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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SF [테창-릴레이완결] Tialist

2006.12.21 07:46

아란 조회 수:91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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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창-릴레이소설 완결]
제목(팀명) : Tialist
장르 : SF
총화수 : 전 25화 완결
팀장 : 아란
팀원 : 다르칸, 영원전설, 높새바람(핏빛노을.), 카에데
연재기간 : 2004년 10월 24일부터 2005년 4월 9일 전 25화 완결

[Tialist] 08 : 잠깐의 휴식
글쓴이 : 영원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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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라는 언덕에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산들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인공적으로 거칠게 만들어진 듯한 조그만 언덕에 [미란]이라 새겨져 있는 나무 푯말이 꽂혀 있었다.  

  "..  형편없네.  너의 무덤.  이렇게 밖에 만들 수 없다니."

  그는 흙 범벅이 된 손으로 움켜지고 있었던 한 움큼의 민들레꽃을 무덤 앞에 놓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것이 너를 좀더 편안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어."

  시체조차 담겨있지 않은 그녀의 무덤은 말없이 그를 바라만 봤다.  그러나 아카라는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체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기억하지, 여기?  가장 노을이 잘 보이는 곳.  허락이 될 때마다 여기로 왔잖아.  우리가 바깥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곳.  그러고 보니..  우리가 트론에 타기 전 알고 있었던 세계는 여기와 기지, 그리고 CAGE뿐이었네.  그래서 그때 너는 항상 희망에 찬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지.  '다른 세상도 저 해 지는 노을처럼 아름다울 꺼야'...  라고 했었나.  그때 난 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말야, 지금 난 이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보여.  내가 이제까지 본..  다른 세상은 너무나도 더러우니까.  너무나도 더러워서 역겨워 질 정도야.  우리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인..  너를 죽인 용들이 아직도 세상을 휘 젓고 다닌 데도 인간은 아직도 서로를 죽여.  살아남기 위해서란 명분아래.  강물은 피로 흐르고 땅은 온통 고철과 건물 덩어리 천지야.  하늘은 불타는 대지에 의해 영원한 회색으로 변색되어서 해라는 것은 찾아 볼 수도 없어.  그저 처참한 주변을 조금 밝혀주는 빛 덩어리일 뿐.  하지만 변질 되어버린 그곳을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도..  생각해 보지 못했어.  왜 일까.  이렇게 여기 있으면 이 자연이 너무나도 좋은데 말야."

  무덤 위를 쓰다듬는 아카라의 푸른 눈동자는 조금 젖어 있었다.  역시 소중한 자의 무덤 앞에 감정을 추스르는 것은 무리일까.  

  "넌 좋지 않았던 거야?  왜 탔어야 했어.  왜 날았어야 했어.  왜 싸웠어야 했어.  모두들 그렇잖아.  모두들 자신이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잖아.  왜 너는 죽어야만 했던 거야.  살고 싶지 않았어?  넌 특별해?  모든 사람들이 그렇잖아.  살고 싶다고.  살기 위해 용을 죽이고, 서로를 죽이고...  그리고 너를....  납득하지 못하겠어.  진리가 아니었단 말이야?  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왜 그럼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너는 그러치 않았어?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살고 싶어 짓밟고 베고 부시는데, 넌 왜 남을 위해 죽었던 거야..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거잖아.  자신이 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꺼야.  내가 있고 닥터 유가 있는데 그 누가 뭐래.  믿지 못했던 거야?  내가 그 용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거야?  내가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너를?"

  조금 전만 해도 상당히 가라앉았던 아카라의 목소리는 이윽고 가둬 두려 했던 온갖 감정들을 쏟아내었다.  절망, 고통, 분노, 후회...  이런 상태이니 아카라가 자신이 뱉어내는 말 틈의 모순을 보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은 무언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지만 미란이는 못한다니.  불행 앞에 인간은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가 앞에 놓여져 있는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을 보지 못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미란이가 왜 죽었어야 했는지, 누구를 위해 죽었어야 했는지.

  "모두가 싫다.  모두가 싫어.  너를 타게 만든 카렌티어스도 싫고 그것을 허락해준 아버지도 싫어.  너를 죽게 만든 용도 싫고 너를 죽게 만든 트론도 싫다.....   그리고 너를 지켜주지 못한 나 자신도...  싫어..."

  무덤 앞에 꿇어앉은 체 아카라는 결국 오열했다.  미란의 무덤은 그런 그를 그저 말 없이 받아들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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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가만히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하얀 천장인가.  왜 하얀 색일까...  뭐, 그런 건 관계가 없는 걸까.

  "이제 많이 좋아진 것 같네, S-X03.  자네의 체력도 대단하군.  이런 상처들을 계속 입었는데도 완쾌가 되다니."

  칭찬인지 뭔지.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의사의 목소리와 눈동자는 에릭에게 그 무엇보다도 아팠다.

  "네."

  "뭐, 그래도 한 며칠만 안정 차 누워 있는 게 좋겠군."

  의사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그리곤 갑자기 피식 웃었다.

  "용이 나타나기 전 까진 말이지."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으며 나가는 의사를 그는 참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에릭은 생각했다.  뭔가 생각해 주는 척 하면서 저런 말투란.

  "하긴, 우린 소모품이니까."

  용과의 싸움을 위한 소모품.  그와 미란은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에겐 과거가 없으며 미래도 없었다.  그들은 가진 것 없는 자들..  이용당하는 자들..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래서 의욕도 없었다.  그저 살고 싶다는 마음에 적당히, 그들이 자신에게서 원하는 만큼 만 해왔다.  살아있지만 죽었던 나날들.  그래.  미란을 만나기 전 까지었다.

  '아..  거기 있는지 몰랐어.  미안.'
  
  바닥에 뻗어 있던 그를 밟아서 넘어진 미란의 첫 인사였다.  

  '..  별로. 신경 안 써.'

  무의식적으로 그는 미란이 바닥에 널부러뜨린 종이 중 하나를 집었다.  거기엔 웬 동그라미 세 개와 뾰족뾰족한 송곳들이 그려져 있었다.

  '아, 이거, 내가 그린 거야!!  어때?!  잘 그렸지, 잘 그렸지?!"

  도대체 무엇을 그린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고로 잘 그렸다는 생각이 들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전혀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  응.'

  '아, 역시, 역시!!  난 그림에 소질이 있나봐!!  모두 다 잘 그린 데!!  어때?  너도 그려 줄께!!'

  '..  그래.'

  풋.  에릭은 힘없이 웃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자신의 무언가가 바뀌었던 것 같았다.  생기랄까.  특히 미란이 트론의 파일럿으로 채택되었을 때는 미친 듯이 엄청난 속도로 시뮬레이션의 싱크로율을 높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  이젠 상관없겠지."

  상관없다.  그녀는 죽었다.  용에게 녹다운 되어서 기절해 있는 동안 그녀는 죽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아카라가 카렌티어스에게 내 뿜었던 감정 같은 거, 그에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의 마음 한 구석이 시리도록 허전했을 뿐이었다.

  "..  뭐가 트론의 S급 파일럿이란 거냐.  뭐가 최강의 방패냐.  그 누구도 지켜주지 못하는 방패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그러고 보니, 한번 제대로 막은 적이 있긴 하다.  바로 병원신세를 지기 전, 일본과의 싸움에서 그 죽음의 빛에서부터 아카라를 막아 주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텅 빈 마음속에 슬픔이란 감정이 차들어 오기 시작했다.
  만약 자신이 아카라를 막아 준 것처럼 미란을 막아 줬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았어도 됐었을까.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는 생전 처음으로, 녹슨 톱니바퀴를 힘겹게 움직이며 돌아가는 머리와 마음에 고통을 느끼며 침대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

  카렌티어스는 떨리는 손으로 플라스틱 병에 있는 알약들을 한 움큼 쥐어 마치 과자를 먹듯 자신의 목구멍에 넘겨버렸다.  병에는 'pain killer(진통제)'라고 써져 있었다.

  '젠장...'

  그는 머리를 움켜잡으며 책상에 앉았다.  도저히 그 일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제까지 그들이 소모되는 것을 끊임없이 본 그가, 그 하나의 죽음에 이렇게 떠는 것일까.

  '괜찮아. 카렌티어스. 어차피 CAGE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전부... 소모품이잖아..'

  그래, 소모품이다, 소모품!!  어차피 전장에서 날아가는 총알처럼 던져지는 그런 생물들이란 말이.....  

  '... 만약에 이게 꿈이라면... 하지만 꿈일 리가 없겠지.  적어도 내가 아니기 전에 모두를 기억한 채로... 그런 꿈을 꾸고 싶어...'

  그의 속에서 목구멍으로부터 무언가가 차 올라왔다.  급히 그의 방에 있는 개인 화장실로 달려간 카렌티어스는 이내 변기에 구역질을 해대며 위액을 토해냈다.  이미 그의 뱃속은 텅 비었으리라.  
  버튼을 눌러 물을 내린 그는 힘없이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갔다.  조금 후, 자동적으로 맑고 뜨거운 물이 그의 몸을 씻으며 내려갔다.

  '하지만 그건 씻기지 않는군.'

  벌써 C-X31이..  아니, 미란이 죽은지 몇 주가 지났다.  크로킹한 상태에서 트론이 자폭하면서 생긴, 온몸을 전율시킨 혼의 상처..  게다가 미란이 한말은 그의 어머니와 겹치면서 고통에 의해 거의 미쳐 가는 상태가 되었다.
  아니, 하긴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미 미친 것이겠지.  한 생명을 소모품으로 치부시키는 인간의 모습.  용의 공격에도 꽃 피우는 인간의 욕망.  그로 인해 벌어지는 무의미한 살생.

  '..  마치, 이 모든 것들이 미란의 죽음을 시작으로 일어나는 것 같다.'

  수건으로 대충 자신의 몸을 감싼 체 그는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나 토해대는 데,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넌...  이 용안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  코어 컨트롤 링크 시스템 제어.  크로킹...  하지만 그 모든 것도 한 생명을 구할 순 없었다.  용안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나 그것은 변함없었다.  
  무력했다, 자신이.
  그리고 인간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게 만든 세상이 무력해 보였다.

  "아프다.."

  머리가 아파 왔다.  배가 아파 왔다.  목이 아파 왔다.  눈이 아파 왔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아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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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녀는 이곳에서 아카라를 발견해 조금 놀란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맞이했다.

  "..  안녕하세요, 닥터 유."

  "..  의외네.  여기서 널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카라와 미란의 작은 무덤에 다가가며 그녀가 말했다.  아카라는 조그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어차피 우리들은 갈 데가 많지 않으니까요."

  하긴, CAGE에서 자라고 나온 아이들의 세상은 좁다.  특별히 제재를 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널린 것은 무너진 건물과 전투의 잔해, 그리고 차가운 본부이니.
  그녀는 미란의 무덤 앞에 앉았다.  주변에 자란 잔디들이 마치 침대 마냥 최대한으로 푹신하게 그녀를 받쳐주었다.

  "..  용이 나타나기 이전엔 말이야, 이런 곳이 많이 있었어.  물론 그때도 인간들은 서로 죽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곳이 누구에게나 존재했었지.  안식처..  그 때는 이런 생존을 위한 걱정 따위, 거의 하지 않았어.  지금에 비하면..  행복했지."

  그녀 역시 아카라처럼 무덤 앞에서 조용히 얘기를 꺼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얘기를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 뿐.

  ".. 딸과 남편을 잃은 후, 맹목적으로 매달렸어.  용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에 손을 댔다.  강철의 거인서부터 거짓 생명에까지.  내 행복을 앗아간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어.  다시 돌려 받을 수 없는 이상,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에게 최대한으로 고통을 주는 일.  내가 받았던 충격과 고통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는 일.  그것뿐이었어."

  그녀는 자신의 긴 머리를 생각 없이 쓰다듬었다.  무의식적으로 신경이 쓰였던 걸까, 자신이 하는 말들이.

  "..  그 때 미란이가 있었다.  내 딸이 자랑스러워하던 긴 생 머리에 내 딸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혹시 몰라.  내가 생각도 않고 그리운 나머지 만들어진 생명이었을 지도.  하지만..  정말 반가웠다.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어.  소모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게 무슨 상관이야.  나한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소녀였는데."

  그녀는 그저 하늘만을 바라보는 듯한 무덤덤한 표정의 아카라를 바라보았다.  별로 대답을 바랄 수는 없는 상태인 것 같았지만 그녀는 물었다.  묻지 않고 서는 견딜 수 없었기에.

  "..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이유치고는."

  아카라가 입을 열었을 때도 그는 하늘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마치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

  "..  인간이란 이기적인 생물이란 것이죠.  어떤 것이든 자신을 만족 시킬 때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지키는 것도..  자신이 상처받기 싫어하는 행동일 뿐."

  아카라는 일어섰다.  마치 시간이 멈춰 있었던 듯, 그리고 다시 시간을 돌리는 듯.  자신의 슬픔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듯.  하지만 닥터 유는 움직이지 않았다.

  "..  저는 CAGE에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에 계속 계실 것입니까?"

  "..  응.  조금만 더.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이 방해받을 때까지만 이라도."

  아카라는 잠시 서 있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뺨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을 삼키는 그녀를 뒤로 한 체.

***************************************************

   커텔은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가 연기를 뱉었을 때는 대량의 회색 연기가 피어 나오면서 죽어 가는 듯 주변과 동화되었다.

  '마치 지금의 우리와 같군.  안전한 곳 속에서 바깥으로 나왔을 때 사라지는 것은.'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지진 후 서류를 둘러봤다.  그 중에선 C-X31과 이카루스에 대한 종이도 있었다.

  "아쉽군.  정말 아쉬워."

  한번의 전투로 동시에 트론과 엘레멘탈 코드를 각성한 파일럿을 잃은 것은 유라시아 지부에서 보기엔 타격이 너무나도 컸다.  뭐, 그래도 아직 2대의 트론이 더 있고 S급 파일럿들도 대기하고 있지만..

  "많은 상처를 주고 갔구만, 그 소모품."

  하지만 계산 적으로 본다면 은 큰 손해는 아니었다.  케찰코아툴루스라는 강적을 맞아, 고작 한대의 트론으로 본부를 지켜냈다는 것.  그것은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이래나 저래나 그들이 트론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문제였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손 약지 손가락에는 조금 빛이 바랜 듯한 간단한 금색 반지가 껴져 있었다.

  "..  당신은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조그맣게, 마치 비웃는 듯 웃었다.  피나 눈물 같은 거, 이미 그때 다 뿌렸다.  그에겐 이제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은 없다.  지켜야 될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그의 체스 말.  그가 이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던져버리는 미끼, 방어벽.
  지금와서 양심 같은 것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더 웃긴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자신을 위해 사는 것.  무엇보다도 지킬 것 없는 자에게 자신만큼 소중한 것은 없었다.  남을 위한다란 것은 위선이다.  어차피 자신이 상처 입기를 원하지 않기에 그런 것 뿐.

  '..  뭐, 어디서나 한 명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많은 것을 구하는 일도 있지만..'

  C-X31이 한 것처럼.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자신의 몸을 버리면서 까지 남을 살린다니.
  아니면 마음의 상처가 더 두려웠던 걸까.  그 것 역시, 누군가를 잃는 다는 두려움에 빠져 생각 없이 자신을 희생한 것인가.
  
  "..  쓸데없어.  모든 것이.  살아남는 것 이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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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스는 어떤가?"

  "잘 사용하고 있어.  대단하더군.  레이저 스플랙스 까지 막아내는 그 방어력이란."

  커텔의 칭찬에 하메디스 R 라디안의 영상은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전혀 비밀이라던 지 그런 것은 없는, 그저 친분 있는 사람들의 담보였지만 주위에 영상을 보이게 하기 위한 어둠은 이 둘의 대화를 강조하는 듯 보였다.

  "아아, 그렇지.  하지만 이지스는 우리에게 있어 알파 모델일 뿐이야.  우리는 아직도 이지스를 토대로 한 타입-B를 건조하고 있지."

  "이런, 이런, 이런.  '모두 알다시피 우리지부의 트론은 다른 지부들에 비해 가장 수가 적고 또한 성능 역시 낮아 아프리카에 출몰하는 용을 처리하기에도 힘든 처지이다'란 말은 다 거짓말이었구먼."

  커텔의 말에 하메디스의 영상은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듯 말했다.

  "기억력도 좋구만.  하지만 수가 적다는 건 사실이라고."

  "뭐, 우리 보단 났겠지.  이젠 두 대밖에 없다고.  슬슬 보급을 해야 되는데 말야.."

  "흐음.  하지만 직접 건조하는 게 오히려 더 빠를 거야.  요즘 각 지부가 정신없잖아.  일본의 공격도 그렇고.  유럽은 지금 베헤모스란 용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다고.  아, 용에 대해서 얘기하니 그게 생각나는군."

  라디안의 생기 어린 목소리가 급격히 어두워 졌다.  커텔은 갑작스런 그의 변화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용?  그게 왜."

  "요즘 미국이 시끄러워.  계속적인 일본의 공격에 강경파들이 그걸 깨우자고 난리라는데."

  "그것..?!"

  그는 자신의 뒷골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설마, 깨운 다는 것은..

  "레비아탄(Leviathan)을 말하는 건가?"

  "..  직경 1.5km를 육박하는 해룡.  예전에 호주 옆의 로드하우 섬을 가라 앉히고는 세상의 주목을 받은 괴물중의 괴물.  생각나지?"

  어찌 생각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티아리스트 이후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은 악마.  세계가 그것을 죽이려고 또 얼마나 많은 돈을 퍼부었는가.  결국엔 죽이지도 못하고 잠시 잠재운 것 밖에는 하지 못했지만..  

  "그래.  하지만 믿기 힘들군.  그런 짓을 생각하다니."

  "글쎄.  그만큼 일본측의 북해 항공모함 전단이 강하다는 뜻도 되겠지.  하와이를 점령당한 이상 그레이스도 곤욕을 치르는 모양이야.  그런 걸 생각한다 한들 이상한 것도 아니지.  요번 전쟁으로 그것에 약을 투입하지 않은 지도 며칠 됐는데 말이야."

  "..  영국이 가만있지 않을 꺼야."

  "그렇지.  그것이 그레이스가 제기하는 문제야.  하지만 위험해.  점점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으니까."

  커텔은 잠시 가만있다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에서 태어난 불꽃은 어두웠던 주위를 환하게 비추며 라디안의 영상을 조금 흐릿하게 굴절시켰다.

  "...  이봐, 라디안.  내가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음?"

  "지금 상황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었어."

  "최악..?"

  머리가 아픈지 커텔은 한 손으론 미간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서쪽의 레비아탄과 동쪽의 베헤모스가 동시에 움직인다.  일본은 계속 진출해 결국 한국을 점령하고 중국과 싸움.  미국은 미국대로 그레이스가 물러나고 강경파인 딘 J. 레인벌그가 대통령으로 출마, 국가 연합에 탈퇴를 선언한다.  어때?"

  "..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군, 커텔.  정말로 그런 일이 한꺼번에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  뭐, 일 퍼센트의 가능성이라고 해두지.  하지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말야.."

  그는 정말로 걱정인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라디안 역시 얼굴이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  그땐 정말로 인류가 멸망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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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아탄(Leviathan)
- 직경 1.5km에 다다르는 최대의 해룡.  뉴질랜드를 지구상에 지워버린 장본인이다.  모든 섬 국가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존재.  현재 태평양 미드왜이 제도와 하와이 제도 사이의 좌표에 '잠'들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관리하에 있던 듯.  현재 일본과의 전쟁으로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 딘 J. 레인벌그
- 현재 나이 52세의 미국 강경파의 실질적인 리더.  그레이스가 일본과의 전투를 처리하는 방법을 영 못마땅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