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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Flame Blaze

2006.01.14 12:23

갈가마스터 조회 수:96 추천:4

extra_vars1 돌아갈 수 없는 길 
extra_vars2 Fire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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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e>

끈적한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비교적 넓은 방. 중앙에 낮게 떠있는 하얀 고리와 혈관처럼 벽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빛에 의존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곳에, 시뻘건 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때문에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가릴 수 없건만 어째서인지 그것이 인간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걸 금새 알 수 있었다. 생물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기초적인 생명력이 결여된 존재, 영원의 생명과 혼을 뒤바꾼 그 같은 이를 다른 차원의 존재들은 경멸의 의미를 담아 ‘엔젤’이라 불렀다.

후드 안쪽에 감춰진 ‘그것’의 머리는 이 방처럼 어두웠다. 흡사 무저갱처럼 어둠만 존재하는 매끈한 얼굴엔 엑스자로 교차하는 하얀 선과 신호등처럼 한가운데 일렬로 늘어선 세 개의 렌즈가 전부였는데, 신호등과는 달리 세 개의 렌즈 모두 잔인한 느낌의 적광으로 가득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 그것이 이윽고 방 중앙의 고리 안쪽으로 들어서자, 기계의 진동음과 함께 무미건조한 컴퓨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서 오십시오. 입실론(epsilon, Ε ε) 각하. 손님이 와 계십니다. 연결할까요?

입실론. ‘엔젤’에 존재하는 13명의 군단장 중 하나인 ‘그것’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방 한 구석에서 희뿌연 입체영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킥킥. 오미크론(Omicron, Ο ο).]

입체영상을 확인한 입실론은 작게 키득거렸다. 꼽추처럼 등을 구부리고 감기라도 걸린 듯 연신 몸을 들썩이던 ‘그것’은 입실론을 발견하자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해골같이 앙상하고 오래된 듯 누렇게 변색된 철골, 피스톤은 물론 관절까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부실한 몸에 어깨에 검은 망토만 살짝 걸친 ‘그것’은 입실론과 마찬가지로 13군단장 중 하나인 오미크론이었다.

[쿨럭. 쿨럭. 드디어 왔나? 입실론.]

오미크론은 연신 몸을 들썩이며 기침섞인 쉰소리로 입실론에게 말했다. 물론 기계인 그가 기침을 할 리는 없다. 이것은 오미크론이 태어날 때부터 프로그램 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버그였다. ‘가장 오래된 13인’이 태초부터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상의 버그는 어느 누구도 고칠 수 없었다.

[이런! 내가 그리웠나 보군? 이렇게 환대를 해주다니.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난 자네가 썩 반갑지 않다네, 오미크론.]

입실론이 검은 머리통을 흔들며 킥킥거리자 오미크론이라고 불린 입체영상이 연신 콜록거리며 말했다.

[쿨룩. 여전히 말 돌리는데는 이골이 났군 그래. 말장난은 그만하고 본론만 간단히 할까.]

오미크론은 기침을 크게 한번 하고 입실론을 노려보았다. 잠시간의 신경전이 그들 사이에 오가고 먼저 입을 땐 것은 오미크론이었다.

[왕을 찾았나?]
[글쎄?]

입실론이 시치미를 뚝 땠으나 이미 오미크론은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지구에 파견된 강행 정찰형 자코가 마도사의 공격을 받아 파괴됐다는 것을. 정찰을 위해 최신형 은폐장치를 달고 있는 자코가 마도사에게 파괴되었다는 것은 은신을 풀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는 뜻이었고, 선제공격을 가했다는 것은 전술상황 알파 즉 마도사가 왕과 함께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파괴된 자코가 입실론의 ‘그레고리’군단 소속인 이상 이 정도의 추측과 자코가 파괴된 장소 외에 더 이상 정보를 얻을 순 없었고 지금 발견된 왕의 정확한 신상명세를 알고 있는 것은 입실론뿐이었다.

[흐음?]

그러나 입실론은 간혹 콧소리만 낼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오미크론은 사슴의 두개골처럼 생긴 길쭉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제야 이곳에 찾아온 원래 목적을 밝혔다.

[쿨룩. 쿨룩. 이봐, 입실론. 나와 손을 잡지 않겠나? 자네의 정보력과 나의 ‘역천사’군단이 힘을 합친다면 다른 녀석들이 미처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왕’을 손에 넣을 수 있어! 아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왕의 힘을 손에 넣어 전 차원을 지배할 수 있다고! 콜록! 콜록!]
[호오, 과연?]

입실론이 시큰둥하긴 했지만 약간의 반응을 보이자 오미크론은 신나게 말을 이어나갔다.

[쿨룩! 왕의 척살만 생각하는 머저리 시그마((sigma, Σ σ)와 탐욕스러운 오메가(omega, Ω ω) 녀석은 지금 외우주에서 세력권 문제로 다투고 있지! 겁쟁이 이오타(iota, Ι ι) 그 놈은 말할 것도 없으며. 얼간이 타우(tau, Τ τ)는 힘만 쌨지 무식하니까 문제될 것도 없다고! 그렇다면 남은 건 우리 둘 뿐이지. 안 그래? 이것이 절호의 기회가 아니고 뭐겠나? 입실론! 콜록! 콜록!]

오미크론이 말을 끝내고 입실론을 바라봤지만 입실론은 묵묵부답이었다. 입실론은 방금 전 보인 조그마한 반응은커녕 명백히 오미크론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런 입실론의 모습에 화가 잔뜩 난 오미크론은 신경질적으로 뒤돌아서서 땅만 쾅쾅 구르더니 기침을 격하게 토해내며 외쳤다.

[좋아! 좋다구! 그렇다면 나도 네 녀석에게 더 이상 손 벌리지 않겠다! 콜록콜록…. 나 혼자 행동하겠어! 지구라는 그 조악만한 별을 모조리 쓸어버려서라도 왕을 손에 넣고 말겠다! 쿨럭! 쿨럭! 쿨-럭!]

어차피 입실론 휘하 그레고리군단의 힘으로 왕에게 붙어 있는 린의 마도사들을 없애고 왕을 포획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오미크론은 미련 없이 통신을 끊었다. 정보력이 부족한 만큼 시간이 촉박해지겠지만 여차하면 지구 전체를 불태워버리겠다는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미크론은 플레임 블레이즈가 왕의 곁에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치못했다.

[킥, 킥킥킥. 캬하하하하하!]

사라진 오미크론의 뒤로 홀로 남은 존재의 미친듯한 웃음소리가 짙게 울렸다.

[자, 그럼 게임이 개시되었군. 엔젤과 그림자의 린. 엔트로피들 그리고 플레임 블레이즈. 단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계속되는 생존 게임이다! 죽고 죽이고 또 죽여라! 어리석은 자들아! 물론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내가 되겠지만… 킥킥. 캬하하하하!]

입실론의 붉게 빛나는 세 개의 눈동자와 공간에 전파되는 음성에는 광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Introduce end>

.
.
.

- 짹짹짹.

시끄럽게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눈을 떠본다. 뿌연 겨울 하늘에서 흐릿하게 빛나는 태양빛이 어둠뿐인 방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반 지하인 이 집에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이라곤 작고 볼품없었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구름 낀 하늘의 모습에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느낄 수 있었다. 어제 옷을 벗을 새도 없이 침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교복 그대로였고, 이제 일어나서 씻고 먹기 싫은 아침밥을 억지로 쑤셔 넣은 뒤 학교로 향하면 나 주은태의 일상은 시작 되는 것이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게 지루한 일상을 당연한 듯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리얼리티는 이제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되어 버렸다.

‘은태야, 네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왕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파괴자라는 것에 대해.’

문득 어제 집에 와서 누나가 해주었던 많은 말들이 생각났다. 세계를 조율하는 왕 그리고 그것을 손에 넣으려는 수많은 존재들. 물론 현실에 살고 있는 내가 그 모든 것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내가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누나와 내가 원래는 적이라는 것이었다.

‘플레임 블레이즈.’

그것은 왕의 적, 변질된 자. 한 때 왕이라는 존재의 힘이자 대행인이던 그들은 어떤 이유를 계기로 왕에게서 등을 돌린 이른바 모순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누나는 자신이 왜 파괴자가 되었는가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겠지만 나에게조차 숨겨야 되는 이유가 있을까? 누가 뭐래도 나는 형제가 아닌가! 어쨌든 어젯밤 나는 그렇게 화를 내며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문을 닫을 때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던 누나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 이건 말도 안된다. 밤이 새도록 나 자신에게 소리쳐 보았지만 그건 헛된 외침에 불과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이 동네에 있기조차 힘들어졌다.

‘내 엄마, 아빠, 동생을 돌려줘, 이 괴물아!’

엊그제, 괴 로봇과 캐서린이라는 아이의 싸움이 있던 곳에서 가족을 잃은 그 꼬마가 나에게 외치던 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울려댔다. 난 귀를 막고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리곤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라는 존재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입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죄하는 것 말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자살까지 생각해보았다. 그런다고 죽은 이들이 돌아오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것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쉽게 목숨을 던질만한 용기가 과연 내게 있을까? 정답은 노(No)였다.

죽기는 싫다. 그렇다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도 싫다. 이 모순된 사고 속에서 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을 떠나 아무도 모를 곳으로 숨고 싶지만 그런 곳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고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찬바람이라도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어?”

누군가 밖에 서 있었다. 순간 경계를 했지만 이내 그 그림자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은색의 머릿결, 온통 헝클어진 모습에 몸 이곳저곳에 붕대를 메고 있는 소녀. 틀림없었다. 바로 캐서린이었다. 한없이 맑게 빛나던 푸른빛의 눈동자는 이제 빛바랜 유리처럼 초점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

내가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자 문득 날 노려보던 캐서린이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깐! 캐서린! 빌어먹을!”

어째서일까. 난 재빨리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의자에 걸쳐져 있는 코트를 집어든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실로 나왔건만 언제나 아침밥을 준비해주던 누나는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틈도 없이 난 신발을 구겨 신고 현관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동장군의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날카롭게 핥기고 지나갔지만 나는 그런 것에 상관없이 캐서린의 자취를 찾아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아!”

다행히 반쯤 열린 녹색 대문 사이로 비틀거리며 멀어지는 캐서린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를 뒤쫓아갔다.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지 캐서린의 동작은 굼떴고 오래지않아 나는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는 캐서린의 팔을 잡아당겨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악!”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일까? 캐서린이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자 마치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져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미, 미안….”

엉겁결에 사과의 말은 했지만 캐서린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등을 돌리고 내 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

그 모습에 문득 가슴 한 구석이 쑤셔왔다. 하긴 저 상처는 모두 내 누나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저, 저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내가 이렇게 캐서린의 뒤를 쫓아온 것도 아무 생각 없이 행한 것이다. 당연히 할 말 같은 걸 생각해놨을 리도 없다. 내가 우물쭈물거리자 캐서린은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듯 한 걸음 내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 저기 잠깐… 미안해!”

내가 당황해서 엉겁결에 외친 소리에 캐서린이 멈칫했다. 그리고 슬쩍 돌린 그녀의 어깨너머로 흔들리는 차가운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미, 미안해….”

나는 도무지 그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에 고개를 푹 수그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 때 캐서린이 몸을 돌리더니 나에게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 짝!

갑자기 눈앞에 번쩍이며 왼쪽 뺨에서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짓곤 뺨을 매만지며 캐서린에게 고개를 돌렸으나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눈물을 가득 머금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에서 느껴지는 오만가지의 감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조차 서글퍼지는 것 같았다.

문득 그녀가 가늘게 떨고 있는 입술을 열고 감정을 토해냈다.

“네가… 네가 뭘 안다고 그딴 소릴 지껄여?”

절제된,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모조리 담고 있는 그 목소리. 그 음성은 여전히 맑고 아름다웠지만 전과 같은 상냥함은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 지 오래였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누나의 공격을 받아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커다란 뭔가가 그녀의 가슴 속에 상냥함을 앗아가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다. 무엇이 됐건 그것은 내가 그녀에게 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주륵. 나도 모르게 눈에서 가느다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그녀가 흥분한 얼굴로 나에게 소리쳤다.

“싸구려 동정심이야? 도대체 날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어야겠어? 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란 말야!”

그녀는 그 작은 손을 들어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비록 전에 괴 로봇을 때려눕힐 때 같이 무지막지한 기술을 쓰진 않았지만 그 작은 손에서 느껴지는 힘에 난 그녀가 지닌 분노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왜 그 힘으로 날 죽이지 않는 지 궁금할 정도였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문득 감정이 복받쳐 올라온 난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이것 놔! 싸구려 동정심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해! 날 불쌍하게 보는 그 눈도 저리 치워!”

캐서린은 내 품을 밀어내려고 몇 번을 애쓰더니 돌연 힘을 빼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난 그녀의 머리에 턱을 기대고 그 분노를 받아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이 전부였다.

“휘우. 이거 그림 좋은데?”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장난스러운 음성에 난 얼굴을 붉히며 캐서린을 놓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리고 벽에 기대서 이쪽을 구경하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중절모에 회색코트. 입에서 희뿌연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고 있는 시가까지, 흡사 갱영화에 나오는 마피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동양계의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날카롭게 생긴 그 남자는 중절모 아래 뱀처럼 가늘게 뜬 눈동자에 조소를 가득 담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량 페이….”
“량 페이?”

캐서린이 그를 보며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량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가 얼굴에 이색을 표하며 말했다.

“어라? 날 알고 있다고? 보통 사람이 알 정도로 내가 유명했나? 어때? 준.”
“량, 네 눈은 장식품?”

뒤에서 또 다른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고 나는 재빨리 뒤돌아섰다. 캐서린은 이미 뒤돌아서서 새롭게 등장한 여성을 보고 있었다. 어깨에 비싸 보이는 회색 모피코트를 걸치고 이 추운 날씨에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 여성은 바람결에 찰랑이는 윤기 있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자랑하며, 사극에서 보일 법한 기다란 담뱃대를 앵두처럼 붉고 탐스럽게 빛나는 입술에 물고 있었다. 입술 아래에 옥의 티처럼 나있는 검은 점이 그녀의 관능적인 모습에 매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뭔가 천박한 느낌이 나는 것이 별로 끌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준… 페이.”
“닥쳐. 프로즌 리버가(家)의 천박하고 더러운 갈보년에게 불려지라고 가지고 있는 이름이 아니야. 도대체가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군?”

내가 보기엔 당신이 더 천박해. 이런 말이 갑자기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상황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이들은 분명 캐서린 같은 마도사가 분명했다. 목적은 나인 것이 분명했고.

“프로즌 리버 가문에 저런 평범한 애가 있었던가?”

량이란 사내는 준이라는 여성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고민을 해보더니 문득 멍청한 표정으로 캐서린을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어이어이. 설마 저 여자애가 소문이 자자한 프로즌 리버 가문의 양녀란 말야?”

량이란 사내는 잠시 캐서린의 이모저모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펴보더니 이내 미심쩍은 얼굴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원천(源泉:링커 코어)이 느껴지지 않는데? 잘못 안거 아냐?”

뿌드득. 캐서린의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그리곤 다시금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나를 노려보고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원천’이라는 것에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 준이라는 여성은 캐서린을 더러운 들개 쳐다보듯 흘겨보다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흥. 어디선가 원천을 빼앗겼나보지. 칠칠치 못하긴…. 프로즌 리버가(家)는 어째서 이런 근본도 모를 애를 받아들인 걸까? 쯧쯧.”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교만으로 무장을 한 그 여성은 그렇게 캐서린을 매도했다. 여우처럼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뭔가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는 듯했다. 캐서린은 용케 참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내가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시끄러워, 아줌마! 못생겨가지곤!”

뚝! 갑자기 나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준이라는 여성의 손에 들려 있던 담뱃대의 허리부분이 딱하고 부러져 버렸다. 그러자 그 여자의 주변 공간이 검은 기운에 물들어가더니 불길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준이라는 아줌마의 관자놀이에 불거져 나온 핏줄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먹에서, 한 눈에도 저게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량이라는 사내가 뒤에서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

“쯧쯧. 금단의 성역을 건들였군. 이번 왕의 포획은 포기해야 하나?”

이봐요, 포기하지 말아줘요. 나는 오히려 이들에게 붙잡혀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꿇어.”
“예?”

문득 준이라는 여성이 하는 말에 살기를 느껴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뜻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한쪽 손으로 빠르게 수인을 맺는 그 여자의 입에서 다음 말이 들려왔다.

“미월문(眉月門) 개(開)! 중력간섭(重力干涉) 압(壓)!”
“으헥?!”

갑자기 어마어마한 힘이 머리를 찍어 누르자 나는 물론 캐서린까지 무릎을 꿇고 말았다. 무릎을 꿇은 것까진 좋은데 도무지 머리를 짓누르는 힘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준의 싸늘한 얼굴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기를 풀풀 내뿜고 있는 것이 엄청나게 위험해 보였다.

“저, 저기….”

그 압도적인 박력에 눌려 사과를 하려는 찰라, 준은 죽음의 기운을 풀풀 휘날리며 나에게 말했다.

“이번 왕께서는 예절이 부족하시군요. 저희 유서 깊은 페이 가문을 대표해서 잠시간의 예절 교육을 시켜드리겠습니다. 우훗. 아!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시길. 아무리 미친 듯이 날뛰는 ‘망나니’라도 이 교육을 한 번 받으면 순한 ‘토끼’가 된답니다. 오-호호호호호!”

어느 새 준의 손엔 뱀 가죽같은 채찍이 들려 있었다. 채찍 표면에 군데군데 쓰여 있는 붉은 한문들이 ‘피’라고 생각한 것은 나뿐이었을까?

“어이, 즐거운 순간에 방해해서 미안한데 말야.”

그 때 등 뒤에서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량이라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위험한 순간에 바다를 가른 모세처럼 그의 목소리는 나에게 있어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량은 천천히 내 옆을 돌아 준에게로 다가가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성가신 놈이 오고 있다.”
“파괴자?”
“아아.”
“흐음. 아쉽군. 건방진 아이에겐 예절 교육이 필수인데 말야.”

내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운 감각이었다. 저 아줌마 도대체 날 어떻게 할 작정이었던거지? 쓸데없는 상상을 하면 할수록 두려움은 배가 되어갔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왕은 확인했고 보모와 싸울 필요까진 없으니. 아쉽지만 물러가도록 할까? 하현문(下弦門) 개(閉). 공간간섭(空間干涉) 이(移).”

준이 새로운 주문을 외운 직후 갑자기 온 몸을 찍어 누르던 압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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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드뎌 썼습니다~

설정 같은 건 귀찮아서 못 씀! 맘대로 써먹어도 뭐라 안그럴게요~

그리고 오미크론은 모티브가 스타워즈 에피소드 3에 나온 그리프스 장군입니다~ 제다이기사이면서 로봇인 멋진 놈이지요~ 전투방식도 똑같아요~ 팔 하나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총 4개의 광검을 들고 공격하는 전형적인 접근전 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