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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DESTINY」 運命의 系統樹

2006.03.12 14:05

갈가마스터 조회 수:128 추천:2

extra_vars1 조용한 평화, 그 속의 작은 꿈 
extra_vars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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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단지 재밌는 구경거리구나 싶었다. 시뻘건 잿더미로 변한 도시의 자취와 검은 하늘에서 그것을 굽어보는 황금빛의 거대한, 마치 조각상같은 천사들. 그리고 그것들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 검은 악마. 둘의 싸움은 이제껏 보아온 그 어떤 가극보다도 흥미로웠으며 박력이 넘쳐흘렀다. 악마의 손톱은 거칠게 황금빛 천사들을 핥기고 찢고 부숴버리며 마치 까마귀 떼를 쫓아버리는 하늘의 난폭자 독수리처럼 날렵하고 절대적인 힘을 과시했고 그 매서운 공격에 천사들은 비둘기처럼 힘없이 하나하나 추락했다. 이내 하늘을 수놓던 황금의 천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홀로 남은 악마가 육중한 몸을 뒤틀며 밤하늘을 향해 크게 포효했다.

  - 캬오오오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였다. 아직도 파괴 본능을 만족시키지 못한 악마가 돌연 괴성을 내지르며 도시를 파괴하기 시작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을 도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도시를 불태우는 검은 악마, 20m가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악마는 괴성을 내지르며 그 육중한 발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그 괴물의 발치 아래에 있는 ‘사내’는 덜덜 떨면서 이것이 꿈이라면 제발 깨어나길 빌었다.

  ‘제발, 제발!’

  ‘사내’의 간절한 바램을 뭉개듯 괴물의 발이 서서히 떨어졌다. 하늘을 시꺼멓게 뒤덮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사내’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안돼! 안돼! 안돼에에에에에에에!’

  쿵! 이윽고 악마의 발은 묵직한 소음과 함께 ‘그’를 깔아뭉갰다.

.
.
.

  “안돼에에에에에에에!”

  벌떡! 사내는 비명을 내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크게 확장된 동공과 땀으로 범벅이 된 최고급 실크 잠옷. 사내는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매만지며 사지가 멀쩡한 지부터 살폈다.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는 몽현의 경계에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내뱉는 바람결에 그의 황금빛 콧수염이 살랑거렸다.

  “후우. 꿈이었나. 살다 살다 이젠 별 꿈을 다 꾸는군.”

  그는 사자갈기같은 황금빛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반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산들바람에 분홍빛 투명한 실크 커튼이 흔들렸다. 아직 꿈이 덜 깬 듯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그것을 주시하던 사내가 갑자기 두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왼쪽 방 한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백송으로 만든 둥근 티 테이블 옆 마로니에 나무 의자에 갈색 누더기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소년이 걸터앉아 자신의 것이 분명한 고급 찻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짧게 깍은 백금발에 아직 볼의 젖살이 빠지지 않았을 정도로 앳된 귀여운 소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앉아 홍차를 마시는 그 모습이 마치 왕족마냥 기품이 넘쳐흘렀다.

  “…….”

  소년은 자신을 주시하는 사내의 매서운 눈빛을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느릿하게 반응한 건지 모를 애매한 태도로 커다랗고 냉혹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흘낏 뜨며 말했다.

  “좋은 아침, 그리드 핸드(Greed hand).”

  그리드 핸드, 탐욕스런 손, 나바론. 그것이 세간에서 사내를 호칭하는 이름이었다. 저스티스의 최고위층 12제중 7번째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그는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호칭하는 건방진 침입자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차가운 기운을 풀풀 날리는 그 웃음엔 결코 호의가 담겨 있지 않았다.

  “여긴 무슨 일이신가, 건방진 대리자 꼬맹이.”
  “프란츠 리슐리외.”

  자신의 이름을 툭하니 내뱉은 소년, 프란츠는 다시금 홍차를 입에 가져가며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남의 방에 무단 침입한 주제에 후안무치하기 이를 데 없는 그 건방진 태도는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아마 폭발하고도 남을 정도였으나 워낙에 냉정하고 사태 파악이 확실한 나바론이었기에 느긋하게 그 모습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답게 농담을 던지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이름으로 불리고 싶으면 다음부터는 방문 예약을 하고 오도록 해. 그 정도 예의는 차 마시는 폼으로 보아하니 배웠을 것 같은데.”

  달칵. 소년은 찻잔을 티 접시 위에 사뿐 내려놓고는 서서히 눈꺼풀을 열었다. 여자아이처럼 진 귀여운 쌍꺼풀이 소년을 소녀처럼 보이게 했는데 얼핏 봐서는 보이쉬한 느낌의 여아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프란츠는 그 커다랗고 싸늘한 눈동자를 굴려 나바론을 잠시 노려보더니 다시금 홍차에 입을 가져갔다.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홍차를 한 모금 들이마신 뒤였다.

  “그것보다 요즘 당신 휘하의 제 7부대 ‘럭키 세븐(Lucky seven)’이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만.”
  “흥, 헛소문이겠지. 내 부대가 맘먹고 은밀히 움직인다면 네까짓 녀석이 눈치라도 챌 수 있었을 것 같아?”

  나바론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포커페이스처럼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그 미소 띤 얼굴을 조용히 주시하던 프란츠는 다시금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총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숙지하셨을테지요?”
  “아아, 그래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지. 대륙은 지금 혼란의 극치에 치닫고 있는데도 말야. 누구 말씀인데 감히 거역하겠어?”

  나바론의 입가가 활처럼 길게 구부러졌다.

  “하지만 말야. 내 부하들 중 몇몇이 ‘분을 참지 못해서’ 움직일 수도 있는 노릇이지. 내가 그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잖아?”
  “…….”

  프란츠는 나바론의 얼음같이 냉정한 눈동자를 주시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곤 찻잔을 티 테이블 위에 사뿐히 올려놓고는 부드럽게 일어섰다.

  “좋아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프란츠는 창가 쪽으로 다가서며 나바론에게 말했다.

  “일의 진행은 확실하게, 그러나 목표한 바는 완벽하게. ‘그 분’의 말씀입니다.”

  단호하고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간단한 말. 나바론은 입가에만 나지막이 희소를 띠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 속 깊이 갈무리하겠다고 전해드려라. ‘어린 왕자(A little prince)’.”

  찰나의 침묵, 나바론이 자신을 지칭한 호명이 탐탁지 않은 건지 아니면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는 건지 프란츠 리슐리외의 무표정에 잠시나마 흔들림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얼음조각의 차가움으로 돌아간 프란츠는 때맞춰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져갔다. 사라진 프란츠의 잔영을 바라보며 나바론은 나지막이 말했다.

  “어린 왕자(A little prince), 배척받은 황제(An expeled emperor), 그리고… ‘이단의 마왕(The arch devil of heterodoxy)’인가, 큭큭…. 기분 좋은 바람이 불 것 같군.”

  나바론의 말처럼 가을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기분 좋게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하늘은 오랜만에 맑고 푸르렀으며 또한 아름다웠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 꿈은 도대체…. 크음….”

  갑자기 좀 전에 꾼 꿈이 생각나 잡친 기분으로 나바론은 신음을 흘렸다.




「DESTINY」
運命의 系統樹
第 31 夜. 축복의 밤.






  “하아.”

  혈맹성의 흑색 첨탑 꼭대기. 마치 하늘을 꿰뚫는 창처럼 우뚝 솟아있는 이 첨탑의 작은 방에서 마왕 유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둥그런 테두리에 가시나무 세공이 되어 있는 고풍스런 창밖의 하늘은 얼마 전의 일들이 거짓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맑고 푸르렀건만 마왕인 그의 맘속엔 청명한 가을 하늘과는 달리 시꺼먼 안개가 끼어 있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두운 생각들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몇 번 휘둘렀지만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하아….”
  “…유리, 아직도 사념을 떨쳐내지 못했나?”

  문득 유리의 뒤편에서 유신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철문에 어깨를 기대고 비스듬히 서 있던 유신은 한참을 그러고 있었던지 뻐근한 어깨를 풀어주곤 똑바로 섰다. 눈송이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이쪽을 쳐다보는 검고 탁한 눈동자, 유리는 그 눈동자를 잠시 주시하고 있다가 이내 힘없이 턱을 창가에 올려놓으며 침묵했다. 할 말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상대방도 알고 있을 대답을 또 해봐야 무의미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침묵은 금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다.”

  원래의 유리 같았으면 이런 식으로 침묵하진 않는다. 상대방의 대화에 진심으로 응해주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꾸해주는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침울해 있을 때야말로 남과의 대화를 통해 풀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건만 유리는 지금 철저히 마음을 걸어 잠그고 대화의 물꼬를 틀어주지 않았다.

  유신은 저번 브람스에서의 사건 이후 계속 저러고 있는 유리의 모습에 걱정의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네 몸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란 점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희망의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면 그것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길을 잃게 되는 법이니까.”

  유신이 몸을 돌려 문을 닫고 사라지자, 그제야 유리는 유신이 빠져나간 문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자신의 허리춤에 메여있는 검을 스르릉 뽑아들었다. 이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게 빛나는 에메랄드빛의 늘씬한 검신과 중앙에 커다란 에메랄드가 박혀 있는 빛으로 가득 찬 투명한 손잡이. 브람스에서 황금색 거인들을 격파하고 얻은 정체불명의 검이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이상하게도 이 검의 정체를 꿰뚫고 있었다.

  “윌 나이프, 펜릴.”

  무심코 검의 이름이 유리의 입가에서 새어나왔다. 검신 안쪽에서 타오르듯 일렁이는 빛은 혼을 빼앗아버릴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유리는 그것이 무서워 덜덜 떨었다. 저 빛이야말로 진정한 암흑의 신, 로키의 힘이며 무지막지한 파괴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지만 그 빛이 눈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혼을 끌어들이는 그 아름다움은 그의 마음을 붙들고는 쉽게 놔주지 않는 것이다.

  “내게 이런 감당 못할 힘을 줘서 뭘 어쩌라는 거야.”

  유리는 우울하게 읊조리며 왼손 약지의 루비반지(Saudade of laevantine)를 매만졌다. 루비의 중심에서 불 뗀 아궁이처럼 활활 타오르던 불꽃은 이젠 미약한 반딧불처럼 꺼질듯 은은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마검.”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의 마검을 불러보았지만 루비반지로부터의 대답은 없었다. 어째서인지 윌 나이프를 얻은 직후부터 반지의 빛이 약해졌으며 마검을 불러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유리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마검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없다. 옛 사건으로 마검은 이미 그 ‘혼’을 잃었지만 그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어주던 육신까지 이제는 없어진 것이다.

  “가로드 씨, 카인 씨, 글릭세르 씨.”

  모두 죽거나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명. 마음의 등불이 되어주던 이들이 하나하나 돌풍에 스러지는 촛불처럼 사라지자 마음의 공허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갑자기 추위가 엄습해와 그는 어깨를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춥다,
  두렵다,
  외롭다.

  “조장….”

  이제 그의 마음을 덥혀주던 불꽃은 단 하나의 촛불밖에 남지 않았다. 갑자기 유이의 얼굴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흑단같이 아름답고 윤기있게 흐르는 검은 머릿결과 보석처럼 빛나는 석류빛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그리웠고 또한 멀게만 느껴졌다. 창가에 이마를 기대고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
.
.

  한편, 혈맹성 아래로 넓게 펼쳐진 시가지의 한 건물 지붕 위에 한 명의 누더기 망토를 뒤집어 쓴 인영(人影)이 있었다. 굴뚝에 걸터앉아 3m는 됨직한 창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훤칠한 키의 그 사람은 멀리 붉은 언덕 위에 가시처럼 우뚝 솟아 있는 검은 혈맹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드의 그늘 아래로 햇빛을 반사하는 안경이 어둠 속에서 거짓말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의 옅은 갈색 눈동자는 분명 이 거리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혈맹성의 첨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작게 난 창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유리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보러가지 않을 생각인가요?”

  문득 그의 뒤 쪽에서 숨을 헐떡이는 여성의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깨 너머로 슬쩍 바라보자, 허름한 여행복 차림을 한 백금발의 여성이 막 지붕 위로 올라온 듯 어깨를 들썩이며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허리를 넘어 무릎부위까지 내려오는 길고 아름다운 백금의 머릿결, 잔잔한 호수의 파면처럼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햇빛을 반사하며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그녀는 분명 카렌티어스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정체불명의 여자였다.

  “…….”

  사내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혈맹성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해 뚱한 표정으로 사내를 노려본 카렌티어스는 뒤이어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모습으로 말이냐?”

  슬쩍 바람결에 흔들린 그의 소매 사이로 강철로 이루어진 기계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난히도 쓸쓸해 보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렌티어스는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그의 목소리는 지금 불고 있는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고 잔잔하게 이어졌다.

  “난 그 때 죽은 거야. 지금 나타나봐야 녀석들에게 혼란을 줄 뿐이지. 그리고 내가 과연 살아 있기는 한 걸까?”

  그는 자신의 기계손을 바라보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호흡하는 대지의 맥동도, 자연에 넘쳐흐르던 생명의 기운도, 이제는 그와는 먼 것이 되어버렸다. 그 어떤 생명도 느낄 수 없는 그의 몸은 모든 사물들을 죽은 것으로 인지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 그는 지금 죽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유령같은 존재가 된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미안…해요.”

  카렌티어스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를 이런 몸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던 것이다. 자조하는 그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날 깨워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는 붕대에 휘감겨있는 창을 지팡이 삼아 천천히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이 끝나는 날. 나는 진정으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겠지. 아무런 원도 한도 남기지 않고 말야. 그거야말로 용병인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인게지. 후훗.”

  작게 웃는 그의 눈은 멀리 혈맹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쓸쓸하고 회한이 가득한 눈빛은 그것을 보고 있는 모든 이들을 숙연하게 만드는 슬픔을 내포하고 있었다.

.
.
.

  “으응….”

  얼마나 잔 것일까? 이미 땅거미가 짙게 깔리고 있는 창밖의 노을을 느끼면서 유리는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어?”

  환각일까? 문득 눈을 흘겨 왼쪽을 바라보자 창턱에 걸터앉아 있는 검은 인영이 희뿌연 시야 사이로 보였다. 바람에 펄럭이는 검은 망토와 그 아래로 늘씬하게 쭉 뻗은 유연한 몸매, 노을에 반사돼 아름답게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넋을 잃을 정도로 황홀하게 빛나는 석류색 진홍의 눈동자. 복숭아 빛이 은은하게 도는 티 없이 맑은 피부와 작게 벌어진 무심해 보이는 입가. 혹시 달콤한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비몽사몽에서 헤매는 유리의 귓가에 그녀의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일어났어?”
  “아, 네…에에에에에에?! 조장?!”

  순간 잠이 확 달아난 유리는 자신에게 눈웃음 짓는 유이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 와중에 다리가 꼬이는 바람에 꼴사납게 뒤로 넘어져버렸고 잘 익은 사과처럼 벌게진 얼굴로 그는 벌떡 일어섰다.

  최악이었다. 절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상대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유리는 제발 이것이 꿈이기를 빌었지만 내심 유이의 미소 짓는 얼굴을 보자 꿈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
  “…….”

  무의미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두 사람은 누구랄 것도 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 유이는 산 너머로 강렬하게 지고 있는 노을을 감상하고 있었고 마왕 유리는 노을에 아름답게 빛나는 그녀의 옆얼굴을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고 있는 태양에 맞춰 정지한 세상 속에서 그와 그녀의 시간은 영원에 함께 하고 있었다.
  
  “…이곳의 경치는 정말 아름다워. 그렇지?”
  “조장이 더 아…. 아! 네, 네에! 그렇고말고요! 경치하면 여기가 제일이죠!”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유이였고 ‘조장이 더 아름다워요’라고 대답하려다가 순간 당황한 유리가 몸을 딱딱하게 굳히며 힘차게 얼버무렸다. 다행히도 유이는 앞 말은 못 들은 듯 별 다른 반응은 없었고 유리는 안심 반 아쉬움 반이라는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그래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훗, 유리는 정말 여전하네. 다른 것들은 변해버렸는데,”

  ‘훗. 네 녀석은 여전히 변한 게 없구나, 유리.’

  과거에 들은 적이 있던 말. 죽기 직전에 가로드와 했었던 대화가 생각나 유리는 시선을 아래로 무겁게 내리깔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요. 전 아직도 예전 그대로의 어리광쟁이일 뿐이에요.”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마왕 유리의 목소리에 유이는 시선을 다시 노을 쪽으로 던졌다. 태양은 이제 능선 위로 실날같은 빛만을 남기고 서서히 밤의 어둠 속에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남색과 주황색이 어우러진 자연의 조화가 아름다운 최후의 불꽃으로 장식되어 밤의 차가움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순리대로 태양빛은 사라지고 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새벽은 다시 다가오고 저문 태양은 다시금 찬란한 황금빛으로 귀환하겠지….

  문득 유이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태양은 다시 뜨지만, 떨어진 꽃잎은 다시 붙질 않아….”

  유이의 옆얼굴에서 쓸쓸함이 베어 나왔다. 마왕 유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더한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요 며칠간 계속해서 앓아왔던 상처가 배가 되어 벌어지는 것 같았으나 조장의 이런 모습을 보자 ‘절대 그렇지 않아요!’하며 마음에도 없는 말로 위로를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가볼까?”
  “네?”

  스윽, 유이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동작이었지만 유리는 그 모습이 마치 멀리 떠날 사람처럼 보여 불안했다. 그는 무심코 유이를 불렀다.

  “…조장?”

  유이는 작은 미소를 짓고 불안한 눈초리로 자신을 보는 유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미소에 즐거움은 없었다. 슬픔만이 가득해 울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떠나려고 해. 남은 꽃잎이 다 지지 않도록. 작별 인사도 끝냈으니 이만 가겠어.”

  그녀는 창 턱 위에 서서 유리에게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안녕, 어린 마왕. 잘 지내.”
  “자….”

  유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조장!”

  유리는 재빨리 창으로 다가가 유리가 떨어지고 있을 곳을 내려다보았다. 중력을 다루는 능력을 가진 유이는 마치 꽃잎처럼 밑으로 천천히 낙하하고 있었다.

  “…….”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리는 순간 무슨 굳센 결심을 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곤 그대로 창턱을 넘어 유이를 향해 힘차게 도약했다.

  “으아아아아아!”
  “유리?!”

  기합(?)을 내지르며 쏜살같은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낙하하는 그의 모습을 포착한 유이는 기겁을 할 정도로 놀라 재빨리 몸을 돌려 간발의 차이로 그의 손을 낚아챘다. 순간 가해진 장력에 중력 밸런스가 무너질 뻔했지만 그런 것에 무너지면 ‘그림자의 여제’가 아니었고 그녀는 순식간에 기울어진 중력 밸런스를 다잡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살았다.”

  살았다며 가슴을 짚고 숨을 크게 들이키는 철없는 유리의 모습에 화가 잔뜩 난 유이가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넌 대체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에에잇! 시끄러워요! 이게 다 조장 때문이잖아요!”
  “발버둥치지마 바보야! 죽고 싶은 거야?”
  “바보는 제가 아니고 조장이잖아요!”

  다른 때완 달리 강하게 나오는 유리의 모습에 유이는 황당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게 혹시 미쳤나 하는 작은 의구심까지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지만 애석하게도 유리는 전혀 미치지 않았고 유이의 가냘픈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용감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갑자기 ‘안녕.’하고 떠나시면 누가 ‘아, 그래요. 몸 편히 지내세요.’하며 보내줄 줄 알았어요?! 조장이야말로 생각이 있긴 한 거예요?!”

  유리의 대꾸에 슬쩍 열이 받은 건지, 유이의 이마에 십자 힘줄이 툭하고 불거졌다.

  “그래! 사람이 안녕하면 그런가보다하고 받아줄 것이지 이렇게 무식하게 막는 게 어딨어?!”
  “이유가 없잖아요! 이유가! 맘 잡고 떠나실 거면 이유라도 말씀해줘야 하는 거 아녜요?!”

  유이는 침묵했다. 천천히 이제는 완전히 어둑해진 밤하늘을 유영하는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유이가 낮고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가로드도, 카인도, 글릭세르도 죽었어. 내 주변의 사람들은 늘 그렇게 사라져버려. 내가 있는 한 그 끝없는 악순환은 계속될 거야. 그리고 그 저주는 곧 너를 찾아내겠지.”
  “이기주의자….”
  “…네가 뭘 알아?!”

  유이는 불같이 화를 내며 유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눈물을 글썽이는 쌍흑의 눈동자를 맞대하자 화난 얼굴은 당혹으로 변하였다. 눈물을 찔끔 머금은 심연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진홍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저는 어쩌구요. 조장이 가버리면 저는 어쩌라구요!”
  “…….”

  유이는 유리에게서 눈을 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애처로운 눈동자를 더 이상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리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유이의 아픈 가슴을 찔러댔다.

  “그러니까 이기주의인거에요 당신은! 남은 자들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혼자만 도망치려하는 겁쟁이라구요!”
  “그럼 내가 어쩌겠어?! 이제까지 내 조원이었던, 내 가족같은 이들이 계속 죽어나갔어! 6백년이나 지나서 이제는 괜찮을까 싶었는데, 이 망할 저주는 다시금 내 가족들을 앗아갔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돼?! 엉? 이제 하나 남은 너까지 죽는 꼴을 보란 얘기야?!”
  “주…!”

  유리는 말을 하려다말고 하나 남은 손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윌 나이프를 겁집채 빼어들었다. 그리곤 그것을 유이에게 보였다. 이제까지 마냥 두려워하던 힘이 이젠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그 강대한 파괴의 힘도 이젠 벌벌 떨며 피하지 않았다.

  유리는 뚜렷하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도망치지 않아요! 죽지도 않아요!”

  유이는 말을 잇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지상에 발을 내딛을 때까지도 유이는 침묵했다. 자신의 시선을 자꾸 피하는 유이를 바라보며 마왕 유리는 온 몸에 힘을 주곤 한 가지 결심을 굳히기로 마음먹었다. 이제껏 마음속에 갈무리하고만 있던 하나의 감정, 자신도 알 수 없었던 그 격렬한 감정을 폭발시키며 그는 유이의 가냘픈 어깨를 잡아당겼다.

  “…에?!”

  와락! 마왕 유리는 그녀의 작은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샷셀에 들어오고 어언 4년, 그 시간 동안 부쩍 큰 그였기에 유이는 더욱 작게만 느껴졌다.

  “유리?”

  자신을 밀쳐내려고 노력하는 유이의 몸짓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더욱 꽉 감싸 안았다. 이젠 놓치지 않겠다는 그 만의 각오와 결심이 이 순간에 제 힘을 다하고 있었다.

  어린 마왕은 위엄과는 전혀 동떨어지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떠나지 말아요. 제발…. 내 곁에 있어줘요, 유이.”
  “…….”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몸. 유이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소년’의 진동과 온기를 느끼며 당혹스러워하다가 이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소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한층 듬직해진 그의 어깨 위에 볼을 기대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바보.”

  샷셀 제 7조 데스티니(Destiny)에 부임할 때 보았던 작고 겁 많던 소년은 4년이 지난 지금, 어느새 의지할 수 있을 만큼 듬직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깊어가는 밤하늘은 그들을 축복이라도 하듯 수많은 별들로 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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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 뿌~ 뿌~ 빠~~

캬캬캬캬 축 프로포즈~ 유리 ♡ 유이 커플~

키에헤헤헤헤헤! 마지막에 염장 용 포옹 그림 집어넣으려다가

실력 부족으로 못 넣는 걸 한탄하며 캬아하하하하!

태클 사절이삼~ 케케케케

헥.헥. 에고 졸려라. 갑자기 필이 받쳐서 마구마구 찍어냈는데. 새벽 5:30분. 내가 미쳤지. 미쳤어.. OTL


-짜투리 설정-

프란츠 리슐리외 - 어린왕자, 배척받은 황제, 이단의 마왕

: 진마국의 14대손 마왕으로서 진마국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귀족들에게 쫓겨난 마왕이다. 애초에 힘은 분명한 마왕, 그 이상이었으나 진마의 순수 혈통이 아닌 빛의 종족 엘프와 어둠의 종족 마족의 혼혈아였던 그였기에 배타적인 귀족들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13대 마왕이 서거하자마자 프란츠 리슐리외를 혈맹성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당시 나이가 13세였던 어린 마왕은 그렇게 조국으로부터 배신받았으며 정처없이 떠돌던 와중에 지금의 저스티스 총수를 만나게 되었다.(진짜 총수, 물론 당시엔 저스티스가 없었음.) 그와 계약을 맺은 후부터 그 자신의 육체의 시간은 멈추게되어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13세 모습 그대로이며 지금의 힘은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 세간에 나서는 일 없이 평소엔 세상을 떠돌다가 어느 날 저스티스의 총수 대리자 역을 맡게되었다. 그 자신은 과거를 떨쳐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진마국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한다.
  프란츠 리슐리외라는 이름과 성은 어머니가 물려준 것. 원래 이름은 잊혀졌다. 진마국의 고문서에도 이단의 마왕, 배척받은 황제, 어린왕자라는 문구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진마국의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운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한듯 보인다.
  각성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지금의 상태가 2차를 지나 3차 각성 상태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