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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DESTINY」 運命의 系統樹

2005.12.22 13:10

갈가마스터 조회 수:102 추천:2

extra_vars1 프란시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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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가로드는 앞에서 찔러 들어오는 병사의 총검을 슬쩍 피한 뒤 병사의 뒤통수를 개머리판으로 찍어버리고 아직도 멧돼지떼처럼 밀려오고 있는 공국군을 바라보며 신음을 흘렸다. 장교란 장교는 모조리 저격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 공국군의 미친듯한 돌진은 저하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전 도착한 샷셀 직속 특무부대 ‘헬싱’과 ‘마탄의 사수’부대에 의해 전황이 순식간에 뒤집어졌는데도 전투에 미친 병사들은 도무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핏발 선 두 눈이 다들 무엇엔가 홀린 것만 같았다.

“네놈들은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 거냐!”

- 퍽!

가로드는 핼버드 라이플의 도끼날을 휘둘러 주변에 서 있던 병사 둘의 목을 날려버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가로드의 외침이 그들의 귀에 닿을 리 만무했다.

“음?!”

가로드는 핼버드 라이플의 창끝으로 앞에 서 있던 병사의 목을 꿰뚫은 뒤 갑자기 뒷골이 오싹해지는 섬뜩한 느낌에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버린 진마국 병사들과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바다를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던 그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비명도 없이 죽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한 남자가 긴박한 전투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유유히 서 있었다.

“젠장.”

오리주둥이같이 생긴 챙 넓은 청색 모자, 그 아래 어깨까지 부드럽게 굽이쳐 내려오는 군청색 머리카락과 권태에 찌들어 있는 푸른빛의 눈동자, 양 팔이 뜯어진 청재킷과 탄탄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양 팔에 휘감듯이 새겨져있는 가시 넝쿨 문신이 특징적인 청년이었다. 가로드는 그를 보자마자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로젠 크로이츠(Rosen Kreuz)!”

12제의 마지막 넘버, 장미 십자가(로젠 크로이츠) - 프레이저 크로바인츠, 그것이 바로 세간에 알려져 있는 청년의 이름이었다. 양 팔에 휘감겨 있는 '장미 가시 넝쿨 문신' 그리고 청년의 몸을 감싸고 있는 잔잔하지만 날카롭고 극도로 정제되어 있는 투기(鬪氣)로 보아 프레이저가 틀림없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 12제가 나타나다니. 가로드는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12제라니. 결국 이 싸움도 저스티스가 개입되어 있다는 건가?”

가로드가 식은땀을 흘리며 프레이저를 주시하고 있는데, 갑자기 프레이저가 숨을 크게 내쉬며 말을 걸어왔다.

“너는 강한가?”

가로드는 프레이저의 난데없는 물음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수 있게 그는 자세를 낮추며 프레이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흥, 그런 건 붙어봐야 알겠지. 하지만 잔챙이라고 무시하다간 먼저 간 놈 꼴이 될 거다. 12제 로젠 크로이츠.”

가로드의 핼버드 라이플을 잠시 주시하던 프레이저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 네가 ‘가로드 샤갈’인가. 너라면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

뚜둑-뚝. 프레이져는 가볍게 손가락 마디를 풀어주며 저음으로 말했다.

“간다.”

얼음처럼 싸늘하고 고드름처럼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와 함께 그의 온 몸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투기가 맹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DESTINY」
運命의 系統樹
第 16夜. 난전(프란시스 전투)






“음?”

카인은 왼손에 든 권총을 연이어 발사해 프란시스 공국군 병사를 쓰러뜨린 뒤 고개를 들어 수도 왕궁 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꺼림칙하고 역겨운 기운이 그 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이, 왜 그래? 카인. 니가 그러면 괜히 불안하단 말야. 조장도 저 모양인데.”

열심히 바주카포와 기관단총을 갈겨대던 글릭세르는 카인의 기색이 이상하게 느껴져 불안감을 내비치며 얘기했다. 유이도 쓰러져 있는 마당에 마왕 유리도 사라져버렸고, 가로드와는 완전히 헤어져 버렸다. 게다가 카인까지 저러니 그의 입장으로선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던 것이다. 카인은 멀리 수도 쪽을 주시하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권총을 들어 옆에서 달려들던 병사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말을 이었다.

“뭔가 나쁜 예감이 든다. 저쪽에서 무언가 기분 나쁜 것이 올라오고 있다.”
“음? 저 검은 불꽃 말하는 거야? 하긴 기분 나쁘게도 생겼구만.”

글릭세르는 왕궁을 휩쓸고 있는 검은 불꽃을 가리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카인이 느낀 탁한 기운은 검은 불꽃과는 다른 존재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게 아니다. 뭔가 다른 것이 저곳에 있다. 역겹고 또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어두운 기운이….”

카인은 그 기분 나쁜 느낌에 신음을 길게 흘렸다.

“음?!”
“왜 또 그래?”

글릭세르가 짜증난다는 듯이 말하는데 갑자기 카인이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러 땅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깜짝 놀란 글릭세르가 카인의 검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옮기자 그의 검 아래, 형체가 불분명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부르르 멈춰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 뭐야 이건!”

글릭세르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그림자의 끝을 쫓아갔다. 그러자 그 끝엔 흰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한 신사가 서 있었다.

- 짝. 짝. 짝.

남을 비웃는 듯한 특유의 미소와 머리를 뒤로 단정하게 넘긴 젊은 신사가 손뼉을 천천히 치며 유쾌하다는 듯 말했다.

“제법인데, 이걸 눈치 챌 줄이야. 역시 이곳에 온 보람이 있었군.”
“에스게일….”

카인이 어금니를 뿌드득 갈며 신음처럼 남자의 이름을 흘렸다. 쉐도우 킬러(그림자 살인마)-에스게일 라브레시아, 저번 마드라엘 수도 습격 사건에서 보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림자를 이용해 상대를 죽이는 힘을 가진 저스티스 제 8부대의 간부이자 카인의 원수.

카인은 검을 땅에 박아 넣은 채 글릭세르를 불러 말했다.

“글릭세르. 조장을 데리고 피해있어라.”
“칫, 정말 괜찮겠어?”

저번에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카인을 생각하며 글릭세르가 물었다. 그러나 카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에선 오히려 글릭세르와 의식을 잃고 있는 유이는 거치적거릴 뿐이었다. 상황 판단을 마친 글릭세르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유이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좋아, 죽지마라 카인.”

카인을 뒤로 하고 유이에게 한달음에 달려온 글릭세르는 바주카포를 미련 없이 버린 뒤 식은땀을 철철 흘리며 땅에 쓰러져 있는 유이를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곤 비교적 프란시스 공국군의 병력이 적은 쪽을 살핀 뒤 미련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글릭세르가 어느 정도 멀어질 때까지 엷은 미소를 띠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준 에스게일은 이윽고 글릭세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손가락으로 카인의 칼 아래 멈춰있는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림자 주박술이군. 동양의 주술인데 누구에게 배웠지?”

‘그림자 주박술입니다. 머나먼 동방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비술이지요. 이거라면 카인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수상한 남자 라오데키야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던 카인은 새삼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배울 땐 반신반의 했지만, 확실히 이거라면 에스게일의 그림자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덤으로 에스게일의 움직임까지 봉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비술에도 몇 가지 약점은 있었다. 바로 검에서 손을 떼기라도 한다면 주박이 풀려버리기 때문에 술자 자신도 공격할 수 없다는 점과 주박술에 걸린 상대도 발만 떼지 못할 뿐 상체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대수롭지 않지만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하물며 총알을 검으로 튕겨내는 경이적인 검술의 소유자인 에스게일이 그림자로 묶고 원거리에서 총을 쏜다고 한들 가만히 맞아줄 리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점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에 만족한 카인은 검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 것보다… 우리 관계에선 누가 죽느냐가 더 중요하다 에스게일!”

카인은 재빨리 검을 뺌과 동시에 에스게일을 향해 달려가며 권총을 연사했다. 적에게 공격의 주도권을 주면 당하는 것은 자신이 될 터였다. 어떻게든 자신의 페이스로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것! 그것이 1:1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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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웅! 프레이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가로드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가로드는 본능적으로 핼버드 라이플을 들어 그 주먹을 막으려했으나, 곧 엄청난 불안감에 핼버드 라이플을 내리고 그 주먹을 피했다.

- 핏!

가로드가 피한 순간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형의 날카로운 바람이 그의 목 부분을 스쳐지나갔고, 위협을 느낀 가로드는 재빨리 뒤로 몸을 날리며 프레이저와 거리를 벌리는데 열중했다. 다행히 어찌된 일인지 프레이저는 물러나는 가로드를 쫓지 않았고, 가로드는 안전하게 프레이저의 공격권 밖으로 물러날 수 있었다.

“헉, 헉.”

가로드는 자신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끈적거리는 피가 약간 배어나오고 있었다.

‘이, 이건 뭐지?’

자신의 목을 스치고 지나간 무형의 흉기!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 전에 프레이저에게 접근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암기인가? 가로드는 이때껏 겪어온 경험에 빗대어 여러 가지 상황을 추측해보며 프레이저를 살폈지만 답은 쉽사리 나와 주지 않았다.
가로드가 바싹 긴장하며 프레이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경계하고 있을 때, 프레이저는 여전히 권태에 찌들어 있는 푸른 눈동자에 보일 듯 말 듯 미묘한 이색을 표하며 가로드를 향해 ‘보기보다 제법’이라는 듯 말했다.

“좋은 감각을 가졌군. 피하지 않고 막았다면 넌 지금쯤 목이 달아났을 거다.”
“흥, 칭찬은 고맙게 받아드리지.”

장난스럽게 프레이저의 말을 받아넘겼으나, 뒤이어 프레이저의 주변 공기가 놀랍도록 강하게 요동치는 것을 보며 가로드는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레이저가 무겁게 입술을 움직여 저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콰앙! 주변의 공기를 요동시키며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프레이저의 투기가 돌연 용광로같이 이글거리는 아지랑이를 순식간에 내뿜으며 주변 공기를 음속으로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불어닥친 돌풍이 주변 땅에 손톱 같은 가늘고 날카로운 검상들을 이리저리 새겨 넣었고 땅에 쓰러져 있던 시체가 엉망이 된 지표면과 함께 몇 토막으로 잘려져 나가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가로드도 특유의 감각으로 무형의 ‘그것’을 피해보았으나 어깻죽지와 오른쪽 허벅지에 작은 검상을 입고 말았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야 가로드는 자신의 목에 상처를 낸 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무형의 검기! 과거 수많은 검술가들이 사용했다는 그것이 프레이저의 전신을 감싸고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저것은 프레이저의 전신이 무섭도록 단련된 칼날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체내를 파괴하는 권법에 강철조차 잘라내는 검기! 이 말도 안되는 조합이 바로 프레이저가 이전에 12제였던 사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 꿀꺽.

가로드는 갑자기 목이 막혀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갈증은 도무지 풀리는 것 같지 않았고 저 괴물같은 상대에 대한 욕지거리만 계속 올라왔다.


‘…어렵군.’

주변의 공기가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았지만 프레이저로로부터 느껴지는 싸늘한 살기는 오히려 더 뚜렷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무형의 검기가 엉망으로 핥기고 지나간 지표 한가운데에 서 있던 프레이저는 두 눈을 더욱 날카롭게 빛내며 무미건조한 어투로 앞서 한 말을 이어나갔다.

“…감각만으로 이걸 피하려 했다간 죽는다.”
“흥, 걱정도 팔자군.”

가로드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야말로 죽을 지도 모르겠군.’

가로드는 오랜 세월동안 자신과 함께 해온 핼버드 라이플의 차가운 금속성을 느끼며 곧 자신의 목을 베어갈지도 모를 상대방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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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

그림자 주박술을 푼 직후 카인이 쏜 총알은 에스게일에게 티끌만한 상처도 주지 못하고 빗나가버렸다. 그러나 총알은 카인이 에스게일에게 다가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해주었고, 그 짧은 시간동안 재빨리 에스게일과의 거리를 좁힌 카인은 검을 역으로 잡고 에스게일의 목을 향해 힘차게 가로 그었다.

“흥! 제법 재롱을 부리는군.”
- 챙!

그러나 에스게일은 가볍게 검을 들어 자신의 목을 노린 카인의 검을 막아내었고 곧바로 그림자를 움직여 카인의 그림자를 노렸다. 하지만 그런 것에 당할 카인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번 공격으로 에스게일을 죽일 수 있으리라 여기지도 않았기에 뒤이어진 동작은 놀랄만큼 빠르고 깔끔하게 진행됐다.

- 탕!

카인은 그림자에 공격당하기 전 재빨리 권총을 들어 제로거리에서 에스게일에게 발사했고, 에스게일은 그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급하게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총알은 아쉽게도 에스게일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애초의 목적은 그림자 공격을 약간이나마 늦추는 것이었고 효과는 확실했다. 카인을 공격하려던 그림자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다음 공격을 감행하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져왔다.

“에-스-게-일!”

퍽! 이틈을 타 카인이 발로 에스게일의 왼쪽 옆구리를 걷어찼다. 순간 에스게일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렸고 당황한 에스게일은 반쯤 공중에 뜬 채 허겁지겁 검을 휘둘러 카인의 움직임을 견제한 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절호의 찬스! 카인에게 있어서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나아가 검을 휘두른다면 균형을 잡지 못한 채 허둥지둥 뒤로 물러나는 에스게일의 목을 날려버릴 수도 있는 최고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카인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에 에스게일의 목을 치는 것 대신 재빨리 검의 방향을 바꿔 땅을 찍었다.

- 위이잉….

구슬프게 울리는 검신 아래 검극에 꿰뚫린 그림자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옆구리를 공격당한 순간, 에스게일은 그림자를 움직여 카인을 공격토록 했고 만약에 카인이 그대로 에스게일에게 달려들었다면 상대의 목을 베기도 전에 그림자의 공격을 받고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다른 자들 같았으면 벌써 그림자에 의해 심장이 터져 죽었을 테지만 에스게일과 이미 두 번이나 싸워본 카인이었기에 눈치챌 수 있었던 공격이었다.

- 촤아악.

그 틈에 카인과의 거리를 어느 정도 벌린 에스게일은 볼에 길게 그어진 혈선을 엄지로 스윽 닦아내 입술을 축이며 즐겁다는 듯 입가를 실룩거렸다.

“좋아, 아주 좋아! 역시 살려둔 보람이 있는 녀석이야! 이토록 즐거운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에스게일의 웃음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카인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검에 꽂혀 있던 그림자가 스르륵 에스게일의 발아래까지 줄어들었다. 카인은 총알이 떨어진 권총을 홀스터에 꽂아 넣고 남은 검 하나를 꺼내든 뒤, 양 손의 검을 거꾸로 쥐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총알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제부턴 두 자루의 검으로만 싸워야 했다. 카인은 증오를 가득 담아 일갈했다.

“오늘 너와의 악연을 종지부지어주마 에스게일.”

카인의 진지한 태도에 잠시 실소를 터트린 에스게일은 검극으로 카인을 겨누며 말했다.

“좋지. 아쉽지만 여기서 끝을 보도록 할까….”
“!”

촤악! 갑자기 에스게일의 옆으로 뻗어 있던 그림자가 검은 형체를 이루며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검은 그림자는 아메바처럼 몇 번을 꿈틀거리더니 곧 검은 물론 에스게일의 모양새와 동상을 이루며 형체를 완성시켰다. 실루엣은 완벽히 검을 든 에스게일의 형상이었으나 시커먼 암흑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검을 쥔 손이 반대라는 것이 그림자와 에스게일의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존재가 둘로 늘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앞을 볼 수 없는 카인에게 있어서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의 존재는 의문투성일 수밖에 없었다. 카인의 혼란을 눈치 챈 건지 에스게일은 얼굴 가득 환희를 표하며 외쳤다.

“간다! 죽고 싶지 않다면 발버둥쳐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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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젠장! 이놈의 조장은 왜 이 긴박한 순간에 기절을 하고 난리야?!”

한참을 달리던 글릭세르는 슬슬 기운이 떨어졌는지 어깨에 메고 있던 유이라는 짐을 땅에 내려놓았다. 전투 때는 날아다니던 유이여서 깃털 같을 줄 알았더니만 막상 들고 나르다보니 천금보다도 무겁게만 느껴졌다. 땅에 털푸덕 주저앉아 헥헥 숨을 고르던 글릭세르는 뭔가 생각난 듯 품에서 수상한 약병 하나를 꺼내들더니 냅다 삼켜버렸다. 그러자 뭔가가 속에서부터 후끈 달아올라오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좋아! 으으으으! 기운이 마구마구 솟구치는구나! 역시나 내 발명품이다!”

한참을 자신의 발명품의 위대함에 대해 감탄하고 있던 글릭세르는 잠시 후 이상하게도 슬슬 배가 아파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고통을 수반하며 글릭세르의 내장을 뒤집어놓기 시작했다.

“끄오오오오오…. 뿌드득. 으그그그그그그. 사, 살류….”

- 저벅. 저벅.

속에 있던 것을 모조리 게워내며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글릭세르의 뒤로 검은 그림자 셋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초점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충혈된 두 눈, 피로 물든 총검과 야전복. 마약을 복용한 듯 흔들거리며 다가온 프란시스 병사들은 입가에서 광견(狂犬)이나 흘림직한 침을 뚝뚝 떨어뜨리며 땅에 쓰러져 있는 유이와 손가락 하나 꿈틀댈 기운도 없는 글릭세르를 노려보았다.

“저, 적!”
“적이다! 적이야!”
“괴물이다! 우릴 죽일 거야!”
“주, 죽이자.”
“그, 그래.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을 거야.”

이미 전신으로 퍼진 약기운에 두뇌까지 미친 병사들은 눈앞에 보이는 살아있는 사물 전체를 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글릭세르와 유이는 이들에게 대항할 수단이 전무했다.

‘주, 죽었다!’
“우웨에에엑! 사, 살….”

‘살려줘’라는 단말마의 외침이 채 나오기도 전에 글릭세르의 머리를 노린 한 병사의 총검이 위로 휙 쳐들려졌다. 글릭세르는 코앞까지 다가온 허무한 죽음에 새삼 허탈감까지 느꼈다.

‘끄, 끝인가! 나 글릭세르 정말 짧았지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는데,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 구나….’

- 핏! 핏!

글릭세르가 겸허히(?) 죽음을 받아드리려는 순간 공기 중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총검을 치켜든 병사의 손이 총검과 함께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떨어졌다. 시간이 멈춘 듯 양손이 조각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던 주인은 잠시 후 입 윗부분의 머리가 아래로 스르륵 밀려나며 생을 마감했다.

“으, 응?”

동료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쓰러졌기 때문일까, 마약에 취한 병사들은 양 손이 절단되고 머리의 절반이 날아가 뇌수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동료를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두 번째 동료가 똑같은 꼴로 쓰러지고 나서야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주변을 향해 총을 갈겨대기 시작했다.

“히, 히아아아악!”

- 핏! 피슛!

그러나 불빛에 노출돼 찬란하게 공중을 수놓는 은사(銀沙)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총을 쏘던 두 명의 병사마저 육신이 둘로 갈라져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 뚜벅, 뚜벅.

병사들이 모조리 쓰러지자, 외눈안경을 쓴 남자가 모래 바람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발터 C 도르네즈였다. 그는 병사들이 흘린 피와 자신이 쏟은 오물에 범벅이 되어 있는 글릭세르에게 다가와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이런…. 여기서 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글릭세르님. 카인님도 안보이시고.”
“아, 그, 그게. 속이 좀.”

이제 좀 살만해진 글릭세르가 창백한 얼굴로 발터에게 말했다. 그가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우자,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발터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마왕자, 유리였다.

“발터씨,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시는 게 어딨어요…! 글릭세르씨?!”

먼저 발터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온 유리는 땅에 널브러져 있는 병사들의 산산조각난 시체와 글릭세르의 모습을 발견하고 급하게 달려왔다. 글릭세르는 손가락으로 유리를 가리키며 발터에게 물었다.

“저 녀석! 어디에서?”
“그 검은 불꽃이 바로 저 마왕자였습니다.”
“에? 그, 그게 바로?”

글릭세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오는 유리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변한 게 없는데 그 무시무시한 불꽃으로 수도를 박살내버렸다니. 정말 놀랠 노자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나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유리가 글릭세르의 팔을 어깨에 걸쳐 일으켜 세워졌고, 글릭세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유리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일어섰다.

“아, 고마우이.”
“별 말씀을…. 앗?! 조장!”

글릭세르를 부축하던 유리가 문득 쓰러져 있는 유이를 발견하더니 갑자기 손을 놓고 부랴부랴 유이에게로 달려가버렸다. 그 통에 다시 피바다에 얼굴을 처박은 글릭세르가 갑자기 솟구친 기운으로 벌떡 일어서며 욕지거리를 토해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할 수 있었다.

“이런 쓰벌 놈!”

글릭세르의 상소리는 귓전으로 흘리며 유이의 상태를 살핀 마왕자는 다행히 상처하나 없는 그녀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맞아! 글릭세르씨!”

그제야 글릭세르가 생각난 유리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글릭세르의 얼굴에서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마왕자는 겸연쩍은 얼굴로 유이를 안아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몸은 괜찮으신지….”
“괜찮지! 아암! 괜찮고말고! 남자가 여자를 쫓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

정곡을 찌르는 글릭세르의 비아냥거림에 유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유리를 위기에서 건져준 것은 바로 발터였다.

“자, 이제 그만하시고 이곳에서 빠져나갈 준비를 하지요. ‘헬싱’과 ‘마탄의 사수’ 부대가 필사적으로 퇴로를 열고 있습니다.”
“엥? 왜요? 지금은 분명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것 같은데.”
“저스티스가 개입해왔습니다. 오는 길에 몇 명 마주쳤지요. 카나드 대공각하께서 ‘살인귀-베리도트’를 막고 있습니다.”
“사, 살인귀 베리도트? 그 변태 살인마자식이 여기에? 아니, 왜?”

글릭세르는 잠시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가 발터의 말을 듣고 ‘제길’을 연신 내뱉으며 에스게일을 떠올렸다. 저스티스의 개입! 저스티스의 간부 에스게일의 등장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저스티스가 이곳에 개입해왔다는 절대적인 증거였다. 지금의 샷셀로서는 형세가 이만저만 불리한 것이 아니었다. 2제인 베리도트는 워낙에 혼자 움직이는 몸이라 휘하부대 ‘Ri’를 대동하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에스게일이 속한 8부대는 이곳으로 오고 있거나 혹은 이미 도착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지금 같은 난전에서 옆구리를 얻어맞는다면 샷셀의 중추 ‘헬싱’과 ‘마탄의 사수’는 철퇴를 맞은 건물처럼 철저하게 무너질 공산이 컸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유리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기, 가로드씨와 카인씨는…?”

글릭세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가로드는 모르겠고…. 카인 녀석은 지금 에스게일이라는 놈과 싸우고 있어.”
“네? 그, 그런!”

유리가 심각한 얼굴로 글릭세르를 보는데 발터의 귓가에 꽂혀 있는 이어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 치지지지…좌익전선 헬싱 제 2 분대입니다!
“그래, 가로드님은 찾았습니까?”
- 네, 허나….

어리둥절하고 있는 발터의 귀로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발터가 문득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럼 일단 본대에 합류하세요. 뒷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발터가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해주었다.

“가로드님은 지금 로젠 크로이츠, 프레이저와 싸우고 있다는군요.”

모두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전 그쪽으로 향할테니 마왕님은 마왕군의 잔존 부대를 이끌어주십시오. 그 후엔 혈맹성으로 이동해서 전열을 재정비해야만 합니다. 혈맹성의 콘라드 하이드레드 백작께서 친히 휘하 부대를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계시니 웨스트 아크 산맥에서 그와 합류하세요.”
“하지만! 카인씨와 가로드씨가!”

투정을 부리는 유리에게 발터의 싸늘한 일갈이 이어졌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당신이 서있는 위치입니다. 어린 마왕님.”

유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물론 알고 있었다. 자신은 마왕이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뭘 해야 하는지…. 와해된 마왕군을 다시 이끌어 실추된 위엄을 되살려야만 했다. 그게 마왕으로서 자신의 의무였고 지금 당장 해야만 할 일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해온 동료를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유리에게 발터가 냉정히 말했다.

“선택은 당신 몫이지만 그 선택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폐하. 그럼 전 이만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빠른 결단을 내려주시길.”

발터가 사라진 뒤 유리는 눈을 내리깔고 고민에 빠졌다. 고민에 빠질 시간은 예전에 지났건만 유리는 쉽게 결정내릴 수 없었다. 보다 못한 글릭세르가 짜증을 섞어 말했다.

“어이, 마왕자.”
“…….”
“네 녀석이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조장이 뭐라고 할 거 같아?”

‘넌 마왕이야, 자신의 앞길은 스스로 정해야 해.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마. 아무에게나 손을 뻗지 마. 그것이 마왕이고, 한 나라, 한 민족 전체를 다스리는 절대 지고의 존재가 갖춰야 할 덕목이야.’

지금이라도 유이가 벌떡 일어나 낮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할 것 같았다. 유리는 연신 중얼거렸다.

“난 마왕…. 절대 지고의 존재.”

유이의 목소리 뒤로 가로드와 카인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유리, 하지만 넌 혼자가 아니다. 그건 결코 잊지 않았으면 한다. 숲의 신의 가호가 있기를.’
‘우리 걱정은 하지 마라. 자기 앞가림도 못할 정도로 한심하지는 않으니까.’

“녀석들을 믿어라. 그렇게 죽을 놈들이었으면 이미 수백 번도 더 죽었을 놈들이야.”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글릭세르의 말. 드디어 결심이 선 유리가 아랫입술을 질끈 씹으며 글릭세르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엔 단호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갑시다, 글릭세르씨!”
“좋아, 그래야 마왕님이시지!”

유리는 유이를 안은 채 달리면서 카인과 가로드를 떠올렸다.

‘절대 죽지 마세요! 카인씨, 가로드씨.’


BGM:Surabhi-01 Glen Affr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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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왜케 길어져요? ㅡㅜ; 이상하다. 글 쓰는 실력이 줄어서 이러나....

여하튼 너무 길어서 일단 여기까지 쓰고 은근슬쩍 바통을 넘깁니다. OTL

그나저나.. 여담. AF가 지금 완결까지 나서 총 페이지 수가 272쪽인데.

데슷히티는 지금 16화인데 211쪽이네요; 이거 뭔가 저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