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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기묘한 이야기-Repetition(반복)

2010.10.02 22:49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144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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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Murder』 vs 『Marginal』



"증오로 감춰진 슬픔을 보았는가? 분노로 감춰진 슬픔을 보았는가? 슬픔으로 감춰진 증오를 보았는가? 슬픔으로 감춰진 분노를 보았는가? 웃음으로 위장된 피눈물을 보았는가? 가면 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았는가? 인생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았는가? 가면만을 쓰고 살아야 하는 어릿광대들을 보았는가? 웃는 가면 속에서 슬피 우는 이들을 보았는가? 이 세상은 Mask Parade─가면무도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건가? 그 모든 것을 보지 못했으면서, 당신들이 어찌 감히 누군가를 탓할 수 있는가?"

- 룬 언그알레이, 『광인의 논리』 中




먹구름이 잔뜩 몰려 하늘을 뒤덮은 날이었다. 이 도시의 거리는 비록 불황기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으로 북적댔다. 곧 비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장사꾼들은 조금이라도 더 팔기 위해 한껏 목청을 올렸다. 약간은 촌스러운 센스일수록 시선을 끌기 쉬웠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니까.

여러 상점이 모인 이 번화가 거리엔 규모가 작은 상점이 조목조목 붙어 있는 터라, 물건을 사려는 손님들이 가게를 잘못 찾아 들어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 상인들은 이목을 끌기 위해, 그리고 착오 없이 물건을 빨리 팔아치우기 위해 아예 상점 밖의 거리로 물건을 잔뜩 꺼내놓는 방법을 택했다.

"………."

물론 지나가는 사람들의 불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상인들에게는 사람들의 불평을 모두 잊게 하는 돈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리는 언제나 복잡했고, 인파와 진열대를 헤치고 지나가느라 늘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하였다.

"언제봐도 개미떼처럼 사람들이 우글우글 거리는군."

재미없는 삼류영화를 품평하듯이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거리는, 이 도시는 언제와도 똑같았다. 10년 전이든, 20년 전이든 늘 그 자리에서 점주들의 얼굴만 약간씩 바뀌었을 뿐.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아마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겠지. ‘그’는 한쪽 입꼬리를 치켜 냉소의 표정을 지었다. 만일 누군가가 그 모습을 자세히 봤다면 마치 마네킹이 웃은 것 같은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느꼈으리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시간이 없어."

그랬다. ‘그’에겐 시간이 없었다. 이 거리를 다니는 인파 중 자신을 알아볼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기게 된다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를 아주 잠시 유쾌하게 만들었다.

물론 거리가 혼잡한 만큼 이 틈을 타서 남의 주머니를 슬쩍 하는 녀석들도 빈번하게 등장했다. 그러나 이 경우엔 재수가 정말 없다고 해야 할까.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곁을 치고 간 애송이가 때마침 ‘그’의 눈에 포착되었다.

"이봐, 거기 꼬마."
"누구보고 꼬마래? 이봐요, 아저씨. 그냥 갈 길 가라고."
"지금 네 손에 들려 있는 그 지갑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

그러자 소매치기는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마 길바닥 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풋내기인 듯했다. 보통 이럴 땐 잽싸게 도망치는 게 상책일 테지만, 소년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소매치기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시간이 없어서 일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거 내놔."
"이 아저씨 웃기네. 돌려 달라서 돌려줄 거였으면 애초에 훔치지도 않았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짝 냉소를 띤 표정으로 소매치기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피부에 너무나 이질적인 보랏빛 눈동자가 마주치자 소매치기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불안함이나, 섬뜩함에 가까운 감각. 소매치기는 그제야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발을 떼려 한순간, 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 죽고 싶지?"

‘그’의 '죽고 싶지?'는 보통의 양아치들이 내뱉는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언젠가 ‘그’가 저 말을 했을 때 '설마 죽이겠어?'라며 엉기던 용감한 녀석이 하나 있긴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피를 뚝뚝 흘리며 한쪽 다리를 절면서 나타나자 두 번 다시 ‘그’에게 괜한 시비를 거는 멍청이는 없었다. ‘그’는 붉은빛보단 파란빛에 가까운 그 입술을 살짝 말아 올려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위험해 보여서 소매치기는 순간적으로 오한이 들었다.

왠지 모를 위기감이 이번엔 이 소매치기를 찾아왔다. 소매치기는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하는 ‘그’를 마주하며,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고 궁리했다.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소매치기가 눈웃음을 살살 치는 순간, 그의 머리카락이 뒤로 확 날리면서 ‘그’의 주먹이 재빠르게 날아들었다.

"사, 살려주세요!"

소매치기는 두 팔로 머리를 보호하며 그대로 바닥에 착 엎드렸다. 아직 밟히지도 않았는데 등이 아파져 오는 것 같았다.

"살려주세요! 이제 다시는 소매치기 같은 짓 안 할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이봐요."

소매치기의 등 위로 내려온 건 ‘그’의 구두가 아니라, 어떤 여자의 목소리였다. 소매치기가 고개를 들자, 거기엔 어떤 가게의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물론 소매치기가 훔친 지갑도 같이 사라졌지만.

"영업 중이니까, 방해 말고 다른 데로 가줄래요?"
"조금 전까지 여기 서 있던 남자는?"

여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소매치기를 내려다보았다. 이 거리에서 심심찮게 눈에 띄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 점주는 장사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런 사람들을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 원 참,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빨리 안 일어날 거에요?"
"쳇, 알았수다."

투덜거리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눈앞에 있는 여자의 주머니를 순식간에 털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도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다. 방금 만난 ‘남자’가 지니고 있던 분위기는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절대 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으니까. 그는 순간적으로 야쿠자나 마피아를 떠올렸지만, 생각해봐도 이런 도시에 그런 거물급 인물이 나타날 이유가 하등 없었다.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하고 오늘은 그냥 접을까……."

소매치기는 끝까지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만난 사람이 전국적으로 수배 중인 연쇄 살인마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았다면, 자신이 이렇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대단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게 되리라.


같은 시간, 인근 주택 지역.

"으응……."

시현의 침대에서 그녀가 졸린 눈을 비볐다. 창을 넘어들어온 빗줄기에 잠이 깬 터였다. 한참을 비몽사몽 하던 그녀는 하품하며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오래도 자 버렸네……."

벌써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녀와 시현과의 관계가 서먹서먹 해진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갔다. 시현은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지만, 가뜩이나 조용한 집에 대화까지 없으니 답답했던 건 사실이었다. 물론 그때 했던 자신의 말이 심하게 들릴 수 있는 소지가 충분했고, 실제로도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까, 하고 생각하던 터였다.

시간이 갈수록 그에게 심한 말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생각만 해서는 달라질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탁자에 다가서서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켰다. 커피를 즐기는 그녀에게 있어 그건 달콤한 휴식이었다. 그 흔한 전기밥솥 하나 없는 시현의 집에서 커피란 원래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통신판매로 구매한 커피포트 덕에 상황은 달라졌다.

"이거라도 있으니까 여기서 혼자 있어도 버틸 수 있는 거야. 그나저나 시현 씨는 어디 갔지?"

콰르릉!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전기까지 나가 불이 꺼졌다. 어두운 곳을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그녀는 지금 캄캄한 어둠보다 커피포트의 전원이 나갔다는 것이 더 불만스러웠다. 책상 위의 작은 스탠드를 켠 그녀는 희미한 불빛 사이로 시현이 남기고 간 듯한 메모를 하나 발견했다.

【잠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외출은 삼가주십시오.】

다른 말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의 외출을 삼가달라는 문장은 좀처럼 그게 어떤 의미로 적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한도에서 그 사람은 장난으로 이런 내용을 쓸 사람이 아니다.

"어째서 이런 글을……."


/


마침내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가 도달한 곳은 마당 곳곳에 식물들이 피어 있는 어느 주택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지가 한참 된 듯 대문에는 녹이 짙게 슬었고, 제멋대로 가지가 삐죽삐죽 문틈으로 나와었었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좌우를 둘러보고는 아무 망설임 없이 대문을 열었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들어서자 흐린 하늘 아래 누군가가 키웠던 식물들이 짙은 녹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

‘그’는 왠지 모를 감개를 느꼈다. 마치 수년 만에 친척집을 찾아온 듯한 그런 그리움이 있었다. 분명히 불청객의 입장임에도 ‘그’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랬다. 이 집은 ‘그’가 예전에 살던 집이니까.

천천히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나란히 심어 놓은 상록수 사이를 걸으며 자신이 손을 놓은 사이 엉망이 된 나무 상태에 약간 울적해졌다. 이윽고 상록수가 늘어선 구역을 빠져나가 넓은 곳으로 나갔다. 그곳은 집 남쪽으로, 마루와 울타리 사이에 있는 공간이었다. 돌을 늘어놓아 만든 화단이 있었으나 식물은 심지 않아 메마른 흙만 보일 뿐이었다.

울타리 옆에 대나무가 몇 개 늘어서 있다. 전에 나팔꽃이 자라던 땅에는 지푸라기가 덮여 있고, 그 아래에는…….

"이걸 발견 못 하다니, 그놈들 눈은 해태 눈인가."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경찰의 눈썰미가 나쁜 것에 비웃음을 주어야 할까. 만일 여기까지 팠더라면, 현재까지 알려진 것보다 피해자의 수가 한 명 더 늘었을 것이다. ‘그’도 정확히 언제 죽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최초의 피해자. 당시 이웃 주민은 밤에 삽질하는 소리가 들려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듯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그’의 이미지는 평소 정원 가꾸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수상하게 생각하기보다는 가족을 잃고 취미만 남은 사람이라고 동정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이젠 끝이지."

자신은 사람을 무참하게 살해한 연쇄 살인마다. 이제 와서 예전처럼 조용하게 묻어가기엔 너무 늦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수할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한 달이 넘게 잠적할 리도 없을 테니까.

혹시라도 경찰이 아직까지 잠복수사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도 있었지만, 집에 들어온 순간 싹 가셨다. 설마하니 범인이 제 발로 자기 집에 돌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으리라. 그것도 단지 물건 하나를 찾기 위해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자그마한 수첩이었다. 언론에선 계획 살인이라 확신하게 된 증거물이었지만, 사실은 똑같은 게 하나 더 있었다. 그나마 그것까진 발견 당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에겐 그 수첩이 꼭 필요했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이 마당 어딘가에 묻어놨을 것이다.

하지만, 얼핏 보기엔 수첩은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흙이나 떨어진 나뭇잎뿐이었다. 자신이 숨겨놓은 수첩 위에 나뭇잎에 덮여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무릎을 구부리고 떨어진 나뭇잎을 두 손으로 헤쳤다. 마당 전체를 그렇게 찾을 필요는 없다. 자신이 수첩을 숨겨놨다면 이 부근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찾게 될 줄 알았다.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찾아봤지만, 수첩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무릎을 꿇은 채로 나뭇잎을 헤치며 수첩을 찾았다. 콧등에 맺힌 땀이 갈색으로 변색한 나뭇잎 위에 떨어졌다. 수첩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지푸라기를 덮은 곳도 헤쳐 보았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지금까진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았지만, 이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땅을 헤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더 늦기 전에 찾아야 한다.

'어째서 없는 거지?'

바스락.

그 순간, ‘그’의 뒤편에서 사람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겸연쩍은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청년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무엇을 하고 계신가 싶어서."

‘그’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하필 이런 순간에 걸리다니. 제아무리 강심장이어도 놀랄 수밖에 없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누가 들어왔는지 의구심이 들었던 걸까. 그러나 범인이 현장에 다시 돌아올 거란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얼굴은 수배지의 모습과 달라졌으니까.

"혹시 뭔가 찾고 계신 것이라도?"

청년이 질문하자 ‘그’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그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그냥 무시하고 돌아가 주면 좋을 텐데, 가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 자리를 피했다가 청년이 가고 난 뒤에 다시 수첩을 찾는 것이 나을까?

"이 근처에 사는 분이십니까?"

대답을 제대로 못 하고 우물거리자 청년이 다시 물었다.

"아, 그래."
"그런데 이 집은 사람이 살지 않은지 꽤 되었더군요."

대뜸 청년이 그렇게 말했다. 대체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걸까?

"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물론 여기에 이사 오고 싶은 사람도 없겠지만."
"그건 그렇겠죠. 그것과 별개로, 원 집주인도 돌아올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

청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보다 열살 가까이 어려 보이는데도 그 눈이 섬뜩하리만큼 무서웠다. 진땀이 났다. 경찰의 시선을 따돌릴 때도 이렇게까지 긴장하진 않았다. 청년은 연쇄 살인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돌아올 리가 없지. 이제까지 잘 도망쳤는데 꼬리 밟힐 짓을 왜 하겠어?"
"그 말씀대로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헛걸음을 한 것 같군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피며 청년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 두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범인이 현장에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여기에 온 거니? 그렇다면 헛수고야."
"아뇨, 그렇지 않아요. 여기 온 것은 산책 같은 겁니다."
"산책?"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그’는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엔 아무리 취향이 독특한 사람이 많다지만 살인마의 집에 산책 오려는 발상은 어딘가 어긋나있다.

"살인사건의 범인이 살았던 집을 구경하는 것이 취미라서요."

그렇게 말하며 청년은 아주 약간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 현장에 돌아온 범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시선은 똑바로 ‘그’를 향하고 있었다. 청년이 한 말에 심장이 멈출 뻔했다. 혹시 자신이 연쇄 살인마라는 걸 알고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가 얼른 부정했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고, 좋지 않은 예감이 소용돌이쳤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절묘했다. 마치 자신이 오늘 이 장소에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 한엔 이렇게까지 딱 맞아떨어질 리가 없다. ……혹시. ‘그’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이 청년은 여기서 수첩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 수첩을 보고서 모종의 이유로 범인이 그것을 찾으러 올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청년은 수첩을 자기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그’를 떠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설마 그럴 리가…….

"7명을 살해하고도 경찰의 눈을 태연하게 빠져나간 범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청년은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치 시험관 안에 갇힌 쥐를 관찰하는 듯한 눈으로, 어딘지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도망치고 싶다.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척 보기에 그리 체격이 좋은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이라면 그를 밀치고 충분히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청년이 수첩을 가지고 있고, ‘그’가 살인범이라고 경찰에 신고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이겠지.

"비행기나 배를 타고 외국으로 도피했을까요? 그 정도로 보안이 허술하진 않을 겁니다. 설령 위조 여권을 샀더라도 얼굴까진 속이기 어렵죠. 물론 밀항을 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요."
"………."

그저 청년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 외엔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돈을 주고서 성형수술을 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만, 경찰이 그걸 조사하지 않았을 것 같진 않군요."

분명히 자신도 그에 대해선 충분히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경찰이 그 의사를 찾을 일은 영영 없으리라. 애초부터 불법 시술이었고, 추적당할 것을 생각해서 후환은 없애버렸으니까. 물론 시체는 당분간 발견되지 않을 장소에 묻어두었다.

"…여기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7명째의 피해자가 발견된 직후, K 방송사에 어떤 편지가 도착했죠."

아아, 그것인가. 경찰의 무능함과 유족을 한껏 조롱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가 생각해봐도 그 편지는 사람의 심사를 충분히 뒤틀릴 수 있을 만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는 자신이 보낸 게 아니다. 필적과 지문, 소인 등을 조사하면 현재 위치가 발각될 게 뻔한데 구태여 그런 얼빠진 짓을 할까?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도였다면,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거나 아니면 추가범행을 저질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범인은 그러지 않았지요."

살인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진 않는다.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녀석들과는 다르다. 그런 놈들이 꼭 중요한 순간에 바보 같은 짓을 해서 경찰에 잡히지 않았나. 자신은 그런 얼간이와 동급이 아니다.

"오히려 그자는 멋지게 경찰의 이목을 따돌리며 지금도 어딘가에서 유유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족들에겐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만."

청년은 그렇게 말했지만, 전혀 유감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그렇게 냉정한 범인이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기록한 수첩을 집에 고스란히 남겨뒀다는 겁니다."

그랬다. 자신은 실제로 집을 빠져나올 때 그 수첩을 일부러 놔두고 떠났다. 집에 들이닥친 경찰들은 저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경찰조사에선 수첩에 적혀진 내용에서 범인이 계획 살인을 한 것으로 확신했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

범인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청년은 먼저 수첩을 잃어버린 범인에 대해 생각했다. 이 수첩은 무엇 때문에 쓴 걸까? 경찰의 말대로 계획범죄를 실행시키기 위해 쓰인 걸까? 아니면 기념을 위해서인가? 잊지 않기 위해서? 분명한 것은 몇 번씩 다시 읽으며 추억에 잠겼을 것이란 점이다. 그러니 범인은 자기가 수첩을 집에 놔뒀을 거란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만약 자신이 범인이라면 언제 여덟 번째 살인을 할 것인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되었을 때? 아니면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쳐, 잡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경찰을 얕볼 때? 이 두 가지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일련의 범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마 머릿속에서 어두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수첩을 다시 잃고 마음을 가라앉혔으리라. 이상적인 살인이란 몇 번씩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자신이라면 언제나 지니고 다닐 것이다. 왜냐하면, 수첩을 자주 보고 싶었을 테니까. 하지만, 수첩은 경찰조사로 압수된 상태다.

그러므로 범인은 다음 범행을 할 수 없게 된다. 그 이후 추가범행은 지금까지 없었다. 하지만, 정말 범인은 더 이상의 살인을 하지 않을까? 무려 한 달이 넘게 경찰의 이목을 따돌린 남자다. 그런 사람이라면 만에 하나 어떤 실수로 범죄가 발각될 경우를 대비해서 수첩을 하나 더 만들어뒀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가 빼앗기더라도 언젠가는 남은 두 번째 수첩을 찾기 위해 범인은 반드시 집에 돌아온다.

"이상입니다."
"넌……."

‘그’는 청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바로 앞에 있는 이 청년은 대체 누구일까. 희생된 사람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기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범죄자에 대한 경멸이나 분노가 그 말투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조용하고, 온화한 목소리였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한진성 씨."


/


그녀는 스탠드의 스위치를 만지작거렸다. 충전해둔 전기가 다 되어 가는지 불빛이 약해지고 있었다.

"충전식이라고 해 봐야 얼마 안 가네. 전기가 빨리 들어와야 할 텐데…. 무슨 비가 이렇게나 많이 내린데?"

콰르릉!

빛이 번쩍이더니 천둥이 울렸다. 연이어 세찬 빗줄기가 쏴 하고 쏟아지자, 한기를 느낀 그녀는 시현이 의자에 걸쳐뒀던 외투를 껴입었다.

"시현 씨는 대체 언제 오려고 그럴까. 설마 지금 빗속을 헤매고 있는 건……."


/


"이렇게 된 이상,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을 살려둘 거라 생각하진 않았겠지?"
"그런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천둥소리와 함께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살려달라고 빌 생각은 없나? 혹시 모를까, 정말 그런 마음이 들지도."

‘그’는 딱히 진심으로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발각될 위험은 감수했다. 때마침 비도 알맞게 오고 있으니 이 부근을 다니는 사람은 더 없을 것이다. 설령 비명이 난다해도 그리 신경 쓰진 않으리라.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이상 이 청년은 위험하다. 죽여야 해. 그러나 청년은 딱 잘라 거절했다.

"살고 싶지 않다는 건가?"
"살해된 사람들 또한 살려달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죠."

그러고 보면 분명히 그랬다. 다들 나중에 가선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눈물 콧물을 흘려가면서, 집에 자신을 기다리는 부모님과 혹은 사랑하는 사람 등의 이유로 그들은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남자는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 청년은 그런 식으로 구차하게 죽을 생각은 없다는 것일까.

"그래서 자존심이나마 지키겠다?"
"그런 건 아니지만, 불필요한 말은 하고 싶지 않군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말해봐야 소용없을 테니까요."

말해봐야 소용없다? ‘그’가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 중 이런 말을 꺼낸 사람은 이 청년이 처음이었다. 물론 자신이 그를 살려줄 리는 없을 테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니까 오히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눈앞의 살인마를 두고 정신이 나갔나?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래도 살고 싶다는 네 의사는 표현할 수 있을 텐데?"
"당신이 내 의사를 존중하진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만."
"물론 그렇겠지."

다른 사람이 들었더라면 남자의 당당함에 어처구니가 없었으리라. 그럴 작정이었다면 죽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오기가 들었다. 어떻게 하면 눈앞의 청년을 굴복시킬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다고? 네 목숨인데?"
"내 목숨은 내게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걸 말해 봤자 무슨 상관입니까? 인정할 것도 아닌데."

설령 옆집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다는 말을 해도 이렇게나 무미건조하게 반응하진 않을 것이다.


/


전기가 잠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다. 그녀는 그 사이에 무사히 커피 한 잔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책상에 커피를 올려두고, 그녀는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기 있는 주말 연속극이 하고 있었다. 그녀는 드라마를 즐겨 보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뭐라도 좋으니까 시간을 보낼 거리가 필요했다. 문득 이 공간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갑자기 만두가 먹고 싶어. 시현 씨한테 부탁하면 사올까? 화야 내겠지만, 왠지 사올 것도 같은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녀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상대는 시현이다. 이런 일상적인 대화도 나누지 못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잖아? 그녀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강하게 되뇌었다.

"절대 만두가 먹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하는 게 아냐."


─Singing a love song, words of a stranger…


웬일인지 시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껏 긴장한 상태에서 전화했는데 정작 시현이 전화를 받지 않자, 그녀는 슬슬 김이 새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 대신 통화 대기 음악만이 흘러나왔다.


─The howling miller, never to face her…….


몇 번이나 전화를 했음에도 시현은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급기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는 신경질을 내며 메시지를 남겼다.

"이봐요, 시현 씨. 어디서 뭐 한다고 전화도 안 받아요? 몰라요. 나 만두 먹고 싶으니까 알아서 사와요. 그리고 나는 봉황정 만두 아니면 안 먹어요. 만두 사서 빨리 튀어와요!"

탕!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할 말을 마친 그녀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시현에게 이렇게 말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중에 들을 쓴소리에 대한 걱정도 잠시, 그녀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


/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살인이 죄라고 하더군."
"보편적인 의미로는 그렇습니다만."
"그것이 진리인가? ‘살인은 죄’라는 것이?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 진리에는 아무런 힘도 없어. 그것이 갑자기 나타나 내 팔을 잡지는 못해."

청년은 ‘그’의 장황한 말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궤변입니다."
"하지만 논리야."

눈앞의 저 남자는 진심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걸까. 청년은 처음 ‘그’를 봤을 때보다 온도가 확연하게 떨어진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일반적인 사고나 가치관을 ‘그’도 똑같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 외적이 아닌 자기 내부 문제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기준 자체가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비틀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을 죽인 거죠?"

청년은 마치 7명의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궁금한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들은 죽고 싶지 않다고 애걸했지만, 어차피 계속 살아봤자 남들 눈에 띄지 못한 채 그저 묻혀졌을테지. 하지만, 이 연쇄 살인극에 동참했기에 그들의 이름은 전국으로 알려졌어. 모든 사람이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주고 있고, 모든 사람이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나? 실로 놀라운 일이야."

마치 연설하듯이 한껏 도취하여 그렇게 말하고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기에 나는 나쁜 짓을 했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아. 물론 유족에 대해서도. 그들의 보잘것없는 삶에 생각지도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줬으니까. 참가자(희생자)도 관객(군중)도 그걸로 즐거워하고 있지. 그러면 된 게 아닌가."

지금 이 남자는 쾌락을 위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살인극을 지켜보는 관객(군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건가? 이 모든 것이 연극이었다고 말할 셈인가?

"당신에겐 죄책감도 없는 것 같군요."
"괴롭다거나 하는 감정이 죄책감이라면,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러나 죄를 지었지 않습니까?"

청년의 말에 일순간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은 눈빛이었다. 둘 사이에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갑자기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건 청년을 비웃거나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깔보는 의도도 전혀 없었다. 그 웃음은 아주 순수한, 그야말로 어이가 없을 때 저절로 나오는 웃음이었다. 놀리기 위해 웃는 거라면 차라리 더 편했다. 청년은 일순의 티끌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웃음에 약간의 공허감을 감지했다.

"이딴 건 말이지……."

말을 꺼냈다가 다시 웃음이 나와 남자는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소름이 끼치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청년의 고막을 자극했다. 어느새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청년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악마를 연상하게 하는 보랏빛 눈동자에 이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은 뒤, 남자는 지루한 어조로 말했다.

"…죄라고 부를 수도 없어."

이 정도는 예상했던 범위다. 청년은 어딘가 냉정하리만큼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이 남자는 미쳤다고 볼 수 있지만, 정신병자는 아니다. 일그러져 있지만, 자기만의 신념, 혹은 기준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오락을 위해 살인을 용납할 정도로 이 사회는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나쁘지? 재미만 있으면 그만일 텐데?"

청년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지금과 같은 궤변을 인정할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절대 허락될 수도 없을 터.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인간이 있다고 해서 놀랄 필요도 없다. 지금 세대엔 분명히 그런 지향성이 있으니까.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는 인생을 보낼 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그런 지향성.

"뭐… 장난은 여기까지 할까. 말이 생각보다 길어졌어."

남자는 주머니에서 검은색 장갑을 꺼내 양손에 착용하더니 사납게 씩하고 웃어 보였다.

"개인적으로 너한테 유감은 없지만, 나를 본 이상 살려둘 순 없지."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청년은 어딘가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으로 중얼거렸다. 아아, 나는 이런 식으로 죽는 것인가. 여유일까, 그렇지 않으면 역시 자신의 생명조차 집착이 없는 것인가? 그 얼굴에 땀 한 방울도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얌전히 죽어줄 생각도 없지만.

"미안합니다, ○○. 오늘은… 생각보다 돌아가는 게 늦어질 것 같군요."


/


쏴아아─.

마치 창문을 깰 것처럼 사정없이 몰아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건 구석에 떨어진 시현의 청구서였다.

"기분 나빠."

청구서에 적힌 시현의 이름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잉크가 물에 젖어 엉망으로 번진 탓이었다. 청구서를 손에 쥐고, 그녀는 아주 약간 열려 있던 창문을 닫았다. 그 틈새로 빗방울이 들어와 청구서를 적신 듯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시현과 같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일반적인 의미의 일상을 보낸 적은 거의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늘 묘한 사건들과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찾아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신이 찾아갈 정도로, 그 사람은 지루함 그 자체를 싫어하는 듯했다. 대단히 실례되는 생각이지만, 만일 자신이 곁에 없었다면 마약까지 고려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마저 든다.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적응해버린 걸까?'

휴대전화를 들어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9시 45분. 비 때문이 아니더라도 매우 어두운 시간이었다. 물론 시현이 들어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미 다 식어 빠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딘가 콕 찍어 말할 수는 없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디 가서 사고치고 다닐 사람은 아니잖아.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아까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내리는 비 때문인지, 시현이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혹시라도 거리가 보일까 싶어 창가로 다가섰다. 그렇지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네온사인만이 비 사이로 흐릿하게 비칠 뿐이었다.

폭우 사이로, 아련한 사이렌 소리와 뭔가가 바람에 날려 깨지는 소음이 음산하게 들려왔다. 창문을 통해 침입하는 도둑과 아직 잡히지 않은 살인마가 나오지 않더라도 여성 혼자 있기에는 적당히 무서운 밤이었다. 괜히 이런저런 생각들이 비집고 나왔다.

"만두… 사오지 않아도 되는데."

어차피 만두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시현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 특유의 무기질 한 눈빛으로 그녀를 획 쳐다볼 것이다. 그리고 오자마자 컴퓨터를 틀어 인터넷에 접속한 뒤,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로 글을 쓸 것이고, 그러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특유의 딱딱하진 않지만, 부드럽지도 않은 어조로 "늦었으니 이만 자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할 것이 틀림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막 잠들려고 하는 순간, 욕실의 불이 켜지면서 물소리가 들릴 터였다.

"………."

그 모든 것이 오히려 기다려질 정도로 불안했다. 스탠드를 당겨 거실 안쪽을 비춘 뒤, 그녀는 침대에 몸을 묻고 시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자마자,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었는지부터 살펴볼 그를.


/


비가 쏟아지는 거리 위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바쁘게 새겨졌다. 진열대도, 상인도 없었다. 그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사나운 비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저 한곳에 서서 비를 피하며 빈 택시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얼마간의 길을 걸은 사내는 어느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어두운 빗길을 비춰주는 것은 드문드문 불을 밝힌 상점들뿐이었다. 투명한 유리문을 넘어 흘러나오는 불빛들을 밟으며,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걸으며 사내는 쉴 새 없이 주위를 살폈다. 아주 작은 고양이 울음소리, 바람에 신문지가 날리는 소리에도 그의 청각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그 남자’와 비슷하다 싶으면 즉시 사내의 눈에 핏발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착각, ‘그 남자가 아니었을 때에는’ 어김없이 그의 입술 사이로 사나운 이가 드러났다.

휴대전화의 전원을 켠 사내는 그 사이 들어온 메시지를 체크하며 슬쩍 인상을 찡그렸다. 또 꽝이다. 빌어먹을. 모여서 비를 피하는 사람들의 앞을 그가 지나가려 할 때,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리며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또 뭐야?"
-이런 날이라도 사람들이 꽤 많군요. 역시나 밖에 있었습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안부를 묻는 듯한 어조. 사내는 그 말이 들리자 대뜸 짜증부터 냈다.

"그놈들이 연락을 줘야 내가 가만히 있든지 하지! 이거 돈만 받고 도망간 거 아냐?"
-재촉하지 않아도 ‘그 남자’가 나타나면, 당신이 고용한 수많은 자가 알아서 찾아낼 겁니다.

그 말에 사내는 거짓말처럼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비는 계속해서 사내의 몸 위에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젖은 머리칼 사이로, 사내의 노기 어린 눈빛이 번뜩였다.

"너도 보고 있다면 알겠지. 거리를 걷는 녀석은 너와 나뿐이라는 것을."
-그렇긴 하지만….
"자기 일이 아니다. 타인의 일이야! 이런 폭우 속에서 그딴 걸 위해 움직일 미친 새끼는 없어!"

듣기 싫다는 듯 사내가 상대의 말을 자르고 소리쳤다. 건너편의 상대가 뭐라고 말을 건네려 했지만, 사내는 그것을 뿌리치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밤마다 ‘그 남자’를 찾으러 거리를 돌아다닐 때의 사내는 항상 이런 광기에 젖어 있었다.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 ‘그 남자’가 당신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휴식을 취해주어야 합니다.

비가 쏟아지는 거리 위로 사내의 발자국만이 가늘게 떨렸다. 아무도 없는 삭막한 그 거리에서, 사내는 전화기를 움켜쥔 손이 하얗게 되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이미 몸은 한계잖습니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

그래서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몸이 완전히 끝장나기 전에 ‘그 남자’를 찾아내야만 한다. 사내에게 있어서 ‘그 남자’를 찾는 것은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수단이었다.

"네 알바 아니야."
-전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너와 난, 그저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일 뿐이다.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 만날 일도 없어."

사내는 지금 자신이 이런 짜증 나는 대화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한시라도 빨리 ‘그 남자’를 찾아야…. 그리고 시간이 멈추었다.

-방금 거기에…

동시에 사내의 모든 움직임이 얼어붙었다. 입을 벌린 상태였지만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전화기를 쥔 손을 내려놓았다. 마치 넋이 나가버린 것처럼 사내의 시선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거리의 끝. 지금, 악귀 같은 형상으로 사내의 눈이 노려보고 있는 곳.

거리의 끝, 그곳에는 검은 장갑을 낀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두 주먹에 누군가의 피를 묻힌 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찰나의 주저도 없이 유유히 거리를 활보했다. 그때도 그랬다. 자신의 약혼자가 그 남자에게 무참하게 살해된 그때도, 그 남자는 태연하게 다음 희생자를 죽이고 있었으니까. 저놈을 살려둬선 안 된다. 그리고 그의 내면을 지탱하고 있던 뭔가가 툭 끊어졌다.

"으아아아아아!"

사내의 절규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칠흑 같은 머리칼, 그리고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두 눈이 번뜩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손을 타고 분노가 전해져왔다. 완전히 제정신을 잃어버린 사내의 입가가 잔뜩 일그러지고, 소름 끼치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한진성, 네놈을 만날 이때를!"


/


문이 열렸다. 아니, 문이 열린 지 한참이 지났다. 그러나 그녀는 문을 닫을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영수증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시현 씨……."

어딘가의 거리를 넘어 사이렌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한 거실 안에서 힘이 바닥난 스탠드가 희미한 불빛을 깜빡거렸다.

"……."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밤이었다. 냉장고에는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우유와 먹다 남은 비스킷, 생수병이 들어 있었고, 한쪽 다리가 부서진 낡은 소파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삐걱거렸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신문과 수많은 책. 그리고 곳곳에 스며든 약품 냄새.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밤이었다. 닫히지 않은 문 앞에서, 시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왜라고? 그건 그녀가 묻고 싶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얼음같이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봐야 했다. 그리고는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전날 못 읽은 책을 보며, 샤워한 뒤에는 낡은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해야 했다. 그 특유의 정중한 말투로 자라고 말해야 할 그가, 왜?

"무슨 문제라도?"

멍하게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무슨 문제라니? 문제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그녀는 단 하나도 꺼내지 못했다. 왜 옷이 걸레 조각이고, 몸은 왜 상처로 엉망진창이며, 어차피 돌아올 거면서 이렇게나 비가 쏟아지는데 왜 전화 한 번 못했는지.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거……."

지금 시현이 손에 들고 있는 것 때문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비닐 봉투.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하얀 상자. 빗방울이 상자 안에 못 들어가도록 끌어안았는지, 비닐 봉투 전체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녀가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자 손을 들어 상자를 내밀었다.

"…늦었습니다. 내용물은 이미 식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만두였다. 그것도 봉황정의……. 이런 폭우 속에서 택시 따위가 돌아다니고 있을 리가 없고, 있다 한들 비에 흠뻑 젖은 수상한 피투성이를 태워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그 지경을 하고, 그 몰골을 하고, 차를 타고도 30분이나 걸리는 봉황정까지 걸어가서 만두를 사왔다고? 중요한 것도 아닌, 자신이 별생각도 없이 남긴 그깟 전화 메시지 하나 때문에?

"시현…씨."

그녀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뭔가가 엄청나게 밀려들었지만.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어떠한 말을 하려고 하면 그 위로 다른 말이 겹쳐지고, 끝내는 모두가 사라졌다. 꺼낼 수 없는 무수한 말을 조각들이 퍼즐로 끼워지기도 전에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어지럽기만 한 생각들 대신, 그녀는 상자를 시현에게 내밀었다.

"나……."

그냥, 그냥. 그녀는 그냥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는 동안에도 시현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에서는 조금씩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담아두고 싶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또 한 번 웃어 보였다.

"이거, 마음에 들어요."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손으로 그것을 받은 뒤,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