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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Flame Blaze

2006.02.27 13:28

아란 조회 수:50 추천:4

extra_vars1 홍련(紅蓮)의 왕 
extra_vars2 -<font color=red>수정</font>- (中)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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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런 곳에서 끝날 순 없지 않나? 너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누군가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나를 위해서. 유이리.’

그가 내게 손을 뻗었지만, 나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살아나갈 용기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일까?

“이런, 이런. 말린 새우 꼴이 다 되어 가는 애한테 손을 잡으라고 하다니. 나도 참.”

아니, 그럴 힘조차 없었다는 게 정답이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 커다란 두 팔로 간단히 나를 안아들었다. 순간 거부하고 싶었지만, 하지만 왠지 따스한 열기에 나도 모르는 새 마음이 놓여서 스르륵 눈이 감겨버렸다.


§ Flame Blaze §



“연보랏빛 머리카락의 귀여운 여자아이네요. 염 님.”

주황색의 짧은 단발의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자두색 롱스커트의 원피스를 입은 차가운 인상의 19세 정도의 여자가 막 들어오고 있는 허름한 수도승 차림의 대머리인 남자가 안고 있는 12세가량의 바싹 야윈 소녀를 보며 말하였다.

“그래, 귀여운 여자아이지.”

염이라 불린 대머리의 남자가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소녀를 한 번 보고, 자두색 롱스커트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에게 말하였다.

“어쩔 셈이죠?”

“글쎄?”

“염 님. 단순히 글쎄 정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염 님은, 이 세계를 조율하는…”

“나도 알아.”

염이 내뱉은 한 마디에 그 여자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 아시고 계시다는 분이.”

“목소리 좀 낮춰 봐. 라르크. 이 애가 잠에서 깬다고.”

“아.”

라르크라 불린 여자는 염의 품안에서 잠들어 있는 소녀를 보며,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죄송합니다.”

“그것보다 라르크, 한창 때의 딸을 키운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네?”

염이 난데없이 꺼낸 이야기에 라르크는 잠시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염은 풋 웃으며 말을 계속해나갔다.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 그건!”

“나름대로 기준을 잡아서 고심 끝에, 사막에서 다 죽어가는 애를 데려와 본 건데.”

염은 슬쩍 라르크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역시 갓난아이를 하나 납치해 올 걸 그랬나? 역시 한창 때 아이는 말도 잘 안 듣고 이만저만 힘들겠지. 라…”

“납치는 범죄니까 안 돼요!”

똑 부러지는 라르크의 한 마디. 그러나 그 한 마디를 쏘아놓고 목소리가 조금 컷다는 것을 알아챈 라르크는 곧장 홍조를 띄우며 두 손으로 자기 입을 막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전 괜찮아요. 염 님. 한창 때의 말 안 듣는 아이라 해도, 그래도 좋아요. 염 님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저에겐, 그것만으로도.”

염은 품에 안고 있는 소녀를 라르크에게 안겨주었다.

“좋은 엄마가 되기도 전에 울면 안 돼지. 라르크도 이젠 애가 아니잖아.”

“염 님.”

“님 자는 빼라고. 라르크.”

염은 그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입술을 라르크의 입술과 겹쳐나갔다.

‘우리, 이 아이의 좋은 부모가 되도록 함께 노력하자.’

멀리서 염과 라르크를 바라보고 있던, 머리에 뿔이 달린, 불꽃에 휩싸인 한 명의 악마의 모습을 한 ‘디아블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이기에 사랑해서는 안 되는 저주, 엔트로피이기에 역시 사랑해선 안 되는 운명. 만약, 저 둘이 보통의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과연 행복했을 것인가? 만약의 과정이라지만, 아마 지금이 더 행복하겠지.”


§ Flame Blaze §



홍련(紅蓮)의 왕, 염(炎).
그는 내가 살던 세계, 홍련의 세계를 조율하는 존재로 달리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세계의 신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신은 무슨. 그저 하는 일이라곤 세계가 잘 돌아가나 슬쩍 흩어보고 낮잠 자는 게 전부인데, 뭘.”

라고, 홍련의 왕, 염은 자기 입으로 설명해 놓고, 바로 부정을 했지만.

꽁.

“아야야.”

“아무리 실생활이 그 모양이라 하지만, 그래도, 염 님은 긍지 높은 홍련의 세계의 왕이십니다. 자신을 비하하지 말아주세요.”

“나 원 참. 우리 셋뿐인데, 진지하게 나갈 필요는.”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엔트로피는 왕과 생명(세계의 운명)을 (고통도)공유하는 대신, 세계와 왕을 수호하는 존재라 한다. 그리고 지금 염에게 잔소리를 퍼부어 대는 주홍빛 단발과 진홍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바로, 홍련의 왕, 염과 계약한 엔트로피로, ‘플레임 블레이즈(Flame Blaze)’라 불리며 본 이름은 ‘라르크’이다.

“저기.”

나는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 조용히 말을 꺼내보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말을 걸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저 두 분이, 이 홍련의 세계를 조율하는 왕과 엔트로피라고 하면 믿어지겠나? 꼬마 아가씨?”

“디아블로 씨.”

머리에 양쪽으로 뿔이 달려 있고, 어깨부터 등까지 삐죽삐죽 뿔이 튀어나와 있는, 인상이 매우 험악하게 생긴, 흡사 많이 보고 들은 악마나 다름없는 모습을 한 이 아저씨는 디아블로. 염과 엔트로피와 허울 없이 지내는 둘 도 없는 친구이기도 한 이 분은 세계의 이치니 삼라만상인지 뭔지 어려운 것을 깨달은 존재 ‘중재자’이다.

“이젠 놀라서 울지도 않는 군.”

디아블로가 내게 말을 하였다. 확실히 그렇게 아주 악마나 다름없는 험상궂은 모습이라면, 누구나 처음에 놀라거나 무서워서 울지도 아니, 분명 나처럼 울겠지.

“홍련의 왕께 뭘 묻고 싶은지 대강 알겠군.”

“정말?”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내가 꼬마 아가씨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와장창, 쿵쾅.

디아블로가 내게 말하는 순간에 어느 순간부터 값비싼 장신구나 가구라던가, 그런 것들이 위험천만하게 날아다니며, 방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우, 우와아악!! 알았으니까, 그, 그만! 어헉!!”

“염은 좀 맞아야 진지해지지요?”

그 중 꽤 많은 숫자가 나와 디아블로가 있는 쪽으로 날아들었지만, 디아블로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쳐 튕겨내었기에 무사했다.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이는 군.”


§ Flame Blaze §



내가 사막에서 홍련의 왕, 염에 의해 구해진 후, 지금은 어딘지는 모르지만, 아주 높은 산  꼭대기에 지어진 작은 저택에 지내고 있다.

“홍련의 왕께옵서는 플레임 블레이즈와 함께, 좋은 부모가 되어보신다고 노력하겠다고 하셨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 게 과연 좋은 부모가 할 일인지?”

“아, 이런.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건 좋은 아빠가 할 일이 아니야. 마침 잘 이야기 해주었어. 디아블로.”

“염 님. 지금.”

좋은 아빠라. 맨 처음 염에게 구해지고, 난 뒤 이 저택에서 깨어난 후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식탁에 둘러 앉아 첫 저녁 식사 때 내게 했던 말들이 문뜩 떠올랐다.

‘에헴, 그, 그러니까 페, 페.’

‘염 님. 페이트잖아요.’

‘아, 그랬지. 참. 에헴. 어쨌든 페이트, 잘 들어라. 나랑 라르크가 너보다 나이가 배는 더 많으니까, 그, 그러니까.’

‘엄마라고,’

‘아빠! 라고 불러주지 않겠나?’

‘염 님, 먼저 새치기 하시면!’

이야기를 간단히 하자면, 염과 라르크는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나를 사막에서 구해준 것이고, 자기를 엄마나 아빠라고 불러봐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를, 나를 가지고 노는 거지. 내가, 이런 꼴이 된 것을!!’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저택 문을 달려 나갔던 생각이 났다. 그대로 울면서 저택 문을 나서 정신없이 앞도 안 보고 뛰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거기서 끝장 날 수도 있었지만, 라르크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내 손을 붙잡고, 염이 나 때문에 떨어지는 라르크의 손을 붙잡고, 마침 방문했던 디아블로의 험악한 모습에 내가 놀라서 손을 놓아 진짜로 떨어질 뻔 했던 일. 그리고 그 후 디아블로의 권고 아닌 권고나 충고와 자초지종에 관한 이야기.

“음, 어쨌든 그러니까 페이트 미안하다. 이런 형편없는 모습만 보여주는 아빠를 용서해다오.”

“페이트, 미안해. 내가 좀 성질이 급했나 봐.”

잠시 생각에 잠긴 내게 염이 용서를 구하고, 라르크는 나를 품에 안으며 나를 다독여주었다.
부모라 생각했던 돌아가신 선왕과 왕비.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그들이 내세울 바보가 필요해서 키워진 가짜 공주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나에게 엄마, 아빠라고 부를 친부모가 있을 리가 없다.

“어머니. 아버지.”

왠지 그때부터 염과 라르크를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고 싶었다.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처음부터 엄마, 아빠라고 부르기엔 창피했던 것 분명했다.


§ Flame Blaze §



“이 아이가, 진짜 플라티네스 여왕.”

아버지라 부르기로 한 염에게 부탁(떼를 썼다고 해야겠지만)해, 결국 찾아낸 진짜 플라티네스 왕국의 공주님.
내가 그녀의 공주로써의 운명을 타의에 의해 훔쳐 화려하지만 거짓된 시간을 보낸 것과 달리, 내가 보고 있는 소녀는 분명 누추한 옷가지와 며칠 씼지도 않은 듯 지저분한 얼굴이나 단 한마디로 말해서 대단히 초라한 그저 빈민촌에서 본 바 있는 소녀들과 다를 바 없는 몰골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주 행복해보이지. 이래서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건데. 뭐, 언젠가는 네 스스로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야.”

염이 시선을 딴데다 두며, 말하였다.
염의 말대로, 그 보잘 것 없는 소녀의 얼굴에서부터 몸가짐 하나하나까지, 행복하다는 것이 물씬 느껴져 왔다. 아니, 분명 행복해 보였다. 아주 많이.

“와아, 렌 누나 왔다.”

“누나!!”

“언니!!”

“헤헤헤, 얘들아 그렇게 보채지 마! 오늘은 가게 아저씨가 인심 많이 써서, 잔뜩 챙겨주었으니까!”

수많은 아이들에 둘러싸인 진짜 여왕, 렌이라는 이름의 그 소녀는 가지고 있던 먹을 것들을 풀면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웃음 지어보였다.

“어째서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거야? 저 앤, 나에게 진짜 공주라는 자리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서, 고아원에서 힘들게 자라왔는데, 어째서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야? 왜 그런 거예요? 아버지?”

“답은 간단하지만, 어라? 마침 배고픈데, 같이 저 애들이랑 식사 해볼까나?”

염은 나의 질문에, 배고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나를 끌고 렌과 아이들이 식사를 하는 대로 향했다.

“작은 꼬마 신사 숙녀 여러분. 즐겁게 식사하시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같지만, 마침 나랑 내 딸애도 조금 배고파서 그런데 같이 식사해도 될까?”

늘 생각하는 거지만, 염(炎)은 염치(廉恥)가 너무 없는 것 같았다.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절대 할 수 없을 지도 모를 소리를 염은 잘도 꺼낸다. 아마, ‘왜, 우리가 구걸을 해야 돼요? 아버지는 이 세계의 신이나 다름없는 왕이잖아요!’라고 따지면,

‘신이고 뭐고, 배고플 땐 일단 먹고 봐야지.’

라는 소리를 대답이라고 내놓을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런 소리를 할 게 틀림없다.

“그러세요.”

렌은 염이 한 말에 너무나도 간단히 수락을 했다. 렌의 주위에 아이들도 역시 따라서 복창을 하였고.

“아하하, 이거 좀 신세를 지.”

“대신 끼고 계신 반지 주세요.”

“그건 거절.”

“그럼 저희 식사를 드릴 수 없는데요?”

“반지를 줄 바엔 차라리 굶어 죽을래.”

“그럼 굶어 죽으시면 고이 명복을 빌어드릴게요.”

“그래주면 고맙겠구나. 작은 아가씨.”

염이 끼고 있는 반지.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라르크의 손가락에 끼여진 반지와 세트인 반지로 그러니까,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이려나? 어쨌든 나는 염이 배고프면 반지라도 내줄 거라는 나의 생각을 그때부터 집어치우기로 했다. 하지만 렌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무런 대가 없이 나와 염에게 자신들의 식사를 조금 나누어 주었다. 어째서?

“원래, 그렇게 돕고 사는 거니까요. 남이 나를 돕듯이, 내가 남을 도우면 그만큼 내게 다시 되돌아온다. 그러니까, 내가 한 것만큼 다시 배로 되돌아온다는 것이죠.”

내 물음에 렌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왠지 기분이 묘해서 반박할 말을 나도 모르게 찾아, 입 밖으로 꺼내었다.

“하지만, 세상은 서로 돕기 보다는, 서로 속이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더 많아.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더 배로 잘 살고 있어. 뭐가 다시 되돌아온다는 거야? 렌?”

“그렇지 않아요. 플라티네스 왕국의 여왕님은 쫓겨났는걸요. 자신의 업보대로.”

렌은 내가, 바로 그 쫓겨난 가짜 여왕이란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왠지 울컥해졌다. 하지만 내가 쫓겨난 뒤, 플라티네스 왕국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플라티네스 왕국을 야마타이 제국이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 후, 자기들이 편드는 황자를 앞세워 편을 갈라 서로 싸우고 있데요. 플라티네스 왕국은 야마타이 제국이 잠시 내전에 휘둘리는 동안, 주변국들이 침략해서 서로 잘 갈라 먹고, 지금은 지도  상에 없는 나라예요.”

아예, 사라졌다는 말인가?
그렇게 허무하게? 아무리 그래도 2천년을 이어온 오랜 역사를 지닌 플라티네스 왕국이 그렇게 간단이?

“멸망하는 건 순식간이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말이야. 그보다 꼬마 아가씨. 이거, 신선 노릇해도 되겠는 걸?”

“헤헤, 저 아직 어리다고요. 신선이라니요? 허허 백발의 노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걸요?”

“하하하, 아직 모르고 있구만. 세상의 이치란 게 별거 없어. 자기가 한 만큼, 언젠가 다시 되돌아온다. 이것 말고, 절대 불변의 이치가 없는데, 꼬마 아가씨는 그 나이에 벌써 그걸 깨우쳤잖아? 그러니까 신선 노릇해도 된다는 거지?”

세상의 이치?
세상의 이치란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일 리가. 비록 가짜 공주였지만 내가 배운 것으로는 상당히 철학적인 이야기들인데.
하지만 멸망, 죽음은 순식간이라. 왠지 그런 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행복할 수 있지?’

자신이 실은 지도에서 사라진 플라티네스 왕국의 진짜 여왕이라는 것을 모르는 렌과 식사가 끝난 뒤 이야기를 더 듣다가, 헤어지게 되었음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커다란 왕성에서 가짜 공주라는 소문에 시달리며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라곤 유이리 밖에 없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다른 거야?

“아직 모르겠니? 우리 페이트?”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예요. 아버지.”

“그래, 용케도 하나는 알아 맞췄구나. 우리 페이트.”

“네?”

“때론 진실을 모르는 것도 나쁘진 않지. 렌처럼 말이야. 만약, 자신이 멸망한 플라티네스 왕국의 진짜 여왕이라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

“그건.”

진실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 믿고 있던 것이 무너져 버린다는 것이.

“진실이야 언젠가 어떤 연유로든 알게 될 일이지. 또는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있지. 하지만 중요한 이치는 그게 아니란다.”

“그럼 어떤 건데요? 아버지.”

“글쎄? 어떤 걸까? 한 번 맞춰볼래?”

“아버지!”

“내가 아무리 이 홍련의 세계를 조율하는 왕이네 어쩌네 하는 엄청 대단해 보이는 존재 같지만, 사실 왕이 하는 일은 별 거 없단다. 흐름이 막히지 않게 자연스럽게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도록 그저 세계를 지켜보는 것 뿐. 태어나고 성장하고 결실을 맺고 늙어 죽는다.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리지. 세계는 그것을 무수히 반복하며 유지되어 가고, 흐름이 막힌 곳은 뚫어주는 게 왕이라는 자가 해야 할 일이다. 존재를 창조한다던가 그런 거창하고 웃기지도 않는 짓은 자신의 주제에서 지나치게 나서는 바보 같은 짓일 뿐. 그저 세계가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이야.”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요?”

“그래, 왕은 군림하지도 않고 다스리지도 않지.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단지 지켜볼 뿐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랑 지켜보는 거랑 그게 그거잖아요.”

“하나 물어보지. 만약 페이트 네가 왕이고, 너의 세계라고 니 마음대로 한다거나, 또는 그럴 일은 없겠지만, 괜한 자신만의 정의감에 도취되어 이렇게 세계를 이끌어 나가야 옳다고 니 생각대로 그대로 세계를 멋대로 이끌면 어떻게 될까?”

염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대로 했던 경우는 어떤 사태가 날지 내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잘 알지만, 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건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닌가?

“전자의 경우는 너도 잘 알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그야, 아주 좋은 세계가 되겠지요.”

당연히, 좋은 세계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니, 틀렸어. 그건 말이 좋아서, 좋은 세계지. 실상은 세계의 모든 의지가 왕에게만 의지하려고 하고 왕이 없으면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세계가 되어 버린다. 왕이 행여 죽게 되면, 자기 스스로 왕을 태어나게 하지 못하고, 바로 소멸되어 버리는 자유의사가 없는 세계가 되어버리지.”

“하지만 어차피 왕이 죽게 되면, 왕이 다스리는 세계도 붕괴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분명히 붕괴하긴 하지. 하지만 자유의사를 잃은 세계는 왕이 없으면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최소한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기에 우왕좌왕 하다 순식간에 붕괴해 버리지. 하지만, 자유의사가 있는 세계는 최소한 왕이 죽더라도 세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해. 분명 계속해서 붕괴해나가고 있지만, 최소한 새로운 왕을 스스로 탄생시킬 때까지 어떻게든 붕괴하는 것을 버텨본다고. 뭐, 과반수의 자유의사를 지닌 세계는 스스로 왕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붕괴되어 버리긴 하지만, 일부는 살아남지.”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

“이런, 아직 어린 너에게 내가 무슨 지루한 이야기를. 어쨌든 그럼 ‘왕은 산소 같은 존재.’라고만 생각해 두어라.”

산소는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런데 그게 왕이랑 무슨 상관일까? 아직 모르겠다.


§ Flame Blaze §



12년 전, 플라티네스 왕성에서는 선왕과 왕비의 암살을 꾀한 내무대신이 적과 내통해, 적을 왕성에 끌어들여 계획대로, 선왕과 왕비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하지만 내무대신은 그 당시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에 불과한 공주를 손에 넣지 못했다. 그 난리 통에 누군가가 진짜 공주를 어딘가로 대피시켰고, 하는 수 없이 내무대신은 진짜 공주를 대신하기 위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무 갓난아기를 데려다가, 죄를 뒤집어씌울 자에게 거짓 증언을 하게 함으로써 그 아기를 진짜 ‘페이트 룬 플라티네스’ 공주라고 데려와서 그저 허수아비로 써먹기 위해 왕성에서 공주로서 키워준다. 유이리는 내가 진짜 공주인 줄 알고, 자기 젖을 물려가며 정성껏 보살펴준 것이고, 결과적으로 내무대신의 생각대로 나는 골빈 바보 여왕으로 자리를 물려받아,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들 마음대로 나라를 다 해먹은 셈. 그 업보로 야마타이 제국의 침략이 발단이 되어, 나라는 멸망.

“나의 지금까지 삶은 하나부터 끝까지 거짓이네.”

디아블로에게 들은 12년 전 플라티네스 왕국에서 일어났던 사건들과 지금까지 내가 알게 된 진실들을 요약하고 정리하면, 이런 것이구나.

“나의 의지로 무언가를 해냈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건 그들 좋을 대로 되었을 뿐이고, 그런데도 유이리는.”

싫다. 이런 건. 생각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싫어졌다.

“지금까지는 타의에 의해 살아왔다면, 지금은 내 의지로 살아갈 때야. 페이트.”

“어머니.”

라르크가 어느새 내가 누워있는 침대 곁에 다가와 말했다.
문득, 엔트로피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왕의 생명을 담보로 세계의 힘을 이끌어 내 세계를 수호하는 자란다.’라고 라르크가 슬픈 눈으로 내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강해요?”

“응?”

그러고 보니 저번에 스카빌른(홍련의 세계에 사는 곰과 비슷한 짐승. 곰보다 더 흉측하고 사납다)에게 잡아먹힐 뻔 했을 때, 라르크가 주먹 한방에 보냈던 것이 떠올랐다.

“제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어머니.”

“그런, 그건. 안 돼!”

“하지만 혹시라도.”

“절대 안 돼!!”

“부탁해요. 엄마.”

할 수 없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필살기이자 아직은 부끄럽기만 한 단어를 입 밖으로 내보냈다.

“큭, 그런.”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내 의지로 라르크에게 엔트로피의 싸움에 대해서 하나하나 직접 가르침을 받고,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며 수련을 받고 있었다.

“엄마는 어째서 무기를, 아읏.”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물으려는 찰나에 라르크는 내 머리에 알밤을 쥐어 먹여주었다.

“긍지 높은 플레임 블레이즈는 내 몸 하나가 무기. 그 외에 도구는 일절 쓰지 않아.”

“그래도, 아읏.”

“수련 중에는 아무 소리 말고, 수련에만 집중해야지. 페이트.”

어째서 무기를 쓰지 않는 걸까? 하는 의문은 일단 접어둔 채 그저 수련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라르크가 싸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은 없지만, 하지만 나에게 동작 하나하나 가르쳐 주기 위해 시범을 보여주는 모습은 그러니까, 하나의 춤이었다.

“역시, 라르크 라니까. 아마 누구도 저 아름다운 춤을 흉내 내지 못할 걸.”

“염 님. 언제부터.”

“우, 우왓!! 라르크, 진정, 컥!!”

수련 중에 특히, 라르크가 시범을 보여줄 때는 언제나 염이 언제 지켜보았냐는 듯,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좋은 소리(?)를 하면 라르크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킥이 염의 머리에 내리 꽂히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이야, 이젠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페이트, 저번에 플레임 블레이즈에게 어째서 무기 같은 것을 쓰지 않냐고 물으려다 머리를 얻어맞았다고 하던데?”

“아, 디아블로 씨.”

“그냥, 아저씨라 불러라. 부끄럽다면 오빠라고 부르던가.”

“아저씨라고 부를게요.”

중재자, 왕과 엔트로피는 세간의 신화나 전설에 빗댄다면, 중재자=신선, 왕=신, 엔트로피= 아마도 세계의 수호자 정도였지만, 보통 신화나 전설에 보면 이들은 굉장히 고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들로 묘사된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염 님!!’

‘볼 때 마다 화기애애하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페이트.’

생각해보니, 염의 말대로 진실은 역시 모르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겠지. 이 홍련의 세계의 왕이 한 말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긴 하지만,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아, 저, 저는.”

“그것보다 과거의 일과 진짜 여왕을 만나고 나서, 마음을 다시 잡은 것 같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 최강의 엔트로피, ‘홍련의 왕의 긍지 높은 플레임 블레이즈’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최강? 엄마가 그렇게 강해요?”

“알겠군. 엄마라고 부르는 대신 싸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겠군. 어쨌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그저 인간들 틈에서 살아온 너라면 세계와 세계의 일들, 엔트로피와 왕의 일들에 대해 모르는 것도 당연하겠군.”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는 대신, 어머니가 아닌 절대 엄마라고 부르기로 약속한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라르크가 말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지. 친구라고 했었지.

“저기, 아저씨는 아버지와 엄마의.”

“페이트!! 라르크는 엄마라고 불러주면서, 나는 왜, 컥!!”

염의 절규가 뒤에서 들려오는 듯 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나는 말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니까 엄마가 싸우시는 것을 몇 번이고 보셨을 것 아니에요? 정말로 강해요?”

“이런, 그건 꽤 지루한 이야기가 될 것 같군. 그것보다 여기서 할 이야기가…”

디아블로는 잠깐 라르크와 염의 상황을 살폈다. 라르크의 펀치와 킥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염은 피하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잘도 피하고 있었다.

“아니지 않은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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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련(紅蓮)의 왕, 염(炎)
: 페이트가 태어난 세계, 즉 일곱 세계 중에 하나인 홍련의 세계를 조율하고 관리하는 왕으로, 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의 운명인지 아이를 태어나게 하지 못한다. 왕으로서 세계의 힘으로 조율한다면 별 것 아닌 문제일 수 있겠지만, 그 자신의 생각으로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사막에서 다 죽어가던 페이트를 구해다 양녀로 삼음. 왕이라는 고귀한 단어와는 달리 실생활은...
+ 생긴 모습은, 전형적인 땡중 스타일. 일단 머리는 박박 밀었고, 낡아 빠진 수도승의 옷을 입고 다닌다. 나이는 알 수 없음. 대충 아무리 젋게 봐도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중후함이 느껴진다.



# 플레임 블레이즈(Flame Blaze), 라르크
: 홍련의 왕과 계약해 엔트로피가 된 여성. 엔트로피로서 가진 또 다른 이름은 플레임 블레이즈로 그 이름은 홍련의 세계의 엔트로피들에게 대대로 물려져 온 최강의 전설의 엔트로피의 이름이다. 현재 라르크는 최초의 플레임 블레이즈의 현신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상당히 강하며, 역시 초대 플레임 블레이즈처럼 전투시 무기를 일절 쓰지 않는다. 그녀의 전투 방식은 힘을 최대로 이끌어 낸다기 보다, 최대한 억제하면서 필요한 힘만을 사용하는 스타일. 냉랭 무뚝뚝해 보이지만, 홍련의 왕, 염을 누구보다도 여자로서 사랑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있다.
+ 나이는 역시 알 수 없음. 다만 19세 정도로 보인다. 주황색의 단발, 붉은 눈동자에 자두색 롱스커트 원피스를 주로 입는다.



# 중재자, 디아블로
: 홍련의 세계의 중재자 중 한 명. 생긴 모습은 어쨌든 완전 악마지만, 세계의 이치를 깨닫는 데 태어난 모양은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는가? 어쨌든 염과 라르크와는 오랜 친구이며, 라르크의 스승이기도 하다.
+ 나이는 알 수 없음.



※ 홍련의 세계
: 어머니 세계이자 태초에 태어난 세계인 에덴이 파멸할 때 쪼개져 나간 커다란 조각 일곱개가 각자의 의지를 가진 세계로 태어난, 즉 일곱 세계의 하나이다. 이터널 블레이즈라는 일곱 세계, 아니 모든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세계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세계가 홍련의 세계이다. 조율하는 왕은 염.
+ 에덴의 커다란 파편 일곱 개는 일곱 세계로 태어났고, 에덴의 자그마한 파편들이 일곱 세계가 탄생한 이후,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역시, 각자의 의지를 지닌 세계로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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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편으로, gogo;;


졸린 상태에서 막 휘갈겨서, 하하,
(후다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