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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FE] 날개 대륙

2007.08.17 08:46

금강배달 조회 수:1472 추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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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에 걸쳐서 노력한 작품입니다. 부디 끝까지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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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과거, 대륙의 인간(이 말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에서 쓰인 말이며, 본래 ‘인간’이라는 말은 블룬-이것이 현재의 인간을 대신하는 원래의 말이다-과 오르크, 요정, 인간과 요정의 중간존재로 불리는 엘먼을 통칭하는 말이다.)의 타락이 극에 달했던 시점, 신께서는 이것을 벌하기 위해 대천사 카름에게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를 주고 그곳의 악마들과 죄수들을 세상에 풀어놓도록 명하셨다. 이것으로 인해 열흘 이상 끔찍한 살육이 계속되었다. 당시 유일하게 신을 잊지 않은 인간(블룬)이 있었는데, 그가 이 왕국을 세운 최초의 왕 빌링 웬 가르투스다. 그는 인간에게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다. 신께서는 그의 깊은 신앙을 믿고 그의 손으로 직접 만드신 검을 보내어 증표로 삼고, 그에게 악의 군대와 맞설 다른 ‘인간’들을 모으도록 지시하셨다. 이것이 구원전쟁의 시작이다.


(중략)


그러나, 평화의 시대는 얼마 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천년이 지났을 무렵, 빌링의 직계 혈통이었던 브링이 방랑자의 삶을 택함으로써 나라가 섭정의 손에 거의 넘어가 있었다. 섭정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탐욕에 눈이 멀어 블룬 외의 인간을 향한 토벌전을 개시한다(후에 그를 끌어내리고 다시 브링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자신의 무책임을 반성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처음 공격을 받은 것은 서쪽의 요정들인데, 숲의 절반을 잃은 그들은 배신감과 증오에 사로잡혀 그들 본연의 성향과는 전혀 맞지 않는 철저한 보복전을 벌인 후 세상과 자신들의 땅을 단절시킨 채 오랜 시간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 쪽도 승자라고 할 수 없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두 종족은 서로에 대한 왜곡된 증오를 가중시켜갔다. 요정들은 블룬의 피가 섞인 엘먼을 멸시하여 자신들의 땅에서 추방했고 블룬은 이들을 노예로서 자신들의 땅에 받아들인다. 당시 최고 귀족에 속하였던 엘먼인 쿠엔 바르탕스(현재 발두스 성의 시초로 보임)가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예로 전락하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들에 대해 행해진 무차별적 분노를 알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이 사건으로 인해 각 종족간의 유대는 깨어지고 만다.


(중략)


이후 만하트 웬 가르투스의 대에 와서는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엘먼은 평민 신분을 얻게 된다. 그는 엘먼에게 황실 기사가 될 수 있는 자격까지 그들에게 줌으로써 지금까지도 가장 개혁적인 정치를 펼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중략)


이후 세상이 경악할 일이 벌어진다. 빌링 왕 이후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루콘 에이투리스가 당시 왕이었던 만하트 웬 가르투스의 후계자로 지목된 사건이다.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황색의 피부와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와 조금 왜소한 체구. 루콘왕은 전형적인 엘먼이었다. 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 자세한 정황은 뒤에 쓰도록 하겠다. 일단 간단히 설명하자면 만하트에게는 여식 레앙 웬 가르투스 외에 후손이 없었는데, 당시 전통상 여성은 왕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중략)


최고 귀족 출신으로 당시 유력한 후계자로 꼽혔던 바룬 롬벌트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왕국을 떠나 바스 제국에 망명한다. 막대한 재산을 제국에 바친 그는 군 간부가 되었는데, 제국이 엘두르 왕국을 공격할 때 왕국 주변의 지리에 능통한 그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제국의 군대는 죽은 자들의 군대로, 200년간 계속된 연구 끝에 악마들이 남긴 책의 해독이 끝남과 동시에 그 사악한 마술을 이용해 일으킨 자들이었다. 이로 인해 2천년전의 악몽이 다시 시작되었다.


성을 점령당한 루콘과 그의 기사들, 그리고 많은 백성들은 바스제국의 공격을 피해 4년간 후퇴를 계속한다.




-고든 티브슨, 엘두르 왕국과 민족에 얽힌 이야기 中 -


 


 


 


~ 날개 대륙 ~








루콘이 왕이 된 것도 벌써 5년째, 그러나 그가 나라 안에서 활동한 기간은 단 1년도 되지 않았다. 롬벌트가 바스 제국으로 망명한지 겨우 몇 개월이 지났을 때, 루콘과 그 전 세대의 어느 누구도 본적이 없는 끔찍한 흑마술 군대가 왕국에 들이닥쳤다. 최전방의 요새가 무너지고 성이 함락되는데 걸린 시간은 단 열흘, 바스 제국이 살려낸 시체들은 먹고 자는 것은 물론 한순간 휴식도 취하지 않으며 진군했고, 그들 손에 죽은 왕국의 병사들 역시 그들의 휘하에 들어갔다. 제국군 사이에서 롬벌트를 보았다는 자들도 있었다.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루콘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저녁별 아래에서 그는 항상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어느 날 희망의 길이 열렸다. 꿈에서 선왕과 재회한 것이다.




‘인간족속들을 모아 연대해야 하네. 과거 빌링 왕께서 했던 것처럼. 자네가 그 일을 해낼 것이야.’




루콘은 나흘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그날의 꿈에 대해 곰곰이 고민하고 있었다.


“날이 춥습니다. 막사에 들어가십시오.”


“이든.”


그를 다시 현실로 불러온 것은 이든이었다. 그는 전 대사제였던 리오덴의 제자로 그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이제 겨우 22세가 된 그가 대사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의 스승이 2년 전 전쟁터에서 적국 병사의 검에 숨지던 날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그는 절친한 친구인 지라가 아닌 어린 그에게 자리를 넘겼다. 지라는 그의 선택에 반대하지 않았다. 잘못된 선택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제들의 반발은 쉽게 잠재울 수 없었다. 심지어 이든이 리오덴의 유언을 날조했다는 말이 돌기까지 했다. 결국 많은 수의 사제가 왕국을 떠나 잠적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잘 된 일이었다. 왕국의 부패의 뿌리가 절단된 것이었다.


루콘은 고민스러운 눈으로 이든을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회의를 열어야겠어. 사람들을 모아줘.”




“전하, 황송하오나 지금 같은 시기에 병사들 곁을 떠나신다는 것은...”


“지금껏 전하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습니다. 허나 지금은 저도 퀀투스의 말을 따르고 싶군요.”


기사 퀀투스과 제스가 가장 먼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특히 제스는 46년간 황실기사의 자리를 지켜온 권위자였다. 그가 반대를 하고 나서자 막사 안은 반대파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전하께서도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잘 알고 계실겁니다. 제스.” 사제 지라가 끼어들었다. 그 역시 리오덴과 일생을 함께 일 해온 사제로서 그에 못지않은 힘을 지닌 인물이었다. “전하, 전하와 선왕께서 얼마나 긴밀한 관계였는지 모르는 자는 이곳에 없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나눈 이야기는 꿈일 뿐입니다. 꿈에서 뵌 선왕이 진짜 선왕이셨는지 증명할 길도 없지 않습니까? 혹 마음이 흐려지셔 마귀에라도 홀리신 것이라면...”


“말을 삼가시오!”


요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보일 듯한 태도였다.


“요한!”


윌리엄이 그를 만류했다. 요한은 거친 숨을 가다듬더니 루콘에게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맞는 말이오. 나는 어떤 근거도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가 없소. 하지만, 여러분도 기억할 것이오. 선왕께서는 우리가 괴로워할 때마다 손을 잡고 훈화하셨소. 꿈속에서도 그러시더군. 그분이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그때와 똑같은 온기를 느낄 수 있었소.”


루콘의 말에 막사 안은 숙연한 분위기에 묻혀갔다.


“선왕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지난 5년간 계속 그런 생각을 했소. 선왕께서 살아계셨더라면 나에게 뭐라고 하셨을까. 이제야 나에게, 우리에게 답을 주신 겁니다. 흰 옷에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신께서 전하라 하신 이야기를 전하러 친히 나타나셨소. 허황된 이야기라고 하겠소? 그래, 허황된 이야기지. 그렇다면 역사에 기록된 빌링왕의 이야기를 배울 때는 어땠소? 그분 역시 꿈에서 계시를 받고 위대한 전사들을 모아 악의 군대와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지금 이대로 가면 우리는 역사의 뒤로 사라지오. 병사들? 지금도 곳곳에서 탈영자가 발생하는 중이오. 하물며 군인도 아닌 대부분의 백성들이 얼마나 견뎌내겠소?”


아무도 반박하는 이가 없었다. 막사 안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바깥의 바람소리와 흔들리는 불빛은 오히려 정적을 더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가라고 하시면, 저는 어디든 갑니다.”


요한이 검을 뽑아 탁자에 힘껏 꽂았다. 그것은 왕국 기사들의 오랜 전통으로 결코 뜻을 꺽지 않는다는 표현이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윌리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젊은 사람의 혈기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일세!”


제스가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은 모두 제스의 제자였던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두 제자는 열정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치고 있었다.


“제스님, 진정하십시오.”


이든이 그를 제지했으나 그는 거침이 없었다.


“여기 모인 우리는 폐하께서 견습기사였던 시절부터 폐하를 가르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입니다. 전하, 어째서 우리의 충고를 새겨듣지 않으십니까?”


바로 그때였다.


“어찌하여 견습기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폐하께서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없는지요.”


갑자기 들려온 여자의 고운 목소리에 막사에 모인 모든 이의 눈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그 자리에는 갈색 머리카락에 단아한 인상을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왕비마마.”


여자는 왕비 레앙이었다. 그들은 하나 둘 일어나 왕비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인사를 받아들인 후 레앙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제스, 말해보세요. 기사수업 중에 단 한번이라도 폐하가 그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제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여러분은 모두 선왕의 친구이거나 그분의 제자이셨습니다. 꿈에 나타나신 선왕의 말씀으로 부족하다면, 그분의 유일한 후손으로서 이렇게 간청합니다. 부디 폐하의 뜻을 따라주세요.”




하늘에는 보름달이 빛나고 있었다. 그 달빛을 오랜 연인이 받고 있었다.


“고마워요, 레앙. 당신만은 지금도 나를 믿어주고 있군요.”


루콘의 손이 레앙의 뺨에 닿았다.


“당신의 나의 기사가 되었던 그 날부터,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어요.”


루콘은 레앙을 끌어안았다.




이틀이 지났다. 왕은 이른 아침부터 각 기사들에게 임무를 부여한 뒤 남동쪽 바히림 강을 따라 떠났다.




“대사제, 북부 몬논에 있는 수도원을 찾으십시오. 그곳에 우리를 도울 군사들이 있을 겁니다. 라만 산맥으로 가세요.”


“알겠습니다.”


“요한, 방패산맥 너머에 있는 북방 오르크를 설득해줘요. 우리 중에 힘으로 그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자는 당신뿐이에요.”


“알겠습이다.”


“윌리엄, 서쪽의 요정들에게 가세요. 가장 위험한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왕비와 함께 가야 합니다. 이유는 그녀 스스로가 알고 있어요.”


루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부디 레앙을 잘 보호해줘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윌리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스님. 제가 없는 동안 백성들을 잘 보살펴주세요. 부대 총 지휘권을 양도하겠습니다.”


“믿고 맡기십시오.”








“희망의 검, 빛의 파수꾼. 성검 듀나림... 짐은 항상 이것을 보고 싶어했소만...”


한 때 시녀들의 웃음소리와 기사들의 회의하는 소리가 가득했던 왕궁은 이제는 제국의 군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삭막한 곳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다 녹슬어버린 실체를 보고나니 실망이 크오.”


2천 년간 가르투스 왕가의 자손들이 나라를 통치하며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자리는 욕망에 들끓는 황제의 손에 들어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롬벌트 장군. 짐의 기억이 옳다면 이 검은 구원전쟁이 시작될 때에 희망의 빛을 뿜어냈다지?”


“옳으십니다. 황제폐하.”


바룬은 제국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왕국을 공격할 때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잡도록 도와 큰 공을 세웠고, 제국 역사상 가장 빠른 계급상승을 이루어냈다. 지금 그는 제국군에서의 위상과 명예에 취해있었다. 롬벌트 장군. 철저한 계급체계를 갖춘 나라에서의 장군자리는 전투시가 아니면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서 토론을 나누던 왕국의 기사로서의 삶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권력욕에 굶주려 있던 그에게 이토록 구미에 맞는 자리는 없었다.


“이제 완전히 녹이 슬어 빛을 내기는 힘들겠군.”


“옳으십니다.”


황제가 말을 할 때마다 바룬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호의적으로 행동했다. 자신의 자리를 누구에게도 내놓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허나 전리품으로 기념하여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자리에 가져다 놓으라.”


황제의 왼편에 서있던 신하가 무릎을 꿇어 두 손으로 검을 받더니 왕좌 오른편의 난로 화구 위에 올려놓았다.


“이미 2천년의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였는데 어리석게도 이 나라의 왕족이란 자들은 저런 것에 매달려 살았군 그래.” 황제의 손에는 기분 나쁜 빛을 내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옛 전설에 불과한 저따위 신의 선물이든 지금 내가 지닌 악마의 힘으로 만든 지팡이이든 실질적인 힘을 갖춘 것이면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역시 옳으십니다.”


황제는 음산하게 웃었다. 황제 주변의 죽은 병사들은 모두 그 지팡이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바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빼앗지 못하는 것은 황제가 죽는 순간 그 지팡이를 노릴 사람이 자신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옆의 근위병이든 혹은 그 주변의 다른 어느 병사가 그것을 노리고 있을지 알 턱이 없었다. 누구든지 그것을 얻고자 처음 칼을 휘두르는 자는 그만큼 다른 자들의 손에 죽기 십상이었다. 바룬의 눈은 점점 더 지팡이 깊숙한 곳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귀찮은 왕국군을 쓸어 없애고 싶지만”


지팡이에 매료 되 정신을 놓고 있던 바룬은 흠칫 놀랐다. 혹시나 황제가 그것을 알아차리지는 않을까 싶어 자세를 꼿꼿이 세웠다.


“참으로 아쉽게도 말이오, 시체들은 지팡이의 주인이 항상 함께 있어야 해서 말이지. 5년 전만 해도 열흘간 자는 것도 포기하고 행군을 하였는데, 지금은 영 그럴 의욕이 없어. 그래서 말인데. 바룬.”


“예, 황제폐하.”


“그대가 병력을 이끌고 왕국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것이 어떤가? 일이 끝나면 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리다.”


바룬은 황제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놀랐다. 총사령관! 그야말로 황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금방이라도 입이 귀에 걸릴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가겠나이다, 황제폐하!”


롬벌트는 자리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왕실을 빠져나갔다. 황제는 그 뒷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더니 편히 쉬어야겠다는 말을 하며 신하들을 물렸다.








“숀, 조금만 더 참고 달려다오!”


루콘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동부 엔트릴을 지나던 중 한때 동맹이었던 튜노스 왕국의 병사들을 마주쳤다. 그런데 그들이 이유 없이 루콘을 공격한 것이다. 그의 어깨에는 분명 왕국의 표식으로 날개가 달린 말이 그려져 있었고 튜노스군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한참을 전력으로 달아나던 끝에 그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엘두르 왕국의 잔존 세력이 주둔하는 남부 다스 일대가 이미 제국의 발아래에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확실한 위치만 발각이 되면 총 공세를 펼칠 수 있도록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지도.


어쨌든 그는 지금 당장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그의 뒤로 튜노스의 가장 빠른 추적자 여섯이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말은 놀라운 체력을 갖추고 있었다. 매일같이 오르막길을 달리며 훈련을 하는 탓이었다. 그러나 숀 역시 명마였다. 사람을 태울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루콘과 함께 2년간 전투를 치루고 후퇴를 하며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가진 말이 되어있었다.


밤이 지나고, 말도 주인도 지쳤다. 말들은 모두 곧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터덜터덜 걸었고, 루콘은 결국 숀의 등에서 내려 그를 끌고 가고 있었다. 그가 그러는 것을 보고 추적자들도 말을 끌며 루콘을 쫓았다. 다시 새벽이 밝아왔을 때 그들은 다시 말 위에 탔다. 이제 다시 숀이 루콘을 위해 거친 숨을 내쉬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달리기가 벌써 나흘째였다.


루콘은 비몽사몽하는 와중에도 혹시 강줄기를 벗어나 달리는 것은 아닌가 계속 신경을 써야했다. 그러나 서서히 걱정이 사그라졌다. 명마와 주인의 눈에 대륙의 가장 깊고 험한 산 ‘헤라들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도 본적은 없으나 멀리서도 알 수 있는 그 기묘한 생태에 그것이 헤라들링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깎아지른 바위 절경과 그 틈바구니에서 허리를 휘어 위로 자라 오르는 푸른 잎의 나무와 식물들, 중간지대의 북부에 사는 그들에게 남동쪽 가장 험한 산의 풍경은 너무도 색다른 것이었다.


루콘은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추적자들의 말들도 이미 너무 오랜 길을 달린 탓인지 가장 자신있어하는 오르막길에서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루콘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숀이 평소와 달리 자꾸만 앞으로 체중을 실어 몸을 기울여가는 것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숀은 결국 왼쪽으로 고꾸라졌다. 루콘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저 멀리 추적자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숀, 숀!”


그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숀을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기력 없는 눈으로 겨우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숀, 조금만 참아라. 어떻게든 해주마. 부디 조금만 참아다오!”


루콘은 검을 뽑았다. 평생을 살며 이토록 검이 무거웠던 적은 없었다. 왕국의 중앙도시가 함락되던 날, 그토록 많은 적을 쓰러뜨리고 병약해진 선왕을 보호하며 탈출할 때에도 지금처럼 검이 무겁지는 않았다. 검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단지 나흘간의 깊은 피로만이 아니었다. 홀로 왕국을 떠나 여섯 명의 적을 앞에 두고 있는 위기감이었다.


그의 눈에 추적자들의 지쳤지만 살기어린 표정이 보였다.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쫓아온 것으로 보아 이들도 지독한 마음으로 훈련을 받아온 자들이 분명했다. 루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태로는 결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레앙... 레앙...”


눈물이 흐르려 하는 것을 간신히 참고 앞으로 고함을 치며 달려가려는 순간.




크어-엉!




갑자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폭포 소리처럼 깊으면서 천둥처럼 우렁찬 소리였다. 추적자도 루콘도 갑작스러운 소리에 주변을 경계했다. 다시 한 번 그 소리는 전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울려 퍼졌다. 산속에서 그런 큰 소리가 나면 메아리가 퍼져 어느 쪽에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 소리가 시작된 곳을 알 수 있었다. 추적자들이 서 있는 자리의 오른편 숲속에서 거대한 생물이 나타나 그들을 순식간에 몰살시킨 것이다. 자기 주인이 죽는 것을 보고 그들이 타고 온 말들은 없던 기운을 내어 달아나버렸다. 거대한 생물은 그들을 쫓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루콘은 그 웅대한 모습에 감탄하며 공포와 신비로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온몸을 덮고 있는 황색 털과 그 위에 앉은 산줄기와 같은 검은 줄무늬. 탄탄하고 긴 네 다리와 그 아래 견고한 발을 장식하는 듯한 날카로운 발톱, 무엇보다도 깊고 고요한 눈동자.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이었다. 사람에게서도 느껴지지 않는 무언가 깊은 뜻이 그 눈동자에서 새어나오는 듯 했다. 미간의 큰 흉터는 그 짐승을 이름 높은 전사처럼 보이게 했다.


“걱정 마시오, 이방인. 그대를 해칠 마음이 없는 듯하오.”


루콘은 다시 검을 뽑아들었다. 목소리는 그의 오른편 커다란 침엽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는 엘먼이었다.


“이럴 수가!”


그 엘먼은 루콘이 놀라워하는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다는듯한 태도로 쓰러져 있는 숀에게 다가갔다. 그는 옷소매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나무로 만든 아주 작은 물병 같은 것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숀의 입에 천천히 부어주었다. 숀은 한번 몸을 요동치며 흔들더니 언제 쓰러졌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황색 털과 목덜미의 갈기가 전보다 더 윤기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루콘의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정신을 놓을 뻔 했다. 엘먼은 루콘에게 다가오더니 숀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것을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입에 부어 넣자마자 싸한 냄새가 퍼지더니 놀랍게도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백색 피부를 가진 자들이 있다는 기록을 본적은 있는데, 실제로 본 것은 저기 죽은 자들이 처음이오. 사실 우리 영역에 들어온 자는 적어도 ‘우리 세대’에서는 당신과 저자들이 처음일거요.”


“어째서 저 짐승이 나는 죽이지 않는 거요? 내가 당신과 닮아서?”


기분이 얼떨떨한 상황에서 그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어찌 보면 가장 상황에 맞는 질문이었다.


“하! 참으로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엘먼은 크게 웃더니 네발짐승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마 당신이 살아온 땅에는 저들이 없겠지. 저들은 호랑이라고 부르는 족속이오. 산의 수호자들이지. 저들의 눈에 우리 피부색이 의미가 있을 것 같소?”


“그럼 대체 이유가 뭐란 말이오?”


엘먼 사내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지그시 웃었다.


“저들의 눈으로 보는 것은 오직 하나요. 그대가 의로운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기운을 차렸을 태니 이제 떠나시오. 무엇 때문에 쫒기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운 좋게도 목숨을 건졌으니 그대의 땅으로 돌아가시오.”


남자는 등을 돌려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넋 놓고 그를 지켜보던 루콘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떠오르자 급하게 숲속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들의 우두머리를 만나러 왔소! 2천년전 날개 대륙의 가장 큰 전투에서 그대들 선조들의 맹세를 따라서 온 겁니다. 나를 안내해주시오.”


풀을 해쳐가는 소리가 멈추더니, 갑자기 루콘을 향해 소리가 가까워졌다. 등을 돌려 나무들 뒤로 사라지던 그가 루콘의 말을 듣자마자 달려 나온 것이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마냥 기뻐했다. 그런 그를 보며 루콘은 당황했다.


“이럴 수가! 예언에서 말한 사람이 당신이었군! 나는 이 산의 북서쪽을 감시하는 주시자 중 한사람이오. 내 이름은 카무,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소! 그건 우리들 대장도 마찬가지일거요.”


루콘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자신을 기다려왔다고 하는 이 사내가 참으로 난해하게 느껴졌다.


“2천년, 자그마치 2천년이오! 우리 족속은 그동안 그 맹세를 위해 2천년을 훈련한 거요. 단 한 시대, 한 세대도 빠짐없이! 난 매일 우리 세대에 대업을 이룰 수 있기를 하늘에 기도했소. 그리고 당신이 온 거요. 나를 따라오시오. 안내하리다.”


카무는 길을 걸으면서 끝없이 말을 했다. 그의 이야기는 주로 그들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덕분에 루콘은 그들의 주 거점에 닿기도 전에 그들 이름을 다 들을 수 있었다. 북서쪽을 지키고 있었다던 그 역시 그들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이든은 아직 제국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남서쪽 몬논 땅으로 달렸다. 이따금씩 북풍이 불어올 때마다 그의 망토가 휘날렸다. 그곳은 아직도 평화로웠다. 바위로 이루어진 험한 산들 때문에 인간의 국가가 거의 들어서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자연도 인간 외의 다른 생물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고 덕분에 이든은 달리는 내내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는 길은 생각 외로 순탄치 않았다. 말 그대로 다른 인간들이 살지 않는 영역이었던 탓에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그 곳에서 구해야만 했던 것이다. 말의 부담을 덜기 위해 먹을 것을 적게 가지고 간 것이 후회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일주일 후였다. 다행히 말은 들판의 풀을 뜯어먹고 개울의 물을 마시면 되었지만 그에게는 당장 먹을 수 있는 빵이 없었던 것이다. 한 번도 사냥을 해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고기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그는 나흘 째 물만으로 연명하며 달리고 있었다.


밤이 깊고 벌레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말도 완전히 지쳐서 더 이상 달릴 기운이 없었다. 쉴 곳을 찼던 그의 눈에 마침 좋은 동굴이 들어왔다. 이든의 말 노웬은 터덜터덜 동굴쪽으로 걸어가 푸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섰다. 그는 말을 묶어놓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동굴 안은 생각처럼 어둡지 않았다. 특별히 마법으로 빛을 내지 않아도 코앞에 무엇이 있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든은 자신이 동굴에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밝아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동굴 깊이 들어가던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굴 깊은 곳에 작은 나무 하나가 푸른빛을 내며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든은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불은 뜨겁지 않았다.


“신이시여...!”


그가 자신의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신비함에 취해 있을 때 갑자기 불길이 거세게 번지더니 푸른빛이 그를 삼켜버렸다. 이든은 놀라 소리를 질렀으나 목소리마저 빛이 삼켜버리는 듯 했다.




인간이여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든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깊은 어둠 속에 희게 번득이는 눈 두 개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네가 저지하고자 하는 것의 근원 이니라




“벨루드!”


그때서야 이든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신의 뜻에 불온한 첫 번째 존재였다. 벨루드, 지옥의 주인인 그와 이든은 홀로 맞서고 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단단히 잡고 주문을 외울 준비를 했다.




어리석도다. 나의 염원이 묶인 군대에 맞서는 너의 왕도 그와 같으리니




“물러가라! 엘리힘의 이름으로 명한다! 물러가라!” 이든의 지팡이 끝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둠을 지키는 자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 너의 신이 주지 못하는 것을 내가 주리니!




“물러가라! 지옥의 어둠 속으로!”




어둠 속의 빛나던 두 눈은 불타는 듯 보이더니 이내 그 불꽃은 거대한 손이 되어 그를 덮치려 들었다. 이든은 고함을 치며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지팡이 끝에 닿은 불꽃은 바람에 밀려나는 듯 큰 구멍이 뚫리더니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다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그의 눈을 멀게 했다. 이든은 급히 두 팔로 눈을 가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가 서 있는 자리는 더 이상 어둠속이 아니었다. 햇빛은 따사로웠으며 희고 노란 꽃이 만발해 있는 푸른 땅 위로는 잘 자란 나무들이 가지를 흔들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너무도 그리워하던 한 사람이 거닐고 있었다.


“스승님!”


그는 하늘거리는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꽃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아마도 맨발이었다. 이든의 스승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미소를 지으며 작은 동물들을 어루만졌다. 그가 입을 열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가 이든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잘 했다, 이든. 이제 엘리힘께서 준비하신 대로 나아가면 된다






“스승님?”


그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가 전에 불타는 나무를 보았던 자리에는 나무 대신 별빛으로 빛나는 희고 가느다란 지팡이가 꽂혀 있었다. 지팡이에 다가가자 다시 어렴풋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아들아. 이것을 가져가라. 가서 나의 뜻을 따라 기적을 행하라




그는 손을 뻗어 지팡이를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지팡이에 감기자 뾰족한 지팡이 끝이 격렬하게 푸른빛을 뿜었다. 그리고 뿜어진 빛은 서서히 그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몸에서 피로와 공복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바깥은 이미 아침이 되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가자, 노웬!”


그는 밧줄을 풀고 말 위로 올라탔다. 말은 다시 힘차게 산길을 달려 올랐다. 이든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있었다. 지팡이에 비친 햇빛이 그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울창한 숲으로 뛰어들고 개울을 건너는가 하면 험한 바위 길을 오르기도 하면서 그는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분명히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연석을 깎아낸 벽돌로 지은 오래된 사원을 발견했다. 그 사원의 입구에는 웬 늙은 사내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말발굽 소리에 이든을 발견하고는 서서히 다가오다가 그의 지팡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증표!”


그의 눈은 지팡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두 손을 들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엘리힘의 뜻을 따라 이곳에 왔습니다. 서둘러 당신의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세요!”


이든은 지팡이를 보이며 말했다.


“놀랍구려, 형제여! 정말로 이곳에 올 줄이야! 그나저나 엘리힘은 참 알 수 없는 분이오. 힘이 넘치던 때가 다 지나고 이런 늙은이가 되어서야 일을 시키시다니.”


그는 어쩐지 조금 정신이 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건물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그 안에서 그가 수도원의 사제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정신없는 노인이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것이다. 이든은 말에서 내려 곧장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사제들은 그의 지팡이를 보고 저마다 탄성을 지르며 놀라워했다. 수도원장이 말했던 것처럼 그가 진짜로 올 줄은 몰랐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든은 그들을 보고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수도원장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는 수도사들은 모두다 비쩍 말랐을 뿐 아니라 그 수도 겨우 60정도뿐이었다. 게다가 반 이상이 원장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들 모두가 남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그들은 싸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일부는 진정한 사제의 길을 찾아 산으로 들어온 사람이었고 대부분 길을 잃고 헤매다 수도원에 눌러 앉아 깨달음을 얻은 거지나 부랑자였던 것이다.


“말도 않되!”


이든은 곧 소리를 질렀다. 그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고 수도사들의 눈이 모두 그에게 집중되었다.


“말도 안 된다니, 뭐가 말입니까?”


원장이 오른쪽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


“병사, 병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린 지금 싸우러 가야해요!”


“병사라니요, 여긴 수도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군대요.”


이든이 맥없는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 앉아버리자 원장이 양 눈썹을 위로 한껏 치켜 올려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소? 참 알 수 없는 분이라고.”








같은 시간, 윌리엄과 레앙은 요정족의 터전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에 있었다.


“에힌(멈추시오), 블룬!”


말을 타고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던 중 요정의 언어가 그들을 붙잡았다. 윌리엄이 주변을 둘러보니 울창한 숲 곳곳에 화살촉이 별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윌리엄은 처음 들어보는 언어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마힘 투린 닐 베렘 퓌이르, 스탄!(물러가지 않으면 쏘겠소, 이방인이여!)”


윌리엄이 서성이는 동안에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활시위가 당겨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윌리엄과 레앙의 목숨이 위험한 것이었다. 사실 그들도 블룬이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을 쏠 생각이었으며 단지 형식을 취하기 위한 경고였다. 말의 푸르륵거리는 숨소리만이 정적을 더하고 있었다. 요정들의 손이 활 시위를 놓기 직전이었다.


“마흐 웬 카르 글리먼! 닐 퓌이르 류스!(족장 글리먼을 뵙기 원합니다! 부디 쏘지 마세요!)”


윌리엄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요정들도 놀란 것인지 반짝이는 별들이 아래로 내려갔다. 윌리엄의 뒤에 타고 있던 레앙이 그들의 말로 답을 한 것이었다.


“마마!”


“놀라실 것 없습니다. 왕가의 여인들은 모두 저들의 언어를 압니다.”


레앙이 조용히 말했다. 숲속에서 요정들의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틸 가나 콘 글리먼! 비 기프 나리힘 코마 로이 에뉴이스 호음!(우리를 안내해주세요! 인간계 전체의 생존 여부가 걸린 사안입니다!)”


잠시 뒤 다시 그들의 언어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들이 뭐라고 합니까?”


윌리엄이 목소리를 줄여 귓속말을 하듯 레앙에게 물었다.


“누군가 다른 한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곧 분주히 낙엽을 밟으며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발소리가 돌아왔을 때 요정 중 한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직도 우리말을 할 줄 아는 블룬이 있는 줄은 몰랐소.”


모습을 드러낸 요정은 윌리엄을 위한 것인지 요정의 말을 쓰지 않았다. 요정이 모습을 드러내자, 하마터면 윌리엄은 그 자리에서 감탄을 터트릴 뻔 했다. 그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깨끗하다 못해 투명한 피부와 섬세한 이목구비, 지금껏 살며 본 다른 미인들의 틈에 두어도 남자로 구분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로이, 인디릴!(전원, 위치로!)” 그가 다시 요정어로 크게 외치자 다시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따라오시오. 안내하리다.”


“에이브(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요정을 따라 숲길을 거닐었다. 바깥의 상황이야 어떻든 간에 이곳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흙길 이곳저곳에는 수수한 들꽃이 듬성듬성 피어있었고 나무 사이사이 작은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윌리엄은 오랜만에 보는 평화로운 풍경에 감동하면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언제 이 족속들이 레앙, 혹은 자신을 해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은 괜한 걱정으로 끝나버렸다.




“잘 오셨소. 배신에 능한 족속이여.”


족장 글리먼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이제 겨우 서른을 넘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족히 700년의 세월을 살아온, 인간의 기준으로 늙은이, 경험 많은 자라는 개념을 초월한 자였다. 그가 손님을 맞은 방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숲의 어딘가에서 자랐을 은빛 나무로 만든 건물의 벽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추어 지면 너무도 은은한 빛을 내었고,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방 안은 수정으로 만든 것인지 알이 작은 발이 반짝이고 있었다.


“검을 휘두를 일은 없으니 편히 있으시오.”


윌리엄은 깜짝 놀랐다. 속으로는 언제든 검을 뽑아들 생각으로 긴장하고 있었으나 결코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글리먼은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 뜻을 알아챈 것이다.


“인간계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 들었소. 말해보시오.”


글리먼은 여유롭게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2천년전의 흑마술이 부활했습니다. 요정족의 참전을 요청합니다.”


윌리엄은 그녀의 태도에 당황했다. 두 족속은 2천년간이나 원수로 지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들을 위해 싸워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태도가 하도 당당해서 마치 약속이라도 해놓은 듯 했다.


“그 일이라면 이미 알고 있소. 우리 정찰병들은 지금도 가끔 당신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밖으로 떠나고는 한다오. 다시는 당신들에게 숲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말이오.”


글리먼의 목소리는 너무도 차분하다 못해 감정이 없는 듯 했다. 지극히 사무적이었으며 어찌 들으면 냉소적이기까지 했다. 그의 그런 태도 때문에 방안의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는 자신의 종족과 블룬이 아직도 적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그의 첫인사를 들었을 때 이미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몇 마디 말에 윌리엄은 전에 느껴본 적 없는 무안함과 막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방을 나서고 싶었다. 그러나 왕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어째서 내가 그대들을 도울 거라 생각하오?”


“당신이 우리가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그 무슨 괴이한 소리요?”


글리먼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요정의 숲을 찾아온 여인이 내가 아니었더라면 당신은 결코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을 태죠.” 레앙의 말에 또다시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들의 언어를 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쓸데없는 소리 그만 두시오!”


글리먼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윌리엄은 그의 모습에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차갑던 사람이 레앙의 말 몇 마디에 이토록 흥분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하나 인정하는 사실은 그대가 누구인지 예상했다는 점뿐이오.”


글리먼은 다시 감정을 추스른 듯 보였다.


“당신은 아직 그녀를 기억하고 있어요.”


윌리엄은 레앙이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글리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자손들에게 이야기를 떠벌린 게로군.” 글리먼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그래, 순진했던 요정의 이야기를 어떤 말로 비웃던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죠?”


“난 이미 그녀를 잊었소.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마시오.”


“자신을 속이지 말아요.”


레앙은 너무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윌리엄은 아직도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내가 아직도 그녀를 그리워한다고 생각하지?”


글리먼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지금도 당신의 목에 왕가의 여인들이 오랜 세월 가슴에 품었던 것이 걸려있기 때문이에요.”


레앙은 외투의 속주머니에서 무언가 소중히 싸놓은 헝겊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레 펼쳤을 때, 윌리엄과 그녀가 안내를 받으며 보았던 들꽃의 모양을 본뜬 작은 보석이 놓여있었다. 놀랍게도 글리먼의 목걸이에도 같은 보석이 장식되어 있었다.


“레우밀...(달맞이 꽃...)”


글리먼의 눈빛이 다시 크게 흔들렸다.


“이실린 웬 가르투스. 700년 전 당신이 사랑했던 연인의 마음은 지금도 당신을 향하고 있어요.”


“그녀는 나를 배신했어!”


글리먼은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만남을 약속한 날 펜놀 언덕에 그녀는 없었어! 위험을 무릎 쓰고 당신들의 성으로 숨어들었을 때 나는 그녀가 어느 영주와 혼인해버린 사실을 알았소!”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것은 정략된 일이었을 뿐, 내 선조는 당신을 잊지 않았어요. 지금도 레우밀이 전해지는 것을 보고도 모르겠나요?”


“모르겠소!”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요정 장인이 만든 보석이야 당신들에게 더 없이 가치 있는 것일 터, 그것을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 어떻게 사랑의 증거가 되겠나!”


“알룬 웨흐 투렌 투트!(내가 당신들의 언어를 알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글리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앙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마음을 추스른 후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레우밀이 전해질 때, 반드시 함께 전해지는 것이 바로 당신이 그녀에게 가르친 언어였어요. 어머니가 딸에게, 다시 그 딸이 자신의 딸에게로, 오직 여인들에게만 전해졌습니다. 다시는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한 여인이 언젠가 자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처음 그것을 시작했죠. 그것이 700년간 계속 되었어요. 이제 그 염원이 이루어졌으니 당신이 그녀의 뜻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에요.”


레앙의 눈에서는 쉼 없이 보석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윌리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요정과 인간의 사랑이야기에 놀랐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왕가의 여인과 요정이 사랑하였더라는 이야기를 들은바가 없었다. 레앙의 말대로 오로지 그녀들과 글리먼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눈물을 그쳐갈 무렵, 글리먼이 입을 열었다.


“레우밀과 함께 이곳을 떠나시오.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말고.”


레앙은 가슴이 아픈 듯 슬픈 얼굴을 손으로 가리더니 이내 윌리엄과 함께 숲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글리먼은 한참을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레앙의 모습에서 이실린을 떠올린 것이었다.




밤이 깊었다. 그가 잠에 들 시간이 되자 시종을 드는 요정이 그의 발을 씻기려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올라왔다.


“헤논.” 시종이 그의 발을 씻을 때 평소와 달리 그는 시종에게 슬픈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니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족장님.”


“벌써 724년의 세월을 살아왔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갖가지 경험을 하며 살아왔다. 더 이상 내가 동요할 일은 없는 줄 알았는데, 나는 오늘 눈물을 흘렸다.”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말에 시종은 조금 놀라는 듯 했다.


“아직도... 내 심장은 그때와 같이 뛰고 있었던가.”


그의 손은 레우밀을 꽉 쥐고 있었다.




레앙과 윌리엄은 물가에 멈추어 쉬고 있었다. 밤이 깊어온 것이다. 레앙은 윌리엄에게 여인들만이 알고 있었던 그 비밀에 대해 털어놓았다. 지금은 족장의 자리에 있는 글리먼은 과거 요정족 정찰병이었다. 성년이 되던 날 의식을 치룬 이실린은 기쁨에 취해 몰래 성 밖으로 빠져나갔고 실수로 하녀를 놓치는 바람에 길을 잃었다. 그러던 중 달빛 아래에서 젊은 글리먼을 만났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글리먼의 도움으로 성으로 가는 길을 찾은 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몰래 성을 빠져나왔고, 그렇게 두 사람은 밀애를 했다. 그러나 이실린에게는 태어나기도 전 정략된 약혼자가 있었고, 차마 그것을 미리 말하지 못한 채로 글리먼과는 영영 이별을 하고 말았다. 약혼자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결국 그녀의 순결을 지켜주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윌리엄은 가슴이 아파왔다. 700년, 그 세월동안 한 여인을 그리워하며 동시에 증오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잠든 레앙을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서고 있던 그에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재빨리 검을 뽑아들었다. 레앙도 소리를 들은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을 찾아온 것은 글리먼의 전령이었다.


“족장께서 전하시는 말씀입니다. 요정족은 참전할 것입니다. 우리 숲의 훈련된 궁수와 검사 각 3천 7백명과 9천명이 참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분께 조심히 돌아가시라는 인사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뒤 요정 전령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 윌리엄은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것은 레앙도 마찬가지였다. 전령이 떠난 뒤, 레앙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간절히 바라오니 들어 주소서


나의 기사를 지켜주소서


그가 무사할 수 있다면


저는 오늘 새벽이슬처럼 사라진다 해도


결코 신을 원망치 않겠습니다








모든 마음을 담아 기도 하나이다


부디 이 기도를 뿌리치지 마시옵소서


제게 저보다 소중한 여인이 있나이다


부디 다시 그 여인에게 가는 날까지


무사할 수 있도록 신께서 지키소서




“무슨 고민이 있소?”


루콘은 깜짝 놀랐다. 한참을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부른 것은 수린이었다. 그는 헤라들링의 군사를 이끄는 대장이었다. 그들의 본거지에 갔을 때, 루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떠한 적도 쓰러뜨릴 수 있도록 고도로 훈련된 병사가 6천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검, 창, 활. 그 어떤 무기도 다룰 수 있었으며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는가 하면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했다. 이런 병사들이라면 6천의 병력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이들은 다른 국가나 어느 종족들과도 다른 특이한 양식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재료부터가 금속이 아닌 가죽이라 갈색을 띄고 있었고 왕국의 기사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갑옷의 크기가 조금 모자란 듯 보였다. 그들의 팔이나 다리에 갑주가 씌워져 있지 않고 천으로만 가려진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좀 더 서두르는 것이 좋겠소.”


그의 부탁 한마디 한마디에 수린은 성실하게 따라주었다. 그들은 2천년의 세월을 오직 이 날을 기다리며 살아온 자들이었다. 지금껏 그들을 성전으로 이끌어줄 루콘을 기다려온 것이었다.


“대장님! 전방에 기마병 1천이 오고 있습니다!”


정찰병이 말을 타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그는 말에서 내려 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비둘기. 전날 나를 쫓아온 자들의 국기입니다.”


수린은 그의 말을 듣더니 카무에게 명령했다.


“병사 200을 이끌고 먼저 가라.”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뱉은 그의 말에 루콘은 당황했다.


“200이라니, 저들의 수는 1천입니다.”


“우리를 걱정하는 거요?” 카무가 말했다. “여보게들, 루콘 왕께서 친히 우리를 걱정해주시는군!”


그가 그렇게 말하자 그의 말이 들리는 거리에 있는 병사들이 가장 먼저 껄껄대며 웃었고 뒤쪽의 병사들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웃었다.


“왜 웃는 거요?”


루콘은 바보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다.


“궁금하거든 카무를 따라 한번 가보시구려.”


수린의 말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수린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카무와 나란히 서서 달렸다. 그들의 뒤로 병사 200이 따르고 있었다. 작은 언덕을 하나 오르고 나니 정찰병이 전한대로 1천의 튜노스 기마병이 기수를 선봉에 두고 달려오고 있었다.


“바람이 좋군. 활을 꺼내라!”


카무가 외쳤다. 루콘은 또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권 밖이오. 더 전진해야 합니다.”


“조준-”


루콘이 하는 말과는 관계없이 카무의 명령은 이어졌고 병사들도 그대로 활시위를 당겼다.


“쏴라!”


그의 말과 동시에 말 위에 탄 200의 병사가 한꺼번에 화살을 놓았다. 루콘과 카무의 머리 위로 쏜살같이 화살 200기가 날아갔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기마병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더니 곧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졌다. 그리고 선두에 선 기마병들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루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수많은 명궁의 이야기를 듣고 왕국에서도 칭송받는 궁사들을 만나보았으나 지금 그들의 화살이 날아간 거리는 짧게 잡아 지금껏 본 장거리 사격의 3할을 더 날아간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란 것은 튜노스 군 역시 마찬가지인 듯 했다.


“조준-”


다시 카무의 명령에 따라 활시위가 당겨졌다. 이번에는 그도 직접 등에 걸어둔 활을 뽑아들었다.


“쏴라!”


다시 화살이 날아갔고, 멀리서 기마병들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다음 화살을 끼울 때쯤 이미 기마병들은 거리에서 달아나버렸다. 그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병사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웃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소? 2천년이요. 그 오랜 세월 전쟁만을 생각하며 대를 이었는데 바깥의 병사들과 어찌 같을 수 있겠소?”


카무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번 호탕하게 웃어재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그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정말로 괸한 걱정을 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스가 지휘하는 엘두르 왕국군은 숲에서 퇴각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제국의 병사 4천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것이었다. 탈영한 자, 그간 죽은 자, 부상당한 자를 다 빼고 나면 겨우 1천이 조금 넘는 왕국의 병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가 아니었다. 사제들은 여인과 어린 아이들을 뒤로 피신시키느라 바빴다. 제스는 멀리서 승리를 확신하는 표정으로 왕국군의 죽음을 지켜보는 롬벌트를 보고 타오르는 분노를 터뜨리며 적을 베어 죽이고 있었다.


“이놈-! 이 더러운 배신자!”


퀀투스 역시 그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롬벌트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듯 서둘러 다 죽이라는 명령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이미 병사의 5분의 1을 잃었으나 달려드는 적의 수는 전혀 변화가 없는 듯 보였다.


“제스님!”


그가 숨을 고르는 사이 길 안내를 위해 보낸 병사 하나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뭘 하고 있나! 퇴각하지 않고!”


“퇴로가 막혔습니다!”


“무엇이!”


제스는 이 상황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루콘과 왕비, 요한과 윌리엄이 다시 이 자리에 왔을 때 자신들이 다 죽은 것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그들의 상황은 오히려 희망을 되찾고 있었다. 멀리서 오랜 형제국가의 나팔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자리에 있던 모든 병사들이 싸움을 멈추었다. 왕국의 기사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숲의 뒤편 언덕 위에 검은 머리칼을 뒤로 묶은 사내와 그 부하로 보이는 병사들이 횡렬로 줄을 서 있었다. 그를 뒤따라온 기수의 깃발에는 창과 방패가 교차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과거 빌링 왕이 세상을 구하던 때 함께 싸웠던 그의 친구 엘리움의 상징이었다. 퇴로를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


“소넷의 병사들!”


퀀투스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우리의 오랜 형제들이 위기를 맞았도다.” 남자가 말했다. “엘리움의 후손들이여, 모든 적을 도륙하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함성과 함께 병사들이 완만한 언덕을 내달렸다. 말을 탄자와 두 발로 달리는 자들이 순식간에 나무 사이로 뛰어들어 왔다. 그들은 당황한 적을 가차 없이 죽여 나갔다. 제국군의 눈에 그들의 모습은 마치 성난 짐승처럼 보였다.


“왕국군이여! 다시 검을 휘둘러라! 승리의 기회가 왔노라!”


제스가 소리쳤다. 왕국군들은 기적 같은 상황에 감격의 환호성을 지르며 퇴각을 멈추고 적들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소넷의 병사들은 창을 들어 적들에게 던진 후 검을 뽑아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그 기세에 놀라 제국군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이미 소넷 병사들이 제국군을 옆으로 싸고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그들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겨우 2천의 병사들이었으나 그 큰 고함소리와 숲의 나무들이 그들의 적은 수를 감추어 준 것이었다. 또한 그들 한사람의 용맹함은 적군 세 사람이 덤벼들어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강대한 것이었다.


“단 한 놈도 남기지 말라! 인간의 의를 저버린 자들에게 철퇴를 내려라!”


머리를 묶은 남자는 계속해서 소리쳤다. 그의 부하들은 고함을 치며 달아나는 적군까지 내리쳤다. 그 모습은 마치 강물이 범람하며 땅을 삼키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살아남아 도망치는데 성공한 병사들은 롬벌트를 포함하여 겨우 20여명에 불과했다.




“제스님.”


소넷 군을 이끌고 온 남자가 먼저 제스에게 다가가 인사를 청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런 큰 도움을 주다니. 어찌 이 은혜를 갚겠는지요.”


제스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가 무릎 꿇는 것을 보고 남자는 당황하며 말에서 내려 그를 일으켰다.


“10년 전, 왕국의 축제에서 당신의 검술시범을 본 이후 지금껏 단 하루도 무예 연마를 쉬지 않았습니다. 저를 모르시겠는지요.”


남자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제스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할림 왕자님! 이토록 장성하시다니!”


제스는 다시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그는 소넷의 왕 힐로손의 첫째 아들이었다. 제스가 그를 처음 본 것은 10년 전 왕국의 동맹국이 모여 벌인 축제에서였다. 당시 그는 11살의 어리광쟁이였다. 그가 지금은 엄격하기로 유명한 소넷의 군사들을 지휘할 만큼 큰 인물이 되어있었다.


“일어나십시오. 당신은 제 정신적 스승입니다. 왕국의 여인들과 아이들은 후방의 부대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들은 소넷의 영토에서 보호받을 겁니다. 진작 왕국을 돕기 위해 달려 나왔어야 했는데, 아바마마께서 다른 동맹국들을 설득하시느라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용서라니요, 송구스럽습니다!”


퀀투스 역시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제가 끌고 온 병력은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지금 제 동생들이 병사 5천을 이끌고 오는 중이며 엔트릴 일대의 동맹국들이 연합 군사 5만 8천을 일으켜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지금 아버지께서는 노쇠하신 탓에 저와 동생들이 이렇게 군사를 이끌고 온 것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숫자에 제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병사들 중에는 너무도 큰 희망에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이제 절망의 시간이 끝나고 다시 승리에 대한 희망이 시작되고 있었다.


“드디어 반격의 때가 왔노라.”


제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옛 왕국의 수도로 향하고 있었다.






요한은 남부 최 남방 요세의 오르크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들은 검은 녹색 피부에 장대한 골격을 가진 반 짐승의 모습을 한 전사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요한의 피부도 지극히 흰 편에 속했다.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홀로 식량을 등에 지고 산맥을 오르는 동안에도 용맹한 전사들을 기대하며 난관을 이겨낸 그의 눈에 비친 오르크들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투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일족의 전사들은 오로지 우리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오. 어째서 우리가 그대의 왕국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가.”


남부의 장로중 한 사람인 템푸스의 말이었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왕국의 문제를 벗어났습니다. 제국은 죽은 자들을 이용해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며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미 숲 주변의 인간들은 모두 그들 손아귀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언제고 당신들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표정도 없이 그에게 같은 말을 반복시키고 있었다. 분명 모두가 그의 말을 듣고 있는데도 오히려 모두가 그를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가 깔려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요한이 지쳐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지도 몰랐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를 공격했을 때 생각해도 늦지 않는 일이 아닌가.”


젊은 전사들을 이끄는 하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잠시 말이 없더니 허탈하게 웃음을 날렸다.


“참으로 한심하오.” 요한의 얼굴에 분노와 애석함이 베어 나왔다. “그 때가 되면 늦소.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저 북쪽에 강링평원, 케펠고원을 넘어서 깃털해안까지 대륙의 북방지역을 손아귀에 넣는데 단 4개월이면 족하오. 당신들이 사랑하는 이 숲을 영혼도 없는 시체들이 활보하며 살아있는 모든 자들을 발아래서 부릴 것이란 말이오! 지금 당장 힘을 모아 그들을 공격하면 아직 희망은 있소! 무엇이 두려워 주저하는 거요!”


“그런 말을 하려거든 그대들에게 등을 돌린 동족들에게나 가서 하시오.”


장로들 중 한명이 귀찮다는 듯 말을 받아쳤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드디어 요한도 인내의 한계가 왔다.


“대전사 코란의 이름이 아깝군. 그가 하늘에서 당신들을 본다면 뭐라고 하겠소!”


“감히!”


요한의 말에 격분한 하딘은 전광석화 같이 도끼를 집어 들고 그의 머리위로 힘껏 내리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도끼자루를 손으로 잡아 세우고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자리에 모인 오르크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뻔 했다.


“그대, 평범한 블룬이 아니로군. 그렇지 않은가?”


템푸스가 그를 유심히 살피며 나직이 말했다. 하딘은 도끼를 그의 손에서 때어 내어 무기 진열대에 조용히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직도 요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 안에 흐르는 피의 일부는 당신들과 같습니다. 내 증조 때에 당신들의 피가 섞인 것으로 압니다. 비록 난 순수한 오르크는 아니지만 그래도 위대한 전사들의 피가 흐르는 것을 자부하며 살아왔소. 그런데 지금 당신들을 보니 모두 비겁자일 뿐이오. 인간계 전체의 운명이 걸린 상황에 한순간의 평화에 안주하다니!”


지도자들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템푸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뭐라 하든지, 지원은 없소. 그게 우리의 결정이오. 먼 길을 고생해 찾아온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로 오늘 밤 잠을 청할 숙소를 마련해 주겠소. 아침이 오거든 떠나시오.”


템푸스를 회의실을 나가자 다른 오르크들도 줄을 지어 빠져 나갔다. 요한은 허탈한 마음에 한동안 자리에서 발을 떼어 놓지 못했다.




다음날 새벽, 요한은 당장 가는 길에 마실 물과 소량의 식량만을 가지고 다시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의 왕 루콘에 대한 죄스러움과 앞으로 치러야 할 전쟁에 대한 걱정으로 고요히 폭풍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문득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한 곳을 응시하다 그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저것은...”


템푸스가 이끄는 남부진영 방향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심상치 않은 광경에 그는 곧장 어깨의 짐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선왕의 마지막 가르침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의를 실천하라. 이를 위해 노력한다면 비록 그 한 사람의 존재는 작더라도 분명 대의는 실현되는 법. 진정 강렬한 빛은 한줄기만으로도 어둠을 꿰뚫는 것처럼 말일세. 자네는 의(義)의 기사가 되어야 하네. 언젠가 저들이 자네를 피부가 아닌 강한 마음과 뜻, 능력을 통해 평가할 날이 오도록. 이것이 이 늙은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수업일세.”




요한은 있는 힘껏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굽잇길을 피하고 나무가 울창한 숲을 가로질러 넘어지기를 몇 번, 드디어 연기의 시발점이 나타났다. 전날 회의를 했던 너와집은 불에 모조리 불에 타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불을 놓은 자들은 어느 국가의 소속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인간 병사들인 듯 했다. 잠에서 깨어난 젊은 오르크들은 기습공격에 이미 죽었거나 남은 자들은 큰 부상을 입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선천적으로 강인한 육체를 가졌다고는 하나 늙은 장로들과 젊은이 몇 사람만으로는 수적 우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전력으로 달려오느라 지친 몸이었으나 요한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가며 병사 몇 명을 순식간에 베어 넘겼다.


그의 눈에 칼에 베인 팔을 움켜잡고 고통스러워하는 템푸스가 보였다. 가장 건장한 인간 병사의 손에 당한 것이었다. 템푸스는 가까스로 다음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젊은 병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검을 높이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우오오!”


요한은 고함을 치며 달려갔다. 젊은 병사는 그의 소리를 듣고 놀라 방향을 돌렸다. 병사는 요한을 내려치려 했으나 이미 그는 병사의 품안에 들어와 있었다. 요한은 어깨로 그의 가슴을 들이받았고, 강한 충격에 상대는 기절해버렸다.


다른 적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하딘은 요한이 고함을 치는 순간에야 템푸스가 쓰러진 사실을 알아차리고 소리를 질러 몇 안 되는 싸울 수 있는 젊은이들은 그에게 보냈다.


“북방의 전사들이여, 싫더라도 당장은 나를 따르라! 반드시 그대들이 이기도록 돕겠다!”


요한은 기절한 병사의 검을 왼손에 집어 들었다. 양 손을 하늘로 교차해 들어 올린 뒤 양쪽 방향으로 힘차게 흩뿌렸다. 검 끝을 따라 바닥으로 인간 병사의 붉은 피와 오르크의 검은 피가 뿌려졌다.


“너희도 저자를 따라 싸워라! 어서! 이쪽은 나와 장로님들만으로 충분하다!”


하딘은 남은 젊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그들은 쏜살같이 요한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비록 완전한 오르크가 아니더라도 이제 갓 30의 나이를 넘긴 요한의 힘은 평범한 인간을 상회했다. 또한 수년간 전장을 누빈 그의 검술은 지금 남쪽 진영을 습격한 자들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 전사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50명의 병사를 송장으로 만들어버렸다. 하딘과 장로들도 마음을 추스러 전열을 가다듬은 뒤 본 실력을 발휘하면서 빠르게 적의 숫자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 인간 병사들 중 살아남은 자는 템푸스를 공격했던 젊은 병사뿐이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많은 오르크와 요한이 그를 둘러싼 후였다. 템푸스의 팔에는 그들 숲에서 자라는 어느 식물의 널따란 잎이 감겨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블룬이여.”


하딘이 분노를 추스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물었다. 젊은 병사는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대의 동료들은 이미 다 죽거나 달아났다. 목숨을 살려줄 것이니 그대가 속한 영지와 그 영주를 말하라.”


요한이 하딘을 제지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심문을 재개했다. 그도 사태를 파악한 것인지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물음에 답했다.


“나는 발푸스 왕국의 롭벨 영주가 다스리는 남부 시리아의 수색대원이오.”


“롭벨, 이 더러운 자! 벌써 제국과 결탁했다는 말인가!”


요한은 롭벨이라는 이름에 치를 떨었다. 그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7년 전 선왕의 탄신일에 찾아와 금은보화를 바치고 갖은 아양을 떨던 자였다. 그 모습이 보기가 싫어 축제가 진행되는 내내 그를 피해 다닌 적이 있었다.


“우리 영주 뿐 아니오. 이미 발푸스의 왕과 모든 영주들은 제국의 편으로 돌아섰소.”


“그대는 수색대라고 했는데, 수색대 치고는 수가 너무 많지 않았나 싶군.”


템푸스가 말했다.


“수색대는 나를 포함해 단 열한 명뿐이오. 다른 병사들은 상황에 따라 직접 타격을 가하기 위해 함께 배치된 병사들이오.”


“이미 처음부터 우리를 칠 생각이었다는 말이로군. 공격을 위해 준비 중인 병사는 몇인가?”


“우리 영지에서만 3천이 준비 되어있고, 다른 영주들도 전쟁을 준비 중이라 들었소.”


자리에 모인 젊은이들과 장로들은 흠칫 놀랐다. 그들이 숲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 이미 전쟁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템푸스의 명령에 젊은 전사 한 사람이 검을 들어 그를 속박한 밧줄을 잘라내었다.


“우리의 입으로 한 약속은 아니지만, 은인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어 이렇게 그대를 살려주는 것이다. 지금 당장 그대 군주에게 돌아가 전하라.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를 적으로 삼았노라고.”


자리에서 일어난 병사는 혹여 하딘이 손에 든 도끼를 휘두를까 겁이나 부리나케 사라졌다.


“각 영지에 파발을 띄워라!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의 말에 젊은 전사들이 다시 일사분란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부상당한 동료를 치료하는 자도 있었고 무기고를 열어 투척용 무기를 수레에 실어 나르는 이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대의 말이 옳았던 듯하오. 나의 우둔함을 용서하시오. 내가 각 진영의 지도자들을 설득하겠소. 하딘을 우리 진영의 선봉으로 세워 보낼 것이니 그 때 함께 이곳을 떠나시오.”


템푸스가 사과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자 오히려 요한이 자리에 무릎을 꿇어 감사를 표했다.




열흘이 지나고, 요한과 하딘을 선봉으로 하여 오르크 전사들은 방패산맥 최서단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곳을 넘어가면 루콘의 고향인 한스가 있었다. 한스는 왕국의 엘먼들이 모여 사는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지치거든 말만 하시오. 헐떡거리는 블룬을 업고 갈 오르크는 뒤에 얼마든지 있소.”


그의 말에 뒤따라오던 젊은 오르크들이 웃었다. 요한도 따라서 웃더니 곧 그 말을 받아쳤다.


“언제든 그렇게 하리다. 그런데 말이오, 당신이 지치거든 그때는 내게 말하시오. 내가 그대를 업고 가도록 하지.”


요한의 말에 또다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녁이 되었을 무렵, 선두에 속한 오르크들은 산맥 아래로 내려와 한스에 당도했다. 어둠을 이용해 몸을 숨긴 그들은 요한과 하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은 마을 입구로 당당히 걸어가 보초와 마주쳤다.


“거기! 검둥이! 멈춰라!” 보초는 거만하게 검을 뽑더니 그에게 다가섰다. “정체를 밝혀라. 허튼 짓을 하면 죽일 줄 알아!”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매춘하는 자입니다. 귀 좀 빌려주십시오, 나리.”


요한은 능청스럽게 연기하고 있었다. 그는 귓속말로 뒤켠에 여인들이 기다린다며 그를 유혹했다. 적당한 가격을 부른 뒤 흥정으로 값을 낮추었고 완전히 속아 넘어간 보초는 그를 따라 어둠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늘씬한 미녀가 아닌 하딘이었다. 그가 휘두른 주먹에 맞고 보초는 즉사했다.


“오르크투쓰!(오르크들이여!)”


하딘이 낮은 소리로 외치자 숨어있던 오르크들이 보초가 없는 틈을 타 마을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마을을 순찰하는 제국군 몇을 죽이자 이것을 목격한 병사 하나가 소리를 질러 방위군들을 밖으로 불러냈다. 그러나 따라 나온 자들은 오르크의 장대한 체구와 안광에 겁을 먹고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죽음을 맞았다.


“한스의 농부들이여! 해방이오!”


제국 병사들이 다 죽은 것을 확인하고 요한이 소리쳤다. 집 밖으로 나온 여인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촌장 얀이 달려 나왔다. 그는 루콘을 키워낸 피가 섞이지 않은 양할아버지였다.


“누, 누구요!”


촌장역시 기겁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팡이를 들어 하딘을 겨누고 있었다.


“이들은 북방의 오르크입니다. 아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한이 하딘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그때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짓고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얀님.”


요한이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했다.


“요한님, 루콘은 어디에 있소.”


“병사들을 모으러 홀로 원정에 떠나신 뒤로는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쯤 우리보다 먼저 약속한 장소로 향하고 계실 겁니다.”








롬벌트가 왕실에 들어섰을 때는 형용할 수 없는 몰골이 되어 있었다. 그의 망토는 이곳  저곳 찢어져나가 걸레쪽이 되어버렸고 얼굴은 아직도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사태에 대해 아뢰었다. 황제는 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아 일으켰다.


“죽여주십시오, 황제폐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는 칼을 꺼내 그의 복부를 찔렀다. 황제의 표정은 너무도 무정했다. 롬벌트는 갑자기 변해버린 황제의 태도에 경악했다.


“그러지 않아도 네놈을 죽게 하려고 전방으로 보낸 것인데...”


롬벌트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그는 곧 숨이 넘어갈 뜻 꺽꺽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토록 내 손을 더럽히게 될 줄이야!”


황제는 검을 뽑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롬벌트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곧 죽을 목숨이니 말해주마. 이미 남부 다스는 제국군이 진을 치고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너는 너무도 쉽게 놀아났어.”


그의 말을 들은 롬벌트는 배신감과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황제의 얼굴에 경멸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놈의 시신을 치워라. 그리고 파발을 띄워 모든 병력을 성 주변에 배치시켜라.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지팡이의 힘으로 일으켜 세워야지.”






드디어 루콘과 그의 신하들이 약속한 날이 되었다. 병사들은 이른 새벽부터 속속 북부 다스의 성, 가르투스 왕가의 다마하스를 둘러싸 모이기 시작했다. 이미 성 앞의 평원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제국의 병사와 그들의 동맹군, 그리고 죽은 자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왕국군과 소넷의 엔트릴 동맹군이었다. 왕국의 병사들을 중심으로 양쪽에 소넷의 동맹국들이 늘어섰다. 그들 사이사이로 과거 신성왕국의 본성을 공략하기 위한 공성무기들이 늘어서있었다. 레앙은 할림이 보낸 병사에게 인도되어 그들의 영토로 갔고 윌리엄은 왕국군과 합류했다.


“하람, 엘두르 군을 중심으로 좌측에 기마병들을 바짝 붙여라. 하로, 우측으로. 목표는 중앙돌파다.”


할림이 두 동생에게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재빨리 병사들을 배치시켰다.


“요한과 폐하가 걱정이야.”


제스가 말했다. 윌리엄과 퀀투스 역시 걱정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때, 서편에서 풀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풀피리 소리라고 하기에는 아주 먼 거리에서 또렷이 들려오고 있었다.


“서쪽을 보십시오!”


할림의 말에 서쪽을 보았을 때, 놀라지 않은 사람은 윌리엄뿐이었다. 요정군대가 온 것이다. 푸른빛을 내는 갑옷을 입고 초승달 같은 가느다란 검을 든 그들의 모습은 기록에 전하는 요정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을 이끌고 나온 지휘관은 족장 글리먼이었다.


곧 요정들이 모인 자리의 북서쪽에서 검은 녹색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요한과 오르크들이었다. 멀리서 언뜻 보아도 족히 1만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그대의 왕은 온 듯하오?”


하딘이 물었다.


“아직은. 그러나 곧 오실 것이오.”


요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왕국군과 소넷의 동맹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익히 들었으나 죽기 전에 눈으로 요정과 오르크의 모습을 확인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동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군대가 접근중입니다!”


할림의 둘째동생 하람이 달려왔다.


“그들의 깃발은 확인했는가?”


“다리가 셋 달린 검은 새입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두 엘먼입니다.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은 당신들과 같은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습니다.”


하람은 퀀투스와 윌리엄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왕이시오!”


제스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윌리엄은 곧장 동쪽 언덕을 향해 달렸다. 퀀투스 역시 말에 올라타 그를 쫓았다. 얼마 후 다시 돌아온 두 사람은 루콘이 확실하다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들은 내심 그가 죽은 것은 아닌가 걱정했던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동편 언덕의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그림자를 비추었다.




“장엄하구려. 이토록 많은 병사들이 한 자리에 모이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소.”


수린이 말했다. 카무도 지금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제국군의 진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콘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서쪽에 늘어선 군대를 보았다. 그리고 북서쪽의 산맥을 내려오고 있는 전사들을 보았다. 적의 수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불리했으나 하나의 의지로 무기를 든 그들은 루콘에게 누구보다도 든든한 아군이었다.


“천년의 갈등과 반목을 넘어, 드디어 모든 인간계의 족속이 한 뜻으로 모였노라.”


루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세어 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동쪽에서는 공격의 때를 알리려는 듯 해가 얼굴을 들어내고 있었다. 햇빛은 루콘이 이끌어 온 엘먼들을 비추었다. 수린과 카무가 검을 빼어 들자 뒤쪽의 부하들은 화살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햇빛을 받으면 금빛으로 빛나는 군대...


제스가 말했다. 그는 문헌에 나오는 오랜 시를 읊고 있었다. 그의 눈에 동쪽에서 온 군대의 얼굴이 금빛으로 빛나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병사들의 눈에도 그러했다.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제스의 눈에 그들의 깃발이 들어왔다.


세발달린 까마귀가 하늘을 날리라.


 ‘동이족’이 실존했다는 말인가.”


동이족이라는 말에 그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모두 술렁거렸다. 그는 전설의 군대를 눈으로 확인한 것에 놀라워하면서도 스스로 읊은 오래된 시의 내용에 뭔가 부족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말이오, 아직까지 죽은 자를 상대로 겨루어본 경험은 없소.”


하딘이 도끼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냥 통째로 부숴버리시오.” 요한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 특기가 아니오?”


“그거 좋군.”


하딘이 씨익 웃었다. 요한도 그를 보고 기분 좋게 웃었다.


“토론 오르크투쓰! 바홉스!(북방의 오르크들이여! 정렬하라!)”


하딘의 외침에 각 지휘관들이 전사들을 횡대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각 부족에서 모인 최고의 사냥꾼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요정 군대와 200보 거리를 남길 만큼의 거리까지 늘어섰다.


“모후트!(함성!)”


우오-!


“모후트-!”


우오오-!


“모후트 발트 논!(전사의 함성을 질러라!)”


우오오오오오오오-!




“참으로 오랜 세월을 오직 이 날을 위하여 살아왔노라!”


수린의 말에 화답하는 듯 병사들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카무가 발사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대며 적들과 거리를 좁혀나갔다. 말 위에 탄 금빛의 병사들이 이 대전투의 서막을 연 것이다. 화살을 쏘아대다가 화살 통에 화살 반이 남자 다시 활을 뒤로 걸었다. 그들이 날려 보낸 화살은 적진의 곳곳으로 날아가 병사들을 쓰러뜨렸고 말들이 치고 들어갈 틈을 만들어내었다. 다시 카무가 명령을 내리자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고, 6천 병력의 검 뽑는 마찰소리가 태풍이라도 불어오는 듯 사방으로 굵직하게, 그리고 낮게 울렸다. 그들은 천천히 앞으로 전진 했다. 수린은 뒤를 돌아 병사들에게 말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제국의 죽은 군대가 서서히 그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그동안 제군들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바쳤다! 단 한 번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남아준 것에 대하여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 너희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적의 수가 너무나 많다! 우리는 싸우다 다 죽을 수도 있다!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므로, 나는 오늘 너희에게 나라를 위한 충성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병사여! 그대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스는 검 끝으로 병사 하나를 지목했다.


“저들의 칼에 돌아가신 제 어머니입니다!”


병사는 눈물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제스는 그 옆의 병사를 가리켰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습니다!”


다시 옆의 병사를 가리켰다.


“어린 아들을 두고 나왔습니다!”


병사의 말이 끝나자 그는 다시 검을 치켜들어 다른 병사들을 주목시켰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싸우라! 나는 오랜 친구였던 선왕, 만하트 웬 가르투스와의 약속을 위하여 싸울 것이다! 오늘 너희가 싸우는 이유는 단 하나, 국가가 아닌 너희가 진정 사랑하는 것을 위하여 싸우라! 그것이 없는 자는 지금 떠나도 좋다! 맹세코 비난하지 않겠다!”


그러나 병사들은 열의에 찬 눈빛으로 손에 쥔 검을 더 단단히 잡을 뿐 누구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얼굴위로 미소를 띠었다. 윌리엄과 퀀투스는 양쪽에서 그의 공격신호를 기다리며 검을 뽑았다.


“좋다! 오늘 죽는 순간까지 영광스럽게 검을 휘둘러라! 나의 마지막 명령이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하여 죽는 순간까지 그 누구도 검을 놓지 말라!”




“페쓰 우툴렌 쿠프, 우툴렌 헤름! 메헨 쿤노스 닐 듀 우툴렌 로 엘흐!(놈들의 목과 허리를 잘라라! 사악한 마법이 그들 몸에 번지지 못하도록!)”


글리먼은 어마어마한 적의 병력을 내려 보았다. 남은 생에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대한 무리가 보였다.


“이실린, 그대 자손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700년 만에 다시 이 땅에 돌아왔소. 부디 지켜봐 주시오.”


그는 그렇게 조용히 블룬의 말을 한 뒤 투구를 들어 머리에 썼다.




“드디어 시작이로군. 그대들과 싸울 수 있음을 평생 영광으로 기억하겠소.”


루콘이 검을 양손으로 잡아 수직으로 올려 코끝에 댄 뒤 오른쪽으로 천천히 내렸다. 엘두르 왕국 기사들의 예법이었다. 먼 곳에서 요한과 제스, 퀀투스, 윌리엄과 그들을 따르는 왕국의 모든 기사들 역시 같은 자세로 예를 취하며 각오를 다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반드시 전하라! 우리가 이겼노라고!”


수린이 말하자 동이족의 무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하늘을 향해 검을 들어올렸다.




“투낙투쓰 폴 코룸!(코룸의 후예들아!) 큇 피스 노크!(오늘을 기억하라!)”




“엘로렌-(요정들이여-)”


글리먼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레우밀이 빛나고 있었다.








에리오-!(돌격-!)




글리먼의 외침과 함께 요정족 군대가 죽은 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더 길었던 그들은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보통 200에서 300의 나이를 넘어선 자들이었다. 오랜 세월 검술을 연마해온 그들 군대는 수에 비해 놀라운 힘을 보여주었다. 글리먼이 지시한데로 그들은 적의 목과 빈 허리를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 뒤따라온 궁수들은 좀 더 먼 곳의 병사들의 목을 겨누었고 현을 꽉 잡은 두 손가락이 펴질 때마다 적의 수가 하나하나 줄어들었다. 글리먼 자신도 적진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누구보다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북서쪽의 오르크들은 그들 종족이 가진 육체적 우월성을 앞세워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싸우는 모습은 적을 베어버린다기 보다는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내듯 적의 무리를 한 방향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들이 고함칠 때마다 아직 그들과 마주하지 않은 적의 숨 쉬는 군사들까지 겁을 먹었다.


“지치면 뒤로 빠져서 구경이나 하시오, 블룬!”


하딘이 달려드는 시체 셋을 뭉개버리며 말했다.


“아직 날 너무 모르는군!”


요한은 검을 휘두르는 시체들 사이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그들을 토막 내었다. 거의 자신의 키만큼 큰 칼을 휘둘러대는 그의 모습은 마치 작은 오르크처럼 보였다.


“남쪽의 병사들이여! 형제들의 도시를 구출하라!”


소넷과 왕국군의 말들은 적들을 부딪쳐 쓰러뜨리고 짓밟으며 달려 나갔다. 소넷의 동맹군은 오르크들보다도 더 거칠게 싸웠다. 특히나 혹독하게 훈련된 소넷의 군사들은 멀리 흩어져 여러 적을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고, 심지어 그것을 선호하기 까지 했다. 제스와 그의 부하들도 만만치 않았다. 연합군의 가운데에서 활 모양의 대형을 이루며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간 그들은 결코 차례를 기다리는 법이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제스의 연설 때문이었는지 그들은 아군의 눈에도 놀라울 만큼 전의를 불태웠다. 앞의 동료가 적을 베고 있는 사이 뒤의 병사는 그 옆으로 빠져나가 더 앞의 적을 죽여 없앴다. 수는 가장 적었으나 아군 전체의 분위기를 승리로 유도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그들의 행렬 뒤로 공성 투척기와 사다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동쪽의 전설들을 보십시오!”


할림의 첫째동생이 검으로 동쪽을 가리켜 말했다. 동이족들의 검술은 다른 어느 국가의 것과도 다른 것이었다. 그들의 무기역시 그랬다. 매가 바람을 타고 날아간 흔적 같은 기다란 유선형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적의 머리가 하늘로 날아갔다. 그들은 소넷의 병사들처럼 넓게 산개해 싸웠다. 말이 급격하게 방향을 틀며 달리는 데도 그들은 그 검을 양손으로 잡고 휘두르고 있었다. 심지어 달리는 말에서 뛰어 내려 한 손으로 안장을 잡고 달리며 적을 죽인 뒤 다시 말 위로 뛰어 오르는 자도 있었다.


“놀랄 노자로군. 과연 전설이라는 것인가.”


바위 위로 올라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윌리엄이 말했다. 그는 곳 자리에서 뛰어 내려 다시 적을 베어 넘겼다.


“성문을 향해 움직여야한다!”


카무가 소리쳤다. 전장에 모인 모든 병사들은 알고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수적 불리함을 넘어 승리하기 위해서는 시체들을 조종하는 황제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왕궁의 꼭대기 층 테라스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바스의 황제의 눈에는 그들이 성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리석게도.”


황제는 음흉하게 웃으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이미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시체들을 베어 넘기면서 점점 더 성벽에 가까워지고 이제 승리가 가까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일이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만은 않았다. 죽은 자들의 군대를 밀쳐내며 드디어 살아있는 인간들과 싸우게 될 때 쯤 가장 먼저 동이족의 군대가 투석기의 공격 범위로 들어왔고 왕국과 소넷, 요정과 오르크의 전사들이 그 범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뒤에서는 미쳐 머리를 베지 못한 시체들이 일어나 그들을 쫓고 있었다. 그나마 숫자가 많은 소넷 연합군만이 완전히 둘러싸이지 않은 채로 나아가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살아있는 병사들은 방패를 가지고 있어 쉽게 치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동이족들도 지금만큼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제 완력이 강한 오르크 전사들이 방패를 잡은 적을 통째로 밀어나며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죽은 자들을 미친 듯이 쓰러뜨리던 전방의 병사들은 숨을 돌리고 있었고, 뒤쪽에 쫓아오던 병사들이 그들을 대신해 싸우고 있었다.


“투석기를 장전하라!”


“투석기 장전!”


“투석기 장전-!”


할림이 소리치자 병사들이 그의 말을 입에서 입으로 옮겨 전했다. 먼 길을 원정해 전투 시작부터 병사들과 함께 힘겨운 이동을 하던 투석기가 드디어 활약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장전완료! 발사준비!”


“조심해!”


가장 먼저 장전을 마친 소넷 연합군의 투석기 한 기가 적 투석기의 공격에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병사들은 돌이 날아올 때 재빨리 옆으로 도망쳐 목숨을 구했다. 연합군이 가지고 온 투석기의 수는 다마하스의 세 배였다. 그러나 이미 장전하고 그들이 사정권에 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다마하스의 투석기들이 유리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다마하스는 왕궁까지 4층의 층계로 급하게 높아지는 형태를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투석기는 더 높은 곳에서 더 멀리 쏘아 보낼 수 있었다.


“후미의 투석기는 외곽을 지원하라! 전방의 투석기들은 일제히 다마하스의 투석기를 조준하라!”


다시 할림의 명령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병사들은 분주히 움직여 그의 지시대로 이행했다. 곧 양쪽의 투석기들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덕에 전방 병사들에 대한 적의 투석 량이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기회에요! 어떻게든 더 깊이, 최대한 들어가야 합니다!”


루콘이 말했다. 선두의 무사들이 방패를 든 제국의 병사들과 맞서고 있는 동안 그 뒤에 선 수린, 카무, 루콘과 다른 무사들은 치고 들어갈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장인 수린의 지시가 떨어졌다.


“말에서 내려라! 길을 만들라!”


수린이 말하자 후미의 무사들이 말에서 내렸다. 그들이 타고 있던 말들은 주인을 기다리겠다는 듯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카무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몸을 공중으로 날리더니 두 발로 방패를 걷어차며 넘어졌다. 강한 충격을 받은 제국의 병사가 뒤로 떠밀려 넘어졌고 그 사이로 틈이 생겼다. 다른 무사들 몇몇이 그 틈으로 들어가 거리를 넓혔고 또 다른 무사들은 카무가 했던 것처럼 방패를 걷어차거나 몸으로 들이 받았다. 그러는 도중에 칼과 창에 찔리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이 벌려놓은 틈으로 말을 탄 선두와 후미의 무사들이 달려 들어가 다시 길을 만들며 그들의 진영을 흐트러뜨렸다. 그들은 루콘을 호위하듯 주변에 붙어 다니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주인들이 앞으로 나아가자 동이족의 말들은 그들을 따라 달리며 앞발로 제국의 방패를 걷어찼다.


“서둘러라! 우리도 저들을 도와 깊이 들어가야 한다!”


제스가 소리쳤다. 그러나 무작정 앞으로만 나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죽은 자들이 되살아나 다시 등 뒤에서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든 원군이 와주기만 한다면!”


퀀투스가 혼잣말을 하며 앞의 병사를 쓰러뜨렸을 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




“뿔나팔.”




부우우-




소리는 처음 왕국의 기사들이 적의 병력과 대치해 섰던 언덕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낮고 긴 뿔나팔 소리로군.”


소넷의 왕자들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제스도 그 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엘두르 왕국의 뿔나팔 소리였던 것이다. 언덕 위로 왕국의 상징인 흰 날개가 그려진 푸른 깃발이 펄럭이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 깃발을 따라 어디서 모인 것인지 많은 기병대가 하나 둘 검을 뽑아 올리며 길게 늘어섰다.


“저들이 이곳에 오다니!”


왕국의 기사들은 그들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지난 날 죽음이 두려워 탈영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도망친 뒤 그들의 마음은 오히려 전보다 더 무거운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인간의 양심과 기사의 도리가 그들의 가슴에 사슬을 쳤던 것이다. 지금도 번쩍이며 빛나고 있는 잘 정비된 그들의 검과 은빛 갑옷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수년간 차례차례 사라졌던 병사들 대부분이 모여 2천의 원군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동지들이 지금 우리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고향 땅 아래에서!”


그들을 이끌고 온 기사 한 사람이 검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따라온 병사들이 화답했다.


“신성왕국 기사단, 돌격하라!”


그들은 쏜살같이 달려와 고함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들의 검이 은빛 선을 그을 때마다 시체들은 다시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 앞만 보며 전진하는 시체들은 등 뒤의 적을 알아채지 못했고 원군들은 단 한명의 피해도 없이 그들을 싹 쓸어버릴 수 있었다. 후미의 시체들을 다 쓰러뜨린 그들은 넓게 퍼져 소넷의 연합군들 사이로 끼어들어갔다.


“제스님!”


탈영병들을 이끌고 온 기사가 제스에게 달려왔다.


“란시스!”


제스는 단박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기사들을 이끌던 대장 중 한 사람이었다.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용서를 빌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그것은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우선은 우리와 함께 싸우라.”


란시스는 제스의 말에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말을 달려 적들의 방패 위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등장으로 다시 탄력을 얻은 ‘반 바스’세력은 전투가 시작될 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숨어있었지만 그들의 활약은 의외였다. 그들 대부분이 왕국의 생존자들 곁을 떠나있는 동안에 힘겨웠지만 영광스러웠던 날들을 떠올리며 무예를 게을리 하지 않은 탓이었다. 긴 공백 기간으로 싸움에 자신이 없는 자들은 허리에 차고 온 뿔나팔을 불며 그들 사이를 누볐고, 그 소리는 아군에게 사기를 불어넣음과 동시에 적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황제는 테라스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자신의 병력이 무너질 때마다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더 가까이 오라. 어리석은 희망에 기대는 자들아. 너희가 지금 품은 희망만큼 내가 절망을 주리니.”




“시체들이 다시 일어선다!”


이번에는 전보다 상황이 심각해졌다. 오르크와 요정, 왕국과 소넷, 그리고 전설의 군대들 사이의 모든 사상자까지 그들의 적으로 돌변한 것이다.


“망설이지 말고 싸워라! 이미 영혼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윌리엄이 병사들에게 말하며 가장 먼저 달려가 죽은 동료의 목을 잘라버렸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도 이를 악물고 방금 전까지 함께 싸우던 전우를 죽였다. 그 지겨운 악몽은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적의 투석기에 의해 계속해서 시체들이 만들어 졌고 팔 다리가 날아간 시체들은 다시 일어나 표정 없는 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모틀렌호우스!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우렁찬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에 떠밀린 듯 죽은 자들의 몸이 하늘로 솟으며 날아갔다. 공중으로 그들이 날아갈 때 그들 등 뒤로 검은 무언가가 날려가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병사들이 소리가 나는 곳을 찾자 그 자리에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 낡은 회색 망토를 두른 백발의 늙은이가 말 위에서 지팡이를 들고 죽은 자들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놀란 병사하나가 그에게 물었다.


“지금은 대답할 시간이 없소! 싸우는데 집중하시오!”


그러나 대답은 그의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는 혼자가 아닌 듯 했다. 어디서 나타난 무리인지 그와 같은 차림을 한 노인과 중년 무리들이 지팡이에서 이상한 빛을 내며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무리 중 유일하게 깨끗한 푸른 망토를 두른 젊은이가 보였다. 그를 알아본 병사들은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대사제님!”


이든이었다. 그가 몬논의 사제들을 이끌고 온 것이었다. 이든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선봉의 지휘관들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달려가는 길에 만나는 적들에게 그는 아무런 주문도 없이 지팡이를 겨누었을 뿐인데도 푸른빛이 번쩍이며 죽은 자들의 몸이 해방되었다. 그의 지팡이가 향하는 곳에서 코앞의 적 뿐 아니라 살아있는 병사들 사이사이에서 검을 휘두르는 죽은 자들 까지 한꺼번에 쓰러져 버렸다.


“윌리엄!”


그의 눈에 온 얼굴에 피를 묻히며 싸우는 윌리엄이 보였다. 이든이 지팡이를 겨누자 그의 곁으로 달려들던 시체와 그 주변의 시체들이 반대편으로 날려졌다. 윌리엄은 날아가는 시체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신비한 힘’으로 자신을 도운 사람을 알아보고 곁으로 다가갔다.


“대사제님, 무사하셨군요! 저들은 누구입니까? 무슨 힘으로 싸우고 있는 겁니까?”


“북부 몬논에서 온 승려들입니다. 저들은 고대의 마법을 전수받은 자들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놀라고 있어요.”


마법이라는 말에 윌리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을 보며 감탄할 시간은 없었다. 성 밖의 적들의 수만 하더라도 그들을 몇 배나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몬논의 수도사들은 지팡이로 희고 푸른빛들을 번쩍거리며 일어서는 시체들을 쉬지 않고 쓰러뜨리고 있었다.


“우리조차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하는 자들이 있을 줄이야.”


글리먼 역시 그들이 하는 놀라운 일을 보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요정의 진영에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요정들도 전보다 마음 편히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성벽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투석기들은 서로 먼 거리의 적을 맞추느라 돌의 대부분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기 때문에 아직도 힘겨루기를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투석기의 돌이 아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적 궁수들의 사정권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벽 위의 궁수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어 장전을 시작했다.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글리먼이었다.


“우투힐 라 로온!(성벽 위다!)”


글리먼은 검 끝으로 성벽 위를 가리켰다. 요정 궁수들 역시 오랜 세월을 살아온 탓에 동이족에 필적할 만한 활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활 역시 그들 숲에서 나오는 특별한 나무로 만든 것이어서 다른 종족이 쓰는 어떠한 활보다도 탄력이 있었다. 글리먼의 명령을 듣자마자 그들은 한 몸처럼 방향을 틀어 활을 들었다.


“퓌이-르!(쏴라-!)”


궁수들은 일제히 화살을 놓았다. 사정권 밖에서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당황한 나머지 공격당한 궁수들은 대부분 성벽 뒤로 숨지 못하고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레에 콘 호엔 퓌흐!(다음 사격을 준비하라!)”


요정들은 명령에 따라 즉각 움직이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들은 톱니바퀴에 맞춰 돌아가는 기계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젊은 사제 한 사람이 그들 앞으로 달려왔다.


로에르 뷔리힌느 세이힐!


사제는 큰 소리로 고대의 말을 하며 지팡이로 그들의 화살촉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자 그의 지팡이가 뿜는 흰 빛이 그들 화살촉으로 번져나갔다.


“성벽 위로 쏘시오! 그들이 숨어 있을 위치로!”


마지막 궁수가 있는 곳까지 쉬지 않고 달린 후 사제가 외쳤다. 글리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명령을 내렸다.


“퓌이르!”


화살들은 유성처럼 흰 빛의 꼬리를 달고 날아갔다. 화살들이 성 벽에 닿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볍고 연약한 그들의 화살이 성벽의 보호벽을 뚫어 앉아있는 적들을 명중시킨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던 다른 동맹군들은 갑자기 서쪽의 성벽에서 바스라진 조각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 동쪽에서는 전설의 병사들이 성벽 위의 궁수들을 쏘아 죽이고 있었다.


“요정들의 재주도 무시할 것이 못되는군.”


하딘이 말했다. 성벽 위를 보던 그의 시선에 무언가 기분 나쁜 빛이 보였다. 다마하스 왕궁 가장 높은 층에서 황제의 지팡이가 방금 전까지와는 격이 다른 음산한 빛을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 경계의 땅이 불그스름하게 빛나더니 그 빛이 점점 더 강렬해져갔다.


“저 위에서 누군가 끔찍한 것들을 세상으로 꺼내려 하고 있소.”


수도원장이 이든을 보며 말했다. 꼭대기 층의 검은 빛은 점점 더 맹렬히 불타고 있었다.


“막을 방법이 있습니까?”


이든이 왕궁과 그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수도원장은 말에서 내리더니 앞으로 달려가 지팡이를 꽉 잡고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는 고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고대에 한 곳에 살았던 ‘인간들’의 언어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마치 어떤 거대한 존재의 목소리처럼 하늘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의 지팡이의 빛도 점점 더 커져갔다.




“귀찮은...”


황제는 소리를 질러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병사들은 투석기를 향해 그 명령을 전달했다. 지상의 투석기와 싸우던 제국 투석기의 방향이 수도원장과 이든이 있는 곳으로 서서히 옮겨졌다. 줄이 풀어져 채찍질 하듯 휘날리는 소리가 난 후 거대한 돌덩이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이 있는 곳을 벗어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수도원장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그의 주문 탓인지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빛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이든은 소리를 질러 아군 투석기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대체 어느 투석기에서 돌을 날려 보낸 것인지 정확히 알아낼 겨를이 없었다.


다시 두 번째 공격이 준비되고 있었다. 제국 병사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각이진 돌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돌이 그들에게 조금 못 미치는 거리에 떨어졌으나 바닥에 끌리며 빠른 속도로 미끄러졌다. 결국 거대한 돌덩이는 주문을 외우고 있던 수도원장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지팡이가 충격을 받아 먼저 꺾여버렸고 그대로 돌에 받힌 수도원장은 뒤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팔이 부러진 것인지 그는 양 팔을 몸에 모으고 고통스러워했다. 이든은 곧장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않되...!”


수도원장은 마법이 실패한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하며 자신을 질책했다. 그는 그 붉은 빛줄기 안에서 무엇이 나타날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곧 싸우고 있는 병사들의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빛을 뿜어내더니 그곳에서는 악몽에서나 만났던 끔찍한 괴물이 튀어나왔다. 붉은 눈에 고양이처럼 찢어진 동공, 하늘을 찢는 듯 끔찍한 소리를 지르는 목, 거대한 개와 같은 모습을 한 몸은 불에 탄 듯 새카만 모습이었다. 머리는 마치 악어처럼 생겼고 그 비늘은 인간의 검이 통하지 않을 만큼 단단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지옥의 파수견, 죽기 전에 먼저 이들을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태지!”


황제는 지팡이의 빛만큼이나 음산하게 웃으며 아수라장이 되어가는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리의 희망으로 가득했던 다마하스 외곽은 갑작스런 괴물의 출연에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어가고 있었다.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치다 쓰러졌고 그들 위로 무시무시한 이빨이 덮어졌다. 몇몇 용감한 병사들이 동료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을 내리친 검은 부러지거나 찌그러져 쓸 수 없게 되었고 이빨에 직접 물리지 않아도 그들이 머리를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의 갑옷은 찌그러져버렸다. 게다가 그들은 황제가 가진 지팡이의 힘으로 나왔으나 그들 자체가 지옥에서 살아나온 실체였기 때문에 몬논 승려들의 마법도 듣지를 않았다. 앞으로 다가섰던 승려들의 지팡이는 그들이 휘두르는 꼬리에 맞아 부러졌다.


“입성이 코앞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카무가 말했다. 수린도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다. 그 두 사람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루콘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괴물들의 무시무시한 힘 앞에서는 북방의 오르크들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끝없이 전진을 이어가던 왕국의 세력들이 순식간에 뒤로 도망치고 있었다.


“일단 물러서야 합니다!”


카무가 수린에게 말했다.


“안 되오!” 루콘이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물러선다고 해도 다시 공격할 기회는 오지 않소! 어떻게든 지금 뚫고 들어가야 해!”


“무모하오!”


수린이 무작정 달리려 하는 루콘을 막아서며 말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커다란 그늘이 지더니 괴물 한 마리가 그들을 덮쳤다. 두 사람은 말과 함께 날려가 쓰러졌고 한 사람만이 괴물의 발밑에 깔려버렸다. 루콘이었다. 괴물의 입에서 역겨운 끈적이는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콘!”


수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들고 달려갔으나 긴 채찍 같은 꼬리에 맞고 튕겨나가 쓰러졌다.


“대장님!”


카무가 수린을 보며 소리쳤다. 절망은 극에 치닫고 있었다. 괴물이 앞발의 발톱을 세워 루콘을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감한 동이족의 무사들도 그 광경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루콘 역시 최후의 순간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가슴이 깔려있어 호흡하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의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괴물의 발톱이 최고점에 올라간 순간, 무언가 다른 거대한 물체에 부딪혀 튕겨나간 것이었다. 거대한 물체에 깔린 괴물은 네 발을 공중으로 휘두르며 발버둥 치고 있었으나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루콘은 그 거대한 물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헤라들링의 수호자!”


거대한 물체는 호랑이였다. 그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괴물을 노려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미간의 거대한 흉터는 그가 전날 루콘의 목숨을 구했던 그 호랑이임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앞발로 괴물의 머리를 내리치더니 날카로운 이빨로 목을 물어뜯었다. 거칠게 머리를 흔들자 괴물의 비명이 끊어지며 살점이 떨어져 나왔다. 움푹 파인 목에서는 피가 튀었다.




크어엉-




그는 하늘을 향해 우렁찬 소리로 울었다.


“동쪽을 보십시오! 산의 호랑이들이 우리를 도우러 왔습니다!”


무사 한 사람이 감격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검은 줄무늬를 가진 황색의 무리들이 언덕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괴물들을 무자비하게 물어뜯는 그들을 보고 병사들은 잠시 경직되어 있었으나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알고 서서히 그들이 아군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


제스는 드디어 동이족에 얽힌 시의 빠진 부분을 찾아내었다.




햇빛을 받으면 금빛으로 빛나는 군대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거대한 짐승을 부리는 도다


 승리의 함성이 그 뒤를 따르노니


 세발달린 까마귀가 하늘을 날리라




그는 다시 시를 읊는 동안에도 호랑이들은 쉼 없이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병사들의 눈에 비친 그 싸움은 너무도 압도적인 호랑이들의 무대였다. 크기는 지옥에서 온 그것들보다 조금 작았으나 성난 포효는 오히려 괴물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호랑이의 무리들은 어느새 성 외곽을 완전히 둘러싸버렸다. 그들을 죽이기 위해 적의 궁수들이 하나 둘 머리를 내밀 때 동이족의 화살이 성벽위로 날아갔다. 재역전의 기회가 찾아온 것을 직감한 왕국의 세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시 다마하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성 외곽의 진영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난전이 일어났다. 이미 적군과 아군들 사이에 경계는 없었고 수많은 병사들이 뒤섞여 싸우고 있었다. 결국 소넷의 사다리들이 성 벽에 닿았고 사다리에 익숙한 소넷 병사들부터 그것을 타고 성 벽으로 올랐다. 아직도 벽 위에는 적들이 있었고 그들의 발길질에 떨어지는 이도 있었으나 아래쪽에서 사다리를 오르던 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오히려 분노에 불타오를 뿐이었다. 소넷의 병사들이 뒤쪽에서 성문을 열자 병사들이 물밀듯 도시로 들어왔다.


동이족은 루콘을 둘러싸고 달렸다. 그들은 적군이 루콘을 알아보고 공격하기도 전에 활을 쏘고 검을 휘둘러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렇게 왕국군은 순식간에 도시의 1층을 되찾았다. 그러나 다음 층계로 가는 길목마다 배치된 창병과 궁수들은 그들의 전진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길고 위협적인 창 앞에서 오르크들도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루콘은 동이족 병사들과 함께 단독적인 행동을 하기로 했다. 위로 올라가는 길목은 일곱, 다섯, 넷으로 위층으로 갈수록 그 수가 적었다. 기사들이 한 방향으로 몰려 그곳에 압박을 가하면 루콘이 반대편으로 향함을 알면서도 그곳을 막아내기 위해 일부 병력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군은 루콘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의 병력을 두고 이동했으나 전설의 군대는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코앞에서 날아오는 화살까지 검으로 막아내는 그들의 무예는 적이 가진 창의 길이를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심지어 말을 탄 채로 달려들어서도 계단 위에서 내려오는 창들을 뚫고 들어가 적들을 괴멸시켰던 것이다. 맨 앞의 무사 한둘이 길을 터놓으면 따라 올라간 나머지 병력이 위층의 길을 막는 자들을 죽여 없앴다. 루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2층에 배치된 투석기와 그 조종자들을 해치워버렸다. 다른 병사들을 죽이는 것은 뒷전이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하나, 루콘을 4층의 왕궁으로 들여보내는 일이었다. 그들이 싸움을 피해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찾기 시작할 때쯤에는 요정과 소넷의 병사들이 이미 2층에 올라와 있었고 오르크 전사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또다시 루콘이 달려간 곳의 반대편을 공격했다. 도시의 가장 넓은 층인 3층에서는 난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루콘은 이미 4층으로 올라가 왕궁에 들어가는데 성공했고 동이족은 네 개의 길목을 가로막아 아무도 그를 방해하러 가지 못하게 저지할 뿐이었다.


루콘은 왕궁 1층의 홀에 숀을 홀로 남겨두고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제국의 황제가 그들을 바라보던 테라스는 왕좌가 있는 왕의 방이자 기사들이 왕을 알현하는 왕실, 이른바 ‘영광의 방’이었다. 롬벌트가 죽은 곳이 바로 그곳이며 성검 듀나림이 보관되고 있는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왕궁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루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를 막는 어떠한 것도 없었고 루콘은 원하는 길을 따라 복도를 달리고 계단을 오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껏 왕궁을 드나들며 한 번도 이렇게 빠르게 꼭대기 층에 닿은 적이 없었다. 영광의 방은 궁의 5층에 있었다.


그가 5층에 올라와 복도를 달려왔을 때 왕실의 문은 너무도 활짝 열려있었다. 병력으로 아무리 우세했다지만 이토록 무방비라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밖에서는 병사들이 목숨을 걸어 길을 사수하고 있었고 루콘에게 망설이거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곧장 영광의 방으로 들어섰다. 멀리 왕좌가 보이고 그 왼편의 테라스에서 지팡이를 든 황제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아직도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끝났다, 바스의 황제여! 지팡이를 놓으라!”


루콘은 검으로 황제를 겨누었다. 그러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루콘은 그의 곁으로 한발자국씩 다가갔다. 황제는 여전히 전장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버리고 투항하라!”


거리는 서서히 좁혀졌다. 루콘은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그의 검이 황제의 등에 닿기 직전, 황제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지팡이를 루콘을 향해 겨누었다. 루콘은 지팡이가 내뿜는 힘에 떠밀려 벽으로 날려갔다. 마치 거대한 바람을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듀나림이 놓인 벽난로의 돌로 된 화구 옆에 부딪힌 그는 너무도 큰 충격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루콘의 검은 그가 날아 갈 때 부러져버렸다.


“네놈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더러운 잡종.”


황제는 지팡이로 그를 겨누며 앞으로 다가왔다. 지팡이가 가까이 올수록 루콘은 숨이 막혀왔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 가르투스는 참으로 정신이 나간 자야. 자신의 정실 혈통을 두고 너 따위를 왕위에 앉히다니. 왕국이 풍비박살이 나는 것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지. 그래도 저토록 많은 군사를 일으키다니, 그것만큼은 인정한다. 허나, 네놈도 내 손에 죽은 네놈 나라의 원수만큼 내 손에 잘 놀아난 것뿐이다.”


황제의 뜻 모를 웃음을 보며 루콘은 식은땀이 흘렀다. 놀아나다니, 무슨 소리인가? 지금까지 자신의 노력이 모두 그의 계획하게 있었다는 뜻일까? 루콘은 무슨 이야기인지 두려우면서도 그 진실이 궁금해졌다.


“그래, 알고 싶겠군. 이미 네놈이 요정과 오르크, 헤라들링의 전설들을 찾아가기 전부터 엘두르 왕국의 주둔지를 중심으로 내 동맹국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언제든 네놈들을 공격할 수 있도록. 허나 나는 그대로 두었지. 네 군대를 일일이 찾는 것 보다 이곳에 모아 모조리 죽이는 길이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자 또다시 의문점이 생겨났다. 대체 어떻게 황제가 자신이 불러온 원군의 정체를 모조리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네놈은 내 지팡이의 힘을 너무 우습게 알았어. 나는 이것으로 저 시체들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야. 이것은 천리안의 힘이 있다. 나도 그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지.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이곳을 빼앗은 지 1년도 안 되어 이미 왕국군을 몰살시켰을 것이다.”


황제는 마치 하나하나 비밀을 밝히는 것을 즐기는 듯 보였다.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인 그를 비웃는 듯 왼쪽 입 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으라고 했느냐? 내가 이 지팡이를 버린다면 이 왕국에 평화가 오리라고 생각했나? 안타깝지만 넌 틀렸어!”




“시체들이 일어난다! 주의하라!”


윌리엄이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쓰러졌던 아군과 적군의 시체들이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다. 글리먼은 눈앞에서 일어선 시체의 목을 찔렀다. 검이 뼈를 쑤시고 들어가는 감촉이 손으로 전해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체가 쓰러지지 않고 그의 검을 붙잡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목에서 쉬어터지고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세어 나왔다.




세이- 리- 크-(짜릿하군)




시체의 입은 금방이라도 귀에 걸릴 듯 소름끼치게 벌어져 스산한 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눈이 마주쳤을 때, 글리먼은 표정이 굳어버렸다. 눈동자 속에 가득한 어둠이 그를 공포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뒤로 물러서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시체의 부러진 칼끝이 그의 가슴을 파고든 것이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말에서 떨어져버렸다.


“리후인드 카르!(족장님을 구하라!)”


요정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이 검이 더 이상 시체의 목을 베지 못했던 것이다.




“지팡이의 힘으로 이끄는 시체들이 전부가 아니다. 저 아래에는 2천년전 구원전쟁을 주도했던 악마들이 시체를 입고 섞여있다. 내가 지팡이를 버리고 계약을 끝내버리는 순간 내 힘으로 부리던 시체들은 쓰러지더라도 그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신들의 힘을 마음대로 부리며 세상을 파괴할 것이다. 결국 네놈이 나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결코 네놈의 왕국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 천리안의 힘을 빌려주마. 네 꿈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확인 하거라.”


황제는 지팡이를 루콘의 얼굴 가까이 대었다. 그의 지팡이에서 세어 나오는 검은 기운 사이로 아래쪽의 상황에 보였다. 아래층의 도시들은 절망 그 자체였다. 갑자기 시체들에게 검이 들지 않자 당황한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허무하게 죽어갔다. 동이족과 요정, 오르크들도 갑자기 변해버린 적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헤라들링의 호랑이들도 앞발을 있는 힘껏 휘두르며 맞서고 있었으나 결국 쓰러지지 않는 적에 의해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절망을 바라보는 동안 지팡이의 기운은 점점 그의 숨통을 조여가고 있었다. 머릿속이 무겁고 정신이 희미해져 가던 중, 그의 기억 속에서 선왕의 말이 전해져왔다.






“듀나림은 고대어로 열쇠라는 뜻일세.”


루콘은 마치 겨울이었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따뜻한 벽난로의 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앞에 침상에 누워 있는 만하트는 말하는 것도 조금은 힘겨워보였다.


“지금부터 내가 자네에게 가르치는 말을 잊지 말게. 이 말은 우리 왕조에 대대로 전해오는 말이며... 이 말을 전해 받는 자는 곧 그 후계가 되는 것이야.”


“전하, 전...”


“알고 있네. 자네는 왕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그러나 후계자가 되지 않더라도 이 말을 반드시 기억하게. 죽음을 앞둔 노인의 간절한 부탁일세.”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그는 루콘에게 유언처럼 그 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후계자로 지목한 기사가 언젠가 왕국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듀브... 토 피닝...(때가 왔노라)


루콘은 반쯤 풀린 눈으로 간신히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황제의 눈에는 단지 그가 미쳐 중얼거리는 듯 보였다. 그때, 루콘의 오른 편 화구에서 쇠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듀나림이 푸른빛을 뿜어내며 진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만하던 황제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스쳤다. 녹슨 골동품처럼 보였던 듀나림이 고대 전설의 이야기처럼 희망의 빛을 뿜고 있었던 것이다.








지팡이를 하늘을 향해 올려라




이든은 깜짝 놀랐다. 사방이 비명소리로 시끄러운 가운데 분명하게 동굴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가 망설이고 있을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믿으라




이든은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아 하늘을 향하게 했다.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갑자기 부풀어지듯 커지더니 강렬한 빛을 내는 하나의 구체가 되었다. 시체를 뒤집어 쓴 악마들도 그것을 보더니 흠칫 놀라며 공격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것은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테라스를 통해 왕실로 들어갔다. 구체는 황제의 몸을 통과해 루콘과 황제의 사이에서 멈추었다. 황제는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루콘!”


소넷의 성벽에서 기도를 하던 레앙은 이상한 느낌을 받고 다마하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 뿐 아니라 보호를 받고 있던 왕국의 백성들도 심상치 않은 느낌에 성벽으로 올라서 다마하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트 듀릿... 부티일...(문이 열릴지니)


듀나림은 스스로 공중으로 뜨더니 구체 속으로 들어갔다.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잡종!”


핀노움, 템파라!(오라, 심판의 군대여)


그의 말이 끝나자 구체에서 엄청난 빛이 테라스를 향해 뿜어졌다. 너무나 강렬한 빛이었다. 대륙의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도 산에 가리지만 않았다면 볼 수 있을 만큼 강렬했다. 황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빛에 떠밀려 테라스 바깥으로 튕겨지더니 아래로 떨어져버렸고 그의 지팡이는 공중에서 완전히 분해되어버렸다. 아래쪽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병사들도 그 빛을 보고 놀라 뒤로 물러섰다. 빛은 이내 물 흐르듯 성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더니 전장을 삼키듯 뒤덮어 버렸다. 병사들은 곧 그 속에서 말발굽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시력이 돌아왔을 때 그들 눈에는 말을 타고 싸우는 기사의 형상을 한 빛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이 검과 창을 휘두르자 시체들은 쓰러지고 그 안에서 추악한 모습을 한 악마들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와 하늘로 날려갔다. 빛의 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순식간에 악마들을 지옥으로 돌려보내버린 뒤 조용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뒤의 고요함은 형용할 수 없었다. 마치 그들이 사라질 때 소리를 훔쳐간 듯한 고요함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병사들은 좌우를 살피었다. 더 이상 그들에게 대적하는 죽은 시체는 없었다.




“카르!(족장님!)”


요정 병사들이 하나 둘 글리먼이 쓰러진 자리로 모여들자 병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들은 숨죽여 요정들을 바라보며 애도를 표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정들은 환호를 터트렸다. 글리먼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부러진 칼끝이 파고든 자리에는 레우밀이 있었고, 그의 심장을 대신하여 레우밀이 부서지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가슴 속에 손을 넣어 부서진 조각을 꺼냈다. 레우밀은 부스러진 곳 없이 너무도 깨끗하게 갈라져있었다.




닐 엘로 티흐(아직 때가 아니에요)




“이실린...?”


글리먼은 슬픈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투항하겠소!” 제국의 지휘관이 외쳤다. “황제도 죽었고, 지팡이의 힘도 사라졌소.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전쟁입니다. 투항하겠소!”


“그 말은...”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부상을 입은 것인지 왼쪽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우리가 승리했다는 뜻이지!”


퀀투스가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도 그제야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소넷과 그들의 동맹, 왕국의 기사들과 각 종족의 병사들이 기쁜 얼굴로 뒤엉켜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힘이 다 풀려버린 것인지 어떤 이들은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곧 이어 왕궁의 테라스로 루콘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콘 왕, 만세!”


기사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여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오르크들은 루콘을 바라보며 특유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계시오.”


고조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듯 누군가 갑작스레 엉뚱한 소리를 내었다. 소리를 지르던 기사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수린이었다. 다른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그는 테라스의 루콘만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이족의 눈에는 우리 왕의 표정이 보이시오?”


제스가 물었다.


“뚜렷이 보이오. 그는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소. 슬픈 얼굴이오.”


그의 말에 병사들이 의아해 할 때 글리먼이 앞으로 나왔다.


“만하트가 진정 훌륭한 후계자를 찾은 것 같군. 당신들의 왕은 성군이 될 자질을 갖추었소. 보시오. 모두가 승리에 취해있을 때 그는 죽어간 자들을 위해 울고 있지 않소.”


글리먼의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루콘은 듀나림을 바닥에 세워 양 손으로 잡고 무릎을 꿇었다. 함께했던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엘루드에서 행해지는 의식이었다. 병사들이 하나 둘 무릎을 꿇고 죽어간 자들을 위해 묵념하기 시작했다. 말에 탄 병사들도 자리에 내려와 검을 바닥에 꽂았다.


“죽은 우리 기사들을 보십시오.”


윌리엄이 말했다.


“아무도 검을 놓지 않았어.”


퀀투스도 시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스도 주변을 살폈다. 그와 함께 전쟁터로 나온 기사들은 누구도 검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명령이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하여 죽는 순간까지 그 누구도 검을 놓지 말라!’




노장의 눈에서 왈칵 하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와 두 제자도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쟁터에 승자는 없다. 단지 안타까운 목숨들이 사라질 뿐. 그것이 대전사 코란의 마지막 가르침, 우리가 참전을 거부했던 궁극의 이유요.”


하딘은 도끼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북방에서 온 모든 오르크들도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그렇게, 장엄했던 전투는 너무도 고요하게 끝을 맺고 있었다.








3개월이 흘렀다. 루콘은 바스와 그 동맹국들에 대하여 너그러이 자비를 배풀었고, 탈영병들을 이끌고 온 란시스는 다시 황실기사로 복직하여 루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가 이끌어온 병사들도 다시 왕국의 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제스는 요한에게 직위를 넘겨주고 고향으로 돌아가 시골의 검술사범이 되었다. 요한의 흑기사 부대에 백인들이 섞여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곧 윌리엄과 퀀투스의 부대에도 엘먼과 흑인들이 섞여들었다. 서쪽의 요정들과 북방의 오르크들은 ‘모든 인간’에 대하여 자신들의 영토를 통행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소넷의 힐로손 왕은 세상을 떠났고 큰아들 할림이 왕위에 올랐다. 동이족은 호랑이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헤라들링의 북서쪽에 터를 잡아 나라를 세웠다. 대륙은 그렇게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얼마 후,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오랜 세월 사라져있었던 다스평원의 대 축제가 다시 열린 것이다.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였던 다마하스의 앞뜰에서 이제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시 이렇게 시끌벅적한 곳을 함께 거닐게 될 줄은 몰랐어요.”


루콘이 말했다.


“나도 지금이 꿈만 같아요.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전쟁터의 모습을 잊을 수는 없겠죠. 모든 것이 너무나 변해버렸어요.”


레앙이 슬픈 얼굴로 말했다.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레앙.”


루콘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난 아직 당신의 기사에요.”


루콘은 레앙의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런 세상에, 우리 고모님이 따로 없군.”


퀀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몬논에서 온 수도원장이 요정들의 악기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너무도 끔찍했던 것이다. 가끔 그가 높은 소리를 낼 때마다 요정 음악가마저 얼굴을 찌푸렸다. 맨 앞줄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차마 대놓고 표정을 일그러뜨릴 수 없어 점점 더 이상한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자네 고모님이 훨씬 잘 부르셔.”


요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대편에서는 이든과 몬논의 사제 한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 항상 이걸 지니고 다녀요. 머리가 아픈 날 원장님 찬양을 들으면 아주 힘들거든요.”


사제는 옷 속에서 귀마개를 몇 개씩이나 꺼냈다.


“몇 십 년이나 수도원을 이끌던 분이 저렇게 노래를 못하시다니, 엘리힘은 참...”


“알 수 없는 분이죠.”


이든은 재빨리 귀마개를 나눠 받고 귀에 꽂았다. 그 옆에 서있던 지라는 이미 한참 전부터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축제의 한 자리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별 볼일 없는 키 작은 엘먼 노인 곁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던 것이다. 하나 둘 모인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용감한 아이였어. 그래서 내 속을 참 많이도 썩였지. 한 번은 말이야...”


노인은 얀이었다. 사람들은 루콘의 어릴적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오르크들은 다른 족속들이 걱정한 것과 달리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무기를 들지 않은 그들은 오히려 요정들보다 아이들에게 상냥했고 너무나 잘 놀아주었던 것이다. 양 팔에 아이들을 여덟 명씩 걸고 다니는가 하면 목마를 태워 더 높은 곳에서 구경거리들을 보게 돕기도 했다.


“블룬 아이들은 원래 이렇게 가볍나? 뭘 좀 먹여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군.”


템푸스가 걱정스러운 듯 수염을 쓰다듬자 하딘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팔짱을 끼었다. 그러나 쉴 틈이 없었다. 계속해서 조그만 아이들이 그에게 달라붙었던 것이다.




와아-


벌써 몇 번째 함성이 터졌다. 머리가 하나 작은 오르크 소년에게 팔씨름으로 덤벼들었던 할림과 하람, 하로 형제가 전멸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소년을 보며 환호하면서도 세 형제가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며 박장대소했다. 웃는 사람들 사이에는 소넷의 병사들도 섞여있었다. 할림은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정말이지 괴력이로군. 이보시오, 윌리엄! 당신도 해보는 게 어떻소?”


하로가 아픈 손목을 흔들며 외쳤다.


“나쁠 것 없죠. 같이 가세, 란시스.”


윌리엄이 신이 나서 뛰어갔다.


“기다려, 난 팔씨름에는 자신 없다고!”


란시스도 허둥지둥 뒤를 따라 뛰어갔다.




“여자들 마음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남편인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내 아내는 요정 남자를 보느라 정신이 없어요. 저것 좀 보십시오.”


카무가 손가락으로 자기 아내를 가리켜 보였다. 잘생긴 요정 청년들을 여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렇게 얌전하던 우리 대장이 체통머리 없이 요정 여자에게 정신이 나가있다는 겁니다. 저기에요.”


그가 다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수린이 요정 처녀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제 될 것도 없지 않은가. 자네들 대장은 총각이라면서?”


제스가 말했다. 그러나 제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카무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제스가 말하는 동안 아름다운 요정 여인 하나가 그들을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먼 언덕에서는 글리먼이 축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실린. 언젠가 내가 당신 곁으로 갔을 때 그곳에도 이런 축제가 있다면 좋겠구려.”


글리먼은 부서진 레우밀을 헝겊에 쌓아 소중히 쥐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몇 해 전에 요정들의 영토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아쉽게도 글리먼은 그곳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방문하기 바로 5개월 전에 그가 죽었다는 것이다. 요정들은 본래 무한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때가 되면 의식을 거쳐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대게 요정들이 죽음을 택할 때는 삶의 허무를 노래하며 무표정하게 떠난다고 하는데, 글리먼을 섬겼던 요정 헤논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그들과 너무나 달랐다고 한다. 그는 ‘행복한 삶 이었다’라는 말과 함께 눈물 한 방울을 남긴 뒤 새벽 별빛으로 사라졌다. 헤논은 아마도 그가 연인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루콘 왕이 선포한 대로 정말 이 세상에 영원히 평화가 지속될까? 글쎄, 그것은 영원히 살지 않는 한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에이투리스 왕조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400여년은 아무런 작은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인간족속은 하나가 되었으며 오르크 태생인 내가 엘두르 왕국에서 30년간이나 블룬 청년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나 누구도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가끔 젊은 요정들이 나에게 배움을 청하러 오기도 한다. 이제 피부색과 외형은 인간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지 못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평화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 엘두르 왕국과 민족에 얽힌 이야기 -


에이투리스력 413년 8월 17일


고든 티브슨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