장에겐 해당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만.”
 모리 지점장이 웃으면서 말하자 빌은 손사래를 쳤다. 그는 남의 귀를 조심하란 의미로 창밖에 힐끗 눈길을 주며 말했다.
 “떠들고 다니지 마라. 관리 놈들이 알면 귀찮아져.”
 지점장은 기어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예. 럼주는 일 할 할인해드리죠.”
 “좀 더 깎지?”
 “저희도 먹고 살아야죠.”
 “엄청 벌면서 엄살은. 아, 이건 락토 개척촌의 브롬 장로님 요구인데, 이번에 가져온 약초 값은 별도로 취급해서 환어음으로 달라더군. 북쪽으로 가는 재단 선박 편에 전해드리게.”
 “그 어르신, 현물과 금화 밖에 모르시더니 이젠 어음도 쓰시는군요.”
 “이젠 지점들과 거래해도 될 만큼 개척촌이 성장했단 이야기겠지.”
 “시대가 변한단 이야기가 정확하겠죠. 북부인이 남쪽에서 이렇게 장사와 돈놀이로 번영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장로회도 좀 덜 완고해졌으면 좋겠습니다만.”
 빌 대장의 옆에 있는 종군 장로 들으라는 소리였다. 30년 전의 대학살은 타 지방과 달리 한 세기는 뒤떨어져 살던 북부인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줬지만 아직 장로회는 보수적이었고 비밀스러웠다. 장로는 콧방귀만 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빌 대장이 짧게 변호했다.
 “첨단을 달리는 사람이 있으면,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도 필요한 거야. 좋은 서적이나 몇 권 추가해주게. 인기 있는 녀석으로.”
 “하긴, 대장도 보수파니 이런 말은 쓸데없겠군요. 책은 제가 직접 골라보죠.”
 “싸게 해주면 고맙겠군. 브롬 장로님 드릴 것은 따로 포장해주고.”
 “예. 신입은 오늘 저녁시간까지 보내겠습니다. 아, 노예와 권총도 마침 좀 들어와 있습니다만. 권총 몇 자루 보시겠습니까?”
 권총이란 말에 빌은 흥미를 보였다. 총은 많을수록 좋았다. 화승총을 두 자루 가지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권총이라면 그렇게 큰 부담이 가질 않아 여러 자루를 더 장비할 수 있다. 보조무기로는 그런대로 쓸 만한 것이다.
 “길이는 어느 정도인가?”
 “한 뼘 정도 됩니다.”
 빌은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적어도 그의 기준에 의하면 한 뼘 길이의 권총은 지나치게 작은 권총들이었다.
 “2뼘 이상은 되어야 써먹을 수 있지. 애들 장난감 같은 총으로 뭘 잡겠나. 우린 그보다 강력한 총이 많다.”
 “뇌관총입니다만.”
 “진작 말하지.”
 빌은 당장 입장을 뒤집었다. 화승식보다 간편한 뇌관식 총은 비싼 물건이었다. 뇌관의 생산량이 아직 적은 탓이었다.
 “내가 볼 것까진 없고, 신입들에게 몇 정 들려서 보내라. 뇌관도 좀 주고. 노예는 나가는 길에 보겠다. 하역창고에 있지?”
 “예. 신경 써서 준비하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그래, 더 이상의 추가사항은 없다.”
 사전에 밀알그릇을 통해 정해진 대로다. 사업이란 본디 이야기가 많지만, 적어도 그에 관한 말은 다 했다. 이젠 빌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 응접실엔 불편한 적막이 흘렀다.
 빌은 한숨을 내쉬어 침묵을 깨곤 말했다.
 “반가운 소식은?”
 “죄송합니다.”
 모리 지점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과했다. 빌은 어깨를 늘어뜨리곤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상품에 대해 실망했을 때보다 더 심각한 모습이었다. 지치고 슬픈 노인의 얼굴. 순식간에 그의 체구가 왜소해지는 것 같았다. 게드 장로만이 혀를 찰 뿐, 다른 사람들은 그의 침울함에 끼어들지 못했다.
 빌은 다시 가슴을 폈다. 그는 고집 센 노인의 얼굴을 회복하곤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알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게 자네 잘못인가.”
 “반가운 소식은 들어오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이만 일어나겠다.”
 “예. 편히 쉬시길.”
 의자를 차지하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동시에 일어섰다. 응접실을 나서는 순간 지점장과 빌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걸어갔다. 부하들은 붉은 머리의 부관에게 요청의 시선을 보냈지만, 가장 고참인 그는 대장이 말하지 않는 것을 캐묻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의 기대와 다른 질문만을 꺼냈다.
 “대장, 다리는 괜찮아?”
 빌은 고개만 끄덕였다. 바지의 꿰매놓은 자리에 약간 얼룩이 지고 있다. 대답은 대머리 게드 장로가 대신했다.
 “할퀴었을 뿐이야. 약을 바르고 붕대를 매놨으니 괜찮을 거다.”
 “그냥 할퀴었다고만 말하기엔 꽤 깊었잖습니까. 그 상태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걷고 다니니 괜찮을 리가 있습니까.”
 “괴물늑대를 상대로 싸우고 그 정도면 죽은 자의 왕이 가호한 거야. 죽음이 알아서 피한 거라고.”
 “쓸데없는 말.”
 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래 그의 몫이었던 자리를 차지한 뒤에도 그는 전쟁 특유의 철학 한 토막만 내놓았다.
 “모든 것은 운명일 뿐. 승리도, 패배도, 삶도, 죽음도.”
 “또 나오는군. 그 구닥다리 숙명론.”
 “장로 옆에서 구닥다리 소리 하면 맞는다?”
 낄낄거리며 서로 싸우는 시늉을 하는 시론과 게드를 향해 고개를 돌린 빌은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할 말만 꺼냈다.
 “노예나 보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