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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인연살해

2010.09.26 02:22

이웃집드로이드 조회 수:785 추천:1

extra_vars1 미친 빌과 귀신늑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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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은 날개에 새겨진 상처를 추스르며 숲 가장자리의 가장 높은 나무 위로 올라섰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 익인 여자가 걱정스레 질문했다.
 “괜찮으십니까?”
 엘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의 총탄은 빗나갔지만 스승의 총탄은 역시 정확했다. 날개가 튼튼하지 않았다면 땅으로 추락했을 것이다. 엘의 인내심이 키체커의 상상 이상이지 못했다면 죽은 자의 왕이 그녀를 끌고 갔으리라.
 삶과 죽음이 이토록 가까운 것이었나. 엘은 한숨을 내쉬고 여자에게 지시했다.
 “올라가세요.”
 여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지시에 따랐다. 시야가 단번에 넓어졌다. 엘은 늑대 떼에게 포위당한 257명의 인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갖가지 장대무기로 늑대들과 싸웠다.
 장창의 아래로 달려들던 늑대들은 마찬가지로 창대 아래에서 대기하던 총병들과 일부 창병들과 싸워야했다. 도끼, 검, 몽둥이, 단검 등을 꺼낸 병사들은 늑대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측면으로 돌아간 늑대들은 미늘창과 도끼창의 열렬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찌르고, 베고, 걸고, 때리고. 잠시만이라도 장전할 시간이 주어지면 총탄과 화살이 날아갔다.
 물론 늑대들이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격돌에서 몇몇 창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야 했다. 평범한 늑대는 사람을 피하지만 필사적으로 덤빌 땐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많은 창병들이 팔에 박히는 이빨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정면에서 목을 물린 병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괴물늑대들이라 해도 잔뜩 모인 쇳덩이들 앞으론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한 녀석이 덩치와 가죽을 믿고 장창병의 숫자가 적거나 대열이 흐트러지는 곳을 골라 돌격했지만, 도리어 피투성이가 되어 물러나야 했다.
 견고하다. 강하다.
 엘은 셀레스테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 근방에 사는 늑대들을 몽땅 모아서는 익인들에게 통보했다. 빌 대장을 죽일 것이라고. 키체커의 총탄에 다친 엘은 경황이 없었던 탓에 침묵했었다. 이제야 엘은 셀레스테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
 협력을 구하는 것 치고는 조야하고 불쾌하다.
 엘은 빌 대장을 떠올렸다. 미친 빌. 대학살 이후 가장 성공한 약탈자, 한 도시에 도전한 정신병자, 물이끼와 진흙의 냄새가 짙게 나던 인간, 락토의 익인들이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봤던 왕국군 장교. 락토 개척민들은 익인들의 이웃이었다. 개척촌에서 월동하는 빌의 패거리도 익인들에겐 나름 익은 얼굴들이다. 아성의 회의실에서 처음 봤을 때에도 빌은 엘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평범한 노인을 갑옷에 파묻어 놓고 도끼를 쥐어준 꼴이랄까. 사실은 세상이 놀랄 만큼 포악한 성격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포악했다. 엘은 예고 없이 돌변하여 달려드는 빌의 눈빛을 잊지 못했다.
 죽고 싶지 않아.
 엘은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그녀의 동족들 중 일부가 도착하지 않았다. 새 무기의 준비가 늦는 모양이다. 무거울 테니까. 어쨌든 이대로 두면 늑대들이 당한다. 잠시 동안의 고민 끝에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숲의 하늘을 맴돌던 익인들은 궤도를 바꿔 스치듯 나무 위를 날았다. 곧 그들의 손에 미리 준비된 무기들이 들렸다. 엘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너무 무섭잖아.”
 긴 손가락이 피 묻은 깃털 위를 가볍게 쓸었다.


*
 마누크는 소리쳤다.
 “빌만 무서운 줄 알았냐!”
 초대형 수총이 몽둥이처럼 휘둘러졌다. 날쌘 늑대들은 재빨리 옆으로 뛰어 그 공격을 피했다. 함부로 대오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마누크는 그들을 쫓아가지 않았다. 밀집대형 안에서는 전투망치나 수총을 휘두르는 것도 위아래로만 가능할 뿐이다. 마누크는 콧김을 거세게 내뿜고는 수총을 거꾸로 세워 재장전을 시작했다. 닦아내고, 화약 넣고, 총탄 넣고, 꽂을대로 쑤시고. 준비가 끝나자 그는 곧바로 적을 조준했다.
 “죽어라!”
 총성이 귀를 때렸다. 화약연기가 거세게 뿜어져 시야를 가렸다. 맞았나? 자문에 마누크는 부정적인 대답만 떠올렸다. 너무 작고 날쌔.
 틸리는 팔의 근육이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화약이 아닌 장력에 의지하는 석궁은 체력소모가 총에 비해 심하다. 시위가 습기에 늘어지는 꼴을 안 보나 했더니, 이젠 제 팔을 늘어지게 하시나이까? 그는 북부인이 가장 의지하는 초월적인 두 존재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오, 제발. 북부의 신이여! 죽은 자의 왕이여!”
 틸리는 어렵게 시위를 당겼다. 그는 짧은 화살을 가죽시복에서 꺼내어 석궁에 장전하였다. 옆 사람의 땀방울이 자신의 목에 떨어질 정도로 밀집한 곳에서, 매우 어렵게. 이제 조준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는 장전만이 아니라 조준 또한 어렵다는 사실에 그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소년 코마는 장전할 때 총탄을 화약보다 먼저 넣는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키체커는 화를 내면서 소년에게서 총을 빼앗았다. 코마는 빽빽한 창대 아래에서 단검을 빼들곤 자신의 앞으로 늑대가 달려들지 않기만을 빌었다. 부들부들 떠는 제자의 모습을 본 키체커는 미간을 찌푸리곤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올 때가 됐는데.
 과연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충분히 상상은 했다만…….”
 키체커는 말꼬리를 흐렸다. 꿈이 현실보다 우월하다던 장로님들, 발칙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반론하겠습니다. 왜 사람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을 보고 말을 잊는지요? 키체커는 등 뒤로 고개를 홱 돌리곤 전혀 사냥꾼답지 않은 일을 해냈다. 쉽게 말해서, 그는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대장, 온다!”


 “빌 대위! 빌 대위!”
 홀더 대위는 부하들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로서는 괴물늑대들에게 포위당한다는 상황이 너무나도 낯선 것일 테니까. 비명소리와 숱한 총성이 진기한 상황과 맞물렸으니, 홀더 대위가 그리 못난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상황을 아는 덕에 상대적으로 침착한 빌이나, 주어진 상황에 충실할 뿐인 정예병들에겐 적잖은 감점 대상이다.
 정신없이 총탄을 장전하는 부하들, 희뿌옇게 눈앞을 막는 화약연기, 시끄러운 총성과 찢어지는 비명을 제치고 대열 중심부까지 어렵게 걸어온 빌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냐고? 저 늑대들이 안 보여? 대체 왜 저런 것들이 락토에 있는 건데? 이런 이야긴 들어보지도 못했어!”
 빌을 보자마자 홀더 대위는 말을 쏟아냈다. 힘들게 걸어오니 들리는 것이라곤 추궁 비슷한 비명. 빌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대체 왜?”
 “모르겠습니다.”
 어떤 아가씨가 수작 부렸다고 해봐야 믿지 않을 것 같다. 믿어주더라도 빌에게 이로울 것은 없다. 빌은 시치미를 잡아떼는 것으로 대응했다. 당사자가 모른다고 뻗대는데 홀더 대위가 무슨 증거를 잡겠는가. 빌은 담담하게 현 상황에 대해 정리했다.
 “일단 늑대들에 관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습니다.”
 늑대들은 누적되는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점점 보병대와 거리를 벌렸다. 이제 늑대들은 총의 유효사거리를 벗어나 숲과 바위와 구덩이를 오가며 보병대의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이젠 제대로 맞는 총탄과 화살이 드물었다. 보여야 쏘든가 말든가.
 “하지만 이대론 대형을 못 풀어! 꼼짝할 수가 없다고!”
 맞는 말이었다. 창병들이 충분히 훈련되었어도 이 상태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하기는 힘들다. 공세로 나서야 할까? 그 또한 힘들다. 창병이 공세로 신속히 전환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가만히 있을까? 안 된다. 아군의 적은 호기를 놓칠 상대가 아니다.
 “온다! 온다!”
 병사들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빌은 부하들이 탄식하며 부르는 대상을 확인했다. 익인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빌은 더 이상 홀더 대위와 의논하려 들지 않았다. 최우선 문제 해결. 그는 대열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냉정하게 명령했다.
 “총병, 조준!”
 빌이 외치자마자 총구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빌은 잠깐 뜸을 들인 다음 외쳤다.
 “일제사격!”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밀집대형이 흰 화약연기 속에 완전히 파묻힌 것이다. 일부 병력이 대형 바깥에서 총을 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병력이 대형 안에서 머리 위를 쏘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이런 상황은 역전의 병사들에게도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건 미리 준비한 상황이 아니다. 귀를 찢는 총성과 매캐한 연기가 대열 한복판에서 솟아오르자 창병들은 공황을 일으켰다. 시력의 상실에 흐트러진 그들의 모습엔 빌의 총병들도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대오를 유지하라, 이 멍청이들아! 자기가 쏜 총에 놀라느냐!”
 빌은 병사들을 독전하면서도 익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피해가 크지 않다. 온다. 익인들 중 일부가 긴 밧줄을 들고 있다. 그 끝에 뭔가 달려 있는 것 같다. 화약연기가 자욱해 정체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대형 앞에 서기도 전에 빌은 그 정체를 알았다.
 “으아아악!”
 사람이 하늘을 날았다. 주변의 화약연기가 너무 자욱해서, 마치 대포에서 사람이 발사되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빌은 그 병사의 배에 박힌 것을 보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사람 낚시로군.”
 갈고리. 원래는 나무 위에서 아래의 물자를 옮기는데 쓰던 물건임에 분명하다. 일개 개인이라면 갈고리가 제 아무리 빠르다 한들 피할 수 있겠지만, 밀집대형은 꼼짝도 못한다. 쏟아지는 핏방울을 보며 빌은 이를 악물었다. 대형 앞에 선 그는 또 다른 갈고리를 볼 수 있었다.
 “꺽!”
 병사가 또 낚였다. 그러나 이번엔 하늘로 솟구치지 않고, 갈고리와 한 몸이 되어 동료들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 빌은 다급히 외쳤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라! 버텨! 밧줄을 끊어버려!”
 대형이 찌그러진다. 이 혼란 속에서는 저 갈고리도 우습게 볼 게 아니다. 빌은 총병들에게 명령했다.
 “자리를 지켜라! 더 빠르게! 장전이 끝나는 대로 자유 사격하라!”
 탄환을 재장전하는 총병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익인들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총은 제일 성가신 물건이다. 익인들은 천에 싸오거나 손에 든 것을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냈다. 돌과 화염병이 비처럼 내렸다. 빌은 병사들의 머릿속에 박아 넣기로 작정한 말을 다시 외쳤다.
 “대오를 유지하라!”
 하늘에서 떨어진 돌은 그대로 핏덩이가 되었다. 투구나 갑옷이 없는 병사들에게 투석은 치명적이었다. 화염병은 더 위험했다. 특히 총병은 화약통 때문에 불덩이가 되는 즉시 동료들과 함께 폭사할 수 있다. 몇몇 병사가 불덩이가 되어 구를 때마다 총병들은 기겁하며 물러나야 했다.
 “대장! 화염병이 예상보다 많아!”
 시론이 당황하여 외쳤다. 빌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대형 앞에는 용케도 깨지지 않은 한 화염병이 진흙탕에 빠져 심지만 타고 있었다. 그걸 본 빌은 신대륙 럼주를 저주했다. 지나치게 싸다고 전부터 말했잖아. 빌은 화염병을 건져내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숲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는 보병대 속에서 게드 장로를 찾은 다음 외쳤다.
 “게드, 마법은 뒀다 뭐할 건가!”
 “네가 이 북새통에서 뭔가 해낸다면 장로회의 수호자로 추천하마!”
 게드 장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양 소매 속에서 온갖 잡동사니들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어깨가 부딪히고 발이 밟히는 혼란 속에서 그것들을 쏟지 않거나 분류하는 것은 고역임에 분명했다. 밀집대형이 조금씩 부서진다. 아직 늑대가 있는데. 빌은 발악적으로 외쳤다.
 “대오를 유지하라!”
 “대장, 앞에!”
 빌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시론이 손가락으로 빌의 뒤를 가리켰다. 빌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갈고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가깝다. 빌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이 뒷걸음질을 하다 말고 주춤거리는 꼴을 보았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 빌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도끼를 양손으로 가로쥐었다.
 “규율 개정! 도망치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화물용으로나 쓸 묵직한 갈고리가 빌의 도끼 앞으로 쇄도했다. 빌은 도끼자루로 그걸 막았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거세게 터졌다. 장갑을 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바닥에 통증을 느꼈다. 팔이 단번에 뽑혀 하늘로 끌려갈 것 같다. 발끝이 땅에서 떨어진다. 도끼자루가 구부러지는 건 아닐까.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갈고리가 이렇게 큰 거야. 빌은 안간힘을 써서 갈고리를 잡아당겼다. 익인은 빌이 당장 낚이거나 쓰러지질 않자 크게 당황했다. 밧줄을 붙잡은 채 보병대 위를 맴돌던 익인은 곧 자신이 총병들에게 아주 좋은 표적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기겁하여 다급히 밧줄을 놓았다. 그러나 때가 늦었다. 빗발치는 총탄 사이로 한 사냥꾼의 총탄이 날아갔다.
 날개의 추락은 서글프고, 요란하다.
 익인의 머리가 깨지고 깃털이 흩날리는 순간, 병사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그들은 일제히 빌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에 빌은 충분히 화끈하게 답했다. 그는 전설 속의 야만전사처럼 수염을 떨며 포효했다.
 “나는 한 도시에 도전했다!”
 병사들의 함성이 같이 터졌다. 빌은 다시 외쳤다.
 “대오를 유지하라!”


 셀레스테는 더 이상 브롬 장로와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포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총성과 다른 수준의 소리였다. 경포다. 경포를 쏠 수 있을 정도라면, 아직 대오는 무너지지 않았다.
 ‘기껏 보냈더니, 아직도 못 죽였어?’
 자포를 곧바로 갈아 끼운 듯 포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긴 흑발이 찰랑거리는 모습은 더 없이 아름다웠지만, 브롬 장로는 그녀의 행동에서 몸을 요란하게 흔드는 늑대의 몸짓을 떠올렸다. 그는 조금 전에 토굴을 탈출한 약사 노인을 떠올리며 한탄했다.
 ‘좀 같이 있어주면 어디 덧나느냐, 친구여.’
 브롬 장로의 불안을 눈치 챈 듯, 셀레스테는 느리게 움직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택에 브롬 장로는 주변에 놓인 약병을 닥치는 대로 움켜쥐는 망상을 실현하지 않아도 되었다. 셀레스테는 브롬 장로를 굽어보며 말했다.
 “일단 고맙다는 인사는 해둘게.”
 “무슨 뜻이지?”
 브롬 장로의 질문에 셀레스테는 웃으며 답했다.
 “당신의 욕심 덕택에 기회를 잡았잖아.”
 “차라리 국왕에게 감사를 하지 그러냐.”
 “여기 없잖아. 하긴, 당신에게 인사하는 것도 어색하군. 샘물과 죽은 자의 왕에게 고마워하진 않는 법이니.”
 물을 마시려는 사냥감, 약하고 병든 사냥감. 브롬 장로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려고?”
 “응.”
 그녀는 몸을 홱 돌렸다. 토굴을 나서기 직전, 그녀는 파란 눈동자로 브롬 장로를 슬쩍 돌아보며 웃었다.
 “나오면 죽는다.”
 브롬 장로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발소리는 없었다.
 장로회의 수호자는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귀중한 서적들과 자료들을 다짜고짜 헤집더니 구석에서 뚜껑 달린 황동그릇들을 찾아 꺼내었다. 윗면에 붙은 이름표들을 보고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던 브롬 장로는 곧 게드 장로라고 적힌 이름표를 찾았다. 뒤이어 가장 깊은 곳에서 절대 꺼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이름표도 찾았다.
 ‘무엇부터 써야 하나?’
 브롬 장로는 잠시 망설인 끝에 불길한 이름표를 골랐다. 우선 조치부터.
 장로는 황동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주머니가 들어있었다. 그는 주머니의 입구를 황동그릇 안으로 향한 채 탈탈 털었다. 수십 알의 밀알이 황동 그릇을 때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브롬 장로는 황동그릇을 빈 촛대 위에 올려둔 다음, 그것을 돌렸다. 너무 세게 돌렸는지 밀알 몇 개가 그릇 밖으로 튀어나갔지만 장로는 그것에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그가 입에 담을 이름은 그만큼 무서웠다.
 “장로회의 수호자가 죽은 자의 왕께 요청한다!”


*
 불덩이가 비명을 지르자 빌은 주저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화염병에 직격당한 총병은 뒤통수가 쪼개진 채 땅에 엎어져버렸다. 뒤이어 폭음과 함께 총병의 몸이 들썩거렸다. 주변의 병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시체를 바라보았다.
 “대오를 유지하라!”
 반복되는 빌의 명령에 병사들의 고개는 즉각 원래대로 돌아갔다.
 “갈고리!”
 키체커의 외침이었다. 이번엔 빌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병사들은 갈고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았다. 총이나 도끼가 사람 대신 걸렸다. 대신 익인들도 멍청하게 갈고리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즉각 밧줄을 놓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갔다. 뒤이어 투창과 돌, 화염병이 다시 낙하했다. 시론이 다급하게 외쳤다.
 “방패! 방패를 가져와! 죽은 놈 거라도 가져와!”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상병이 생기고, 전사자가 생겼다. 옷에 불이 붙은 병사들 위로 동료의 망토가 날아다녔다. 축차적인 손실. 그러나 빌은 여전히 같은 명령만 반복했다.
 “대오를 유지하라!”
 뾰족한 수가 없다지만 시론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서 있기가 싫었다. 그는 당장 빌에게 달려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후퇴해야겠어!”
 시론은 억지로 빌을 끌고 갈 각오까지 했다. 빌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래. 슬슬 가자.”
 빌 대장이 어떤 거부의 말을 꺼내던 뒤로 잡아당기려던 시론은 예상외의 대답에 잠깐 말하는 것을 잊었다. 그는 다급히 물었다.
 “어, 대장. 이거 환청은 아니겠지?”
 “왜 늑대들이 덤비지 않는 것 같나?”
 빌의 엉뚱한 반문에 시론은 당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입만 벙긋거리더니 간신히 말을 꺼냈다.
 “모, 모르겠는데.”
 “늑대들은 우리에게 밀집대형을 취하게 했어. 그리고 익인들은 미리 준비한 무기를 사용했지. 늑대들은 처음부터 우릴 간단히 이길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여기까진 이해했다. 그런데 그 다음 순서는? 나라면 지금 이 상황에 늑대들을 돌격시킨다.”
 시론은 창병들의 창으로 눈을 돌렸다. 어느 사이엔가 창촉은 꽤 높은 각도로 겨누어졌다. 익인을 찌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늑대들은 보이지 않았다. 전부 숲으로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빌은 몸을 천천히 돌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손발이 안 맞는 건가. 어쨌든 빈틈을 기꺼이 이용해야겠지. 숲 쪽을 경계하면서 아군을 물릴 것을 홀더 대위께 건의하겠다.”
 대형이 다소 망가지더라도 일단 늑대들이 달려오지만 않으면 문제없다. 오히려 숲과 거리를 둬야 늑대의 기습적인 돌격에 당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결정타가 안 나오니 다행이다.”
 “결정타?”
 “그래. 우릴 완벽히 격퇴하려면 뭔가 결정타가 될 만한 것을 준비했을 텐데, 익인들에게 그 정도 여유는 없었던 모양이다.”
 시론의 입이 벌어졌다. 빌의 지적이 타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 대장? 이 근방에 밀조장이 있었어?”
 빌은 뜬금없는 질문에 눈만 껌뻑거렸다. 밀조장? 있지. 항상 거래하는데. 시론은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말을 끝맺었다.
 “털렸나봐.”
 그 순간 빌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맛봤다. 국왕의 세금을 피해 만들어진 비밀 술 창고들. 빌은 바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익인들이 들고 오는 것은 어린애만한 통들이었다. 그 통은 자체의 무게만이 아니라 내용물도 지극히 위험하다. 빌은 즉시 가장 강력한 화력을 주문했다.
 “경포, 앞으로!”
 빌의 지시에 따라, 대형 한복판에 있던 경포가 즉각 앞으로 나왔다. 포병들은 곧 상황을 이해했다. 재앙이 다가왔다. 그들은 재빨리 대포의 각도를 조절하고, 자포를 포신에 끼웠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귀를 막았다.
 “쏴!”
 사람의 몸까지 울리는 포성이 터졌다. 세 명이 들 수 있는 대포라고 해서 약한 건 아니다. 수십 발의 산탄이 허공을 찢자마자, 느릿느릿하게 날아오던 커다란 술통들이 폭발해버렸다. 하늘에서 불벼락이 쏟아졌다. 겨우 70야드 앞. 병사들 사이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또 온다!”
 키체커의 경고였다. 용케 맞지 않은 술통들, 터지지 않은 술통들이 다가온다. 병사들은 서둘러 총탄과 화살로 표적을 겨누었다. 몇몇 익인은 기어이 떨어졌다. 그러나 빌은 계획을 대폭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익인들이 술 창고를 털었다면 술통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고 봐야 한다. 생각할 시간이 모자란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
 “경포, 재장전! 서둘러라!”
 빌의 지시와 달리 포병들의 행동은 다소 굼떴다. 그들은 포신 내부의 새카만 그을음을 정신없이 닦아내며 외쳤다.
 “그을음이 너무 많이 꼈어! 거기다 포탄 부족!”
 빌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신속하게 지시했다.
 “부상병은 화약과 탄환을 경포에 넘겨라! 납 남은 놈들은 즉시 총탄을 주조한다! 아니, 자포에 돌멩이라도 대신 쑤셔 넣도록!”
 화약통에서 검은 가루가 빈 자포로 쏟아진다. 탄환과 화약 사이에 끼워 넣을 나무 마개는 즉석에서 제조가 힘들어서 결국 녹인 납을 얇게 펴서 대용품으로 쓴다. 문제는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급한데 언제 불 피우고 납 녹이고 원하는 형태로 굳히겠는가. 빌은 결국 경포의 화력을 포기했다. 시간이 없다. 그는 대열 한복판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키체커, 틸리! 술통 들고 오는 놈을 최우선으로 제거해라! 그리고 전군, 철수 준비!”


*
 셀레스테는 산책하는 것처럼 걸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과 귀는 전장의 소란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다급한 전장이 먼발치에 존재한다. 나무가 타는 냄새. 술 냄새도 난다. 피와 땀의 냄새는 당연하다. 화약 냄새가 제일 지독하다. 병사들은 거듭되는 고난 속에서도 계속해 고함을 질렀다. 나의 왕이여! 그리고 죽거나 다친다.
 신기한 족속들이다.
 西파롤의 왕이라면 셀레스테도 들어봤다. 요절한 선왕의 아들이며, 북부의 왕으로 등극하기 일보 직전의 군주. 그의 옷에서 떨어진 보풀을 우려낸 물이 병자를 낫게 했다는 강력한 군주. 하지만 저 병사들 중 그 왕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병사들은 그의 고함소리를 들었을까? 그가 입은 갑옷을 보았을까? 그와 같은 빵을 먹었을까? 아직 전쟁도 없는데. 병사는 왕의 이름으로 소녀를 방해한다. 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셀레스테는 웃어버렸다.
 숲. 셀레스테는 점점이 이어진 핏자국과 부러진 나뭇가지들, 그리고 동족의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하고 습한 숲속에서 그녀는 곧 동족들을 발견했다. 총에 맞고, 창에 찔리고, 도끼날에 베인 늑대들. 쓰러져서 헐떡거리는 늑대들 중 다수는 이미 가망이 없다. 셀레스테는 그들 한복판으로 걸어갔다. 곧 거대한 덩치의 괴물늑대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원형으로 선 거대한 식인괴수들에게 소녀는 짜증부터 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셀레스테의 질책에 괴물늑대들은 앓는 소리를 냈다. 장창에 무리하게 돌격했다가 피투성이가 된 괴물늑대가 그들의 앞으로 나섰다. 셀레스테는 그를 노려보다 말했다.
 “그럼 쉬울 줄 알았어?”
 용기 있게 나선 괴물늑대는 다시 뒤로 물러서야 했다. 셀레스테는 숲 밖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익인들이 틈을 만들어주니 빌만 물고 와. 인간들 전부를 상대할 필요는 없잖아.”
 음울한 신음소리가 무리 속에서 새어나왔다. 셀레스테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면서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겁먹은 늑대들은 모두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늑대들은 화약 냄새가 싫었다. 완전무장한 건장한 남자가 싫었다. 괴물늑대들이 있다고 해도 집단이 된 인간은 상대하기 어렵다. 괴물늑대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식인괴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냥에 한정한 이야기.
 셀레스테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사냥이라고 생각해!”
 괴물늑대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셀레스테는 계속해서 외쳤다.
 “뛰어나가! 가만히 있으면 놓쳐! 신도 내려주기 어려운 기회를 낭비하지 마!”
 늑대들의 시선이 교차했다. 셀레스테가 하는 말은 이해했다. 익인들이 술통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밀집대형에 이런 재앙은 또 없다. 지금이 기회다. 하지만 괴물늑대들은 쉽게 나서지 못했다. 그들의 두꺼운 가죽도, 억센 발톱도, 강력한 턱도 집단을 상대하기엔 부족하다. 집단이란 적을 극복하기에는 근소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다.
 셀레스테는 인간의 왕을 떠올렸다. 얼굴도 못 본 왕과 희미한 명예와 그날의 일당을 위해 죽는 병사들. 그런 것보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늑대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 그녀는 괴물들에게 약속을 상기시켜주었다.
 “봄에는 내가 낳을 새끼가 보고 싶겠지?”
 결정타였다. 결국 괴물늑대들은 하나둘씩 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부하들은 셀레스테를 곁눈질하더니 그 뒤를 따랐다. 눈에 보이는 보상, 눈에 보이는 대장. 셀레스테는 한숨을 내쉬었다. 타향의 늑대들을 집단으로 움직이는 경험은 그녀에게 낯선 것이지만, 통솔문제는 해결되었다.
 마지막 늑대가 사라지자 셀레스테는 땅바닥에 털썩 앉았다.
 셀레스테의 짝은 미친 빌을 셀레스테에게 갖다 바치려 했다. 빌은 살기 위해 발악하듯 저항했다. 빌의 동료들은 대장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귀신늑대들은 일개 개인에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셀레스테는 늑대들에게 그녀의 짝이 해내지 못한 일을 강요했다. 익인들은 삶의 터전을 지킨다. 개척민과 병사들은 돈과 왕의 명령으로 싸운다.
 이유는 많다. 모두 죽여라.
 죽은 자의 왕이 속삭이는 느낌이다. 이것은 과연 내 의지인가. 셀레스테는 결코 평범한 사냥이 아닌 복수극을 돌아보았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사냥과 복수를 동일선상에 놓아야 하는지부터가 문제다. 죽은 자의 왕이 듣는다면 폭소할 고민거리다. 죽음은 평등하다며?
 셀레스테는 사고를 그만두었다. 상상력은 지성 있는 것들과 신령한 존재들의 필수조건이지만, 눈앞의 문제가 최우선이다.
 빌이 코앞에 있다.


*
 늑대, 늑대, 늑대.
 빌은 말 그대로 미칠 것 같았다. 철수를 건의하기가 무섭게 늑대 울음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빌은 즉각 건의를 철회했다. 무질서한 도주는 늑대들의 밥이 되겠단 소리다. 하지만 홀더 대위는 빌이 꺼낸 철수방안을 강행코자 했다.
 “요새! 요새까지만 도망치면 승산이 있어!”
 보기 드물게 요새화된 락토 개척촌은 분명 보병대에게 있어 좋은 안식처다. 게다가 수호자도 있다. 사실 빌도 그걸 주목해서 철수를 건의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빌은 자신이 강력히 건의한 방안을 곧바로 뒤집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까지 느꼈다. 홀더 대위는 빌이 철수를 제안했단 사실만 주목했다.
 “늑대는 성벽을 뛰어넘지 못해!”
 “그 성벽 보기도 전에 우리가 물려갈 겁니다.”
 “아냐, 할 수 있어! 자네도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늑대만 아니라면 가능합니다.”
 “늑대까지 고려했던 계산 아닌가?”
 “적어도 지금보단 숲과 거리를 벌려놓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출발하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옥신각신할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지금 당장 철수해! 늑대가 문제라면 더 빨리 철수해!”
 무장하고 대열까지 갖춘 채 늑대보다 빨리 뛰라니, 절대 무리다. 속도가 안 나는데다 익인의 술통이 직격하면 대참사가 벌어진다. 술통을 포기하고 속도를 높이기 위해 대형을 포기한다 해도 장창병은 속도가 느려서 무기를 포기하거나 보병대 전체가 보조를 맞춰야 한다.
 어느 쪽이든 좋을 것이 없다. 빌은 다시 강력히 주장했다.
 “철수는 절대불가입니다. 대형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자네 미쳤나! 술통에 맞아 죽어!”
 “기필코 술통의 접근을 막겠습니다.”
 “어떻게!”
 빌은 포기했던 경포의 화력을 다시 되살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홀더 대위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작전을 내놨다.
 “역공을 걸겠습니다.”
 홀더 대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찔끔찔끔 익인들을 공격하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역공? 게다가 늑대까지 있는데? 홀더 대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혼란스러운 것은 알겠네만, 절대 무리야.”
 “숲은 괴물늑대들의 은신처이지만 전장은 아닙니다. 그 덩치가 숲 속에선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그리고 평범한 늑대는 병사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익인들도 자신들의 숲 안에 불을 지르는 건 힘들 테고, 설령 술통을 떨어뜨리더라도 타격은 줄어들 겁니다. 무엇보다도, 숲은 당장 갈 수 있습니다. 요새는 멉니다.”
 홀더 대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요새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빌은 점잖게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늑대가 숲 밖으로 나오기 전에 우리가 숲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제길, 죽은 자의 왕의 주사위놀이를 즐기는 건가? 자네란 사람은 도통 갈피를 못 잡겠군! 작전회의 때는 곧 죽어도 밀집대형을 해야 한다더니 익인이 오고 나선 내 작전에 동의하질 않나, 결국 밀집대형을 갖추니 철수해야 한다 말하고, 이젠 철수를 철회하고 숲으로 들어가자고?”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익인이 눈치를 깠으니 밀집대형 작전을 밀어붙이지 못했다. 늑대들이 끼어드니 밀집대형을 갖출 수밖에 없었다. 늑대들이 물러가니 화염병 세례를 피하고자 철수를 건의했다. 늑대들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하니 철수를 철회해야 했다. 미친년 변덕처럼 계획이 수시로 바뀌긴 했지만, 그 이유는 어린애도 알 수 있는 논리다.
 빌은 홀더 대위가 자꾸 엉뚱한데서 시간을 잡아먹자 결국 비상수단을 쓰기로 결정했다. 마침 시론이 홀더 대위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최고참인 시론은 똑똑했다. 그는 빌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안다.
 “뒤!”
 빌이 소리치자 홀더 대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커다란 돌덩이였다. 피할 틈이 없었다. 급작스러운 충격에 홀더 대위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자신에게 날아온 돌덩이가 익인이 던진 것인지 누군가 잡고 휘두른 것인지 알지 못했다. 분간해내더라도 별로 상관은 없었겠지만. 주변 병사들은 앞만 보느라 정신없으니 목격자도 별로 없다. 있어도 감히 끼어들 엄두가 안 난다. 시론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런! 저 망할 익인 놈들이!”
 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췄다.
 “지휘관 부상인가. 치명적이군. 방패 위에 눕혀드려라. 사기에 직결되는 문제니까 주변 병사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해.”
 시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보이게 가려두란 말이지. 빌은 가장 중요한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내가 지휘하겠다.”
 “창병중대 부중대장은?”
 “그 친구보단 내가 계급이 높지. 여차하면 윽박질러보마. 이건 비상사태고, 부중대장이 어떤 전장에서 얼마나 싸워왔든 인간 아닌 것들과 싸운 경력은 내가 더 위다.”
 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빌은 한 도시에 도전했다. 괴물늑대를 잡았다. 대륙의 북쪽 끝과 남쪽 끝을 오가며 전혀 다른 대륙도 보았다. 부중대장이 잠시만 우물쭈물해도 지휘권은 빌이 낚아챌 것이다. 좀 과묵해서 그렇지, 말발과 경력이라면 빌도 남들보다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빌은 다시 대형 앞으로 나섰다. 총에 크게 데어본 경험 때문일까. 늑대들의 속도가 느리다. 아직 보이지 않는다. 빌은 소리쳤다.
 “중대, 사격중지!”
 “사격중지!”
 한 병사가 복창하자 총성이 조금씩 멎었다. 빌은 하늘을 보았다. 아직 깨끗하다. 술통은 보이지 않는다. 빌은 도끼를 양손을 꽉 쥐며 소리쳤다.
 “돌격준비!”
 “돌격준비!”
 병사가 또 복창한다. 도끼 위에서 총을 놓는다. 개목걸이 같은 멜빵으로 대충 묶어놓은 총을 대각선으로 멘다. 도끼를 양손으로 잡고 들어올린다. 준비 완료.
 빌은 숲 속의 암흑을 향해 소리쳤다.
 “돌격!”
 빌의 발이 제일 먼저 떨어진다. 그는 곧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부하들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도끼를 하늘로 쳐들었다. 얼떨떨한 분위기의 창병중대에도 곧 돌격명령이 떨어졌다. 시론은 광적으로 소리쳤다.
 “돌격! 살고 싶으면 돌격!”
 부분적이고 발작적인 돌격이 이어졌다. 요행히 몇 개의 자포를 장전하는데 성공한 포병들, 그리고 게드 장로가 제일 마지막으로 그 뒤를 따랐다. 창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무조건 앞으로 뛰어갔다. 이미 보이지 않게 된 빌과 총병들을 뒤따르며. 시론은 이제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다시 배틀크라이를 외쳤다.
 “이런 제기랄, 나의 왕이여!”
 동시에, 저 앞에서 늑대들의 비명이 터졌다.


*
 빌은 커다란 나무뿌리를 넘어 평평한 돌을 밟고 뛰어올랐다. 때마침 그의 코앞으로 한 늑대가 마주 뛰어올랐다. 빌은 공중에서 도끼로 늑대를 찍었다. 늑대는 두개골이 박살나면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빌은 관성 때문에 땅을 굴렀다. 젖은 흙과 낙엽이 전신에 달라붙었지만 빌은 털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넘어지자마자 일어났다.
 눈앞에는 괴물늑대. 새카만 털 사이의 붉은 잇몸과 누런 이빨이 보인다. 빌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코를 향해 흙 묻은 왼쪽 주먹을 내질렀다. 도끼에 정신을 집중하던 괴물늑대는 번개 같이 찾아온 고통에 뒤로 물러서야 했다. 빌은 그 괴물늑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꺼져라!”
 이번엔 주먹이 아니라 도끼날. 앞발로 싸맨 코를 향해 도끼날이 날아들었다. 괴물늑대는 뒤로 펄쩍 뛰었다. 도끼날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괴물은 다시 앞으로 뛸 준비를 했다. 그러나 총병들이 빌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미리 장전된 소총과 권총을 일제히 겨누었다.
 “대장, 엎드려!”
 빌과 괴물늑대가 동시에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앞으로 뛰려고 몸을 웅크리다 황급히 방향을 바꾼 괴물이 더 볼품사납다. 그러나 덩치가 워낙 크다보니 총탄 세례를 완전히 피할 순 없다. 대여섯 자루의 총이 한꺼번에 불을 뿜자마자 괴물늑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몇 발의 총탄이 애꿎은 나무줄기를 부쉈다. 빌은 자신의 몸 위로 떨어진 파편을 한번 털어내곤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부하들. 그는 명령했다.
 “미친 빌이 명령한다! 쓸어라!”
 총병들의 함성이 뒤따랐다. 머리 위를 괴롭히던 익인은 이제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망가뜨릴까봐, 또는 울창한 나무에 시야가 방해되어 더 이상 투척 공격을 못했다. 지금이 기회다. 빌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불태우고 부숴라! 익인 놈들의 재산을 깡그리 없애라!”
 그때 빌을 향해 한 늑대가 달려왔다. 괴물늑대는 아니지만 체구가 꽤 컸다. 당황한 총병들이 도끼나 검을 들기 전에 늑대는 도약했다. 늑대는 빌의 뒤를 노릴 생각이었다.
 도끼자루가 부채꼴을 그리면서 늑대는 위턱이 쪼개져 나무에 처박혔다. 늑대는 격통에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운명은 결정되었다. 빌은 도끼날을 나무에서 뽑았다. 늑대는 나무에 박힌 채 떨어지지 못했다. 그는 도끼로 버둥거리는 늑대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거친 숨소리가 멎는다. 빌은 떨어진 위턱을 주워들었다. 그는 그걸 총병들에게 던지며 외쳤다. 
 “늑대 놈들은 오는 족족 박살내버려!”
 명령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도끼날이 소나기처럼 쏟아지자 돼지와 양을 가둔 우리가 부서졌다. 숨겨진 창고는 남김없이 드러나 불씨가 던져졌다. 부랑자들의 빈 천막들마다 칼날이 날아들었다. 병사들은 날붙이와 횃불을 휘두르며 늑대들을 쫓아냈다.
 틸리와 석궁수들은 아예 남은 화약뭉치들에다 불을 붙여선 괴물늑대들에게 마구 던져댔다. 키체커와 코마는 익인들의 기중기를 이용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잠시 뒤 늑대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총탄에 쓰러졌다. 마누크는 지형지물을 이용해 작은 포대 하나를 즉석에서 만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몇몇 총병들과 함께 재장전을 서둘렀다. 빌은 그의 친우 게드 장로를 찾았다. 그는 드디어 잡동사니의 정리를 다 끝냈다. 그는 진흙이 들어간 작은 유리병을 꺼내 자신의 몽둥이 끝에 묶었다. 그 다음, 장로는 유리병을 나무에 후려쳐 깼다. 그 순간 물에 젖은 흙이 거대한 불꽃을 토해내는 기적이 실현되었다. 늑대들은 기겁하며 물러섰다. 장로는 소리쳤다.
 “타 죽지 않게 조심해라!”
 불의 검이 하늘로 휘둘러지는 꼴을 본 빌은 혀를 찼다. 저건 아까 꺼냈어야지. 그는 목재가 상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불 같이 화를 내고 포효하던 전사는 이미 없다. 그곳에 존재하는 건 냉정하게 손익을 계산하고 적의 동태에 온 정신을 쏟는 노인이다.
 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터전이 불타고 있다. 힘겹게 길러왔을 가축들이 산 채로 찢겨져 분뇨 섞인 진흙탕에 버려졌다. 어설프게 만든 오두막들이 부서졌다. 항아리는 깨졌다. 나무 위에서 어린 익인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폭력과 마주친 약자들의 아우성. 흔해빠진 광경이다.
 빌과 셀레스테도 그 광경 속에 있다.
 빌은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수풀을 짓밟았다. 그는 앞으로 걸어갔다. 병사들을 제치고 밀치며, 그는 늑대들이 도사리는 곳까지 걸어갔다.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흉흉한 눈빛들이 빌을 노려보았다. 돌격 직전이다. 다시 온다. 빌은 도끼자루를 꽉 쥐었다. 빌은 생각했다. 냉정하게 계산해라. 머리를 쳐. 빌은 소리쳤다.
 “나와라!”
 응답은 없었다. 병사들은 날뛰기를 멈추곤 경애하는 대장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빌은 그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다시 소리쳤다.
 “숨지 마라!”
 늑대들을 향한 도발이라고 생각한 병사들 중 일부가 빌의 말을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병사들은 온갖 야유와 독설을 사방으로 쏟아냈다. 우린 돌격해왔다! 너희도 와봐! 부딪혀보자! 빌은 그 소음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다시 외쳤다.
 “너는 나를 죽인다!”
 정적. 불씨가 젖은 나뭇가지를 태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병사들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시론은 당황하여 빌에게로 달려왔다. 그가 빌의 어깨를 짚었지만, 빌은 멈추지 않았다.
 “죽은 자의 왕께 맹세한다!”
 키체커의 총성마저 멎었다. 장로의 불길이 꺼졌다. 마누크와 경포병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틸리와 그의 석궁수들은 손에 쥔 화약주머니가 폭발 직전이란 걸 깨닫고 황급히 던져서 위기를 모면했다. 깨진 코를 붙든 채 쓰러져 쉬고 있던 홀더 대위는 한마디만 했다. “미친 놈.” 빌은 그 소릴 분명히 들었다. 빌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싸움과 죽음은 숙명이다!”
 홀더 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하지. 북부 숙명론. 빌은 다시 선언했다.
 “나는 너를 죽인다!”
 다시 정적. 병사들은 불편한 침묵 속에서 늑대들과 빌을 번갈아 보았다. 곧 시선은 한곳으로 쏠렸다. 늑대들이 있던 곳에서 확연히 격이 다른 늑대가 걸어 나왔다. 커다란 덩치의 검은 늑대. 평범한 괴물늑대가 아니다. 빌과 시론, 키체커는 그 정체를 알았다.
 빌은 도끼자루를 고쳐 쥐었다. 


*
 셀레스테는 빌의 미친 짓거리를 모두 살펴볼 수 있었다. 그녀는 빌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빌은 상냥하던 남자를 죽였다. 그가 살기 위해서였다. 그 남자는 빌에게 덤볐다. 여자에게 물어다 줄 먹잇감으로 알았으니까. 간단한 이야기다. 땅에 발 딛고 서려면 다른 발 달린 놈을 죽여야 한다. 가죽시장의 사치품도, 유물을 탐하던 북부재단도, 목재의 값을 계산하던 수호자도 사실 그런 살해의 연장선에 있을지도 모른다.
 빌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껄끄러워할 것 없다.
 살려면 죽여라.
 너나 나나.
 죽는다.
 셀레스테는 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인연을 죽인다.’
 떨어져 나온 거짓말쟁이, 원초적인 이유의 살해자,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뢰배.
 그것이 셀레스테가 빌에게 받은 인상이었다. 그는 죽어도 후회가 없기에 앞으로 나선 것이 아니다. 빌은 셀레스테를 죽이기 위해 섰다. 가만히 있으면 죽임을 당할 판이니, 자신이 살기 위해서 싸운다. 그러니까 나와. 이놈들은 내 상대가 되지 않아. 내가 너를 죽일 수 있게 해. 네게도 기회를 줄 테니.
 “죽은 자의 왕에게 맹세한다고?”
 셀레스테가 늑대의 모습으로 말을 하자 인간들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그러나 빌은 꼿꼿이 선 채로 답했다.
 “그는 내가 옳다 말할 것이다.”
 셀레스테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당신, 찾는 게 있다지?”
 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셀레스테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럼 그것도 죽은 자의 왕에게 물어봐.”
 그 순간 커다란 술통이 빌의 바로 뒤로 떨어졌다.


*
 장로회의 수호자는 부들부들 떨었다. 황동그릇에 뜬 왕의 뜻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렇게 욕심이 많아서는 무덤을 크게 파야 하겠소.’
 브롬 장로는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죽은 자의 왕은 위대하다. 공포 그 자체다. 가장 지독하며 완벽한 살해자이기에 그렇다. 그가 행차의 대가로 개척촌의 모든 생명을 거두어가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브롬 장로는 다시 북부의 호의를 담았다. 잠시 뒤 왕의 뜻이 답했다. 그건 지나치게 애매모호하고 당연한 말이어서,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장로도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이기는 자가 살아 나오겠지.’
 수호자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왕은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 아니다. 그가 말할 뿐이다. 있는 힘껏 준비하고 예를 갖춘 다음에는 순전히 왕의 뜻을 기다릴 뿐. 왕이 다시 답했다.
 ‘나는 이미 존재한다.’


*
 익인들은 마구잡이로 술통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이래 파괴되나 저래 파괴되나 그들의 숲에 더 이상 미래는 없다. 익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남들에게 망가지는 꼴을 보느니, 스스로 파괴하는 한이 있더라도 침입자들을 물리치기로 결정했다.
 빌은 술을 잔뜩 뒤집어 쓴 채 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엘을 떠올렸다. 지금쯤 울고 있겠군. 빌은 도끼 자루를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술통이 또 떨어졌다. 이번엔 늑대 무리 한복판이었다. 더는 피아를 가리지도 않는다. 또 떨어졌다. 이번엔 불타는 오두막에 떨어져 그대로 폭발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숨이 막힌다. 하지만 셀레스테는 기다리지 않는다. 늑대들이 뛰쳐나오는 순간 빌은 도끼를 들어올렸다. 셀레스테의 이빨이 코앞이다. 그는 소리쳤다.
 “찢어발겨!”
 동시에 날붙이들이 뛰쳐나왔다. 셀레스테는 주둥이가 아니라 오른쪽 앞발로 그녀를 가로막은 총병들을 쳐냈다. 괴력 앞에 병사들은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론과 마누크가 뒤따라 셀레스테에게 덤벼들었다. 요란한 총성. 그 직후 달려드는 도끼와 망치. 셀레스테는 앞발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자 격노했다. 그녀는 상처투성이의 앞발을 절룩거리더니 곧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녀의 도약력은 다른 늑대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시론과 마누크의 무기는 허공을 갈라 하마터면 서로를 죽일 뻔했다. 시론이 비명을 질렀다.
 “대장!”
 셀레스테가 낙하하는 곳에 빌이 있었다. 빌은 재빨리 몸을 굴렸다. 아슬아슬하게 셀레스테의 몸뚱이가 빌을 비켜갔다. 압사는 면했군. 빌은 중얼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러나 셀레스테가 더 빨랐다. 상처투성이 앞발이 빌에게로 날아들었다. 빌은 황급히 양팔을 들어올렸다. 발톱과 도끼 자루가, 발바닥과 사슬갑옷이 부딪혔다. 빌은 그대로 날아갔다. 요행히 충격이 분산된 데다 힘이 없는 공격이라 골절은 없다. 되려 셀레스테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움찔거렸다. 나무에 부딪혀서 멈춘 빌은 허리가 아프다고 느꼈다. 그는 재빨리 주변공간을 파악했다. 그는 술을 뒤집어쓴 상태다. 조금만 불씨가 튀어도 위험하다. 빌은 땅바닥에서 젖은 천을 찾아 쥐었다. 이전엔 뭘 닦았는지 모를 더러운 걸레짝이었다. 그는 황급히 도끼와 몸에 묻은 술을 닦아냈다.
 당연하지만, 전부 닦을 순 없었다. 셀레스테는 시간을 더 주지 않았다. 몇몇 창병들이 장창을 들이대는 것을 도리질 한번으로 다 쳐내고, 빌에게 전속력으로 달려든다. 몸통박치기다. 늑대답지 않은 공격에 빌은 혀를 찼다. 셀레스테의 어깨가 빌을 피해서 그 옆의 굵은 나무줄기를 강타했다. 그 순간 빌은 그녀가 표적을 헷갈릴 정도로 다쳤는지 의심했다. 오답이다. 총성과 함께 들려오는 키체커와 코마의 비명소리에 빌은 미간을 좁혔다. 셀레스테는 빌을 공격한 게 아니라 저격을 피했다. 오발탄이 어디로 날아갔는지는 파악이 되지 않지만, 분명 셀레스테를 맞추진 못했다.
 셀레스테의 눈이 빌에게로 돌아갔다. 빌은 자세를 고치고 도끼를 겨누었다. 위협적으로 도끼를 내밀었다가 빼기를 반복하자 셀레스테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조금 전과는 의미가 좀 다르다. 가소롭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 도끼에 네 짝이 죽었다.
 빌은 멀쩡한 앞발로 공격이 날아오는 걸 짐작했다. 그는 셀레스테가 다친 발쪽으로 몸을 날렸다. 셀레스테의 배 밑을 통과한 빌은 잽싸게 뒷다리를 도끼날로 찍었다. 거체가 뒤흔들린다. 시론과 마누크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시론은 도끼로 셀레스테의 꼬리를 인정사정없이 찍었다. 그 직후 생물처럼 발광하는 꼬리에 맞아 허공을 날았다. 마누크는 망치를 못으로 삼아 그녀의 앞발로 달려들었다. 상처 후비기다. 셀레스테가 얌전히 있어주진 않았다. 몸이 날쌔게 반전하더니 꼬리가 마누크를 때렸다. 반대쪽으로 날아가는 마누크를 본 시론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안 쉽다니까.”
 빌은 한탄하는 시론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는 신임하는 부하를 짐짝처럼 질질 끌어가며 소리쳤다.
 “창병!”
 황급히 달려온 10명의 창병들이 2열 횡대로 늘어섰다. 지형지물을 살려 좌우에는 엉망진창의 장애물을 놔둔 채로. 빌은 그들의 창대 아래까지 기어간 다음 부중대장을 그곳에 내팽개쳤다.
 “총이나 쏴!”
 빌은 다시 창대 아래로 뛰쳐나갔다. 셀레스테는 창병들을 확 뭉개버리려다 빌의 움직임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창병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오는 꼴을 본 시론이 중얼거렸다.
 “명령대로.”
 시론은 권총을 빼들었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더니 실소했다. 지난번의 셀레스테는 이걸로 위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다. 시론은 권총을 배 위에 올려놓고는 화승총을 대신 들었다. 애석하게도 비었다. 누운 채로 장전하는 건 안 익숙한데. 시론은 앓는 소리를 하며 화약통의 마개를 열었다.
 틸리는 총탄 몇 발에도 쉽게 멈추지 않는 괴물딱지들을 석궁으로 잡긴 힘들다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틸리와 그의 동료들은 평범한 늑대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빌 대장은 상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셀레스테를 달고서 뛰어오는 대장의 모습에 틸리는 말 그대로 경악했다.
 “어떻게 하라고요?”
 “화약!”
 짧고 굵은 대답. 틸리는 짧은 시간 동안 숱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 생각들이 정리되기도 전에 그는 화약뭉치들을 마저 꺼냈다. 마지막. 주저할 틈도 없다. 그는 황급히 남은 화약뭉치 모두에게 불을 붙이곤 빌의 머리 위로 던졌다. 그 즉시 셀레스테의 주변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그녀는 고통과 폭음, 섬광에 빌의 추격을 중단하고 당장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치명타는 아니다. 화약을 종이에 싸놓은 폭탄에 파편효과까지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 지나치게 과하다. 틸리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쉽게 말해, 셀레스테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난 할 일 다 했어!”
 틸리의 말에 가장 공감하기 어려운 것은 키체커와 게드 장로였다. 재장전을 서두르던 키체커는 셀레스테가 정신없이 날뛰는 통에 조준이 어려울 것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툭하면 빌과 셀레스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진다. 잘못하면 빌이 맞는다. 게드 장로는 더 한심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효과가 지극히 의심스러운 늑대 쫓는 향을 사방에 뿌려댔다. 조금 전의 위기에서도 안 쓸 정도로 사용을 고려치 않던 물건이었다. 당연히 광분한 늑대들을 상대로는 효과가 거의 없었다. 게드 장로는 셀레스테의 뒤통수에다 철퇴를 냅다 집어던지고는 부리나케 키체커가 매달린 나무 위로 올라가버렸다. 빌은 그런 게드 장로를 보고 외쳤다.
 “당장 쓸 만한 것 찾아내지 않으면 해고하겠다!”
 게드 장로의 대답을 들을 정신은 없었다. 늑대 하나가 빌의 옆에서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다. 빌은 그 늑대에게 왼팔을 물린 채 데굴데굴 굴렀다. 불행히도 도끼를 놓쳤다. 팔 보호대를 뼈다귀 씹듯 깨무는 늑대의 배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턱이 벌어지질 않는다. 빌은 늑대와 함께 나무뿌리들 위를 굴러 커다란 구덩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뾰족한 나뭇가지, 돌멩이를 닥치는 대로 집어 늑대의 배를 짓이긴 후에야 해방되었다. 그 직후 셀레스테가 뒤따라 날아올 때 빌은 암울한 기분을 느끼며 검을 뽑았다. 일단 도끼부터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빌은 일단 구덩이를 뛰쳐나갔다. 셀레스테가 곧바로 쫓아왔다. 빌이 계단처럼 뛰어올라야 할 나무뿌리들을 그녀는 너무 가볍게 넘는다. 숱한 부상을 입고도. 주변의 병사들이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으면 빌은 벌써 잡혔을 것이다.
 다행히 도끼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자루까지 쇠로 만들어진 도끼. 빌은 재빨리 그것을 잡고는 커다란 고목을 등지고 뒤로 돌아섰다. 셀레스테가 절룩거리면서 달려온다. 빌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북부 비약. 30년 전. 왕의 정예병.
 성벽을 깨고 광야를 달린다.
 빌은 수통을 꺼내들었다. 마개가 열리고 역한 냄새가 풍겨온다. 희석하지 않은 회백색 액체. 빌은 하늘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그 약을 목구멍으로 쏟아 넣었다. 셀레스테도 그 비약을 안다. 그녀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한 방울이라도 더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빌을 죽여 버리기로 결정했다.
 둘의 시도는 같은 이유로 동시에 무산되었다는 점에서 꽤 특이하다. 이제까지 떨어졌던 것보다 훨씬 큰 술통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폭발하지 않더라도 술통은 그 질량에서 충분히 폭탄이다. 특히 셀레스테보다 훨씬 체구가 작은 빌은 산산조각 나는 술통 속에 들어온 착각을 느꼈다. 파편과 액체가 놀라운 속도로 빌을 강타했다. 그는 고목을 등진 채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버렸다.
 빌은 의식을 잃었다.


*
 새하얀 세상.
 빌은 벽도 바닥도 없는 공간을 걸었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 의문도 생기지 않았다. 빌은 생각했다.
 ‘꿈같군.’
 꿈인 걸 깨달아도 깨지 않는 꿈같다. 그건 마치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가 “나도 알 것 다 알아.”라고 중얼거리는 기분이다. 이런 꿈은 참 드물었는데. 빌은 혀를 찼다. 다행히 분명 꿈이 깰 때가 된 것 같았다. 공간의 가운데이자 끝에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전투 중에 술 폭풍을 맞는 사람은 처음 봤다.”
 시각적 혼란 속에서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느낌을 줬다. 새카만 사내였다. 처음엔 멀어서 점처럼 보였다. 그러나 빌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그가 허공을 의자처럼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손목을 감추듯 팔짱을 낀 상체가 보인다. 빌의 반 보 앞에 나타났다.
 “여전히 특이한 전장만 끌고 다니는군.”
 빌은 사내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새카만 천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싼 젊은 사내. 머리에는 작고 낮은 고깔모자를 썼고, 눈은 황금 가면으로 가려져 있다. 가면은 콧등에서 끝났는데, 작은 황금구슬들을 묵주 같이 여럿 엮어 턱 끝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려 놨다. 가장 인상적인 건 전신에 두른 녹슨 쇠사슬들이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새빨간 녹이 흔들리며 옷자락을 자꾸 스쳤다.
 “브롬 장로의 부름은 솔직히 반갑지 않지만, 자네는 정말 반가워. 미친 빌, 아직도 헤매는가?”
 남자가 웃으며 인사했다. 빌은 그가 누군지 안다. 난생 처음 보는 옷차림, 난생 처음 듣는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영혼 깊은 곳에서 남자의 정체를 소리쳤다. 빌은 무릎을 꿇었다. 사내는 빌이 내려다볼 존재가 아니다. 사내가 빌을 올려다보는 것도 격이 안 맞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소리칠 배짱도 생기지 않는다.
 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는 당신을 뵙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사내는 여전히 웃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빌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며 말을 끝맺었다.
 “죽은 자의 왕께 경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