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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DESTINY」 運命의 系統樹

2006.02.27 13:20

갈가마스터 조회 수:135 추천:3

extra_vars1 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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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르르릉.

  천둥소리.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싸움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겨진 것은 잔혹한 도시의 잔해와 하늘을 뒤덮은 회색 얼룩뿐. 엘트리움의 검은 빛은 산 자 죽은 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비….”

  유이는 어깨로 떨어진 작은 물방울을 어루만지며 싸늘하게 식어 있는 가로드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시뻘건 화상과 걸레같이 너덜한 전신, 주변에 널린 파편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역시 SIA 1호와 싸울 때 본 폭발에 의한 게 분명했다.

  “가로드 씨.”

시신의 곁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유리는 초점 없이 흐려진 흑색 눈동자로 유이를 올려다보며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거짓말. 이거 거짓말이죠? 그렇죠? 조장!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유리는 유이의 검은 망토 끝자락을 움켜쥐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기 싫은 그 잔혹한 현실을 유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도시의 묘지 속을 맴돌 뿐이었다.

  쏴아아. 한 방울이던 빗방울은 이내 두 방울 세 방울 늘어나 어느새 굵은 장대비로 변해 유이의 전신과 고개를 숙인 유리의 등을 두드렸다. 끊임없이 세차게 쏟아지는 빗물은 어느새 회색 잔영만 남은 도시의 슬픔을 가득하게 적셔주었다.

  “살아온다고 했는데. 나랑 약속했는데.”

  오열. 유이의 발치에 머리를 기대고 위태롭게 일렁이던 검은 눈동자가 흘러내리는 빗물에 섞여 무너진 둑처럼 눈물을 쏟아낸다.

  “…….”

  유이는 왼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오열하는 어린 마왕의 머리를 조용히 품에 안아주었다. 그녀의 품 안에서 마치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울부짖는 유리를 느끼며 유이는 가로드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울컥하고 오래전에 망각한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애써 그것을 억눌렀다. 그러나 가로드에게서 눈을 돌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용병인 가로드에게 있어서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단순하며 어이없는 죽음. 늘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어 위태위태하게 살아왔던 사람이 이렇듯 가버리자 머리회로는 그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바보같은 사람.’

  주륵. 무표정한 그녀의 백지같은 볼을 타고 흐르는 그것은 빗물인가 눈물인가, 그걸 아는 것은 본인뿐이리라.





「DESTINY」
運命의 系統樹
第 28 夜. 뫼비우스.







  그로부터 일주일, 하늘은 아직까지도 죽은 이들을 애도하듯 회색빛 슬픈 얼굴로 장대비를 쏟아냈다. 빗물은 슬픔의 강이 되어 홍수처럼 대륙을 적셨고 죽은 이들의 가족을 비롯해 갈 곳을 잃은 모든 인간들의 눈물과 합쳐져 행성 전체가 비탄의 늪에 물들어 갔다. 그것은 마치 가이아나 행성이 피조물들을 대신해 우는 것 같았다.

  힘겨운 싸움이 끝나고 프리벤터를 비롯한 진마군 제1, 제3군단은 마드라엘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도시 ‘브람스’로 이동했다. 저스티스의 급습과 얘기치 못한 황금빛 괴물체의 습격 때문에 거의 괴멸 가까운 타격을 입은 진마군이었으나 콘라드 공작의 뛰어난 수완과 잘 훈련된 병사들에 의해 가까스로 부대를 유지하고 어찌어찌 이곳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브람스는 그야말로 피폐한 도시였다. 그동안 실바니아 공화국이 벌인 억지스러운 전쟁 때문인지 공화국의 제2수도라고 불릴 정도로 번화했던 브람스는 예전의 활기를 잃고 죽어가는 사람처럼 침울한 분위기였고 똑같이 사기가 저하될대로 저하된 진마군은 입성하자마자 브람스의 시청을 지휘소 삼아 공화국내에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을 재편성함과 동시에 혈맹성을 위시한 타국과의 연락망을 재가동했다.

  일주일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후우.”

  유이는 브람스 시청에 마련된 프리벤터 전용 임시 집무실의 창가에서 회색으로 얼룩진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 1 부대 ‘헬싱’은 조장 모스베라토 카나드를 비롯해 부조장 커니션 사망 등 도시 내에 남아 있던 부대원 절반이 사망 혹은 부상. 시네프스 왕국에 남아 있던 제 2 부대 ‘악즉참’은 조장 젠가 사망에 부대원 3분의 2가 느닷없이 나타난 황금빛 괴물과 마리카제 대륙의 북부지역을 초토화시킨 정체불명의 빛에 의해 전멸. ‘몰살 부대’와 싸운 제 3 부대 ‘레비아탄’은 조원 120명 부상과 사망 15. 그리고… 특무부대 ‘데스티니’는 사실상 전멸.”

  유이의 뒤로 책상에 앉아 피해보고서를 읽고 있는 발터가 짐짓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동안 발터가 받은 스트레스는 그의 수척해진 얼굴만 봐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으며 요 며칠 새 부쩍 나이가 먹은 듯 그의 얼굴엔 주름이 그득했다.

  탁. 발터는 조용하면서도 신경질적으로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아. 우리들은 사실상 모든 전투력을 잃었습니다. 임시로 헬싱과 악즉참을 합쳤다고는 하나… 대공과 젠가의 공백은 도저히 메울 수 없겠죠.”

  발터는 말하면서 유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은 묘하게 힘이 없었고 생사여탈에서 벗어난 끝없는 무기력증이 마치 처음 샷셀에 왔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끄응.”

  발터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고 힘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곳에 오고 나서 시네프스 왕국에서 온 전보는 그를 위시해 프리벤터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며 특히 유이와 마왕 유리가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마왕자인 유리를 빼고 달랑 네 명이던 부대가 졸지에 유이 혼자만 남아버린 것이다. 가로드, 글릭세르는 사망했고 카인은 행방불명되었다. 이 이상 그녀를 슬프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어쨌든 그 뒤 유이는 극도로 말이 줄어들었다. 원체 과묵한 유이였지만 일주일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가 심적으로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 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마드라엘과 함께 실바니아 공화국의 수뇌부는 전멸했고 사실상 공화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진거나 진배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이 R. 세이비어.”
  “…….”

  아니나 다를까 유이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빛을 잃은 루비빛 눈동자는 우울하게 창가를 두드리는 빗소리만 쫓았고 그 무표정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유이는 꽤나 진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엘트리움….’

  유이는 허리춤에 매달린 얼음처럼 투명하고 바다처럼 푸른빛이 도는 ‘검’의 손잡이를 쓰다듬는다. 여신의 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을 그대로 형상화한 듯 세밀하게 조각된 손잡이와 검집에 가려진 시퍼런 검날, 그 옛날 디스아스트라나간이라 불리는 유이의 쌍둥이 신검 중 하나이다. 이것을 얻은 것은 일주일 전 그 날이었다.

  ‘뫼비우스!’

  “큭.”

  유이는 그 ‘단어’를 떠올리자 신음을 흘리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건 뭔가 주박 같은 거였다. 억지로 기억을 제어하는 술법과 그것에서 느껴지는 불쾌감. 그러나 유이는 그 단어를 떠올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뫼비우스!’

  유이의 시점은 다시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
.

  일주일 전 마드라엘. 세차게 내리는 장대비 속에서 유리가 유이의 품에 안겨 오열하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 이질적인 그러나 지금 같은 회색 배경에 묘하게 어울리는 푸른색일색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머리에 깊숙이 눌러쓴 비에 젖은 청색 캡(cab)과 그 아래로 어깨까지 물결치며 내려오는 군청색 머리카락, 싸늘한 느낌의 바다처럼 깊은 푸른 눈동자와 굳게 다물어진 입술, 어깨가 뜯어진 청자켓을 걸치고 있는 다부진 어깨선과 무엇보다도 단단하고 군더더기 없는 근육으로 이루어진 팔죽지에 휘감기듯 새겨진 초록 가시넝쿨 문신이 그의 정체를 확연하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바로 사라진 저스티스의 12제, 로젠 크로이츠(Rosen Kreuz) 프레이저였다.

  “프레이저… 크로바인츠.”
  “!”

  유이가 갑자기 나타난 프레이저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그녀의 품에 안겨 울고 있던 유리가 마치 총알과도 같이 멀어졌다. 벌떡 일어나 프레이저를 노려보는 유리의 두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적의를 한 치의 거름도 없이 그대로 내뿜고 있었다.

  “저 ‧ 스 ‧ 티 ‧ 스!”

  아무리 프레이저가 전(前) 12제였고 지금은 저스티스에서 나온 몸이라지만 유리의 머리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넘쳐나는 분노를 풀 상대가 필요했고 가로드를 죽였다고 여겨지는 저스티스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순간, 유리가 왼팔을 들어 프레이저를 겨누며 소리쳤다.

  “마검!”

  화르륵! 유리가 마검을 부르자마자 왼손 약지에 껴져 있는 루비반지(Saudade of laevantine)가 길쭉한 불꽃으로 화(化)하더니 검은 광택의 마검을 생성했고 마검은 자연스레 프레이저를 겨누는 자세가 되었다.

  “유리! 그만둬!”
  “감히 본좌의 친우를…! 하앗!”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유이가 말릴 틈도 없이 마검을 쥔 유리가 프레이저를 향해 몸을 던졌다. 새하얗게 물들어가는 머리카락과 어느새 황금빛 야성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 분노라는 감정에 몸을 내맡겨 각성한 유리는 그야말로 악귀와도 같이 무시무시하게 프레이저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마검은 뱀처럼 몰아치는 물에 휘감겨 마치 용과 같은 포효를 지르며 프레이저의 목을 노리고 탐욕스럽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무표정하게 유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

  그러나 다음 순간 고꾸라진 것은 오히려 유리였다. 오른쪽 어깨를 슬며시 뒤로 빼 한끝차이로 마검을 흘린 프레이저가 검을 쥔 유리의 손목을 잡아 꺾어 순식간에 뒤로 넘겨버린 것이다. 검을 휘감은 수룡은 허무하게 빗나가 애꿎은 건물의 잔해만 뿌리 채 쓸어버렸고 자신의 돌진하는 힘을 이용당해 역습을 당한 유리는 공중에서 반 바퀴 돌며 볼썽사납게 땅에 처박혔다. 이 때 프레이저의 공격을 맞게 된다면 천운이 아닌 이상 십중팔구 죽음이었다.

  “경고다 프레이저. 그만두지 않으면 그 잘난 목을 갈라버리겠어.”

  유이가 검을 꺼내 프레이저를 겨누며 위협했다.

  “…….”

  경고가 먹힌 건지 프레이저는 유리를 향해 추가타를 날리진 않았다. 멀찌감치에선 유리가 비틀거리며 검을 지팡이 삼아 힘겹게 일어서고 있었는데 땅에 내동댕이쳐진 충격이 꽤 큰듯 싶었다.

  “으윽…. 본좌의 친우를… 그 죄는 죽음으로 사죄케 하리라!”
  “유리! 그만해!”

  이성을 잃은 상태에선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이기지 못한다. 게다가 상대가 12제라면 그건 말할 것도 없는 진리다. 그걸 알고 있는 유이가 목청이 터져라 소리치며 유리를 만류했지만 지금 그의 귀에 이 말이 닿을 리 없었다. 프레이저는 잠시 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유이의 검극과 각성한 유리를 번갈아 노려보더니 이내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푸욱 내쉬곤 멀리 떨어진 유리를 향해 가볍고 빠른 동작으로 잽을 먹였다.

  퍽!

  그러자 놀랍게도 5m가량 떨어진 유리가 샌드백 치는 소리와 함께 턱을 얻어맞은 것처럼 고개를 뒤로 크게 젖히며 날아가 버렸다. 평소의 집중력이라면 못 피할 것도 없는 가벼운 일격이었을텐데 지금의 유리는 그것조차 피하지 못했다. 반격당한 충격과 분노로 둔해진 전투신경이 이 같은 어이없는 일격을 허용한 것이다. 쓰러진 채 옴짝달싹도 안하는 것과 원래의 검은색으로 돌아간 머리카락으로 봐선 일격에 기절해버린 것이 분명했다.

  “유리! 너 이 자식!”

  탁! 유이가 그녀답지 않게 얼굴을 싸하게 굳히며 땅을 박차고 프레이저를 향해 달려들었다. 평소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냉정함을 잃지 않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가로드의 죽음에 대해 가까스로 억눌러둔 분노가 유리가 나가떨어지자 폭탄처럼 터져나간 것이다.

  유이는 프레이저가 검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목을 목표로 검을 빠르고 위협적이게 휘둘렀다. 그러나 분노로 이성을 잃은 두뇌는 전투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공격이 아니라 본능에 의한 공격을 하기 때문인지 그녀의 검은 간단히 뒤로 물러난 프레이저의 목에 작은 생채기도 내지 못한 채 허무하게 빗나가버렸다. 유이는 프레이저와 더욱 간격을 좁히며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쉭! 쉬익!

  그러나 그것은 단지 휘둘렀을 뿐이다. 연이은 공격은 쉴 새 없이 프레이저에게 쇄도했는데 정작 그의 몸을 베기는커녕 옷자락에조차 스치지 못한 것이다. 초조해진 유이는 갑자기 몸을 멈추고 짧게 기합을 터뜨렸다.

  “하앗!”

  기합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릴 정도의 중력장이 그녀를 중심으로 사방 10m에 펼쳐졌다. 아무리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곤하나 전투경험이 풍부한 유이가 프레이저의 움직임을 약간이라도 둔하게 만들기 위해 광역 중력장을 펼친 것이다. 효과는 있었는지 순간적으로 중력을 20배 이상으로 만드는 그 압력에 물 흐르듯이 움직이던 프레이저가 우뚝 멈춰 섰다. 압력이 사라지는 0.1초의 짧은 순간, 유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야말로 섬광처럼 프레이저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그러나…

  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다음 순간 두 동강난 것은 프레이저의 머리가 아닌 유이의 검이었다. 그녀의 검을 마치 손쉬운 두부처럼 깔끔하게 자른 프레이저의 수도(手刀)가 뿌연 아지랑이에 둘러싸여 유령같은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극도로 정제된 검기, 순수한 파괴의 힘을 압축해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는 그것은 강력한 중력장으로 둘러싸인 유이의 검을 두 동강낼 정도로 단단하고 또한 강력했다.

  “이, 이럴 수가….”

  두 동강난 자신의 검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유이는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 프레이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렇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상대는 한때 저스티스 12제의 일원이었다. 분노에 몸을 맡겨 대책 없이 검만 휘두르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오히려 방금 전은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한 가지 의문점이 그녀의 머릿속에 솟구쳐 올라왔다.

  “왜지? 이번 일격으로 날 두 동강 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다. 이번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는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여유롭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자신이 이성을 되찾을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유 있어 보이는 그 행동은 전투를 행하는 자에게 있어서 이미 오만하게까지 느껴졌다.

  유이의 물음에 프레이저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초에 싸울 마음이 없었으니까.”

  너무나도 간결하고 당당한 그 말에 유이가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륙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저스티스의 12제가 적을 앞에 두고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것은 쉽사리 믿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만두라는 자신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유리를 공격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유리를 공격한거지?”
  “망아지가 미쳐 날뛰면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하니까. 그걸 바랬나?”

  프레이저의 간단한 대답을 들은 유이는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분노로 이성을 잃은 유리를 죽이지 않고 막는 길은 기절시키는 방법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이곳에 나타난 목적을 말해보실까? 설마하니 관광하러 온 것은 아닐테고. 저스티스에서 물러난 이상 우리와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을 텐데.”
  “글쎄….”

  유이의 물음에 그렇게 뒷말을 흐린 프레이저가 잠시 무심하게 가로드를 내려다보며 실소했다. 보일듯 말듯 희미한 그의 미소엔 허무에 찬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과거에 받을 빚도 있어 잠시 들렸는데. 아무래도 돌려받긴 그른 것 같군.”

  꽤나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가로드에게서 시선을 땐 프레이저는 다시금 얼굴을 굳히고 몸을 돌려 하얗게 쏟아지는 비속으로 발을 옮겼다.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느릿한 그의 발동작에서 방랑자의 자유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그의 옷 등에 새겨진 장미에 둘러싸인 십자가가 묘하게도 그가 등에 이고 있는 짐의 무게를 알려주듯 묵직하게 다가왔다.

  “즐거움이 하나 사라졌군. 결말을 짓기 전에 꼭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시끄러운 빗소리를 뚫고 유이의 귓가에 들려온 낮고 허망한 목소리는 장난감에 흥미를 잃은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이 느껴졌다.

  “결말? 즐거움?”

  유이는 처음엔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어느 순간 자신의 무기력한 옛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무기력한 것과 허무한 것을 비교한다는 건 언뜻 어불성설 같아 보여도 생각해보면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둘 다 살아간다는 것에 흥미를 잃은 자의 말로로서 그들에게 빛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긴다는 것뿐이었다. 유이는 그 빛을 자신의 조원들에게서 얻었다. 가로드가 죽고 유이와 프레이저가 얻은 상실감은 미묘하게 다르지만 그 근본은 비슷한 것이었다.

  “……!”

  우뚝. 문득 프레이저가 발을 멈추고 정면을 노려본다. 소리 소문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소년 하나가 그의 앞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킥. 킥.”

  짧은 금발에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소년은 마치 빨간 물감이라도 튀긴 듯 노랗고 펑퍼짐한 반팔과 깃털처럼 새하얀 반바지 이곳저곳에 핏물이 튀겨 있었다. 소년의 상의와 하의, 그리고 오른쪽 팔을 대신하는 기계의수엔 빗물에도 씻기지 않는 시뻘건 피가 마치 희생자의 저주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 피를 바라보고 있자니 유이는 어쩐지 가슴이 욱하고 아파오는 기분 나쁜 통증을 느꼈다.

  “…넌 분명 EL 13호(EL No. Thirteen)라고 했던가.”

  유이는 그 소년이 누군지 익히 알고 있었다. 늘 SIA 1호와 같이 행동했던 재수 없는 꼬맹이…. 소년은 바로 ‘EL 13호’라는 괴상한 이름을 가진 녀석이었다.

  철컥.

  문득 피에 물든 EL 13호의 왼손이 뒤춤에서 낯익은 검을 하나 꺼내 쓰레기 버리듯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더러운 진흙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검은 가히 예술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름답고 또한 고귀했다. 조각가가 혼신을 다해 만든 유리세공품처럼 세밀하게 다듬어진 손잡이와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을 요사스럽게 내뿜고 있는 푸른 검신, 그 예술품을 더럽히듯 이곳저곳에 이물질처럼 늘러 붙어 있는 피가 빗물에 녹아 날을 타고 부서진 타일을 붉게 물들여간다.

  “!”

  유이는 순간 경악과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그건 바로 SIA 1호가 가지고 있던 신검 ‘디스 아스트라나간’이었기 때문에 경악했고 그것을 저런 식으로 다뤘다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이 자식….”

  프레이저의 어깨 너머로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유이를 즐겁게 바라보던 EL 13호가 반갑다는 듯 미소 지으며 건들건들 손을 흔들었다.

  “헬로-. 이걸로 세 번째 뵙는군요. 세이비어.”
  “…….”

  자신을 무시하고 유이에게 인사를 하는 EL 13호의 모습에 기분이 나빴는지 프레이저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프레이저는 그 꼬마를 결코 호의적인 눈빛으로 보지 않았다. 하긴 수 년 전만해도 저스티스의 일원으로 자신이 ‘12제’보다 강하다고 입을 놀린 가볍고 쓰레기 같은 녀석이다. 기분 좋게 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그를 싫어하는 것은 그가 ‘뫼비우스’의 실험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또 무슨 목적이냐 EL 13호.”

  프레이저가 제법 위협적인 어조로 묻자, 소년은 건방지게 손가락으로 황금빛 팔찌를 빙빙 돌리며 도발적인 어조로 프레이저에게 말했다.

  “당신은 빠지셔, 로젠 크로이츠. 난 저 뒤에 있는 레이디를 만나러 온 거거든. 레이디를 기다리게 해서야 신사의 도리가 아니지.”
  “여전히 건방지군. 쓰레기 같은 놈.”
  “그건 피장파장이라 여기는데? 엎치나 뒤치나 너나나나 다를 게 없는 쓰레기야.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인간을 사람들은 뭐라고 부르지? 킥.”

  순간 프레이저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식어버렸다. 고요한 분노 그 이상의 뭔가를 향한 철저한 증오가 검기가 되어 그의 주변에서 흉풍(凶風)처럼 몰아닥쳤다. 그러나 폭풍같던 검기는 금새 순풍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았고 금방 아무렇지도 않게 흥 콧방귀를 뀐 프레이저가 조소어린 시선으로 EL 13호를 바라보며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EL 13호의 곁을 스치며 지나가는 말투로 속삭였다.

  “네 녀석의 주인에게 전해라. 나와 ‘쿤’을 농락한 것을 조만간 갚아주겠다고.”
  “킥킥. 자신이 죽인 아버지의 복수라고? 좋지. 하지만 몸성히 돌아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 때가 되면 우선 네 목부터 비틀어 따주지. 기대하고 있어라.”
  
  프레이저는 그렇게 천천히 회색 폐허 사이로 사라져갔다. 침묵하던 EL 13호가 입을 연 것은 프레이저가 완전히 비안개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자, 그럼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세이비어.”
  “네 녀석이랑 할 얘기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요? 물건을 돌려주러 온 사람에게 너무 야박하게 구시네.”
  “물건을 돌려줘? …설마!”

  유이는 진흙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바라보며 ‘설마’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적일 터인 자신에게 이것을 돌려줄 리가 만무하다고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그 모습을 기쁜 듯이 바라보던 EL 13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뱀 같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쿡쿡. 당신도 봤죠? 그 황금빛 사자…. 그 녀석들, ‘엘트리움’의 강림 때문에 우리 ‘뫼비우스’의 어르신들은 더 이상 ‘당연하게 여겨지는 운명의 흐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엘트리움? 뫼비우스? 도대체 무슨 소릴… 큭!”

  유이는 뫼비우스의 이름을 되새기는 순간 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불쏘시개로 뇌를 쿡쿡 찌르는 듯한 아픔. 전기가 뇌를 불태우는 듯한 고통. 그 모든 통증이 뇌를 휘저으며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유이는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끊임없이 자문하는 그녀의 모습을 EL 13호는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EL 13호는 문득 자신의 기계 의수에 뭍은 피를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SIA, 불쌍한 모조품. 쿡쿡.”

  슥. 혓바닥으로 빗물과 섞인 피를 핥는다. 그 역겨운 모습과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현기증이 합쳐져 유이의 목구멍에서 위액이 솟구쳐 올랐다. 배 속에 있는 걸 모조리 게워냈지만 역겨움은 그치지 않았다.

  “크윽.”
  
  아픈 머리를 쥐어짜며 힘겨운 신음을 내뱉고 있는 유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EL 13호가 잔인하게 웃음지으며 말했다.

  “…결국 모조품은 진품을 이길 수 없다는 거죠. 하지만 당신은 과연 진짜일까요? 유이 R 세이비어.”
  ‘뭐, 뭐라고?’

  힘겹게 입을 오물거리며 반문을 하려했지만 입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내가 진짜냐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털썩! 의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고 결국 유이는 힘없이 진흙바닥에 쓰러졌다. 전신의 힘이 빠져나가고 모든 감각이 그녀의 뇌와 연결된 신경을 차단해갔다. 그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EL 13호의 잔학한 미소를 보는 것을 끝으로 그녀의 뇌는 사고를 정지했다. 모든 것이 정지된 암흑 속에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EL 13호의 목소리가 전파의 잡음같은 것과 섞여 들려온 것 같았다.

  -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SIA type zero.

  곧 수신이 중단된 라디오처럼 그녀의 오감은 모든 신경을 차단했다. 몸을 적시는 비의 차가움도 귓가에서 맴돌던 EL 13호의 숨결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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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길어졌심! 이런 젠장;; 요즘 왜 이럴까요?

생각해보면 무지 짧은 내용인데 제 의사와는 관계없이 글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무슨 저주인지 모르겠심;; =ㅅ=;

여튼 짜잔~~입니다~ 짠~ 짜라잔잔~

프레이저 등장 경축~ 케케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