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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DESTINY」 運命의 系統樹

2006.01.09 03:48

갈가마스터 조회 수:89 추천:2

extra_vars1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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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공동. 벽에 걸린 햇불에 의지하는 것 말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꽉 막힌 이곳에, 대여섯명정도 되는 이들이 한쪽 벽면에 거치된 제단을 앞에 두고 모여 있었다. 제단 꼭대기에 놓여있는 상석엔 검은 로브를 걸친 이가 거만하게 앉아 있었고 그 외 나머지 그림자들은 각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침묵하고 있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은 연령은 물론 성별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무시무시한 백곰의 등에 앉아 있으면서 태연하게 사탕이나 쭉쭉 빨고 있는 붉은 댕기 머리의 소녀부터 시작해서 우아한 노부모의 옆에 숨어 있는 방독면을 쓰고 있는 어린 아이, 호랑이 형상의 마스크를 얼굴에 쓰고 있는 웅장한 몸집의 사내까지 다양하고 또한 개성이 넘쳐흘렀다.

- 콰앙!

갑자기 거대한 문이 거친 소음을 내며 튕겨나가듯 열렸고 지저분한 갈색 코트를 어깨에 걸친 한 남자가 내부로 드러섰다. 군복을 차려입고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 솟은 하얀 백발에 성질 고약하게 생긴 이 남자는 들어오기가 무섭게 햇불에 환히 빛나는 황금니를 드러내며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이게 무슨 소리요! 시네프스 전역에서 발을 빼라니!”
“휘우 제법 요란하게 등장하는데? 최후의 장군.”

팔짱을 낀 채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 베리도트가 휘파람을 불며 카미코프를 환영했다. 그러자 그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은발의 엘프가 손에 든 재봉용구로 비둘기처럼 생긴 봉제인형의 날개를 고치면서 뾰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저 사람은 너무 시끄러워. 그렇지? 아 다 됐다 날아봐 킨키.”

- 꾸룩.

놀랍게도 은발의 엘프가 인형의 이름을 지어주자마자 이 전까진 미동도 없던 인형이 누더기같은 주둥이를 벌리며 생명의 울음을 터뜨렸다. 인형은 우스꽝스러운 날개를 연신 퍼덕이면서 주인의 손을 떠나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어두운 공동 이곳저곳을 돌다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은발의 엘프, 프리실라 테스테롯사는 만족한 얼굴로 인형이 빠져나간 문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켓, 여전히 저 짓이구만. 다 늙어서 왜 인형질이야?”

겁도 없이 흰색 곰 위에 올라타고 있는 붉은 삐삐 머리의 소녀, 엘리스 카리나가 프리실라의 그런 모습에 헛구역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 때 옆에서 동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엘리스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훗, 꼬맹이. 비정상인 건 저 엘프 녀석이 아니고 한창 클 나이에 애늙은이 소리를 하는 자신이라고 생각지 않나?”

사자처럼 풍성한 금발과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이 중년의 신사는 바로 그리드 핸드라는 아명을 가진 나바론이었다. 나바론은 손가락으로 금화를 튕겼다 받아들었다하며 노골적으로 엘리스를 비웃었고, 엘리스는 흥 코웃음치며 배알이 꼴리는 듯 비꼬는 말투로 대꾸했다.

“오호라? 뭔가 이 분위기가 마음에 안든다했더니 바람둥이 종마사냥꾼께서 여기에 친히 납시셨구만? 어때, 저번에 심하게 당하고도 아직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있단 소문이 들리던데?”
“쿡쿡, 걱정하지마. 너 같은 폐기물 수준의 발육부진 애늙은이 꼬맹이는 내 사냥 목표가 아니니까.”
“뭐야?!”

핑! 순식간에 엘리스의 손에서 육안으론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바늘들이 나바론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순식간에 손가락 마디마디에 금화를 끼워든 나바론은 금화로 그것들을 막아낸 뒤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해보자는 거냐?”
“오냐, 오늘 너 죽고 나 살아보자.”

크르릉!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 우렁찬 사자후가 공동을 쩌렁쩌렁 흔들며 울려 퍼졌다. 바로 타이거 마스크를 쓴 용자 레이 미스테리오의 일갈이었다.

“칫.”

레이의 위협 섞인 중재에 나바론과 엘리스는 조용히 분을 삯이며 서로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레이가 무서워서라기보단 이성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중년의 부인, 카트린느는 혀를 끌끌차곤 무서운 듯 벌벌 떨고 있는 방독면을 쓴 아이에게 속삭였다.

“쯧쯧쯧. 요한 당신은 커서 저런 어른이 돼서는 안되요. 알겠죠?”
- 쉬익. 쉬익.

절망의 연주자, 요한 베르캠프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빠지직!

이런 소란통에 어느새 단상의 앞까지 다가온 카미코프가 자신도 모르게 방전을 일으키며 단상에 앉아 있는 자를 향해 소리쳤다.

“자! 이제 말해보시오! 총수! 나에게 시네프스 전선에서 돌아오라고 명한 이유를!”
“내가 분명 의심치 말라 전했을 텐데?”

잠시 인상을 구긴 카미코프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이건 당신의 뜻이오? 아님 ‘진짜’의 뜻이요?”
“카미코프! 더 이상 지껄인다면 네 녀석의 숨통을 짓이겨 놓겠다!”

레이가 우렁찬 목소리로 카미코프에게 소리쳤다. 이미 단상 위에 서 있는 총수가 진짜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는 사천왕 레이로서는 카미코프가 마음대로 지껄이지 못하게 해야 했다. 물론 나바론을 비롯해 제법 나이가 든 12제들은 저 총수가 단지 대리인일 뿐이란 걸 대강 눈치 채고 있었지만 그것을 표면에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필요도 못 느꼈거니와 아무리 대리인이라지만 총수는 총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놓고 총수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금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나 이성을 잃은 카미코프에게 그런 것은 별 상관이 없었기에 금기나 레이의 위협같은 것은 전혀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화를 돋우는 결과가 될 뿐이었다.

- 빠직!

몸을 돌려 레이를 노려본 카미코프는 가죽장갑을 잡아당겨 가벼운 방전을 일으키며 뒤틀린 입술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아? 어디 한번 해봐. 대가리까지 근육덩어리인 고양이가면. 나도 이대로 그냥 갈 생각은 없어. 새하얗게 불태우고 싶어?”

또 다시 일촉즉발의 상황이 발생하고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머지 12제들은 재밌는 구경거리를 찾았다는 듯 이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뿐이었다.

“그만.”

갑자기 공동에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 아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청명한 기운과 당당함은 그들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대리자 총수가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작은 인영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넌!”

로브를 뒤집어 쓴 이가 후드를 벗자 정말로 어린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금발을 짧게 깍은 귀여운 소년은 단상에 서 있는 대리자에게 침착하고 목소리에 아무런 기복도 없는 어투로 말했다.

“수고했어. 이젠 내가 알아서 할게.”
“그, 그렇지만….”
“괜찮다니까. 이것도 그분께 받은 심부름이야. 그분은 이미 이런 걸 예상하고 계셨나봐.”

12제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소년은 앳된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커다란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고 나바론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굳혔다.

“하아, 이거야 또. 정말 황당한 일투성이군 이놈의 조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나바론의 넋두리에 어린 아이가 말했다.

“왜? 내 겉모습이 어리다는 것이 불만?”
“아니아니, 그것보다도 사천왕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해? 이곳이 어린아이도 드나들기 쉬울 정도로 허술한 곳이었나? 아니면 내 감이 녹슨 건가?”

나바론은 보안이 이토록 쉽게 뚫렸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아이의 말을 귓전으로 넘겨버리며 베리도트와 레이에게 물었다. 베리도트는 연신 유쾌한 듯 킬킬거릴 뿐이었고 레이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이 어린 아이 뒤에 비친 총수의 모습에 예를 표할 뿐이었다.

“칫. 어쨌든 나도 인사는 해야겠군.”

나바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최대한 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아이는 슬쩍 고개를 끄덕여 나바론의 인사를 넘기고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고, 엘리스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자, 요한도 인사하세요. 친구를 만나면 이렇게 예를 갖춰 인사하는 거랍니다.”

요한은 유모의 지적을 받아 수줍은 듯 재빨리 인사를 하곤 유모의 치맛자락 뒤로 몸을 숨겼다. 무표정한 프리실라를 마지막으로 아이는 카미코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빌어먹을! 말년에 내가 어린 아이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
“겉만 늙은 놈이 말이 많군. 인사하기 싫으면 저 엘프 녀석처럼 안 해도 상관없잖아?”

나바론의 지적을 받은 카미코프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벼운 묵례로 답례를 한 아이는 작은 지체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카미코프에게 물었다.

“나는 그분의 대리자, 프란츠 리슐리외. 이제부터 그 분의 전언을 알려드리겠어요, 카미코프.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전쟁인가요? 아니면… 승리?”
“승리!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 뭐가 됐건 이왕 시작한 전쟁에서 먼저 몸을 뺀다는 것은 내 프라이드가 절대 용납하지 않아!”
“호오? 단순한 전쟁광만은 아니었군?”
“베리도트.”

중간에 끼어든 베리도트에게 레이가 눈길을 주자, 베리도트는 가볍게 킥킥 웃으며 말을 멈췄다. 한결 조용해진 상황에서 아이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당신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면서 우리들에게 유리한 방법을 일러주겠습니다. 카미코프. 이걸 마지막으로 일단 우리 저스티스는 모든 전선에서 발을 뺀다는 것이 그분의 말씀이십니다. 이미 목적은 달성했으니….”

목적! 저스티스의 힘과 악명을 전 대륙에 널리 알리고 더할 나위없는 혼돈을 만드는 목적! 그건 이미 달성했다. 하지만 그런 걸로 이 모든 의문을 풀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카미코프는 만족했다. 자신은 전쟁보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에 더 관심이 깊은 인간이니까.

"호오?"

아이의 작전설명을 듣는 카미코프의 입가에 만족스럽진 않지만 작은 미소가 걸렸다.






「DESTINY」
運命의 系統樹
第 22夜. 힘겨운 사투 그리고 납치된 왕녀







갑자기 나타난 유리 덕분에 유이 일행이 구원을 받은 그 시각. 예니체리 기사단은 구울로 변해 버린 아군을 맞아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살아있는 녀석들은 모두 왕녀님을 보호해라!“

예니체리 기사단의 단장 살라딘은 양 손에 들려 있는 흑백의 쌍검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은 좀비를 산산조각으로 만들어버리며 외쳤다. 그러나 싸울 수 있는 인원은 고작해야 20여명 남짓으로 나머지는 좀비가 되거나 깊은 부상으로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나마 항구로 들어가는 입구가 좁아서 망정이지 이 입구마저 넓었다면 애초에 포위당해 전멸했을 지도 모를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다.

“드미트리. 네 녀석까지….”

살라딘은 지시를 내리던 와중에 자신의 앞에 나타난 금발의 사내를 바라보며 신음을 흘렸다. 예니체리의 상징인 하얀 베레모를 비스듬히 쓰고 붉은 피로 얼룩진 하얀 제복을 입은 그 사내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부관이었던 드미트리였다. 그러나 좀비라고 치기엔 그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표정들이 실로 다양했다. 조소 섞인 차가운 눈빛을 가진 좀비라니… 살라딘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당혹감에 중얼거렸다.

“설마….”
“킥킥, 그러니까 당신은 어쩔 수 없는 바보인거요, 살라딘. 내가 좀비라도 된 줄 알았나?”

살라딘은 그가 멀쩡한 것을 깨닫곤 분을 삯일 수 없어 소리쳤다.

“드미트리! 이 배신자 같으니! 설마 네 놈 저스티스에 영혼을 판 것이냐!”
“킥. 글쎄, 과연 어떤 것일까? 내가 배신을 한 걸까? 아니면 조종당하고 있는 걸까?”

드미트리는 양 손에 끼워져 있는 갈퀴손을 한번 쩔그럭 거리곤 잽싸게 살라딘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그건 당신 스스로 알아봐!”
“드! 미! 트! 리!”

살라딘이 이빨을 뿌드득 갈며 검을 한번 휘두르자, 불꽃이 튀며 드미트리가 휘두른 갈퀴손이 튕겨나갔다. 원래 고양이처럼 가볍고 빠른 속공이 특기인 드미트리였지만 이번에 그가 휘두른 갈퀴손은 마치 해머라도 되는 듯 묵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살라딘의 상대가 되기엔 무리였다. 몇 번 공방이 오가지도 않았는데 살라딘의 일격을 막고 양 손이 뒤로 튕기더니 정면이 뚫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방비의 드미트리에게 용서없는 살라딘의 검이 파고들었다.

“배반자에겐 피의 단죄를!”

살라딘이 흑백의 두 검을 일순간에 내리치자, 드미트리의 양 팔이 싯뻘건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썩은 나뭇가지처럼 잘려져 나갔다.

“크아악!”

드미트리가 비명을 지르며 풀썩 쓰러지자 살라딘은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이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렸다. 아무리 아끼던 부하였지만 배반자에게 신경 쓸 틈 따윈 없었고 한시라도 빨리 왕녀를 피신시켜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황을 보아하니 프리벤터가 들어간 항구도 가망은 없어보였다. 그렇다면 왕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래도 프리벤터 정도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티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입구는 하나, 만약 그들이 기습을 받고 도망쳤다면 이곳밖에 퇴로가 없을 터. 그렇다면 합류를 해서 왕녀님이라도 피신 시켜야한다. 그들이 살아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하지만… 이 길 밖에 없는가?’

살라딘이 고민을 하며 잠시 서 있는데 엘 왕녀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살라딘! 뒤를!”
“!”

살라딘이 뒤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살기에 급하게 몸을 틀었지만,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끔찍한 느낌과 함께 날카로운 뭔가가 박혀들었다. 그것은 바로 몸통을 잃은 드미트리의 오른팔이었다! 살을 파고든 갈퀴손들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덜렁거리자 살라딘이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를 내며 자신의 내장을 휘젓고 있는 ‘그것’을 쳐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직도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그것’은 살라딘이 검을 들자마자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재빨리 그에게서 이탈해 멀쩡하게 서 있는 주인-드미트리에게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드미트리의 양 팔은 공중에 둥둥 뜬 채 주인과 붉은 피로 이루어진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네, 네 녀석! 어, 어떻게!”
“킥킥. 미안하지만 내 몸은 위대하신 메두사님께 개조 받은 몸이거든. 흑마술 때문에 내 몸은 이미 사람의 구조가 아니란 말씀이지.”
“너 이 놈!”

살라딘은 검을 치켜들고 드미트리에게로 다가갔다. 이번엔 완전 산산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생각이었다.

“!”

그러나 갑자기 시야가 일그러지며 정신이 혼미해졌고, 살라딘은 가까스로 검을 땅에 꽂아 비틀거리는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일그러진 형상의 드미트리를 노려봤다. 어지러운 세상 속의 그는 비틀거리는 살라딘을 조소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삐뚤어진 입에서 환청같은 소리를 자아냈다.

“어지럽지? 이제 슬슬 손가락 끝부터 마비가 올 거야.”

그의 말처럼 검을 쥐고 있는 손가락 끝의 감각이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했고 살라딘은 핏발선 두 눈으로 드미트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 네 놈 설마… 독을….”
“킥킥, 아하하하하! 당신 진짜 바보로군? 그럼 내가 진짜로 당신과 정면 승부할 줄 알았던 거야?”

드미트리는 크게 웃으며 살라딘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윽고 살라딘의 앞에 선 드미트리는 의기양양한 눈을 들어 엘을 흘낏 쳐다봤다. 그러나 기사들은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구울들을 막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와줄 수 없었다. 한 명만 자리를 이탈해도 이들은 모두 고립될 위기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드미트리는 열심히 구울들을 베어버리며 이곳으로 오려 노력하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꽤나 우스웠던지 등을 들썩이며 킥킥거리다 엘에게 말했다.

“걱정마시지요 마이 로드. 당신은 상처하나 없이 깨끗이 모셔갈 예정이니…. 그래야 상품 가치가 나온다고 카미코프님께서도 말씀하셨거든? 킥킥킥.”
“당신… 어떻게 이런 짓을?! 조국을 배반하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용서 받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그러나 엘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초연한 얼굴로 드미트리를 비난했다. 살라딘을 구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볼 생각이었다. 역시나 아인츠베른 학원 출신답게 그녀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었고 그녀는 드미트리가 반응할지 안할지에 관계없이 무리수를 두기로 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드미트리가 약간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킥, 캬하하하! 뭔 소린가 했더니 역시나 엘리트로군 당신! 정말 책에서나 나올 법한 문구야!”

엘은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드미트리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드레스자락 사이로 숨긴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역시 이 나라의 귀족 연놈들은 썩었어! 아암! 이제 갈아엎을 때가 되었지! 썩은 물을 그대로 뒀다간 땅까지 썩어버리니까!”

미치광이 같은 얼굴로 엘을 노려보던 드미트리는 이내 고개를 돌려 갈퀴손으로 살라딘의 심장을 겨누며 말했다.

“자, 이제 사신의 노래를 들을 시간이다! 살라딘! 한번쯤은 울어보는 게 어때?!”

쉬익!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드미트리의 갈퀴손이 살라딘의 심장을 향해 꽂히는 순간이었다. 돌연 죽어가는 줄 알았던 살라딘이 순식간에 몸을 뒤집더니 흑의 검을 들어 드미트리의 갈퀴손을 막아내었고 쇠를 긁는 소리와 목구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선혈과 함께 살라딘의 일갈이 강하게 울려 퍼졌다.

“죽을 놈은 네 놈이다!”
“뭐라고?!”
“하아압!”

거치적거리는 드레스자락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든 엘이 눈 깜짝할 사이에 드미트리의 지척까지 날아오더니 손에 든 단검을 들어 드미트리의 등을 단숨에 꿰뚫었다. 공격자가 다름 아닌 목표물인 엘이었기에 드미트리의 반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이런 기습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검은 정확히 심장에 박혔고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즉사까지도 가능했으리라. 그러나 드미트리는 이미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자였다.

“쿡, 쿡쿡, 쿠하하하하!”

시퍼런 검날이 가슴을 뚫고 삐져나왔건만 드미트리는 쓰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가만히 선 채 유쾌한 웃음만 터뜨렸다. 살라딘과 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아하하하! 정말 재밌군! 재밌어! 이런 것도 하나의 살아 있는 기쁨이지!”

드미트리는 피로 연결된 왼팔을 날려 엘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낚아채더니 자신의 귓가에 끌고와 속삭였다.

“이러시면 곤란하지요, 전 이런 간지러운 공격 따위엔 죽지 않으니 나중에 천천히 놀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이 로드…?!”

냉소하며 엘에게 속삭이던 드미트리가 돌연 창백한 얼굴로 입에서 검붉은 피를 한바가지  쏟아내더니 곧 술 취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주시하던 엘이 입가에 살짝 조소를 띄고 작게 속삭였다.

“당신에게 나중이란 없어요. 드미트리 ‘경’.”
“너! 이 빌어먹을 년! 내 몸에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쿠엑!”

드미트리는 엘의 목을 꺾어버릴 듯 머리채를 잡아당겨 힘겹게 소리쳤지만, 이젠 엘의 연약한 목을 꺾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빠져나가는 혈액과 함께 그의 생명이 갈기갈기 조각나며 토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문득 자신의 등에 박혀 있는 단도를 생각했다.

“쿨럭! 설마… 이건!”

금과 은장식이 된 오래된 보검. 언뜻 보아도 그것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목적보다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 그러나 그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가히 범상치 않았고 그것은 흑마술과는 상극에 위치하는 성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왕가의 보검… ‘그릴리오트’.”
“맞아요. 이것이 흑마술로 구성된 당신의 육체에 박히는 순간 당신은 진 거에요. 드미트리 ‘경’.”
“너… 너어어어어어어어!”

엘이 조롱하듯 ‘경’이라는 칭호에 강세를 두었지만 이미 드미트리는 무너져가는 몸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지경이었다. 그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뜨거운 촛농처럼 녹아내리더니 이내 큰 소리와 함께 폭발해버렸다.

“큭!”
“살라딘!”

드미트리가 사라진 직후 살라딘이 왈칵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하자 엘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이미 전신에 독이 퍼진 듯 얼굴은 시꺼멓게 죽어가고 있었고 검을 쥐고 있는 손은 이미 썩어가는 듯 손가락 끝부터 시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살라딘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위태위태하게 생명의 줄을 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단장님!”

남아 있던 기사들이 자신이 맡은 구역의 좀비들을 베어버리며 엘과 살라딘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야 살라딘의 상태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단원들은 일순간 절망적인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이내 결연한 각오로 좀비들을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비켜주십시오!”

그제야 살라딘의 곁으로 도착한 한 의무병이 공주를 밀치고 살라딘의 용태를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심각한가요?”

엘이 굳어진 표정으로 의무병에게 물었다. 실낱같은 희망을 잡고 싶었으나 의무병의 얼굴이 지금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수도로 이송만 한다면!”
“괜찮다.”
“단장!”

단장이 피비린내 섞인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엘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미 드레스가 피로 엉망이 되었지만 이 강직한 성품의 왕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그녀는 구울을 막고 있는 기사들에게 적절한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살라딘은 시네프스 왕국의 밝은 내일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곧 프리벤터분들께서 오실 겁니다! 살라딘 경! 그 때까지 제발 버텨주세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듯 아롱거리는 엘의 눈동자를 가만히 주시하던 살라딘은 결심을 내린 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말했다.

“외람되오나 마이 로드. 저흰 여기 남도록 하겠습니다.”
“에? 살라딘 경?”

툭! 살라딘이 가벼운 손놀림으로 엘의 목덜미를 치자 그녀가 잠든 것처럼 스르륵 무너졌다. 힘겨운 몸으로 엘을 받아든 살라딘은 잠시 회한에 가득한 눈빛으로 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멀뚱하게 서 있는 의무병에게 넘기며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네에겐 지금 즉시 왕녀님을 모시고 프리벤터에게 합류할 것을 명하는 바이다! 하지만 왕녀님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왕녀님의 목숨을 지켜라!”

의무병이래도 그는 예니체리였다. 다른 이들과 비교해 전투능력이나 육체적인 능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 기사였기에 살라딘은 그에게 왕녀를 맡길 수 있었다. 의무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거수경례를 했다. 살라딘은 답례를 하며 그에게 말했다.

“그대와 왕녀님께 신의 은총이 있기를….”
“단장님과 단원들에게 여신의 바람이 함께 하길….”

의무적인 인사가 끝나고 의무병이 등을 돌리는 찰나였다. 문득 무서운 표정을 짓곤 의무병의 등을 노려보는 살라딘이 의문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건… 예니체리가 아닌 아르마다식의 인사말인데….”

쉐엑!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살라딘의 흑검이 무시무시한 검광을 흩뿌리며 의무병을 세로로 양단하였다. 그러나 그의 검은 목표로 했던 것을 베지 못하고 애꿎은 땅에 무시무시한 검상만을 남길 뿐이었다.

“쿨럭!”

무리해서 공격을 퍼부은 탓에 살라딘은 역류하는 피를 쏟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는 비틀거리면서 두 눈을 부릅 뜨고 사방을 살폈다. 이윽고 그는 한 커다란 나무 위에서 왕녀를 어깨에 걸친 의무병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 10여 미터나 떨어진 나무 위까지 이동했다는 것을 보아 한 눈에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살라딘으로선 무리라는 것도.

“네 노오오오오옴!”

그러난 살라딘은 물러섬 없이 노성을 지르며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눈 앞에서 왕녀를 내줬다는 사실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지만 이내 피를 한 움큼이나 쏟아내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전신이 마비되어 한 발자국도 땔 수 없었다.

"단장!"

구울들을 막고 있던 기사들도 이번에는 한꺼번에 자리를 이탈해서 살라딘의 곁으로 다가와 몇몇은 최소한의 방어진을 펼치고 몇몇은 왕녀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기사들이 나무 위에 서 있는 의무병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구울들이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마치 군대와도 같은 정확하고 신속한 포위에 기사들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이 노오오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서라도 왕녀를 구해내겠다는 살라딘의 거동을 바라보던 '그 자'가 낮은 목소리에 경의를 가득 담아 말했다.

“당신의 불굴의 의지에 정말 경의를 표하오 살라딘. 마음 같아선 이대로 왕녀님을 내드리고 싶으나 나 또한 명령을 받는 몸. 마음가는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시길.”

의무병을 가장한 그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들더니 곧장 살라딘에게로 던졌다.

“이, 이건?”

기사 하나가 그것을 낚아채서 살펴보자 병 속에 영롱한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액체가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쿨럭!”

살라딘이 피를 토해내자 의무병을 가장한 남자가 말했다.

“그것이 당신에 대한 나의 최대한의 답례요, 살라딘…. 바로 해독제지.”
“뭐라고?! 네 녀석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안 믿어도 할 수 없겠다만….”

문득 그 남자는 숲 저편을 예리하게 주시하더니 살라딘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소. 왕녀님은 최대한 안전하게 모시기로 약속하지, 다섯 번째 12제 코드네임 이반 아이작이라는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이반 아이작!”
“천의 얼굴!”
“불살!”
“마음을 먹는 자!”

5번째 12제 이반의 이름을 확인한 이들이 소리내어 그의 명칭을 불렀다. 힘이 모자라다는 안타까움과 절망, 그리고 분함을 가득 담아서….

“그럼 다음에 뵙길 고대하겠소. 살라딘.”

이반은 나타날 때와 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은 이들은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는 구울들은 무시한 채 망연자실 이반이 사라진 곳만 주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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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켈켈켈~~ 이걸로 잠시 저스티스도 전쟁에서 발을 빼서 전력을 가다듬을 예정입니다.
물론 빠져나간 프레이저와 유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목적도 있음.

PS:왕녀를 납치한 이유는 카미코프를 약간이라도 만족시켜주기 위한 거삼. 물론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케케케 다음은 아란님께 맡깁니다~ 살라딘의 생사와 왕녀의 납치 여부는 아란님에게 달려 있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