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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DESTINY」 運命의 系統樹

2006.05.10 03:59

갈가마스터 조회 수:143 추천:4

extra_vars1 최후의 결전 Part 1 
extra_vars2 33(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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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맹성. 진마국의 수도이자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외적들의 침략을 타파해온 최고의 요새. 수많은 종족들의 피와 역사가 깃들어 있는 이 검은 고성은 마을 뒤로 완만하게 솟은 구릉 위에 우두커니 서서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마을은 축제라도 벌이고 있는 듯 밤조차도 밀어내는 불빛으로 환히 빛나건만, 그들의 군주가 살고 있는 혈맹성은 아무런 불빛도 없이 완벽한 어둠속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비교적 높은 구릉 위에 축조되어 있는 웅대한 성벽 뒤로 수많은 첨탑들과 왕족들의 궁전이 보였다. 그 모습과 양식들은 제각각이라 누가 보더라도 그것들이 시대의 흐름과 필요에 따라 덧붙여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듯, 그 중심에는 언제나 거대하다는 말론 부족한 ‘흑색 첨탑’이 웅장한 위용을 갖추고 서있었다. 마치 거대한 마상창(Lance)처럼 날카롭고 투박한 형상을 지니고 있는 첨탑은 대대로 마왕들의 권위와 힘을 상징하며, 드넓은 하늘을 찌르는 하나의 창으로서 그 위력을 과시해왔다. 게다가 비록 겉모습은 투박하나 이 탑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조각들과 아름다운 문양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조차 그것의 예술적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을 정도였으며, 벽돌 하나하나에 장인의 영혼이 깃들어있는 아름다운 사각뿔 형태의 지붕과 네 개의 방위를 지키듯 그 꼭지점에 앉아 있는 흑사자상은 몇백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모습으로 이 진마국을 굽어 살피고 있었다. 그 지붕 아래 마치 하나의 거대한 눈처럼 자리 잡고 있는 고풍스러운 원형 시계는, 달빛을 받아 창연하게 빛나며 이파리가 돋은 나뭇가지 형상의 아름다운 시침과 분침을 움직여 정확히 12시를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이 탑의 이름은 ‘흑혈탑’.

  암흑의 핏줄, 즉 마족들을 상징하며 진마국 초대 마왕에 의해 세워진 이 탑은, 이젠 주인된 마왕의 피마저도 진득하게 머금고 바야흐로 그 빛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 탑 아래가 진마국 제 47대 마왕이자, 분열된 진마국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부야 유리 하나쥬크 불리’가 유이라는 세기의 마녀에 의해 살해당한 지점이었으며, 그 직후 주인을 잃은 오래된 탑은 그 힘의 원천을 잃고 외로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은 반드시 비밀에 붙여야 합니다.’

  피와 광기로 얼룩진 배경 속에서 유신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은 타당한 결정이었다. 마왕이 죽었다는 소식은 분열되었다가 응급처치로 그 상처자국을 꿰맨 진마국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랬다간 마왕을 구심점으로 간신히 모여 있는 수많은 귀족들이 폭발하듯 나라를 다시 분열 시킬 것이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힘을 합쳐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을 몰아내기도 벅찰 판에 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국가가 완전히 와해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그 때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기에 일주일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마왕의 죽음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모든 정보를 통제하는데 이골이 나있는 프리벤터의 제 4부대 ‘프로비던스’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진마국은 140여개의 제후국으로 분열되어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권력에 의한 욕망과 순혈에 대한 오만이 뒤엉켜 구역질나는 싸움이 동족의 목숨을 노리고 지저분하게 펼쳐졌으리라.

  “…….”

  온통 시커먼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심야의 고요함과 덧없음의 한숨이 흑혈탑 아래 깔린 작은 정원에 흘렀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무저갱의 어둠 속, 그곳엔 진득한 어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여인이 한 명 서서 침묵하고 있었다. 흡사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별과도 같은 여인, 그 눈부신 육체 위에 눈송이같이 빛나는 새하얀 드레스와 별빛 같은 은색의 흉갑을 두르고 두 자루의 기형 총검(Bayonet)을 위세 있게 허리춤에 찬 그 여인은. 단 한 치의 빛조차 용서치 않는 그 지옥 속에서 동화 속에 나오는 그 어떤 용맹한 기사들보다도 더 밝고 고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크롬웰’, '달의 장미‘라는 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크롬웰 하이드레드 백작이었다. 그러나 여느 때와 같은 당당한 대장부의 기세가 오늘따라 눈에 띠게 사그라져 있었다.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엔 근심이 크게 드리우고 흐릿한 에메랄드빛의 눈동자를 낮게 깔고 있는 것이 그녀의 심중을 얼핏 내비치는 것 같았다.

  “후우….”

  크롬웰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보석처럼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를 낮게 깔았다. 진주 같이 맑고 티 없는 얼굴엔 근심이 길게 드리워져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지레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무성한 잔디밭은 일주일 전 마왕 유리의 피로 연못을 이루던 곳이었으며 그 위에 겹치는 환영을 쫓아 그녀는 사라진 유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격렬했던 전투로 인해 엉망으로 찢겨나갔던 잔디와 잡초들은 마왕의 고귀한 피를 빨아먹고 순식간에 숲을 이루어 마치 갈대밭 같았으며, 사방에 흩어져 있던 유리의 자취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건만 그녀의 눈엔 아직도 홍건하게 고인 검은 피의 물결이 보이는 것 같았다.

  “유리.”

  크롬웰은 가만히 무릎 꿇고 앉아 손으로 땅의 온기를 느끼며 사라진 이의 이름을 슬프게 되뇌었다. 마왕이 사라지고 요 며칠간 보인 그녀의 행동은 분명 이상했다. 언제나 사내대장부처럼 당당했던 기백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대신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을 때가 더 많았던 것이다. 늘 호랑이처럼 매섭게 진행했던 병사들의 훈련도 요 일주일간은 전부 콘라드 하이드레드 공작이 도맡아 했을 정도였다. 그 때도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사락사락.

  쉬익! 그 때 크롬웰의 뒤에서 수풀을 헤치는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번개같이 검을 찔렀다. 예상대로 그녀의 뒤 3m가량 떨어진 곳엔 검은 그림자가 하나 있었으며, 크롬웰은 볼 것도 없이 그림자의 목젖을 향해 길게 검을 찔러 들어갔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짙게 깔린 살기는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으며 검에 실린 무게만하더라도 사람을 죽이기에 무리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달빛이 어둠을 쓸어가자, 그녀는 그림자로부터 순간 그리운 쌍흑의 눈동자를 보게 되었다.

  언제나 열정으로 가득해 빛을 잃지 않는 검은 눈동자.
  순수함으로 가득해 손을 대기에도 죄책감이 느껴지는 어리숙한 소년.

  “!”

  짧은 상념과 찰나간의 망설임. 그러자 망설임때문에 내지른 매서운 일격이 작게 흔들렸고 그림자는 간발의 차이로 상체를 왼쪽으로 기울여 검에 목이 꿰뚫리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을 내지른 크롬웰은 그림자의 행운에도 기뻐할 수 없었다.

  ‘피했다고?’

  아무리 상념에 잠겨있었다지만 이 정도로 짧은 거리에서 그녀가 목표물을 놓친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고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크롬웰은 본능에 따라 재빨리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그녀가 두 번째 공격을 감행하려하자, 그림자는 항복이라도 하듯 두 손을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저를 죽이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크롬웰 경.”
  “…….”

  달빛이 구름에서 얼굴을 내밀자 그림자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에 흔들리는 기나긴 백발과 유리의 그것과도 같은 쌍흑의 눈동자. 그는 바로 유리의 하나뿐인 형제, 유신이었다. 유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확인하자마자 크롬웰의 전신에서 살기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분출되었던 내면의 폭풍은 드러날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도 찰나였으며 곧 자취도 없이 스멀거리던 기분 나쁜 형체를 감추었다. 크롬웰은 검을 내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뭐야, 유신이었군. 놀라게 하긴….”
  “놀란 건 접니다. 크롬웰 경.”
  “흥.”

  크롬웰은 단 한번 코웃음 친 것을 끝으로 다시금 침묵 속에 잠들었다. 고요히 눈을 감고 아직도 끓어 넘치려는 분노를 이성으로 잠재웠다. 검을 땅에 꽂고 선 채로 깊은 명상 속에 잠긴 크롬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신은 생각했다.

  ‘아직도 유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그녀가 오길 기다리는 걸지도 모르겠군.’

  잠시 이상한 생각이 든 유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마지막 생각을 부정했다. 자신답지 않게 비논리적인 상상을 했다는 것에 그는 작게 실소했다. 크롬웰은 분명 사내대장부라고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걸출한 전사다. 그런 사소한 일에 이렇게까지 극적인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방금 전 자신을 찌를 때와 같은 살기. 그것은 분명 순수한 증오에 대한 감각이었다. 간신히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주전자가 펄펄 끓어 넘치는 물들을 증기로 내뿜는 것처럼 지금의 그녀는 위태롭게 느껴졌다. 유신은 그것 때문에 크롬웰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내가 피곤한가보군. 남 걱정을 다하다니.’

  하긴 그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유리가 사라지고나서 진마군의 최고 결정권이 자신에게 넘어왔고 그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려 요 일주일간은 거의 잠도 못잘 정도로 심신이 피곤했으니까. 지금 와서 느끼는 거지만 유리는 요 5년간 정말 잘해온 것 같았다. 그 약한 성품으로 미쳐 날뛰려는 진마국이란 말의 고삐를 용케도 여기까지 잡아끌고 온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성군,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라졌다. 아니, 정황을 보건데 살해당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범인은 누구인가? 역시 유이일까? 아니다, 적어도 유신은 유이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사건 당일엔 분노로 다들 이성을 잃어 제대로 판단할 정신이 없었기에 팔 밖에 남지 않은 유리의 육신을 들고 있는 유이를 범인으로 몰았고 결국엔 그녀를 국경 밖으로 추방해버렸다. 그러나 사건이 어느 정도 경과되자, 이성을 되찾은 이들은 하나둘씩 유이에 대한 의심을 풀어갔다. 지금까지 얼핏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결과 거의 모든 이들에게서 같은 결론이 나왔다.

  물론 단 한 사람 예외가 있었지만….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크롬웰 경.’

  유신은 명상에 잠겨 있는 크롬웰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몸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 오늘도 유리 대신에 처리해야할 일들이 많았고 그의 어깨엔 지금, 진마국의 미래라는 막중한 책임이 맡겨져 있었다.

  “…….”

  유신이 밤의 이슬 사이로 사라지자, 크롬웰은 조용히 눈을 떴다. 명상을 한 덕인지 아까의 살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쪽빛 눈동자 깊숙한 심연 속에선 지옥의 불길보다도 더 뜨거운 죽음의 불꽃이 녹색의 구슬을 불태우며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뿌드득.

  가늘게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이빨 갈리는 끔찍한 소음과 함께 나지막한 저주의 속삭임이 한 사람을 향해 끊임없이 퍼부어졌다.

  창백한 피부, 흑단같이 윤기 있는 검은 머릿결과 홍옥처럼 빛나는 적색의 눈동자.
  언뜻 무심해 보이는 얼굴로 자신의 정혼자를 빼앗아간 도둑고양이 같은 년.

  ‘나와 결혼해주세요.’

  별빛이 아름답게 속삭이는 그 밤하늘 아래서 유리가 그 도둑고양이에게 고백할 때, 크롬웰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처음엔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단지 창문 너머로 유리가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곤 서둘러 달려온 것뿐이었으니까. 다행히도 유리는 살아있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있을 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갈 뻔했다. 그 숫기 없던 유리가 당당한 목소리로 청혼을 한 것이다. 그것도 더러운 잡종에게…. 그 때, 크롬웰은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자신이 이 정도로 유리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나 자문할 정도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흘러넘치는 증오 때문에 전신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평소 당당하고 호기롭던 성품도 이 때 만큼은 철저하게 무너져 그녀는 내면 깊숙한 곳부터 뿌리 채 뒤흔들렸다.

  지금 당장 뛰쳐나가 저 연놈들을 모조리 두 동강내고 싶었지만 극도의 인내심으로 그걸 눌렀다. 아직도 남아서 거치적거리는 이성 때문에 그녀의 정신은 거의 분열에 가깝게 나눠지고 있었다.

  이성이냐, 감성이냐.

  이윽고 유이가 유리의 청혼을 뿌리치고 사라졌을 때, 어둠 속에서 한 기분 나쁜 느낌의 남자가 나타났다. 구릿빛 피부에 두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는 흑색 장발의 엘프 남자였다. 예전에 한번인가 두번 정도 만찬에서 본 적이 있는 더러운 빛의 종족 엘프, 그는 바로 카인 에르바네스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그리고… 그녀가 아직 정신적인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바로 그 사건이 터졌다.

  ‘카, 카인…씨, 어…째…서?’

  유리의 가슴팍을 깊숙이 꿰뚫고 삐져나온 황금빛의 손과 그 손에 쥐어져 있는 마왕의 척추. 그러나 크롬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성의 회로가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그녀는 도무지 작금의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황금색으로 창연하게 빛나는 수정들이 유리의 몸을 완전히 뒤덮을 때까지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유리!’

  뒤늦게 나타난 유이와 엘트리움화(化)한 카인의 짧은 전투가 벌어지고, 삼삼오오 몰려드는 병사들의 크고 작은 발자국 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엘트리움이 사라진 뒤, 유이가 팔 하나만 남은 그의 육신을 부여잡고 절규하는 것을 바라보며 크롬웰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이성은 없다. 마족들의 마성(魔性)에 사로잡힌 크롬웰의 얼굴에선 이미 그 고귀한 풍모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 하하. 하하하.”

  그렇게 그녀는 유이를 유리의 살해범으로 모는데 성공했다. 너무나도 쉬웠다. 이성을 잃은 자들에게 살짝 언질만 해줬을 뿐 그 뒤는 일사천리였으니까. 모든 일이 끝나고 마왕의 피로 물결을 이루고 있는 정원 한복판에서 크롬웰은 지금처럼 무미건조하게 웃었다. 미친듯한 그 얼굴과 눈동자는 이미 빛을 잃어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유이 R. 세이비어.”

  유이의 이름을 속삭이는 무표정한 크롬웰의 얼굴에서 절대영도에 가까운 차가운 한기가 농밀한 살기를 내포하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마치 삐뚤어진 증오와 적의라는 펄펄 끓는 스프가 이성이라는 솥에서 부글부글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이미 솥은 열기에 시뻘겋게 달구어졌고 버틸 수 있는 한계에 다다라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사람’이 나타났다.

  『안녕.』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변조된 목소리. 아무도 없었을 터인 공터에서 수상한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크롬웰은 당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냉소조차 띠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지?”

  크롬웰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정원 담벼락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검은 로브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성별은커녕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검은 로브는 전신에 검은 붕대를 칭칭 두르고 있었다. 남자인가 여자인가? 아니, 이미 그 ‘존재’는 그런 것조차 초월하고 있어보였다. 성인이라기엔 덩치가 작아 어린아이리라 상상해볼 뿐이었다.

  “대단하군. 유신과 나를 속일 정도의 능력이라니. 저스티스인가?”
  『대단하게 생각할 것 없어. 차원의 틈새, 시간의 굴레 속에서 나를 인지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뭐 좋아. 그런 것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 어차피 이제 곧 죽을 놈에게 관심을 가질 필욘 없겠지.”

  스윽. 크롬웰은 땅에 꽂힌 총검(Bayonet)의 소켓에 꽂혀 있는 고풍스러운 손잡이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베어버린다.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크롬웰의 눈동자가 유신 때와는 다른 의미로 번뜩이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에게 선악은 상관없었다. 무엇이든 거슬리면 베어버릴 뿐이었다. 그 대상이 진마국의 적, 저스티스라면 망설일 이유조차 없었다.

  『쿡, 쿡쿡쿡.』

  그러나 검은 로브는 변조된 목소리로 기괴한 웃음을 낮게 깔 뿐이었다. 표정조차 보이지 않는 얼굴에선 그나마 드러나 있는 눈동자가 달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색을 바꿔가며 그 존재의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것은 감히 인간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돌연 그 존재가 크롬웰을 향해 간단하고 뚜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리가 있는 곳에 가고 싶어?』
  “뭐, 뭐?”

  크롬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제야 검은 로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놀란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녀의 앵두같던 입술이 창백하게 질려 부들부들 떨렸다. 그 존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대단히 사무적인 어투로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간단한 부탁만 들어주면 돼. 물론 너에겐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거야.』

  그렇게 밤이 깊도록 그들의 거래는 이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혈맹성 전체는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듯 아무런 미동도 없었으며 그 어떤 이들도 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이 이틀 뒤 일어난 ‘참상’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일이 터질 때까지도 그리고 터진 뒤에도 아무도 없었다.


  


「DESTINY」
運命의 系統樹
第 33 夜. 배신, 와해, 벼락, 혈맹성 붕괴의 날(上).






  혈맹성 외곽의 작은 궁전에 설치된 임시 프리벤터 정보국. 그 중 전국에서 들어오는 방대한 정보들을 수집, 처리하는 기관인 제 4 과는 이 구질구질한 궁전의 지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과거 제 15대 마왕이 만들어 놓은 비밀스러운 장소라던가? 여하튼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이밀었을 때는 용도를 알 수 없을 정도, 아니 알고 싶지 않을 정도의 각종 고문기구들이 이 지하실 깊숙한 곳에 걸죽하게 늘어붙은 피와 함께 있었다. 그 음침한 분위기는 강심장이라 자부하던 프로비던스의 요원들도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였고, 시간이 없는 관계로 고문 기구들만 간단히 처리해놓고 기기들을 설치했기에 지금 이 방의 벽은 시뻘겋게 말라붙은 피들이 저주라도 되는 듯 키보드와 모니터를 주시하는 요원들에게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그것은 몇 주일째 계속되는 철야의 고통과 함께 그들에게 지옥의 고통처럼 다가올 정도였다.

  “후아암. 졸려요.”

  전뇌기(電腦機)의 희뿌연 모니터 앞에서 입을 가리고 귀엽게 하품을 하고 있던 안나는 투정을 부리듯 옆에서 오늘자 신문을 바라보는 오크를 흘낏 바라보았다. 오크특유의 기름기 흐르는 녹색피부, 멧돼지같은 이빨이 입술 양 끝에서 삐죽하니 솟아 올라와 있는 투박한 모습의 이 오크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주제에 인탤리처럼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위에 맵시 있는 검은 조끼를 두른 ‘죠셉 그리야’라는 이름의 괴짜였다. 죠셉은 지적으로 보이는 작고 둥근 안경을 들창코 위에 걸치고 근심어린 얼굴로 신문을 바라보면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듯한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저, 과장님? 좀 쉬면 안될까요?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은데….”

  간접적인 요청을 죠셉이 무시해버리자 안나는 용감하게도 직접적으로 그에게 휴식을 요청했다. 며칠 동안 철야로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눈이 저절로 감길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4과 내의 모든 요원들의 염원이었고, 모두들 기대감 어린 시선을 교차하며 거구의 과장님을 주시했다. 그러나 쿨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철혈의 오크는 커피잔을 입가에 슬쩍 대며 간단한 대꾸로 그녀의 요청을 묵살해버렸다.

  “일 해.”
  “하아아아아아.”

  그 한마디에 방 안에 탄식의 한숨소리가 넘쳐났다. 체념한 듯 다른 사람들처럼 다시금 게슴츠레한 눈으로 전뇌기의 키보드를 두드리며 정보를 정리하던 안나는 문득 궁금한 게 생겼는지 죠셉을 향해 지나가듯 물었다.

  “저, 과장님?”
  “…으음.”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죠셉이 느릿하게 신음소리 비슷한 대꾸로 반응하자, 안나는 말을 이었다.

  “얼마 전부터 헤이즐넛 조장님과 라오데키야 부조장님께서 안 보이시던데, 어디 출장 가셨나요?”
  “글쎄? 내가 알아야 하는 일인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궁금하잖아요.”
  “궁금증은 접어버리고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린 저스티스 제 5부대 ‘도플갱어’에 대한 정보나 정리해서 제출해.”
  “너무해요 과장님, 히잉.”

  오늘따라 안나가 투정을 심하게 부리자 죠셉의 두 눈이 가늘어지며 대번에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인상을 풀고 단호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 녀석들의 행보다. 조장님과 부조장님의 행적보다는 그것이 더 중요해. 쓸데없는 일엔 신경 끄는 게 좋아. 여차하면 우리들의 목이 순식간에 떨어져버리니까. 아니면… 목숨보다 남 일에 더 관심이 많다는 뜻인가 그건?”
  “…….”

  안나는 금새 창백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목숨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가자 그제야 졸음보다 더 공포스러운 현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전력이 절반 이하 수준으로 떨어져버린 프리벤터, 그리고 저스티스의 1차 목표이자 최우선 공격목표인 프리벤터. 놈들의 행적을 놓치면 그야말로 끝이었다. 이미 몇번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고생해보지 않았던가!

  예를 들어 제 1차, 2차 마드라엘 습격전. 이 두 습격을 허용한 것은 녀석들과의 정보전에서 패배한 해커부대의 명백한 실책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 괴물들에게 점령당한 마드라엘 대포위, 탈환전에선 대단히 중요한 작전 중에 녀석들에 대한 정보 전달이 늦어져 하마터면 진마국의 주력부대가 와해되어 버릴 뻔했다. 물론 뒤늦게 나타난 정체불명의 녀석들 때문에 프리벤터의 주력이 완전히 공중분해 되었지만 말이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인 타격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정보전의 무서운 점이며, 각 국가가 정보에 기를 쓰는 이유였다. 특히 한 나라를 일순간에 전멸시켜버릴 수도 있는 괴물같은 녀석들이 이들의 상대였다.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이들은 치명적인 미스를 한 가지 범했다. 저스티스 내부에 심어놓은 첩자가 돌연 연락이 끊겨버리면서 저스티스 제 5부대 도플갱어의 동선을 놓쳐버린 것이다. 첩보, 암살, 각종 사보타지가 특기인 녀석들을 놓치다니 이것은 분명 치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스였다.

  죠셉 그리야는 근심어린 얼굴로 신문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다른 생각에 잠겼다.

  ‘불안하군. 녀석들이 모습을 감춘 것도 벌써 이틀째, 다른 부대들의 움직임은 거의 없지만 녀석들이 사라진 것은 뭔가 꾸미는 것이 있기 때문이야. 게다가 파악되는 놈들의 숫자가 점점 줄고 있어. 갑작스런 첩자 색출과 사라진 도플갱어대. 일단 경보는 내려뒀지만 과연 녀석들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까? 마왕이 사라진 허울뿐인 진마국이?’

  일단 암살자부대와 협조하여 마왕 사망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통제했지만 이 정보가 새어나갔다면 지금은 절호의 찬스였다. 지금 만약 공격을 당한다면 그나마 통제되던 정보가 진마국 전체에 퍼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고 결국 진마국은 140개 제후국으로 사분오열될 것이다. 이래저래 상황이 안 좋았고 이번엔 다만 적들이 제발 조용히 지내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현재 프리벤터가 처한 상황이었으며 아무런 힘도 없이 정보를 빌미로 진마국에 빌붙어 있는 것에 불과한 그들의 한심한 처지였다. 과거 저스티스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아슬아슬한 로프 위에 서 있는 곡예사같은 기분이었다. 아래로는 천정부지의 낭떠러지가 자리 잡고 있는….

  “음? 과장님 여기 좀 보세요.”

  그 때 안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암호 해석기에서 인쇄되어 나온 긴 두루마기 종이를 뜯어 죠셉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그는 눈언저리를 꿈틀거리며 종이에 적힌 글들에 집중했다.

  “어디보자, 달의 장미, 크롬웰 하이드레드 백작 직속 진마국 특수부대 길로틴(Guillotine)에 대한 보고서? 안나, 지금 장난하나? 아군 부대에 대해 내게 알려서 뭐하자는 거야?”
  “잘 읽어보세요. 이 녀석들의 행적이 어제부터 묘하게 변했거든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요원을 하나 붙여뒀는데….”
  “뭐, 뭐라고? 요원? 안나아아아아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쓸데없이 내부 부대 첩보에 사람을 쓰다니! 그것도 상관의 명령도 없이! 안나의 개념없는 행동에 잔뜩 화가 난 죠셉이었지만 한숨만 크게 내쉬고 두루마기 용지에 시선을 옮겼다. 일단 안나가 이상하다고 했으니 읽어보되, 이상한 것이 없다면 잔뜩 혼을 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죠셉은 두루마기의 글을 읽으면서 눈에 띌 정도로 안색을 굳혔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굴리며 다시금 글을 읽어나갔다.

  ‘어제부터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 길로틴대의 동선 파악 실패. 현재 행적 파악 가능한 요원은 350명 중 50명 남짓. 이에 대해 왕가 내부에 아는 사람 전무(全無).’

  “어때요? 과장님? 경보가 발령된 지금 우리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갑자기 모습을 감추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얼마 전부터 크롬웰 백작도 이상했고 말이죠.”
  “속단하기엔 이르다 안나. 어찌됐든 이번 일은 상대가 너무 나빠.”

  물론 길로틴은 진마국의 유력자 하이드레드 공작가의 직속부대다.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든 정확한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그들을 매도한다면 매장당하는 것은 오히려 프리벤터 쪽이 될 것이다. 그들을 감싸고 보듬어주던 유리는 이제 없고, 유신이라는 녀석은 전 12제 사천왕이었는데다가, 자기 우월주의와 마족주의에 찌들어 있는 하이드레드 공작가 녀석들과 그 힘 아래 아슬아슬하게 묶여 있는 140개 이상의 제후국들이 지금은 진마국의 실세였기에 프리벤터의 입장에선 적지 한복판에 있는 거와 진배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길로틴대의 행동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만약 특수 임무를 행하려한다면 당연하게 정보국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진마국에 프로비던스 이상 가는 정보체계가 작동할 리도 만무하고 결국은 프리벤터의 이목까지 속여 가며 몰래 작전을 진행한다는 뜻인데. 지금같이 뒤숭숭한 시기에 무모한 짓을 벌일 필요가 과연 있을까? 그것도 국가의 명맥을 걸고서까지?

  ‘궁금하군. 정보국의 도움이 필요 없는 단독 행동이라니. 괜한 걱정인가? 크롬웰 백작 독단이든 진마국 수뇌부의 결정이든 미치지 않고서야 진마국을 뒤집어엎을 행동을 할 리가 없겠지. 이거 이런 때 마야 조장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지금은 마야가 미치도록 그리울 지경이었다.

  뚜벅뚜벅.

  신음에 잠겨 있는 죠셉의 예민한 귓가에 문득 규칙적인 구두소리가 들려왔다. 진원지는 문 쪽이었고, 그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그대로 놀란 토끼눈을 하며 소리 소문도 없이 통제구역으로 들어온 ‘괴인’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푹 눌러쓴 검은 고깔과 그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생기 없는 두 눈동자. 검은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 입고 왼쪽 팔뚝엔 진홍빛의 완장을 차고 있는 인물. 완장에 새겨진 ‘For our His/Her dominant(우리의 지배자를 위해)'라는 글귀보다도 더욱 죠셉을 놀라게 한 것은 괴인의 양손에 하나씩 들려있는 호박만한 크기의 검은 철구였다. ’치지지지‘하는 심지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꼭지에서 시뻘건 불꽃을 토해내는 그것은 분명 폭탄이었다.

  쨍그랑.

  커피잔을 떨어뜨리며 죠셉이 소리쳤다.

  “모두 엎드려어어어어어어어어!”

  『어둠의 군주 가라사대 지배자의 앞길에 영광스런 빛이 있으라.』

  괴인의 입에서 기괴한 기도문이 읊어짐과 때를 같이 하여 그의 양 손에서 시작된 시뻘건 불꽃의 폭풍은 주인의 몸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리며 좁아터진 방 안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어버렸다.

.  
.
.

  쾅! 콰앙! 쾅!

  그 시각 혈맹성 내부의 모든 관공서, 행정과 군사의 중심 기관들이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화염에 휩싸여 커다란 재난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혈맹성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혈맹성에서 한 2, 3 km 떨어진 지점에 주둔하고 있는 주력 제1, 제2 군단에서 사단장 이상, 군단장 이하가 모조리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때마침 경보가 발령되어 작전회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난은 더욱 크게 작용했다. 두뇌를 잃자 전 지휘 계통이 일순간에 마비가 되었고 병사들은 혼란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For my dominant(나의 지배자를 위해)!”

  그 모든 사건들의 중심엔 진마국의 특수부대 ‘길로틴’이 있었다. 누가 그들을 의심했겠는가! 그들이 폭탄을 들고 유유히 사령관막사로 향할 때도 병사들은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이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진마국의 최고 정예 부대이자 광신도 집단인 ‘길로틴’의 배반. 이것은 병사들 사이에서도 무시 못 할 사기저하와 공포를 가져왔다.

  일련의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확장되어 나갈 때, 혈맹성에서 북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진 산맥의 붉은 절벽 위에선 어두운 밤하늘을 환히 밝힐 정도의 불꽃에 휩싸인 혈맹성을 바라보는 두 명의 인영이 있었다. 이젠 벌겋게 물이 든 단풍나무숲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들은 청색의 머리카락이 어깻죽지까지 축 늘어진 훤칠한 키의 남자와 까무잡잡한 피부에 보이쉬한 느낌을 가진 묘인족 아가씨였다. 남자는 분명 프로비던스의 부조장 라오데키야 B 고든이었고, 묘인족 아가씨는 역시 조장, 마야 헤이즐넛이었다. 마야는 뭔가가 불만인 듯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으며 무심한 얼굴로 서 있는 라오데키야에게 말했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거지?”
  “모르겠다.”
  “이봐, 고든! 아니, 아니지. 잉그램이라고 불러야 되나?”

  마야는 무책임하게 말하는 라오데키야에게 버럭 신경질을 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버리며 불타는 혈맹성을 주시했다. 평소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라오데키야는 무심하게 팔짱을 끼곤 중저음의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은 ‘아카식 레코드’ 태초의 예언서에 의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 최후의 인류가 남긴 유산과 테라포밍 시스템에 의한 운명의 간섭. 이것이 깨어지면 이 행성은 붕괴한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꿈을 꾸며 이 가이아나 행성을 유지하고 있는 자의 꿈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세계가 붕괴한다. 그것이 테라포밍 프로그램 ‘아카식 레코드’. 빌어먹을 파멸주놈들! 그런 개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다니!”
  “당시엔 어쩔 수 없었어.”
  “뭐가 어쩔 수 없었어?! 결국 녀석들이 겁쟁이였기 때문이잖아! 앞날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언젠가는 이 행성도 전쟁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의 손으로 역사를 만들려던 것 아니었겠어? 그 오만함! 자기들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결국 지들 몸도 간수 못해 피조물인 진왕에게 죽은 것들이!”

  마야는 신경질적으로 땅을 콱콱 밟아댔다. 분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자식과도 같던 녀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은 이런 곳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진마국이 괴멸할 때까지 기다려야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카식 레코드에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이 시점에서 진마국은 확실히 붕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그램과 코어 사이의 동조에 심각한 모순이 생겨 테라포밍을 유지하는 행성 자체에 오류가 생겨버린다. 그 결과는 프로그램의 폭주. 행성의 사막화 등등으로 이어져 종래엔 아무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행성이 되어버릴 것이다. 물론 행성의 역사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인간 개개인의 사소한 일들 쯤은 어느 정도 바뀌어도 상관없지만, 이런 대사건만은 반드시 일어나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꿈이 뒤틀리면 행성은 의문에 빠진다. 그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역사라는 프로그램의 흐름에 따라 자연과 각종 현상들을 조정하던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버리는 것이다.

  이 테라포밍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바로 초대 파멸주 중에 하나 ‘노아’였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신의 외손녀, 즉 '메르세데스'와 '노머시 장군'의 아이를 행성 중심부에 박아 넣고, 그녀에게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꿈을 꾸게 만든 장본인….

  오래된 옛날, ‘푸른 방주’를 타고 온 태초의 이민자들은 메르세데스와 노머시 장군의 딸을 테라포밍에 이용하고는 일명 ‘노아파’라고 일컬어진 이들과 ‘가이우스파’라고 일컬어지는 두 개의 파로 갈리어 서로간의 이념을 다퉜다. 운명을 예정해서 인위적인 조화와 안정을 꾀하려는 ‘노아파’와 후세에게 모든 것을 맡기려는 ‘가이우스파’는 결국 파멸주들끼리의 불화와 다툼을 가져왔고 결국 훗날 ‘성왕 전쟁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기나긴 싸움으로 이어졌다. 잉그램 또한 가이우스파였고 처음부터 그는 가이우스의 이념과 존경심에 편승해 그들과 함께 하기로 맹세했었다. 그 끝이 없는 싸움 속에서 결국 ‘가이우스’는 초대 진왕을 이용해 노아파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로 마음먹게 되었고, ‘오딘’의 성물 ‘쟈칼’을 이어받은 초대 진왕의 강력한 힘과 뛰어난 두뇌는 결국 기나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때 노아파가 행성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은 조물주 노아와 함께 파괴되었지만, 노아가 최후의 카드로 마련해놓은 ‘아카식 레코드’는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이우스파’는 ‘SEED'라고 이름 붙인 피조물들을 만들어 그 생명의 씨앗을 진왕에게 맡겼다. 그것이 바로 페어리족의 시초였고 페어리야말로 ’아카식 레코드‘에 직접적인 관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정된 역사가 바뀌는 것을 파악하고 조정을 해주기 위해선 그것을 감시하고 보정할 수 있는 조직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가이우스는 알고 있었기에 그는 마지막으로 비밀 결사단 ‘뫼비우스’를 조직했다. 이들의 목적은 이 가이아나 행성의 변경된 운명을 아카식 레코드와 비교하고 SEED를 이용하여 ‘아카식 레코드’를 흘러간 흐름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알아, 가이우스는 최후의 일인으로서 널 지목했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뫼비우스가 변절될 걸 알고서 한 짓이겠지.”
  “그래, 네 말처럼 수세기가 넘는 긴 유배기간동안 뫼비우스는 변했다. 바로 욕망이라는 어둡고 케케묵은 본능 때문에…. 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 파멸주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이 될 때까지 천년이라는 기나긴 시간동안 동면에 들어가 있었고, 미나스력이 끝날 무렵 내가 눈을 떴을 땐 이미 페어리종은 멸종한 뒤였어.”

  그렇다. 수세기가 지나는 동안 뫼비우스라는 조직은 변모했다.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위해 페어리종들을 남용했던 것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운명을 변경하여 돈과 힘을 쌓고, 결국 유일하게 행성의 운명에 간섭할 수 있게 만들어진 페어리종(SEED)은 몇 사람도 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욕심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멸해버렸으며 인류는 그렇게 자신의 욕망 때문에 또다시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 때문에…. 잉그램이 깨어났을 땐 이미 세계는 붕괴의 적신호를 발산하고 있었고 그는 서둘러 뫼비우스를 장악해 행성이 자멸하기 전에 그 뒤처리를 시작해야만 했다.

  잉그램은 더 이상 인간들에게 행성의 운명을 맡겨두지 않았고 파멸주들이 사라진 그 순간부터 뒤틀린 역사를 아카식 레코드에 맞추어 교묘하게 조작하기 시작했다. 각종 정재계의 중요한 인사들이 이 조직에 속해있었으니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행성에서 벌어진 첫번째 대전쟁, 6백년전 전 세계가 피로 물들었던 그 성전(Holy war)은 종족간의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해 이들이 일으켰으며 그 뒤부터 뫼비우스의 손에 의해 한 나라가 망하고 다시 일어서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 일련의 과정 중에 가장 효율 중심적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저스티스’라는 거대 조직이었다. 그 강력한 힘과 그 절대적이랄 수 있는 능력은 한 나라를 지도상에서 말끔하게 지워버리는 것조차 가능했기에 잉그램은 끊이지 않는 자금줄을 이용해 그들에게 각종 더러운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당시에 작았던 저스티스가 백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 거대해진 것은 다름 아닌 뫼비우스의 보이지 않는 원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잉그램은 1차 저스티스 토벌이 끝나는 시점에 ‘아카라’와 ‘스펜타마이뉴’를 그 장으로 하는 2번째 샷셀을 설치하여 교묘하게 힘의 균형을 꾀하였다. 세계는 그렇게 당분간 보이지 않는 균형과 ‘아카식 레코드’의 굴레 속에서 서서히 발전해나갔다.

  그러던 중 전멸했을 줄 알았던 페어리 한마리가 돌연 발견되었다. 그에 잉그램은 크게 기뻐하였다. 어째서인지는 그 자신도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머나먼 과거 가이우스와 자신이 가슴속 깊이 담고 있던 신념을 다시금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잉그램은 스펜타마이뉴와 아카라가 장악하고 있는 ‘샷셀’에게 SEED의 회수를 맡기기엔 공개적으로 문제가 많이 있을 것을 두려워해 뒤끝이 없는 저스티스에게 회수를 맡기지만 그것은 결국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 되었다. SEED는 저스티스의 손에 넘어가 행방이 묘연해지고, 설상가상으로 그 뒤부터 이들이 일으키는 혼란은 가히 상상불허수준인지라 아카식 레코드의 예언이 점차 빗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구 인류를 전멸시킨 ‘엘트리움’들의 강림과 급히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희생한 ‘검제 리온하르트’, 증거는 없지만 분명 저스티스 녀석들에 의해 죽었음이 분명한 각종 정재계의 뫼비우스 인사들. 그 결과 뫼비우스는 이제 허물뿐인 조직이 되어버렸고, 이제 이 행성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루비콘 강을 넘어서버렸다.

  잉그램은 근심어린 시선으로 불타는 혈맹성을 주시했다.

  “마지막 남은 페어리종,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었고 인류의 희망이었다. 그것이 저스티스 놈들에게 넘어간 이상, 이제 이 세계는 돌이킬 수 없어. 붕괴되던가 역사에 맞춰 살아가던가 둘 중에 하나뿐이지. 지금은 아카식 레코드에 맞춰서 행성이 붕괴되는 것만은 막아야 해.”
  “하지만, 이대로 진마국이 무너진 후가 문제잖아! 아카식 레코드에 의하면 국가의 개념 전체가 붕괴해야 돼. 세상은 바야흐로 혼돈이 되어 수세기 이상 암흑기를 맞게 될 거야. 과연 그걸로 괜찮을까? 그것이 파멸주들이 바라던 거냐? 가이우스가 바라던 것이 이런 것일까?”
  “정확하게 말하면 아카식 레코드를 작성한 ‘노아’가 바라던 것이다. 그가 이 계획을 짰을 때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에게 ‘암흑기’가 필요하다고 여겼겠지. 그것에 상관없이 우리들은 선택을 강요받았을 뿐이야. 어차피 이념의 문제는 오래 전 페어리 종이 전멸했을 때 사라져버렸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최우선 과제는 ‘생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마야.”
  “하지만 저스티스 녀석들을 어떻게 믿지?”
  “저스티스는 괜찮아. 얼마 전 녀석들의 수장에게 내 뜻을 전달했으니까. 녀석들도 이 행성에 살고 있는 이상 행성이 붕괴할게 뻔한 짓을 할 리가 없겠지. 그 좋은 증거로 지금 진마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녀석들의 움직임을 들 수 있어.”
  “엘트리움은?!”
  “그들을 막을 방법은 선조들로부터 시작되어 지금 거의 완성 단계다. 우리들은 이제 시간만 벌면 돼. 벗어난 운명의 길을 원래대로 되돌릴 때까지만…. 저들을 희생시켜 전 인류를 살릴 시간을 번다.”
  “…나는 가끔 네가 무서워 잉그램.”
  “대를 위해 소를 버리는 과감함이 필요한 때야.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굳이 이 방법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을테지…. 이제 좀 머리를 식혔으면 돌아가자. 저스티스가 실패하면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라도 진마국을 반드시 멸망시켜야 되니까.”

  라오데키야가 몸을 돌려 막 숲의 어둠 속으로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그렇군. 네 녀석이 잉그램인가.”

  갑자기 이들의 귀에 낮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발걸음을 멈춘 라오데키야는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급히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숲길 가장자리에 있는 한 커다란 단풍나무 뒤편이었고, 그곳에는 놀랍게도 나무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팔짱까지 끼고 있는 한 ‘남자’가 어느 사이에선가 이쪽을 어깨너머로 주시하며 서있었다. 어두운 그늘 사이에서 그의 놀랍도록 차가운 푸른색 눈동자가 야수처럼 뚜렷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누구냐!”

  그가 말할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기에 화들짝 놀란 마야가 급히 소리쳤다. 그들의 반응이 너무 싱겁게 느껴졌는지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팔짱을 풀며 나무 그늘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푹 눌러쓴 청색 캡(cab)과 어깨까지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내려오는 군청색 머리카락, 소매가 어깻죽지까지 뜯어진 자켓과 구릿빛 탄탄한 양팔 근육에 휘감기듯 새겨져 있는 가시넝쿨 문신. 그는 바로 사라진 ‘12제’, ‘장미십자가(Rosenkreuz), 프레이저 크로바인츠’였다.

  “후우….”

  프레이저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실망이다. 네 녀석들이 프리벤터의 정보부를 장악하고 있었다니… 실바니아 공화국이 그렇게 쉽게 무너진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겠군.”
  “뭐, 뭐라고?!”

  프레이저의 도발에 마야가 앞으로 뛰쳐나가려하자, 잉그램이 그녀를 제지했다.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잉그램을 바라보는 마야의 눈초리에도 상관없이 잉그램은 말했다.

  “날 찾아온건가?”

  잉그램은 자신을 뚫어지게 노려보는 프레이저의 눈빛에서 그의 목적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한 눈에 간파했고 상대방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단호하게 말을 건넸다.

  “휘우. 눈치가 빨라서 좋군.”

  잉그램은 프레이저에게서 원하는 반응이 나오자 이어서 물었다.

  “그래, 잊혀진 12제께서 날 찾아온 목적은?”
  “뭐, 별 거 아냐.”

  쉬익! 갑자기 프레이저의 전신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의 극도로 정제된 검기는 바람과 함께 그의 주변에 휘몰아쳤고, 공중을 휘돌던 단풍들을 모조리 조각내버리며 이윽고 잠잠해졌다. 우수수 떨어지는 단풍들의 잔해 속에서 그는 살기와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내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던 ‘쿤’. 내가 그를 죽이게끔 조종한 네 녀석을 죽이기 위해서 왔을 뿐이니까.”
  “쿤?”

  마야가 이상한 눈초리로 라오데키야를 바라보자, 라오데키야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식은땀을 주륵 흘리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하긴 네 녀석이 이 정도 사소한 일까지 기억할리는 없겠지.”

  프레이저는 품속에서 뒤적거리더니 작은 단검을 하나 꺼내 잉그램의 발 앞으로 던졌다. 아무 장식도 없는 밋밋한 모양이었지만, 손잡이에 특징적인 가시넝쿨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뭐, 뭐야? 단검? 잉그램?”
  “…….”

  잉그램은 짐짓 무표정해 보였지만 마야는 알고 있었다. 그가 말을 할 때 무표정해지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를 숨기거나 당황했을 때란 걸.

  ‘그렇군. ’그 일‘에 대해 알아낸 건가.’

  마야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십수년전 점점 강대해지는 저스티스의 세력을 줄이기 위한 요량으로 잉그램은 당시 12제 중 하나였던 쿤의 암살을 계획했다. 그 때 도구로 사용된 아이가 바로 쿤의 의붓자식 ‘프레이저’였으며, 그는 아직 어린 아이였고 힘도 미천했기 때문에 간단한 최면술로 조종할 수 있었다. 결국 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자식의 칼에 찔려 생을 마감했다.

  쿤의 전신을 둘러싸고 있는 검기는 평상시엔 그 어떤 것의 침입도 허용치 않는 철벽의 방어력을 자랑했지만, 그가 이렇듯 쉽게 세상을 떠난 이유는 피도 이어지지 않았고 늘 엄하게 대하기는 했어도 내심 친자식보다도 더 깊이 사랑하고 있던 프레이저 앞에서만은 늘 검기를 몸속에 갈무리하는 습관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쿤의 검기는 피아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이 다칠까봐 그런 걸 테지만 그것이 바로 목숨을 빼앗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을 그는 죽음으로서 깨달았을 것이다. 어쨌든 치명적인 독과 저주가 발라져 있는 단검은 그대로 무기력한 12제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으며, 잉그램은 보란듯이 그를 암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던가! 프레이저가 죽은 아비보다 더한 힘을 가지고 그의 자리를 물려받을 줄은!

  프레이저가 저스티스의 12번째 왕좌에 앉았을 때, 잉그램은 진즉에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후회했지만, 당시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죽이도록 조종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프레이저가 알리 만무했고, 마침 샷셀도 삼연성이라는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발아래에 꽂혀 있는 단검은 바로 쿤을 암살할 때 사용된 그것이었다. 저것을 이렇게 내놓았다는 얘기는 모든 것을 확신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때? 이제 조금 기억이 나나?”

  프레이저가 무표정한 얼굴에 살기를 살포시 띄우며 말했다.

  ‘이거 낭팬데? 설마 녀석이 그걸 알아냈을 줄이야. 어떻게 해야 하지?’

  잉그램은 지금 모든 것을 알고 자신을 죽이러 온 프레이저에게 전신의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맞서 싸울 방법이 아니라 도망칠 방법이었다. 5년 전만 했더라도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었겠지만, 지금 프레이저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결코 5년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후우… 뭐 좋아.”

  잉그램이 시치미를 뚝 떼고 프레이저를 주시하자, 프레이저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오른손을 약간 앞으로 내밀고 왼손으로 심장 쪽을 가리는 독특한 무술 자세. 이때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세로서, 이건 그가 전력을 다하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였다. 곧 공격해올 거란 건 사방에서 옭죄어오는 살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문득 프레이저가 고요하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어조로 말했다.

  “네 녀석이 잊었어도 상관없어. 속죄하길 바라고 온 것도 아니니까…. 단, 나와 쿤을 농락한 죗값은 톡톡히 치러줘야겠다.”

  훅! 마치 촛불이 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프레이저의 모습이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공기는 미동조차 없었고 마야가 그의 모습을 다시 찾았을 땐, 이미 프레이저가 라오데키야의 앞에 서있을 때였다.

  “고든!”

.
.
.

  “하아아아아아!”

  쩍! 콘라드 공작이 내리꽂는 거대한 마상검(馬上劍)에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길로틴 대원 하나가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쩌억 갈라져버렸다. 이것이 바로 최후의 일인, 이것으로 10분 전에 이 저택에 들이닥친 ‘배신자’들은 모조리 척살해버렸다. 검을 한번 크게 휘둘러 도신(刀身)에 뭍은 걸쭉한 피를 털어낸 콘라드 공작의 입가에서 근심어린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길로틴인가….”

  콘라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주위엔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시체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비서관도 경호원도 모두 기습을 당하는 그 시점에 절명했다. 하긴 그것도 당연했다. ‘길로틴’은 하이드레드 공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조직한 암살단. 이 정도의 인원을 눈 깜짝할 사이에 몰살시키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며 시체들을 주욱 둘러보던 그는 정면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한 마디 했다.

  “나와라, 크롬웰. 거기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 텁, 텁, 텁.

  짧게 끊어 치는 박수소리. 건틀렛이 부닥치는 둔탁하고 투박한 소리가 들려오며 부서진 문틈으로 크롬웰이 모습을 드러냈다. 싸늘하게 냉소를 짓고 있는 크롬웰의 모습에 콘라드는 가슴이 아픈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묘하게 요염한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과연 오라버니. 언제부터 알고 있었죠?”
  “…길로틴은 어릴 때부터 키워온 우리 가문 직속의 사냥개. 그들이 섬기는 지배자는 바로 크롬웰 하이드레드 백작이며 그들을 움직일 수 있게 할 수 있는 건 전 세계에 너 하나 밖에 없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간단히 알 수 있는 일이야.”
  “하하하. 그런 것치곤 대응이 많이 늦어졌군요. 오라버니.”
  “내가…!”

  콘라드 공작은 크롬웰의 도발에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분노를 속으로 급히 갈무리하며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어쩔 수 있었겠느냐. 배신자가 다름 아닌 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어야만 했단 말이냐.”

  그렇다. 길로틴의 은밀한 움직임이 보고된 그 순간부터 콘라드는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짐작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누이가 조국에게 배신의 칼날을 들이밀려는 것을 그가 어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성과 감정의 굴곡에서 그는 결국 혈육의 정을 택했고 그것은 이렇게 치명타로서 다가왔다. 연락이 끊겨 전방 부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지금쯤 저스티스의 기습을 받아 궤멸 직전에 몰렸을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다. 이 나라는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문득 콘라드가 입을 열었다. 그의 야수같은 눈동자는 이젠 병들고 지친 호랑이의 그것처럼 흐릿했다.

  “이유는 묻지 않겠다. 지금이라도 돌아오지 않겠느냐? 나의 사랑하는 누이여.”
  “…….”

  마지막 권유. 최후의 순간에 봉착했음에도 혈육의 정을 끊을 수 없었던 콘라드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잠시간 짧으면서 영원처럼 느껴지는 침묵이 흘고 누이와의 추억이 콘라드의 머리에서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런가, 그것이 네 대답이냐. 크롬웰.”

  문득 콘라드가 먼저 고개를 무겁게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늘진 그의 볼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성에 빠진 게로구나. 불쌍하게도….”

  마족이라면 그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악마의 성질. 콘라드는 크롬웰의 눈에서 얼핏 스친 붉은 빛을 발견하곤 이미 때가 늦었음을 깨달았다. 한번 마성에 혼을 빼앗긴 마족은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도 늘상 당당했고 누구보다도 정의로웠던 누이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철컥. 콘라드는 거대한 흑색 마상검을 들어 크롬웰을 겨누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마족들의 수호신 흑사자여! 초대 신성 진왕이시여! 저 어리석은 자의 영혼을 굽어 살피소서!”
  “쿡쿡.”

  자신을 비웃는 크롬웰을 바라보며 콘라드가 기합과 함께 검을 찔러 들어갔다.

.
.
.

  같은 시각, 유신이 있는 흑마궁 또한 길로틴의 습격을 받고 있었다. 자폭 테러에 초반 피해가 심각할 정도였으나, 유신의 뛰어난 수완과 마침 거기에 있었던 발터, 근위대 등의 조직적이고 막강한 전력 앞에 수가 적은 길로틴은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애초에 수뇌부만을 노리고 기습을 건 것이기에 그것이 실패한 이상 전멸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예상외로 근위대쪽의 피해가 컸다는 것에 있었는데 이건 유신이 초반에 심하게 당황했기에 생긴 문제였다. 그 누구보다도 굳게 믿었던 ‘사냥개’가 주인의 목을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이 정도의 충격에 유신이라고 멀쩡할 리는 없었다.

  “각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프로비던스대가 걱정입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부디 살아서 돌아오시길….”
  “…….”

  발터는 묵념하듯 고개를 살짝 숙여 작별인사를 건네곤 그대로 홀에서 모습을 감췄다. 유신은 사라진 발터의 자취를 바라보며 체념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보기관은 공격의 일차 목표다. 상대방의 눈과 귀를 빼앗고 혼란에 빠진 적을 일거에 섬멸하는 것이야말로 전술의 기초였으며, 길로틴이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아마 지금쯤 프로비넌스대가 위치하고 있는 궁전은 집중공격을 받아 궤멸했을 것이다. 아니 애시당초 방어가 취약하고 한곳에 집중 배치되어 있는 부대였으므로 폭탄 공격 한방에 모조리 날아가 버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통신병! 가까운 곳에 위치한 부대 중 연결이 되는 곳이 있는가?”
  “제1, 제2 군단 통신 두절! 제 36, 27, 14 경계초소 및 혈맹성 내에 주둔하고 있던 제 128 황실 보병연대는 물론 황실 기병대까지, 본 흑마궁의 황궁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가 연락이 끊겼습니다! 시내 유선 통신망은 물론이고, 마법석의 전파통신마저 주변에 흐르는 미확인 결계로 인해 두절된 상태입니다!”

  통신기를 붙잡고 있는 병사의 절망조 섞인 보고를 들으며 유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이드레드 공작가 쪽은?”
  “그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칫!”

  갑자기 유신이 벌떡 일어나 현관쪽으로 성큼성큼 걷자, 화들짝 놀란 근위대장이 유신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전하! 위험하옵니다! 지금 밖을 나가시면 언제 습격을 당하실지 모릅니다!”
  “닥쳐! 여기에 틀어박혀 있다고 무슨 뾰족한 수라도 생길 것 같나? 지금은 움직여야 무슨 수라도 생긴다!”

  유신이 막 근위대장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돌릴 때였다.

  “……!”

  고풍스럽고 거대한 석문아래 누군가가 서 있었다. 몸의 윤곽을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요염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 여자는 기척도 없이 어느 사이에선가 거기에 서 있었다. 핏기하나 없이 창백한 피부와 허리까지 부드럽게 물결치며 내려오는 창포색에 윤기 넘치는 머리카락보다도 그녀를 이질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한 마리의 거대한 뱀이었다.

  - 쉬익.

  왼쪽 눈에 눈알 대신 손톱만한 자수정이 박혀 있는 그 뱀은 시뻘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유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느다란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혼까지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유신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부르듯 그녀에게 말했다.

  “오랜만이군, 메두사.”
  “…….”

  그러나 메두사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단지 적의로 가득한 싸늘한 무표정만이 그녀가 유신에게 보내는 전부였다.

  금지된 마녀(Forbidden witch) 메두사. 저스티스 제 1부대 ‘Ri'의 간부이자 흑마술, 특히 소환을 겸한 환영 마법에 특출난 재능을 소유하고 있던 그녀는 과거 유신 휘하의 간부이기도 했었기에 그는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이제 나는 저스티스의 사천왕이 아니라 이 나라의 최고 통솔자.’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회상하던 유신은 잠시 쓴 웃음을 지었다. 한 때 진마국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렸을 정도로 마족들을 증오했던 자신이 어느 순간 유리의 순수함에 이끌려 복수심과 증오심을 모두 잃어버렸고 지금은 사라진 유리의 자리를 대신하면서까지 진마국을 필사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는 없다고 생각하니 쓴 웃음이 절로 나왔다.

  “…….”

  메두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펼쳐 유신을 향했고 고대어로 뭐라 중얼거리자 그녀의 신수 ‘뇨르그’가 전신에서 불길한 마력을 내뿜었다. 그에 유신은 피식 웃으며 화이트 블레이드의 가녀린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싸운다. 싸워서 진마국을 지켜야만 한다. 정신적 친구였던 유리는 지금 사라지고 없었지만, 유리와 자신의 희망이자 등불이었던 마족들의 낙원 진마국을 반드시 지키고 말겠다고 그는 속으로 두 번 세 번 맹세했다.

  “음?”

  쿠구궁!

  유신이 막 검을 뽑아 메두사에게 달려들려던 찰나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진동과 함께 천장이 펑하고 터졌다. 부서진 천장에서 쏟아지는 잔해들과 먼지들 틈에서 뭔가 시꺼먼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고, 그것은 운석같은 맹렬한 속도로 유신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 순간 유신은 그림자에게서 노랗게 빛나는 들짐승의 눈동자를 본 것 같았다.

.
.
.

  라오데키야는 놀란 눈으로 다가오는 프레이저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시간은 분명 느리게 흘렀고, 프레이저의 손 또한 느릿하게 다가왔지만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고는 있건만 그것 또한 다가오는 주먹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느렸다.

  ‘나는 이 녀석보다… 느린건가!’

  프레이저의 주먹은 그가 피할 시간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저 주먹에 맞는 순간, 전신은 산채로 토막나버리고 고통도 없이 죽을 테지.’

  라오데키야는 그 순간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탕!

  그 때 갑자기 단말마의 총성이 들려오고 라오데키야를 향해 다가오던 프레이저의 주먹이 순간적으로 궤도를 바꿔 그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총알을 정확히 두 조각내버리며 튕겨냈다. 놀랍도록 날카롭고 정밀한 검기는 총알조차 반으로 가르는 신기를 보여줬으며 직접적으로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라오데키야의 가슴이 쩍 갈라지며 순간적으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라오데키야는 고통도 없이 갈라진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뒤로 무너져갔다.

  “고든!”

  마야가 창백해진 얼굴로 선혈을 흩뿌리며 쓰러지는 고든을 향해 달려들었고 프레이저는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단지 이빨만 뿌드득 갈며 신성한 복수의 순간을 방해한 방해꾼을 찾아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거기냐!”

  그는 숲으로 들어오자마자 100m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저격수 하나가 허둥지둥 나무를 엄폐물로 삼아 도망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지체할 것도 없이 그 자를 쫓아 몸을 움직였다.

  “도망치게 내버려둘 줄 아느냐!”

  쉬익! 프레이저는 더 이상 거리를 좁힐 필요도 없다는 듯 제자리에 멈춰 서서 수도(手刀)를 휘둘러 검기를 발산했다.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희뿌연 검기는 그대로 일직선상에 놓인 수백 그루의 나무들과 함께 도망치는 저격수의 허리를 끊어버렸고, 검기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몇 그루의 나무를 더 베어버리며 사라졌다.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일격에 저격수를 양단한 프레이저는 순간적인 기의 방출이 좀 많았었는지 심호흡을 길게 하며 운기를 취했다.

  “…….”

  프레이저는 잠시 동안 눈을 감고 몸에서 들끓는 검기들을 가라앉히더니 갑자기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소리는커녕 벌레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고요함, 그것은 분명 이상한 느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서서 눈동자만 굴리던 프레이저가 갑자기 씩 조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날 방해할 생각이냐. 블라디미르.”

  부스럭.

  프레이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를 둘러싸고 수십 명의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프레이저가 이런 포위를 허용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겠지만 방금 전에는 꽤나 흥분해있던 상태였기에 눈치 채는 것이 늦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포위하고 있는 검은 레인코트의 사내들도 분명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중기관총을 들고 있는 덩치가 큰 남자, 손가락 사이에 단도를 끼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키 작은 남자, 쇠사슬이 연결된 사슬낫을 들고 있는 꼽추에 기관단총을 손에 쥐고 의족을 낀 남자 등등 제각기 다른 모습 다른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단 한 가지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오른쪽 팔에 해골 마크가 그려진 붉은 완장을 차고 있다는 점이었다. 해골 위로 두 줄기의 번개가 내리꽂히는 독특한 마크, 이 마크를 달고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그들은 바로 ‘최후의 장군, 블라디미르 카미코프’ 휘하의 친위대 ‘쉐발리어(Chevalier)’였다.

  “여~ 오래간만이군. 장미십자가.”

  아니나 다를까 정겨운 인사말과 함께 쉐발리어들의 틈새에서 낡은 갈색의 군복을 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빗자루처럼 삐죽하니 솟은 백발에 구겨진 미간, 짙은 선글라스를 낀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블라디미르 카미코프 본인이었다. 비웃듯 가늘게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이빨을 대신하고 있는 금니가 번쩍 빛을 발했다.

  “자, 이 내가 친히 납시셨다. 반갑지?”

  카미코프가 담배 연기를 짙게 내뱉으며 말하자 프레이저가 냉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거 영광이로군. 뒤에서 명령 내리는 것을 좋아하는 겁쟁이 전쟁광께서 제 발로 이곳을 찾아올 줄이야.”
  “킥. 이래뵈도 총수의 직할 명령까지 받으신 몸이라서 말이지.”
  “언제부터 자네가 남의 명령을 받들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지는군. 약점이라도 잡힌 건가? 최후의 장군.”
  “아아. 뭐 약점이랄 것도 없어. 다만 네가 목을 따려했던 그 녀석이 죽으면 이래저래 곤란해지기 때문에 이렇게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 다른 녀석들은 오늘 바쁘고 네 놈도 명색이 전 12제인데 구색이라도 맞춰줘야지 죽었을 때 덜 억울할 거 아냐?”

  카미코프는 삽시간에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땅에 버리곤 군화로 질끈 밟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네놈답지 않게 말이 많군. 내가 딱 재미있을 때 끼어들어서 그런가? 흥분한 모습이 아~주 보기 좋은데 그래?”

  카미코프의 말처럼 지금 프레이저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꽤나 흥분한 상태였다. 그도 당연한 것이 원수의 목을 눈앞에 두고 뜻하지 않게 장해물이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까 잉그램이 쏟은 출혈로도 충분히 죽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 그의 곁엔 쌩쌩한 수인족 동료가 한명 있었고 그가 그 정도로 죽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기에 프레이저는 지금 조바심이 난 상태였다. 그러나 이내 그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카미코프를 주시했다. 12제인 카미코프가 친위대를 이끌고 이곳에 나타난 이상, 오늘 라오데키야의 숨통을 끊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앞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정말 내 일을 방해할 생각이냐, 블라디미르?”
  “앙? 하여간에 머리 나쁜 것도 고생이라니깐. 꼭 두 번 설명해야지 알아들어? 겁나면 냉큼 꺼지고 불만 있으면 덤벼. 어때, 간단하지?”

  뚜둑. 손가락 마디를 가볍게 풀어주는 프레이저의 주변으로 적의로 가득한 검기가 묵직하게 맴돌았다. 그의 어깨에 떨어진 단풍잎이 순식간에 사분오열되어 사방으로 흩어지자 그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살기를 내뱉으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너희들은 이제부터 내 적이다.”
  “킥킥. 아~암 그렇게 나와줘야지. 안 그럼 재미없잖아?”

  프레이저의 반응이 예상대로이자 몸을 들썩거릴 정도로 기쁨을 표출하던 카미코프가 돌연 웃음을 멈추더니 엄지손가락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죽여버려.”

  투타타타탕! 그의 말 한마디에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던 수십명의 쉐발리어들이 제각각의 무기를 꺼내들고 프레이저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중기관총과 각종 화기들의 끊이지 않는 총성이 어두워지는 밤하늘을 울리고 어두운 숲 속을 환히 밝혀주는 순간에도 프레이저는 묵묵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To be cou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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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 상편! 스크롤의 초압뷁을 느끼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