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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 Fight>

오후 여시. 차가운 밤의 나래가 세상을 뒤덮는 시간.
교복 차림의 소년 몇이 학교에서 나와 어둠이 내린 길을 걷는다.
바람은 여전히 차다.
한 소년이 입을 연다.
"있잖아 말야. 사람은 왜 싸우는 걸까?"
소년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논쟁이라면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그들이다.
"그거야 당연히 욕심이 있어서지."
노릿한 피부에 검은 안경이 아름답게 어울리는 소년이 쉽다는 듯 대답한다.
하지만 소년들은 만족하지 못하는 듯 하다.
"아냐. 사람이란 건 원래 싸우도록 만들어져 있는 거야.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공격 본능이 사람을 싸우게 만드는 거지."
대답을 내어 놓은 소년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편다.
큰 덩치에 작은 눈이 꽤나 우스꽝스럽다.
그 사이, 다른 소년 하나가 자신의 의견을 풀어놓는다.
큰 키에 흰 피부가 보기좋은 소년이다.
"아니. 너희 다 틀렸어. 사람은 자신과 같은 것이 세상에 널려 있다는 것이 싫은 거야. 독일에 도플겡어라는 몬스터가 있잖아? 그게 이 사실을 반영하는 증거야."
소년들은 미소를 짓는다.
비웃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똑같은 인간들이다. 심지어는 복색조차도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소년들 중 하나가 손가락을 튕긴다.
맨 처음 이야기를 꺼내 놓은 소년이다.
"내적인 뭔가가 아냐. 인간은 환경의 지배 때문에 싸우는 거야. 생존을 위해서. 생각해 봐. 인류 최초의 싸움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겠어? 바로 식량 때문일 거야.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가장 필요한."
티격태격하던 소년들은 이내 언성을 높이기 시작한다.
따뜻하기만 하던 밤의 고요는 잠깐 사이에 산산히 조각났다.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싸움에 대해 논하던 소년들이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소년들의 말소리가 더욱 커지고 빨라졌을 때 쯤, 한 소년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그들의 싸움을 말린다.
"너희 모두 틀렸어."
소년들은 갑자기 나타난 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럼 사람들은 왜 싸우는 건데?"
아이들을 말리던 소년은 입을 가리고 웃는다.
비웃음이다.
"기준이 없기 때문이야."
싸움을 하던 소년들은 서로 싸우기를 멈추고 새로 나타난 소년을 바라본다.
"기준?"
"그래. 기준. 지금 너희는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놓고 싸우고 있지 않아?"
소년들의 고개가 숙여진다.
그들은 부끄러워 하고 있다.
"우린 싸우지 않았어."
애써 부인하려 하나 소용없다.
"아니. 싸웠어. 너희는 기준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싸운 거야. 만약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었다면 너희는 싸우지 않았겠지."
모여 있던 소년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선다. 세번째 의견을 내놓았던 흰 피부의 소년이다.
"그게 법의 역할이야?"
그의 질문을 받은 소년은 고개를 끄덕인다.
"법은 싸움을 막기 위해 있는 거니까."
소년들은 간단한 인사를 한 뒤 서로의 갈 길을 계속 간다.
혼자 걷던 소년은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는 싸움을 말린 것이다.
싸움은 기준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기준을 내밂으로써.
그 기준이 옳은지 그른지는 누구도 모른다.
"오직 신만이 아시겠지."
소년은 하늘을 보고 구슬프게 씨익 미소지은 뒤 다시 자기의 길을 간다.
목적 아래 거니는 그의 발걸음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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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밝은 빛 속에서 나는 정신을 차렸다.
여긴 어딜까?
나는 생각했다.
평소보다 생각을 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수천, 수만가지 추측과 상상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나의 생각은 공허한 한 마디 울림조차 되지 못한 채 기억의 저편으로 서서히 잠겨 들어갔다.
나는 내 손을 보려 했다.
하지만 나의 눈도, 나의 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한다는 것이 나에게 느껴지지 않았다.
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자 그에 연결된 모든 부위 역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도대체 뭐야 이건!
다시 한 번. 나는 한 획 생각을 기억 속으로 비집어 넣으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기억 속으로 잠겨가던 생각이 서서히 모습을 바꾸었다.



완벽의 세계야.



뭐?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멋대로 모습을 바꿔 다시 한 번 내 생각에 답했다.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는 곳. 완벽한 세계야.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나는 생각했다.
그 어느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무엇이 이루어진다는 거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데 무엇이 된다는 것일까?
나의 생각은 다시 한 번 모습을 변경했다.



너의 세계. 너의 완벽함이 세계를 만드는 거야.



무슨 소리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고!
나의 생각은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더 이상의 답변은 바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생각이 기억 속으로 잠겨 간 뒤편 허공에서 단말마의 비명과도 같은 한 줄기 생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기억해. 너의, 너의 세계야. 이것은 완벽한 세계.



한 줄기 생각이 자취를 감춘 뒤 얼마 후.
나는 몸이 나른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생각을 하는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내 머릿속에 상주하던 생각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추었다.
너무나 기분 좋게 잠이 쏟아졌다.
몸의 피곤함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생각하기가 점점 귀찮아 진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생각이 하나 둘씩 지워져 머릿속에 단 한가지 생각만이 남았을 때. 나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는 한 생각이 있었다.
녹아들어가는 듯한 느낌. 자는 동안엔 나를 느낄 수 없다는 공포가 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으며 나의 잠을 깨웠다.
그 어느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서, 오직 나라는 의식 하나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 나의 의식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나를 최대한 명확히 느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찾아오는 몽롱함과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느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순간, 아까 떠올랐던 생각들이 기억 속에서 비집고 나오려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까의 일을 최대한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몽롱함과 나른함이 나를 가로막았지만, 나는 아슬아슬하게 아까의 생각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너의 세계. 너의 완벽함이 세계를 만드는 거야.



나의 완벽함이 만드는 완벽한 세계.
그것은 곧 내가 만드는 세계.
나는 머릿속이 밝아져 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를 명확히 느끼기 위해 무언가 느낄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 내려 했다.
나는 마치 가위눌렸을 때 하듯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감각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존재하지 않는, 느껴지지 않는 손가락을 느끼끼 위해서 나는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가짜 정보'를 만들어야 했다.
나는 나의 뇌가 가짜 감각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한참 뒤, 나는 가까스로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었다.
손가락과 연결된 손, 팔, 몸 등을 느끼는 것은 손가락을 느끼는 것에 비해 훨씬 쉬웠다.
바탕이 되고 기준이 되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감각의 범위를 점점 넓혀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눈에 이르렀을 때, 나는 너무도 밝은 허공속에 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강제된 가짜 감각에 의해 만들어진 몸이지만 실제와 다른 것은 없었다.
사실 실제라는 것도 알고 보면 감각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만들어진 몸에 대단히 만족한 나는 흡족한 마음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아직도 밝은 허공일 뿐이었다.
나는 내 방의 느낌을 나에게 인식시켰다.
방의 모양, 벽의 색깔, 벽을 만졌을 때의 촉감 등의 정보를 바탕으로 내 방이 완성되었고, 가구나 기자재들이 놓아졌다.
그렇게 모든 것들을 느끼게 된 뒤.
나는 내 방 안에 있는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따뜻한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난 나는 짐짓 씩씩하게 내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까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들이 나름대로의 실체, 즉 소리를 가진 채 나를 불렀다.



이게 완벽해진다는 거야.



나는 어딘지 모를 허공을 향해 살폿 미소지어 보인 뒤 문을 힘차게 열었다.
내 의식속에서 실재하는 나의 세계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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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또 하나의 돌멩이가 나의 다리를 가격했다.
아프다.
하지만 내가 아파하면 아파할수록 녀석들은 즐거워하겠지.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걷는다.
꽤 날카로운 돌에 맞은 듯, 어깨에선 뜨끈한 피가 흐른다.
피하면 되지만, 도망치면 되지만 내가 도망치고 나면 녀석들은 말할 것이다.
'악마'를 쫓아내는 법을 알아냈어. 라고.
그러면 돌을 던지는 아이들은 몇배로 늘어나겠지.
더 큰 축복을 기다리며 고통을 참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 고통을 참는 것은 실로 괴로운 일이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내가 생각을 마친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가 시큰거렸다.
꽤나 무거운 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돌을 던지던 녀석이 던질 만한 것은 아니다.
그래. 녀석에겐 꽤 큰 형이 있었지.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나는 그저 막연한 추측만 머릿속에 남긴 채 계속, 또 천천히 걷는다.
뛰어서는 안 된다. 태연해야 한다.
그래야 녀석들이 포기할 테니까.
하지만 가면 안에서는 눈물이 줄기차게 흐르고 있다.
나를 '악마'로 만든 이 가면 안에서는.
나는 고통스럽게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에 씌워져 있는 가면을 쓰다듬었다.
뼛속까지 시리도록 차가운 금속의 느낌.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내 얼굴의 느낌이다.
지금은 이것이 내 진짜 얼굴인데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진짜 얼굴을 보이라고 요구했고, 지금의 얼굴만이 내 진짜 얼굴이라 생각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나는 '악마'가 되었다.
그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죽어버려! 이 악마야!"
쉴새없이 돌을 던져 대던 아이들 중 하나가 악을 쓰며 울음을 터뜨렸다.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날 보고 우는 거지?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이를 악물고 다리의 통증을 참아가며 최대한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한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이미 얼굴에 들러붙어 버린, 벗겨지지 않는 저주의 가면 때문에 나 역시 괴로워하고 있을 뿐인데..
저들은 내 가면 속의 얼굴을 멋대로 상상하고, 그 상상을 토대로 나를 악마로 만든다.
내 진짜 모습은 보지도 못했으면서 나를 악마라고 욕하는 근거로 그것을 사용한다.
그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이는 걸까
아니면 그들의 정신이 그들이 보는 것을 멋대로 왜곡하는 걸까
나는 흐르는 눈물 속에서 빙긋 미소를 짓는다.
그래. 인간이란 건 원래 그런 거다.
인간은 자기가 알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적대시하며, 적대시하는 것을 파괴하려고 애쓴다.
바보같은 인간들.
어째서 자기들끼리는 서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타인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것들이...
그게 아니면 마음 속으로 서로에 대한 적대심을, 파멸에 이르는 적대심을 기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가면 그거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닌가.
"키키키킥"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가면 속에서 웃었다.
복수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 놔두는 것.
그리고 그들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미소띤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나의 복수이다.
"키키키키키"
나는 다시금 웃었다.
어두운 가면 속에 오랫만의 햇볕이 비친다
인간 위에 떠 있는 여름의 햇빛은 어째서 이리도 아름다운 걸까
역설적으로도 아름답게.
우습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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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벌써 몇 시간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평소 같았으면 힘든 일이었겠지만, 부모님이 안 계시는 지금은 아무리 게임을 오래 한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소년은 그것이 기쁘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기쁜 것일까.
아니면, 기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스스로 기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건 아닐까.
잠시 생각하던 소년은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기쁜 거야. 아마도.
소년은 다른 무엇보다도 게임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그 나이 또래의 소년들이 의례히 겪곤 하는 그런 현상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집에 계시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교마저 가지 않는 것은 분명히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으니까.
소년은 몇일 전에 구입한 최신형 마우스를 움직여 게임 속 캐릭터를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으켰다.
너무나도 자신의 방과 비슷한 게임 속의 방.
그 속에서, 지현이란 이름의 캐릭터는 아직도 졸린 듯 눈을 비비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바라보며, 소년은 피식 웃었다.
게임의 사실성이 너무 높잖아.
게임은 사실과도 같고
곧 사실은 게임과도 같다... 라는 건가.
소년은 생각했다.
지현,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딴 캐릭터는 매일 아침 자신의 일상을 똑같이 흉내내고 있었다.
지현은 간단한 아침을 먹고, 옷을 차려입은 뒤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학교로 향하지 않았다.
이제야 실제 지현과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지현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 때문에 나는 게임에 빠지는 걸지도.
지현은 생각했다.
지현이 은근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놓자, 길을 가던 사람이 지현을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알겠습니다. 곧 해결해 드리죠.
지현은 말했다.
운좋게도, 오늘은 이렇게 빨리 일이 들어왔군.
지현은 말했다.
저 자리에 실제로 내가 있었다면.
지현은 생각했다.
그 다음에 할 말은 선뜻 생각나지 않았다.
좋았을까, 아니면.....
지현은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일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지현은 갑자기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추워서겠지.
지현은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히터를 틀었다.
히터에서 나온 따뜻한 바람이 자신의 피부를 덥혀 오는 것을 느끼며, 지현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지현의 발걸음은 집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집은 아니지만, 그와 똑같고, 또한 그보다 훨씬 포근한. 자신의 집으로.
지현은 자신의 방에 들어서서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았다.
이 곳에서 그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오늘 일이 빨리 끝나야 운동하러 갈 텐데. 요즘은 힘이 예전같지 않단 말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지현은 중얼거렸다.
모니터에 출력된 대상의 정보는 의외로 간단했다.
이런 인물이 어째서...
원한을 산 걸까. 하고 현진은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날마다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일까.
단지 가상일 뿐인데.
지현은 자신이 왠지 우습게 느껴져 짐짓 큰 목소리로
이 사람이 내 목표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만 더 착잡해질 뿐이었다.
지금은 마음을 단단히 먹을 때니까.
지현은 아무 뜻도 없어 보이는 말을 내뱉으며 옆에 다소곳이 놓여 있는 도검을 집어들었다.
아버지의 검도장에서 가져다가 자신의 방 장식용으로 놓아 두고, 프로그래밍하여 게임에서도 쓰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는 친구와도 같은 도검이었다.
형광등 빛에 부서지는 은빛 검광이 시리다고 생각하며, 지현은 반쯤 뽑았던 검을 도로 검집에 꽂아넣었다.
지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가면 그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지현은
뭐, 까짓 거. 베어버리면 그만이지.
라며 피식 웃어 넘겼다.
사람을 벤다.
언제나 해오던 일인데 갑자기 새롭게 느껴졌다.
새롭게 느껴지며, 또 두려워졌다.
괜찮아. 언제나같이. 자연스럽게.
지현은 스스로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중얼거린 후 집을 나섰다.
밝은 햇빛이 왠지 눈부셨다.
지현은 길을 따라 걸었다.
십 분 남짓 걸었을 때, 예상하고 있던 방해 요소가 나타났다.
어이, 이봐. 그거 뭐야? 도검 소지 허가증좀 보여줘.
도검 소지 허가증. 돈 있는 녀석들에게나 발급하는 그런 것 따위 나한테 있을 리가 없잖아.
이렇게 생각하며 지현은 방해 요소, 경찰관을 향해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갔다.
무심함을 가장한 사람들의 은밀한 시선이 온 몸을 통해 느껴졌다.
도검 소지 허가증 말입니까
지현은 최대한 목소리를 바꾸어 말했다.
이런 시점에서 목소리가 드러나는 것은 일을 하는 것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응, 그래. 지금 가지고 있나?
경찰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현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평소 배우고 있던 검도의 동작을 응용한 찌르기 기술은 정확히 경찰관의 목 한 가운데를 꿰뚫었다.
공포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크게 치뜨고 있는 경찰관의 눈을 바라보며 지현은 조용히 웃었다.
이 근처에만 있지 않으면 되니까.
지현이 안심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경찰들은 이 근처만을 수색하고는 그만 둘 것이다.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으니까.
지현은 생각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사람들은 지현이 경찰관의 목에서 검을 뽑고 나서야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걱정 마. 방해가 되지 않으면 죽이지 않을 테니까.
지현은 말하려 했다.
위험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다시 평소처럼 행동할 것이고, 그러면 경찰들이 사건을 알아채는 것도 느려질 테니까.
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사람들을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분명히.
그러나, 극도로 이성적인 판단과는 달리, 몸이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몸이 마구 떨려 왔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지고, 몸에 튄 경찰관의 핏방울이 아주 강한 산처럼 뜨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지현은 겨우 입을 벌려 조그만 신음성을 내질렀다.
마음 속으로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냥 질러도 되는데, 왠지 그냥 내질러 버리기가 싫었다.
지현은 손을 들어 땀을 닦았다.
손에 묻어 있던 붉은 피가 이마를 적셨지만, 지현은 개의치 않았다.
힘든데.
지현은 생각했다.
정말로 힘든 게임이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오던 것 중 가장.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한 차례의 전율은 지나가고, 지현은 마치 날아갈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지현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늘상 하던 일이었으니까.
늘상 즐거웠으니까.
마치 약에라도 취한 듯 몽롱하게 되어, 지현은 들고 있는 도검을 도망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휘둘렀다.
목격자를 없애는 거야.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이유를 대며, 지현은 계속 사람들을 베어 나갔다.
사람 하나하나를 벨 때마다 몸 속에서 힘의 원천, 이를테면 아드레날린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해 온 일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지현이 또 한 명의 사람을 베기 위해 검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꼼짝마.
지현은 비명이 아닌 사람의 소리를 듣고야 정신을 차렸다.
그 사이, 열 몇의 경찰들이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런, 늦었나.
경찰이 열 명 이상에 전원 총기 무장이라.. 아아...이건 위험한데.
잘못되면 이번 일은 실패할 수도 있겠어.
지현은 생각했다.
죽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단지 게임이 잠깐 늦어질 뿐.
하지만 의뢰에 의해 일하는 에이젼트인 지현이 일에 실패한다는 것은....
꼴사납잖아. 그러면 아무도 일을 맡기려고 하지 않을 거라구.
지현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멍한 얼굴로 경찰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현에게 연신 뭐라고 외치고 있었는데, 얼핏 듣기에는 무기를 버리라는 것 같다고 지현은 생각했다.
하지만, 불쌍한 경찰들 따윈 너무 많이 겪었다고!
지현은 마음속으로 외치며 빠르게 움직였다.
경찰들이 쏘는 총알은 일반적으로 너무 느렸다.
그리고, 지현은 보통 사람에 비해 너무 빨랐다.
고로, 경찰의 총알은 지현의 몸을 맞추지 못한다.
지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총알은 지현의 몸을 맞추지 못해야 했다.
그러나 지현의 기대는 정확히 빗나갔다.
지현은 복부와 오른쪽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는 쓰러졌다.
아프다.
지현은 생각했다.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픔을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놀라움 때문인지, 아니면 극심한 통증 때문인지 지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검붉은 피에 젖어 원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지현은 억지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총알을 맞은 부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현은 두려워 몸을 떨었다.
아니야....이제 곧....
지현은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경찰들이 놀란 김에 발사한 총알들에 벌집이 된 인간의 꿈틀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지현은 몸이 마구 떨리는 것을 느꼈다.
추워서겠지.
지현은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히터를 틀었다.
히터에서 나온 따뜻한 바람이 자신의 피부를 덥혀 오는 것을 느끼며, 지현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차갑고 네모진 조물주가 자신에게 준 지능으로 목표의 정보를 살피며, 지현은 컴퓨터 앞에 계속 앉아 있었다.
차가운 도로 위에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게임 오버라고...
겨우겨우 꿈틀거리던 지현의 입에서 비명소리같은 말이 튀어나오자 그에게 총을 쏘았던 경찰 중 한 명이 딱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죽어가며, 지현은 생각했다.
어머니는 왜 내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이상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어머니들은 알고 있는 거야. 결국.
싸늘하게 식은 지현의 시체에 흰 천을 덮으며, 경찰들은 지현의 죽음보다는 자신들이 받게 될 징계를 더 걱정했다.
지현의 시체 앞에는 죽은 자를 위한 레퀴엠 대신에 경찰들의 시시껄렁한 농담이 울려 펴졌다.
컴퓨터 속에서, 지현은 생각했다.
어째서, 플레이어는 오지 않는 걸까.
이제 일을 할 시간인데.
지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생각을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히 여기며
지현은 계속 컴퓨터 화면만을 바라보았다.
영원이란 시간을 바라보며 멈추어 있는 컴퓨터 화면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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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테스트랍니다. 이건. 한 게시물에 두 편을 올리는 것은 규정에 어긋날까요 아니면 어긋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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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마치 갓난아이가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향기를 찾듯, 아무 생각 없는 걸음으로 찾은 이 곳.
부드러운 달빛이 눈에 가득히 들어와서일까.
한 번 이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도통 나갈 생각이 들지를 않아 이곳에서 밤을 새워 버린 일도 허다하다.
페건물의 옥상이다. 이곳은.
시내에서 동떨어진 한적한 곳에 세워진 이 건물은 건설업체가 부도나면서 공사 중에 버려진 건물이다.
시내에서 워낙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건물이기에 이 건물에는 항상 나 혼자였고,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어 이 건물을 찾는 횟수를 늘려갔다.
그러나 얼마 전 일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이 나 뿐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왠지 가만히 있는 것보다 걷는 것에 마음이 끌리던 어느 날.
나는 느리고 좁은 발걸음으로 이 곳을 천천히 걸었다.
은은한 달빛에 생긴 옅은 그림자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 그림자는 아니었다.
나보다 약간 작은 체구의 긴 머리를 한 그림자.
나는 계속 걸었고, 그림자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계속 나를 따라왔다.
그와 똑같은 패턴으로 몇일인가가 흘렀다.
그 몇일 동안 나는 계속 이곳을 걸었고, 그림자는 나를 따라 걸었다.
그림자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어제부터였다.
왜 자꾸 따라다니냐고 물었을 때, 그림자는 장난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여기에 자꾸 오는 이유와 같다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이유도, 논리도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둘은.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나는 언제나와 같이 건물 옥상의 외진 부분에 가만히 앉아 있고, 방금 전에 도착한 그림자의 주인공은 나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앉은 듯 하다.
오늘도 달은 밝다.
내가 백색으로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림자의 주인공이 내게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운명이란 건 무엇일까?"
가늘고 여린 목소리. 그림자의 주인공은 여자이리라.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이 걸어가는. 또 걸어가야 할. 그 자신의 길이야."
대답을 해 놓고 나는 내 자신에게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이었다. 남에게 이렇게 부드럽게 말한 것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자신을 약간 힐책했다.
만약 상대가 나를 이용이라도 하려 한다면, 이런 마음으로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라고.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은 무언가 생각하는 시간인 듯 했다.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는 걸까?"
나는 우리가 아무 거리낌 없이 반말로 말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약간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뒤 대답했다.
"응. 정해져 있는 거야."
이런 질문을 왜 하는 것일까.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너도 걷고 있어?"
나는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운명의 길. 마치 실처럼 가는 이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나는 생각하고 있다.
"지름길은 없는 거야?"
다시 한 번 응 하고 대답했다.
"이 길은 경로까지도 고정되어 있는 길이니까."
실처럼 가는 길 위에서, 떨어질 수 없다면 그 길 위를 걷는 수밖에는 없다.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경로까지도? 하고 되물었다.
나는 보충 설명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 어느 지점에서 왼쪽으로 두 걸음. 어느 지점에서 앞으로 열 걸음. 그런 것 하나하나까지 정해져 있는 길이야."
그리고 그 길에 걸쳐 있는 바위나 방해물까지도.
말을 맺지 못했다.
내가 알아낸 어두운 면을. 그녀에게까지 전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의 말이 그녀에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운명을 바꾸기를 원하고 있던 걸까.
"하지만 지금 내가 여기서 뛰어내린다면?"
나는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그게 네 운명인 거야."
그녀는 수긍할 수 없는 듯 했다.
"운명을 깨고자 하는 일인데도?"
그녀는 오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운명을 깨고자 하는 생각도 운명에 포함되는 거야. 우리가 하는 생각 하나 하나,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 하나 하나도.
어떠한 길의 흐름만이 운명은 아냐. 그 길을 가는 방법, 속도, 쉬어가는 곳 같은 사소한 하나하나도 모두 운명 안에 들어가 있는 거지."
그녀는 약간 화난 듯한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았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네 길은 알지 못해?"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런 뜻이 아니었는데.
"난 잘 알지 못해. 그리고 알아서도 안 되고. 운명에 관한 건 알기도 어렵지만, 알아서도 안 되는 거야. 원래부터."
내가 만약 나의 운명을 알 수 있다면.
그럼 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내 운명을 안다면.....
"만약 누군가 세상의 운명을 알게 된다면, 그는 자신과 타인이 걸어갈 모든 길을 알게 돼. 하지만 그는 거기서 절대 벗어날 수 없지.
그런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물론 있을 수 없겠지만. 천만에 하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훗. 오래 전에 미쳐 버렸겠지.
그게 그 사람의 운명.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
"운명은.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알 수도 없는 거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녀는 내 말의 뒷꼬리를 나지막히 읊조렸다.
다른 생각을 하는 듯 조용하게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내가 알지 못할, 그리고 알아서도 안 되는 깊음 같은 것이 스며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나와는 상관 없지.
"그래. 정해져 있어. 모든 길은."
약간은 냉정하게 말했다.
말투야 상관 없지. 결국은 누구에게나 너무나도 잔혹한 한 마디이다.
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과연 진짜 즐거운 웃음일까.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나를 약간 지나친 앞쪽에서 멈췄다.
옥상의 난간 즈음이겠지.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내 눈은 하늘을 향해 있어서 그녀를 보지 못한다.
아니, 보지 않는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
"그럼. 한번쯤은 나의 운명을 시험해 보도록 할까. 어떻게 되든. 결과는 귀결을 향하겠지."
그녀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어 뻣뻣해진 몸을 급히 일으켜 그녀가 멈췄으리라고 예상되는 곳을 향해 빠르지만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걸었다.
나의 눈은 처음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마치 곡예라도 하듯. 가는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내 발소리를 듣자,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우스워서일까.
내가 미처 답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녀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있던 난간에서 살며시 미끄러졌다.
내 손이 그녀를 향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의 손에 잡힌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뭐하는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최대한 무표정하려고 노력했지만, 당황한 마음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내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비치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네가 잡지 않아도 운명은 운명대로. 결과는 귀결을 향할 텐데."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몸은 가벼웠다.
보통 여성의 몸무게보다도 훨씬.
무엇인가. 마치 몸이나... 혹은 영혼의 한 조각이 없는 사람처럼.
그녀를 끌어올려 놓고 나서,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운명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거니까. 이것은 나의 운명. 너를 바라보고, 너를 향해 가고, 너를 잡는 것이 바로 나의 운명이고."
그녀는 웃었다.
그 속에 무언가 감춘 듯한 웃음을.
"뛰어내리다 잡히는 것이 나의 운명이고."
그녀가 웃으면서 한 말을 내가 받았다.
"널 잡아주는 것이 내 운명이지."
그녀를 끌어올린 뒤. 나와 그녀는 옥상의 난간에 걸터앉아 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옆에서, 그녀가 말했다.
"사실은, 네가 잡아줄 거라고 믿고 뛰어내린 거야."
수줍은 듯 고백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말했다.
"사실은, 널 구하지 않으려고도 했어."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리는 아니지. 하마트면 죽을 뻔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말을 이어야 했다.
"장난이 아냐. 진짜로. 진심으로 죽으려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아버린 것 같았거든."
한숨을 쉬듯 툭 던진 나의 말에 그녀는 내 얼굴에서 고개를 돌려 다시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모습에 드리운, 알 수 없는 어둠이 순간 불안감으로 다가왔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하긴, 그게 운명일지도 몰라."
머릿속에 생각나는 대로 던진 한 마디에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그게?"
나는 다시 한 번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열었다.
"그건, 저 달빛이 슬플 정도로 아름답다는 거야."
"슬플....정도로?"
나는 웃었다.
나의 웃는 모습을 처음 본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크게 소리내 웃었다.
그리고 웃음 끝에, 들릴 듯 말듯 한마디 했다.
"내 말은,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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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명심해 두게. 그녀는 보통 사람이 아냐.
치명상을 입히고 나서, 숨통을 끊어 버려.
절대로 칼질을 한 번에 끝내지 말게.
마음 같아서는 기관총이니 대전차화기니 바리바리 싸 주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해해 주게.
총을 쓰면 흔적이 남을 테니 칼을 사용하게.
명심해, 절대로 칼질을 한 번에 끝내지 말게.』
남자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으며 땀을 닦았다.
그가 아는 수화기 너머의 사람, 아버지는 이렇게 긴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지령을 내리던지 항상 냉정하던 그의 아버지는, 오늘은 어쩐 일인지 긴장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아버지는 항상 그런 사람이니까. 하고 남자는 생각했다.
정부의 온갖 더러운 일을 맡아서 하면서도 그 자신은 그것을 입에조차 올리기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그 때문에 내가 손에 피를 묻혀야 하지.
남자는 한탄이라도 하듯 나지막히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감정 따위 드러나있지 않았다.
나를 아들로는 생각하고 있을까
남자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역시 감정은 드러나 있지 않은 채였다.
언제나 자신과 함께 했던, 날은 잘 섰지만 흠집투성이인 군용 대검을 바라보며, 남자는 그제야 얼굴에 긴장을 드러냈다.
몇 년을 그와 함께 보냈으면서도, 칼은 아직 그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에게도....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가
남자는 긴장한 얼굴 그대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에 서려 있던 긴장은 시계의 초침이 12를 가르키는 순간 사라졌다.

"다녀올게. 멜리사."

남자는 머릿속에 한 얼굴을 떠올리며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남자는 목표의 집까지 소리 없이 걸어갔다.
집 안은 캄캄했으나, 그 안에서는 분명히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남자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창문을 살며시 열어보았다.
창문은 의외로 쉽게, 또 조용히 열렸다.
잠겨있는 문을 상상하며 꺼내들었던 락픽 킷(Lockpick Kit : 열쇠식으로 잠겨있는 문을 열 때 사용하는 Unlock Kit 와 달리, 창문과 같이 안에서 잠겨있는 문을 열 때 사용)을 다시 옷 속으로 찔러넣으며, 남자는 달도 뜨지 않은 바깥보다 더 어두워 보이는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집 안에 들어서자 마자 남자는 벽을 손으로 짚으며 숨을 만한 곳을 찾았다.
잠깐 가량 벽을 더듬던 남자는 마치 자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뒤에 충분한 공간을 두고 걸려 있는 커튼 뒤로 들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방의 불이 켜졌다.
다행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는 아무래도 익숙해 질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정말 조금만 늦었다면 분명히 들키고 말았을 테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현 대통령의 정적을 암살하러 갔다가 경찰과 마주쳤을 때의 느낌 이상의 공포.
남자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커튼의 아래쪽을 걷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눈의 소녀를.
남자는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나 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계속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원래대로는 자동으로 움직였어야 했을, 군용 대검에 놓인 손도 마비된 듯 움직이지 못했다.
멜리사.
남자의 입에서는 한 여성의 이름이 나왔다.
그것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소녀는 큰 눈을 계속 깜빡이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호기심 어린 소녀의 눈길은 남자의 눈에서 그의 목으로, 가슴으로, 그의 오른손을 따라, 그의 허리께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소녀는 말했다.

"또 왔군요."

남자는 의아해 했다.
나는 널 본 적도 없어.
목표의 사진은 보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 군중 속에서 목표를 찾아내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또라니?"

목표와는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
남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규칙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소녀에게 물었다.

"어제도 당신 같은 사람 한 명이 왔다 갔어요. 너무 금방 가버려서 재미 없었지만요. 차나 과자 드실래요?"

차나 과자?
남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고 애썼다.
자신의 허리에 채워져 있는 대검을 보고도 웃으며 자신을 맞이하는 소녀. 남자는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왜 왔는지는 알고 있겠지?"

남자는 잡념을 떨쳐 버리려고 물었다.

"흑, 왜죠?"
"뭐?"
"왜 모두 나를 죽이려 하는 거죠?"

상대가 감정에 호소해 오자, 남자는 오히려 마음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대검도 그에 반응하듯 부드럽게 칼집에서 반 정도 빠져나왔다.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는다. 남자는 다짐했다.
마지막 한 마디만 하고 나서.

"너는 위험하니까."
"내가 왜 위험하죠?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웃다니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남자는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은 어째서 이 소녀를 죽이려 하는 건지도.
그는 단지 이 소녀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만을 들었을 뿐이다.
이 소녀가 어떤 위험한 짓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너는 위험하니까."

남자는 아까의 다짐을 잊은 채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번엔 소녀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에 질린 표정이라기보단, 기가 찬 듯한 표정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말하면서 날 죽이려 했어요. 나는 위험하다고. 위험한 존재라고. 어째서인지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어...!"

말을 하면서, 소녀의 얼굴은 점점 공포로 질려 갔다.
남자는 이제야 소녀가 정말로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척 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소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녀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느낄 법 한 감정을 대강 떠올려 본 것에 불과했다.
남자는 자신과 한 사람, 멜리사 외에는, 아무도 불쌍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멜리사....
멜리사를 떠올리자 남자는 가슴이 조금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멜리사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소녀는 멜리사와 너무 닮아 있었다. 심지어는 목소리까지도.

"너는 보통 인간보다 뛰어나니까."

남자는 스스로 생각하기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말을 내뱉었다.

"그게 죄라면 나는 태어난 죄밖에 없어요!"

남자는 소녀의 말에 동의했다.
인간 중에는, 태어난 것 자체가 죄악인 녀석들도 있는 것이다.
마치 자신처럼.
그러나 그는 살았고, 살아있어야 했던 멜리사는 죽었다.
남자가 별 반감 없이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죽어도 좋은 녀석들 대신 죽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죽는, 그런 일은 다시 없게 하기 위해서.
남자가 생각하는 동안에도, 소녀의 말은 계속되었다.

"내가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이렇게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그냥 태어나 보니까 이렇게 태어나 있는 걸 어떻게 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악을 썼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은 없었다.
그가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 이유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단지, 죽여야 했을 뿐.

"난 그렇게 명령받았을 뿐이다. 널 죽여야 할 이유는 알지 못해."

남자는 반쯤 뽑혀나와 있던 군용대검을 완전히 뽑아들었다.
이제는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했다.
하지만 상대는 멜리사의 얼굴을....

"나, 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 살려주면 안 되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 약속해요. 원한다면, 여기가 아니라 어디 다른 곳, 그러니까 감시되고 있는 곳이라도 괜찮으니까 그냥 살면 안 돼요?"

남자는 소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런 명령은 받지 못했다."

소녀는 뒤로 물러서다가 뭐에 걸렸는지 뒤로 풀썩 쓰러졌다.

"명령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인간으로써, 인간으로써 생각해 봐요!"

남자는 흠칫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 발짝 소녀에게 다가섰다.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멜리사는 말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그러나 그녀가 죽고 나서, 그는 자신이 인간인지를 의심했다.
그리고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지금 멜리사와 같은 얼굴을 한 아이가 자신을 인간이라고 하고 있었다.
소녀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면서도 계속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하려고도 하지 않았고요. 그냥 태어나 보니까, 살다 보니까 남들보다 좀 덜 다쳤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죽어야 하나요? 당신들은 나를 위험하다고 말해요. 늘 그랬죠. 몇 명이나 되는 암살자들이 왔다 갔어요. 죽음을 코앞에 두고 숨어있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나는 내가 위험하지 않다고 확신해요. 그런데 왜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거에요? 나는 살고 싶어요. 죽는 건 싫어요! 무섭단 말야!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데! 나도 보통 여자애들이랑 똑같다구요! 난...죽을 이유가 없어! 죽고싶지 않아. 죽지 않을 거야...."

공포가 극에 달해서인지,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횡설수설하기만 했다.
남자는 소녀의 말은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문장은 그의 의식을 무시하고 그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빠...나는 죽고 싶지 않아...죽을 이유...왜 내가 죽어야 하는지...모르겠어.....]

멜리사의 유언.
멜리사는 그럴듯한 유언을 남기기에는 너무 어릴 때 죽음을 맞았다.
그 때, 멜리사는 두려워했다.
마치 그의 앞에 쓰러져 있는 소녀처럼.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래도 날 죽여야 돼요? 죽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뭐든지 할게요!"

조금은 정신을 차린 소녀가 애원했지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녀는 얼굴에 가득한 두려움을 증오의 빛으로 바꾸며 독기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역시 날 죽이려는 거야. 죽여지는 것은 싫어. 죽여지고 싶지 않아. 좋아. 당신들이 그렇게 원한다면 죽어주겠어! 원한다면 죽어주지!"
"이...이봐! 무슨 짓을!"

남자가 말릴 틈도 없이, 소녀는 손에 몰래 쥐고 있던 조그만 과도로 자신의 가슴을 깊숙히 찔렀다.
소녀의 의외의 행동에 놀란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도로 칼집에 꽂은 뒤 소녀에게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 너무나도 새빨간 피가 소녀의 목에서 흘러나와 남자의 손을 적셨다.
소녀는 그런 그를 약간은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나...죽이려던 게 아니었구나....왜...?"

남자는 칼을 뽑은 뒤 옷을 찢어 지혈을 하면서 외쳤다.

"이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싫어졌어!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것도 싫어졌고! 너 때문이야! 그러니까 일어나 봐!"

멜리사에겐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멜리사가 엄청난 상처를 입고 들어왔을 때, 그가 넋놓고 있지만 않았다면 멜리사를 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열 다섯살짜리 소년에겐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지만, 누구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을 테지만, 그는 두고두고 그 일을 후회했다.
이제 그는 멜리사와 똑같이 생긴 소녀의 목숨을 구하려 하고 있다.
제발, 더이상 널 죽게 할 수는 없어. 멜리사!
소녀가 멜리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멜리사의 이름을 부르며 전력으로 소녀의 상처를 지혈했다.
소녀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오른쪽 손으로 남자의 손을 꼭 감쌌다.

"하지만....이제....늦은 걸....이미....끝에 거의 다다른......"

남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소녀를 지혈하고 있던 손에 힘을 더욱 가했다.

"이봐! 포기하지 마! 아직...아직..."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틀려..."
"응?"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나보다는....당신이었어..."

소녀의 말을 듣고, 남자는 깜짝 놀라 몸을 을으키려 했다.
그러나, 소녀의 왼손은 어느 새 번개같이 과도를 집어 들고 있었다.
남자가 그것을 피할 틈도 없이, 소녀가 든 과도는 남자의 목을 뚫고 깊게 박혔다.
소녀는 자신을 지혈하고 있던 남자의 손을 툭 쳐서 치워낸 뒤 몸을 일으켰다.
피는 계속 흘러 내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미안.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난 살고 싶다구. 그냥 가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마워.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멜리사, 멜리사 하는데 나는 멜리사가 아냐. 멜리사는 언젠가 나한테 대들다 죽었던 조그만 계집애라구."

남자는 목에 칼이 꽂힌 채로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뜨자, 멜리사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소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오호...네가 그 오빠인가 보구나...그 아이가 뱃속에 칼이 박힌 채로 자꾸 오빠를 찾길래 그 오빠가 대체 누군가 했지..."

남자는 증오의 빛이 가득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죽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죽어야 할 사람에게 죽었다.
죽어야 할 사람도 죽어야 할 사람에게 죽었다.

"뭐, 남매가 같이, 좋은 곳에 가는 거나 빌어 주지."

남자는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애써 참으려 하며 소녀를 노려보았다.
나는 멜리사와 같은 곳으로 갈 수가 없다.
멜리사가 어디로 가든지....
나는 그 애와 같이 갈 자격이 없어...
남자는 졸음이 오는 것을 느꼈다.
너무 졸립다.
그럼 자야지...
죽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이미 죽었고
죽어야 할 사람도 죽었다.
결국 살아남은 것은
죽어야 할 사람 하나 뿐이었다.
죽어야 할 사람은 말했다.

"어찌됐건, 고맙게 됐어. 남매가 함께 말야."




-필살 스페셜 구창도글 한번에 옮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