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DESTINY」 運命의 系統樹

2006.02.16 13:11

갈가마스터 조회 수:105 추천:2

extra_vars1 난입 
extra_vars2 25(上) 
extra_vars3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수도 마드라엘은 지금 지옥의 불구덩이같은 형상이었다. 이미 땅거미가 자욱하게 내려앉을 시간이었건만 도시를 불태우는 용암같은 불꽃에 지금 하늘은 핏빛처럼 붉었다. 반쯤 무너진 성벽은 성을 방어한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정반대로 안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짐승보다 못한 핏덩이들의 질서 없는 행군이 살아 있는 생물들을 향해 혼돈의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살아 있는 자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혼란 속에 도시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촛농처럼 녹아내린 형체없는 괴물들의 파도 속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살아 있는 먹이들이야 말로 수도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괴물들이 아직까지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수도 외부를 둘러싼 유리 휘하의 진마군은 그 괴물들이 밖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포위진을 펼치고 있었다. 밀집 방형을 취하고 성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의 중간중간엔 수백 명의 마법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용도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 넣고 있었다. 병사들은 이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도시를 봉쇄하기 위해 밀집대형과 포위대형을 겸한 진을 펼치고 있었다.

  이 진마군을 이끌고 있는 것은 바로 콘라드 하이드레드 공작이었다. 뒤로 한 대 묶은 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그 사이사이 하얀 선처럼 새겨져 있는 새치, 옅은 황금빛의 날카로운 눈동자와 각진 턱에 두툼하고 멋들어지게 정돈된 콧수염까지. 영웅의 풍모가 물씬 풍겨져 나오는 사람, 그가 바로 유리를 도와 진마군을 이곳까지 이끌고 온 장본인인 콘라드 하이드레드 공작이었다. 그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장의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는 과감함은 아무리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섞여 있다지만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실바니아 공화국군들이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결국은 각개 격파, 궤멸되어 삽시간에 수도까지 진마군에게 넘겨주는 결과가 되었다.

  “크흠….”

  윤기 나는 흑색 갈기를 자랑하는 준마의 등에 올라타고 있는 콘라드 공작은 불타는 마드라엘을 바라보며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땅을 짚고 마법진을 새겨 넣고 있는 유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것으로 정녕 괜찮으신 겁니까, 유신 공.”

  유신은 눈을 감고 입으로는 쉴 새 없이 고대의 잊혀진 언어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영창하는 주문이 진행될수록 대지를 타고 흐르는 황금빛의 마법언어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퍼지며 저절로 땅에 마법진을 설치했고 그것은 그대로 다른 곳에 있는 마법진과 연결되었다. 지금 유신과 마법사들이 마드라엘 주변에 새겨 넣고 있는 주술은 모두 666개, 이 모든 것들이 회로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결되는 것은 모두 유신에게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마법진을 그리며 쉴 새 없이 다른 마법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지 잘 알고 있는 콘라드 공작은 유신의 대답이 없자 미련 없이 수도 쪽으로 눈을 돌리며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말씀하시려는 바가 뭔지 압니다. 하이드레드 공.”

  문득 유신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는 얘기는 마법진의 설치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교한 마법진을 새기는데 사방에 명령을 내리면서 말대답까지 하다니 다른 마법사들 같으면 꿈도 못 꿀 재능이었다. 이것이 바로 천재란 걸까? 콘라드 공작은 쓸데없는 생각에 잠시 쓴웃음을 짓곤 다시금 유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유신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땅을 짚고 마법진을 생성하고 있었다. 바람결에 그의 눈송이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흔들거리며 그의 평온하고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마법진이 발동되면 진 안의 모든 생명체가 절명한다는 사실을 유리는 전혀 모르고 있죠. 나중에 유리가 상처받을 것이 두려우신 겁니까, 하이드레드 공작?”

  그렇다. 유리는 지금 이 마법진이 마드라엘 안에 들끓고 있는 ‘괴물’들만을 처치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는 지금 프리벤터와 함께 이 진이 완성되기까지 시간을 벌고 또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드라엘 안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마왕인 그가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분노할 지 유신과 콘라드 공작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물론 프리벤터를 이끌고 있는 발터에게만은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적당한 때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 그가 프리벤터와 유리를 데리고 저 도시를 빠져나올 것이다. 발터는 썩 내켜하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유신의 계획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하이드레드 공, 이게 최선입니다. 우리들의 전력으로 저 도시의 인구만큼 많은 괴물들을 처치하기 위해선 엄청난 시간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검과 방패는 앞으로 있을 다른 전투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보존해야만 하죠.”

  그렇다, 희생을 최소화하고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것이 전략의 기본이자 용병술의 기초였으며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비록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 권할 것은 아니었지만 세 수 네 수 앞을 바라보고 진마국의 미래를 생각해보았을 때도 이런 식으로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판단이 우선되었다.

  하지만 생명을 가장 중요시하는 유리는 분명히 반대했을 것이고 부득이 거짓말로 그를 속여야 했다. 이미 지옥으로 변해 꿈틀거리는 도시와 몇 되지도 않는 소수의 생존자들을 위해 병사들을 헛되이 소모할 수는 없었다.

  “으음….”

  콘라드 공작은 신음을 깊게 흘리며 도시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속으로 이제 곧 사라질 무수한 생명들을 향해 깊은 조의를 표하며 최고 지휘관의 면모답게 감상에 빠지려는 자신을 추스르고 앞으로 자신과 진마군이 해야 할 일에 초점을 맞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마국의 미래다. 이런 일에 일일이 마음이 약해졌다간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어때? 야경이 참 멋지지?”
  “!”

  상념에 빠진 것도 잠시,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콘라드 공작과 유신은 급히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노려보았다. 병사들의 한 복판, 그 중심에 붉은 댕기머리를 양쪽으로 귀엽게 딴 8~10세 정도의 여자아이가 붉은 소용돌이무늬의 하얀 막대사탕을 빨며 여유롭게 서 있었다. 분명 눈에 심하게 띠는 외모인데 병사들은 그것을 이제야 발견한 듯 당황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검을 뽑아들었다. 지휘부를 보호하는 최정예 친위대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실력,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이는 이 대륙에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였다.

  “네 놈은 누구냐!”

  콘라드 공작은 급히 말머리를 돌리며 애병인 2m 마상검(馬上劍)을 꺼내들었다. 평소라면 눈치 채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쾌검으로 바로 목을 떨궈버렸을 그였지만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콘라드 공작은 쉽사리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너는….”
  “유신, 아는 사람인가?”

  유신은 땅을 짚은 손을 떼지 않은 채 소녀를 주시하며 말했다.

  “사우전드 니들(Thousand needle)…. 엘리스 카리나.”
  “저스티스!”

  콘라드 공작은 엘리스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리자마자 번개같이 말고삐를 단단히 붙들고 장검을 옆으로 비스듬히 내려 공격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남방의 검호’ 살라딘과 더불어 최강의 검술을 가지고 있는 그라지만 12제라면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헤에, 전 사천왕이셨던 어벤져(Avenger) 퀘브레 크리올란님께서 저 같은 말단을 기억해주시다니, 이거 황송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마마. 키킥.”

  엘리스 카리나는 그 커다랗고 붉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디서 본 듯한 예식을 흉내 내며 있지도 않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드는 듯한 포즈를 취한 그녀는 이내 조소를 띠며 사탕을 입에 물었다. 그녀가 혼자라는 것을 생각한 콘라드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엘리스에게 말했다.

  “혼자서 여기까지 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나보군. 12제.”
  “어머? 잘 생긴 오빠에게 죽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말야….”

  딱! 엘리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히 손가락을 튕겼다.

  “크아아악!”

  그녀가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그녀 뒤에 서있던 병사 두 명이 돌연 붉은 피를 사방으로 튀기며 산산조각으로 찢겨졌다. 비산하는 피와 살점의 중심엔 백짓장같이 새하얀 장발에 창백한 얼굴을 가진 중년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실로 꿰맨 입술, 온통 흑색과 백색으로만 이루어진 남자. 그는 바로 ‘고요한 죽음(The Silent Death)’이란 아명을 가진 저스티스 제 1부대 ‘Ri'의 간부, 헬무트였다.

  “…….”

  헬무트가 양 손에 들고 있는 검은 모두 여섯 자루, 손가락 마디마다 갈퀴손처럼 들려 있는 여섯 자루의 검은 방금 전에 두 명의 사람을 도륙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방울의 피도 묻어 있지 않았다.

  “쿡쿡쿡….”

  엘리스는 자신들을 노려보는 이들의 긴장 섞인 시선을 느끼며 한 번 씨익 웃어 보인 뒤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아직 죽기엔 내가 너무 젊잖아, 안 그래? 곰탱이 녀석은 너무 눈에 뗘서 이 녀석을 베리도트한테 빌려왔지. 이 녀석의 실력은 말로 안 해도 알거라 믿어. 이젠 어떻할래? 배신자 나으리?”

  유신은 식은땀을 흘리며 엘리스와 헬무트를 노려보았다. 8번째 12제와 12제급의 대인 전투력을 가진 간부. 콘라드 혼자 저 둘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마법진은 완성되지 않았고 지금 와서 손을 땔 수 있는 그런 수준의 마법도 아니었다. 지금 손을 땐다면 필시 저주로 돌변한 마력의 역류 때문에 중상을 입을 것이 뻔했고, 자신은 살아남더라도 나머지 마법사들은 십중팔구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되면 저 도시를 가득 메운 괴물들을 막을 길이 요원해진다.

  “아! 맞다! 그러고보니 지금 시간이 몇 시지? 헬무트?”

  문득 아주 중요하고 유쾌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 엘리스가 호들갑을 떨며 헬무트에게 물었다.

  “…….”
  “아, 맞다. 넌 말을 못하지. 에잇! 쓸데없이 왜 입을 꿰매가지곤… 쯧쯧.”

  콘라드 공작과 유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엘리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문득 기대 받고 있다고 착각했는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주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있지, 유신. 정말 놀랄 만한 일이야. 듣고 싶어? 응? 듣고 싶지?”

  어린 아이가 즐거운 비밀을 숨기고 뜸을 들이듯, 잠시 동안 유쾌하게 웃으며 키득거리던 엘리스가 장난스럽게 손가락 사이에서 막대사탕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을 때였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귀청을 찢는 기괴한 귀곡성과 함께 서쪽 방면의 병사들 너머로 시꺼먼 안개와 함께 음습한 푸른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 푸른 불꽃과 불길하기 이를 데 없이 어두운 흑마술의 기운, 그리고 그 끔찍한 비명소리를 유신은 알고 있었다.

  “플뢰레!”

  절망의 연주자(Das Musiker der Verzweiflung), 요한 베르캠프가 사역하고 있는 ‘소리와 죽음의 악마’, 플뢰레.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여 없애는 그 괴물이 지금 나타난 것이다. 비록 30분 정도가 플뢰레가 날뛸 수 있는 한계였지만, 30분이면 병사 2만을 죽이고도 남을 정도의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상급 악마 플뢰레였다. 검은 안개와 같은 몸과 푸른 불꽃으로 이루어진 두 손을 가진 플뢰레는 그 손을 휘둘러 한 번에 수백이 넘는 병사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산산조각으로 파괴해 버리며 날뛰었다. 그리고 그 뒤엔 열정적으로 바이올린을 키고 있는 검은 방독면을 쓴 꼬마아이, 요한이 있었다. 마치 주변의 살육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소년은 무언가에 홀린 듯 활을 들고 미친 듯이 바이올린을 켤 뿐이었다. 어떨 때는 격정적으로 또 어떨 때는 잔잔하게…. 소년의 연주가 이어질수록 플뢰레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듯 병사들을 도륙했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하하하 이런 벌써 날뛰기 시작했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저것만이 아냐. 전 사천왕인 너라면 알겠지? 용자(Brave man) 레이와 녀석이 이끄는 제 2부대 ‘몰살 부대’를.”

  펑! 이번엔 마드라엘 동쪽에 위치한 부대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지축을 뒤흔드는 강력한 소음. 그러나 이건 폭탄이 터지는 폭발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제 2부대는 순수한 수인들로만 이루어진 부대로 절대 폭탄 같은 것을 쓰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쯤은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단 하나의 가능성만이 남는다. 대포 수백 발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가진 용자 레이 미스테리오의 주먹이 바로 그것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앙」

  야수가 표효하는 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에 음울하게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한동안 잠잠했던 저스티스가 이 정도의 전력을 투입하다니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악의 타이밍. 플뢰레를 묶어놓을 수 있을만한 힘을 가진 자신은 정작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콘라드 혼자서는 엘리스와 헬무트를 감당하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레이의 ‘몰살 부대’를 막을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콘라드! 신호탄을! 프리벤터를 지금 당장 이곳으로 불러들여요!”

  급한 김에 유신은 콘라드 공작의 이름을 부르며 프리벤터를 불러들일 것을 명령했으나 그 시간을 엘리스가 순순히 내줄 리가 없었고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엔 사탕과 함께 수십 개의 가시가 끼워져 있었다.

  “그 치들이 오기 전에 넌 뒈질거다! 배신자!”

  쉬식! 엘리스가 춤을 추듯 빙글 도는 것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날카로운 가시들 수천 개가 쏘아졌다. 엘리스의 특기인 숨 쉴 틈조차 보이지 않는 전 방위 공격! 그것이 지금 소나기처럼 유신과 콘라드에게 쇄도했다.

  ‘유리!’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유신은 자신의 동생 유리를 떠올렸다.





「DESTINY」
運命의 系統樹
第 25 夜. 난전, 위기, 불꽃, 운명의 별.







  “응?”
  “무슨 일이야? 마왕자 나으리.”

  가로드는 낫으로 변한 창을 휘둘러 한 마물의 목을 베어버린 뒤 다시금 유연하게 창으로 돌려놓으며 멍하니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유리에게 물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인 유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상하다는 어투로 대답했다.

  “방금 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듯해서….”
  “그래? 마왕이 되더니 이젠 환청까지 들리나 보군.”
  “윽, 아닌데… 정말 들려왔는데….”

  유리는 순간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심각한 얼굴로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가로드는 고민에 잠긴 유리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낮고 허탈하게 웃음 지으며 그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훗. 네 녀석은 여전히 변한 게 없구나 유리. 3년이 넘는 세월동안 마왕의 자리에 있었으면서 아직도 예전 그대로야.”
  “헉! 가로드씨! 그거 어째서인지 절 놀리는 것처럼 들려요!”
  “하하하하.”

  금새 사색이 되어 쌍흑의 두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유리의 모습에 가로드는 오래간만에 유쾌하게 웃으며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이건 칭찬이다 애송이 마왕. 역사책을 장식하는 위정자 중에 너처럼 초심을 잃지 않는 사람은 드무니까.”

  진심이었다. 권력을 잡으면 인간은 변하기 마련이건만 이 어린 마왕은 여전히 예전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였으며 가로드는 그것에 굉장한 만족감을 느꼈다. 귀족들의 권위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유리에게만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권력의 최고점에 올라서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마왕, 이런 왕이라면 얼마든지 충성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 가로드씨!”

  문득 유리가 당황한 얼굴로 가로드의 뒤를 손가락질했고 가로드는 순간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불길 속에서 익숙한 두 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로 간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은사로 연결되어 있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기괴한 가면을 쓴 키가 큰 광대, 바로 마리앙과 돌로레스였다.

  “키득. 오빠, 오랜만에 보네?”
  - 야하! 별로 반가워하는 얼굴은 아닌데? 마리앙~
  “그래도 마리앙은 반가워~”

  마리앙이 귀여운 몸짓으로 손을 흔들었지만 인형같이 생기 하나 없는 모습이 귀엽다기보단 괴기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가로드씨! 저들은?”
  “아아 저번에 그 놈들이다. 질리지도 않고 따라오는군. 괴물 놈들.”

  가로드가 손가락으로 창을 휙휙 돌리며 그 끝으로 마리앙과 돌로레스에게 겨누자, 마리앙이 돌로레스의 앞에서 즐거운 듯 빙글빙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얀 드레스자락이 마치 만개한 꽃처럼 부드럽게 휘돌았다. 문득 춤을 추던 마리앙이 몸을 멈추고 생기 없는 검은 눈동자를 들어 가로드에게 말했다.

  “오빠, 우리우리 또 놀자.”
  - 야하! 놀자놀자! 인간에게 있어서! 그리고 우리들에게 있어서 짧은 유희의 시간만큼 달콤한 것은 없지! 춤추고! 노래 부르자! 창백한 달이 지쳐서 잠들 때까지!

  투타타타타타탕! 쩍 벌어진 마리앙의 목구멍과 돌로레스의 다섯 손가락 끝에서 삐죽이 튀어나온 작은 기관총 총구들이 기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
.

  한편 유이는 혼자서 동분서주하며 마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생존자는 거의 없나?’

  벌써 1시간 이상 돌아다녔는데 찾은 생존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정말 암울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이 도시는 이제 녹아내린 괴물들만 존재하는 지옥의 한 구석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4년이 넘도록 고향 삼아온 도시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했다 생각하니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

  갑자기 뒷덜미에서 느껴진 살기에 유이는 재빨리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육감이 가르쳐준대로 단 한 점의 빛도 느껴지지 않는 검은 구체가 그녈 향해 날아오고 있었고 그것은 유이가 휘두른 검결에 닿자마자 반발을 일으키며 튕겨나갔다. 튕겨나간 검은 구체는 불에 휘감긴 건물의 윗부분을 깔끔하게 소멸시키면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중력포(Gravity cannon)!”

  불꽃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물의 지붕, 그건 특수한 중력장에 의해 공간을 입자 수준으로 압축하여 사실상 소멸에 가깝게 만들어버리는 유이만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쓸 수 있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클론이자 신검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사용하는 소녀였다.

  “SIA…."
  “오랜만이야… 유이 R 세이비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대로 한가운데에 검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8살 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 검은 드레스를 입은 흑발의 소녀. 푸른빛의 창백한 기운을 내뿜는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들고 있는 SIA 1호의 붉은 두 눈동자는 유이를 바라보며 증오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증오로 얼룩진 자신의 옛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유이는 소녀를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너와 난 질긴 악연으로 묶여 있는 것 같구나.”
  “그래, 악연이지. 자신이라는 존재의 모순으로 얽힌 악연.”
  “늘 그랬듯이 날 죽이더라도 너는 세이비어가 될 수 없어.”
  “…상관없어.”

  SIA 1호는 디스 아스트라나간을 들어 유이를 겨누며 말했다. 푸른 광기너머 죽음을 각오한 적색의 눈빛. 그 얼굴엔 이미 증오를 넘어 절실한 염원만이 가득했다.

  “그것이 내 존재의의며 삶의 목적이니까. 거울 앞에 선 광대의 역할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야. 오늘이 지나면 내가 죽던가 네가 죽던가 둘 중에 하나일테니.”
  “그래? 아쉽군.”

  유이도 검을 들어 SIA 1호를 겨누며 허탈한 느낌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들의 대치상황을 지붕 위에서 재미있게 구경하는 존재가 있었다. 펑퍼짐한 반팔 상의와 노란 반바지를 입고 있는 소년, 소년은 열기 섞인 바람에 살랑거리는 짧은 금발을 옆으로 쓸어 넘기며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은색의 갑옷같은 기계 의수가 오른손을 대신하는 소년의 이름은 ‘EL 13호’였다.

  “아무쪼록 분발하라고 SIA 1호. 이 싸움의 결과에 네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

  소년, EL 13호는 왼쪽 손목에 채워진 금색 고리 팔찌중 하나를 빼내 손가락으로 휙휙 돌리며 유이와 SIA 1호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마치 벌레들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표정으로….

.
.
.

  “으아아악!”

  「끼아아아아아아아」

  검은 그림자, 플뢰레는 귀곡성을 내지르며 푸른 불꽃으로 휩싸인 두 손을 휘둘러 진마국 병사들을 산산조각으로 찢고 불태웠다. 그것은 감미로운 바이올린 소리와 뒤섞여 한 편의 오페라극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았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그 모습에 병사들은 꿈을 꾸는 듯한 환상에 빠져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의 밀집 방형은 이 괴물에게 있어서 먹잇감이 차려진 손쉬운 식탁과도 같았고 단지 팔을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수십, 수백 명이 비명을 지르며 처절하게 산화해갔다. 같은 규모를 가진 군대끼리의 접전도 아닌 절대자와의 일대 다수의 전투에서 밀집 방형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전열을 가다듬어 찌르는 창칼은 악마의 몸에 닿기도 전에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총이나 화포의 경우엔 티끌만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

  “저 꼬마! 저 놈이다! 저 녀석이 저 괴물을 조종하고 있다!”

  더 이상 플뢰레를 죽일 방도를 찾지 못해 초조해진 진마국의 장교들은 병사들을 시켜 뒤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소년, 요한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요한의 주변에 휘감긴 검은 안개 형태의 결계에 막혀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진 사단 지휘부는 망연자실 저 괴물의 살육극을 손 빨며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에 대한 공포로 병사들은 통제할 수 없는 패닉에 빠진 상태, 게다가 지휘부의 명령을 기다려도 위에선 아무런 연락도 없고, 상황은 더욱 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사, 사단장님! 틀렸습니다! 후퇴 명령을!”
  “아으, 으아아아!”

  사단장 부쉬 백작은 코앞까지 다가온 플뢰레의 모습에 덜덜 떨기만 할 뿐이었다. 지옥 저 밑바닥에서 튀어나온 듯한 악귀, 전설로만 들어온 파괴주들을 대면하는 것 같아 그는 부장의 간절한 후퇴권고도 들을 수 없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아」

  문득 한 병사의 머리를 물어뜯고 불태워버린 플뢰레가 부쉬 백작 쪽을 바라보더니 그 쪽을 향해 손에 매달린 푸른 불꽃을 내뻗었다. 그러자 플뢰레의 손을 타고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푸른 불꽃의 회오리가 일직선에 위치한 모든 것을 불태우며 사단 지휘부를 향해 날아갔다.

  “아!”

  비명조차 지를 틈 없이 푸른 화염에 몸을 내맡겼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영(人影) 하나가 부쉬 백작의 앞으로 떨어졌다. 꽤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땅이 움푹 패일정도로 터프하게 착지한 그 사내는 내려서자마자 힘찬 기합과 함께 손에 든 은색 창연한 대검을 세차게 내려찍었다.

  “하압!”

  놀랍게도 그가 일으킨 육중한 검풍에 푸른 불꽃이 마치 반으로 가른 듯 쩍 하니 벌어지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 차례 불어 닥친 폭풍이 사라지고 드디어 정신을 차린 부쉬 백작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사내의 외관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남자답게 자란 두터운 구렛나루와 두 눈을 가릴 정도로 풍성한 실버 바이올렛 빛의 머리카락,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상체에서 느껴지는 육체미의 극치 그리고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잔잔하게 물결치는 폭이 넓은 거대 참함도. 부쉬 백작은 그가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로 프리벤터 제 2부대 ‘악즉참’의 부대장, ‘악을 베는 검’ 젠가 드가인이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

  잠시 젠가에 대해 감탄을 하던 부쉬 백작 이하 진마군은 플뢰레의 귀곡성이 들려오자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자동적으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저것이었군. 그 어두운 기(氣)의 정체는.”

  검은 악마 플뢰레를 한번 슥 내려다본 젠가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검을 들었다. 검을 쥔 그의 팔뚝이 붉어져 나온 핏줄과 함께 크게 부풀어 올랐다.

  “오래간만에 전력을 다할 상대를 찾은 것 같군.”

  「꺄아아아아아아아!」

  땅을 박차고 공기가 팽창할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플뢰레를 향해 젠가는 조용히 삼식 참함도를 휘두르면 소리쳤다.

  “덤벼라 악마! 내가 베지 못하는 것은 없다! 내가 바로 악을 베는 검, 젠가 드가인이다!”

  콰앙! 참함도와 맞물려진 플뢰레의 불꽃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폭풍이 되었다.

.
.
.

  “크엉!”

  퍼엉! 우렁찬 사자후와 함께 레이의 주먹이 한 병사의 복부를 강타했다. 대포와도 같은 육중한 폭음과 함께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병사의 복부는 속에서 내장을 터뜨리며 뒤에 서있는 동료 셋과 함께 백 미터는 넘게 뒤로 날아가 버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힘, 그것이 바로 저스티스의 사천왕이자 ‘용자’라고 불리는 레이 미스테리오가 가진 위력이었다.

  “으음….”

  호랑이 가면을 쓴 레이는 아직까지 수인화는커녕 100% 모든 힘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거니와 굳이 100%로 싸우지 않아도 충분히 전세는 이쪽으로 기울었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도 체계적으로 진영을 짜고 자신이 이끌고 온 ‘몰살 부대’에 저항하는 진마군을 바라보며 짧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기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마군은 잘 버티고 있었다. 하긴 그것이 당연할 것이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지만 이들은 엄연히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12제인 자신이 투입되었다지만 이곳에서 그는 단지 잘 싸우는 장수에 불과했다. 일 대 일에선 최강의 힘을 발휘해도 그에겐 요한의 사역마 플뢰레와 같은 대단위 살상 능력은 없었기에 쉽사리 적을 와해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곧 끝이다. 저 앞을 막고 있는 적진의 중심부만 뚫는다면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부가 나온다. 그것만 처리하면 머리를 잃은 나머지는 알아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받은 명령은 진마군의 와해. 하지만 좀 지루해지는군.’

  그는 천천히 정면의 진마군 방어선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음?”

  - 키에엑!

  파슉! 레이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멈춰 섰을 때, 갑자기 창공을 가르는 독수리의 울음소리와 함께 뇌전을 뒤에 길게 이끄는 총알 하나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흥!”

  레이는 한번 흥하고 코웃음 치곤 놀랍게도 손을 휘둘러 자신을 향해 날아온 총알을 공중에서 낚아채버렸다.

  치이익

  그는 아직도 뇌전과 함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총알을 한번 슥 내려다보곤 고개를 들어 뒤이어 땅에 착지하는 거대한 황금색 독수리를 바라보았다. 꼬리 깃털 끝에 앙증맞은 붉은 리본을 매단 그 독수리는 그 커다란 날개를 부드럽게 휘저으며 천천히 땅에 착지했다.

  - 키에엑!

  황금 독수리는 착지하자마자 한번 소리 높여 울고는 스르륵 모습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황금색 깃털들이 어지러이 바람에 흩어지고 줄어든 날개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안경을 쓴 어른스런 분위기의 여성이 황금빛의 눈동자를 빛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장신에 늘씬한 몸매, 발목까지 내려오는 연한 레몬빛 블론드 헤어와 아까 독수리의 꼬리 날개에 매달려 있다가 이번엔 머릿결의 끝에 묶여 있는 붉은 리본. 레이는 그녀가 누군지 누구보다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아미르 얀 류네였기 때문이다. 완전히 인간으로 변한 류네의 어깨로 로봇 새 ‘슈우’가 꽃잎처럼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아미르 얀… 류네.”

  끼기긱! 레이는 손가락으로 총알을 동전처럼 납작하게 구겨버리며 류네의 이름을 조용히 되새겼다. 과거 자신을 찬 여인과 재회하는 순간이었으나 그는 놀랍도록 냉정했고 그의 그런 침착함에 이색을 표한 류네는 조용히 눈웃음치며 그에게 말했다.

  “오랜만이야, 레이.”
  “십 수년만인가. ‘그 때’ 이후로 본 적이 없었지.”
  
  마치 좋은 추억을 생각한다는 듯 레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류네의 입장에선 마냥 즐거운 일도 아니었다. 세간에 도는 소문으론 그가 저스티스에 들어간 것이 그녀 탓이란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쯧, 남자가 여자에게 한 번 차인 것 가지고 꽁해가지곤….”

  류네가 경멸에 찬 어조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레이가 부드럽게 웃음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날 그 정도의 남자로 밖에 안 본건가? 류네. 그렇다면 너에게 차인 것도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군.”
  “맞아, 난 너 같이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한 녀석은 싫어. 게다가 남자가 쪼잔하기까지 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이지.”

  류네의 거침없는 독설에 레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도 상관은 없지. 하지만 이거 한 가지만은 꼭 알아둬라. 류네.”

  사사삭! 어느새 몰려든 수인족 부대가 레이와 류네를 빙 둘러쌌다. 그러나 류네는 묘하게도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레이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레이가 납작하게 찌그러진 총알을 땅을 버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과거에 미련을 가지는 그런 한심한 남자는 아니다. 내가 저스티스에 몸담은 것은 모실 수 있는 주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여전히 넌 최악의 남자야.”
    
  퍼퍼퍼펑! 류네가 말을 잇고 난 직후, 갑자기 뒤쪽 언덕 능선 위에서 엄청난 양의 불꽃들이 길게 꼬리를 잇고 폭음을 터뜨렸다. 그 불꽃들은 순식간에 날아와 류네를 둘러싼 저스티스의 전사들을 포함하여 진마군을 도륙하던 ‘몰살 부대’의 에이전트들을 일순간 일백 가까이 산화시켰다.

  “레비아탄!”

  레이는 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녀석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프리벤터의 제3부대 ‘레비아탄’, 구 ‘마탄의 사수’와 ‘셀레브레이트’ 부대가 합쳐진 그들은 초 장거리 저격 겸 화력 지원 부대였다. 그러나 지금 언덕 위에 있는 인원들은 분명 프리벤터 뿐만이 아니었다.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있는 해골과 그 뒤에 금방이라도 목을 벨 수 있게 섬뜩하게 날을 드러낸 낫이 그려져 있는 검은색 깃발, 그림 아래 쓰여 있는 붉은 ‘For our his/her dominant'라는 글귀, 그 섬짓한 깃발 아래 눈구멍만 뚫어놓은 검은 고깔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검은색 제복의 사신같은 무리들이 살기등등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그것은 ’달의 장미‘ 크롬웰 하이드레드 백작 휘하의 마왕군 최정예 친위군 ’길로틴(guillotine)‘이었다. 검은 고깔로 얼굴을 가리고 어둠의 사신들이라고 불리는 그들이 레비아탄의 곁에서 이번 사형수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 크어어어엉!

  레이가 우렁찬 사자후를 터뜨리자, 갑작스러운 기습에 잠시 멈칫했던 ‘몰살 부대’가 일사분란하게 전열을 가다듬고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적’을 향해 적의에 찬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진마군은 완전히 무시하고 잽싸게 방향을 돌려 레비아탄과 길로틴 부대가 있는 언덕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언덕 아래까지 당도했다. 레비아탄은 원거리 저격부대기 때문에 접근전에 들어가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엔 길로틴 부대도 있었기에 여느 때완 달리 신나게 불을 뿜기 시작했다. 하늘을 수놓는 수천줄기의 총탄과 불꽃들이 언덕을 오르려는 ‘몰살 부대’를 향해 폭풍우처럼 쏟아졌다.

  “크르르르….”

  총탄이 스치고 지나가도 레이는 눈앞에 서 있는 류네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천천히 뇌격총(Lightning gun)을 꺼내든 류네는 총구로 레이를 겨누며 작게 조소했다.

  “너는 내 몫이야. 용자, 레이 미스테리오.”
  “그런 것 같군.”

  우드득! 갑자기 레이의 온 몸에서 근골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크게 벌어진 입에서 송곳같은 이빨이 뻗어 나오고 크게 구부러진 등이 산만큼이나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뒤이어 전신에서 빛바랜 갈색과 검은색 무늬같은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흥!”

  피슉! 류네는 기다리지 않고 뇌격총으로 레이의 머리를 향해 총을 연사했다.

  - 크엉!

  그러나 레이는 류네가 발사한 총알을 손을 한번 휘둘러 모조리 튕겨냈고 변신이 완전히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류네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여전히 무식하군!”

  류네는 푸념 섞인 소리를 내며 레이의 주먹을 피해 옆으로 몸을 날리며 총을 난사했다. 몇 발이 아슬아슬하게 레이의 몸을 스치며 지나갔지만, 한발이 얼굴에 명중하며 레이가 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됐다!”
  「삑! 아직! 아직!」
  “뭐?!”

  슈우의 경고에 류네는 땅에 착지하자마자 레이를 살폈다. 머리를 뒤로 축 늘어뜨린 레이가 서서히 머리를 들자 류네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말도 안돼….”

  - 크르르르….

  반쯤 찢어진 호랑이 가면이 걸쳐져 있는 진짜 호랑이 머리와 야성으로 번뜩이는 노란색 짐승의 눈동자, 그리고 그의 누렇고 날카롭게 삐져나온 이빨 사이로 아직까지도 연기와 전격을 내뿜고 있는 총알이 처참하게 구겨진 채 끼여 있었다.

  “미친… 괴물 같은 놈.”

  류네는 문득 지금 어처구니없는 놈을 상대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짜릿했다.

.
.
.

  ‘유리!’

  엘리스 카리나의 ‘천 개의 가시’가 사방을 둘러싼 병사들을 고슴도치로 만들며 유신과 콘라드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콘라드 공작은 특기인 묘기에 가까운 기마술을 펼치며 길고 무거운 마상검(馬上劍)을 마치 장난감 다루듯 휘둘러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들을 쳐냈지만, 손을 땔 수 없는 유신은 속수무책으로 다가오는 가시들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끝인가!’

  생성하는 마법진을 멈춰도 죽고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죽는다. 유신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적을 바라며 두 눈을 조용히 감았다.

  챙! 챙! 챙!

  그 때 날카로운 것들을 쳐내는 소리와 함께 기적이 일어났다. 눈송이처럼 새하얀 드레스 와 그 위에 달빛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은색 경갑을 걸친 하나의 인영(人影)이 순식간에 유신의 머리를 뛰어넘어 앞을 가로막고는 양 손에 든 총검(bayonet)을 번개같은 속도로 휘둘러 가시들을 모조리 쳐낸 것이다. 속으로 고슴도치가 되어 죽을 유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워하던 엘리스는 갑자기 등장한 난입자에 적지 않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뭐, 뭐야!”

  난입자는 가시들을 모두 쳐낸 뒤,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며 특수한 손잡이를 달아놓은 총검을 땅에 꽂아 넣었다.

  “후우.”

  구름에 가려진 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그제야 달빛에 반사돼 은하수처럼 반짝거리는 그녀의 아름다운 은백색 곱슬머리와 에메랄드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여신처럼 빛을 발하며 모든 이들의 눈에 들어왔다. 잠시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으며 그 자태를 뽐내던 그녀는 조각같은 고개를 돌려 유신을 바라보며 강인한 어조로, 그러나 남자같이 거친 어투로 말했다.

  “어쨌든 딱 맞춰 도착한 것 같군.”
  “너, 너는!”

  유신은 여성의 얼굴을 확인하곤 놀라움과 감탄사를 섞어 소리쳤다. 놀란 것은 콘라드 공작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야수같은 노란 눈동자를 크게 키우며 당혹감을 가득 담아 여성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다.

  “크롬웰!”

  크롬웰 하이드레드 백작, 콘라드 공작의 여동생이자 마왕 유리의 약혼녀. 그러나 혈맹성을 지키고 있어야할 그녀가 이곳에 등장했다는 사실에 유신과 콘라드 공작은 당황 반 반가움 반을 섞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멀뚱히 그녀의 옆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크롬웰 백작은 그들의 의문을 모두 안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작게 끄덕였다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귀여운 곱슬 머리카락을 귀 뒤로 슬쩍 넘기며 엘리스와 헬무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대답은 이 뒤에…, 저 둘을 처리하고 난 다음에 해드리지.”

  빠득!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엘리스가 이빨로 사탕을 부숴버리며 그것도 모자라 이빨까지 뿌드득 갈았다. 열이 단단히 받친 듯 목과 손가락 관절을 풀어준 엘리스는 크롬웰을 찢어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헬무트! 넌 저 말꼬랑지 머리를 맡아! 난 저 재수없는 년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릴테니까!”
  “…….”

  사사삭! 헬무트가 마치 콘라드를 유인하듯 빠르게 측면으로 이동하자 콘라드 공작은 씩 웃으며 말고삐를 거칠게 잡아 당겼다.

  “오랜만이군, 일대일 대결은…. 좋다, 받아주마! 가자! ‘나이트 왓쳐’!”

  히히히힝! 흑색 준마 ‘나이트 왓쳐’의 거친 투레질 소리와 함께 콘라드 공작이 헬무트를 따라 병사들 틈을 질주했다. 헬무트와 콘라드 공작이 저 멀리 사라져버리자 엘리스는 개운하다는 듯 어깨를 풀고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우리 대화를 좀 시작해볼까? 이거 아주 예쁘장한 고슴도치가 탄생할 것 같아 흥분되는걸?”

  캉! 크롬웰 백작은 땅에 꽂아둔 두 자루의 총검을 뽑아 들어 십자 형태로 교차시키며 조소했다.

  “해볼 테면 해봐, 악취 나는 꼬맹이. 얇게 저민 베이컨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늘 그래왔지만 예쁘장한 겉모습과는 달리 남자보다도 더 거친 크롬웰 백작의 말투는 오랜 세월 그녀를 보아온 모든 이들도 아연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여장부같은 기질 때문에 소꼽친구였던 유리는 어린 시절 많은 괴롭힘을 받았었고, 크롬웰 백작이 약혼녀로 결정되었을 때 유리가 울며불며 난리를 피운 것도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했을 것 같았다.



                                                                         To be continnued.....

-----------------------------------------------------------------------------------------------
상편! 분량이 상당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상 하로 나눕니다... 그래도 많군요... -ㅅ-; 뭘 믿고 이리 길게 끌어버렸는지...

여튼 이번에 등장한 콘라드 공작, 크롬웰 백작은 다르칸님이 설정하신 캐릭들입니다. 설정은 제 멋대로 해버렸어요~ 괜찮죠? ㅋㅋ

여튼 이번에 등장한 녀석들을 정리하자면

1. 유신, 콘라드, 크롬웰 VS 헬무트, 엘리스
2. 요한 VS 젠가
3. 레이 VS 류네
   3.5 - 저스티스 제 2부대 '몰살 부대' VS 레비아탄, 길로틴 연합 부대
4. SIA 1호 VS 유이
5. 가로드 VS 마리앙, 돌로레스 입니다.


여튼 지저분할 정도로 많은 녀석들이 나온..... =ㅅ=; 에구 수습도 힘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