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Le Comte de Vergnette

2007.07.20 08:59

하코 조회 수:1486 추천:4

extra_vars1 마술사 
extra_vars2
extra_vars3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밤이 찾아왔다.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은 급한 성격이었나 보다. 해가 진지 얼마 되지도 않아 황도 런던의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태양이 구름사이로 숨어들고, 다시 달 꽃이 피어오를 무렵. 그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끝없는 낮과 새벽의 기로에서 헤매던 하늘이 달마저 가려버린 듯 했다. 밖은 어두컴컴했고 사람들은 내일의 일과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누웠다. 제과점과 잡화점은 벌써 불이 꺼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렇게 늦은 밤도 아니었다. 착한 어린이들이야 잠들 시간이었지만, 하루 노동에 찌든 노동자나 시장 구석에서 야채를 파는 할머니, 순찰로 남아있는 경찰만 하더라도 런던은 아직 바빴다. 도심 주변의 캄캄한 공원에서는 연인들이 뜨거운 밀애를 즐기고, 집 반찬을 마련 못한 주부들은 아직 파하지 않은 시장에서 야채 하나라도 더 싸게 사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오늘 밤은 무슨 특별한 날인가. 거리에 외로이 서 있던 가로등이 환히 웃었다. 외진 길이기에 밝은 낮에도 사람들은 자주 오지 않는다. 근 몇 일 동안 쓸쓸하고 적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오늘 도보를 걸어오는 발길에 그런 마음은 씻은 듯 사라졌다. 조심스러운 발걸음, 한결같은 예법이 신분 높은 사람이란 걸 증명해 주었다. 맑은 여자들의 웃음소리에 화답하듯, 가로등은 더욱 밝게 빛났다.

“베르그네트 백작은 그날 이후 아무 소식도 없지요?”

  두 명의 귀부인중 오른편의 귀부인이 말꼬리를 높였다. 고요함에 주위를 돌아보고 있던 참이었다. 땅에 닿을 정도로 긴 드레스를 손가락으로 살짝 잡고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있었는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던 왼편의 귀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검소하게 보이려는지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간단한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보통 귀족들은 특별한 연회나 행사가 아니면 비교적 간편한 옷차림을 입곤 했다. 여자들은 평소에도 코르셋의 압박이 장난이 아니었기에 답답한 드레스는 그 압박을 더욱 가중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범한 옷이라고 해도 재질도 보통이 아니고, 옷 어디에 빠지지 않고 주렁주렁 매달린 보석의 수와 품질 또한 무시 할 수 없었다. 귀족정신은 어디서나 여전하다는 명언이 생각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니었지만 귀족 부인들이 돌아다닐 시간은 절대 아니었다. 정숙과 정조를 자세로 삼진 않더라도 밤늦은 외출은 거의 없던 귀족들이었다. 때 묻은 세월에 지친 노동자, 지친 주름으로 고생의 강도를 측정해 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으레 늦게까지 일하곤 했다. 그 외의 사람들이라도 밤늦은 시간까지 남아있긴 했지만, 그건 그리 많은 사람들이 아니고 일부만이 얼쩡거릴 뿐이었다.

“그때의 연회 이후에는 잠잠하지요.”

  왼편의 귀부인이 대답했다. 베르그네트 백작은 그날 이후로 아무 소식도 없다. 또 무언가를 준비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조용했다. 다시 오른쪽의 귀부인이 물었다.

“훤칠하고 잘 생긴 게 제 딸이랑 결혼하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나요?”

  베르그네트 백작은 단연 화제였다. 연회가 벌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사실 많이 지났어도 잊혀 질 리가 없었다. 그 어마어마하게 비싼 저택의 가격을 알면 아무리 돈 많은 귀족이라도 입을 벌리기 마련이었다. 이천만 에델만파운드면 평생을 놀고먹고도 남을 돈이었다.    재력 과시를 위해 썼다 기엔 너무 많은 돈 이었기에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르그네트 백작의 재력 은 대단하다’라는 인식은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자연스레 잡혔다. 그 연회의 참석자 혹은 참석자가 아닌 사람들도 그의 재력을 부러워했고, 어떻게든 그와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아직 미혼이라는 사실은 좋은 기회일수밖에 없었다. 딸자식 있는 귀족 치고 어느 정도 백작에 욕심내지 않는 귀족은 드물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곰곰이 떠올려 보면, 사실 백작의 얼굴이 그다지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그리고 기억에 남더라도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외모야 금방이지만, 돈은 오래 갈수 있다. 화려한 조각품, 아름다운 정원, 위엄 그득하던 커다란 저택, 그 연회의 기억만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어머, 부인의 딸은 아직 일곱 살 아닌가요?”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왼편의 귀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른편의 귀부인도 보석 박힌 장갑을 들어 입을 막고 살짝 웃었다. 어렸을 적부터 친구이던 두 부인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이 몇 살이며 딸은 결혼을 했고 안 했고 남편이 술주정뱅이다 등등의 정보는 기본으로 공유하는 사이였다.

“아, 다 온 것 같아요.”

  조용히 걸어가던 두 사람은 잠시 멈췄다. 가로등 가득히 세워져있던 길도 끝나고, 환한 불빛이 그들을 반겼다. 새로 나타난 것은 둥그란 모양으로 커다랗게 세워져있는 건물이었다. 아까의 외로운 길과는 달리 이곳은 화려한 복장의 귀족들이 몰려있었다. 이렇게 늦은 밤에 귀족들이 모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사람들도 스타디움 문 앞에 걸려있는 판을 보면 그 이유를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귀부인은 건물 앞에 서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건물 안으로 발을 옮겼다.
  황도의 명물이라 불리기도 하는 귀족 전용 공연장인 라스텔 스타디움이었고, 커다란 문 앞에는 ‘세계적 마술사 데시드의 화려한 마술 공연’ 이라고 큼지막하게 서있었다.





  데시드의 마술 공연은 상당히 유명했다. 일단 뺀질 하게 잘생긴 얼굴의 남자라 귀부인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있지만, 마술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세계를 순회하며 펼치는 마술 공연은 누구든 손꼽고 기다릴 만 했다. 공연이 런던에서 열린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귀족들이 환호했다.

"잠시 실례하겠소."

  아직 공연이 시작하기 전이었다. 자리에 앉아 공연 시작을 기다리던 콧수염 난 귀족은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머리 깊숙하게 눌러쓴 중절모가 보였다. 한 손에는 번호표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금으로 장식된 지팡이를 잡고 있는 사내였다. 번호표를 슬쩍 본 콧수염 난 귀족은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중절모 쓴 사내는 귀족을 지나 그 옆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온 몸에 달고 다니는 귀한 보석들이 조명등에 비춰졌다. 사내의 재력을 어느 정도 파악한 귀족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자신의 재력으로는 불가능한 치장이었다.
  사내는 품속으로 손을 옮겼다. 두툼한 무언가가 만져지고, 그중 일부를 품 안에서 꺼냈다. 갈색 봉투 안에 보관되었던 서류철이었다. 사내는 서류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늦은 밤 이었고, 비춰지는 조명도 약했기에 스타디움 내는 어두웠다. 하지만 사내는 안광이라도 냈는지, 서류의 내용을 잘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사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그는 아직 텅 빈 무대를 둘러보았다.
  시작 전이기 때문인지 아직까지는 소란한 내부였다. 푹신한 의자가 원 모양 스타디움의 둘레를 가득 채우고, 그 중심에 화려하게 꾸며진 높은 무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천장은 원형으로 뚫려있어 까만 밤하늘이 보였고, 천장 주변 에는 갖가지 종류의 조명이 빛났다.  무대에는 아직 주인공이 오지 않은 모양이다.

“부인, 그 소식 들었어요?”

“어떤 소식요?”

  잠시 딴 생각에 빠져있던 사내의 귀에 귀부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앞 열에 앉아있는 두 귀부인은 무엇이 그리 신난 지,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벌써 몇 십분 째 나누는 대화이기에 질릴 만도 하다만, 두 귀부인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어떤 식당 여자 화장실에 변태가 나타났데요.”

“변태요?”

  순간적으로 사내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황도의 치안 때문에 범죄자가 나타나는 비율이 적었기 때문이다.

“네. 그런데 여자 화장실 벽을 통과해서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요.”

“벽을 통과한다고요?”

  사내의 몸이 움찔했다. ‘벽을 통과했다‘ 라는 말에 그는 다시 주의 깊게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사내는 이내 굳어진 얼굴을 폈다. 앞 열의 귀부인들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더 이상 그의 귀에 들어올 정도로 흥미로운 소식은 없었다. 아직 마술사가 오지 않았나, 그는 무대위를 살펴보았다.
  스타디움 높이 위치한 시계의 시각을 확인한 사내는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가고, 귀족들이 소란했단 수다도 잦아들 무렵,  무대의 아래편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람 모양의 기다란 그림자의 오른손엔 무슨 막대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드러났을 때, 스타디움 내의 모든 귀족은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짧은 갈색 머리에 유쾌한 표정을 지은 채 그림자의 주인공은 오른손으로 마술 봉을 흔들며 외쳤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공연을 시작합니다!"






“자,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공연이 열기가 한창 뜨거워질 때였다. 무대 바로 앞에서 공연을 보고 있던 슈렌파이 후작은 자신에게 내밀어지는 손에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고, 앞에는 마술사 데시드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엉겹결에 손을 잡고 무대 위로 나간 후작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긴장했다. 보통 마술사의 손을 잡고 올라간 관객은 나쁘게 말해 ‘실험도구’가 될 운명이다. 그리고 후작의 기억 속에선 실험도구로 끌려 나간 사람이 당하는 일은 끔찍한 것뿐이다. 퀘퀘묵은 나무상자 속에서 사방으로 꽂아지는 칼에 푹 찔려야 한다던지 혹은 곧 물에 빠질 상자에 들어가서 탈출 쇼를 도와줘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실험도구였던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그건 또 무사할 때의 일일 뿐이다. 후작은 무대 주위에 자신을 공포에 빠지게 할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무대에서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명예에 ‘겁쟁이’ 라는 먹을 칠하게 될지도 몰랐다. 평소에 마술을 좋아하고 데시드의 마술이라면 미치도록 좋아하는 후작이지만 이런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후작은 당장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쩔쩔맸다.

“후작님께서 도와주실 마술은 이것입니다.”

  오들오들 떨고 있던 후작에게 데시드가 다가갔다. 그 모습이 불쌍했던지, 데시드는 부드러운 웃음을 얼굴 가득히 띄고 있었다. 그의 손이 후작의 눈높이로 올라갔고, 그 손에 잡혀진 것을 본 후작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그의 손엔 조커를 선두로 카드 뭉치가 쥐어져 있었다. 고작 카드 몇 장 가지고 그렇게 수선을 떨었던 게 부끄러운 이유였다. 귀족들은 데시드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또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후작의 손에는 몇 장의 카드가 쥐어지고, 데시드는 무대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데시드가 도와달라는 마술은 카드 마술인 것 같았다. 후작은 혹시 긴장감을 떨어뜨리기 위한 술책은 아닐까, 하고 주변을 살펴봤지만 텅 빈 무대에는 후작과 데시드 뿐이었다. 마술입니다! 하고 갑자기 없던 살인 도구가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것은 후작이 모르기에 당장 걱정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 후작의 겁 많은 성품은 어디 가지 않았고, 그 성품은 그를 불안에 미치게 했다. 평소 여섯 마왕의 측근으로 무슨 짓이던 하던 그는 적이 많았고, 언제 암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 모두 후작님을 주목해 주십시오!”

  벌써 무대 끝까지 달려간 데시드가 크게 외쳤다. 순간 모든 귀족의 눈이 후작에게 쏠리고, 후작은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어쩔 줄 몰라 쩔쩔 맸다. 당황한 후작은 급히 고개를 돌려 데시드를 바라보았다. 무대 끝에선 데시드가 손으로 무엇인가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카드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또 다른 카드를 쥔 채 두 손 모두 올리고 있었다. 다시 한 손은 밑으로 내리고, 남은 한 손의 카드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동작이었다. 아마 따라하라는 동작인 것 같았다. 당장 무엇을 할지 몰라 급한 후작은 데시드의 동작을 보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두 손이 모두 올라갔다. 그리고 한 손을 다시 천천히 내렸다. 후작은 데시드를 주시한 채 천천히 남은 카드 한 장도 떨어뜨렸다. 순간 후작의 눈이 흐릿해지고, 데시드의 부드러운 웃음만이 잔상으로 남았다. 그리고 후작은 다시는 데시드를 보지 못했다.

“뭐지!”

“정전이다!”

  갑자기 스타디움 전체에 조명등이 꺼졌다. 건물 내부를 간신히 밝히던 조명등이 꺼지자 스타디움 내부는 어둠으로 꽉 차버렸다. 워낙 늦은 밤에 시작한 공연이라 한 줌의 빛도 찾을 수 없게 됐다. 많은 귀족들이 혼란에 빠진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손으로 앞을 더듬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고, 손에 잡히는 것도 옆 사람의 얼굴이나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귀족들은 눈뜬장님이 된 체로 주변을 살폈다.

“옆에 계신 분은 칼돈 자작님 입니까?”

“그러면 지금 말하는 사람은 메흐덴 남작이오?”

  스타디움 내부엔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상대방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지금 일어난 정전에 대한 불평이었다. 라스텔 스타디움 이라고 하면 나라에서 엄청난 양의 돈을 부어 만든 황도 제일의 공연장 또는 경기장 이었다. 그 만큼 관리도 철저히 하고 내부 장비도 항시 고장 없게 점검해야했다. 그런 만큼 이런 실수 따위는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스타디움의 책임자의 관리 소홀은 귀족들의 안전으로 직결되기에 그만큼 더 중요했다. 치안이 좋은 스타디움이기 때문에 ‘암살이다!’ 라고 생각하여 급히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어서 불이 다시 들어와 스타디움 책임자를 질책하고 다시 데시드의 마술을 관람하는 것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피해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다시 불이 들어옵니다!”

  불이 꺼진지 얼마 되지 않아 스타디움 내의 스피커에서 안내문이 들려왔다. 여느 타 스타디움에선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대처였다. 다시 조명등이 하나씩 천천히 점등되고, 어두웠던 경기장도 천천히 밝아졌다. 귀족들은 다시 무대 중앙을 보기 시작했다. 부실한 장비에 귀족들이 해코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꺄악!”

  어느 귀부인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스타디움에 있는 귀족들의 눈이 한 순간 커졌다.  밝혀진 조명등에 드러난 건 데시드의 창백한 얼굴, 카드가 목에 꽂힌 채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슈렌파이 후작이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이 물러가고, 해가 바둥거리며 하늘위로 올라갈 때쯤에 조사가 끝이 났다. 슈렌파이 후작이 죽고 몇 시간 동안 경찰에게 취조를 받던 한 마술사는 경찰의 한 마디에 입가에 스며드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그만 가셔도 좋습니다.”

  눈가를 쓱쓱 문지르며 데시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짙게 나 있었다. 밤을 꼬박 새서 취조를 받은 까닭에 감겨지는 눈꺼풀을 지탱하기가 힘들었다. 경찰에게 잠시 압수당했던 마술 도구들을 돌려받은 후에야 데시드는 스타디움 밖을 나갈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이번 살인 사건과는 별 관계가 없으신 듯 하군요. 일단은 보내 드리겠습니다만, 몇 번 다시 소환할 예정입니다.”

“네...”

“당분간 마술 공연은 하실 수 없으니까 참고해주세요. 괜한 사건에 휘말려서 힘드시겠군요.”

  담당 경찰관의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공연장 내부엔 경찰들이 가득히 몰려있었다. 사건 목격자라고 할 수 있는 귀족들은 일부만 남아서 경찰들에게 잠깐 진술한 후 곧바로 공연장을 떠났다. 아직까지 경찰에게 취조 받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공연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이었다. 후작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는 경찰들이 몰려서 조사하고 있었고, 한 쪽에서는 목격자들의 진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저야 괜찮습니다. 그럼 수고해 주십시오.”

  데시드는 공연장 밖으로 나왔다.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본 후작의 자리에는 약간의 피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사가 시작될 때 시신은 경찰 쪽에서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다. 명색이 후작이라는 높은 자리의 귀족인지라 곧바로 가족의 품에 돌려 졌겠지만. 공연의 단골손님이었던 후작의 죽음에 데시드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들이야 좋아하지 않긴 하지만 단골손님에겐 어느 정도 신경을 써두고 있었다. 공연장 안은 경찰들이 조사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약간 남은 미련을 피곤으로 눌러버리고 데시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런던에서 바라보는 아침은 언제나 그렇든 다양하고 근사하다. 햇살이 비추고, 구름이 떠다니고, 흔들리는 나무 사이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크게 들린다. 도심에 위치한 에델만 광장의 모습이나 웅장하게 서 있는 건물들, 인공적으로 심어진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연미가 런던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도로에는 차들이 지나다니고 꽃과 나무와 예쁜 돌로 만들어진 공원에는 다정한 연인들의 대화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왔다. 지친 얼굴의 하층민들은 그늘진 부분을 차지하고, 그와 대조되게 화려하게 치장된 귀족들이 밝은 햇살이 비춰지는 양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술사 데시드씨?”

“네?”

  뒤에선가 굵고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데시드는 사내의 범상치 않은 복장에 놀랐다. 커다란 중절모를 머리 깊숙이 눌러 쓰고 있는 남자였다. 한 손에 쥐고 있는 금으로 도금된 지팡이, 입고 있는 외투 가득히 치장된 보석들이 얼핏 보면 귀족 같은 차림새였다. 하지만 중절모 아래 그늘진 부분에 길게 나 있는 흉터로 험악해 보이는 인상은 거친 인생을 살아온 사람 같았다. 인상과 어울리게 커다란 덩치도 한몫을 했다. 애매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내는 대뜸 말했다.

“공연 잘 봤습니다. 기대 이상이더군요.”

  아마도 공연을 관람했던 귀족 중 한명인 것 같았다. 사실 마무리 부분에 좋지 못한 사건으로 망쳐버린 공연이었다. 후작의 죽음이 갑자기 떠오른 데시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는 그런 데시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마무리로 후작을 깔끔하게 암살하는 솜씨도 좋았습니다.”

“네? 무슨 소리이신지?”

  갑자기 나온 뜬금없는 소리에 놀라 데시드는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벌어진 중절모 사이에서 보인 입가의 한 쪽이 비틀어져 올라갔다. 후작을 암살했다, 아마 데시드를 두고 말한 소리 같았다. 데시드는 한껏 불쾌한 표정을 지은 후 사내를 노려봤다.

“이드렌 아시븐, 뒷세계에선 유명한 암살자의 필명입니다. 남장을 즐겨한다는 소문이 있지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제가 후작님을 암살했다는 소리인가요? 제가 어떻게요?”

  어이없는 표정밖에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이드렌 어쩌고 하는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을 대며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남장을 즐겨하는 여자로 만들고 있다. 자신을 후작 암살 범인으로 몰려는 사내의 음모에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후작의 죽음부터 자신의 세계에 뭔가 혼란이 빚어지는 것 같다며 데시드는 투덜댔다. 오늘 따라 자꾸 일이 꼬여 가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날 때 후작의 옆에 있긴 했지만, 흉기로 나온 카드에 묻은 지문은 데시드의 지문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그런 지문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후작의 죽음으로 손해를 본 것은 오히려 데시드 자신이었다. 많은 수익을 보장하는 마술 공연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앞으로 호텔에 투숙하며 몇 일간 하릴없이 보내야 할 수 밖에 없었다.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암살 의뢰를 한 게 여섯 마왕이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의 수하이고요.”

  여섯 마왕의 이름이 나오자 지금까지 기가 차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데시드의 얼굴이 갑자기 변했다. 시장에서 에누리라도 실패한 듯 찌그러진 표정이 더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놀랍게도 입에선 지금까지의 낮은 중성적인 목소리와는 달리 높은 톤의 목소리가 나왔다.

“넌 여섯 마왕 쪽의 사람인가?”

  지금 까지 마술사 데시드, 즉 암살자 이드렌 아시븐의 얼굴에서 벌어진 놀라운 연기에 사내는 감탄스러워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그것도 성별이 다른 정반대의 역활이라면 말이다. 한 쪽으론 세계적 마술사 데시드, 다른 쪽으론 암살자 이드렌 아시븐이란 이름으로 불려진 여자는 사내를 깊게 주시 했다. 사내는 지금까지의 연기에 보답하기로 했다.

“의뢰를 요청한건 여섯 마왕 중 한명이었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의 말에 이드렌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경찰에게 물품검사까지 받은 마술사의 복장, 칼 같은 게 달려 있을 리가 없었다. 여자는 비밀무기로 개조한 지팡이의 손잡이를 잡아 올린 후, 천천히 둘렸다. 그리고 손잡이를 열었다. 그 안에는 경찰도 발견하지 못한, 날카로운 칼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아침 시각에, 이렇게 북적거리는 도심 한복판에서 누군가를 죽였다간 몇 초 되지도 않아 경찰이 들이닥치기 마련이다. 도망갈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목격한 경우 특유의 마술사 복장으로 인해 범인이 마술사 데시드 란걸 금세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쌓아올린 가면의 가치가 너무 아까웠다. 이드렌은 지팡이를 오직 사내만이 볼 수 있는 사각지대에 숨기고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협박으로 입을 떼려고 하던 참이었다. 사내의 행동에 이드렌은 잠시 멈췄다.
  사내는 깊숙이 눌러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었다. 이드렌의 예상대로 흉터가 크게 나있는 얼굴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커다란 덩치와 그와 잘 어울리는 인상, 그리고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잘 어울렸다. 금으로 도금된 지팡이 위에 중절모를 살짝 걸치고는, 사내는 전혀 긴장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입고 있는 외투 사이로 녹색의 조끼가 보였다.

“제 이름은 야코포 라고 합니다.”










이드렌 아시븐(Idren Asiven) - 마술사 이자 암살자.

성별 - 여자

나이 - 불명

고향 - 불명

  원래의 이름은 알 수 없고, 뒷 세계에선 필명으로 이드렌 아시븐이라고 불림. (왜 그렇게 불리는지는 의문) 상당히 유명한 암살자로, 변장과 마술의 달인이며 속이는 것을 잘하는 무서운 성격. ‘데시드‘ 란 이름의 유명한 남자 마술사와 암살자 ’이드렌 아시븐’ 의 이중 역할을 함. 무슨 이유인지 부유 대륙을 사려는 목적으로 돈을 벌고 있음. 자신을 키운 암살자 스승을 죽였다는 소문이 있음.

-역시 암살자니까 뒤에서 찍어버리는 게 특기겠지요. ㄱ- 상당히 재빠르고 암살을 마술 같이 펼칩니다.




---------------------------------



끄어.. 미치겠습니다. 갈갈이님의 무게에다가 몇일간 컴퓨터도 제대로 못하고 등등의 이유로 상당히 늦게 올렸습니다. ㄱ= 죄송해요. 어떻게든 빨리 올리려고 쌩쑈를 하다가 본의 아니게 미흡한 부분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크흨. 읽다보면 뭔가 '사건이 초 급전개 되는 것 같다!' 라고 느끼실 겁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66 배틀로얄 [34] Bryan 2008.01.10 295
565 배틀로얄 [11] file 기브 2008.01.09 508
564 배틀로얄 [40] 기브 2008.01.09 297
563 배틀로얄 [37] die1death 2008.01.09 248
562 배틀로얄 [42] Rei 2008.01.04 371
561 배틀로얄 [29] 하코 2008.01.02 278
560 배틀로얄 [34] 아란 2007.12.31 583
559 배틀로얄 [24] 베넘 2007.12.30 368
558 배틀로얄 [25] Bryan 2007.12.30 323
557 배틀로얄 [26] 기브 2007.12.27 590
556 배틀로얄 [19] 기브 2007.12.27 589
555 꿈꾸는 자의 모험 [6] 씨말른아이 2007.12.18 1812
554 [ReB...] [1] 우편엽서 2007.10.16 1357
553 Le Comte de Vergnette [4] Mr. J 2007.08.11 1453
552 [ReB...] [4] 치료 2007.08.08 1800
551 [ReB...] [4] 무역장사 2007.08.06 1542
550 [ReB...] [5] file 우편엽서 2007.08.05 1474
549 Le Comte de Vergnette [6] 마일 2007.07.27 1405
» Le Comte de Vergnette [6] 하코 2007.07.20 1486
547 Destiny * 운명의 일곱 가지 [3] Mr. J 2007.07.20 1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