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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Flame Blaze

2006.12.03 12:34

아란 조회 수:115 추천:4

extra_vars1 <font size=5 face=궁서체 color=red>Last Dance of Flame</font> 
extra_vars2 <font color=red>Fire 24(完)</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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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콰쾅.

돌연 푸르른 저 높은 하늘에서 시커먼 연기와 함께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며 푸른 하늘을 온통 시커멓게 물들어갔다.

“하늘이….”

은태는 돌연 하늘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하늘을 올려본 은태의 갈색 눈동자가 작아졌다.

“쯧쯧, 기어이…”

원시천존이 시커멓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쩌면 너희들 7선이 힘을 합쳐야 할런지도 모르겠군.」

“반고님!”

낮게 깔린 반고의 목소리에 7선들이 일제히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아이와 불여시를 안전한 곳으로….」

반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7선과 은태가 있던 미르의 땅이 네 갈래로 쩍 갈라지며, 갈라진 부분에서 검 보랏빛의 에너지 파장이 높이 솟구쳐 오르며 그 자리에 있던 태상노군, 천보도군, 환웅, 환인, 석가모니가 삼켜졌다.

「어서….」

모기 소리만큼 작게 들린 반고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원시천존이 미리 은태를 들쳐메고 달아날 준비를 하던 덴 시그와 함께 그 자리를 피했으며 예수는 반고의 넋에서 떠내려 온 주황색 보옥을 꼭 쥐며 미르의 땅을 네 갈래로 가르며 높이 솟구쳐 오른, 검 보랏빛의 에너지 파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더 이상 반고의 목소리도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검 보랏빛의 에너지 파장이 가라앉았을 때 나타난 것은 더 없이 시커멓게 물들어버린 더 이상 7선이라 부를 수 없는 태상노군, 천보도군, 환웅, 환인, 석가모니가 주위에 시커먼 검 보랏빛의 기운을 강렬하게 발산하며 새하얀 흰자위만 드러난 눈으로 예수를 주시하며 서 있었다.

“자네들이 이렇게 간단히 타락해버리다니….”

예수는 여차하면 주황색 보옥을 사용해 옛 7선이었던 그들을 가둬버릴 준비를 하였다. 그들 타락한 5명의 칠선은 예수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시커먼 기운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안쓰러운 지고. 예수여.」

“설마, 반고님….”

「이제 알겠느냐? 어머님의 의지다. 세계를, 이 세계를 칠흑으로 물들이고 또 물들여 칠흑빛 금강석으로 제련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예수는 더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평상시의 인자한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반고님이 아니군요.”

「이들 모두 나의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를 칠흑으로 물들였다. 예수, 너도 이리로 오라.」

“반고님의 껍데기를 쓴 어리석은 왕에게 가지는 않습니다. 이 보옥 속에서 영영 자신의 죗값을 치르시길….”

예수는 돌연 주황색 보옥을 타락한 5명의 칠선을 향해 내던졌다. 그러나 돌연 미르의 땅 중심에 칠흑빛 에너지 기둥이 솟구치며 거기서 나타난 한 남자에 손이 주황색 보옥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주황색 보옥의 겉면에 칠흑빛 돌조각이 솟구치며 감싸다 한순간에 깨져버렸고 칠흑빛 보옥만이 남자의 손에 잡혀 있었다.

「반고인지 반창고인지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다니, 과연 둘 밖에 안 남은 칠선. 아니, 이젠 한 명만 남게 되려나?」

“역시 은(慇)이었군.”

「늘 늦는다고, 당신들 칠선이란 작자들은. 그리고 세계 그 자체인 왕보다 더 존경해 마지  않는 반고란 작자는 훨씬 더 굼벵이고.」

은의 말이 끝나자마자 예수의 발밑에서 칠흑빛 에너지 기둥이 치솟았다.

「내가 조율하는 세계가 어차피 멸망할 운명이라면, 이 많은 세계 전부를 은하를 시커멓게 물들여 버리면 돼. 그럼 멸망해야 할 세계의 기준은 없어져 버려.」


§ Flame Blaze §


차가운 기계장치가 단단히 내 몸을 구속하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끝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지. 그날 이후로는 눈을 뜨자마자 은태부터 찾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 애를 만나는 것이 너무나 무서워. 왜냐하면 그때 클러치에게 대판 깨졌던 날 온몸으로 알게 되었는걸. 은태도 옛날 일을 기억해내게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날 무척이나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미소 지으며 나타나 말을 거는 위선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무 쉽게 확보했군.”

- 삐삑, 예상외로 어떤 저항도 없었습니다. 오메가 님.

“그래, 정말 예상 밖이야. 아무리 클러치에게 두들겨 맞았다고는 해도 악명 높은 플레임 블레이즈, 그래서 시스 3개 사단을 일부러 데리고 왔건만. 한 번 졌다고 이렇게나 의욕을 잃어버렸을 줄은. 적어도 시스 3개 사단 전부를 잃을 각오를 하고 왔건만 이래가지고는 시스들을 욕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군.”

어렴풋이 들려오는 기계음들, 하나같이 나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실망이라느니 너무 쉬웠다느니 등에 이야기뿐이었다. 하긴 은태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던 때부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없겠지. 다 부질 없어. 다 끝난 거야. 이젠 나도 아버지, 엄마 곁으로 돌아가야지.

“프로즌 버스터 익스퍼트!!”

- Yes, My Boss!

어디선가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와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디바이스의 중후한 남성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음에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얼어붙어 깨지거나 폭발하는 소리들이 연달아 들려왔다.

“허허, 이거 정말 예상 밖의 일이 터졌군. 하지만 누구라도 상관없겠지. 나와 시스들의 전투 욕구를 채워주기에는.”

오메가가 즐겁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들렸다.
그 뒤로도 폭발하고 터지고, 얼어붙는 소리들이 연달아 들리고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며 나는 소리에 이어 익숙한 소녀의 신음소리까지… 하지만 나하고는 상관없…!

“큭, 역시 엔젤 13군단장. 시스의 군주, 오메가. 하지만 지금은….”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 그리고 차갑지만 따듯한 피가 흐르는 손이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초점 안 잡히는 시야 너머로 하체가 얼어붙은 오메가가 양손에 붉은 광검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치게 놔둘까 보냐!!”

오메가의 절규를 뒤로 하고 시야가 흐려졌다.


§ Flame Blaze §


“넌….”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은발의 소녀는 분명….

“네야 프로즌 리버.”

그런 이름이었던가? 이름 같은 건 별로 상관없겠지.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일까? 분명히 이 손으로 마도사의 생명이라는 링커 코어를 적출해 파괴해버렸는데, 어째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막대한 마력이 느껴지는 걸까? 아니, 마력뿐만이 아니라 훨씬 강해져 있어. 엔젤의 13군단장 중에 한 명인 오메가는 그림자의 린 중에서도 특히나 악명 높은 마도사 사냥꾼, 그런 오메가를 상대로 살아서 도망치는 것은 물론 엇비슷하게 싸웠다.

“어째서 날….”

“구할 생각 같은 건 없었어요.”

“그럼 왜?”

“처음엔 은태를 만나려고 왔을 뿐인데, 새로 얻은 디바이스가 실수했을 뿐이예요.”

- 미안, Boss.

“그래… 그래도 혼자서 도망치면 될 텐데, 어째서….”

넌, 그 날 이후로 나를 증오할 텐데 실수로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고는 해도 날 데리고 도망갈 필요는 없었을 텐데 왜 나를 구한 거야?

“새로 얻은 디바이스, 듀랜달의 판단으로는 불꽃의 파괴자를 엔젤이 순순히 데려가서 좋을 일이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렇구나.”

“사실은 내가 이만큼 강해졌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싸워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 가치조차 없는 것 같네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이제 와서 내게 싸움의 의미란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싸운다는 거지? 이미 은태는 더 이상 날 원하지 않아, 증오하고 있어. 지키기 위한 싸움조차도 이젠 할 필요가 없어졌어. 나 자신이 살기 위한 싸움마저도, 아니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어. 세계가, 엔젤이, 그림자의 린이, 인간이, 은태가 어떻게 되던 이젠 아무래도….

짝.

갑자기 왼쪽 뺨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워지며 고개가 오른쪽으로 휙 돌아버렸다.

“뭐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거죠? 도대체 그 무력한 모습은 뭐죠? 한 번 무참히 깨졌다고 그렇게까지 나약해지다니. 그때 나의 링커코어를 무정하게 부수던 플레임 블레이즈는 어디로 갔죠?”

“…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뭐가 상관없다는 거예요? 나한텐 상관있다고요! 적어도 그때 불꽃의 파괴자, 플레임 블레이즈에게 짓밟히면서, 다시 힘을 얻게 된다면 하고 얼마나 분을 참아 왔는데, 그러다 드디어 마침내 힘을 새로 얻게 되었는데, 당신은 어째서!”

네야는 쓰러진 내 멱살을 움켜잡으며 열을 내며 말을 토해냈다. 왠지 화가 약간 치밀었다.

“나한테 한 번 깨진 주제에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큰소리야?”

“그래도 당신에게 큰소리 칠 자격은 있어요.”

“기껏해야 14년 정도 밖에 살지 않은 네가, 적어도 그 몇 십 배를 살아온 나에게 큰소리치는 거야?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내가 어떻게 태어나고 살아왔는지 뭐 하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한테 큰소리 할 자격 따위가 있다는 건방진 소릴 지껄이는 거야? 네가 뭔데? 왕도 아니면서, 기껏해야 나한테 무참히 짓밟혔던 마도사주제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야는 있는 힘껏 날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렸다. 철로 된 벽과 바닥에 내가 부딪치면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울화통이 치밀어 고개를 들고 네야를 올려다보았다.

“조금이지만 이제야 제가 알고 있던 불꽃의 파괴자와 약간 닮았네요.”

“뭐가 불꽃의 파괴자라는 거야! 원래 플레임 블레이즈라는 호칭은….”

“최강의 엔트로피만이 가지는 긍지 높은 이름이라는 거겠죠.”

“뭐야? 너. 중간에서 끼어들지 마!”

“지금 그딴 소리나 들으려고 당신 같은 포악하고 비열하고 사악한 불꽃의 파괴자를 구해준 줄 알아요? 듀랜달의 실수로 오메가 녀석의 전함으로 워프해버렸는데, 다시 나가려고 하니 엔젤 놈들 전용 워프 루트를 제외한 모든 워프 루트를 차단해버려서 고심에 고심을 하다가 결국 당신의 힘을 빌려서 전함에 구멍 내고 튈까 했는데, 이게 뭐예요? 제가 알고 있던 불꽃의 파괴자는 어디로 가고, 살아있는 시체만 있는 건 대체….”

콰쾅.

일어서자마자 있는 힘껏 철벽을 주먹으로 쳐버렸다. 엄청난 폭발음이 귀를 찢었지만 상관 안했다.

“예나 지금이나 입만 살아있는 허접 마도사 주제에!”

“흥, 이제야 겨우 제가 알던 불꽃의 파괴자로 부활이로군요.”

“좋다. 일단은 날 구해준 것에 대해 빚은 갚겠어. 널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아주는 건 그 다음이야!”

“네, 네.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엔젤 놈의 고철 전함 따위 당신의 무식한 파워로 때려 부수고 나가자고요.”

“하하, 말 다했니?”

“말 다했다면요?”

난 주먹을 꼭 움켜쥐며 눈앞에 들어올렸다. 지금 내 기분을 대변하듯 주먹 쥔 손과 발은 이글이글 거리는 시뻘건 화염으로 뒤덮여서 조금이라도 건들면 폭발할 것 같았다. 난 그대로 철로 된 바닥을 화염에 휩싸인 발을 들어 냅다 내려치며 소리쳤다.

“여기서 나가면, 개박살 날 줄 알아!”

무지막지한 폭발과 화염이 내 주위를 감쌌다.


§ Flame Blaze §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내가 아무리 물어도 덴 시그도 원시천존님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물며 내 왼쪽 팔목에 팔찌 모양으로 매달려 있는 새하얀 금강석, 그 안에 깃든 윈더러조차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이런, 설마.”

갑자기 원시천존님이 우리들을 태운 학을 멈춰 세우며 이를 갈며 말했다. 원시천존님이 바라보는 곳을 보니, 저쪽 하늘에 칠흑빛 구체가 수십, 수백, 수천 개가 연달아 생겨 시커멓게 물든 하늘을 가득 메우고 숲을 집어삼키며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많은 칠흑빛 구체들이 한 순간 사라지자 나타난 것은.

“저, 저건!!”

믿기지 않았다. 원시천존님을 제외한 나머지 칠선, 그리고 그 밑에 24선 중에서 22선이 시커멓게 물들고 기묘하게 뒤틀리며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수십, 수백, 수천 명이 칠흑빛으로 빛나는 수정 날개를 달며 나타나 흰자위만 드러난 섬뜩한 눈으로 이쪽을 주시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원시천존님이시여.」

“네 놈은, 엔젤의 13군단장 시그마(sigma, Σ σ)!!”

갑자기 들려온 매우 공손하고 차분한 청년의 목소리에 원시천존님은 매우 격노하게 소리치는 것으로 답해줬다. 하지만 엔젤의 13군단장이니 뭐니, 어쨌든 시그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아, 갑자기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창이 뜨며 치지직 거리다가, 이내 눈구멍 4개가 뚫린 남색 가면을 쓴 사이보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사이보그는 금색 눈 4개를 빛내며 말했다.

「어이쿠, 이거 원시천존님께서 보잘것없는 엔젤의 13군단장에 불과한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니 이것 참 대단한 영광입니다.」

“닥쳐라! 시그마!”

「이제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위대하신 칠선 중 한 분인 원시천존님께서 닥치라고 하시니 일단은 닥치겠지만, 거기 있는 반만 각성한 왕은 넘기십시요. 넘기지 않을 경우 이 세계의 경계면에 주둔한 우리들 엔젤의 위대한 카이저께서 친히 지휘하시는 함대가 언제든 준비해두고 있는 ‘월드 브레이커(the World Breaker)’를 발동할 것입니다.」

“엔젤 따위가 감히!!”

월드 브레이커?
직감적으로 그 단어 자체에서 이미 그것이 어떤 것인지 한 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직역하면 세계를 부순다는 의미. 엔젤의 과학력에 대해선 이미 충분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설마 세계를 때려 부술 수 있는 병기를 만들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세계를 때려 부순다는 나의 생각은 과장된 것일지도 몰라. 그래, 아무리 핵폭탄이 대단해도 지구는 못 날리잖아. 월드 브레이커란 것도 같은 것일지도 몰라.

「아직 반만 각성한 왕께서는 월드 브레이커에 대해 모르실 것 같으니 간단히 설명을 드리죠. 이것은 이름 그대로 세계 그 자체를 근원부터 때려 부수는 안티 월드 웨폰, 궁극의 대 소멸 병기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들이 거주하는 칠흑빛 금강석 세계의 왕이라는 은이 넘겨준 ‘그것의 일부’ 덕택에 겨우 완성할 수 있게 되었죠. 물론 이미 한 번 시험해 봤습니다. 단지 출력을 30% 정도로 해서 발동시킨 것뿐인데도 조그만 세계는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더군요.」

뭐, 뭐야?
그, 그런 말도 안 돼는. 하, 하지만 시그마란 녀석의 목소리에는 전혀 거짓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돼. 어떻게 세계를 조율하는 왕만이 가능한 짓을 엔젤이 할 수 있냐는 말이야? 그림자의 린조차도 못하는 짓을.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최근에 몇몇 세계가 그곳에 거주하는 생명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도 바로 네 놈들 엔젤의 소행이었냐!!”

「부정은 않겠습니다. 원시천존님. 그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이터널 블레이즈와 반만 각성한 왕, 그리고 아직 각성하지 못한 왕을 우리 엔젤에게 넘기십시요.」

“그럴 수 있을 것 같나?”

「어리석군요. 적어도 원시천존님만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현명한 판단을 하실 거라 믿었습니다만, 어쩔 수 없군요. 개인적으로 원시천존님을 존경했습니다만 그것도 오늘부터는 비웃어드리겠습니다.」

시그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방에 수천 명의 타락한 육선, 22선이 우리들을 향해 날아오며 기괴한 포효를 내질렀다.

“잠깐, 페이트… 그녀는 어떻게 한 거야? 그리고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이 많은 중재자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거지?”

원시천존님이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시그마의 홀로그램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시그마는 가는 금속으로 된 손가락으로 가면을 긁적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오호호호호, 반만 각성한 왕께서 궁금하시다면 대답해 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그래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24선은커녕, 어딜 가나 흔한(?) 이름 모를 중재자 하나 시커멓게 물들이는 건 불가능, 하지만 만약 최초의 중재자이며 최초의 엔트로피이자 그리고 그 위대하다는 반고의 어머니, 그 여자의 육신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되려나?」

“이, 이놈들이 설마!!”

「오호호호, 원시천존. 전 어디까지나 반만 각성하신 왕의 질문에 답하는 것일 뿐, 어리석은 당신 따위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놈이!!”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 하찮은 목숨을 조금이라도 보전하고 싶다면 말이야.」

“이, 이….”

원시천존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뜨거운 열기가 주위로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시그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나를 보면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페이트라… 한때는 악명 높은 파괴자, 플레임 블레이즈 말입니까? 그녀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요. 이미 신병을 확보해 지금쯤이면 엔젤 카이저에 기함에서 보호 받고 있을 것입니다. 아, 그녀라면 어떻게 될 거라고 염려하지는 마십시요. 아무리 우리들 엔젤이라도 미래의 왕이 되실 당신에 한때나마 누나 노릇했던 여자를 헤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단지 은에게 그 여자의 육신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이터널 블레이즈만 적출할 생각입니다만, 너무 염려 마세요. 엔젤의 기술력이라면 충분히 안전하게 적출해….」

그 순간, 저 높은 시커먼 하늘에서 격렬한 불꽃 덩어리가 수백에 이르는 타락한 중재자들을 집어삼키며 떨어졌다.

콰콰콰쾅.

불꽃 덩어리에 집어삼켜진 타락한 중재자들이 불꽃놀이 마냥 폭발하며 숲으로 바다로 땅으로 추락했다.

「이, 이럴 수가!!」

갑자기 시그마가 말을 더듬으며 놀랬다. 시그마의 홀로그램 영상이 지지직 흔들렸고, 그리고 그 와중에도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던 불꽃 덩어리가 다시 하늘로 떠오르며 아직도 수천은 넘게 남아 있는 타락한 중재자들 앞에 멈춰 섰을 때, 난 알 수 있었다. 그 불꽃의 중심에 있는 자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은태야….”

불꽃이 꺼지며 불꽃의 중심에 있던 붉은 단발의 소녀가 살짝 뒤돌아보며 내 이름을 불렀다. 한때나마 누나라고 믿고 따르던, 그러나 사실은 내 부모와 친누나를 죽이고 친누나의 이름인 주희를 훔친 원수, 페이트. 그래, 모를 턱이 있나? 하지만 지금의 난, 어째서인지 분노라던가 하는 감정이 일지 않았다. 이상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나라면 어쩐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을 해낼지는 이제부터 결정해나가야겠지만. 그래 우선은.

“페이트 누나.”

누나의 루비같이 타오르는 눈동자가 크게 떨렸지만, 난 상관하지 않고 원시천존님이 나와 덴 시그를 태우고 있는 학에서 뛰어내렸다. 덴 시그와 누나, 원시천존님은 나에 갑작스런 행동에 깜짝 놀라서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것 같았지만 난 지상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질 리가 없다. 그대로 누나를 향해 허공을 달려 나갔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어느새 이치를 깨달았다니….”

뒤에서 원시천존님의 감탄어린 소리가 들려왔지만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은태야….”

“페이트 누나.”

그래, 이것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한때 증오했었지만 또한 소중한 사람의 진짜 이름. 그렇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페이트 누나야. 난 페이트 누나를 꼭 안았다. 뜨거운 누나의 몸, 누나의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까지. 그리고 들렸다.

‘은태야,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난 언제나 이 아이와 함께 하고 있어. 그러니 증오하지는 말아줘. 하지만 그래도 진실을 부정하라는 건 아니야. 다만, 이미 지나간 일에 너무 얽매여서 소중한 것을 잃으면 안 된다는 거야.’

이제는 볼 수 없는 친누나이자 진짜 주희 누나의 혼이 속삭이는 말이.
주희 누나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하지만, 혼만은 페이트 누나의 몸에 깃들어 나를 지켜봐주고 또한 지켜줬던 거야. 그러니까.

쪽.

“아….”

왕의 자격으로, 페이트 누나의 이마에다 키스했다.
내가 키스했던 페이트 누나의 이마에 새하얀 표식이 빛났다.

“은태야, 너… 나를….”

“응. 페이트 누나는 이제부터 나와 한 목숨이야.”

“은태야….”

“모두를 살리기 위해…”

나 때문에 원치 않게 휘말린 사람들, 그리고 나에게 가르침을 준 중재자들. 여왕벌 싸움이란 룰 때문에 민정이와 싸우고 싶지도 않아. 그렇다고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는 것도 싫다. 오른손을 누나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누나의 가슴에서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대신 찔러 넣은 손이 참을 수 없이 뜨거웠지만 참고, 누나의 안에 늘 억제되었던 누나의 힘에 근원인 이터널 블레이즈(Eternal Blaze)의 봉인을 풀었다.

“엔젤, 그리고 칠흑빛 금강석 세계를 모두 불태워버린 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자.”

알고 있다.
그러니까… 누나와 내가 죽을 것이다.

“은태야…”

페이트 누나의 얼굴에 진심으로 기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누나의 루비같은 눈동자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넘쳤지만 누나는 손을 들어 닦지 않았다. 다만, 누나는 내 얼굴을 부여잡고 내 입술에 누나의 뜨거운 입술을 겹쳤다. 뭐지? 난 그래도 한때나마 같이 지낸 가족이라 이마에다 키스했는데….

“당신의 플레임 블레이즈(Flame Blaze)로서 반드시 분부를 이행하겠습니다.”

겹친 입술을 떼며 페이트 누나가 기운차게 말했다.


§ Flame Blaze §


은태가, 나를 엔트로피로서 받아들여줬다.
증오해도 한참 모자를 나를, 명예로운 엄마가 받은 플레임 블레이즈라는 이름을 더럽힌 한낱 파괴자에 불과한 나를 말이다. 너무나도 기뻤다. 정말로. 은태는 나를 엔트로피로 받아주고 내 안에 억제된 이터널 블레이즈의 봉인을 풀어버렸지만 하지만 괜찮아. 봉인이 완전히 풀려 폭주하기 시작한 이터널 블레이즈, 결국엔 그 힘은 그릇인 나를 부수고 뛰쳐나가 나나 은태나 같이 죽게 될 테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아직 1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어. 그러니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인 은태의 명을 확실히 이행하겠어.

“1시간이면 충분해. 가자, 페이트 누나.”

“응.”

양 손목, 양 발목에 불꽃의 링이 만들어져 휘몰아쳤다. 봉인이 풀린 이터널 블레이즈의 힘이 벌써부터 사방으로 불꽃을 분출해냈건만 전혀, 그 힘에 휘둘리고 있지 않았다. 완벽하게 제어되고 있었다.

「거, 건방진. 당장, 저들을 붙잡으란 말이다! 멍청한 중재자 놈들!」

시그마의 홀로그램이 연신 성을 내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오른손에 잔뜩 불꽃을 모아서 날려버렸다. 그 한방만으로 수백, 수천의 무수히 복제된 타락한 중재자들이 재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원시천존, 덴 시그. 당신들은 아직 살아남은 중재자들과 사람들을 데리고 네야와 함께 다른 세계로 탈출할 준비를 하세요.”

이젠 어린애 티를 벗어난 한층 성숙한 은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은태님을 놔두고 어찌….”

“됐네. 덴 시그. 이것이 새로운 왕의 의지. 우린 그 의지를 존중해야 하네.”

“하지만, 은태님! 칠흑빛 금강석 세계만은.”

“덴 시그, 자네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애초에 모순되고 뒤틀린….”

원시천존과 덴 시그라 불리는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하얀 금강석 세계로 되돌려놓으마. 그러니 지금은 나를 믿고 탈출할 준비를 해. 네야! 부탁한다. 이 사람들과 살아남은 중재자들, 생명체들을 최대한 끌어 모아서 근처에 다른 세계로 탈출해줘.”

“은태, 아니 이젠 어엿한 왕… 알겠어. 하지만 너도 살아야 해.”

은태의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 네야의 미련이 섞인 목소리.

“페이트 누나.”

“은태야.”

“내친김에 월드 브레이커까지 화끈하게 날려버리지 뭐.”

“그럴까?”

은태를 보며 한번 미소를 지어준 뒤, 그대로 불꽃을 사방으로 내뿜으며 전력으로 타락한 수천의 중재자 무리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엄마처럼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고에 불꽃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커멓게 물든 하늘은 시뻘겋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 Flame Blaze §


반고가 존재했던 세계의 바깥 경계선에는 무수히 많은 엔젤의 모함과 전함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엔젤들의 지배자, 카이저의 기함은 가장 거대했으며 또한 세계를 근원부터 파괴하는 대 소멸 병기, 안티 월드 웨폰인 월드 브레이커라 불리는 초거대 엔레멘탈 주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아니, 카이저의 기함, 그 자체가 월드 브레이커의 포신이었다.

“플레임 블레이즈의 파워는 파괴자로서 그 악명이 절정이 달했던 시절을 상회, 아니 그 이상입니다. 초대 플레임 블레이즈이자 최초의 중재자인 프리그의 시신을 핵으로서 안티 월드 에너지로 타락시켜 대량으로 복제 양산한 중재자들로서는 도저히 상대가 불가능합니다.”

카이(Χχ)가 엔젤의 황제에게 조심스레 말하자, 황금빛 갑옷으로 무장한 황제는 결단을 내린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월드 브레이커로 전력으로 날려버린다.”

“허나, 아직….”

“필요 없다. 날려버려라.”

“알… 겠습니다. 황제폐하.”

카이저의 기함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포신에는 시커먼 에너지가 파직거리며 튀었다. 그리고 이내 눈을 태워버릴 정도로 너무나 눈부신 강렬한 빛이 사방에 퍼지며, 월드 브레이커의 포신에서 너무나 새하얗고, 너무나 시커먼 에너지 기둥이 반고가 존재했던 세계를 그 근원부터 부수기 위해 직격했고, 관통했다. 그리고 세계는 마치 깨진 유리 구슬마냥 산산이 금이 가며 으스러지고 부서졌다. 그러나 카이저를 비롯한 함대를 지휘하던 13군단장은 너무나 눈부신 빛 때문에 눈치 채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사조 모양의 불꽃 덩어리가 엔젤의 함대를 덮치려고 날아들었다는 것을.

퍼퍼퍼퍼펑.

세계가 무너지고, 새하얀 빛이 거두어졌을 때 남아있는 엔젤의 함대는 없었다.


§ Flame Blaze §


“히야, 이거 참. 엄청 화끈하게 저질러주잖아?”

칠흑빛 금강석 세계의 왕인 은(慇)은 진심으로 방금 전 엔젤의 함대를 모두 날려버린 불사조 모양의 불꽃 덩어리를 보며 감탄했다.

“감탄을 하는 것도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야. 은.”

그리고 은의 앞에는 새하얗게 빛나는 은태가 오른손에는 새하얀 금강석으로 이루어진 검을 들고 서 있었다.

“크큭, 그럴지도 모르지. 결국 모정 앞에선 왕의 대한 충성이고 뭐고 없었군.”

은은 자기 옆에 가만히 서 있는 흑진주, 레나 세이어즈를 흘겨보며 말했지만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은태만을 바라봤다.

“내가 졌다졌어. 그래 내친김에, 엔트로피에 계약도 해제해주지.”

은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레나 세이어즈는 끈이 잘린 인형 마냥 갑자기 앞으로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은도 가슴을 움켜쥐며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어버렸다. 그러나 은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새하얀 금강석으로 된 검을 은의 목에다 갖다 대며 입을 열었다.

“칠흑빛으로 물든 이 세계를 구해주겠다고 덴 시그라는 사람과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첫 단계로 난 널 죽여야 해. 레나를 계약에서 풀어준 것은 고마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나?”

“마지막으로 할 말이라… 그건 들어서 어디다 쓰려는 거지?”

“비록 억지로 빼앗았다곤 해도 한때나마 한 세계를 조율했던 왕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예의다.”

은태의 말을 들은 은이 피식 웃었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난 말이야, 염 형을 정말 좋아했어. 가끔 싸우기도 했지만, 그건 형제 사이에서라면 흔하디흔한 그런 다툼이지. 그러던 어느 날 나와 형이 홍련 세계를 조율하는 왕이라는 거야. 한 세계에서 인정되는 왕은 한 명 뿐이라면서 원하지도 않던 여왕벌 싸움을 시켰지. 원하지는 않았지만 지는 자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내쫓기는 룰이었지만 난 그 룰을 알면서도 도저히 형을 이길 수가 없었어. 결국 졌고, 내 소중한 그녀는 사라졌지. 형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그녀를 살리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만약, 그녀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내겐 어떤 미련도 없어.”

담담하게 말하던 은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자기도 모르게 흘리며 말을 마쳤다. 은태도, 어느새 정신을 차린 레나도 은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해주었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은태가 말했다.

“돌고 도는 세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없어요. 다만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존재하는 것일 뿐. 그래서 왕이란 존재는 어떻게 보면 없어도 되는 존재예요. 세계는 처음부터 자기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고 있고, 왕은 그저 세계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아줄 뿐이죠.”

“형이 했던 말을 다시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당신이 알고 있던 그녀는 다시 만날 수 없겠지만,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살아가는 그녀를 만나게 되어도 괜찮겠습니까?”

은태가 하는 말에 은은 그저 미소로 답했다. 은태는 은의 목에다 겨누던 새하얀 금강석으로 이루어진 검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은은 새하얗게 빛나며 빛이 사라졌을 땐 은은 그 자리에 없었다. 은태는 레나를 한 번 쓱 바라보았다. 레나는 슬픈 눈으로 은태를 바라보았지만 은태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이것이 저의 선택입니다. 이제 제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저 지켜만 봐주세요. 어머니.”

은태는 레나를 지나쳐 이윽고 칠흑빛 세계의 중심에 도달했다. 칠흑빛보다 더한 암흑으로 가득 차야할 그곳은 은태의 플레임 블레이즈에 몸을 휘감고 있는 불꽃으로 물들어 있었다.

“페이트 누나. 이제 칠흑빛으로 물든 금강석을 무지막지한 화염으로 다시 재련해서 반짝반짝 광을 내 볼까?”

“분명 아주 아름다울 거야.”

플레임 블레이즈, 페이트 룬 플라티네스가 화염에 휘감긴 손으로 새하얀 금강석으로 된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은태의 손 위에다 겹쳤다. 한 명의 왕과 그의 플레임 블레이즈, 두 사람은 같이 새하얀 금강석의 검을 잡고 칠흑빛 금강석 세계의 중심에 내다 박았다. 칠흑빛 금강석 세계는 중심에서부터 그 바깥까지 새하얀 영원의 불꽃에 휩싸여 아름답게 빛났다.



[2년 뒤]

“오늘도 그림자의 린과 한바탕 한 거야?”

나의 왕, 민정이가 볼을 잔뜩 부풀리며 나에게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은 많았다.

“그건 그쪽에서 먼저 잘 돌아가고 있는 세계의 흐름을 건드려서 세계를 지키는 왕의 엔트로피로서 감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단 말이야.”

“으이구, 전 사범님과 원시천존님께 그렇게 먼지 나도록 맞고도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단 말이야? 에휴, 정말. 매번 이럴 거예요? 잭.”

민정이가 저렇게까지 말하면, 순순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변명을 늘어놓았다가, 정말로 전 사범이랑 원시천존에게 연락해서 그 날처럼 먼지 나게 쳐 맞을 지도 몰랐다.

“잘못했습니다. 나의 왕이시… 아얏!”

갑자기 민정이가 내 머리에다 꿀밤을 한 방 먹였다. 뭐, 뭐야? 이건. 난, 분명 고개 숙이고 잘못을 인정했는데 어째서?

“그렇게 부르지 마. 민정이, 민정이라고 부르라고.”

“그, 그래도….”

“그럼, 나의 달링이라거나 나의 자기라고 부를 수는 없어?”

“민정아, 그건 보는 중재자 어르신들이 닭살 돋아서 안 돼.”

민정이의 어깨를 딱 잡으며 난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저런 닭살 돋는 호칭을 부르기 보다는 차라리, 민정이라고 부르는 게 낫….

쪽.

민정이가 기습적으로 나에게 입술 박치기(?)를 날렸다. 물론 나야 기분 좋았지만, 하지만 이거 뒤에서 무지막지한 살기가 느껴지는 건, 서, 설마?

“에헴, 쿨럭, 쿨럭.”

예상대로 전 사범이 대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으악! 부, 분명이 민정이랑 떨어지자마자 먼지 나게 두들겨 팰 지도 몰라.

“좋은 시간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럼 불청객에 불과한 중재자는 이만 마누라에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헤헤, 나중에 또 놀러오세요!”

민정이는 전 사범에게 손까지 흔들어주며 말했다. 또 놀러오라니! 으아악! 제발, 그것만은.

“아참, 잭.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알려줄까?”

“어, 응.”

“있지, 나, 임신 4개월이래.”

“어, 그래… 뭐, 뭣!!!”

별로 대수롭지 않은 소리겠거니 넘기려다 기겁해서 입이 쩍 벌어졌다.

“진짜야. 한번 확인해볼래?”

민정이는 그렇게 말한 뒤 내 머리를 잡고 자기 배에다 가져다댔다.

“어때? 우리 둘의 아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지?”

“그, 그렇긴 한데. 그, 그런데 나 사실 너 운동 안 해서 뱃살이 나오는 줄 알았, 크억!”

민정이가 냅다 팔꿈치를 내 머리에다 내려치며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뭐야? 정말? 나랑 계약한 엔트로피가 그것도 몰라?”

“모르는 것이 당연하잖아. 내가 살았던 녹록의 세계에서 왕과 엔트로피는 사랑할 수도, 아이를 가질 수도 없다고.”

“그랬었나? 하지만 2년 전 그 일 이후로는 세계의 규칙이 조금이지만 바뀌었다고 알고 있는데, 특히 왕과 엔트로피는 서로 정말로 사랑한다면 아이를 가지고 낳아 기를 수 있게 되었다고.”

2년 전 그 일.
그래 은태가 완전한 왕으로 각성하고, 플레임 블레이즈는 파괴자가 아닌 최강의 엔트로피로 부활하여 초대 플레임 블레이즈의 시신을 손에 넣어 세계를 파멸로 몰고 가려던 엔젤들을 전멸시켰고 결국에는 칠흑빛 금강석 세계를 은태와 함께 원래 모습인 새하얀 금강석 세계로 되돌려 놓았었다. 그 후, 두 사람의 행방은 살아남은 중재자인 원시천존도 전사범도 단군도 해모수도 제천대성도 알 지 못했다. 아니, 폭주하는 이터널 블레이즈에 불꽃에 휩싸여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 소멸되었다고 했다. 이터널 블레이즈는 새하얀 금강석 세계의 중심에 봉인되어 왕이 없는 새하얀 금강석 세계를 계속해서 살아가게 했으며, 민정이는 얼마 후에 각성하여 민정이가 태어난 세계를 조율하는 왕이 되었고, 난 그녀에게 선택되어 다시 엔트로피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파괴자라든가 그림자의 린이라든가 그들은 아직 건재했다. 하지만 그림자의 린 쪽이라면 특별히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칠선인 원시천존의 눈에 띄어 거두어진 네야 프로즌 리버는 그의 제자로서 중재자가 할 일에 대해 차근차근 배워나가면서 그림자의 린에 마도사들이 꾸미는 음모와 계획을 번번이 망쳐주었고 원래부터 재능이 있던 그녀였기에 지금에 와서는 그림자의 린에 마도사들도 그녀를 함부로 대적하지 못할 정도로 대마도사 중에서도 가장 명예로운 마이스터라고 부르며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나타냈다.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파괴자를 적당히 막는 것도 어쨌든 중재자들의 일이니 별로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테고.

“그랬었지.”

“하지만 나, 아직도 은태랑 주희 언니가 이젠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아.”

민정이는 아직도 두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나 보다. 하긴 두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 그 충격으로 왕으로 완전히 각성해버렸으니. 민정이에게 있어 두 사람은 매우 소중한 사람이었나 보다.

“분명, 돌고 도는 세계라면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라도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거야.”






∮ epilogue ∮

어느 이름 모를 작은 세계.
보름달이 뜬 밤하늘, 아래 고급스런 저택 정문에서 돌연 초인종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저택의 주인인 노부부는 약간 짜증을 내며 정문을 열었지만, 정작 사람은 없었다. 그대로 짜증 섞인 말 몇 마디를 내 뱉으며 정문을 닫으려는 순간,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노 부부 중, 한 명이 다시 정문 바깥을 살펴보니 바구니 한 개가 있었고, 거기에 갓난아이가 두 명 있었다.

“죄송합니다. 은태와 희를 잘 부탁드립니다. 허참, 여기가 무슨 고아원인 줄 아나?”

“그래도 여보.”

“알고 있소. 어쩌면 이건 신께서 우리에게 보내는 선물인지도 모르겠군.”

노부부가 미소 지으며 두 갓난아이를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흑색 단발과 흑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이걸로, 된 거겠지.’라고 중얼거린 뒤 사라졌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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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개연성이라던가 설정을 무시하고
화끈하게 불태워버렸... 퇴고도 안 했...
그냥 오랜만에 플레임 블레이즈 23화까지 다시 읽어본 뒤,
줄줄줄 써내려갔습니다.

어쨌든,

저와 함께했던 팀원분들

문학소년 쉐르몽 님, BARD OF DESTINY 님, 다르칸 님, 갈가마스터

모두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