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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연애 雨中緣(우중연)

2005.05.26 12:02

비의 검마 조회 수:300 추천:1

extra_vars1 『그 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하늘나라 선녀님과 함께, 참 세차게도 내 가슴속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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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참 많이 내리고 있었다. 담배 한갑 오롯이 삼켜대며 오락에 몰두하느라 한 시간 내내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난 계단으로 내려와서 막 걸음을 내려고 하는 찰나에야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상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좁은 골목같은 지그재그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내려오며, 그러면서 닫혀진 창문을 전도해 들리는 추적추적 빗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얼마나 빌고 또 빌었던가. 정말 오랜만에 갖는 소개팅이라 때깔나는 옷 차려입고, 상대방 여인이 듬직한 스타일을 좋아한다길래 일부러 담배 냄새까지 배게 하려고 PC방에서 한시간을 보내는 노력을 거듭했던 터이니,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소식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짜증이 우러나지 않을 리 없었다.

아! 상황설명을 좀 더 자세히 해야겠다. 일단 인터넷으로 자세히 확인한 기상청의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늘 비가 올 가능성은 기껏해야 20% 내외인 즉,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었다. 장마철이라 걱정되는 바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치적거리는 우산을 들고 다니기는 몹시 싫었기에 난 맨몸만 달랑 집에서 나섰다. 그리고 계획 대로 약속장소 근처의 PC방에 들러 담배를 흩뿌려 댔고, 만족할 만큼 니코틴이 온 몸에 배어났다고 생각되어 어슬렁 어슬렁 기어나오려는 찰나, 비내음을 맡고 만 것이다.

오, 맙소사! 정말 폭우라는 말이 곱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화려하게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는, 도무지 20%의 확률로 내리는 거라곤 믿기 힘든 그 물대포는, 아무리 4인용의 파라솔(Parasol)과 도롱이, 삿갓으로 무장한다 하여도 다리부분은 물씬 젖을 만큼 기기묘묘한 각도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 절망하였다.

절망은 쉬이 헤쳐지지 않았다. 사실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녔다. 조금 생각해 보니 PC방에 손님도 꽤 있더라, 게다가 알바생 역시 이 장마철에 우산 하나쯤 없겠는가? 좀 이따 돌려준다 하고 빌려오면 그만일 터라.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다리였다. 아니, 내 말끔하고 균형잡힌 하체를 맵시있게 가리고 있는 바지, 바로 그것이었다.

일명 빽바지! 흰 백자 쓰는 바로 그 백바지인데, 그것도 내 다리에 걸친 이놈은 무려 서른 두만원짜리 특급품이다. 검은색 정장인 웃옷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스물 두살먹은 백수인 나를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의 거대기업 대표이사로 변모시키고 있는 이 백바지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오늘을 위하여 준비해 낸 스페셜 유니크 레어 아이템였던 것이다. 그런 터인데, 이렇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야 일단 물이 튀고, 서울 비니까 그 안에 섞인 미세한 흙과 모래들이 물의 증발을 기하여 꼬질꼬질한 때깔을 드러낼 테니 처음에 기획했던 미청년 프로젝트가 큰 차질을 빚게 되고 만다.

나의 미청년 프로젝트! 그건 검정장에 백바지, 검구두로 무장한 뒤 머리는 가벼운 갈색 블리치를 넣고 눈썹에 닿는 앞머리를 내츄럴하게 늘어뜨리며 나머지는 뒤로 깔끔하게 정리한 채, 파란색이 스며든 도수없는 안경을 쓴 얼굴은 가볍고 따스하게 미소지으며, 청결하고 고귀한 그 모습에 몸에는 친절이 온통 깃들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여인을 감동시키게끔 해 그야말로 나의 날을 만들겠다는, 오늘을 위한 특 A급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비에 젖고 똥색이 얼룩덜룩한 백바지는 그 계획에 눈꼽만큼이나마 도움이 되기는 커녕 방해만 일삼을 것이 분명. 그러니 오늘 하루만은 철저한 미청년인 내 입에서 아까같은 상소리가 튀어나온 게 아니겠는가. 나는 무척 열이 뻗친 상태였다.

"음……."

팔짱을 꼈던 두 팔중 오른팔을 꺼내어 턱을 괴며, 신음성을 한번 흘렸다. 잠시 고민하고, 결정했다. 그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만은……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이미 일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을. 무릇 나아가고 물러갈 때를 알아야 성공한다 하였으니, 이는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여야 그럼으로써 새로운 것을 움켜쥘 수 있으리라는 진리를 내포한 명언이자 지금의 사태에 유용한 사고방식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마음이 평안해져, 아까 몹시 짜증을 내던 건 내가 아니었다는 듯이 깔끔하게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다시 2층의 PC방으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지고 있었다.

다행히 내일 아침까지 죽치고 앉아서 열렙하시겠다는 아저씨 오락 매니아를 쉬이 찾아낸 나는, 내일 새벽까지 돌려주겠다는 전제하에 접히지 않는 그린용(?) 우산을 획득할 수 있었다. 백바지의 수난은 잊자! 겉모습보다는 친절한 마음씨로 그이를 사로잡으리라. 강렬한 다짐들이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무릇, 백바지가 없어도 미청년은 미청년인 것이다.

마음을 다잡으며, 이번엔 오른손에 기다란 우산을 거머쥔 채 나긋나긋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걸어 내려온 나는, 별 생각없이 우산을 펼치고 거리로 나섰다. 왕복 이차선의 차도가 있고 양편으로 인도와 잡다한 상점들이 즐비한 이곳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특별시의 한 거리……. 인구밀도가 높기로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서울이라지만, 원래 이 쪽 길이 변방이기도 했거니와 맹렬히 쏟아지는 빗줄기까지 가세하여 지나는 사람은 하나 없고, 승용차 몇 대만이 이차선 도로를 질주하며 광맹한 소리를 낸다. 쐐액 쐐액 지나는 차들이 뿌리는 물줄기만 조심한다면 이미 백바지는 포기한 나의 미청년 프로젝트 에디트 버전, 볼륨 2.0에 방해를 가할 것이 별로 없다는 걸 확신하고서 난 그대로 인도를 따라 걸어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모 카페로 향했다. 습기 찬 보도블럭에 구두 소리가 청명했다. 그러나 잠시 후 걸음이란 녀석이 의무를 태만히 했다.

'오, 이쁜 여자!'

아리따운 처자 한사람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하였을 제, 어떤 사람이라도 굳이 걸음을 멈추고서까지 감상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걸으면서 흘끔 바라보며 '오오' 하고 말겠지. 그렇다면 내가 지나친 호색한에 치한, 변태라서 이런 기이한 사태가 발생한 것인가?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녔다. 다만, 이미 길게 드리워진 검은 머리가 물줄기를 뚝뚝 떨어뜨리고, 흰 바탕에 귀여운 곰이 그려진 원피스가 좀 축축해 보일 만큼 비에 맞은 채 그래도 좀 그어 보고자, 쇠로 된 셔터로 이미 세상과 단절된 어느 철물점의 요(凹)한 부분에 들어선 채 후들후들 떠는 듯한 모습이 무척 안쓰러운 탓이었으니, 찬사를 들어 마땅한 태도일 것이다. 흐뭇이 그이를 스윽 훑어보고 있노라니 참, 단아한 모습에 꼭 안아주고픈 그런 여성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이 흐릿했으나 이 세상 사람같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코가 오똑한 게 인상적이었다. 에이, 머리 좀 젖혀 보우, 정말 미인일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다 문득, 고개를 돌린 그이의 눈이 보였다. 어흠, 우산을 하나 더 빌려 보는 건 어떠할까?

그러나, 물론, 내겐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30분인데 약속장소인 카페까지 가서 몸을 좀 녹이려면 10분은 필요할 게 뻔하거늘 지금 시각이 벌써 20분이다. 약속을 잡아놓고 여인을 기다리게 한다는 것부터가 실례이긴 했으나 더욱 큰 문제는, 오늘 또 내가 실패하게 된다면 이미 질릴대로 질려버린 친우들도 중매쟁이 노릇을 꺼려할 게 뻔하다는 것이었다. 천연 미팅소인 대학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 인맥이 적은 나로선 절대 피해야 할 결과! 하여 당장 카페로 뛰어가서 나의 사랑 백바지를 수건으로 좀 닦고, 모습을 단정히 한 채 여인을 기다려 확고한 미청년의 이미지로 그일 사로잡아야 하는 게 나의 사명이자 절대적인 바람일진대, 어찌 이런 별 상관없는 일에 시간을 소비할 수 있으랴.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여인이 서 있는 철물점 건물이 방금 내가 나온 PC방의 바로 옆에 붙은데다 그 카페로 향하는 방향에 있기 때문에 외면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사실 어마어마하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도 아니다. 귀찮기는 했으나 사람으로서 양심을 중히 여기는 나였기에…… 아니, 알겠다, 알겠어. 사실, 가녀린 신세의 그 여인에게 꽤 호감이 일어 미청년의 이미지도 잊은 채 그렇게 바라보다가, 필연인지 공연인지 여인의 우수 가득한 검은색 눈동자의 시선과 그래 정면으로 마주쳐 버려, 재빨리 눈은 외면했지만 결국은 차마 그 처지를 외면하지 못한 채 투덜투덜 대면서도 우산을 얻기 위해 다시 PC방으로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 정말 예쁜 눈이었다. 옛날 얘기 선녀님들이 그랬을 법한, 새까만 눈이었다.

이번 앵벌이 작업은 아까처럼 간단하고 쉽지 못하여, 결국 다섯사람을 허탕친 후에야 귀여운 무늬에 살이 접히는 우산 하나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새 도구의 획득에 성공하자마자 난 헐레벌떡 뛰어서 계단을 내려와야만 했으니…… 으악! 이러쿵 저러쿵 하느라 벌써 4분이나 흘러버렸던 것이다! 아무래도 백바지는 완전히 포기한 채 뛰어가든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좀 늦게 도착하는 두 방법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느 방법이든 미청년 프로젝트에 꽤 지장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 아직 카페에 도달하기도 전이므로 상대 여인의 흘기는 시선을 받을 이유도 없던, 미처 철물점 여인(?)에게 우산을 전해주지도 못한 때에 벌써부터 나는 허탈함을 느껴야 했다. 그 까닭이 무엇인고 하니, 힘겹게 얻은 그 여성스런 우산을 들고 여인에게 전해주러 철물점 쪽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에 이미 여인은 없고 닫혀진 샤타만이 홀로 느긋하게 날 반기고 있었던 것으로, 평소같다면 그냥 '아, 비가 그치기를 기대하던 걸 포기하고 집으로 뛰어갔구나.'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것이었다만 무려 4분이란 소중한 시간을 소모하여 선행을 베풀려 하였던 이 시점에선 허망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했던가, 하는 의구심이 사라진 여인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끊임없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허탈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만큼 주어진 상황이 여유롭진 못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은 하는 수 없는 법, 난 일단 건물로 들어서 우산을 접은 후, 홰액 소리나게 정장 입은 몸뚱이를 돌려 다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으려 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무릇, 나아가고 물러갈 때를 알아야 성공하는 법. 실패에 빠져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더 큰 실패가 되고 말지 않겠는가? 아직 삶에 대한 애착이 커다란 청춘인 나로선 빨리 우산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고, 여러번 차질을 빚긴 했지만 아직 가치가 남아있는 미청년 프로젝트를 이어나갈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심은 했다만 아직도 복잡야릇한 심적 상황속에서 막 몸을 돌려 지그재그 개단으로 향하려 하던 순간에 삐그더억- 하는 소리와 함께 문 하나가 열리며 여전히 축축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철물점에 있던 여인이 등장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의문만 가득하여 멀뚱하게 여인과 눈이 마주쳐버린 찰나에야 상황 판단이 무척 힘들었으나, 이내 여인의 쑥스런 눈동자가 내 시선을 피해 떠나가자 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랬다. 철물점에서 비를 긋고 있던 여인은, 생리적인 현상인지 무엇인지 모를 이유에 의해 이 PC방 건물의 1층과 2층 계단 중간의 화장실로 향했던 것였다. 그래서 철물점에서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고, 막 선행을 포기한 채 PC방으로 올라가려던 때에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으니, 참으로 기묘한 일이 아닌가. 아! 여인이 한 4~5분만 더 일찍 생리현상을 느꼈었더라면, 이렇듯 복잡하고 골치아픈 일은 없었을 것이거늘…….

그런 뚱한 심정에 사로잡힌 난 여인에게 우산을 주어 비를 이길 수 있게 해 주려던 본연의 목적을 잠시 망각하고 말았다. 목적을 잊은 이유가 하나 뿐인 것은 아니고, 굳이 하나 더 들자면 급작스레 낯선 여인과 좁은 공간에서 눈을 마주치게 되어 어찌 처신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냉철한 사고능력을 잃었던 탓도 있겠다. 거 대수로운 상황도 아닌데 얼굴을 돌려버린 여인은 몹시 당황하는 듯했고, 쑥스런 얘기지만 손을 어디다 둬야 할 지 모르고 있던 건 나 역시도 그이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혹의 결과로서, 나는 다시금 몸을 홰액 돌려 여인을 외면하고 말았다.

…… 정면으론 화려한 각도로 휘어지며 아스팔트에 부딪혀 요란한 음색을 내는 빗줄기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마치 내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이리저리 부닥치며 도무지 혼란스럽다. 처음 심정은 좀 떨떠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생각이긴 하다만 마치 선심써서 큰 돈내고 선물을 했는데 필요 없다며 상대가 팽개친 듯 느꼈달까? 그래서 무턱대고 몸을 돌려 외면해 버렸지만 사실 그러려던 바도 아니었다. 그 여인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차라리 마지막 게임을 이겨야 한다며 한사코 5분을 더 뻗대고 PC방을 나섰던 내 잘못이지!

'암튼 난 뭐 하고 있는 걸까. 이거 좀 멍청한 꼴 아닐런지 몰라, 저이는 나한테 별로 신경도 안 쓰는지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나는 다시 원래의 목적과, 주어진 시간이 매우 짧음을 기억해낼 수 있었기로 신음을 흘렸다. 그래, 이러고 어색하게 서 있을 게 아녔다. 영원과도 같았던 시간이 이젠 제법 흘러서, 벌써 십여초쯤이 말없이 지났기에 이제 심기도 정리했겠다, 당연히 원래 계획대로 자비로운 표정을 지으며 우산을 전해주고 미청년의 모습으로 갈 길을 가야 할 터였건만 왠지 몸을 돌려 여인을 보기가 거북하고 주저되었다. 행여나 여인이 뭐라고 말을 걸어올까 하는 바람만 있고 정작 나 자신은 뭘 하면 좋을런지 감이 잡히질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기한이 매우 촉박한 것이 이쪽이야말로 아쉬운 처지였기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 몸은 돌리지 않고 중얼거려 보았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그리고 한동안 빗소리만 우람할 뿐, 사위가 조용했다. 내 말을 들은 건지, 아니면 못 들은 건지. 대답을 않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아니, 대체가 지금 내 뒤에 서 있기는 한 것일른지, 난 어느 하나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조용한 와중에 여인이 내 몸을 제치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만을 유일하게 이해할 따름이었으니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되자 이젠 자연스레 눈이 감겨왔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알고 있다, 이런 장마철 비 내리는 날이 아니었던 바에야 이 도시에선, 거리에서 스쳐 지나는 사람들끼리 얘기를 나눈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語不成說)에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고운 눈을 마주했고 선심으로 우산을 빌려주려 했던 심기가 있었고, 우연히도 지금 이처럼 한정된 공간에 같이 있게 됐다고 하여 보았자 지금 내가 누구나 보일 태도를 취하는 건지, 아니면 누구나 바보짓으로 생각할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일른지 의구심이란 것이 자꾸 발을 두드렸다. 이 도시는 여태껏 내게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들 중 누구도 도시의 도도한 면모를 이상타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오늘만을 위해 비싼 백바지를 빌려 한껏 멋을 내 본 난 손쓸 방도가 없는 촌놈이었다.

어렸을 적 얘기를 가끔 친구들에게 들려주곤 했었다. 시골에선 사실, 이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 곁에 있는 사람의 반응을 걱정하는 일은 별반 없었다. 마을 사람끼리 얼굴을 다 알고 있으므로, 가끔 외지에서 놀러온 사람이 있을 때에나 잠시 말 걸기가 힘들고 통성명 하기 꺼려지는 것 뿐, 언제 이렇듯 어색할 수 있을까. 언제 이렇듯 자기 행동이 웃기는 일은 아닌가 고민할 수 있었을까. 그나마 몇 안 되는 친한 녀석들은 녀석, 순진하구나, 어쩌고 하면서 어깨를 툭툭 쳤지만 그것 뿐이었다. 그럴때면 꼭 '닫힌계'가 떠올랐다.

네 명의 급우들과 한가로이 자전축의 변동을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께선 과학자들이 나눈 세상의 구역권엔 세 가지 성격이 있다고 하시면서 열린계와 고립계, 닫힌계를 말씀하셨었다. 열린계는 물질도 에너지도 곁의 다른 구역과 교환한다. 고립계는 어느 것도 교환하지 못하는 별개의 세상이고, 닫힌계는 바로 나였다. 닫힌계에선 외부와 에너지를 교환하는 게 가능하지만 그러나 많은 실질체들이 그 속에 갇힌 채 외부와 교류하지 못한다는 것였다. 그 닫힌계야말로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서울살이 삼년차 촌놈, 바로 내 모습이 아닐른가…… 그런 생각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어쩌면 내가 시골에서 오래 자라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따위의 생각은 무척 고통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는지라, 그리고 그런 어색하고 혼란한 심기론 당최 미청년이고 인자한 우산의 전달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기로 난 호기롭게 한마디를 더 해야 했다. 외치듯!

"무슨 비가 이렇게 쏟아지나! 우산 없으면 참말로 흠뻑 젖겄네……."

그런데…… 맙소사! 정말 당황했었는지, 서울 올라와서 최대한 자제하던 토종 전라도 사투리가 말 중에 흘끔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복잡한 심중에 그래도 아리따운 여인에게 잘 보이고픈 마음이 없지 않았건만 이래서야 촌사람으로 낙인찍히기가 딱이다! 마음 속으로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심기를 알 수 없는 철물점 여인은 여전히 숨소리도 안 들리게 가만 있을 뿐…… 아니, 고개도 안 돌리고 있는데다 빗소리가 자자하므로 여인이 뭘 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나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심정에 여인이 씨익 비웃고 있으리라고 단정짓고야 만 터였으니, 그런 가상적인 사실에 괜히 오기가 올라, 마음대로 생각해 보라는 심기로 한마디를 더 중얼거리고야 말았다. 완전한 방언으로!

"아가씨 우산 없소? 빌려 줄티니께 쓰고 가씨요."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아뿔싸! 정말 왜 이러느뇨, 이 친구야. 이젠 정말 두말할 나위없는 촌사람이 되고 만, 그래서 성공한 인생의 미청년으론 절대 보이지 않을 자신을 느끼며 속으로 다그쳐 보았다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이미 지난 일, 더 어찌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 것였다. 5초 빠른 인정이 다섯배의 성공을 부르는 법, 늘 그랬듯 차라리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면으로 보여지는 여인의 모습은 다행히도 대놓고 비웃는 모습은 아닌 듯 싶었으나 속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난 최대한 표정을 감춘 채, 고개를 숙이고 성큼성큼, 여인에게 다가가 왼손에 들린 우산을 들어올렸다. 거, 상황에 안 어울리게 무늬가 참 귀엽기도 했다.

여인은 화장실에서 나와 내 눈과 마주쳐 고개를 돌렸던 그 곳에서 가만히 있었던 것 같았다. 왜 그랬을까, 혹시 누구 따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연한 고민과 쓸데없는 선심였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조금씩 마음에 엄습해오면서, 실은 그 멋쩍은 마음에 우산은 바닥에 팽개쳐 두고 갈 길을 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너무 성의없는 일인 데다, 지금까지 해 온 노력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느낌도 들어서 기각한 터였다. 그래서 앞이 깜깜한 와중에 왼손을 들어 내보였던 것인데 우산을 건네는 품으로 여인의 답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이 이렇게나 긴장되고, 가슴이 두근거릴 거라곤 차마 생각하지 못했기에, 눈 앞이 어지럽고 몽환스런 심정이 된 게 무척 당황스러웠다. 고개를 빼꼼 들어 흘끗 본 여인의 얼굴은 흐릿하니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 깊고 까만 눈동자 하나만큼은 너무 곧바로 내 눈에 와닿고 있어 순간 깜짝 놀랄 지경이어서 곧 고개를 숙였다.

'아, 어서 받아요. 어서 받으라니까……!'

속으로 외치고 외친 보람이 있었는지 여인은 수줍은 자태로 고운 오른손을 내어 내가 건넨 우산을 받아 쥐었다. 매정하지 않은 그 손길에 잠시, 아주 잠시 기분이 좋아져서 실실 쪼개며 눈을 마주칠 뻔 했으나 잠시일 뿐이었다. 마음이야 예쁜 여인과 얼굴 마주하면 좋겠지만 그거 참 쑥스러운 일이 아닌가. 외려 내쪽에서 매정하게 눈길을 피해버렸고, 어쩌면 고맙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을지도 모를 여인은 그저 우산을 두손으로 포근히 쥐고있는 듯했다.

그런데, 이렇게 그냥 여인을 떠나버린다는 것에 대해선 조금…… 아니, 무척이나 의아한 상황이라고 판단할 이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러하다. 내가 우산을 주면서 그게 내 것이 아니라 앵벌이를 통해 빌려온 것일 뿐이란 걸 얘기하지 않았음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내된 이로서 어떻게, 아리따운 여인의 앞에서 그런 부끄럽기 그지없는 말을 떠벌릴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 돈 몇천원 써서 원래 주인한테 새 우산을 사주고 말겠다는 생각에 고의적으로 한 행동이었으니, 그 외에 다른 문제가 없다면 난 이만 여인의 곁에서 바람처럼, 혹은 나비처럼 사라져 버리고픈 심정이었다. 그런 내 심정을 관심법으로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여인도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난 슬그머니, 그러나 최대한 매정한 품으로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고자 했다.

그래! 더 이상 미련도 없…… 지는 않다. 사실 여인과 몇마디 말이라도 더 나눠 보고, 또 왜 그렇게 비를 맞았느냐며 질책 아닌 질책으로 그 수줍은 미소를 한번 훔쳐보고픈 심정이 있기는 했다만, 그런거야 꿈일 뿐이지, 어디 처음만난 미인과 할 만한 일이겠는가. 이 도시는 그렇듯 꿈과 현실을 둘로 나누어서 사람들에게 두 배로 삶을 즐기도록 해 주지 않는가 말이다. 하여 비록 미련은 남지만 아직 미청년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았기에 가차없이 발걸음을 놀려, 계단 아래 짧은 복도의 끄트머리에 선 채 우산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이 우산이 펼쳐지면, 이제 이 짧은 인연은 끝이다. 한바탕 폭우 속의 어색했던 꿈이 지고…… 다시 난 현실이란 이름의 마라톤으로 돌아서, 미청년 프로젝트를 재차 제고하고, 그렇게 이 우산이 펼쳐지면……

"저어…… 기요!"

…… 설마, 했다. 아니, 얘깃거리 삼아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설마설마 했다. 그 나름으론 크게 소리내서 부르고자 하는 바람이 필시 있었을 것만 같지만, 폭우가 뿜어내는 음률에 고막을 두드려맞고 있던 내겐 그리 큰 소리로 들리지 않았고, 어쩌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을 법한 미묘한 소리의 파장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빨리 가야 해, 빨리 가야 해, 하며 외치고 있는 이성의 논리를 무시한 나는 슬그머니 허리와 목을 돌려 뒤를 바라봤고, 눈동자의 운동을 통해 인식된 건물 안의 모습에 큰 눈으로 몸을 돌릴 수 있었다. 선녀의 눈동자가, 아니, 철물점 여인이 분명한 시선으로 나를 직시하고 있었으며, 그 입이 조금 벌리어 아직 다 닫히지 않은 상태였으니 필시 날 불렀던 것이리라, 하고 추론해 냈던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과 대화하고픈 미련이 다 가시지도 않은 터였으니 룰루랄라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막상 돌아서서 생각해 보니 할 말이 없었다. 하기사 여인쪽에서 불렀으니 내 쪽이야 할 말이 별로 없는것이 당연하도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부른 이유를 물어보는 것 뿐이었다.

"왜 불러요?"

퉁명스레 말할 필요는 없었건만 혹시 부른 게 아니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탓에 말투가 자연 딱딱해졌다. 그러면서도 말투 탓에 여인이 꺼려 하면 어쩌나 하고 조바심내고 있었으니 참으로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기는 하다만, 다행히도 여인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인지 결코 얼굴을 찌푸리는 법 없이 말을 이었다. 여인의 이어진 말은 미처 나로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실 내가 돈 날리면서도 하는 수 없이 실천한 안타까운 사기행각의 결과물적인 요소가 다분히 끼어있는, 그런 내용의 얘기였다.

"우산 돌려드려야죠. 연락처요, 적어주시겠어요?"

여인은 그러면서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실로 좀 오래 뒤적뒤적거리더니, 한참 후에야 멋쩍은 듯 예쁘게 웃으며 펜과 종이를 건네왔다. 아마도 좀 덤벙대는 성격인 듯 한 게, 펜도 두 개를 쥐어 내밀고 있다……. 그리고 여인이 그렇게 부산스러운 동안 내 심정도 무척 부시럭대고 있었으니 참으로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걸까? 사실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평소에 나쁜 두뇌를 한스러워 한 적이 몇번 있긴 했지만 이리도 멍청하리라곤……. 그랬다, 여인은 분명 그 귀여운 무늬의 우산이 내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돌려주려 할 거고…… 이거야 말로 오비이락! 애쓰지 않아도 작업이 되는 거잖아?

반전도 이런 반전이 있는가. 참으로 희비가 엇갈렸을 듯한 아까 상황을 잠시 되새겨 보려니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생기는데, 이번엔 애써 여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웃는듯이 해 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좀 두려워서 반응을 보지 않고 펜과 종이를 받아들고 유려하고도 묵직한 글씨체로 나의 이름 석자와 핸드폰 번호를 또한 수려하기 그지없는 사인과 함께 적어넣었고, 돌려주면서 그제서야 여인의 얼굴을 오롯이 바라보았는데, 구름결처럼 부드러운 피부 위에 별처럼 뜬 두 눈동자가, 오똑한 그 코가, 빠알간 입술이 날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게다가 괴상한 게 적힌 종이를 보곤 푸훗, 하며 웃는데, 그래, 선녀다!

'선녀야……. 비내리는 날, 구름에서 미끄러져 같이 내려온 하늘나라 선녀인게야…….'

친구 하나가 시랍시고, 제 연인을 찬양했던 글귀 중 하나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 글귀가 친구에게 들은 건지 문학에는 젬병인 내 글솜씨의 그 최대한을 발휘해 머리속에 끄적거려 내린 건지 그거야 정확하지도 않고 내 두뇌로 확신하지 못하겠고 중요치도 않은 일였다. 정말로 이 여인은, 내게 선녀처럼 다가왔다. 선녀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땅과 하늘의 두 삶을 살아야 하는 이 도시에서 구름처럼, 땅의 식물과 하늘을 이어주는 그런 사람, 불행한 이들의 염원을 하늘에 전해 주었다는 그 선녀, 바로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있었다. 어느 순간 난 미청년이 아녔고 서울 사는 촌놈도 아니었고 지금 이 순간, 여인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 난 그저 나라는 오롯한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당연한 것으로 이미 소개팅이나 미청년 프로젝트 따위는 도저히 내 뇌리에 침범할 수가 없었으니, 이제 다시 친구들에게 여인을 소개받기는 근간에야 몹시 고단한 일이 아닐까 한다. 뭐, 딱히 또 누굴 소개받을 마음도 생기지 않지만.

그래, 내 소중한 빗 속의 인연(雨中緣)은, 그렇게 시작되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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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썼던 글을 오랜만에 창도로 날아든 밤을 맞아 이럭저럭 고쳐 보았습니다. 참, 전엔 퍽 좋은 글이야, 했었는데 조금 자란 시각으로 보니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상징이나 몇 가지 소재를 부여해 어느정도 글다운 글로 변모시켜보고자 했으나 부족한 글임엔 여전한 듯 싶습니다. 부족한 필자이니 그게 당연하겠지요.

자기소개 올립니다. 이 사회의 '기타'직업권에 속하는 이로 雨劍魔라고 불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프리웨어 수집하기나 장황하게 말 늘어놓기 등이 취미인 참으로 평범한 청년이랍니다. 앞으로 문학동에 장편소설을 좀 연재할까 합니다. 두 가지를 생각중입니다만, 둘 다 아직 구상단계입니다. 하나는 무예계통으로, [싸울애비]입니다. 고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가상을 다분히 섞어 독특한 분위기의 글로 이끌어 볼 생각입니다. 조선의 독특한 감찰제도였던 암행어사제가 고대 삼국시절부터 있었다는 가정하에, 백제에서 가장 화려했으며 비참했던 왕이라 할 수 있는 성왕 예하의 자유로운 [싸울애비] 간난달의 싸움과 고뇌, 복수를 그릴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환생몽환지가]로 마술이나 기이한 생물들이 등장하는 판타지 계통의 글입니다. 줄거리는 얼추 되어있으나 아직 짜임새가 부족한 글로, 작성된 초기 일부를 소개삼아 붙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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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회.
                생이 진하여 사하면 생한다. 그 생을 후생이라 하고,
                후생은 후후생의 전생이 되어 후생을 낳는다.
                사람도 윤회하며, 짐승도 윤회하며,
                ,
                사람은 윤회를 낳았다. 후생을 길렀다.


                                
  "무슨 책?"
  
  진영이는 서점의 눈에 띄는 곳에서 선 채 책을 훑고 있었다. 빨간 표지에, 제목은 어, 윤회?
  원 녀석도. 별난 책을 다 읽는군?
  
  "불교 믿었어?"
  "알라."
  "……."
  
  당최 진심인지 원.
  방학이었다. 기상청에선 미리부터미리부터 <올 여름은 유례없는 기상이변으로 최고기온이 이십 오 도를 밑도는 약서현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건 구월 초가 되겠습니다.>하고 문제성 다분한 발표를 했고 재해에 가깝다는 이변에 학교장들은 방학을 한껏 뒤로 미뤘고, 결국 누구의 잘못인진 몰라도 올해 학생들 무더위에 학습하느라 고생 많았겠어. 아무튼 덕분에, 엄연히 가을비도 내리는 서늘한 날씨 속에서 우린 방학을 맞을 수 있었다. 나름대로 신선했다.
  진영인 곁에 서서 궁시렁대는 날 신경쓰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미동도 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항상 포커페이스인 녀석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고, 말도 붙이기 힘들다.
  한번쯤 니가 말해도 되잖냐.
  
  "……는?"
  "어?"
  "……."
  
  말했다. 으흐흠.
  
  "야, 뭐."
  "너는."
  "나는 뭐."
  "……믿냐고."
  
  잠깐 심호흡을 한 후에 대답했다.
  
  "알라는 안 믿어."
  "…… 건 쌩이었어. 뭐 믿냐고."
  
  진영인 왠지 좀 들뜬 듯했다. 왜 그럴까? 평소보다 훨씬…… 말수도 많고. 이녀석이 나한테 말 건단 자체가 실은 기적이련만, 저렇게 당당히 바라보고 오니 뭐 이상하단 생각도 하기가 힘들다.
  일종의 심리전인가!
  
  "난 자랑스럽게 단군할아버지 잘 믿어. 천, 지, 인. 홍익인간."
  "……."
  
  야아, 농담 아니었는데. 정말 대종인데 나. 얜 순간 내가 장난으로 복수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알라를 믿어."
  
  우헝헝. 좀 웃으면서 말을 하던지.
  
  진영인 이학년이었다. 난 삼학년이다. 고로 난 걔 선배지만, 아쉽게도 얘한테 선배취급 받느니 ET와 손가락을 마주하는 게 쉬울 것이다. ET보다 다루기 힘든 걔는 날 아무렇잖게 무시하며 다시 책을 읽고 있었다. 빨간 표지에, 윤회. 어…… 제목 아래에 뭔가 쓰여 있나?
  고개를 숙이고, 책을 살짝 들춰서 올려봤다. 음, 그렇군.
  빛을 못 받아서 안보이는군.
  그냥, 올려보고 있자니 진영이 도끼눈만 한가득 보여 왔다.
  
  "뭐해?"
  "어어, 제목이 뭔가 해서. 재밌냐?"
  "윤회."
  
  우와.
  
  "…… 그 공허한 환상에 대해서."
  
  어?
  순간 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으스스한?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 감긴가? 진영이를 보면서 비틀거릴 줄이야.
  
  "아……프냐?"
  "아냐, 마. 내가 아프면 넌 죽었게. 책 읽고 있을거냐?"
  
  왠지 생각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얘가 대답할 애는 아니다.
  
  "그럼, 나 갔다가…… 아니…… 갈게. 잘 있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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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타자는 즐겁군요. 즐거운 하루 만들어 나가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