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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겨울E] 토끼가 웃는다

2007.01.31 19:43

페이스리스 조회 수:888 추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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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소재 : 토끼, 의인화


 


*




처음으로 본 것은 새하얀 가운이었다.


 


안에서 막 나온 나는 바깥의 차가운 공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얼어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을 에는 추위였다. 그 때 어디선가 두텁고 따뜻하고 감촉이 좋은 수건이 내려와서 내 몸을 감쌌고, 수건을 쥐었던 손은 곧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애정 어린 손길.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 그 기분 좋은 느낌에, 그 따스함에 나는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곧 나는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코도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고.


 


차갑게 빛나는 형광등을 뒤로 하고 나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이 내 눈에 보였다. 길고 검은 머리에 새하얀 가운을 입은 그녀. 은은하게 오렌지 향기가 나는 그녀. 그녀가 두 손으로 내 몸을 마치 아기 들듯이 살며시 들어 올리자 그녀의 얼굴이 더 자세하게 보였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본 그녀의 미소였고, 나는 곧 깨달았다.


 


 


 




이 사람이 나의 엄마로구나.


 


 




                                                       ~ 토끼가 웃는다 ~


 


 


*




처음으로 본 것은 눈부신 빛이었다.


 


수건을 덮고 웅크리며 자고 있던 나는 그 빛에 아예 눈을 감아버렸고 그러자 조금만 더 자고 싶다는 생각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래서 꾸물거리며 포근한 수건 더미 속으로 기어들어갔지만, 한번 깨버린 잠에 다시 빠져들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참동안 속에서 이리 저리 뒹굴다가 결국에는 다시 밖으로 고개를 쏙 내미는 것이었다. 그 때쯤 되자 빛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앞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앞 유리에 내 얼굴이 살짝 비쳤다. 새하얀 털에 커다란 귀, 새빨간 눈, 옆으로 죽죽 뻗은 기다란 수염, 그리고 작은 입 사이로 삐져나온 자그마한 이빨. 엄마는 내 눈이 루비 같다면서 웃으며 칭찬해주었다. 나는 ‘루비’란 게 어떤 건지 잘 모르지만 그 소리를 듣고 마냥 좋아서 따라 웃었다.


 


이제 빛에 익숙해진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내 오른쪽 방에서 살고 있던 친구가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나보다 하루 전에 태어나서 여기에 살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웃으며 말했던 친구.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지만 내가 이 방에 들어온 그 다음 날에 비어있던 왼쪽 방에 새 친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말을 믿게 되었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새로운 친구에게 전해주었고, 그 친구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보고는 나도 오른쪽 방의 친구처럼 웃었다.


 


오른쪽 방의 친구가 말하기를, 그도 그 이야기를 자신의 오른쪽 방에 있는 토끼에게 들었다고 한다. 그 토끼는 또 오른쪽 방의 토끼에게 들었고, 그 토끼는 또 오른쪽 방의 토끼에게….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걸까. 맨 끝 방에 살고 있는 토끼는 나이가 도대체 몇일까. 엄마만큼 커다랄까. 엄마만큼 많이 알고 있을까.


 


똑똑, 소리와 함께 앞 유리의 문이 열렸고 언제나처럼 엄마의 손이 건초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나는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접시에 얼굴을 파묻고 건초를 아작아작 씹었다.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엄마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엄마는 내 코에 달린 건초 조각을 떼어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았다.


 


곧 왼쪽 방 친구의 엄마가 내 엄마의 곁을 지나갔다. 그녀 역시 하얀 가운을 걸쳤고 노랗게 염색해서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인상적이라는 것 뿐, 내 엄마보다 예뻐 보이진 않다. 요 근래에 이 주제를 두고 왼쪽 방 친구와 싸운 적이 있다. 키도 작고 염색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내 주장이었고, 친구는 귀엽기만 한데 뭐 어떠냐고 반박했다. 하지만 그가 내 엄마에 대해 뭔가 불평을 늘어놓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도 내 엄마가 더 예쁘다는 것에 별다른 이견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의 소심한 성격을 생각하면, 내 엄마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면 내가 화를 낼까봐 말을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오른쪽 방 친구는 우리의 논쟁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왼쪽 방 친구의 엄마든 내 엄마든 각각 자신의 매력을 가지고 있고 자신은 그걸 인정한다는, 시원시원한 주장을 내놓고는 그대로 수건더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엄마는 시원시원한 파랑색 머리에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친구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사실 앞의 유리문은 조금만 힘을 주면 열리기 때문에 나가려고 하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밖으로 나가보려고 했는데 오른쪽 방 친구가 그걸 말렸다. 그 친구가 말하기를, 뛰어내려서 다리가 부러진 토끼가 몇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문을 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문을 연 것도 불만이 있었다 라기 보다 그저 호기심에 한 행동이었을 뿐이니. 어쨌든 나가면 다친다고 말한 건 그 친구 본인이니 스스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리가 없다.


 


오늘 중에는 돌아오겠지.


 


나는 수건 속으로 도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배가 불러서 그런지 이번에는 금방 잠들었다.


 


 


 




꿈을 꾸었다.


 


하늘은 먹구름 때문에 햇빛이 땅에 닿지 않았다. 그 어둠 속으로 구름을 헤치고 뭔가가 빠르게 날아다니며 지상을 향해 자그마한 것들을 떨어뜨렸고, 그것들이 땅에 닿는 순간 귀를 찢으며 일어난 폭발에 주위의 병사들은 그대로 고기조각이 되어 사방에 피를 뿌렸다. 그 피를 뒤집어쓰면서도 병사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자극이 되어 핏발 선 눈으로 적진을 노려보며, 괴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폭격기는 주위를 선회하며 살상용 소형 폭탄을 끊임없이 퍼부었지만 그들의 돌진을 막을 수 없었다. 곧 그들은 적진에 도달했고 손에 들고 있던 전투용 전기톱이 기분 나쁜 빛을 내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최전방에 있던 적군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강화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속도는 보통의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목덜미를 붙잡힌 병사는 눈물 콧물 다 짜내며 인간 아닌 괴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 발버둥이 채 효과를 거두기도 전에 초당 2000회씩 회전하는 전기톱이 그의 머리를 두 동강 내다 못해 잘게 썰어버렸다. 동료의 피 위에 적군의 피까지 뒤집어 쓴 강화병은 주위를 빙 둘러보며 다른 사냥감을 찾았다. 하지만 동료 강화병들이 이미 주변의 인간들을 죄다 고깃덩이로 만들어 버린 뒤라 살아있는 타깃을 찾기란 힘들었다. 끈질긴 생명력과 정신력으로 아직도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시체들에게 결코 편안하지 못한 끝을 맺게 만들어줄 뿐.


 


그들은, 아니, 우리는, 낄낄거리며 눈앞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사냥감을 찾기 위해.


 


 


 




번쩍 눈이 뜨였다. 식은땀 때문에 온몸이 축축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하게 뛰었다. 고통스러웠다. 분명 수건 때문은 아니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 때문이었다. 두려움. 공포. 광기.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그것들을 잊으려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자꾸 마음속에서 어두운 뭔가가 빙빙 돌며 나를 휘저었다. 머리까지 빙빙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 때, 유리문이 열리면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나를 밖으로 꺼내 놓았다.


 


엄마였다. 아마 산책을 위해 온 것이리라. 엄마는 언제나처럼 나를 품에 안고 내 흰털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내 몸은 그 부드러운 손에서 나오는 온기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온기는 내 안의 무서운 것을 잊게 만들어주었다. 심장의 떨림이 멈추었고, 웅크린 몸을 펼 수 있게 되었으며, 그제야 긴장을 풀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미소 지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엄마가 나를 안고 데리고 간 곳은 잔디가 끝도 없이 널려 있는 동산이었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언덕에 앉고 나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었다. 나는 엄마의 품에서 깡충 뛰어서 잔디 위에 앉았다. 싱그러운 초록색 잔디의 감촉이, 엄마의 두 손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기분 좋았다. 엄마의 손은 요람같이 따스하고 부드럽지만, 이 잔디밭은 시원하고 그 뾰족한 끝이 흰털에 닿으면 간지럽기까지 하다. 나는 몸을 뒹굴뒹굴 거리면서 그 감촉과 햇살의 따스함을 한껏 느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엄마는 미소 지었고 나도 따라 웃었으며 해님도 같이 웃었다.


 


모든 것이 기분 좋았다.


 


동산에서 잔디를 잔뜩 먹은 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오른쪽 방 친구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갔기에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걸까. 내일이면 다시 볼 수 있는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수건 속으로 들어갔다.


문득, 그 친구가 사라지기 전 밤에 해준 얘기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말했다.


 


자고 일어나보니 자기 옆방의 토끼가 사라져 있더라고.


 


그 옆방의 토끼는 말했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보니 자기 옆방의 토끼가 사라져 있더라고.


 


그 옆방의 토끼는 말했다고 한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보니 자기 옆방의 토끼가 사라져 있더라고.


 


그리고 그 옆방의 토끼는….


 


잠들기 전에 나는 깨달았다.


 


 


 




나도 곧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



 


처음으로 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나는 정말로 눈을 뜬 것일까. 앞이 훤히 보이는 유리문도, 나를 따뜻하게 덮어주던 수건더미도 보이지 않았다. 배에 닿는 감촉이 차가웠다. 몸을 잔뜩 웅크려도 그 냉기가 사라지지 않고 몸속으로 침투했다. 빛. 이 어둠을 걷어줄 빛. 나를 따스하게 감싸줄 빛. 그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내 눈은 점점 이 숨 막히는 어둠에 적응하고 있었다. 유리문은 있어야 할 곳에는 쇠창살이 있었다. 옆쪽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어디지.


 


그때 저 멀리서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기분 나쁜 고요 속에 하이힐 소리만 또각또각 거렸다. 엄마였다. 엄마가 내게 밥을 주러 온 것이었다. 아니, 밥은 어떻게 되어도 좋아. 그저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항상 들고 오던 밥그릇을 놓고 온 모양이다.


 


그 해맑은 미소도.


 


어둠 속에서 내 앞에 선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엄마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엄마는 하얀 가운의 주머니 속을 뒤지더니 작은 주사기를 꺼냈다. 본 기억이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무슨 병의 예방 주사를 맞을 때 그것을 보았었다. 그렇구나. 예방 주사 맞으러 온 거구나. 그렇지?


 


응? 그렇지?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쇠창살문을 열고 손을 뻗어 내 몸을 쥐었다. 꽉. 엄마의 손톱이 내 살갗을 파고들었다. 아파, 엄마, 하지 마, 그렇게 잡지 마, 평소처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기를 안듯이 살짝 끌어안아줘. 마치 물건 다루듯이 어두운 방에서 꺼내는 바람에 내 귀가 천장에 부딪쳤다. 엄마는 몸을 틀어쥐고 있던 손을 조금씩 움직여 뱀처럼 내 목을 움켜잡았다. 숨이 막혔다. 몸을 막 흔들며 발버둥을 치는데도 엄마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주사기를 내 머리의 어느 한 부분에 팍 꽂았다. 생전 처음 느끼는 날카로움, 생전 처음 느끼는 고통. 미끌미끌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내 머리로 들어오고 있었다. 차갑고 더러운 피가 머릿속을 휘젓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어느 방구석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쾅.


 


어이 괜찮나.


 


방 안에는 나 말고도 다른 토끼가 있었다. 그는 내 몸을 툭툭 치며, 갑자기 다가온 상황에 놀라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내게 계속 괜찮냐 괜찮냐, 신경 거슬리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그래, 네 말대로 괜찮으니까 그렇게 툭툭 치지 말고 좀 가만히 있어라. 하지만 그는 내 말이 말같이 들리지 않는지 그 짜증나는 짓거리를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행위도 점점 노골적이 되는 것이었다. 배만 살짝 치던 녀석이 이제는 내 아랫부분에 대가리를 처박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녀석은 낄낄대며 그곳에 더러운 숨을 불어넣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녀석의 대갈통을 발로 힘껏 찼다. 녀석이 끈적끈적한 침을 흘리며 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무슨 일인지 몰라 하는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말했다. 자네 왜 그래. 혹시 상처가 난 게 아닌가 해서 살펴본 것뿐이야. 그렇게 경계하지 마. 누워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내려다보니까 그 토끼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명확한 형상이 되어 떠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가 내게 내리는 명령은 단 하나였다. 죽여, 죽여. 네 눈앞에 있는 발정 난 토끼 새끼를 죽여 버려. 녀석은 꼴사나운 포즈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제발 한번만 살려달라고 빌고 있는 것 같았다. 코로 들어오는 냄새가 역겨웠다. 바닥에 흘리는 침은 더러웠다. 내 아랫부분에 남아 있는 숨결은 끔찍했다. 그러니까 죽여. 이 토끼는 더러워. 죽어야해. 나는 그 새끼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은 쓰레기 주제에 그래도 어떻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내가 놈의 목 줄기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넣고 살점을 뜯었을 때 이미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거리에 불과했다. 그 깊은 상처에서 더럽고 냄새나는 피가 왈칵왈칵 솟아올랐고 죽어가는 그 녀석은 경악으로 가득 찬 두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왜. 우린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왔잖아, 왼쪽 방 친구. 내가 네게 많은 걸 가르쳐주었잖아, 왼쪽 방 친구. 그렇게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입에서 피를 한 덩이 토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놈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멀리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 나 잘했지? 더러운 쓰레기를 물어 죽였어.


 


엄마는 미소 지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엄마는 방에서 나갔다. 쾅.


 


홀로 남겨진 나는 곁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는 시체 위에 철퍼덕 쓰러졌다. 나와 같은 흰털의 부드러운 감촉. 미끌미끌한 피. 식어가는 체온. 그 기분 좋은 것들 속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이번에 저희 우로보로스 사(社)에서 개발한 신약 크레크렙(Krecreb)은 현재 군용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강화병 양성용 약물과 비교해서 약 3배의 효과를 발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선 화면을 보시죠.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실험체 R6과 R7의 모습입니다. R6는 그대로 두고 R7의 뇌에 크레크렙을 주입한 뒤 같은 방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서 로봇이 두 실험체의 신체 능력은 물론이고 뇌에서 분비되는 쾌감성 물질에 이르는 것들을 측정했습니다. 그 결과, 주입한 지 0.94초 만에 뇌에서 폭발적으로 쾌감성 물질이 분비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신체 능력도 실험체 R6의 6배로 증폭되어, R6을 순식간에 물어뜯어 죽여 버렸습니다. 또 다른 실험 장면입니다. 이번에는...”


 


 


*


 


 


처음으로 본 것은 새하얀 가운이었다.


 


안에서 막 나온 나는 바깥의 차가운 공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얼어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을 에는 추위였다. 그 때 어디선가 두텁고 따뜻하고 감촉이 좋은 수건이 내려와서 내 몸을 감쌌고, 수건을 쥐었던 손은 곧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애정 어린 손길.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 그 기분 좋은 느낌에, 그 따스함에 나는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곧 나는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코도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고.


 


차갑게 빛나는 형광등을 뒤로 하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내 눈에 보였다. 길고 검은 머리에 새하얀 가운을 입고 은은하게 오렌지 향기가 나는 그녀가 두 손으로 내 몸을 마치 아기 들듯이 살며시 들어 올리자 얼굴이 더 자세하게 보였다.


 


나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곧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미소였고, 사실,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나의 엄마가 아니었다.


 


 


 


 




-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