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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Flame Blaze

2006.02.02 06:51

아란 조회 수:257 추천:6

extra_vars1 <font color=red>First Kiss</font> 
extra_vars2 Fire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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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라지고 나와 캐서린 앞에 나타난 사람은, 나의 누나였다.

“으, 윽.”

캐서린의 떨리는 목소리.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엔 꼭 누나를 말리고 말 것이다. 반드시.

“왜 또 나타난 거지?”

“으흑….”

캐서린이 뒷걸음질을 치며 내는 발자국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지만, 하지만 나의 마음 속 결심과는 달리, 나는 누나에게 단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사라져. 그리고 은태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마.”

누나의 목소리는 작고 차분했지만, 하지만 나는… 아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자, 잠깐! 캐서린!!”

서둘러 손을 뻗어 캐서린의 팔을 거칠게 잡아 멈추었다.
누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캐서린은 뛰어나갈 참이었는지, 하마터면 나도 넘어질 뻔 했다.

“은태야.”

누나가 내 이름을 불렀지만, 지금 난 누나의 두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잠깐 마주쳤지만, 무표정한 얼굴의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그 진홍의 눈동자를 마주치기엔, 내가 알던 누나와는 완전 다른 사람 같았기에 그래서 지금은 마주할 수가 없었다.

“희 누나.”

나는 양 손으로는 어떻게든 달려 나가려는 캐서린의 오른팔을 붙잡고, 나의 입은 누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의 두 눈은, 캐서린을 바라본 채.

“은태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니겠지?”

등 뒤로 누나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캐서린이 심하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숨을 잠시 고른 뒤, 용기를 내어-마주보지 않고 말하려 하는 것도 용기라면- 나는 입을 열었다.

“누나, 잠깐 캐서린과 이야기하면 안 돼?”

“안 돼!”


∮ Flame Blaze ∮


종례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청소 당번인 애들은 청소하고-또는 빼먹거나- 당번이 아닌 애들은 가방을 챙겨들고, 교실을 부리나케 빠져 나가는 그야말로, 다람쥐 쳇 바퀴나 다름없는 일상의 모습.

“어제 옆 동네에 미사일이 떨어졌데.”

“무서웠겠다.”

귀가하는 애들이 쑥덕거리는 이야기는 지금 전 세계(지구)를 휘말리게 한 커다란 전쟁, 일명 3차 세계대전이라 붙여진 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우리나라는 미국의 우방으로서, 전쟁 개시하자마자 쑥밭이 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전쟁이 터지기 약 2개월 전 실상 미군이 우리나라에서 돌연 철수를 하였고, 정치하는 어른들이 뭘 잘못 먹었는지, 중립을 선언한 덕분에 이 땅은 지금까지 무사한 것이었다.

‘난… 캐서린이 아니야. 프로즌 리버 家(가)를 이어나갈 「네야 프로즌 리버」야.’

캐서린… 그녀는 그렇게 그녀의 본명이 ‘네야 프로즌 리버’라고만 알려준 채, 나를 뿌리치고 떠나버렸다. 나는 네야 프로즌 리버, 그녀를 다시 붙잡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지?”

네야-캐서린-이 교실에 없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단 하루 밖에 같이 수업을 하지 않은 전학생. 하긴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건데, 전쟁 통에 언제 영국에서 이곳 중립국 한국에 올 수 있을까? 그것보다도, 그날 하루만큼은 모두들 그녀를 전학생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캐서린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취급을 하고 있었다. 출석표에는 물론, 그 누구도 캐서린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걸까? 하긴 알고 있다고 해도, 나에겐 아무런 힘이 없지.”

늘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

“잠깐 어디를 가나? 땅콩?”

아무래도, 토요일의 평범한 일상에 하나 더 스케줄이 추가되는 것 같았다. 나쁜 의미로.


∮ Flame Blaze ∮


“윽!”

그들 패거리는 나를 골목의 구석진 곳에다 냅다 밀친다.

“어이, 땅콩? 도대체 그 괴물들은 뭐야?”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알 지?”

나를 구석진 골목에 몰아넣고, 윽박지르며 금방이라도 주먹질을 할 것같이 보이는 험악한 패거리들은 내가 다니는 유정 중학교의 그러니까, 일단은 별 볼일 없는…

퍽!

정신이 순간 멍해졌다. 그 다음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픔이 왼쪽 뺨에서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이 땅콩XX가 우리 형님께서 궁금하다는데, 땅콩XX주제에 감히 형님 말을 씹어!!”

아무리 그렇게 윽박질러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어이, 땅콩. 8초 9초 다 필요 없다. 10초 안에 대답해라. 대답 안 하면 알 지?”

어쩌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싸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들 과연, 이 평범한(?) 애들이 믿어 줄 거냐? 는 말이지? 정말로 두 눈 뻔히 뜨고, 불꽃과 얼음덩이가 튀기는 것을 직접 봐도 믿을까 말까인데,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시간 됐다.”

아, 아니에요! 무, 무조건 다 대답 할 테니까, 제발!!

“얘들아, 밟아!”

패거리들이 와아, 소리를 내며 내게 몰려들고 있었다. 이놈의 입은 왜 이런 중요한 순간에 한 마디도 못 꺼내느냔 말이야? 이제, 난 운이 좋으면 최소 병X 정도로 끝나겠지… 하지만 분명 누나에게는 내 시체가 전달될 것이고, 누나는 이 동네를 다 불태워 버릴 거야. 아마도 그럴 것이고.

“그만두세요!”

패거리들의 목소리로 혼잡한 골목에서 확연하게 들리는, 구원의 목소리의 정체는 나중으로 치더라도, 일단 패거리들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는 것. 이 틈에 도망을 쳐야겠지만, 마땅히 도망갈 구석이 전혀 없었다.

“이게 누구야? 설마, 땅콩 녀석의 애인이라도 되는 거냐?”

좀, 쪽수를 데리고 다닌다고 대단한 척 막말하는 저 녀석은, 이 별 볼일 없는… 이 아니라, 웃기지도 않는 ‘경기 지존’ 파의 보스(BOSS)라는 ‘최강건’이라는 녀석이다. 이름그대로 정말로 덩치만 보면 강해보였지만, 솔직히 누나의 싸움에 휘말린 것이 아니라면, 나도 의도적으로 피해 다니니까 면상 마주 볼 일은 없겠지만,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민… 정아.”

서민정.
나와 어렸을 때부터 같이 놀았던 소꿉친구인 건강한 여자애라고 단 한 줄로 설명이 될까? 어쨌든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그 흔한 감기도 잘 안 걸리는 강력한 체력과 체육을 좋아하는 건강미 넘치는, 내가 부러워하는 소꿉친구였다. 소심해서 늘 또래에게 따돌림 당하고, 괴롭힘 당할 때도, 민정이는 늘 항상 나랑 같이 놀아주고, 지켜주었다고 할까나? 아, 물론 지켜준다는 얘기는 학교에서의 이야기와 몇 군데 골목길 이야기지만, 하여간 지금 그녀는 바보같이도 또 나를 지켜주려고 하고 있었다.

“짝짝이 눈깔년, 아무래도 똘마니 몇 놈 손봐준 것만으로 자기가 뭔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본데, 이번에는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나?”

짝짝이 눈, 나도 이전에 그런 이름으로 민정이를 불렀던 적이 있었다. 뭐 어릴 때 막말하던 시절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설명을 첨부하자면 민정이는 태어날 때부터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일명 오드 아이(Odd Eye)이다. 더 자세히 적자면, 오른쪽 눈동자는 옅은 녹색, 왼쪽 눈동자는 옅은 갈색.

“나도 여자는 때리고 싶지 않거든. 이래보여도 페미니스트라서 말이야. 그러니 좋게 말 할 때 못 본 척 하고 썩 꺼지는 게 어때? 짝짝…”

퍼-억.

민정이는 강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건의 면상을 향해 오른쪽 다리로 킥을 먹여버렸다. 하지만,

“페미니스트이긴 하지만, 여자에게 맞고 살 정도로 좋은 남자는 못 되거든. 짝짝이 눈깔년.”

강건의 코에서 피가 흘렀고, 강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강건의 두터운 왼손은 민정이의 오른쪽 다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그저 허풍인가 보네? 얼간이.”

이 목소리는? 설마 누나?

“히, 히에엑!!”

“무, 무조건 튀어!!”

민정이의 오른쪽 다리를 붙잡고 있는 최강건을 제외하면, 나머지 패거리들은 죄다 꽁지가 빠져라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뭐, 그 시장에서 전투로 우리 누나의 소문이 좀 그래 났을지도 모른다지만, 어째서?

“아, 아닙니다. 누님, 이, 이건 그러니까 페미니스트 가, 강의 중이었…”

강건이 부들부들 떠는 것도 모자라, 어느새 바지에는 오줌을 지렸는지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아, 강의 중이었구나. 그럼 나도 강의를 하나 하도록 하지.”

누나는, 그때와는 다른 공포감을 잔뜩 주변에 흩뿌리며 천천히 강건에게 다가가서는, 그대로 강건의 면상에다가 퍼억! 소리가 청명하게 들리게 펀치로 날려주었다.

“내 동생 은태에게 한 번만 더 손을 대봐라!! 그때는 알 지? 얼간이?”

개거품을 물며 쓰레기통에 처박힌 강건은,

“내 얼간이입니다. 누님.”

라고 중얼거리며 게거품 물고 고꾸라졌다.


∮ Flame Blaze ∮


“누나 그랬던 거야!!”

은태가 놀라서 내게 소리친다.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여 버렸으니 조금은 사실대로 이야기 해야겠지.

“알바만으로는 어떻게 생활비가 충당이 안 되니까 은태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이런저런 이유로 좀 양아치들을 갱생시키면서 갱생비용을 좀 받은 거뿐이야.”

랬지만, 왠지 나답지 않게 말을 이리저리 비비꼬아대는 건 뭘까?

“자, 여기 돈까스 정식 2인분 나왔어요.”

은태랑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민정이가 쟁반에 주문한 돈까스 정식 2인분을 가지고 나오며 청명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 민정이니? 아버지는 요새 어떠시니?”

“여전히 식당에서 매일이세요.”

“아, 그래?”

여전히 식당에서 매일이라? 아, 참고로 나와 은태, 그리고 민정이가 있는 이곳은 민정이의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작은 분식점이다. 어쨌든, 여기에 단순히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닌 만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정이의 쟁반을 낚아채서, 은태 앞에다 내려다 놓았다.

“아, 저기 언니? 오늘은 알바하시는…”

민정이가 하는 말대로, 사실 오늘은 여기 분식점에서 알바를 하는 날은 아니다. 월, 수, 금. 이런 요일에, 오후 파트타임 알바지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단순히 식사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민정이의 말이 끝나기 전에 걸치고 있는 앞치마까지 빼앗아 걸쳤다.

“값은 몸으로 때우려고. 그러니 민정이는 은태랑 같이 먹고 있어.”


∮ Flame Blaze ∮


“하아, 정말 누나는?”

돈까스 2인분 정식을 시켰을 때는 분명, 나랑 같이 식사하는 줄 알았지만, 어째서 그렇게 말해버리는 지.
누나가 알바뿐만 아니라, 양아치들을 강탈-좋게 말해서 갱생-해서 생활비에 보탠다는 것은 나름대로 충격이었지만-아마, 누나가 플레임 블레이즈인지 뭔지 인지 몰랐다면 더 충격이겠지- 그런데, 민정이네 아버지가 운영하는 분식점이란 것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놀러갔으니까 알고 있었지만, 누나가 이곳에서 알바를 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은태는 주희 언니가 좋지 않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그냥, 뭐랄까, 누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었달까?”

민정이는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왜 나는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인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그래?”

“응?”

어쩐지 괜히 서먹서먹해진다.
그러고 보니 왜 늘 이 모양일까? 오늘 만해도, 민정이는 나를 구해주려다가 크게 당할 뻔  하였다. 드라마 같은 데서는, 정 반대로, 내가 구해주어도 모자랄 판인데,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부터, 난 늘 누군가 지켜주기만 했었다.

“미안.”

“응?”

“내가 약해서, 민정이가 그런 험한 꼴을 당할 뻔하게 만든 거. 아깐 정말 미안했어.”

왠지 민정이의 색이 다른 두 눈을 마주보며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돈까스를 보며, 나는 말하였다.

“괜찮아. 괜찮아. 그 녀석의 얼굴을 차 준 건, 내 의지였으니까.”

“아, 그래?”

“그보다, 돈까스 식겠다. 빨리 먹자. 모처럼 아빠가 은태가 왔다고 기합을 넣어서 만들었으니까.”


∮ Flame Blaze ∮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가? 플레임 블레이즈.”

민정이의 아버지, 서지우.
그는 보통 인간으로 보이지만, 이곳 세계 시간으로 20년 전만 해도, 나와 같은 파괴자였던 자로서, ‘웃지 않는 광대’라고 불린 자였다.
그림자의 린(麟)의 마도사 가문 중, 디바이스로는 최강의 가문인 서(曙)씨 가문을 이어나갈 장남이자 최고의 마도사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우연찮게도 한 명의 왕에게 선택받아, 한 명의 왕과 하나의 세계를 지켜야 할 의무를 떠받들게 된 엔트로피가 된 남자였다.

“그런 부탁을 한 대도,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변했군.”

변했다, 라? 정말로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나는…

“아직도 너와 싸웠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 전 일이 되어버렸군.”

서지우가 어떤 이유로 한 세계와 왕을 보좌하는 엔트로피에서, 파괴자로 변질되어 버렸는지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다만, 20년 전 나는 파괴자로 변질된 그, ‘웃지 않는 광대’와 싸웠고 쓰러뜨렸다. 왕을 증오하는 존재가 파괴자이지만, 그렇다고 다 같은 파괴자들은 아니다. 서로의 신념과 목적이 충돌하면, 설령 같은 파괴자라도 싸워서 쓰러뜨릴 뿐이며, 심지어 목적만 맞아 떨어진다면, 왕의 엔트로피와 일시적인 동맹까지 맺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 제가 당신을 죽이지 않은 것을 아직도 후회하시는 지?”

“후회한다고 생각하나? 이젠 아니네. 덕분에 어떤 식으로든 살아간다는 것이 좋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비록 힘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인간이란 존재가 되었어도 말일세.”

“후회하지 않으신다니, 다행이군요. 하지만…”

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은태와 민정이를 살짝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요리하는 법을 배우고, 이 세계의 법칙을 알게 되고, 그리고 사랑하는 딸애를 얻은 이 세계는 정말로 멋진 세계이지.”

서지우의 양 손은 열심히 요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나만이 알아 볼 수 있는 깊은 수심이 보였다.

“비록, 사고로 아내를 잃고, 술에 잠시 쩌는 바람에 민정이를 방치하다가, 자네 덕분에 다시 제 정신을 차리고, 여기까지 왔지만, 어느새 이 세계는 자기들끼리 커다란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래도 나는 이 세계를 좋아한다네. 자네와 싸워 패한 뒤, 모든 것을 잃고 인간이 되어버린 나를 일으켜 준… 유신애, 그녀를 처음 만난 세계니까.”

지우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나와 신애 사이에서 태어난 딸, 민정이가 왕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지우는 말끝을 흐리며, 다음 주문을 받아 다시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민정이 역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왕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항간에는 무정한 학살자로 알려져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는 사람의 딸을 죽일 정도로 무정하지는 못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정하지 못한 저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고요!”

무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나를 거두어준 아버지 같은 홍련(紅蓮)의 왕의 엔트로피로 선택되지 못하고, 나의 무정하지 못함은, 결국 아버지인 홍련의 왕은…

“나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 하지만, 벌통에 2마리의 여왕벌이 같이 태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그건….”

지우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이 세계를 벌통이라고 치면, 은태나 민정이는 아직 번데기에 불과한 여왕벌이라고 할 수 있지. 꿀벌의 경우에는, 어느 한쪽이 먼저 우화하는 경우가 있어서 우화한 쪽이 아직 번데기인 여왕벌을 독침으로 찔러 죽일 수가 있지. 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좋을 거야. 하지만, 불행히도 왕이라는 존재나 세계라는 존재는 꿀벌과는 다르지. 두 명의 각성하지 않은 왕이 한 세계에 같이 태어난다는 경우도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이미 일어난 경우가 몇 있고, 그리고 어느 한쪽이 먼저 각성하면, 다른 한쪽 역시 원하든 원치 않던 각성하게 된다.”

“그리고, 세계라는 벌통에는 단 한 명의 왕의 존재를 인정할 뿐이기에, 두 명의 왕은 자신의 소중한 존재를 걸고, 한쪽을 죽여야 끝나는 싸움을 해야 한다. 이 싸움에는 다른 세계의 왕의 엔트로피나 존재들은 물론, 심지어 파괴자나 중제자들도 참견할 수 없다. 오직, 두 명의 왕만이 자신의 세계의 진짜 주인이 되기 위해 서로 싸울 뿐. 엔트로피와의 계약 역시 당연히 불가하다. 싸움에서 이긴 자는, 왕으로서 남고, 패한 자는 자신의 소중한 존재와 함께 사라져갈 뿐이다.”

지우의 말을 이어서 내가 말하였다. 가장 싫은 최악의 전개. 누가 말릴 수 없는 일명 여왕벌 싸움. 왕이 실질적으로 직접 싸우는 경우는, 이때뿐이지만, 그렇기에 가장 슬픈 싸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주희, 당신이 아직 번데기인 민정이를 죽여주면 안 되는 건가?”

“언제나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만 이야기 해두겠습니다. 무정하지 못한 나라서 아는 사람의 딸을, 설령 왕이라고 해도 죽이지 못하는 것은 이해바라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당신도 당신의 딸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저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겠지요.”

너무나 사랑하니까, 그래서 그런 여왕벌 싸움 같은 절대 괴로운 싸움 같은 것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손으로 죽일 정도로 무정하지는 못하겠지. 여왕벌 싸움이란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 고통스런 싸움인지는, 일전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 왕을 죽이기 위해 찾았던 한 세계에서 진절머리 나게 지켜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여왕벌 싸움이라 불리는, 그것은 다른 세계의 왕의 엔트로피나 다른 세계의 존재, 파괴자와 중제자란 존재 역시, 절대 참견할 수는 없으나, 그저 지켜보고 승패의 결과에 대한 증인의 역할 밖에 할 수 없으며, 한 번 지켜볼 경우, 싸움이 끝날 때까지 반드시 지켜보아야 한다. 그저 지켜 볼 뿐인 거였다.

“누나, 나 먼저 집에 가볼게.”

“아빠, 주희 언니. 저 은태를 바래다주고 올게요.”

은태와 민정이를 보고 있자니, 왠지 슬퍼졌다. 아무래도 슬슬 결단을 내려야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 Flame Blaze ∮


“바래다주어서 고마워. 민정아.”

사실, 민정이가 바래다 줄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거절하기 어려웠다고 할까? 민정이는 꽤 어렸을 때부터 같이 놀았던, 누구에게나 있는 소꿉친구이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 제일 처음 이해하게 된 친구이기도 하고.

‘오드 아이가 뭐가 좋아!! 너란 애 정말 싫어!!’

잘 기억이 안 나지만, 8살인가 9살인가? 하여간, 언제나 열심히 뛰어다니며 밝게 웃었던 그녀에게 ‘나도 민정이 같은 눈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 라고 그땐 정말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가 뺨을 얻어맞은 기억이 난다. 그 일이 있은 후, 잠시 우리 사이는 소원해지긴 했지만, 오히려 난, 그 일로 인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하였다. 물론 사과는 10살 때 하였지만.

“나야 말로 고마운 걸. 은태야.”

민정이는 두 눈동자의 색깔이 오른쪽 눈동자는 옅은 녹색, 왼쪽 눈동자는 옅은 갈색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꽤나 평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쪽 머리를 위로 올려 묶은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에 키는… 인정하긴 싫지만 나보다 크다, 정확히는 내가 여학생들의 평균 키보다 작다고 해야겠지만.

“저기, 민정아, 아깐 정말로… 고마웠어.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강해질게. 최소한 너 하나는 지킬 수 있게 말이야.”

“괜찮아. 은태야. 이대로도 상관없어. 왜냐하면 난, 보호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켜주는 왕자님이 되고 싶으니까. 솔직히 은태의 언니의 강함은 부러워.”

이게 아닌데?
어쨌든 확실히 민정이는 보통의 여자애들과는 좀 많이 다른 편인 것 같았다. 그것보다 민정이 얘가 왜 내 어깨에다가 손을 올려놓는 거야? 거기다가 왜 무릎을 굽혀서 시선을 맞추냐고?

“음, 확실히 은태는 좀 키가 작은 걸.”

겨우, 키가 작다는 거 하나 말하려고, 이 난리인가? 안 그래도 땅콩이라는 소린 미치겠는데, 민정이 너마저 그런 소리를 하면… 좌절할 수밖에 없잖아.

“어른들 땅따먹기, 덕택에 물가가 비싸져서 칼슘 섭취랑 영양 섭취가 많이 부족해서 키를 키우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민정이 너도 잘… 우웁!!”

뭐, 뭐지? 입술에 느껴지는 이 부드러운 감촉은? 그, 그러고 보니 바로 눈앞에는 민정이가 두 눈을 감은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 서, 설마…

“….”

“….”

잠시간의 정적이 계속해서 흘러간다. 단 몇 초의 불과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단 1초라도 억만년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나도 모르게 바라고 있는 것은 왜일까?

“아, 시, 시간이 나도 참?”

침묵을 깬 것은 민정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간데다 김이 모락모락, 살짝 찌르기만 해도 터질 것 같아 보였다.

“미, 미안! 아, 아까는, 그, 너무 신경 쓰지 마!!”

민정이가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조용히 손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대보았다. 아직도 남아 있는 온기와 향기.

“이것이….”

왠지 갑자기 빈혈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저 보이는 모든 것이 흔들흔들 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첫 키스… 를 빼앗겼다라고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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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벌 싸움
: 세계를 벌통이라고 가정하고, 왕을 여왕벌이라고 가정했을 때, 한 벌통에는 한 마리의 여왕벌만이 인정되고, 행여나 두 마리의 여왕벌이 동시에 우화하면, 한 마리만 인정됨으로 두 마리의 여왕벌은 싸워야 되고, 한쪽을 죽일 때까지 끝나지 않는 싸움. 즉, 일종의 비유인 셈이다.
다만, 꿀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꿀벌의 여왕벌은 어느 한쪽이 먼저 우화하면, 아직 번데기나 애벌레 상태의 여왕벌을 먼저 가서 독침으로 찔러 죽일 수 있지만, 왕의 경우는 어느 한쪽이 먼저 각성하면, 다른 한쪽도 자동으로 각성하게 된다는 점이 다르달까?
이 경우, 한 세계에는 벌통과 마찬가지로 단 한 명의 왕만이 인정된다. 그럼으로 두 명의 왕은 서로 싸워서 한쪽을 죽일 때까지 끝나지 않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엔트로피는 물론 계약할 수는 없으며, 다른 세계의 왕과 엔트로피나 다른 세계의 존재들, 심지어 중제자나 파괴자 역시, 절대 참견할 수 없이, 그저 증인으로서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 그것을 어기면, 참견 받은 세계의 강력한 반발로, 박살나거나, 불구가 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큰 해를 입게 된다.
+ 싸우게 될 각성한 왕은, 엔트로피를 가질 수 없지만, 허나 가장 소중한 존재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 물론 싸움에서 목숨을 잃으면, 가장 소중한 존재의 목숨도 사라지며, 혹은 싸우지 않고 도망가겠다고 할 경우, 도망가는 왕은 모든 것을 잃고 그저 평범한 존재가 됨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지만-이 경우, 도망치지 않은 왕이 자동으로 이긴 것으로- 역시, 가장 소중한 존재의 목숨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 한 세계에 아직 각성하지 않은 왕이 두 명이 태어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다만, 여왕벌 싸움 같은 경우는 매우 희귀하지만 매우 처절한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 민정
이름 : 서민정
성별 : 여
나이 : 14
신분 : 유정 중학교 2학년 재학 중
설명 : 짙은 갈색에 오른쪽 머리를 올려 묶었음. 오드 아이(Odd Eye)로서, 오른쪽 눈동자는 옅은 녹색이고 왼쪽 눈동자는 옅은 갈색, 또래보다 키가 큰 편(당연히 은태보다 크다.)이다. 가족은 분식점을 운영하는 아버지 서지우와 돌아가신 어머니인 유신애이다. 성격은 늘 명랑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오드 아이에 대해 크게 상처를 받아 있으며, 그것을 이해해주는 이는 은태와 주희, 아버지뿐이다. 아버지를 늘 걱정하는 보기 드문 효녀 타입이며, 은태와는 어렸을 때 같이 놀고 지낸, 소꿉친구이자 학교나 유치원에선 자칭 은태의 보디가드인 체육을 좋아하는 건강한 소녀.
+ 아직 각성하지 못한 왕.
+ 단순한(?) 소꿉친구지만, 은태에게는 오래 전부터 자신도 모르는 감정이 조금씩 싹트고 있었던…



# 서지우
: 민정이의 친 아버지이자, 그림자의 린(麟)의 마도사 가문 중, 최고의 디바이스 제조 기술로 유명한 서(曙)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 세계의 왕에게 선택된 엔트로피였던 남자. 어떤 사유로 자신의 왕을 잃은 이후로는, 시간이 다시 흘러 늙어죽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는 그를 파괴자 ‘웃지 않는 광대’로 변질시켜버렸다. 그 후, 신념의 차이로 20년 전, 현재 은태가 있는 세계에서 플레임 블레이즈와 싸운 끝에, 패배하고 파괴자로서 가진 모든 힘을 잃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지금은 이 세계에 잘 적응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 서씨 가문이 만든 최후 최강의 디바이스, 빙결의 지팡이 듀랜달(Durendal)을 소지하고 있지만, 봉인 중이다. 참고로 듀랜달은 인공 링커 코어가 장착되어 있는 만큼, 링커 코어가 없는 자라도 마술을 사용할 수 있다. 덤으로 최신식 카트리지 시스템과, 자체 AI를 가지고 있다.
(어째, 나중에 네야 프로즌 리버에게 넘어갈 분위기잖아;;)
+ 여왕벌 싸움이라는 처절한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플레임 블레이즈인 주희에게 자신의 사랑하는 딸인 민정이를 죽여 달라고 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죽기를 바라고 있지 않다. 민정이도, 민정이가 좋아하는 은태도.
+ 진짜 인간이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늙어 죽습니다.(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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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간만에 올리는 여섯번째 불꽃이네요;;

어쨌든, 커다란 폭탄 하나 깔아두고,
(일명, 여왕벌 싸움이라는...)

네야 프로즌 리버는 저멀리 차버렸심~
(그저 은태가 캐서린의 진짜 이름을 아는 것 정도로 끝~)

여하여간, 우리 주희 누나는, 알바 만으로는 영 생활비 충당이 안되기 때문에, 근방의 양아치들을 개과천선 시키는 대신, 그 비용을 받아(삥 뜯는게 아니라?) 챙기고 있었죠;;

어쨌든 문학소년 쉐르몽, 다음 턴 열심히~

# 순서
아란 → 문학소년 쉐르몽 → BARD OF DESTINY → 다르칸 → 갈가마스터



p.s 솔직히, 쓰면서 속이 느글느글 했다는;;
p.s2 뭐, 언제나 그랬지만, 날린 부분이 많은 분량만 많은 글이지만, 잘 읽어주시길... 리플은 기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