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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SF 범인류법안(汎人類法案)

2007.08.16 23:57

갈가마스터 조회 수:1178 추천:3

extra_vars1 chapter1.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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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



  미터기의 시끄러운 소리가 모기소리처럼 귓가에 메아리쳤다. 실핏줄이라도 터진 걸까? 붉게 점멸된 시야 사이로 다급하게 돌아다니는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보였다. 백열전등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백의의 천사들, 저들이 바쁘게 움직인다는 건 환자의 생명이 그야말로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것은 내가 될 수도 있었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는 것은 내가 될 수도 있었고, 혹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신의 장난, 교차되는 운명의 장난이었다. 모든 것을 얻은 듯한 기쁨과 모든 것을 잃는 슬픔이 이 한 순간의 장난으로 손바닥 뒤집듯이 결정되는 것이 인생이다.


  ‘선생님! 환자의 심장박동이 떨어지고 있어요!’


  ‘혈액이 부족합니다!’


  그들은 주사기 바늘과 제세동기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죽어가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 대한 보답도 없이 신은 인간의 편,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삐————————————



  신이 죽어가는 어린 양을 차갑게 외면하듯, 귀에 거슬리는 죽음의 소리가 미터기의 검은 화면을 쪽빛의 선으로 그어버리며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의사 하나가 다시금 제세동기에 전력을 최대로 올리며 파리하게 죽어가는 한 여인의 가슴에 심폐소생술을 가했다. 그러나 영혼이 떠난 여인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생전에 그렇게나 아름다웠던 그녀의 블론드 머릿결과 얼굴은, 아교처럼 말라붙은 핏자국 때문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핏물 섞인 감정의 정수가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었고 내 인생의 마지막 빛은 그렇게 서서히 소멸해갔다. 의사들에게 둘러싸여 보이지 않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데, 그 순간 시야가 점멸되며 시간이 멈춰버렸다. 내 시간도 이제 다 된 것일까. 심판의 나팔이 울리는 최후의 순간, 내 눈동자는 응급실 구석에서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한 노인을 망막에 담고 있었다.


 







 


 


 


汎人類法案 (The bill for the pan-human)



 


chapter 1 百日紅.


 


 


 


 






 


 


 『지난 12월 22일 13시 0분, UT(United Terra) 연방의회는 ‘범인류법안(汎人類法案, The bill for the pan-human)’을 통과시켰습니다.』


  ‘범인류법안?’


  다니엘 루벤하임은 아나운서가 입에 담은 생소한 말에, 아무 생각없이 TV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저녁놀이 이 회색도시를 누렇게 밝혀주는 시간,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집으로 가는 자기부상전차를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터였다. 퇴근길의 러시아워, 과연 지상으로부터 10m 가량 떨어진 전차플랫폼은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었다.


  그곳에 몰려 있던 다른 이들도 다니엘처럼 ‘범인류법안’이라는 생경하고 두려운 느낌의 단어가 궁금했는지, 일제히 숨을 죽이고 긴급뉴스가 방영되고 있는 대형 2D 홀로그램 영상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아크릴 벽 위로 약 2mm가량 떨어져 투영되고 있는 화면 안쪽엔, 예쁘장하게 생긴 아나운서가 마치 안드로이드처럼 무미건조한 어투로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이름이 아마 ‘메어리 그린웨이’였던가? 그는 분명 안드로이드(Android)이자 신문기자인 ‘브루스’와 결혼신고를 낸 것으로 최근에 유명한 여자였다. 얼마 전 한 토크 쇼에서 그린웨이 부부가—안드로이드는 성이 없기 때문에 여자인 메어리의 성을 따른 듯하다— 나왔었는데, 표정이라든지 말투라든지 모든 면에서 브루스라는 안드로이드 쪽이 더 인간 같아 피식 웃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 생각을 하는 통에, 문득 다니엘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브루스라는 로봇도 그렇고, 메어리란 인간도 그렇고,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행세를 하는 것이나, 로봇을 반려자로 삼은 그녀의 반인륜적인 행동거지에 관한 것이나, 그 모든 것이 그의 심기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저건 인류에 대한 배신행위요, 인간을 대지 위에 서게 한 조물주에 대한 조롱—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엔—이었다.


 『…현장에 나가 있는 더글라스 기자, 나와 주세요.』


  그 때, 기자를 부르는 메어리의 냉랭한 목소리와 함께 화면이 전환되며 UT 연방의사당 앞에 서 있는 기자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더글라스’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뒤—성이 없는 걸 보니 그는 안드로이드임에 분명했다—, 의사당 정문을 가리키며 현재의 상황에 대해 흥분조를 섞어 말했다. 화면에 비친 UT 연방 의사당은, 지금 각국에서 몰려든 외신기자들로 인해 다니엘이 서 있는 플랫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붐비고 있었다. 한 자라도 더 보도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는 그 진풍경을 바라보며 다니엘은 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현재 연방의사당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아직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 밝혀진 것은 없지만, 이 법안은 내일 이 시간까지 전 세계로 공식 전달될 것이며, 새로이 발족된 이 법안에 대해 각국의 사정에 맞게끔 자세한 내용과 적용범위를 조정한 뒤 공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로베르토 하버 의장께선 조만간 공식석상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하셨으며, 이 법이 인류를 위한 새로운 도약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한 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의사당을 떠났습니다.』


  다시 화면이 전환되며, 이번엔 투박한 얼굴에, 피부가 마치 진흙상처럼 말라비틀어진 늙은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볼 살이 축 늘어져 흡사 불독처럼 생긴 남자였는데, 그가 바로 ‘로베르토 하버’ 의장, UT라는 세계 연합체를 조종하는, 지구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검은 양복 차림의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여기저기서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의 공격에도 표정변화 하나 없이 전용벤츠를 향해 당당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굳세고 강해보이는 외견과 어딘지 모르게 오만해 보이는 푸른 눈빛은 그가 자가용의 뒷좌석에 몸을 싣는 그 순간까지도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인상 깊게 맺혔다.


  그 장면을 끝으로 더 이상의 정보는 없었는지 화면은 금새 메어리에게로 돌아왔다. 좀 더 자세한 사항은 9시 뉴스에서 밝히겠다는 그의 말과 함께 뉴스가 조금 전까지 방영하고 있던 시시껄렁한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어버리자, 사람들은 뉴스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일제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바로 직전까지 그들의 주의를 끌던 ‘범인류법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 떠들어대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인간들이 매사에 무기력해지고 세상일에 관해 무관심해진 것은.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의 자동화시스템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소위 3D업종이라 불리는 혐오업종에서 벗어나게 된 인간들은, 삶이 편안해지고 편리해질수록 주변을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자신에게 해만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는 개인주의, 이기주의, 편협한 사고. 인간들은 문명이 진화할수록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그들의 관심사가 있었다면, 그건 바로 자신들을 집으로 이끌어줄 전차뿐이었고 그것이 이 회색 도시의 일상이자 임팩트가 없는 무미건조한 삶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물론 그건 다니엘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처럼 아무런 두런거림도, 아무런 대화도, 아무런 행동도 없이 그곳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외톨이였다. 혼자라는 외로움, 독방에 홀로 갇혀있는 듯한 두려움. 아무리 인간이 우글거려도 이건 마치 무인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그것이 무섭고 슬퍼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벽으로 자신만의 보호막을 만들고, 그들의 유일한 보금자리 ‘집’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친인척은 물론 가까운 이웃과도 단절된 인간들의 삶은, 보금자리를 제외하고 그 어디에서도 행복하지 못했다.



  위이잉.



  귀에 거슬리는 모터음과 함께 문득 다니엘의 눈에 이제 막 휴지통을 비우는 청소로봇 하나가 들어왔다. 흡사 깡통처럼 생긴 그것은 문어발같은 손으로 휴지통을 들더니 뒤에 연결된 카트에 쓰레기를 우수수 쏟곤 금새 지정된 다음 코스를 따라 덜덜거리며 이동했다. 10년 이상이나 지난 퇴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은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조주인 인간에겐 없는 완벽함이 피조물인 로봇들에겐 있었다. 더욱이 로봇이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인간행세를 하며 돌아다니는 미친 세상이다. 이만한 부조리가 또 어디 있을까?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다니엘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하염없이 천장만 바라보았다. 돔 형태로 하늘을 감싼 플랫폼의 천장은, 아무런 여과 없이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여주고 있었다. 낮과 밤의 미묘한 경계, 빛과 어둠의 기묘한 앙상블. 그것은 현재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밤하늘처럼 로봇들이 인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이, 다니엘.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문득 오늘 벤자민 부장에게 꾸중들은 것이 생각나 다니엘의 인상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다니엘의 직장상사인 벤자민, 그는 무려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였다. 다니엘과 입사동기인 주제에 과장자리에 오르고, 게다가 근 5년 만에 부장자리까지 승급한 초엘리트에 놀라운 수완가. 늘 불만에 잠겨 있는 듯 화난표정인 그를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으드득 이가 갈렸다.


  “인간도 아니고 한낮 기계덩어리 주제에 감히….”


  그렇다. 벤자민은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였다. 그 점 때문에 다니엘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안드로이드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인간이신 자신에게 훈계를 놓다니!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망치를 들고 가서 회로로 가득할 녀석의 머리통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곧 가슴 속에서 불타오르는 화를 잠재우기 위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게 쌓인 모양이었다. 이럴 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라도 있었다면 훨씬 덜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의 나이 현재 40세, 대학 친구들은 진작에 연락이 끊긴지 오래였고, 그렇다고 직장 동료란 것들은 모두 ‘인간’이 아닌 ‘로봇’이었다. 아무런 뜨거움도 차가움도 없이 그저 조물주인 인간을 따라하는 역겨운 피조물들에게 우정도 사랑도 그 무엇도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런 의미에서 회사 동료들은 그에게 동료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하긴,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리라.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모든 것을 망쳐놓은 현대 사회에서 심장이 존재하는 인간이라고 쉽게 마음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었다. 이건 정말 슬픈 일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인간과 로봇의 차이란 무엇인가? 현대에 와서 인간의 겉모습과 창조성마저 획득한 안드로이드들 때문에 경계가 모호해지는가 싶더니 벤자민 녀석처럼 피조물주제에 창조주에게 소리치고 윽박지르는 하극상까지 벌어진다. 그래서 신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켰고, 바벨탑을 쌓던 인간들의 언어를 지금처럼 나눠버린 것일까? 그래서 홍수로 마음에 안 드는 세상을 휩쓸어버린 것일까? 인간이 신의 자리를 위협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다니엘은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찾아 신경질적으로 코트를 뒤적거렸다.


  “아, 맞다.”


  몸을 뒤지던 중 잊고 있던 게 떠올랐는지, 다니엘은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한숨을 늘어져라 내쉬었다. 그는 지친 얼굴로 저녁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에이린. 담배냄새를 싫어하지.”


  노을이 고층빌딩들에 가려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는 도시를 바라보며, 다니엘은 한층 부드러워진 얼굴로 한 여자를 떠올렸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에 사금처럼 반짝거리는 블론드 머리카락이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그녀. 그래, 그녀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주었을 때도 지금처럼 노을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빛이 환하게 번져오는 스카이라운지의 레스토랑에서 에이린은 다니엘이 내민 결혼반지를 받아주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에 젖어 울던 그의 아롱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니엘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니엘은 약지에 끼고 있는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황홀한 추억에 잠겨 노을을 바라보았다.


  ‘에이린 루벤하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지금 다니엘의 아내였다. 사막같은 인생에서 유일한 오아시스이자, 따스하고 아름다운 그만의 파라다이스. 게다가 그녀는 안드로이드의 거짓된 아름다움이 가득한 돼지우리 속에서 진주알처럼 곱디고운 ‘인간’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 기분. 그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안드로이드 놈들은 평생을 가더라도 이걸 알 수 없겠지. 차갑게 식어버린 강철심장이 이 뜨거움을 알 리 없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나무꾼처럼 거짓된 심장을 받고 좋아해본들 그건 가짜일 뿐 진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아,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오늘따라 더 피곤한 느낌이었다. 다니엘은 한시라도 빨리 에이린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가고 싶었다. 포근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사랑스러운 아내의 품속에서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아이처럼 잠에 들고 싶었다. 고독한 인생에 유일한 안식처이자 최후의 성지가 바로 거기였으니까.


  그 때 ‘따르릉’거리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열차가 들어선다는 걸 알리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잠시 후 OO행 501호 열차가 들어섭니다. 승객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시길 바랍니다. I repeat….』


  네 개 국어로 안내되는 방송을 듣고 사람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하자, 과연 ‘부우웅’하고 모터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원통형 튜브레일 저쪽에서 자기부상전차의 환한 불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니엘은 집에 갈 생각만 해도 좋은지 연신 실실거리며 코트깃을 여미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덜컹덜컹덜컹. 매끄러운 유선형 몸체에 미끄러지듯 플랫폼에 들어서는 회색의 전차. 그건 다니엘을 집으로 보내줄 천국행 열차였다.



.


.


.



  다니엘의 아파트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주택지에 있었다. 최소 50층이 넘는 고층아파트가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가려버리고, 나무 한그루 없는 칙칙한 아파트단지는 어둠이 짙게 깔려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초저녁의 어스름이 천지를 지배하는 그 어중간한 시간대는 가로등도 불을 켜지 않아 어둠이 극치에 오르는 시기였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져버리는데, 기계라는 놈들은 정말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기분 나쁜 것들이었다.


  “벤자민 그 녀석도 그렇고. 꼬장꼬장한 깡통자식 같으니.”


  최근 그를 제치고 과장자리로 올라간 안드로이드, 벤자민이 떠올랐는지 다니엘은 주먹을 불끈 쥐며 악의를 섞어 중얼거렸다. 안드로이드 특유의 완벽함을 자랑하는 그 녀석은 요새 다니엘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인 녀석이었다. 씩씩, 거칠어진 숨이 하얀 입김으로 변하여 대기중으로 점점이 흩어졌다. 숨을 골라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또다시 어슬렁어슬렁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입사동기랍시고 신경써주는데, 쓴소리 몇 번했다고 토라지면 그거야말로 ‘나 속 좁은 놈이요’하고 광고하는 꼴이 아닌가.


  “후우, 실수투성이 인간인 내가 참아야지.”


  다니엘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벤자민이 틀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휘휘 저어 질투섞인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 애썼다.


  그것과는 별개로 도심에서 멀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막히는 이 불쾌감은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아줌마, 하얀 입김을 후후 내뱉으며 조깅을 하는 노인에, 멍한 얼굴로 무선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 경비원까지, 여기서도 인간은 늘 혼자였다. 늘 혼자만의 작은 세계 속에 틀어박혀 자신 외엔 그 누구도 관심갖지 않는 답답한 모습이 인간들의 현주소였다.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없어 안드로이드를 반려자로 택하는 세상. 인간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오래 전에 본 영화처럼 결국 노예에 불과한 피조물들에게 먹히고 마는 것은 아닐까?


  “멍청이들.”


  다니엘은 냉소적인 태도로 코웃음치며 에이린이 기다리는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뜨거운 가슴마저 잃어버린다면 인간들은 정말 영장류의 자리에서 물러나야할 것이다. 인간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월한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


  “음?”


  단지내에 조성되어 있는 상가를 지나가던 중, 문득 그의 눈이 작은 꽃집에 머물렀다. 유리창 너머로 화사하게 피어있는 백일홍이 그의 시선을 못박아두고 있었다. 어느새 꽃집을 나서는 그의 두 손엔 풍성한 백일홍 꽃다발 하나가 들려있었다. 하고많은 꽃중에서 하필 백일홍을 고른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단지 점원이 백일홍을 가리키며 꺼낸 말에 혹했다고 할까?


  '백일홍의 꽃말은 '행복'이에요. 딱 지금의 손님 표정이 행복이란 단어에 어울리네요.'


  "행복, 행복이라."


  백일홍의 꽃말을 되새기는 그의 얼굴이 아련한 꽃향기와 행복감에 젖어 바보처럼 웃음짓고 있었다.



  그의 집은 아파트단지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초고층 빌딩들에 둘러싸인 이 숨막히는 도시에서 그나마 전망이 가장 좋았기에 선택한 자리였으며, 발코니에 나와 밖을 바라보면 비교적 낮은 빌딩들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도 있는 최고의 자리였다. 느긋하게 고속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그것은 다니엘을 40층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옮겨다주었다. 10초도 걸리지 않는 어마어마한 속도인데 가속도에 의한 중압감이 거의 없다니, 기술력의 진보란 그만큼 굉장한 것이었으며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하는 다니엘에게 있어서 그것은 문명의 이기이자 인류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과 진배없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기 집 현관 앞에 선 그는 꽃집에서 산 꽃다발을 뒤로 숨기며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벌써부터 꽃을 보고 기뻐할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니 가슴이 미어터질 듯 벅차올랐다. 가까스레 뛰는 심장을 가다듬은 그는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숫총각처럼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다니엘?”


  일초가 한 시간 같은 기나긴 침묵 뒤에 찾아온 에이린의 목소리는 마치 오아시스의 샘물처럼 그의 갈증을 단숨에 씻어주었다. 그는 말없이 도어폰의 렌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바보같이 웃어버렸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나갈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안에서 산사태 비슷한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곧이어 자동문이 옆으로 스르륵 열리며 흰색 에이프런을 걸치고 있는 에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을 위로 틀어올려 묶고 다소 당황한 듯 투명한 초록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있는 모습이 조금 전까지 뭔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녀가 문을 열어주는 순간, 다니엘은 숨겨두고 있던 꽃다발을 불쑥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영문을 몰라 눈만 꿈뻑거리자 다니엘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자, 받아 선물이야.”


  과연 그것 때문에 더 놀라고 쑥스러웠는지 에이린은 꽃다발의 메인플라워 백일홍만큼이나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수줍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숨을 들이켜 백일홍의 향기를 한껏 빨아들인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다니엘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다니엘.”


  “아니 감사인사가 그걸로 끝이야? 이거 실망인데.”


  다니엘이 짐짓 아쉽다는 듯 그녀를 향해 볼을 내밀자, 에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볼에 짧게 입맞춰주었다. 부드러운 감촉과 온기가 그의 볼을 타고 전해왔다. 그래, 이것이 인간이다. 이 찐한 감동과 두근거림이 인간의 존재 이유며,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가장 큰 은총이었다. 아직도 코끝을 아련하게 간질이는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다니엘은 기분 좋게 웃었다.


  “다녀왔어 에이린.”


  “어서와요 다니엘. 피곤하죠? 자, 어서 들어와요.”


  마치 연애하던 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다니엘은 시선을 어디다가 둬야 할지 막막해졌다.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며 그는 에이린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거실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잡지라든지, 신문지 같은 것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있고 박스 같은 것이 여기저기 꺼내진 모습이 이삿짐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게다가 뭔가에 걸려 쓰러졌는지, 공들여 쌓은 책의 탑이 옆으로 와르르 무너져 있었다. 산더미같은 책의 위로 도어폰이 보이는 걸로 보아, 조금 전의 소란스러운 소리는 이것이 넘어지는 소리였으리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다니엘은 난장판처럼 보이는 거실을 가리키며 에이린에게 물었다.


  “당신 설마 날 두고 어디 가려는 건 아니지?”


  “아니요. 잠시 기분 전환 겸 정리 좀 하려는 거예요. 후후, 제가 떠날까봐 두렵나보죠?”


  에이린은 부엌 쪽에서 꽃다발을 꽂아둘 병을 찾으며 대답했다. 찻장에서 금방 커다란 유리병 하나를 찾아낸 그녀는 병에 물을 담으며 이어 말했다.


  “걱정말아요. 질릴 때까지 곁에 있어줄테니까.”


  “그거 안심되네.”


  다니엘은 실없이 웃으며 화분에 꽃을 담는 에이린의 뒤로 다가갔다. 그는 뒤에서부터 조심스레 그녀의 허리를 휘어감고 아련한 꽃내음이 감도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그의 가슴과 에이린의 등에서부터 전달되는 심장소리가 두근두근, 은은한 하모니가 되어 피곤에 젖은 그의 심신을 달래주었다.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다정함, 따스함, 그리고 일체감. 아, 인간들의 삶이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해. 에이린.”


  “…저도요.”


  그들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공명하는 심장소리와 호흡소리만으로도 이미 거실은 봄의 기운으로 충만했으니까. 에이린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없이 백일홍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맞다. 그러고보니 내일이 우리 결혼기념일이지?”


  “아 맞아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내일이 결혼기념일인 걸 잊고 있었던 에이린은 놀란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런 걸 꼼꼼하게 챙기는 다니엘이 귀엽게 느껴졌는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짐짓 투정부리듯 이어 말했다.


  “아휴 정말, 남자면서 어떻게 나보다 더 꼼꼼한지 몰라.”


  “후후후 그것이 다 사랑받는 이유 아니겠어? 어쨌든 내일 시간 되지?”


  “저야 괜찮죠. 회사는 어때요?”


  기대 반, 걱정 반의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가 묻자, 다니엘이 악동처럼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고 답은 이미 나온 터였다.


  “걱정마, 그 꼬장꼬장한 벤자민 녀석이 특별히 일찍 보내준다고 했거든.”


  “어머? 당신 그거 혹시 벤자민이 가르쳐준 거 아니에요?”


  “어? 그, 그렇지 않아.”


  반은 사실이었다. 오늘만해도 내일이 결혼기념일이니까 일찍 보내달란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벤자민쪽에서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내주었던 것이다. 비록 겉모습은 험상궂지만 이런 쪽으로 꼼꼼한 것이 벤자민의 장점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고성능 안드로이드다 보니 직장동료들의 신상명세쯤은 전부 꿰차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벤자민이 까탈스럽게 굴어도 마냥 욕할 수 없는 게 다 이런 식으로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섞기 때문이었는데, 동기들 사이에선 벤자민이 사람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어쨌든 내일 시간 되지? 근사한 레스토랑에 이미 예약도 다 해놨으니 피할 생각은 하지마.”


  “하여간에 못말려 정말.”


  그들은 행복에 젖어 가볍게 입맞춤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면서 그들의 사랑은 선홍색의 백일홍처럼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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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컹덜컹덜컹!



  전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원통형 레일에 흐르는 전자기력으로 공중에 붕 뜬 채 가속도를 얻는 자기부상전차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그야말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플랫폼에 들어섰다. 이윽고 전차가 완전히 정차하고 도착지를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미닫이문이 열리자, 다니엘은 말없이 플랫폼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가 내려야 하는 그곳은 거의 종착역이나 다름없는 먼 곳이었기에 들어올 때 바글바글했던 인파는 어느새 두세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어 있었다.


  개찰구를 지나 역을 뒤로 한 채 거리로 나가려는데 문득 그의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하며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전자기레일이 발생시키는 전자기파가 통신을 방해하는 역을 나서자마자 징징 울려대는 것이 누군가가 급히 다니엘을 찾는 것 같았다.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는데 전화번호가 익숙지 않은 번호였다. 순간 받을까말까 고민한 다니엘은 핸드폰 옆에 꽂혀있는 작은 무선이어폰을 뽑아 귀에 꽂고 다소 신경질적인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니엘인가?』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다짜고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노인의 괄괄한 목소리가 어째 귀에 익었다.


  “그런데요. 실례지만 누구신지?”


  혹시나하는 심정에 심드렁하게 대꾸를 하긴 했지만. 아니나다를까, 그는 다니엘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날세, 테오도어 박사일세.』


  “아, 장인어른….”


  프로페서 테오도어 룩셈베르크. 로봇공학의 천재라고까지 추앙받으며 한 저명한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에이린의 아버지이자 다니엘의 장인어른이었다. 실례했다는 생각에 다니엘은 짐짓 반가운 어조로 그에게 인사했으나 테오도어 박사는 인사를 받아줄 시간도 없는 모양이었다. 뭔가에 쫓기듯 다급한 어조로 그가 다니엘의 인사말을 뚝 끊으며 말했다.


 『자네, 에이린을 사랑하는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것도 일 때문에 바쁘다며 딸애의 결혼식에도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사랑을 논해? 다니엘은 기분이 상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공격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적어도 장인어른보다는 많이 사랑한다고 자부하죠.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결혼식은커녕 5년 전 ‘그 일’이 터졌을 때도 코빼기 한번 비추지 않으신 분께서.”


  5년 전. ‘그 사건’을 얘기하는 다니엘의 안색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하마터면 다니엘과 에이린이 영영 이승을 떠날 뻔했던 교통사고. 그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을 때, 테오도어 박사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춘 적이 없었다. 그것이 한이 되어 맺혀있는 판국에 자신이 에이린을 사랑하냐고? 테오도어 박사는 얼마나 철면피였기에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일까. 정말 뻔뻔스럽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하긴, 내가 입에 담기에도 너무 뻔뻔하구만.』


  잠시 이어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지나 싶더니, 테오도어 박사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강한 어조로 바뀌었다. 작게 훌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소 울먹거리는 것이 울음을 억지로 참는 것 같았다.


 『자네, 지금 당장 에이린과 함께 떠나게.』


  “뭐, 뭐라구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해진 다니엘은 말까지 더듬거리며 이유를 물었으나 테오도어 박사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어. 이번 한 번만 날 믿어줄 순 없겠나? 자네가 진정 내 딸애를 사랑한다면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게나. 시간이 없어. 곧 ‘그들’이 찾아올게야. 한시라도 빨리 딸애를 데리고 어디론가 멀리 가주시게. 돈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 모든 재산을 자네 명의의 스위스 은행 계좌로 돌려놓았으니까. 어디라도 좋네. 무인도로 가든, 어디로 가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이면 돼. ‘범인류법안’이 발현되기 전에 어떻게든 딸애를 데리고… 뚜우——』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장인어른? 장인어른!”


  전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다니엘이 연이어 테오도어 박사를 호출했으나 전화가 끊겨있다는 말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 범인류법안? 대체 무슨 소리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의 막연한 불안감은 곧 집에 있을 에이린에게 돌아갔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녀가 위험한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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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이이익—!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술이라도 마신 듯 별안간 옆차선에서 끼어든 운전자 때문에 다니엘은 급히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이어진 건 옆에서 달리던 차량과의 충돌. 급브레이크를 밟고 상대차량의 옆구리를 강하게 들이박은 다니엘의 승용차는 운이 없게도 뒤쪽에서 미처 속력을 줄이지 못한 트럭에 차여 멀찌감치 날아가 버렸다. 발길에 채인 깡통처럼 우그러진 그들의 차가 크게 뒤집히며 도로에 내리꽂히자 다니엘은 그대로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의 마지막 시선은 피투성이가 된 에이린에게 꽂혀있었다.


  ‘에이린….’


  그것이 그들의 결혼기념일에 벌어진 사고였다.








  시끄러운 소리가 모기소리처럼 귓가에서 앵앵거린다. 핏줄이 터졌는지 붉게 점멸된 시야 사이로 얼룩조차없이 새하얀 천장과 백열 조명 아래 다급하게 돌아다니는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보였다. 조심스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주사기 바늘과 제세동기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삐이이 거리는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녹색의 선이 미터기의 검은 화면을 일직선으로 그어버렸다.


  그 순간 피가 섞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 에이린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데 그 순간 시야가 점멸되며 시간이 멈춰버렸다. 최후의 순간, 그의 눈동자는 응급실 구석에서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테오도어 박사를 망막에 담고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다니엘은 낯선 천장을 볼 수 있었다. 꿈속에서 본 것과 똑같은 천장과 쉴 새 없이 삑삑거리는 미터기가 그의 심장 박동에 따라 푸른 선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문득 갈증이 느껴진 그는, 흐릿한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며 습관적으로 ‘아내’를 찾았다.


  문득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져 다니엘은 느릿느릿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희뿌연 시야 사이로 백금같은 블론드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뒤이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자신을 바라보는 쪽빛의 눈동자가 보였다. 흡사 보석과도 비견될만큼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다니엘도 익히 알고 있는 여자였다.


  “에이린.”


  에이린, 나의 천사. 떨리는 음성으로 그녀가 다니엘을 향해 뭐라고 나지막이 속삭였으나 그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어 희미하게 웃어줄 뿐이었다. 곧이어 간호사와 의사가 다니엘의 상태를 보기위해 찾아왔고 그제야 다니엘은 자신이 의식을 잃은 채 근 삼 개월이 흘러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동운전로봇의 회로 이상으로 인해 사고가 벌어졌고, 심장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다니엘은 누군가가 기증한 심장덕분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고 했다.


  다니엘이 심장을 준 사람에 대해 물어봤으나, 의사들은 환자의 개인정보를 내줄 수 없다며 기계적인 대답만 할 뿐이었다. 하긴 그런 것을 알아서 어쩌겠다는 건가. 누군가 자신에게 심장을 내줬다는 얘기는 기증한 사람은 죽었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이미 죽은 그의 영정에 찾아가 고맙다고 눈물을 흘려도 당사자와 그의 가족들은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린을 돌아보았다. 어찌되었든 지금 다니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에이린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악몽을 꿨어. 끔찍한 악몽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뒤, 다니엘은 에이린이 깎아준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꿨던 ‘꿈’에 대해 얘기했다. 피투성이가 된 에이린의 모습과 창백한 얼굴로 구석에 서 있던 테오도어 박사, 그리고 그녀의 맥박이 완전히 정지해버리는 미터기의 끔찍한 소음에 관해 모든 것을 얘기했다. 에이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니엘을 바라보더니 그의 머리를 끌어안아주며 슬픈 미소로 답해주었다.


  “난 살아있어요 다니엘.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와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자, 그제야 다니엘의 마음에서 어두운 장막이 걷어졌다. 그는 그 순간 바보같이 엉엉 울어버렸다. 그녀를 잃을 뻔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이었고 도무지 씻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스며나오는 아련한 꽃향기가 회한으로 타들어가던 그의 상처를 아스라이 가려주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없는 그에게 있어서 에이린은 단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마음속의 지주이자 등불이었다. 적막에 잠긴 망망대해에서 그를 항구로 이끌어주는 단 하나의 등대였다. 그것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은 그의 인생에 단 하나뿐인 빛을 잃을 뻔했다는 걸 의미했다.



.


.


.



  “에이린!”


  다니엘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거칠게 열고 그녀를 찾았다. 자동문을 거의 억지로 열다시피 하며 거실로 들어선 그는, 곧 부엌에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에이린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을 갈고 있었는지 꽃병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은 물길에 젖어 있었고, 수분을 가득 머금은 백일홍다발은 주변을 장식한 안개꽃 사이에서 화사한 붉은 빛을 뽐내고 있었다.


  무사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다니엘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곧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곤 거실 소파에 힘겹게 몸을 뉘었는데,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에이린이 꽃병을 식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다니엘. 식은땀을 그렇게나 흘리고….”


  “아, 별 거 아냐.”


  ‘쓰잘데기 없는 노친내같으니.’ 다니엘은 속으로 테오도어 박사를 욕하며 손바닥으로 턱선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걷어내었다. 역에서부터 집까지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 그것도 한파가 몰아닥치는 초겨울에 땀이 셔츠를 적실 정도였다. 그는 두 번째로 한숨을 내쉬며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자네가 진정 내 딸애를 사랑한다면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게나.’



  테오도어 박사가 남긴 이 말이 계속해서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결혼기념일이 바로 내일인데 그딴 소리나 지껄이다니. 한 번도 테오도어 박사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던 다니엘로서는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할지 노망난 늙은이의 헛짓꺼리로 받아들여야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만약 그가 말한대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할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그 때, 에이린이 내민 물컵이 그의 시야를 가리며 불쑥 튀어나왔다.


  “자요, 여기 물.”


  “아… 고마워.”


  그녀의 자그마한 배려가 담긴 물컵을 받아들며 다니엘은 눈웃음으로 답례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가며 그의 갈증을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빈 컵을 아내에게 넘긴 다니엘은 두 번째로 고마움을 표한 뒤, 그제야 결심이 섰는지 아내를 향해 물었다.


  “여보, 우리 당분간 어디 여행이나 떠날까?”


  “그게 무슨 소리에요?”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다니엘을 돌아보며 에이린은 반문했다. 이윽고 그녀는 짐짓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짓더니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물었다.


  “당신 설마 무슨 일이라도 벌인 건 아니죠?”


  “아, 아냐. 다만 좀 지쳤을 뿐이야. 나도 휴식기간이 조금은 필요하다고.”


  그래, 테오도어 그 늙은이의 부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심신이 피로했다. 부장으로 승극한 직장상사 벤자민은 사소한 트집거리로 점점 더 그를 압박해왔고 과장자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나이 40에 아직도 과장자리에 못 앉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고문이었다. 며칠정도 그녀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지친 마음에 풍요를 가져다주고 싶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고, 테오도어 박사의 말은 계기에 불과했다.


  역시나 에이린은 뭔가를 느꼈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뭇 심각해보이는 그 얼굴에 다니엘은 히죽 웃으며 그녀의 심기를 덜어주기 위해 말했다.


  “뭐 급한 건 아니니까, 다음에 천천히 생각하자. 당신도 가끔씩은 바깥바람도 쐬고 그래야지. 이 칙칙한 도시 공기도 이젠 지겹잖아.”


  “…당신만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 어쨌든 전 먼저 씻을게요. 쉬고 계세요.”


  “응.”


  그녀가 욕탕으로 들어가자 다니엘은 다소 불편한 얼굴로 뭔가를 찾아 서재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자동으로 조명이 밝혀지며 전형적인 서재의 모습을 그의 망막에 드리웠다. 현대사회에 걸맞지 않게 복고풍으로 꾸민 서재의 전경은 목재와 책들로 채워져 차분하고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책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맡으며 서재의 주인은 방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목조책상으로 다가갔다.


  서류와 모니터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책상 위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서랍열쇠를 찾은 다니엘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첫 번째 서랍의 열쇠구멍에 신중하게 그것을 끼워 넣었다. 봉인을 풀고 서랍을 잡아당기자, 안에는 그동안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리볼버가 은빛 광택을 내뿜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권총을 꺼내들었다. 실린더의 약실을 드러내자, 여섯 발의 구릿빛 총탄이 빈틈없이 장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비무환… 이려나?”


  테오도어 박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순 없지만, 조심한다고 나쁠 건 없었다. 그가 권총을 이리저리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거실쪽에서 전화벨소리가 크게 울렸다.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란 다니엘은 권총을 뒷춤에 끼워 넣고 급히 거실로 달려갔다. 자칫 잘못하면 탄환이 발사될 수도 있었지만, 당황한 상황에서 그런 위험을 고려할만큼 다니엘은 냉정치 못했다.


  잽싸게 거실로 튀어나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전화기로 다가간 그는 이어폰처럼 생긴 소형수화기를 뽑아 귀에 꽂고 수신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이어폰 너머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네 전화 바꿨습니다. 누구십니까?”


  다니엘은 상대방의 사무적인 어투와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발음에 전화판매원정도로 조심스레 추측해보았다. 그러나 발신인은 전화판매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아, 루벤하임 씨 되십니까?』


  “네, 그렇소만…. 무슨 일이십니까?”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성이 거론되자, 다니엘은 깜짝 놀라 얼굴을 굳히고 반문했다. 아까 테오도어 박사의 전화도 그렇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닥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비밀정보국(Secret Service) 소속의 ‘버나드 요원’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사항이 있어 전화드렸습니다.』


  “비밀정보국…, 지금 그걸 믿으라는 겁니까?”


 『갑자기 이런 전화를 받게 되면 저라도 믿지 못하겠죠. 뭐, 믿지 않으셔도 별반 상관은 없습니다.』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무슨 일입니까.”


 『혹시 OO주립대학의 테오도어 룩셈베르크 교수를 알고 계십니까?』


  그제야 다니엘의 본능이 그를 향해 적신호를 발했다. 테오도어 박사의 다급했던 목소리와 미처 끝맺지 못하고 끊어진 전화가 불현듯 떠올랐고 버나드라는 자는 위험하다는 판단이 그의 이성을 잠식했다.


  “…그런 사람 모릅니다.”


  다니엘은 어리석게도 시치미를 떼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코자 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미 다니엘의 이름은 물론 가족사항이나 사회적 지위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고 자신이 다니엘 루벤하임이라는 것을 밝힌 순간,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는 걸 그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버나드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 자는 수화기너머로 기분 나쁘게 쿡쿡 웃으며 특유의 세일즈맨 같은 어투로 말을 이었다.


 『선생, 저는 선생에 관련된 중요한 정보가 있어 전화한거지, 절대 선생께 위해를 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을 해하려했다면 굳이 이렇게 전화로 제 신분을 밝혔겠습니까?』


  공포심에 질린 다니엘이 다급하게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그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버나드가 말을 이어나갔다.


 『뭐,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시겠지만 이 일에 관해 들어두시는 것이 선생의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발현될 ‘범인류법안’. 물론 그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범인류법안.”


  수신종료버튼을 누르려던 다니엘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멈춰섰다. ‘범인류법안’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테오도어 박사의 전화도 그렇고, 비밀정보국의 요원이라는 이 작자도 그렇고, 모두 다 오늘에서야 접할 수 있었던 이 생경한 단어를 입에 담고 있었다. 다니엘이 입술을 곱씹으며 버튼에서 손가락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이 버나드 요원이 말했다.


 『선생이나 다른 민간인들은 오늘에서야 이 법안에 대해 들으셨겠지만, 사실 이 안건은 1년 전부터 비밀리에 계획되어 왔습니다. 쇠퇴해가는 인류가 영장류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대혁명으로서 말이죠.』


  “그래서요?”


  다니엘이 관심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한창 고무되어 연설을 준비하고 있던 버나드 요원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내뱉곤 이어 말했다.


 『뭐 자세한 사항에 대한 건 내일 모레로 계획된 로베르토 하버 의장의 연설을 듣게 되면 알게 되겠지만, 중요한 건 이번 계획의 다른 이름이 ‘유사 인간형 로봇 처분 계획’이라는 겁니다.』


  “…….”


  잠시간의 침묵. 그러나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충분히 생각이 정리될 때쯤 되자 돌연 다니엘이 웃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버나드 요원쪽이었다. 그는 의아하게 말꼬리를 올리며 예상치 못한 다니엘의 반응에 대해 놀라워했다.


 『놀라지 않는 겁니까?』


  “놀라요? 하하하,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인데요. 이참에 그 쓸모없는 고철덩어리들이 모두 폐기된다는 뜻 아닙니까? 인류의 미래를 위한 대업인데 제가 놀랄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네, 뭐 그런 의미가 크죠. 이해해주신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해?”


  다소 뉘앙스가 이상한 버나드의 말에 그제야 의문이 생긴 다니엘이 물었다.


  “그래서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저희 집엔 안드로이드는커녕 청소부 로봇도 없는데요.”


 『음? 무슨 소리십니까. 최신형 안드로이드가 이미 그곳에 있지 않습니까.』


  “네? 그게 무슨….”


 『에이린 루벤하임, 선생의 아내 분 말씀입니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머리가 정리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개같은 농담이란 말인가!


  “에이린이 안드로이드라고?”


  그는 입꼬리를 덜덜 떨 정도로 분노하며 버나드를 향해 말했다. 혹시라도 아내가 들을까봐 그의 언성은 강한 혐오와 증오를 억제하며 극도로 낮아져갔다. 수화기 너머로 서류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이어 버나드 요원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린 룩셈베르크 2513년 태생,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 그 뒤 테오도어 박사에 의해 안드로이드로 비공식 재생 시도, 성공. 설마 테오도어 박사가 말하지 않은 겁니까? 그럼 모르시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안드로이드 센터에 등록도 안 되어 있는데다가 그 정도로 인간에 가까운 안드로이드는…….』


  “에이린은 살아있어!”


  그제야 언성을 높인 다니엘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가슴 속에 묻어두고 있던 분노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까지 쌓여 결국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끊기고 에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야 여보. 별 일 아니니까 신경쓰지마.”


  다니엘은 창백한 얼굴로 욕실쪽을 돌아보며 최대한 평온을 가장해 말했고, 잠시 침묵이 이어지나 싶더니 금방 샤워기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자, 버나드 요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 아무리 선생이 부정하고 싶어도 그녀는 안드로이드지, 절대 에이린 루벤하임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 에이린은 분명히 살아있어. 5년 전 그 사고에서 살아서 나를 안아줬다고! 그 감촉, 그 온기, 그 향기. 모든 것이 생생해! 안드로이드라면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래서 최신형이라고 하질 않습니까. 지금 전 세계 어딜 둘러보더라도 ‘에이린’처럼 인간에 가까운 인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인형일 뿐 인간이 아니….』


  “닥쳐! 에이린을 인형이라고 부르지 마!”


 『후우, 이거 위험하군요. 그렇기 때문에 그녀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적인 겁니다. 선생을 보니 그 위험성을 알 수 있겠군요.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선생.』


  “닥쳐…. 닥치라고. 제발… 그만.”


  다니엘은 그대로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버나드의 냉정한 목소리는 그대로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에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었다.


 『선생, 어쨌든 저는 경고를 했습니다. 내일이면 안드로이드나, 그것들을 비호하는 자나 모두 똑같이 처벌받게 될 겁니다. 이미 오늘 밤을 기점으로 군을 비롯해 나라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모두 1년 전부터 계획되어온 일. 내일 ‘범인류법안’이 공포되고 로베르토 의장이 연설을 시작하는 즉시, 전 세계의 안드로이드들은 이 세상에서 말끔히 정리될 겁니다. 그 때의 선택은 선생 몫입니다. 안드로이드와 같이 인류의 대업 반대편에 서서 죽음을 당하시던지, 아니면 인류의 편에 서서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안드로이드를 배제하시던지. 인간이라면 어느 쪽이 현명한 선택인지 잘 아시겠지요.』



  뚜—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은 끊겼다. 더 이상 버나드라는 악마의 목소리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건만 다니엘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복잡한 머리를 움켜잡고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조금씩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다니엘….”


  혼란에 잠긴 그의 귓가에 언젠지 모르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에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니엘이 억지로 웃어보이며 그녀를 돌아보았으나, 이미 버나드와 다니엘의 대화를 들어버린 듯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굳어있었다. 다니엘의 간절한 시선을 피하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을 긍정하는 듯한 그녀의 그런 태도가 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다니엘의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이린이었다.


  “저기….”


  “하, 하하. 여보, 누가 장난 전화를 했어. 그래, 장난 전화일 뿐이야. 장난 전화.”


  “다니엘….”


  “어떤 몹쓸 녀석인지 몰라도 그런 시답잖은 짓거리를 하다니. 정말 개 같은 녀석이지?”


  “나는….”


  “그만, 그만! 제발 그만해!”


  와장창! 다니엘이 괴성을 지르며 탁자 위를 쓸자, 그 위에 있던 꽃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양탄자 위에 흩어진 유리조각들 사이로 시뻘건 백일홍이 핏물처럼 흩뿌려졌다, 씩씩거리며 호흡을 조절한 다니엘은 간절한 눈빛으로 에이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당신은 살아있어. 그렇지?”


  “나는….”


  다니엘이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5년 전의 사고에서 당신은 경상에 불과했다고 ‘당신’이 말했잖아. 그렇지?”


  “다니엘….”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당신의 체온, 아련한 향기, 심장 소리. 그것들은 절대 가짜가 아냐. 당신은 살아있는 거야. 5년 전 그 사고로 죽지 않았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그녀의 얼굴 위로 5년 전 꾼 악몽이 겹쳐졌다. 그리운 향기에 섞여 진동하는 아찔한 피비린내와 피로 얼룩진 금발의 머릿결. 그리고 끔찍할 정도로 창백한 테오도어 박사의 얼굴.


  “그건 악몽이었어. 결코 일어나선 안되는 악몽.”


  주륵. 그 때를 떠올리자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에이린은 금새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른 누구보다 울음이 많았던 그녀가. 다니엘의 별 것 없는 청혼에도 행복의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지금은 미어터질 것 같은 가슴에도 불구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 언제부터일까? 다니엘이 그녀의 눈물을 보지 못한 것은.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다고 말해줘. 그건 악몽이었을 뿐이라고, 당신은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미안해.”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저렇게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자신은 미칠 듯이 눈물이 쏟아지는데 이렇게 따스한 체온을 가진 그녀가 울지 않는다니! 다니엘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미친듯이 흔들며 소리쳤다.


  “그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냐! 제발,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그 작자가 한 소리는 전부 헛소리라고 말해줘! 당신은 강철이 아니고 피와 살덩이로 된 인간이라고 말해줘! 뜨거운 눈물을 쏟고 뜨거운 심장을 가진 진짜라고 말해줘!”


  “미안해, 미안해 다니엘.”


  우뚝. 문득 그녀를 흔들던 다니엘이 멈춰섰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갑고 증오로 얼룩져 있었다.


  “넌 에이린이 아니야.”




  탕!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 들려 있던 은색 리볼버가 그녀의 복부에서 불을 뿜었다.



.


.


.



  “힘든 결정을 하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찾아온 버나드 요원은 소파에 앉아 멍하니 정면을 주시하는 다니엘을 향해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마른얼굴에 중절모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그는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평범한 사내였다. 그는 다니엘에게서 대답이 없자, 피식 웃으며 부엌과 거실 사이에 길게 누워 있는 에이린에게 시선을 옮겼다.


  버나드 요원은 휘파람을 작게 불어 감탄을 표했다. 복부에 한 방, 거기에 심장과 머리까지 합쳐 도합 다섯 발. 배터리와 두뇌회로가 완전히 부서져버린 안드로이드는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엔 은색의 리볼버가 베란다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온 아침햇살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위이이이이잉———



  태양이 떠오름과 동시에 도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사이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인류의 안드로이드에 대한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될 것이다.


 『전 요원 작전개시. 작전명 ‘개벽’이 0600시를 기점으로 발동되었다. 작전코드 0021. 도시전역에 걸친 안드로이드 스내치 미션을 개시한다.』


  “알겠습니다. 요원넘버 013 조셉 버나드, 델타콤마써틴(D.13)구역 작전개시합니다.”


  버나드 요원의 귓구멍에 꽂혀있는 리시버에서 드디어 작전개시를 알리는 본부의 명령이 하달되었고, 그는 무심하게 명령에 따라 현관쪽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뭔가 잊어버리고 있던 게 생각났는지 그는 품을 뒤적거려 서류 한첩을 꺼낸 뒤, 다니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러고보니 말하는 걸 잊었군요. 미스터 루벤하임. 당신의 아내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제야 초점이 풀려있던 다니엘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뒤늦게 찾아온 양심의 가책과 자기 합리화 속에서 버나드의 말은 그에게 있어 작은 희망의 등불이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보았을 때 버나드 요원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장난스럽게 서류첩을 흔들거릴 뿐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누런 문서뭉치를 다니엘에게 던지고 난 뒤, 엄지로 자기 가슴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이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당신의 심장, 당신의 아내는 거기에 살아있어요.”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뒤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나 다니엘은 혹시라도 남아있을 희망을 쫓아 버나드가 남긴 서류를 향해 달려가 허겁지겁 그것을 집어 들었다. 표지를 한 장 넘겨 깨알같이 쓰여 있는 글귀들을 읽자, 그는 버나드가 남긴 말의 의미를 금새 이해할 수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


  힘없이 웃는 다니엘의 손아귀에서 버나드가 남기고 간 종잇조각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건 장기기증서였다. 그것도 에이린의 사진과 이름이 적혀있는. 특이하게도 장기를 기증받은 환자들의 이름과 부위가 좌르륵 나열되어있어야 할 마지막 장엔 단 하나의 항목과 단 한명의 기증자만이 존재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다니엘의 눈동자에서 희망과 흔들림이 사라졌다.



  심장, 다니엘 루벤하임(남편, 35세)



  다니엘은 가슴 속에서 쿵쿵 뛰고 있을 아내의 심장을 느끼며 메마른 눈동자로 에이린을 돌아보았다. 잔인하게 구멍 난 안드로이드의 오른쪽 눈동자에서 눈물인지 오일인지 모를 것이 잔뜩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문득 자기 발밑에 깔려 있는 백일홍을 바라보았다. 바싹 마른 백일홍 꽃잎이 그의 발에 깔려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그는 몸을 굽혀 비교적 멀쩡한 백일홍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다니엘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백일홍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했지.”



  오래전 꽃집 점원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는 시든 꽃을 든 채 에이린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릴 끌어안았다.


  그는 곧 소리없이 오열했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도저히 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보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그의 시선이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리볼버로 향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꺼냈다가 되려 그녀의 목숨을 앗아버린 저주받은 물건. 그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금방이야 여보. 5년 전처럼 또 다시 당신 혼자 보내진 않을 거야.”




















  탕!



  곧이어 길게 여운을 남기는 총성 하나가 침묵에 잠긴 아파트에 울려 퍼졌다.









  잔잔하게 메아리치는 총성을 뒤로하고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전차의 육중한 굉음과 병사들의 소총소리가 도시 전역에 진동했다. 화염이 솟구치고 포성과 총성 뒤에 인간인지 안드로이드인지 구별할 수 없는 비명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흐른다. 한 폭의 지옥도, 현실감이 결여된 그 아바돈의 혼돈 중심에선 로베르토 하버 의장의 강렬한 연설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 인류는 지금 가장 큰 분기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기계들에게 존재마저 위협받고 창조주로서의 위상마저 빼앗길 처지에 빠져있습니다. 로봇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안주하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 인간들은 그 성실성과 창의성마저 피조물인 로봇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재정된 ‘범인류법안(汎人類法案, The bill for the pan-human)’은 이름 그대로 우리 인류의 미래를 위한 위대한 개혁이며!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피조물에 대한 경종이고 또한 도태되고 있는 인류의 계몽을 위함입니다! 여러분! 안드로이드의 외견에 속지 마십시오! 그들은 비록 겉은 인간일지라도 우리가 만든 피조물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모습을 본떠 인류를 창조했어도 우리 인간이 감히 신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듯, 그들은 결코 창조주인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차가운 회로와 강철, 인공피부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심장은 결코 우리들의 심장처럼 뜨겁게 타오를 수 없습니다! 감히 창조주의 겉모양을 따라하는 역겨운 짓일 뿐입니다! 바벨탑이 신을 엿보려다가 무너졌듯, 소돔과 고모라가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다 뜨거운 지옥불에 불타버렸듯, 우리들은 건방진 장난감에 대해 벌을 내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양심의 가책도, 성서에 명시된 도덕과 규율도 하나 위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안드로이드를 지구상에서 몰아냅시다! 인류를 위해! 그리고 우리들의 후손과 미래를 위하여!”









 


핫핫핫, 오랜만에 올립니다.


 


지난 겨울 단편제때 대충 쓴 것을 읽으며 조금 더 이야기와 문장을 정리한 정말이지 알흠다운 이야기죠.


(젠장, 우려먹지마!)


 


 


간만에 키보드를 두드렸더니 정신이 없심돠.


 


에고고... 생각해보니 이거 좀 길근염. 파트별로 나눠서 연재할 걸 그랬나? =ㅅ=;;;;


 


어쨌든 이번건 챕터 원이었고, 당초에 기획한대로 챕터2 '커피'와 챕터3 '로봇'을 위해 이야기를 정리했심둥.


 


근데...... 다음 이야기를 과연 쓸 수 있을지..... 크악! 크악! 몰러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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