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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대생환

2008.07.20 01:57

칼르베른 조회 수:1101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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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며칠을 잠들지 못한 것처럼 몸이 나른했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를 더욱 고단하게 만들었


고, 삶의 의욕마저 앗아간 듯했다. 이러한 사념이 커질수록 난 이 언덕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려가는 것과 동시에


자연스레 이곳의 풍경에 익숙해져 갔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것은 언덕이 아닌 언덕 아래로 펼쳐진 건물의 나열들,


그리고 그 회색빛 도시를 붉게 물들이는 석양이었다. 정작 언덕에 관심을 두는 법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언


덕에는 주의를 기울일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무성한 잡초, 풀의 내음, 그 비릿한 향기를 옮


기는 바람뿐. 저 아래 정렬된 듯 세워진 건물의 숲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그 흔하다는 잡목 하나 없는 이


언덕은 어떤 의미에서 가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채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남아 있는 모


습이란 모두로부터 소외당한 채 어쩔 줄 몰라 멀뚱히 서 있는 어린애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런 모습에 이끌렸


고, 알 수 없는 동질감이 내가 이 언덕에 머물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언덕에 홀려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면 단지 표면적 명목은 무엇이든 간에 그저 이곳으로 도망쳐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난 어디서 도망


쳐 온 것일까, 저 아래 보이는 도시? 아니, 그렇게 간단히 구체화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도망


쳐 왔냐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곳이 어디든 간에 난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될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었다는 것


이다. 숨을 돌릴 겸 지친 몸을 달래며 풀의 파랑에 몸을 묻었다. 건물의 옥상들이 시야의 아래로 숨어들듯 사라졌


고, 온통 보랏빛 하늘이 동공을 가득 채웠다. 부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풍경이 익숙해지는 것은 사


람이 적응하는 생물이기 때문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이번에도 적응할 수 있는 것일까. 다시 찾아온 이별을 말


이다. 이번만큼은 내가 먼저 이별을 고할 줄 알았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로 커다란 배신감을 내게 안겨 주었다.


마음속 한편에서는 괘씸하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러나 떠날 사람은 떠나갔고, 난 이번에도 남겨진 것이다. 아


무것도 없는 이 언덕 위에.


 


2.


 


식장에서 돌아온 이후 밤에는 마냥 한가했다. 그리고 어찌 되어도 좋을 정도로 무의미한 시간이었기에, 불 꺼진


어두운 거실에서 나는 냉장고에서 꺼내 온 캔맥주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리모컨을 쥐고는 상시 켜져 있


는 텔레비전의 백여 개가 넘는 유선 채널을 돌려가며 액정에 투영되는 이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이것은 기호도 취


향도 아닌 작년부터 생겨난 기괴한 습관의 일종이었다. 채널을 돌려가며 문득 온종일 켜져 있는 텔레비전의 브라


운관이 심하게 가열된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리모컨의 버튼을 꾹꾹 짓누르던 손가락은 멈췄지만, 엉덩이가 소


파에 눌러 붙은듯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또 쓸데없는 걱정이겠지, 하고 얼버무리며 맥주를 홀짝거리며 다


시 채널을 돌리는데 열중했다. 그리고 우연히 리모컨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춘 채널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장 적당한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 라는 논제로 네댓 명의 예능인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패널들은 저예산


케이블 방송국답게 무명 가수들을 대거 출현시켰지만, 그들은 나의 선입견과는 달리 나름 진지한 얼굴로 토론에


참여했고 난 괜스레 짜증이 났다. ‘저속한 농담이라도 내뱉어 보는 게 어때? 어차피 그런 방송이니까.’ 그들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더욱 토론의 열기를 가했다. 텔레비전에 비치고 있는 사람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짜증을 내는


것이 허락되는 것은 8살 까지다. 혈당 수치가 도저히 신경 쓰여 반주는커녕 국에 넣는 소금 몇 그램에도 민감한


나이가 되어서까지 잠복기 아동 같은 행동을 취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 이 맥주는… 표면에 수적이 맺혀 흐르는


캔을 잠시 바라보았다. ‘취침 전 맥주 한잔 정도는 혈액순환에 좋겠지.’ 시선을 다시 화면으로 옮기자 패널들 중


가장 소소한 옷차림의 남성이 고슴도치의 거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였다, 물론 상대적인 얘기지


만. 옆으로 빗어 올린 머리칼은 숱 적은 정수리를 가리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조근조근 하


게 고슴도치 거리라는 것을 다른 패널들에게 설명해 주었고, 나도 의식하지 않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서


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입지 않을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이상적이지 아닐까요?’ 나는 그의 표정을 섬세하게


읽고자 엉덩이를 소파에 붙인 채 머리를 앞으로 쑥 내민 후 눈을 가늘게 떴다. 목이 아파져 왔다. 남자가 그렇게


말을 끝마친 후 카메라가 진행자 쪽으로 돌아갔고, 그제야 난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확실히 고슴도치가 항


상 서로를 찌르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다고 한다면 명안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고슴도치는 상대를 찔러버릴 만큼


가까이 붙거나, 가시가 얽히는 일조차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지기까지 한다. 서로 작용하는 둘은 늘 평행선만을


그리며 나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최선의 방법이란 무엇일까. 나는 다시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유현의 탐구자가 진리를 갈구하며 방황하는 듯한 목마름이 손가락을 재촉했다. 텔레비전에서 내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것은 그냥… 자위행위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중년남성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위행위. 그렇기에 더욱 열중해 화면을 노려보았다. 텔레비전을 직시한 채 리모컨 누르기에 열중


하고 있는 중년의 모습이 가족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불 꺼진 거실은 나 혼자만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도중 티브이 위에 엎어져 있는 액자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시


선을 브라운관에 굳힌 채 몇 번이고 반복되는 채널들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손가락이 아파져 왔다. 리모컨에서 손


을 떼자 공교롭게도 종교 채널에서 화면이 멈췄다. 미묘하게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키며 티브이에 투영된 화면


을 응시했다. 그 안에서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성이 단상 위에 올라 신의 복음이라는 것을 열변하고 있었다.


남자는 말했다. ‘신께서는 당신의 소중한 모든 것들을 지켜주시고 계십니다.’ 웃기고 있네. 난 그 남자의 벗겨진


머리를 향해 조소를 지었다. 너의 숱 적은 소갈머리는 지켜주시지 않는군. 비아냥거리며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


렀다. 픽, 하고 맥아리 없이 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난 눈살을 찌푸렸다. 검게 변해버린 티브이의 화면에 멍


하니 앉아 한 손에는 캔맥주를 든 중년의 남자가 꺼져 버린 티브이에 비춰졌다. 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교회라도


다녀볼까, 하고 진지하게 고심해 봤지만, 이미 사라진 머리칼과 가족이 돌아올 리 없었다. 취기가 돌기 시작한 것


인지 머릿속이 혼잡해지며, 피곤해졌다. 이럴 때일수록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잠들고 싶었다. 잠들고 싶었지


만, 자잘한 문젯거리들이 스테인리스 용기에 뿌려진 모래알처럼 산란하게 흩뿌려져 머릿속을 긁어 놓았다. 냉장


고는 괜찮을까, 정전이라도 되면 큰일인데… 들은 것은 별로 없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미적지근한 물로 끈적


한 혈액을 희석시키는 것은 사양이다. 아, 텔레비전… 껐지. 껐구나. 가열돼서 터질 일은 없겠어. 그나저나 누군가


말해주지 않으려나, 저 텔레비전처럼 이젠 좀 잠들라고. 누군가 전원 버튼을 눌러 줘. 캔을 기울여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입으로 쏟아 넣었다.


 


3.


 


바람이 분다. 대기를 감싸고 있던 습기를 걷어내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기분 좋게 머리칼을 간질였다. 난 위로 빗


어 올린 옆머리가 바람에 흩날리지 않도록 깍지를 껴 정수리에 포개었다. 갈대처럼 흔들리고 싶어 하는 주책맞은


머리칼만 아니면 정말로 기분 좋은 날씨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나라도 초원을 뒤덮은 석양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오늘은 정말로 상쾌한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니?” 여자애는 여름의 청


량함을 닮은 웃음을 지을 뿐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녀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러나 후천적인


요인에 의한 청력의 상실인지 소녀는 말을 할 수 있었는데, 곧잘 내게 말을 걸기를 좋아했다. “요즘 들어 여기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 것 같아.” “음….”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난 짧게 신음했다. 며칠 전


이 언덕에 올랐을 때 느꼈던 극심한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고, 고름이 되어 가슴 어딘가에 고여 버린 것처럼 안쪽


에서부터 심한 통증을 느꼈다. 식장을 가득 채웠던 검은 물결이 다시금 상기 되면서 나는 늑골을 긁는 듯한 통증


을 참지 못하고 언덕에 난 잡초를 꽉 쥐었다. “좀 한가해졌어. 휴가를 받았다고 해야 하나? 좀 큰일이 있었거든.”


“큰, 일….” 소녀는 나의 입 모양을 읽어 단어를 추론해 내기도 했다. 물론 극히 단편적이거나, 단순한 대답만을


알아들을 정도였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쭉 한가할지도 몰라. 만약 그렇게 되면 매일 같이 있을 수도 있어. 그곳으


로 돌아갈 이유가 없어지는 거야. 계속 여기 있을 수 있어.” 나는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아랫입술이 극통에 떨리


고 있었지만. 소녀는 나의 웃음에 응해주듯 붉게 물든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로 나는 다시금 확인했다. 내


게 남은 것은 소녀와 이 언덕의 허무함 뿐이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나를 향해 조


소를 흘리면서도, 그 어느 것도 날 구속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기뻤다.


 


4.


 


감긴 눈꺼풀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의 햇살에 잠에 젖었던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르듯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그


리고 정말로 지금까지 물속에 잠겨있던 것인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아침이라도 여름의 더위는 무시할 수


없군. 상체를 일으키며 척척한 등을 손으로 짚어 보았다. 그렇다고는 하나 날은 그렇게 무덥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땀은 무엇이란 말인가. 며칠째 입고 있는 티셔츠의 가슴골 쪽도 꽤 젖어 있었다. 그리고 쥐어짠 것처럼 꾸깃꾸


깃하게……. 그 주름에 의문을 품은 것과 동시에 구역질이 났다. 무언가, 가슴에 응어리진 덩어리가 북받쳐 오르


는 듯한 역겨운 감각이었다. 고개를 돌린 곳에서 바닥에 놓인 맥주 캔이 눈에 띄었다. 텅 빈 캔을 발견하고 나서야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역겨움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그래, 어젯밤 혼자 맥주를 마셨지. 속이 매스꺼운 건 숙


취 때문이었어.’ 그제야 직소 퍼즐을 완성한 듯한 안도감에 크게 숨을 내뱉었다. 어지러움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


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소파에서 일어나 젖은 티셔츠를 벗으며 시간을 확인하자 시침이 9를 가


리키고 있었고,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없어진 난 햇볕이 들지 않는 다락방으로 올라가고자 몸을 돌리려던 순간 인


터폰이 울렸다. 의식하지 않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현관으로 걸어가 수화기를 귀에 대자 “가스 점검입니다.” 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예…” 얼빠진 대답을 하고는 수화기를 손에서 놓고 문을 열려고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금 내가 트렁크 한 장을 달랑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트렁크의 고무줄은 꽉 죄는 편이 아니었지


만, 흘러넘치는 맥주 거품처럼 뱃살이 삐져나와 있었다. “가스 점검입니다!” 이번엔 인터폰이 아닌 철문을 사이에


두고 그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시선을 옮겨 황급히 문을 열었다. 모자를 푹 눌러 쓴 점검원은 집 안으로 한 발을


들여 놓고는 벌거벗은 내 몸을 보고 놀란 것인지 잠시 주춤하였다. “서문수씨 맞으시죠?” “아, 예….” 내 짧은 대


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점검원은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경유해 보일러실로 직진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언


제나 직장에 나가 있었던 내게 이런 경험은 사실상 처음이라고 해도 좋다. 늘 집에서 가사만 해오던 아내에게 이


러한 방문은 극히 일상적인 것일지도 모르나, 내게는 첫경험이라는 것이다. 조금 두근두근하기 시작했다. 황급히


소파 밑에 던져 놓았던 티셔츠를 주서 입었다. 티셔츠를 적신 땀이 식어 등과 가슴이 척척했다. 긴장감과 기대감


이 아우러져 상체를 적셔가는 것 같았다. 여자는 어느새 보일러실에서 나와 주방에 서 있었다. “가스레인지 사용


하실 때 가스 냄새가 나거나 하지 않으시죠?” 너덜거리는 가스관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 그렇게


물어도 내 손으로 켜 본 적이 없으니, 대답할 방도가 없다. 있다 하더라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대답이 돌아오질


않자 점검표에 무언가 바쁘게 써 넣기를 멈추고 이쪽을 바라본다. 시선이 마주쳤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두근거리


던 심장도 샌드백을 두드리는 것처럼 둔탁하게만 느껴졌다. “냄새가 나지 않냐구요.” 솔직히 써본 적이 없다고 말


하고 싶었다. 집사람이 돌아오면 그때 물어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


혀 가스가 새거나 하지 않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아내가 돌아올 리 만무하였다. 며칠 전 있었던 식


장에서 아내가 건넨 말들을 생각해냈다. 그러한 기억들이 떠오름과 함께 가슴의 통증도 더해갔다. 한쪽 다리가 저


릿저릿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튜브가 너무 낡아 있어서 가스 누출의 위험도 있으니 되도록 바꾸시


게 좋을 거에요.” 여기 사인해 주세요. 점검원이 들고 있던 점검표와 펜을 내밀었다. 간단한 일이다. 서명 정도는


몇 번이고 해 봤다. 못 할 리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난 무엇을 불안해하고 있는 것인가. 내밀어 진 펜을 오른손에


 


쥐고 점검표를 안듯이 한 채 시선을 내린 순간, 그 불안감이 윤곽을 드러냈다. “......” 나는 멀뚱히 종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마치 젖은 야크가죽에 심장을 넣고 말리는 듯했다. “그쪽에 사인해 주시면 돼


요.”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인내에 한계가 온 것인지 점검원이 손가락으로 아무렇게나 지면(紙面)을 가리켰다. 그


러나 나의 시야에서는 그저 검은 물결이 흐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등에 들러붙은 티셔츠


가 신경에 거슬렸다. 등을 축축하게 적신 땀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뒤에서부터 덮쳐오듯… “저, 저기요…?” 그


것을 마지막으로 텔레비전이 꺼지는 듯이 핏, 하고 주변의 소리가 차단되었다. 가슴이 욱신거린다. 종이 위에서


넘실거리던 검은 물결이 둑을 터져 나오는 물살처럼 온 시야를 뒤덮어 갔다. ‘아…’ 얼빠진 비명을 질렀다. 마지막


으로 끼워 넣은 퍼즐 조각이 잘못된 것이었다. 조각을 찾기에 조급했던 내가 끼워 넣은 것은 그저 안도하기 위해


필요했던 별개의 ‘결함’이었다. 후회의 상념보다도 빠르게 등에서부터 물이 차올랐다. 벌려진 입으로 검은 물결이


흘러들었을 때 그제야 심장은 힘겹게 뛰기를 포기하고, 흐릿한 의식과 함께 물 밑으로 스며들었다.


 


5.


 


“심근경색이래.” 소녀는 알아듣고 있는 것인지 나를 향해 근심스러운 시선을 지었다. 석양은 이미 지평선 아래로


퇴근을 한 뒤였다. 서머타임제로 여름에는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지 않으면 안되는 태양이 어째서 다른 계절보다


더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지 그 불합리함을 설명해주려 했던 나의 계획은 의사의 심근경색 선고와 함께 지평선 아


래로 사라져 버렸고, 그것을 대신하여 난 의사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소녀에게도 심근경색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


었다. 물론 걸린 것은 나다. “갱년기에 들어서면서 발병될 확률이 높다는데, 그런가… 나 갱년기인가? 너한테도


내가 머리숱 적고, 배 나온 아저씨로 보이려나?” 난 스스로의 머리칼과 배를 만지면서 그렇게 물었다. 소녀는 대


답하는 대신 계속해서 날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렇지만, 운이 좋았어. 마침 가스를 점검하러 온 사람이 있었기


에 망정이지 만약 나 혼자 있다가 쓰러졌다면 그대로 극락정토 밟을 뻔 했지. 그런데 내가 명줄은 길거든.” 왼손을


쫙 펴서 소녀에게 보이듯 내밀었다. 사실 나도 내 명줄이 긴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지금도 모르고 있지만 일단은


소녀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의도가 전해지지 않은 것인지 엉뚱하게도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하고 말


았다. 나는 웃었다. 소녀도 따라 웃었다. 마치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말로 전


하는 의사소통 따위는 관계없이 말이다. 이 아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고백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필요


도 없을 것 같았다. 비록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막연하게 느껴지는 이 친근감이 그 사실을 증명하듯


오늘만 해도 몇 번이고 죄여져 고난을 당한 나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나 소녀와의 유대감이 깊어질수록


그와 함께 커져가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소녀를 향한 나의 위치를 애매하게 만들었고, 어느샌가 내가 그 존재에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두터워진 경계가 나와 소녀의 사이에 생겨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


는 게 두렵다고 생각하진 않아. 나는 누구의 죽음이라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거든. 죽는 것이 나


라고 해도…” 죽음에 대해 무감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슬퍼만하기보다 ‘죽음’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려 할 뿐


이다. 생물이라면 누구나 직면하게 될 문제에 대해서 난 그날부터 준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년 이맘때쯤


아들 영호가 토마토 나무가 심고 싶다고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주말 농장을 막 분양받은 찰나의 여름이었다. 그날


따라 정전이 돼서 냉장고에 넣어 둔 아이스크림이 녹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거실


에서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하릴 없이 일어나 수화기를 집어 귀에 대었다. ‘아버지


께서 돌아가셨어.’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목이 탁 막힌 듯 숨조차도 넘길 수 없었다. 머릿속


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가는 것 같이 머릿속을 맴돌던 사고의 연쇄들이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구가 점멸해 가는


것처럼 일순간에 정지해 버린 것이다. 내 옆에서 비스듬히 앉아 깎아 놓은 사과를 입으로 옮기던 아내는 천연덕스


럽게 ‘누구 전화에요?’ 하고 물었다. 아래턱이 떨려 와서 아내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난 수화기에


더욱 귀를 곤두세웠다. ‘지금 안치소에 모셔는 뒀는데, 어쩔 거야?’ 아마도 장례식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아마


도 자신이 지금까지 모시고 살았으니, 장례식은 내가 맡으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엄연히 말하면 아직 미혼인


동생이 부모님과 같이 살았을 뿐이지, 부양한 것은 아니다. 내 기억 속에서의 아버지는 아직도……. ‘어, 어쩌다


돌아가신 거야?’ 나는 그 근본적인 의문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아내는 여전히 옆에서 귤을 우물거리며 텔레비


전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을 간간히 내 쪽으로 돌려 살필 뿐이었다. ‘뭐, 뭐랬더라. 뇌출혈? 아, 어 맞네. 맞어, 뇌출


혈. 며칠 전부터 코피를 터뜨리는가 싶더니 오늘 저녁쯤에 갑자기 쓰러졌어.’ 구토감이 밀려왔다. 그 지경까지 뭘


했냐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따로 살면서도 자주 연락도 못 해 본 내게 그것은 주제넘은 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


래. 어느 병원이야. 지금 갈게’ 그제야 아내는 ‘어머, 누가 죽었데?’ 하고 눈을 동그랗게 하고, 새로운 수다거리를


찾은 것 마냥 눈을 빛내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난 도대체 무엇에 화가 난 것일까. 몇 번이고 병세를 보이는


아버지를 방치해 둔 동생의 무심함? 아니다. 난 그런 것에 화가 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와서의 이야기지만 그


때 나는 죽음에 대처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있었다.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 그리고 인간


과 인간의 이상적인 거리, 이것들을 고려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뼛가루를 납골당에 안치한 후의 이야기였다.


 


6.


 


지평선을 경계로 희미하게나마 푸른빛을 발하던 태양의 잔광이 사라지고, 드디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밤이 되었


다. 녹슨 기억들을 들춰내는 것은 그다지 기호가 아니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서 기분이 가라앉았고, 이 이상 과거


의 일 따위 생각해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오늘은 돌아가지 않는 거야?” 소녀는 어두워진 허


공을 향하여 손을 뻗으며, 내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겨우 결심이 섰어. 이제 그곳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오늘 아침 몸을 덮친 통증을 기억해 냈다. 끔찍하다는 말 이외에 형용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그것은 나의 몸에 극심한 고통과 함께 죽음에 대한 절대적인 공포심을 새겨 놓았고, 그와 동시에 모순되긴 하지만


동시에 삶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렸다.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은 극통. 차라리 언덕에 머문다면 그


러한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괴로움에서 도망쳤다고 비난해도 상관없어.” 소녀가 앉아 있는 쪽을 바라봤


다. 얼굴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지만, 내 말마따나 나를 힐난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도망친 건 사실이니까. 아버


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며칠 전 아들 영호가 죽었을 때도 난 이곳으로 도망치기를 선택했어.” 주말을 맞아 농장을


찾았을 때, 밭에서 넘어져 깨진 무릎을 움켜잡고 날 안심시키려 웃음을 지었던 아들의 얼굴이 장례식장에 걸려 있


던 영정사진과 오버랩되었다. 작년 겪었던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발전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죽음의 괴로움에


서 도망치고자 꼴사납게 언덕에 주저앉은 난 어떠한 진보도 행하지 못하였다. 안치소에서 대면한 아버지의 시신


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던 나는 이번에도 직면한 죽음에 이성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그저 도망치기를


계속할 뿐이다. “아, 영호에 대해서는 아직 얘기하지 않았나? 파상풍이었어. 고열을 내며 쓰러졌을 때는 이미 손


을 쓰기엔 늦어버렸었지.” 물방울이 손등에 떨어져 흘러내렸다. 손등에, 손등에, 벗겨진 머리에, 그리고 뺨에 떨어


져 흘러내렸다. 비가 내리려는 것이다. “아내도 친정에 내려가 있겠다고 했고, 이제 남은 건 나 혼자뿐이야.” 당분


간이라는 말은 일부러 뺐다. “게다가 심근경색이라니… 이젠 정말 끝이라고 생각해. 물론 수술만 하면 거의 완치


할 수 있는 병이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소녀는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련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어둠 속에 묻


힌 나를 계속해서…. “지쳤어.” 솔직한 마음을 고백했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 갔다. “비….” 소녀는 신음하듯 작


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것뿐이었다. 언덕에 앉아 피부를 내려치는 빗방울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 우


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어떠했을까? 지친 것일까? 어깨를 짓누르는 짙은 어둠 속에서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 눈을 가늘게 떴다. 심장이 요동치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신경을 집중시켰다. 어두워


서 잘 보이지 않았고, 조급해진 나는 얼굴을 더욱 가까이 했다. 묘하게 흥분되는 상황이다. 꺼져버린 텔레비전의


검은 화면을 응시하는 듯한 기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투둑, 빗방울이 정수리에 떨어져 흐를 듯 말 듯 위태롭게 흔


들거렸다. 나는 기대하고 있다. 소녀만은 내가 느끼고 있는 잔혹한 무게감을 느끼지 않기를, 그리고 이런 나의 괴


로움을 이해해 주기를…. 정수리에 떨어져 흔들거리던 물방울이 이마를 흘렀다. “있잖아….” 칠흑의 허공을 올려


다보던 소녀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였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금빛의 잔디처럼 하늘거리던 소녀의 머리칼은 비로


인해 형편없이 젖어 있다. “비, 비가 그치면 말이야. 이 언덕을 같이 넘지 않을래? 응?” 끄덕였다. 내 말을 알아들


은 것인지 소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준 것이다. 그리고 이마를 타고 내려온 물줄기는 뺨을 흐르고 있었다. “아


아….” 순수한 감탄사와 함께 마지막 빗줄기가 턱 끝에서 떨어져 내려 지면에 스며든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췄


다. 소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던 두터운 경계가 마지막 빗방울과 함께 녹아 언덕 아래로 자취를 감춰 버렸는지, 단


순히 나의 변덕인지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서 나는 일체의 두려움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눈을 감고


수초를 세었다. 단순한 변덕이라면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금……. 천천히 눈꺼풀이 열린다. 제우스에게 받


은 상자를 열려했던 판도라의 심정으로 재촉하지 않고, 신중을 가했다. 눈을 떴을 때 소녀는 저 멀리 언덕의 끝에


서 있었다. 나는 지면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이 저리지 않았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몸이 가벼웠다. 맥주


거품 같은 뱃살도 무겁지만은 않았다. 첫 발을 떼자 몸은 더욱 가벼워졌다. 효과음이라도 넣는다면 ‘쉬이이익’ 하


고 증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온통 어둠뿐인 언덕을 오른다. 가뿐한 몸을 이끌고, 저 위에서 기다리


고 있는 소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 속에 고름이 찬 것처럼 고여 있던 수많은 의문


이 몸의 증기가 빠져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현저하게 윤곽을 드러낸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소녀에 대한 나의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어째서 소녀와 친밀감을 공유할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어야 했는지 그 대답이 뇌리에서 선명한 실체를 드러냈다. 난 두 번 다시 뛰지 않을 심장을 움켜쥐


었다. 소녀가 가깝다. 언덕의 끝이 자정의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뇌 내에 새겨진다. 발을 멈추었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았다. 난 영호가 내게 보였던 미소를 그대로 소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렇


다. 소녀는…. “자, 박수가 멈췄어.”



 


소녀는 나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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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쓴지 좀 됐군요...


이 글을 쓸 당시에는 격앙된 감정으로 키보드를 두들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머리에 좋지 않은 벌레라도


들어가 있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