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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문속의 세계

2006.01.15 04:02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1178 추천:2

extra_vars1 0화 下편(1). 어둠과 빛의 이면을 가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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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暗)은 빛(光)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빛과 어둠은 상극(相剋)의 관계.
  나락(奈落)의 저편으로 밀어버리거나 깊이 잠재우는 수 밖에 없다.』-룬 언그알레이-




복도 저편으로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기 시작한다. 정말이
지 애도 아니고... 상대는 짙은 갈색머리가 인상적인 장민식이라는 녀석이다.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그런 대로 인상은 좋은 녀석이다. 하지만, 어딘가 붙임성 없어 보이는 헤실
헤실한 표정에서 얼빠진 녀석이라는 느낌을 주게 한다.

“여, 드디어 퇴원한거냐? 오랜만이군.”

“그래, 오랜만이다. 후아암~ …세수를 했는데도 왜이리 졸립다냐.”

“피곤해보이는 것 같은데 커피라도 하나 뽑아줄까?”

“괜찮아. 나에게 그런 배려를 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말과는 달리 나의 표정이나 어투는 한눈에도 알아볼만큼 냉담했다.

“때때로 너는 너무 퉁명스러워. 같은 말이라도 웃으면서 하면 좋을텐데 말이지.”

“충분히 그러고 있다고 생각한다만.”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너는 광기(狂氣)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너라면
  그런 부류에 대해 잘 알 것 같은데.”

뜬금없는 말이긴 했으나, 녀석의 이런 반응에는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인지라,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 말문을 열었다.

“제어되지 않는 흉폭함, 목표를 가지지 못한 채 그저 미쳐 날뛰는 힘을 가진 영혼.
  혹은 이유없는 살인충동(殺人衷動)도 되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것이 광기의 논리야. 세상에는 너 같은 사람이 모르는 세계가 있어.”

그렇게 말하는 나의 말과 어조가 왠지 섬뜩하게 들렸다. 녀석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일까.
녀석은 마음속 깊이 질렸다는 얼굴로, 깊이 한숨을 쉬었다.

“너는 인간의 정신을 하나둘 분석하는 것 같아.”

“아무래도 좋잖아? 어차피 흥미 위주니까. 그리고, 내게는 필수적인 거지.”

“그렇군. 뭐, 너는 비밀투성이니까 여기서 하나 더 늘어난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너와「그 녀석」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런 내색도 하질 않아.
  이런 저런 생각들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호오.. 너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다있었나?”

녀석은 묘하게 감탄사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나의 눈동자가 살짝 좁혀졌다.

“…너, 나를 이상한 녀석으로 생각했지? 누가 보면 내가 무슨 인형인줄 알겠다.
  뭐, 거짓은 아니지만.”

“…때때로 너는 자신조차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투로 말하더라.”

“그래? 아직도 인간 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에이이치…?”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럼, 이만.”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를 내버려둔체 자연스러운 태도로 나는 교실로 향한다.
… 다소, 불쾌해졌다.
듣기 싫었다.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내가 그와의 대화에서 순간적으로 느낀 기분은─


──── 그것은, 자기혐오(自己嫌惡)다.
             죽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한 자기혐오.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키려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
언제부터 였을까─내가「나」라는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나약하기만 했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어둠」에 의존하여,
어느새 나 자신이 아닌 전혀 다른「이질적인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은.

죄책감인가?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늘 확신에 찬 인간이었다. 모든 일에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놀람을 느꼈다.
잠시간의 생각. 하지만 역시 결론은 하나다.

“하하..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어,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지. 난 내 방식대로
  할 뿐. ‘쓸데없는’ 참견 따윈 하지마.”

나는 지금 무신경하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말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기적’이다.
자신에게 확인 시키듯이 질문을 던짐과 함께 자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교실 문을
열었다─그 때의 시간은 7시 59분. 참으로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하지만,「그 녀석」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꽤나 오랜 시간을 쓰지 않은 듯 책상 위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주변의 아무 녀석이나 잡고 물어봤다.

“‘인현신’? 그 녀석, 1주 전부터 갑자기 학교 안나왔는데 몰랐어? 아, 하기야
  너는 병원에 있었으니 몰랐을 만도 하겠네.”

인현신과는 1년 정도 전까지 친구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냥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급생이었을 뿐이었다.
녀석은 학교에서 ‘어떤 의미’로는 꽤나 유명 인사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친해지기 어려워 보통이라면 친구가 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조차 없지 않았을까.

계기는 놀이터였다. 1년 전 어느 날,
나는 평소와 같이 학자금을 내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삼촌께서는 그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시는 듯 하셨지만)

우연히 골목길을 돌아가다가 놀이터에서 즐겁게 노는 그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무시하고 그냥 가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그 모습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얼굴은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수심에 젖은, 삶에 지쳐보이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다른 누군가와 어울리지 못한채 혼자서 외로이 장난을 치는...
자세히 들여다보니 녀석의 두 눈은 나와 같은 오드아이(Odd Eye)였다.
그렇군. 그런 이유에서였나. 그제서야 나는 어렴풋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녀석도 나와 같은 이유로 따돌림을 받았겠지. 그래서 이곳에서 혼자 놀고 있던거고.

나의 시선을 눈치챈 것일까. 녀석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는 당황하여, “아..나도 같이 놀면 안될까?”라는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말을
내뱉어버렸다. 녀석은 지긋이 나를 바라보더니, “그래? 너도 나랑 같군. 괜찮아. 상
관없어.”라는 척 보기에도 농담이 아닌 진심으로 한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얼떨결에 친구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비웃어도 할 말은 없다.
중3치고는 약간 유치한 대화 내용이 아니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드아이와 따돌림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어쩌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5시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점심시간이 되었고, 나는
늘 그랬듯이 학교 안의 매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메뉴는 질좋은 생선의 눈알을 갖은
양념과 채소로 버무린 ‘투 아이즈(Two Eyes)’. 다른 녀석들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먹어치우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지만 그것은 취향차이다. 외국에는 달팽이를 먹는 사
람도 있는데 생선 눈을 먹지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매점에 갔을 때
그것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어디로?

“아, 미안하게 됬네. 젊은 총각. 그건 먹는 사람이 없어서 생산 중단됬거든.”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머리가 하얗게 되는 기분을 느꼈다. 먹는 사람이 없긴 왜 없
단 말인가! 나는 쓰라린 심정으로 꿩대신 닭이라는 듯 남아돌던 카스테라 빵을 하나사
서 밖에서 먹으려고 교정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어쩐지 학교 쪽에서 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이 기분나쁜 직감은 때때로 잘 맞았다. 하지만, 이럴 경우에만 묘
하게 들어맞는 그런 예감이란 것은, 정말로 빌어먹을 정도로 쓸모없다고 생각한 채) 학
교 옥상을 보니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자세히 보니 그
녀는 아침에 봤던 정선희 선배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인가. 그녀의 목에 선명하게 있었
던「검은 띠」는 확실하게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타인이야 어떻게 되건 그것은 내가 알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
으로, 나 자신이 그것을 원했다. 필요 이상으로 참견하지도 않고, 필요 이상으로 접점
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나는 망가져버리기에.

손을 돌려 닿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움켜쥐고, 놓지 않고, 끝내는 타인에 대한 신뢰
라는 것이 메말라 있다. 무언가를 얻기에는 부적합하지만, 아무하고도 관계성을 맺지
않는다는 조건을 성취하려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좋았다. 목적하는 것을 찾고, 이용할
수 있는 타인은 최대한 이용해먹고, 서로 금을 그어 나누어 떨어지면 그만인 것이니까.
애초부터, 이해타산 외에 나의 비상식과 타인의 상식은 결국 평행관계인 것이다. 정확
히 말하자면, 접점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되는 형식의 일이었다.

죽기 3초전,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섬찟한 것일까.

“안녕.”

원래대로라면 들리지 않을 그 한마디.
떨어지면서 나에게 던진 그 한마디가, 왜인지 강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콰직!

그리고 지금,「그 사람」은 죽어 버렸다. 그녀의 죽음은「자살」로 기재될테지.
아니, 그냥 ‘죽었다’는 것보다 더 나쁜 상태인가.
순간, 인간의 목숨이 벌레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그 사람」이 죽자, 목에 있던 검은 띠는 스스르 사라졌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사신(死神)은 목숨을 거둬감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촤악─하고, 손에 감촉이 왔다. 비산하는 붉음. 얼굴로 튀는 피는 뜨거움.
그리고, 나의 귀를 스친 짓눌려버린「그 사람」의 두 눈.
왠지 그것이 오늘 따라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희미한 피의 선율(旋律)..

세계가 일그러져간다. 그녀의 몸이 식어간다.
몸을 기점으로 점점 퍼지며 바닥을 적시는 붉은 피.
기점은 바닥에 직격으로 새차게 부딛힌 얼굴.
고장난 펌프에서 물이 새어나오는 것처럼, 피가 계속 새어나온다.

가볍게 일그러지는 입가.
목에서 흘러나온 웃음소리.
자신도 모르게 들떠버리는 기분.

비틀어진 욕망(欲望). 것 잡을 수 없는 충동(衝動).
그것이 마음 한구석이 아닌 모든 것을 지배(支配)하고 있다.
나는 잔혹한 승리자처럼 흐흐 웃음을 흘렸다.
지금 이런 내가 지금 짓고 있는 미소는 가식일까. 진심일까.


──── 그 순간. 나는, 일종의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 미소는 순간 차갑고 냉혹하고 잔인한 미소가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비틀린 웃음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만약 그 미소를 봤다면 정상적인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단 게 대체 어떤 기분일까.
보통 사람은 죽은 사람을 볼 때마다 살아있다는데 안도하며 쾌감마저 느낀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시체를 본다 한들 그 시체가 죽어있단 느낌은 없다.
살아있답시고 착각할 정도로 시체를 봐서 미쳐버린 게 아니라,
시체 따위를 보면서 감정이나 실을 정도로 머릿속이 편하단 건 아니라는 거다.
즉 지겹다는 소리. 하지만, 나는 어떨까.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건가?

언제부터인가 ‘죽음’ 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같이 느껴진다.
항상 내 주위에서 보는 거니까.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련 따윈 추호도 없었다. 이건 매번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수십번의「죽음」을 목격해왔고, 그때마다─


──── 네가 원하던「죽음(死)」은 그렇게도 가까이 있는데 뭘 망설이는 거지?


무엇인가 나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피를 갈구 하고 있었다.
피를 원하고 있었다. 너무 너무 원하고 있었다.
그의 욕망이 나의 인격을 마구 파먹고 있었다. 마구 망가트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무감각했던 느낌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것은「나」인가.「쿄우」인가. 아니면「또 다른 누군가」인가.
나로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언제부터인가 악마처럼 속삭이는 이「목소리」는 나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이성을 상실한 본능으로만 똘똘 뭉친 존재.
사람이 지니기엔 너무나 끔찍한 형벌(刑罰)이다.
원죄(原罪)처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쿄우가 표면적으로 나서는 것 뿐 달리 방법은 없다.
내가 육체의 사용권을 주도하고 있을 때 그는 대부분 잠을 자고 있어서,
나 혼자서「목소리」의 유혹을 떨쳐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의 설명으로는, 나의 모친 쪽에 흐르는 피가 쿄우라는 인격 자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반발작용 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모친 쪽의 가문은 예전에 무녀인가
퇴마사 쪽의 일을 했었다고 한다. 때문에 마(魔)의 존재와 접촉이 잦았었다고 한다.

요컨대 요괴(妖怪)나 마물(魔物)이라고 불리는 존재. 실존했었는 지의 여부는 둘째치
더라도, 그런 일을 자주하다 보니 뭔가 성격이 뒤틀리게 되었다고 해야 될까. 예전에
들은 예기로는 아마도 그런「존재」에게 뭔가 성격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추측
이 유력하다. 그것으로 인해 이상하게 가문의 장남에게만 파괴충동적인 성격이 계속
유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기호가 약간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꺼려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것은「죽인다」는 행위와「피」라는 것이다. 나는 아직 사람을 죽이지 못했다.
아니, 죽이지「못한」것이 아니라 죽이지「않은」것이다.
그것이 쿄우와 그리고 나 자신에게 한「약속」이니까.

12년 전, 예고에도 없던 금환일식으로 인해 나의 왼쪽 눈은 느닷없이 금색으로 변해
버린데다, 두 눈은 판타지식으로 말하자면 마안이 되었다. 쿄우가 나온 것은 부모가
죽고 나서였고, 그 전까지 계속 자고 있었다고 하니 금환일식의 영향은 아니었다. 나
의 마안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을 때가 된 사람의 목에「검은 띠」가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그것」이 보인 상대는 왜인지는 몰라도 자연사로 죽은 사례가 없었다.

어느 날, 부모의 목에 평소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검은 색의 띠가 보였다. 그것은 어
두운 기운이 풍기는 것 같았으며, 그 형상은 마치 사신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
을 단순하게 착각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부모를 저승길로 보냈다.

그리고, 그 날 밤. 부모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운이 없게도 고갯길에서 급커브를
돌다가 마주보던 트럭과 정면충돌을 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운이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죽음’이란 것을 알고 두려웠다.


──── 아니, 솔직히 좋았어.


유일하게 그 부분에 관한 기억만은 잊혀지지 않았다. 아니, 잊혀질 수 없는 것인가.
부모가 죽고, 나는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고아원 출생이였기 때문에 친가
쪽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외가쪽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을
반대하셨고, 결국 부모의 연을 끊으면서까지 결혼을 강행했던 것이다. 이제 5살인
아이 혼자 살기는 무리가 있었지만, 어머니와 친하게 지내셨던 수희조 삼촌 덕분에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 삼촌에게서 들은 내용이다.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사쿠라이 에이이치’로 살고 있다.
난 인간에겐 헌신적이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서 인간따윈 죽여버리고 싶었다.
정체(停滯)되어 있는 세계보단 무질서(Chaos)가 좋았다.
이런 나를 어떻게 바라 보느냐 따윈 관심 밖의 예기, 결국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뿐.
나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과 다른, 말 그대로 이상(異常)을 원했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천둥소리와 섬광이 몇 번 교차되었다.
본격적으로 빗줄기가 퍼붓기 시작한다.


──── 비는 조용히,「나」라는 가식의 존재를 씻어 내리고,
             진짜「나」의 존재를 비난 하면서, 우울하게, 슬프게「나」의 몸을 적셨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10시가 넘어섰다. 그녀의「자살」로 인해 경찰의 취조를 받은
탓에 평소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달도 보이지 않는.. 칠흙같이 어두운 밤 거리.

희미한 달빛과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
이미 검게 변한 하늘은, 별빛과 달빛조차도 삼켜 가고 있었다.
오늘도 힘을 잃어가는 그 불빛에 의지하며 놀이터 앞을 지났다.
계절은 여름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늘 밤은 쌀쌀해서 조금 기분좋았다.

낮에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이 거리지만,
밤에는 최근 일어나는 실종사건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다.

물론 해가 지고 밤이 되니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수많은 전등과 가로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그토록 많은데도「그 장소」는 점점 침울하게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그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의 어둠이 아니었다. 나는 무엇인가 보이지않는,
빛을 빨아들이는 무엇인가가「그 장소」를 뒤덮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인현신과 처음으로 만났던 바로 그 장소. 발걸음을 멈춘다. 뭔가가 있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주변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듯이 움직이고 있다.
이 칠흑 속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뭔가가..

평소같으면 그저 평범한 풍경이지만... 무언가가 어긋나있다.
모순되어있는 것, 이질적이고, 또 이 세상에 어긋나있는 ‘그 무엇’.

놀이터 중앙에 조용히 자리잡은 검게 빛나고 있는「문」.
평소라면 신경쓰지 않고 집으로 갔겠지만... 왠지... 신경쓰였다.
그것은 마치 나를 부르는 듯이 이끌고 있었다.

“아아.. 할 수 없지.”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놀이터’로 이동했다.

처벅.
처벅.
처벅.
처벅.
처벅.
처벅.

“음? 이것은…?”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검게 빛나는 문.
그것은 예전에 어디선가 본 기억이 들었다.
그래. 전에 인현신이 보여준 문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
하지만, 전에 봤을 때는 검은 빛을 띄고 있지 않았을 텐데?
인현신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이 문을 지나「어딘가」로 갔기 때문이겠지.

“과연 이번에는 어떨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두근!

뭐, 뭐지? 이 기분 나쁜 감각은?! 제길, 뭐냐. 나를「거부」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없어.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이건 뭔가 착오가 생긴 것이다. 그래,「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야.

“…녀석이 한 것을 내가 못할 리가 없어!”

나는 아까보다 힘을 세게 주어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철컥!

후후..그럼 그렇지. 열리지 않을 리가 없지. 아까 전의 감각은 단순한 착각이다.
아무래도 좋다.「잠시」후면 돌아오게 될테니. 어차피, 인현신 녀석도 자주 문을
넘었었는데 나라고 못할 것은 없다. 이건 일종의「게임」이다. 난 지지 않아.

척.
척.

“후후후후.. 좋아. 이제 빌어먹을 현실세계와는 잠시「이별」이다.”

화악!

문을 넘어서는 그 순간, 나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잘왔다. 12년 전 나의 힘을 이어 받은 인간의 자식이여.」


우우우웅-

소리다.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희미했던 정신이 서서히 깨기 시작했다.

“음? 여기는 대체….”

도착한 곳은 칠흑같은 어둠으로 가득찬 공간…이었다.

주변이 어둡다.
아니-, 어둡다라기 보다는,
불쾌하다-.

무언가 지독한게 느껴진다. 기운이 느껴진다.


──── 나는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걸까.


이곳은 어디일까?
이곳의 끝에 다다렀을 때 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왠지 아무 두려움도 들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상황.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것은 분명 꿈이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확신감이 든다.


──── 내 주위에는 오로지 어둠만이 감싸 쥘 뿐이었다.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칠흑의 빗속에서의 빛은 또 하나의 ‘사치’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설령 그 빛이 다가와 이 어둠을 비춘다고 해도 어둠 그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단지 ‘어둠은 없다.’라는 믿음만을 강하게 줄 뿐이다.

이런 어둠, 너무나 익숙하다.
그렇게 어둠을 싫어했는데,
그렇게 어둠을 무서워했는데,
그렇게 어둠을 증오 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왜────


────「나」라는 존재 자체가「어둠」이기 때문일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어둠이 오히려 나를 즐겁게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난 커다란 기쁨을 느낄 뿐이었다.

언제부터일까? 내가 이 알 수 없는 기분에 감싸여 이곳을 걷고 있던건.
최초에 느껴지던 위화감은 지금에와선 선명한 기운이 되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을 걷는 듯한...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보인 또 하나의 커다란 문.
허나, 그것은 보통의 문과는 달랐다─기분 나쁠 정도로 검고, ‘눈’이 새겨져 있었다.

-그건 나락(奈落)으로 가는 문이다. 손을 댄다면 너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넌 가겠는가?

모습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갑자기 들린 그 목소리는 머릿속이 웅웅거릴 정도로
우레처럼 무겁고 낮은 울림을 지녔다.

“…너는 누구지?”

-네가 어둠에 가까운 ‘존재’라면 나를 만날 수 있겠지. 기다리고 있겠다.

“검은 문은 나락의 문, 인가. 뭐, 아무래도 좋겠지.”

그러다 문득 검은 문의 옆에 있는 비석의 존재가 나의 눈에 띄었다. 척보기에도 꽤나
오래 전에 쓰여진듯 자욱한 먼지로 가득했다. 나는 손으로 먼지를 툭툭 털어 비석의 내
용을 읽기 시작했다.

『용의 힘과 권의를 받은 불사의 몸. 그 각인은 666.
  그 이름은 ‘묵시룩의 야수(아포카 리프티크 비스트)’
  그가 나타난 것은 오래전의 일. 하지만 그의 모습은 아무도 알수 없는 것,
  그리고 그 자는 지금 바로 여기에 봉인되어 있다.』
라고 적혀진 글귀.

그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뜨겁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두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어서 써있는 글귀를 계속 읽었다.

『그의 힘은 무한(無限)하며 그 무한함은 모든 이의 힘을 앗아갈수 있는 데에 있다.
  그는 혼돈(Chaos)을 구성하는 어둠의 존재. 그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어둠에 가까운
  존재(存在)와 이세계(異世界)를 연결시킬‘문’이 필요하다.
  또한 무(無)로 도달할 수 있는 2개의 열쇠(Key)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여겨졌다.
그냥 여기를 떠나가면 영영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순간, 검은 문이 갑작스럽게 열렸다. 아니,「그」가 ‘열어준 것인가.’
빛이 닿지 않는 방의 깊은 곳은, 내 눈으로 봐도 어둠에 가려있어 건너편을 볼 수 없었다.
몇 발자국 앞조차 분간할 수 없는 어둠.
단지 그곳에 압도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 사실만이 강하게 전해져왔다.

지금 내 앞에 높여진 저 문을 지나는 순간. 그 순간. 분명 내 일상은 변해 버릴 것이다.
일말의 두려움.. 그것은 일상에서의 일탈.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분명히 느껴진다.
저 문을 넘어서는 순간 내 일상은 끝이라고,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다고,
그렇지만 그런 두려움과 관계 없이 내 발걸음은 문을 향해 나아간다.
다만 걸어 갈뿐이다. 나를 부르는 저 소리를 따라서...

“어이! 어차피 보고 있겠지! 대답해!”

고여있는 이 방의 공기를 가르며, 어둠보다 깊은 암흑이 형태를 이루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부르다니 배짱 한번 좋군. 그래, 무슨 용건이지?

“인현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넌 ‘이곳’으로 오기 위해 ‘문(門)’을 통과했다. 가족도 미래도, 모두 버리고 말이야.

“하지만, 난 내 의지로 이곳에 왔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그럼 대신에 무엇을 얻었지? 넌 가족을 버리고, 미래조차 버렸다.
뭐든 버리기만 한 네 마음은... 텅 비었어. 이 방처럼 말이야.
그래, 마음도 버렸지. 네 텅빈 마음에 남아있는 건 버리지 못한 어둠 뿐이다.

웃기는 소리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버려? 네놈이.. 네놈이 뭘 안다는거냐!
젠장, 그가 육체만 가지고 있었더라도 한대 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헛소리 마!”

-크크크... 정말 그럴까? ‘그 여자’가 죽었을 때 너는 무슨 생각을 했지?
그리고, 네가 문을 넘기 전 정말로 인현신을 만나고 싶었나?

“그걸 네가 어떻게?!”

-너는 12년 전, 부모가 사고로 죽기전 그들에게서 ‘죽음의 고리’를 보았다.
하지만, 너는 그것을 환각으로 생각하고 말을 하지 않았지. 결국, 그날 밤 너의 부
모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너는 자신이 부모가 죽을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도,
그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때? 내말이 틀렸나?

빌어먹을 노릇이지만 그의 말은 하나도 틀린 부분이 없다.
나는 뭐라 반박을 하려 했으나,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큭...”

-너는 금환일식이 일어난 그 날부터 이미 나의 힘의 일부를 이어 받았다. 그래,
‘문과 문사이의 경계를 조절하는 능력’과 사람의 죽음을 보는 사안(死眼)을 말이지.
예지몽이라는 어중간한 형태로 나타나긴 했지만, 어둠에 물들기엔 충분했지.
설마, 네가 아직도 ‘평범한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던 거냐? 큭큭큭.

그가 한 말을 이해하는 것을, 뇌가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당혹감의 표정을 짓고 있을 나를 향해 내려온 목소리는,
영롱하면서도 어딘가 즐거운 듯한 느낌을 포함하고 있었다.

“나는..나는..”

-어둠을 받아들여라. 어둠은 네 무기가 된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곤란해.
거부하지 말고, 어둠을 받아들여라!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순간, 나의 뒤편─정확히는 문 너머에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대단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고성(高聲)의 울림이었다.

“뭐, 뭐야? 방금 전의 괴성은?!”

-쳇, 탈주한 ‘키메라(Chimera)’가 이곳까지 당도한 것인가. 골치아프군.
지금은 육체도 없으니 힘을 쓸 수도 없고….

키메라? 그게 뭐지?
하지만 나는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할 시간따윈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르르르!

그리고, 그 눈앞에서 나는 발견했다. 거대한 무언가가, 눈앞에 서 있었다.
참고 있는 숨은 진작에 뱉어서, 지금은 연기를 들이마시며 기침을 내뱉고 있다.
이대로는 곧 질식사. 그런 눈앞에, 그 거대한 것이 서 있었다.
그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그런 이계(異界)의 존재.

이전에 느낄 수 없던 공포(恐怖)가 나를 사로잡았다.
무섭다.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다. 눈 앞의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나의 힘 따위로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확실한건 지금 이것은 도저히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 뿐이다.


──── 도망치라며, 마음 속에서 외치고 있다.


난생 처음 느껴본다 싶을 정도로 강력한 압박감. 나는 자신이 떨고 있음을 발견했다.
다리에 맥이 풀려 움직였다간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개죽음을 당하긴 싫었다. 뒤돌아서서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어디로? 뒤돌아서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확인해 버린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삼촌도 없고, 친구도 없다.
내가 의지할 것을 전부 잃어버린 세계에, 자신이 내던져졌단 사실을 확인해 버린다.
그렇기에, 눈 앞의 존재에게 덤벼들었다.


──── 하지만 나는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젠장, 제기라알-!!!”

나는 짐승이 울부짖듯 소리치며 괴물(怪物)에게 달려든다.
알고있다. 이건 기합따위가 아니다. 비명이라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확실한 죽음이 기다릴 뿐.
그렇다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에 건다.

이길 수 있다는 상상따윈 논외(論外).
자신이 어떻게 패배할 것인가, 등의 상상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는 것은 죽음. 절대의 죽음에 대한 환시(幻視).
‘그것’의 팔이 한번 휘둘러지면,
이 세상에서 사쿠라이 에이이치가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그만둬! 지금의 네 힘으로는 저녀석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거냐?!

퍼억!

“크헉!”

쓰라린 통증을 채 전해지기도 전에 뭔가 둔탁한 충격이 정수리를 때렸다.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아... 기분이 나쁘다.
피가 역류하는 고통. 그대로 속에 있는 모든것을 토해내고 싶다.
아아..... 고통스럽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곧 거센 통증과 뼈를 접지르는 충격이 옆구리와 복부, 뒤이어 얼굴에 느껴졌다.
나의 몸이 허공을 날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잃는 듯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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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후기>

0화 下편은 사정상 2개로 쪼개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무려 A4용지 29장(먼산)이나 나가는 관계로 그대로 올릴 수는 없었기에;;

이번편은 '세계의 적'과 관련깊은 인물인 '묵시룩의 야수' 씨가 등장합니다.
아마 등장 인물중 2~3위로 강력한 캐릭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만..
육체가 없으시니 말짱 헛 꽝이셨군요(끌려간다)

下편(2)는 아무래도 내일 쯤 되어야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이대로 한편 더 올렸다가는 도배가 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