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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Flame Blaze

2006.02.27 13:26

아란 조회 수:53 추천:4

extra_vars1 불꽃의 공주님 
extra_vars2 -<font color=red>수정</font>- (上)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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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리 플라티네스 왕국의 유일한 정통 왕위 계승자. 이 왕국의 모든 건 당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의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중 나랑 가장 가까이 있던 늙은 남자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려서 그들이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에 대해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저 인형이 갖고 싶어.”

“예! 페이트 공주님.”

내가 인형을 갖고 싶으면, 그들은 방안이 가득할 정도로 인형을 갖다 주었고,

“저 꽃이 맘에 안 들어!”

“예! 페이트 공주님.”

정원에서 내 손가락에 상처를 입힌 꽃(장미)이 맘에 안 든다고 말하면, 바로 그 꽃들을 정원에서 모조리 잘라내 주었다.

“내무대신, 말이 되어라!”

“아, 예! 페이트 공주님!”

나의 이름은 페이트 룬 플라티네스. 당시 내가 태어난 세계의 기준으로 5살의 플라티네스 왕국의 유일한 왕위 후계자인 여자 아이.

“이럇! 이럇! 신난다! 달려라! 달려!!”

“아이구, 허리야!”

“더 빨리!! 더 빨리!!”

“네, 네. 공주님.”

하지만 그때는 그저 열심히 뛰어놀기 좋아하는 건강한 여자 아이에 불과했었다.


§ Princess of Flame §


8살 때부터 왕실의 법도나 역사 같은 것을 개인 교육 받게 되게 되었지만, 내가 어렸던 것도 있고 그저 주변에서 오냐오냐 떠받아 주기만 한 어린애였기에 늘 수업 때만 되면, 하녀들이 나를 찾아 왕성 이곳저곳을 헤매었다.

“공주님! 어디 계세요?”

역시나 하녀들이 나를 찾으려고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부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지금은 미안하게 느껴지지만, 그때는 나를 못 찾아 헤매는 것을 재미있어 했었다.

“역시 그 소문대로 일까?”

“그 가짜 공주 소문?”

“돌아가신 선왕 폐하와 왕비님은 그렇게 훌륭한 분이셨는데 전혀 안 닮았잖아. 하다못해 머리색도 눈동자 색도 다르고.”

“역시 진짜 공주님도 그 때 돌아가신 것일까?”

어린 나였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반쪽짜리 공주라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다. 다들 나를 공주님이라고 받들어 모시며 웃지만, 사실은 다들 나를 비웃고 있다는 것을.

“흥. 다들 뒤에선 비웃고 있으면서. 누가 뭐래도 난 공주야.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하나 뿐인 친 딸이라고.”

반발 심리였을까?
스스로도 자신이 진짜 공주인지 아닌지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더 제멋대로 무리하게 굴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Princess of Flame §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가 10살이 되었을 무렵, 동방의 나라에서 황태자가 내 10번째 생일을 축하해주러 왔었던 때가 있었다.

“이분이 야마타이 제국의 황태자세요. 공주님.”

동방의 국가에 대해선 그저 책에서만 읽어보았기 때문에 그때는 꽤나 환상에 사로잡혔던 때였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황태자라는 소년은 누구나가 호감을 가질 수 있는 대단히 잘 생기고 상냥한 모습이어서 나도 모르게 볼을 붉히기만 했었다.

“네가 소문의…”

하지만 그렇게 상냥하고 잘생긴 동방의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짜 공주구나.”

터무니없을 정도로 솔직하고 잔인했다.


§ Princess of Flame §


시간이 흘러 11살이 되고, 그리고 비어있는 왕좌를 물려받아 플라티네스 왕국의 어엿한 여왕이 되었다. 그리고 즉위식을 끝내자마자 내가 했던 일이 하나 있다.

“내 12번째 생일 전까지 성을 완전히 새로 개축하도록 해!”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럽고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내가 자라왔던 성의 모습이 매우 싫었었다. 내가 자랐지만, 언제나 가짜 공주가 아니냐는 소문과 내가 자란 성에서 야마타이 제국의 황태자란 자에게 들었던 말들이나…

“여왕 폐하, 하지만…”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거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봐왔지만, 저 인자해 보이는 늙은 대신은 내가 어렸던 때부터 내가 바라는 것은 뭐든지 알아서 다 해주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었지만, 하지만 그 순간부터 인자해 보이지 않고 뭐랄까, 비웃는 것 같아 보였던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었을 거다.

“아닙니다. 여왕 폐하. 하지만 그전에 결제해주실 것이 있습니다만….”


§ Princess of Flame §


“흥, 바보 같은 대신들. 이게 뭐야. 내 12번째 생일인데, 성은 아직도 공사 중이고, 고려인지 코레인지 하는 나라의 왕자랑 맞선을 보게 하려고?”

12번째 생일이자, 내가 여왕으로 즉위하고 맞는 첫 생일이었기에 나의 왕성이 있는 도시 전체에 축제를 열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즉위하자마자 뜯어 고치라고 했던 성은 아직도 공사 중이었고, 그것도 모자라, 대신들은 몰래 나와 고려라는 저 먼 동방의 나라의 왕자와 맞선을 보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우연찮게 알게 되었다.

“흥! 갈까 보냐!”

당연히 몰래 빠져나갔다.

“어디 나의 백성들이 내 12번째 생일 축제를 얼마나 즐겁게 즐겨주시는지 둘러 볼까나?”

나름대로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지 확인(?)해 본다는 핑계를 스스로 대었지만, 사실은 그저 여러 가지 행사들이 갑자기 귀찮아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스스로 자기 생일을 온 도시에 축제거리로 삼았으면서 정작 자신은 각종 행사들이 행사 당일 귀찮아서 멋대로 빠져나와 땡땡이친다는 멋진(?)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였던 것이다.

“아, 죄, 죄송합니다.”

한창 어떻게 놀까 고민하던 나는 어떤 꾀죄죄한 옷을 입은 꼬마 여자애와 부딪치게 되었다. 꼬마 여자애는 황급히 사과를 하며 급히 사라졌다.

“뭐야? 내 왕국에 저런 지저분한 백성이 있다니? 거기다 뭐냐고? 저 건방진 눈빛은?”

사과를 하는 꼬마 여자애와 잠깐이지만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 살의가 가득한 눈빛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는 몰랐다.

“에이, 그런 거 생각하지 말자. 오늘은 내 생일! 어떻게 놀아 볼까나? 엉?”

품에는 가지고 나온 지갑이 어디에도 없었다.

“설마… 이런 건방진 백성 같으니라고! 내가 누군지 알면 그냥 콱!! 아, 저 녀석!!”

사람들 틈에서 저 멀리 도망가는 아까 나와 부딪친 꾀죄죄한 꼬마 여자애를 발견하고 그대로 쫓아갔다.

“뭐야? 내 왕국에 이렇게 더러운 장소가 있었다니…. 아, 저 녀석! 거기 안서!!”

한참을 꼬마 여자애를 쫓아오다보니 도착한 곳은 빈민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기, 실례지만 왜 이 애를 쫓는 것이죠?”

고려에서 왔다는 내 또래의 소년을 만나게 되었다.


§ Princess of Flame §


동방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10살 때, 그 일 이후 아주 안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고려에서 왔다는 플라티네스 왕국에 대해 알고자 여행 왔다는 소년, ‘최원’은 왠지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이곳 지리에 대해 잘 모른다는 최원의 말에 괜시리 흥미가 생겨서 왕성을 몰래 빠져나올 때마다 자주 가던 공원이나 다른 곳을 신나게 돌아다니며 저녁노을이 질 무렵까지 놀았었다.

“어땠어? 좋은 나라지?”

나는 저녁노을을 보며 숲이 우거진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채로 옆에 앉아 있는 최원에게 물었다.

“그러네. 유이리.”

최원은 내가 최원에게 사용한 유이리라는 가명으로 부르며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사실, 내 진짜 이름은….”

그래서 헤어지는 선물 겸 깜짝 놀라는 최원의 얼굴을 볼 겸해서, 내가 플라티네스 왕국의 여왕이라고 밝히려고 했었지만, 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생일이라며 온 도시에 축제를 벌이거나 성의 개축 같은 걸 하기 전에, 이 나라의 여왕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곳 사람들 일이라든지….”

그곳 사람들 일. 내가 지갑을 소매치기 한 꾀죄죄한 꼬마 여자애를 쫓다보니 도달한 빈민촌.

“그건 일하지 않는 녀석들이 나쁜 거야!”

“일할 수 없는 거야. 일이 없어서 아침에 먹을 빵조차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도둑질까지 하는 아이도 있어.”

최원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술 더 떠서 정말 바보 같은 소리를 해버리고 말았다.

“빵이 없다면… 사탕을 먹으면 돼!!”

내가 들고 있던 막대 사탕을 최원의 눈앞에 보여주면서 아주 당당하게.

“넌 행복하구나.”

최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나중에 최원이 바로 고려국의 왕자인 ‘왕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주 조금은 가슴 아팠지만 철이 들게 되었던 것 같았다.


§ Princess of Flame §


내 12번째 생일은 그렇게 지나가고, 나는 관심 밖이었던 국정이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아주 조금은 열심히 관심을 가지고 일을 처리해 나갔다.

“여왕님도 오늘 따라 열심히 시네요.”

“유이리.”

유이리. 크기만 큰 왕성에서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한 궁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내가 갓난 아기였을 때부터 젖을 물려주었고, 가장 가까이서 나를 보살펴 준, 친 언니이자 친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동방의 왕자들은 다 건방진 것 같아. 다들 하나 같이 나에게 싫은 소리만 해. 하지만 그건 내가 어린애 같아 보이니까, 지는 조금 어른이라고 그렇게 말해서 잘난 척 하는 거겠지. 그래서 나도 조금은 어른이 되어 보일 거야.”

유이리는 그저 말없이 나를 품에 안아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여왕님은 분명, 훌륭한 여왕님이 되실 거예요. 분명, 아니, 그렇게 저는 믿고 있답니다.”


12번째 생일이 지나가고 얼마 안 있어, 성의 공사가 마무리 되고 일반 백성들에게 공개하는 때가 다가왔다.

‘나는 오늘, 이 성과 함께 훌륭한 여왕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은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Princess of Flame §


나는 한때 플라티네스 왕국의 빈민이었다가 난민으로 전락한 무리들 틈에 숨어 거친 사막을 걷고 있었다.
막 새로 고친 성을 일반 백성에게 공개하는 때에, 야마타이 제국이 쳐들어 왔다. 도시는 불타고, 성도 불타올랐다. 왕국에는 군대가 물론 있었지만, 그들 대다수의 군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야마타이 제국이 심어둔 스파이들과 내통하던 자들이 지휘권을 쥐고 있었기에, 응전한 군대는 몇 안 되었다. 나에게 늘 충성을 바친다는 대신들은 어느 새 하나 같이 나를 붙잡아 조금이라도 야마타이 제국에 좋게 보이려는 자들로 변해 있었고, 유이리가 아니었다면 벌써 붙잡혀서 그 보기 싫은 야마타이 제국의 황태자의 면상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다 망할 여왕 때문이야!”

“우릴 쫓아 낸 건, 야마타이 제국이라고.”

“내가 일자릴 잃은 건 여왕 때문이야.”

난민들 틈에 숨어서 걷는 내내, 들려오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나를 비난하는 말뿐, 그 외에는 그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들뿐이었다.

“뇌물이나 좋아하는 공무원들하고 건축업자들만 신나게 벌었지.”

“우리들의 혈세를 강제로 뺏어가며, 뜯어 고친 성은 야마타이 제국에게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지. 질려버리겠어. 망할 여왕.”

즉위하자마자 벌렸던 성에 개축 공사 명령.

‘내 12번째 생일 전까지 성을 완전히 새로 개축하도록 해!’

그리고 12번째 생일 때 만난 고려의 왕자가 공원에서 내게 한 말.

‘그래도 생일이라며 온 도시에 축제를 벌이거나 성의 개축 같은 걸 하기 전에, 이 나라의 여왕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곳 사람들 일이라든지….’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난민들의 사정보다는 그저 분한 마음에 속으로 ‘내 맘대로 하는 게 뭐가 나빠. 난 여왕이야.’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말했었다.

“역시 가짜였어. 소문대로….”

“선왕 폐하와 왕비님은 그렇게 훌륭한 분이셨는데 전혀 안 닮았어.”

‘내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네 녀석들이 뭘 알아!!’ 라고 분한 마음에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이 말라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 Princess of Flame §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는 요리는 처음… 이랄까? 내가 성에서 먹었던 화려한 요리들에 비하면 굉장히 보잘 것 없고, 맛도 형편없었지만, 하지만 너무나 맛있어서 처음으로 눈물을 다 흘리며 그 죽을 다 먹어버리는 나에게 난민 캠프에서 알게 된 ‘다르칸’ 이라는 소년이 나에게 ‘괜찮으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르칸. 너도, 여왕이 원망스러워?”

하지만 왠지 참을 수 없어서 물어보기를 겁냈던 말을 스스로 꺼내고 말았다.

“응.”

나의 물음에 다르칸은 바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짧은 대답 뒤로, 길지만 짧은 원망 가득한 이야기를 계속 해나갔다.

“우리 아빠는 요리사였어. 작지만 자기 가게를 가져서 매일 손님이 잔뜩 왔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도로를 만든다며 가게를 나라에 뺏겨선 아빠는 완전히 의욕을 잃었거든. 그 다음은 뻔한 스토리야. 술과 도박에 빚에 쩔어서는 나중엔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었어. 뒤를 돌아 볼 때마다 항상 생각해. 여왕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 해주고, 아무 말도 안 듣잖아? 그건 저렇게 높은 곳에 있어서 여왕에게 우리 따윈 전혀 안 보이는 걸 거야. 그래서 나도 여왕에게 기대하는 건 관뒀어. 절대 쳐다봐주지 않겠다고. 그 열 받는 생일잔치도 그래. 그러니까 난 역시 여왕은 싫어.”

원망만 가득한 이야기들. 하지만 도로를 만든다며 네 아버지의 가게를 뺏는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아니,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정말이야?”

“방금 다른 그룹하고 합류했다는데 거기에 섞여 있었다나봐.”

갑자기 옆에 있는 난민들이 수근 대며 소란을 피워대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다들 나에 대한 비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리와 모두들! 왕궁에서 일하던 궁녀를 한 명 잡았어!”

순간 혹해서, 그들 난민들 틈에 섞여 따라가게 되었고, 그곳에는!

“본 적 있어, 이 여자. 페이트 여왕의 측근이야!”

“우리가 굶주릴 때 이 녀석은 편안히 지내놓고, 이제 와서 우리들 틈에 섞여서 도망치려 하다니.”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유이리가 있었다.

“너희들 탓이야!”

“내 자식을 돌려줘!”

“집도, 일자리도!”

“이게 다 너희가 그 멍청한 여왕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뒀기 때문이야!”

난민들의 분노와 쌓이고 쌓인 모든 것이 유이리에게 마구 쏟아져 부어졌다. 그들 난민 중에 한 명이 돌을 던지자 이내 거기 있던 난민들 모두가 유이리에게 돌을 던졌다.

“빌어먹을 야마타이 제국에 넘겨버릴까?”

“아니, 그 정도론 화가 안 풀려. 책임지게 해!”

“그래. 우리가 빼앗긴 걸 이 녀석한테도 뺏어버리자구!”

나쁜 건 나인데, 어째서 유이리가?.

‘여왕님은 분명, 훌륭한 여왕님이 되실 거예요. 분명, 아니, 그렇게 저는 믿고 있답니다.’

유이리가 예전에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온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멍청한 나를 믿어주고 보살펴 준 것뿐인데.

“꼴좋지?”

“저, 저 자는 그저 궁녀잖아.”

다르칸이 어느 새 내 옆에 와서 싸늘한 눈빛으로 돌을 맞는 유이리를 보며 내게 말하였다.

“똑같아. 여왕이 그렇게 멋대로 구는 걸 잠자코 보고 있었어. 그 탓에 우린.”

뭐라고 반박해야 하는데. 유이리는 나쁘지 않았다고. 멍청한 건 나였다고.

“단 한 번 기회를 주지. 여왕은 지금 어딨느냐! 말하면 살려주마!”

내가 다르칸에게 반박할 말들을 찾고 있을 때 어느새 유이리는 돌을 온 몸에 맞아 피투성이인 채로,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유이리. 그래 나야 말로.’

나야 말로, 플라티네스 왕국의 여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여왕이라는 것을 말한다면,

‘어째서.’

이상했다. 늘 하던 대로 당당하게 앞으로 나가 내가 여왕이라고 나는 ‘페이트 룬 플라티네스’라고 소리 높여 외쳐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왜 움직이질 않는 거야?’

발이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혀도 말을 듣지 않는다. 그저 뺨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뿐. 어째서? 어째서 내 몸인데 말을 듣지 않는 거야?

“정말 모르냐?”

“설마 그딴 여왕을 위해 죽겠다는 건 아니겠지?”

내가 어떻게든 발을 움직이려고 끙끙 대는 동안 유이리는 폭도로 돌변한 난민들에게 끊임없이 당장이라도 절벽에 내밀릴 판이었다.

‘내 발이면 어떻게든 움직여 보란 말이야! 나는!’

그 순간 유이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내게 있어서는 억겁이나 다름없는 찰나의 순간.

“모릅니다.”

유이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것도 그렇게 편안한 얼굴을 하고서는.

“설사 안다고 해도 절대 말 할 수 없어요.”

유이리가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아주 조금씩이지만 눈물이 맺혔다.

‘엄청 무서울 텐데, 어째서?’

나의 두 손으로 벼랑 끝으로 스스로 뛰어 내리는 유이리를 붙잡기 위해 내뻗어졌지만, 발은 결코 한 발자국도 앞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시시하게. 조금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다거나 빌어보라고.”

다르칸의 냉랭한 한마디에 말을 듣지 않던 내 발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유이리가 뛰어내린 벼랑과는 완전히 정 반대의 방향으로.


§ Princess of Flame §


“내겐 나라도‥ 친구도‥”

태양이 뜨겁게 달구는 쓸쓸한 사막을 홀로 걸어 나가며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여왕의 긍지조차…”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뜨거울 것이 당연한 모래밭에 쓰러졌지만, 이미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젠 됐어. 이걸로 끝인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이젠 편히 쉬겠다고 두 눈마저 감아버렸다.

“끝은 반대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지.”

누군가의 목소리. 나는 간신히 두 눈을 떠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

목이 말라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 남자는 마치 내 마음 속을 읽기라도 하는 듯,

“붉은 세계를 조율하는 홍련(紅蓮)의 왕, 염(炎)이라네.”

그것이, 내가 몰랐던, 왕이라는 존재. 그 중에서 홍련의 왕인 염과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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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트 룬 플라티네스
: 연보랏빛 머리카락과 연파랑색의 눈동자를 지닌, 12세의 귀여운 소녀. 어렸을 때부터 플라티네스 왕국의 공주로 키워졌지만, 사실은 12년 전 플라티네스 왕성에서 있었던 사건에서 없어진 진짜 공주를 대신하기 위한 가짜. 어쩄든 철이 없어 보이지만, 자신이 반쪽 공주라는 사실은 눈치 채고 있어서, 더더욱 멋대로 굴었다.



# 유이리
: 30세. 옆으로 땋아 내린 갈색의 머리카락과 암갈색의 눈동자를 지닌 부드러운 인상의 여성. 페이트가 갓난 아기였던 시절부터, 젓을 먹이는 유모이자, 가장 곁에서 돌봐준 궁녀로 페이트가 그 넓은 왕성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



# 왕건(최원)
: 야마타이 제국과 맞먹는 군사 대국, 고려의 왕자. 13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사는 생활상에 관심이 많다.



# 다르칸
: 12세의 플라티네스 빈민가의 소년. 야마타이 제국의 침략으로 난민으로 전락하면서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여왕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더해졌다.



※ 플라티네스 왕국
: 2천년의 역사를 지닌 왕국. 그러나 12년 전 사건으로 선왕과 왕비가 암살 당한 이후, 왕국의 운은 다해가는 듯.



※ 고려
: 역사는 비록 400년 정도 밖에 안 되지만, 가히 동방 최고의 군사대국, 야마타이 제국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군사대국으로, 강력한 궁수들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 여기서 말하는 고려라는 나라는, 우리가 사는 지구에 있었던 그 고려가 아님. 다른 차원에 있는 같은 이름을 지닌 나라라고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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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편으로 이어짐.

한가지 분명히 해둘 것은,

페이트 룬 플라티네스가 사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아님.

페러렐 월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