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영웅의 발자취 2 - 방패(防牌)

2010.09.13 07:28

비벗 조회 수:247 추천:2

extra_vars1 17 
extra_vars2 134942-1 
extra_vars3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수풀을 발로 짓이기고, 단도로 덩굴을 잘라 가며 전진한다. 오랫
동안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소로는 겁 없는 모험자에게 자연의 위
대함을 가르쳐 주겠다는 듯 빽빽한 녹색에 뒤덮여 있었다. 간간이
뱀이나 작은 산짐승들이 우리의 소란에 놀라 도망간다.


 


“힝, 이 년 전엔 안 이랬는데?”


 


유리에가 이런 길을 안내한 게 미안했던 듯 내 뒤에 와서 중얼거
렸다. 그야 산길이란 게 여름 한 철 지나고 나면 원형도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게 상식이지만, 이 상태로 보면 이 길은 일 년 이상은 사
람의 발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산길은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 거다. 이용하는 등산객이 급격히 줄어든 거겠지. 생각해 본
다. 대륙 7경 중 하나인 일출산이니 그 사면에는 수많은 등산객이
만든 수많은 등산로가 있을 것이고, 개중 평판이 별로인 등산로에
발이 끊기는 것도 다반사이리라. 우리는 그런 길 중 하나에 억지로
발을 들였을 뿐이다. 유리에의 잘못이라고 말할 순 없다.


 


응……?


 


가만. 그렇게 생각하면, 그 갈림길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가다 보
면 제대로 된 길을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산길이 거미줄처럼 잘
뚫려 있다는 것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이렇게 유명한 관광명소
라면 과연 어떨까? 억지로 뚫고 온 건 바보짓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발을 돌리기에는 너무 많이 와 버렸다. 게다가 슬슬 풀
이 낮아지고 나무들이 많아지는 게, 조금만 더 뚫고 가면 높은 나무
들 사이를 산책하듯 걸을 수 있을 듯했다.


 


우리는 조금 더 걸었고, 높은 나무들 사이에 섰다. 그러나 산책하
듯 걷기는 어려워 보였다. 난 애써 평정을 가장한 채 뒤로 돌았다.


 


“다들 그 자리에 서 주세요.”


 


일행은 그 자리에 섰다.


 


“일드, 이 자리를 지켜라.”


 


주춤주춤 내 옆에 서는 일드.


 


“학자 여러분, 잠시만 그 자리에 계세요.”


 


당황해서 서로 둘러보는 학자들.


 


“마물을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웅성웅성, 두리번두리번.


 


도저히 믿지 못하는 눈치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이다.


 


대륙 7경 중 하나인 일출산의 등산로에서 마물 따위를 만나게 되
다니, 대체 있을법한 일이냔 말이야!


 


하지만 저쪽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까만 물체는 틀림없는 클라
우디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포악성 하나만큼은 마물들 중 수위라
고 할 수 있으며, 언제나 큰 무리를 지어 행동한다는 점이 주의사항
인 마물- 클라우디스. 아직 거리가 먼데다 원체 오감이 둔한 놈들이
라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피해서 가겠다든
가, 그런 요행수를 생각할 만한 상황도 아니다. 자칫 잘못해 그 무
리에 포위당하기라도 한다면 학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역시
지금은 내가 홀로 소탕하고 오는 게 옳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나의 기사, 엘리제
가 길을 막듯이 서 있었다.


 


“아, 그, 죄송합니다, 엘리제. 당신에게 먼저 말했어야 하는데.”


 


문득 생각이 났다. 캐롤린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종자는 기사의
허락 없이 전투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기사에게 전투기술을 배워 악
을 타도할 힘을 갖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선과 악을 구분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나? 그래서 ‘명예의 상징’인 기사
가 전투의 정당성을 확인해 주고 나서야 종자는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가 가서 저 마물들을 치우고 오겠습니다. 어, 한 식경이면 돼
요.”


 


엘리제는 내 제안에 따뜻하게 웃었다.


 


“함께 가자꾸나, 루포리여. 우리가 함께하는 첫 전투가 될 것이
다.”


 


에엑!?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역사와 모든 나라에서 기사의 정점
으로 인식되는 영웅기사님- 엘리제와 함께 마물을 소탕하러 간다니!
기쁘다. 정말 영광스런 일이다. 나는 이 기분을 내 기사님께 전하고
싶었다.


 


고금 제일의 기사님을 수행해 산길을 걷는다. 조용히 걷는다. 머
릿속엔 감동의 소용돌이가 들끓고 있다.


 


어떤 말로 감동을 표현할 지 고민하며 걷다가, 드디어 결정했다.
몸을 돌려 엘리제를 바라본다.


 


“저기, 귀애와 함께 싸우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리제는 한동안 멈춰선 채 나를 응시했다. 왠지 얼굴이 붉었다.


 


“그, 그대는 지금, 단어를 잘못 사용한 것 같다.”


 


불안에 허우적대는 내게서 엘리제는 시선을 돌렸다.


 


“아마 말이 바뀐 것이겠지. 그대가 그런 뜻으로 말했다고는 생각
지 않는다.”


 


그녀는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붉은 얼굴을 살짝 숙인
다. 이럴 때의 모습은 영락없는 명가의 규수다. 역전의 기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아니, 그게 아니라, 난 대체 어떤 단어를
또 틀린 걸까? 이 대사는 기사 소설에서 자주 봤는데?


 


‘귀하와 함께 싸우게 되어 영광입니다.’


 


음, 정말 모르겠다. 난 잘못 말하지 않았다. 아마 엘리제의 말대
로 어떤 단어의 뜻이 바뀐 모양이다. 우리는 그렇게 납득했다.


 


 



무척 무거울 게 분명한 풀 플레이트 메일 차림의 기사님은 놀랍
도록 조용히 내 등 뒤를 따랐다. 물어본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엘리
제의 갑옷은 마법 갑옷인 것 같다. 그야 그런 마법 갑옷이 정말 있
냐고 물어 보면 마법이 없는 시대의 범상한 평민인 나로선 답이 궁
하지만, 들은 얘기론 플레이트 메일만 해도 부품을 모두 모으면 열
살짜리 아이 몸무게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런 무게를 몸에 걸치고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채 일출산 정상을 넘는다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엘리제는 여전히 평온하게 걷고 있다.


 


뒤를 돌아보며 눈동자를 굴리는 날 보고서 그녀는 멋쩍은 듯 미
소 지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진정하여라. 앞을 보고 걸어야 기습에
대비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 아아, 죄송해요.”


 


맞는 말씀을 하셨기에 고분고분 앞을 보았다. 클라우디스의 무리
는 아직 한 다경은 걸어야 닿는 위치에 있다. 소리를 죽이며 걷는
다. 등 뒤에서 들리는 엘리제의 부드러운 발소리가 귀에 즐겁다.


 


“루포리여, 그대는 참 눈이 밝구나.”


 


스무 걸음쯤 더 걸었을까, 엘리제가 그런 말을 했다. 당황하지 않
고 대답한다.


 


“저 말씀입니까? 저로 말하자면 눈이 밝기로 둘째가라면은 서운
한 사람입죠.”


 


그렇다. 지금도 발소리가 가 닿기 어려울 만큼 멀리 떨어진 계곡
에 진을 친 클라우디스 무리를, 나는 이백 걸음은 더 떨어진 곳에서
한 번 스친 눈길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봄날의 나뭇잎들 사이로 보인 그 작은 흔적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흔치 않을 것이다, 에헴.


 


“좋은 일이다. 밝은 눈은 전사에게 중요한 자질 중 하나이지. 뛰
어난 전사일 것이라 이미 확신하고 있지만, 처음으로 그대와 함께할
이 전투가 내게는 더없이 기대된다.”


 


“아, 예? 예…….”


 


그러고 보니, 나 지금 이 분과 함께 싸우러 가는 거였지!


 


그저 ‘감동적이다’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 앞에
서 받아쓰기를 검사받을 때보다 더한 부담감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
작한다.


 


엘리제과 함께 싸운다는 건 단지 영웅기사님의 검을 견식하게 된
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종자로서,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보좌하며 내 검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내 형편없는 검술을!


 


으아아…… 소리 없이 신음하며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클라우디스- 무리 짓는 최하급 마물. 덩치는 작고 네 발로 걷는
다. 주 무기는 날카로운 이빨, 노리는 곳은 보통 다리와 무기를 들
지 않은 팔이다. 예전 잡종을 들고 싸울 땐 한 번 칼질로 두 마리씩
양단하곤 했지만 지금 내가 가진 검은 롱소드. 다른 전술을 써야 한
다.


 


떠올린다. 세 마리의 클라우디스가 정면에서 달려든다. 단번에 벨
수는 없다고 가정한다- 좌측에서 위협하는 한 놈을 발길질로 떨어
뜨리고 뛰어오른 한 놈의 목을 노려 횡으로 벤다. 목은 한 번에 베
어낼 수 있다. 오른쪽이 빈다- 다른 한 놈이 뛰어오르고, 발에 맞았
던 놈도 틈을 본다. 재빠른 몇 놈이 뒤쪽으로 돌아들어온다. 뛰어오
른 놈을 돌려차기로 날려 보내고 앞으로 몸을 날리며 한 놈을 더
벤다. 포위에 뛰어드는 격이지만, 클라우디스와 싸우는 것이니 감수
할 일이다. 왼손에 든 칼집으로 좌측을 견제하며, 겁 없이 다가온
놈을 밟고 뛰어오른다. 그렇게 놈들의 뒤에 서자 작은 혼란이 만들
어진다. 검을 뿌려 두 놈을 더 벤다-


 


음, 롱소드를 쓰던 기간도 꽤 길었던 만큼 전술에 결실은 없었다.
문제는 몸인데, 커다란 검에 익숙해져 있어서 빈틈이 생길지도 모른
다. 조심해야지. 미리 몸을 좀 풀어둘까?


 


살짝살짝 어깨와 허리를 움직여 본다.


 


“전법의 재확인인가. 그대는 준비성도 좋구나. 준비가 부족한 전
사는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법이지. 바람직하다.”


 


등 뒤에서 얼핏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는 모양이다. 역시 기사
님. 종자로서 감탄해 본다.


 


“그, 너무 칭찬하셔도 곤란한데요. 저 그다지 세지 않거든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대는 내가 선택한 종자이니, 자신감을 가
져도 좋다.”


 


나는 자신감을 갖고 한층 맹렬하게 전술을 탐구했다.


 


그렇게 걷던 것도 잠시, 우리는 클라우디스 무리에 근접했다. 계
곡의 사면에 얼기설기 자리한 그것들은 서른 마리쯤 되어 보였다.
나 혼자였다면 버거웠을지도 모를 숫자. 그렇지만 엘리제와 함께 온
지금 그것들은 곰 앞의 강아지만큼 작아 보인다.


 


실제로는 작은 멧돼지 크기인 그 마물들은 우리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코를 땅에 박거나 나무에 몸을 부딪치는 등 도무지 알 수
없는 짓들을 하고 있다.


 


하긴, 마물이 하는 짓을 알 수 있다면 그것도 이상하겠지.


 


“엘리제, 여기서부터 돌격할 생각입니다.”


 


우리는 사면의 비교적 위쪽에 있었고, 달려 내려가며 공격한다면
기선제압이 가능할 듯했다. 놈들이 제대로 포위전을 펼친다면 이쪽
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초반에 최대한 피해를 주는 것이 대 클라
우디스전의 정석이었다.


 


엘리제는 수긍했다.


 


“따르도록 하마. 뒤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터무니없이 든든한 은빛의 기사님. 왠지 긴장이 풀어지는 걸 느끼
며, 심호흡을 한 번 한다.


 


“그럼, 이제-”


 


뒤로 돌아 계곡을 마주한다.


 


“돌격합니다!”


 


바위를 박차고 뛰어내린다. 마물들은 갑작스런 외침에 놀란 듯 긴
장한 채 두리번거리고 있다. 최하급 마물에게 기습을 극복하는 정신
력 따위 있을 리 없다. 바위들을 건너뛰며 빠르게 접근한다. 뒤에선
엘리제의 철제 부츠가 바위를 부술 듯 박차며 쇳소리를 냈다.


 


콰앙- 철컹!


 


그 굉음, 그 무게감은 분명 풀 플레이트 메일의 그것이었다.


 


아니, 저거, 마법 갑옷이 아니었단 말야!?


 


“이야압!”


 


생각을 뒤로 미뤄둔 채 시뻘건 눈을 동그랗게 뜬 마물 두 놈을
잇달아 베었다. 곧장 왼쪽으로 치고 나간다. 엘리제가 오른쪽으로
돌아들며 치고 나가면, 마물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을 수 있으리라.
포위당할 가능성은 줄이는 편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왼쪽에서 세 마리째 마물의 목을 베었을 때, 나
는 맞은편에 도달한 엘리제의 검술을 목도했다.


 


“하앗!”


 


눈을 빼앗겼다.


 


묶지 않은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은 정말 비단의 길을 연상시켰다.
그 빛의 길이 한 번씩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미스릴 레이피어가 섬
광과도 같이 빠르게 두 개, 세 개의 선분을 만든다. 그것은 찌르기
였다. 그녀가 마물을 인식한 순간, 그 마물의 급소를 향해 검이 뻗
어나간다. 그녀가 검을 움직이는 것인지, 검이 그녀를 움직이는 것
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름다웠다. 조금도 화려하지 않은 교본적인 찌르기,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동작이, 어째서인지 아름다웠다.


 


절제된 움직임으로 오로지 검을 찌르고, 회수하고, 다시 찌른다.
결코 감성을 자극할 수 없을 터인 단순한 움직임, 빠르기만 한 공
격. 그럼에도 그것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아름답다. 그
녀가 아름답고, 그녀의 걸음걸음이, 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움직임
이, 전광석화와도 같은 검의 궤적이 아름답다. 더하거나 뺄 것이 없
는 완성된 예술이었다.


 


“으랏차!”


 


잠깐의 틈을 보고 달려든 마물 한 놈을 베고 두 놈을 발로 차 냈
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지금이 보름날의 달밤이었다면, 하고.



새하얀 달빛을 흩뿌리는 엘리제의 검은, 분명 달빛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


1. 세상은 결점으로 이루어져 있고,


결점들이 모여서 완전한 세상.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결점 투성이라서 완전한 모양입니다.


저 자신도 결점 투성이면서 가끔은 타인의 결점을 욕합니다.


그런 오만하고 이기적인 모습 또한 완전한 우리의 일면이겠지요.


 


2.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코드기어스를 다시 보고 있습니다.


글을 쓸 땐 정말 다른 작품을 보아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작품을 보게 되면 자만하게 되고,


위대한 작품을 보게 되면 압도되고 맙니다.


... 지금 압도되어 있습니다. 간신히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