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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누구도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2005.05.26 09:41

L.V.Verdinihi 조회 수:179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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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1.
어떤 세계의 이야기이다. 오로지 나의 허구와 내면세계 속, 그리고 이 글 내에서만 존재하는 이 세계에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 우리와 같은 사회를 이루고 있고, 그것이 모여 국가, 나아가 대륙과 세계를 이루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기술하고 싶은 것은 그 중의 한 나라이다. 이 나라도 인간이 사회를 이룬 그 속에서 만들어진 평범한 국가이다. 다만 한 가지, 내가 그 나라를 주목한 이유는, 이 나라의 국민 모두가 '그것' 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 이 무엇인지는, 그 나라 사람들만이 알 수 있었다. 고로, 이 세계를 유심히 관찰하는 나로서도 '그것' 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지 못한 채 이 글을 기술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내 허구 속에서 만들어낸 존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내가 모르는 '그것' 이 생겨버렸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세계를 죽 보아온 바로는, 그 나라 사람들의 대다수는 지식인들이라, 모든 지식의 정점에 '그것' 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나라는 '그것'으로서 움직이고 '그것' 으로서 '그것' 을 통해 일하였으며 '그것' 없이는 살 수조차 없게 되었으고, 심지어 '그것' 으로 인간 자체를 판단하기도 했다.
나는 또다시 알 수 없는 궁금증과 호기심에 휩싸였다 - 원래 인간이란 너무나도 호기심에 쉽게 휩싸이는 존재가 아니던가?! - . 나는 몇날 몇일을 그 세계에 심취하여 탐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주목하게 된 불쌍한 친구가 디에노스 (Dienos, 이는 발명왕 에디슨의 영문 철자 E D I S O N 을 마구 섞어놓아 제일 어색하지 않은 내에서 정한 것이다)라는 친구이다.
세상에는 어디에나 '별종', '돌연 변이' 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내가 관찰을 시작한 디에노스라는 친구도 그런 부류의 인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다른 쪽으로 변이가 일어났다면 오히려 그에게 좋았을 것을. 그는, '그것' 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하필 '그것' 을 모르게 되는 존재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나란 인간은 처음에 이러한 극소수 인물의 발견에 매우 무관심했지만, 그의 과거와 그의 외침, 그리고 그의 사정을 알게 되자, 안 그래도 궁금했던 이 세계에 대한 것들이 이제는 미칠 듯한 욕구에 옮겨붙어 더 이상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2.
그는 다른 이들처럼 너무나 평범하게 태어났다. 뭐, 한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남들에게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기 힘든, 입가의 특이한 점이 그에게 나 있었다는 것이다랄까. 각설하고, 그들의 부모는 다른 이들처럼 디에노스가 지식기반의 사회에 큰 지식인이 되기를 바랬고, 그도 그렇게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정말 똑똑했으니까. 한번 기억한 것을 거의 대부분 외우고 다닐 정도의 그였다. 그의 10년 스승인 빌록쉬스(이 또한 루이 16세의 이니셜, L O U I S X I V를 어설프게 조합한 것이다. 그에게 감정은 없지만, 뭐), 그 학교에서 제일 칭찬에 인색하다던 고약한 빌록쉬스도 언젠가 그가 12살때 학교에 와서는 머리를 쓰다듬고 너는 이 애들중에 제일 먼저 '그것' 을 찾아 낼 거다 라고 말했었다. 그것이 그냥 지나가는 빈말이었는지 칭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빌록쉬스는 그러한 말을 한 것이다. 사례를 조금 더 들자면, 항간에는 그 입가의 점이 천재의 상징이라고도 한 적이 있었다. 옛날 그 나라의 누구 성자도 그렇고, 진짜로 천재로 불렸던 누군가도 그랬고. 시조 국왕도 그랬고.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15세 때, 친구들이 '그것' 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조차도 그는 '그것'에 대해 글쎄, 라는 말로만 일관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천재는 원래 늦게 태어난다느니, 혹은 대기만성이라는 그럴 듯한 말들을 해가며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17세가 되고, 그 반에서 가장 못났다는 노키메부스(이 또한 어떤 인물의 단어를 조합한 것이지만, 말하지 않겠다. 풀 수 있는 자는 풀어 볼 지어다, NOKHYMEBUS이다)마저 '그것' 의 대열에 합류했을 때조차도, 그는 다른 이들에게 쓰잘 데 없다 불리우는 문학이나 시들을 읊고 다녔고, 그가 말하는 '이상' 이란 것은 '그것' 과 그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하였으며, 결국 그와는 누구도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왕따' 라는 것이 이렇게 형성되는 것이리라.
'그것'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그것' 없이 사는 것이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생활을 '그것'에 의존해 살았으므로, '그것'과 관련되지 않은 실생활이란 없었다. 사실 '그것' 과 실생활이란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이었지만, 이 둘이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 이유는 한가지이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이 여겨버렸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묻지 않았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캐낸다면 알 수 있겠지만서도... 그러므로 실생활 중에서 '그것'과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점차 사라져갔다. 굳이 있다면 그들이 쓰잘데 없다 부르는 것이랄까. 이러니, 더 이상 그들은 디에노스에게서 바라는 것이 없어졌고, 그 또한 더 이상 되는 일이 없었으므로, 집에 틀어박혀 잠깐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글을 짓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람과 사람간의 대화가 없어졌다.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은 이미 '그것' 을 아는 사람, 그리고 디에노스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으로 갈라져, 더 이상 어떠한 커뮤니케이션이 통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디에노스는 혼자이고, 그들은 다수이다. 알지 않은가, 인간의 본성을. 인간은 자신의 사회와 자신의 무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한다.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천성이 착했던 디에노스지만 이러한 집단적 손가락질을 받고도 성격이 바뀌고 사람 자체가 바뀌어버릴 정도로 바보이거나 철판이 두둑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와 같은 사람들은 늘 죽음을 생각한다. 언제라도 '그것' 없는 고통스러운 육체를 버리고 나와 두뇌 속에서 사라져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것은 내가 그동안 이야기해 왔던 '그것' 과는 다르다)조차 힘든 것은, 죽기에도 '그것', 죽어서도 '그것'……. 내가 보기에 심히 짜증날 정도로 이 세계는 '그것' 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나, 하는 정도로.


"도대체가, 이놈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것은 나의 울부짖음이 아니다. 디에노스가 사람들의 무관심과, 그로 인해 꽉꽉 잠궈둔 창문, 그의 방이 2층임에도 불구하고 빛조차 그의 곁에 있는 것을 허용치 않는 두터운 커튼으로 닫힌 그의 방, 그 안에서 한 줄기 전등 빛에 의지해 글을 쓰고 있던 그가, 비로소 펜대를 꺾어버릴 때.
디에노스는 울부짖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것' 이 없는 그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라고 그 세계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디에노스는 손톱을 뜯으며 생각했다. 그동안 가끔 밥때 맞춰서 잠깐 낼와서 겨우겨우, '그것' 없이 밥을 먹고, 부모 형제 자매들에게 욕을 좀 듣고(그래도 밥은 챙겨줬던 것을 보면 디에노스는 주워온 자식이 아닌 모양이다)다시 방안에 틀어박혀 글을 썼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초췌해지려고 해도 그렇게 초췌해질 수는 없었다. 세간에서 야이가하는, 그, 폐인이라던, 그 꼴. 생각해보라! 초췌한 폐인이 엄청나게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뜯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자를 정신병원에 빨리 데려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들린다.


"에잇!"


그러다, 갑자기 그는 빛을 가로막고 있던 커튼을 걷어버렸다. 오랜만의 햇살은 너무나 눈부신 듯, 한동안 그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동공이 제법 빛에 익숙해지자 이윽고 그는 유리창마저 열었다. 얼마만에 맛보는 상쾌한 공기……. 그러나 그런 것을 맛보는 그의 얼굴에는 기쁜 구석이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음이다.


'이 공기도, '그것' 이 없으면 더 이상 맛보지 못함인가…? 이 햇살도, '그것' 이 없으면 느끼지 못함인가…?'

그러다가 그의 생각은 너무나 철학적이던 자신을 햇볕에 말려 조금 현실적으로 변해가는 듯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 그에게, 누군가가 외쳤다. 딱 봐서, 부티가 나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고위 관직에 있던 사람인 것이 분명하였지만.


"어이, 야, 이 '그것' 도 없는 놈아. 재수 떨어져, 썩 들어가지 못해?"


그러고서는 나오는 말이 도저히 엘리트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말이었다. 이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그를 알아보고,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그것' 이 없는 것이야말로 그 나라 초유의 사태일 테니까. 그가 '그것' 을 모르는 자로서 알려진 것은 20세 전후였을 것이다. 보통 그 나라의 사람은 그 이전에 이미 '그것' 을 알게 되니까. 그 쯤 되면 아마 그 당사자가 누구인지, 그 사람이 어디 사는지 정도는 알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주변은 되도록 피해야 하니까.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지금대로 뭐라뭐라 욕을 하는데,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디에노스는, 평소대로(라고 해봐야 이미 대화란 것이 단절되어 버린 지 십년도 넘어버렸기에, 나의 평소를 대봤다만)라면 똑같이 욕에는 욕으로 대응하며 쾅 하고 유리문을 닫아버렸어야 했을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생각에 푹 빠져 있어 보여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귀를 닫아도 들릴 것은 들린다. 하물며 그렇게 가만히 부들거리며 그 한사람 한사람을 여러가지 감정 섞인 눈으로 바라다보는 그에게, 그 말이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누구보다도 그 상태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그 욕지거리를 온 몸으로 받아가며 슬픈 눈빛을 짓고 있었다.
그가 그동안 창문을 닫아두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이 무엇이며, 디에노스에게 왜 '그것' 이 없고, 도대체 사람들이 왜 그를 욕하는지 까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3.
나는 더 이상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나의 두뇌에 몇몇 전기적 신호가 빠르게 움직이며, 세계를 완성하였다. 조금 더 생각을 하자, 그 나라가 보였다. 그 대륙, 그 국가, 그 도시, 그 마을. 그러니까, 디에노스가 사는 마을. 그리고, 그 거리. 나는 그 곳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맥이 빠져 돌아갔지만 디에노스는 아직도 상념에 빠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의 행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죽 지켜보며, 그 하나하나가 왜 그러했는가, 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어이, 이봐."


그는 예의 상황처럼 나의 말을 간단히 무시하고 자기의 생각을 펼쳐갔다. 아마 종전의 나도, 그를 만나기 위해 했던 생각을,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채, 그렇게 그려나갔으리라.


"이봐, 디에노스라고 했나?"
"......"
"날씨가 참 좋지, 그렇지 않나?"
"......"
"올라가도 되나?"


상상이란 너무나 좋은 것이다, 그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해 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2층으로-어떻게 올라갔는지는 나도 이해되지 않지만 어쨌든-올라갔다.


"이봐, 내 말 안들리나?"
"당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 좋은 상상을 방해한다는 것이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디에노스는 갑자기 친한 척 하려는 사람이 생기자 오히려 반감을 가졌다.


"알았소, 계속 생각하시오. 아마,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상상이었던가?"


자기의 마음을 읽히는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다.


"다... 당신은 누구지?"
"나는... 이 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이오."
"그렇다면, 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어 시원하게 웃어제꼈다.


"하하핫, 글쎄, 마음에 들긴 하는데. 내가 신이라면 당신 앞에 이렇게 존재해 있을 리가?"
"그렇다면, 빨리 여기서 나가, 누가 너같은 사람 얼굴 보고 싶다던..."


그는 부정하여도, 나는 그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당신,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요? 언제나 왜 사람들이 내가 단지 '그것'을 모른다는 이유로 그렇게들 행동하는지. 그리고, 알고 싶었겠지요?"
"......"
"그렇다면, 그 생각 끝에서, 혹시 '그것'을 찾아내시었소?"
"젠장,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몰라, 모른다고!"


내가 한번 더 찔러주자 그는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흥분한 나머지, 피해망상에서 오는 여러가지 지껄임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래, 당신도 지금 나에게, '그것'이니 뭐니를 들어가며, 나를 엿먹이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는 못해. 나가, 나가라고!!"


그리고는, 어딘가에서 종이칼을 꺼내 나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다지 두려워하진 않았다. 어차피 내 상상 속인지라 저 사람은 내가 원하지 않는 한 나를 죽이지 못한다. 그것이, 방금 전에도 말한... 상상의 매력이다.


"소용 없는 일이오. 나는 당신을 놀리려고 온 게 아니오."
"...그럼, 뭐야...?!"
"나도 '그것'이 궁금하단 말이오."
"그거라니, 그거 뭐?"
"당신이 알고 싶어하던, '그것' 말이오."


그는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풋. 하고 체념의 코웃음을 쳤다.


"이거이거, 별일이군. 나 말고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또 있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그 코웃음에는, 무언가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그간의 고통이, 자기와 비슷해 보이는 나라는 사람의 등장을 통해 다시 살아나려 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의 부재... 디에노스는 자신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외국인인가?"
"... 난 이 세계에 살지 않소."
"그런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당신은 이곳을 몰래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군.
이곳은 도무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야, 모든 것이 '그것' 운운으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아예 이곳에 살 수조차 없으니까. 그러니, 강을 따라 차라리 야만인의 땅으로 가버리는 것이 낫겠지."
"...야만인의 땅이라고? 어디가 야만인의 땅이라는 거요?"
"아마, '그것'이 없는 저 바깥세계 사람들의 백성을 야만인이라고 하지. 그들이 사는 곳이 야만인의 땅이고."
"그럼 당신은 왜 그렇게 못하시오?"


그는 슬픈 기색을 보였다.


"감시당하고 있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저기 저 빌어먹을 가족이란 것들에게."


그에게 가족은 이미, 감시자 이외에는 그저 밥을 주는 사람, 쯤으로 그에게 인식되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다른 사람이 그를 감시한다고 하면 가족을 매수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제일 가깝기 때문이니까. 이미 애물단지처럼 되어버린 디에노스니까, 정이라고는 다 팔려나갔을 것이다. 그나마 부모라는 마음이 있어서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것이지, 그 이상의 일들은 이미 거부당하고, 그 일은 대신 다른 것들로 채워진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에게 감시당할 만큼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가 제일 믿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그렇게 쉽게 깨져버렸다는 것을 그는 단지 너무 빨리 깨달았을 뿐이다.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 여기서는, 체제 전복보다도 더 심한 일로 치부되고 있는 것. 그래, 그렇군. 나는 그 생각에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빨갛게 물들여야 했다, 애절한 말로 나를 회유시키려는 그 디에노스 앞에서.


"뭐가 그렇게 웃기는 거지?"
"그, 야만인의 땅, 누가 가르쳐주었소? '그것'을 아는 자요, '그것'을 모르는 자요?"
"'그것'을 모르는 자는 나밖에 없다만..."
"그래서 설마, 그것을 믿는 건 아니겠지요."
"그저 절대 다수가 이야기하는 것 뿐이오."


나는 왜 이 자가 '그것' 없는 놈이라 불리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정말 웃기는 군. 그럼 '그것'이 있고, '그것'을 안다고 한 자들도 그들이오?"
"...몇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그것을 믿으신단 말이오?!"


그러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이다가 문득, 새빨개진 얼굴과 분통 터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아니오. 나는 다만, 당신의 상식 밖에 있는 걸 이야기하려 할 따름이오.
이 나라 사람들이 야만인의 땅이라고 부르는 곳, 혹은 이 행성의 반대편에는 이 나라 사람들보다 적어도 훨씬 잘난 민족들이 살고 있소.
내 말 알아듣겠소?"
"정말로 내 상식 밖의 이야기로군."


그는 고개를 떨군 채,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내가 첫 눈에 딱 맞춘 것 같지만, 당신은 정말로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이곳에 온 여행자인 모양이군.
여기는 타 지역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인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나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소."
"그, 그럼 당신은 도대체...?"


그는 이제 나란 사람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모를 것 빼고 다 알고 있고, 나는 나는 그 모를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다... '그것' 빼고. 그리고 그것을 아무리 이해시키려고 해도, 디에노스나 이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아까 나를 신이라고 불렀죠? 그럼 그거라고 해 둡시다."


내가 굳이 신이라고 불림받고 싶었던 이유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말도 안돼, 당신이 신이라면 나를 이렇게 버려둘 리가 없잖아."
"버려 두다니, 나는 지금 이곳에 있잖소."


그러자 그는, 마치 연극에서 무대를 향해 자기 독백을 외치듯 창가에 나와 하늘을 향해 계속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신이 이곳에서 '그것'을 없애기라도 하겠단 건가? 아니면, 나를 지금 당장이라도 머나먼 곳으로 데리고 가서, 좀 편히 지내게 할 생각인가? 그것도 아니면, 나에게 '그것'을 알려주기라도 할 건가?"
"난 그저 '그것'을 알고 싶을 뿐이오."
"모른다고 했잖아!!"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여기 온거요."
"??"
"우리 이렇게 한번 해 보는게 어떻겠소? 당신이 예전에 영재 소리를 듣고 지낸 사람이라는 거는 나도 익히 아는 사실이오, 우리 서로 '그것'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소? 당신 머리라면, 조금만 조사를 한다면 알아낼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그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미쳤나? 그랬으면 내가 진작에 '그것'을 알아냈겠지... 이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그것'을 경외하는지, 입밖으로조차 꺼내지 않는다는 걸 알기나 하시오, 잘난 신 나으리?!"
"꼭 그것이 거북스럽다면,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겠소? 아니면, 자기가 위장을 하는 것도 괜찮고."


그러나 되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냉소였다. 익히 예상한 결과였다. 어차피 그런 생각을 조금 바꿔보고 싶어서 말해봤을 뿐이다.


"그래, 그 이야기 참 잘 나왔군. 아까 이야기했듯이 부모 따위는 다 감시자에 불과해... 형제들도 마찬가지고. 도대체가,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가 부끄러울 따름이지. 친구? 그놈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 지 알기나 해? 지금은 이 나라에 빌어먹을 엘리트 따위를 해 가면서, '그것' 따위로 폼을 재고 있지. 스승? 그것은 매일매일 '그것'을 가르치느라 피곤해서 나에게 알려줄 생각조차 하지 않아! 이제 알겠나?"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나는 찾고야 말 거니까. 언젠가 '그것'을 알게 되면 나를 부르시오."
"다... 당신을 어떻게?"


나는 창가 쪽으로 나가려다, 나의 말에 흔들려버린 그의 떨리는 음성에 고개만 살짝 돌린 채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그거야, 신이여! 하고 부르면 되는 거 아니겠소."



4.
그러나 그가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이 길고 긴 싸움에 지쳐, 두뇌를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그는 그대로 반쯤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찾아간 것은 단지 그에게서 무언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어느정도 성과가 있었다. 어쨌든, 그가 왜 '그것' 없는 놈이라고 불렸었는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끄트머리에 이층에서 우마차를 향해 뛰어내리는 연출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혔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어째서 나도 모르는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것'으로 이들은 한 사람을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는가. '그것'이 무엇이길래 그들은 그렇게 잘못된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는가? 왜 하필이면 나란 사람도, 이 세계를 창조한 나마저도 '그것'을 모르게 되었는가? 적어도 이곳을 만든 나에게는, 이 곳은 분명 내 지식 안에서 만들어졌을 텐데, 그것을 초월하는 건 없을 텐데?
나는 잠시 미친 척을 하였다.


"이보시오, 말씀 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뭣이오?! 갈 길이 바쁘니 짧게 물어보시오."


내가 상대로 정한 사람은 고위 관직자,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엘리트였다. 그는 갈 길이 바쁘다라고는 이야기해도, 가르쳐주는것이 그들의 직업이기도 하니까, 그냥 아는 게 없어서 짧게 끝내려고만 할 지도 모르겠다. 가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모르겠단 말이오. 혹시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그러자 그는 의외로 피식 웃어넘겼다-나는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면 저 사람이 아주 호들갑을 떨면서 "으악, '그것' 모르는 놈이 날 죽이려 하네" 따위의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예끼, 이사람. 농담도 그런 농담은 하지 마시오. 이 세상에 '그것' 모르는 놈이 어디... 딱 한사람 있군."


나는 기어이 그를 생각해 냈다. 그래,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아까 창가에 선 디에노스를 욕하던 그 엘리트였다. 그 이상으로 무언가 생각이 날듯 나지 않을 듯 했지만, 어쨌든 의외의 반응의 이유를 알아봐야 했기에 나는 다시 디에노스를 이용해 먹었다. 그런것 보다도, 더 알고 싶었다. 어째서 '딱 한사람' 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순순히 나는 '그것' 모르오 라고 했는데도 피식 웃어넘긴 것은 왜인지.


"아니, 그럼, 아까 나으리께서 욕하시던 그, '그것' 없는 놈은 무엇입니까?"
"아, 그놈? 내가 그 딴 놈을 알리가 있나."


아 그놈 에서부터 이미 '나으리'는 디에노스를 안다는 것이 들통났으면서도, 일부러 발뺌을 하였다.


"그럼 모르는 사람을 왜 욕하십니까요?"
"답답한 사람이로세. 이거 안 읽어봤나? 이거나 읽어보고, 나는 바쁘니 썩 물러가게. 어흠."


그리고선 그는, 나라의 국왕이 친히 적었다는 국서의, 양피지에 복사한 사본을 나에게 거의 던지다시피 해서 건네주었고, 이윽고 나는 비로소 이 나라에 존재하는 엄청난 '그것'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5.
약속은 약속이니, 내가 그에게 '그것'에 대하여 일러주려고 그를 찾았을 때, 디에노스는 아직 집에 있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객기 안 부리고 문으로 들어가려 하다가 문득 들리는 독 깨지는 소리에 나는 문고리를 잡으려다 그만 뒤로 나자빠질 뻔 하였다.


"이녀석이, 또 누구 망신을 주려고 나와서 이래?!"
"엄마는 자식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방 안에서는, 어머니와 자식간의 말싸움이 계속되는 모양이었다. 항상 그런 식이다. 어머니는 투덜거리며 뭐라뭐라 그러고. 나는 그걸 또 말대꾸로 받아치고. 어머니는 울화통이 터지고.


"네가 처신 잘 하고 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니?"
"내가 뭘 못하고 있는데?"
"니가 '그것' 하나 모르는 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갖은 고생을 하면서 너를 그 나이까지 살려뒀는지 알기나 해?!"
"그렇게 편해지고 싶었으면, 엄마가 몰래 '그것'을 알려주면 될 거 아냐?"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제 더 이상 응석 따위를 받아주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인지도.


"너는 이제 이 나라 지식인으로서의 긍지고 뭐고 다 잊어버렸구나, 그래, 오, 그래.
기껏 '그것' 알아낼 수 있다고 키워놓고 지 맘대로 내버려뒀더니,
니 머리가 그것밖에 안돼? 그것밖에 안되냐고!!"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제는 거의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자식이 이토록 망가져가는 것을 10년동안 자기 나름대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한 어머니였다. 그런 그가, 이제는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모습을 보니, 더 이상 그녀 나름대로라도 참을 수 없었으리라,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디에노스의 어머니도 꽤나 늦게 '그것'을 뗀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 또한 잠깐동안 '그것'을 몰라서 고통스러워 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평범하게, 아들 몇 딸 몇 낳고, 잘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 덕분에.
아마 그렇지 않을까? 부모는 자신을 닮아가는, 특히 자신의 못난 점만 그렇게 쏙 닮아가는 아들딸의 모양을 절대로 못본다.


"도대체 엄마가 말하는 그 지식인이라는 게 무엇이길래."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에야 디에노스는 그것을 깨뜨릴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래, '그것' 하나만 알면 지식인인 거야? 도대체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데, 왜, 저 세계 밖에는 '그것' 없이도 충분히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며? 도대체 '그것'이 뭐길래, 이 나라 사람들은 '그것' 에 아주 얽매여 살다시피, 미치다시피 사냐고?!"
"너... 너......"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미 겁에 질려 있었다, 마치 금단의 영역을 방문하기도 한 것 처럼... 아, 정말 금단의 영역이구나.


"'그것' 없는 아이들도 저렇게 바깥에서 잘만 뛰놀고 있잖아, '그것' 없는 우리 집 개는 어떻고?
하물며, '그것' 없는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 왜 굳이 '그것'을 얻어야 하는 거냐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내 귀에는 이제 단지 문간에서 지켜보다가 간이 콩알만해 진 내 빠르고 둔탁한 심장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왜,... 엄마도 '그것'을 아는 잘난 지식인이면, 한번 대답해 달라구. 고작 그런것도 대답 못해, 지식인이라는 것이?!"


기어이 극에 달했다.


"...그래, 어디 그 문제에 대해서 대답해 줄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진 인간이 있나 나가서 찾아 보지 그래?
나가, 나가라구! 니는 이제 더이상 내 아들도 아냐, 아주 생 외계인 같은 놈 아냐,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어머니의 한마디 외침 속에는, 자식에게 도전당하기 시작한 어머니의 권위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연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모자는 싸움의 극에 달했고, 나는 그 '나가!' 소리에 놀라 문간에서 귀를 떼어야 했고, 이윽고 디에노스가 뛰쳐나갔을 때 나는 문간에 부딪혀 코를 찧고 기절해 있어야만 했다, 내 정신세계속임에도 불구하고......



6.
학교의 종소리가 귓가에 은은하게 퍼졌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일어나면서, 아직도 내가 이 세계에 있음을 불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지 헷갈려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째서 이러한 빌어먹을 세계를 나란 사람이 만들어 냈는지 또한 후회되기 시작하였다. 나란 사람의 헛된 망상이 어쩌다 디에노스같은 좋은 청년을 망가뜨려놓고 말았을까. 하는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그에게 나를 신이라 부르라 라고 한 이상, 그를 구제하는 것이 나로서의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빨리 '그것'을 알려야 했다. 나는 이 세계를 내 마음밭에 이루어 놓은 이상, 그 세계에서는 행복한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그러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시 학교의 종소리가 들렸다. 아마 디에노스는 학교에 있을 것이다.
학교에는, 그의 스승이 있었지...
그리고 그것은 그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 아니, 마지막 질타가 될 것이다.


"무슨 일인가."


내가 빌록쉬스의 교실에 들어갔을 때는 수업이 끝난 뒤에 어렵게 디에노스가 말을 건 이후였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다 가르쳤네, '그것' 빼고."
"저는, 바로 '그것'을 알러 온 겁니다."


빌록쉬스의 싸늘한 목소리와 디에노스의 낮게 깔리었지만 아직 울분이 섞인 목소리가 뒤섞여, 아이들이 떠난 교실에 흐드러졌다.


"아직도, 아직도 '그것'을 알지 못한 겐가."
"송구합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라면 분명 다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록쉬스는 계속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의 호리호리한 체격과 날카로운 코, 그리고 비쩍 말라 광대뼈가 다 드러나는 얼굴이 그 싸늘한 목소리에 차가움을 더해주었다.


"가르쳐 줄 수 없네."
"어째서...?"
"이미 자네는 성년일세. 관념이 굳어져버린 걸 어떻게 할 순 없지 않겠나. 게다가..."


의자에 앉아 있던 빌록쉬스가 문득 그의 구부정한 등을 보기만 해도 포근해 보이는 등받이에 착 기대어, 천장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자네는 지금, 자기 성찰과 노력도 없이, 나에게 거저 '그것'을 얻으려 하는 것 뿐이잖나."


이에 디에노스는 할 말을 잃어버린 듯, 마룻바닥만 자꾸 쳐다보고 있었다.


"절대 알려줄 수 없네. 왜냐하면 '그것'은..."


입이 방정이다. 빌록쉬스는 무언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다는 듯 입을 가로막았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기회를 놓칠 디에노스가 아니었지만, 막은 입을 조심스럽게 풀어버린 노스승이 한다는 소리는 고작 이것뿐이었다.


"'그것'은... 모든 지식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알려 줘버리면 그것은 지식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지식이라면, 공유하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든 사람이 편리함을 볼 수 있게."


디에노스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따져나가기 시작했다.


"큰일 날 소릴! 그렇게 되면 그 지식을 얻으려고 자기 혼자서 성찰하고 노력한 사람의 노력은, 다 어디로 가버리는 건가?"
"그 노력해서 얻은 지식을 누군가, 선생님 같으신 분이 남들에게 나눠주었기에 이 사회가 발전한 것 아닙니까?"


빌록쉬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짚어가며 디에노스의 말에 대꾸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디에노스의 말이 구구절절 옳은 탓도 있었다만, 몇십년동안 자신이 믿어 온 진리를 버리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지식을 만들어 내기 위한 원료를 위해서라도, 그럴 순 없다고 생각하네."
"그 원료는 지식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까?"
"... 그렇겠지."
"그 지식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다시 한숨을 쉬고 아까보다도 더욱더 긴 생각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오로지 냄새나는 하나의 말만이 나올 뿐이었다.


"'그것'이네."
"'그것'은 무엇입니까?"
"알려 줄 수 없네."


말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렇게 계속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로는 계속 그런 대답만 하실 작정이시군요."
"포기하게. 나 뿐만 아니라 누구도 알려주려고 하지 않을 걸세."


그러나 이정도에 포기하려 했다면 내가 그를 바깥으로 내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승님, 이 나라 바깥의 세계를 알고 계십니까?"


디에노스는 다시 이어진 긴 적막을 깨고 화제를 바꾸어 나의 말을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그가 잘 기억해 낸다면 좋으련만.


"...야만인의 땅 말인가."
"누가 그 곳을 야만인의 땅이라고 불렀습니까."
"우리들일세."
"그것이 틀렸다고는 생각지 않으셨습니까?"


빌록쉬스는 자신의 얇고 가느다란 수염을 두어 번 쓰다듬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네."


이윽고 디에노스는 나에게서 들은 말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해 나갔다-라는 걸 보면 그는 정녕 천재 혹은 바보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열변을 토하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조소가 섞인 노인네의 웃음소리였다.


"누가 그것을 자네에게 일러 주었는가."
"... 신입니다."


그는 그렇게 부르기에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기억이 나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나 따위의 인물을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그래, 그러면, 그 신은, '그것'을 안다고 했는가, 모른다고 했는가?"
"...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곧 튀어나올 한마디에 발끈해 당장 교실로 뛰어들어가, 이 빌어먹을 노인네의 멱살을 잡고 불벼락을 내려치며, 이게 어디서, 감히 나에게. 라는 말을 하려 했으나, 그저 꾹 눌러두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만 같았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런 말을 했는 지는 모르지만, 그 말을 믿는단 말인가?"


허나 디에노스는 내 앞에서와는 달리, 무언가로 맞받아쳤다.


"스승님께서는, 그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나."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그 지식이 틀렸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노교수는 움찔한 듯 하였으나, 이윽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럴 리는 없네. 나의 지식은..."
"그것이 정말 스승님의 지식입니까?"
"?!"
"제가 가르침을 받았듯, 스승님도 어디선가 가르침을 받았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알아낸 것입니까, 혹은 억지로 주입받은 것입니까?
하물며, '그것'은 뭐가 다릅니까?"


빌록쉬스는 할 말을 잃은 채 타오르는 디에노스의 동공만을 억지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가고, 나의 두뇌는 그 흥미를 흠뻑 느끼며, 아까의 걱정 따위는 이제 잊어버려도 될 만큼 되어가고 있었다.

그 즈음, 누군가가 들어왔다.
아마도 잽싸게 몸을 피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또다른 누군가가 교실을 향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를 본 순간, 그래, 아까 전에도 만났고, 맨 처음에도 만났던 사람이라는 것이 내 두뇌의 한 기억 속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 쯤 되면,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아, 아까 그 사람. 이라는 탄성을 내지를 것이다.
그러나 나의 내면을 지켜보고 있는 나조차도 놀랄 만한 이름이 빌록쉬스의 입에서 튀어나와버리고 말았다.


"아, 노키메부스 군, 아니, 엘리트 나리. 여긴 어쩐 일로...?


한눈에, 디에노스의 얼굴에서, '노키메부스라고, 저것이?!' 라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네놈, 여긴 또 왜 온거냐."
"오든 안 오든, 그건 내 자유다."
"'그것' 없는 사람에겐, 자유 따윈 주어져 있지 않아."
"... 뭐라고?!"


이런 망할 노키메부스. 내 앞에선 그렇게 능청을 떨면서 '누군지 모르오~' 라고 이야기하더니, 나를 속였겠다. 오냐, 이 세계를 지워버리는 날이 있다면 네 머리부터 먼저 넣어주마.


"고작 '그것'을 얻으려 한다는 자세가, 그 뿐인가?"
"그러는 네놈은, 얼마나 잘났다고 나한테 그'딴'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냐."


노키메부스의 그 툭 튀어나오고 속에서는 더러운 것이 가득 차 냄새가 심한 입에서는 아주 재수없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적어도, '그것' 하나부터가 너보단 잘났지."
"... 뭐라고?!"
"그래,"


빌록쉬스가 거들었다.


"그는 더이상 자네보다 못난 놈도, 성적이 나빠서 나에게 매일 혼만 나던 사람도 아니네. 오히려 그는 정부의 고위 관료인, 자랑스러운 엘리트가 되었다네. 자네가 늘 나의 목표는 이거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때는 철없는 때의 말일 뿐이었다, 애들한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십중팔구 대통령이라고 했었던 그 옛날처럼.
빌록쉬스는 그의 귀에 일부러 들으라고 혼잣말로,


"대기만성이란 바로 이런, 노키메부스에게 어울리는 말이겠지......"


라는 말까지 덧붙여 버렸다.
노키메부스를 맞아 일어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꽉 닫은 입술은 엄청난 분노를 참고 견디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따라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가 자기 주장을 위해 쥐었던 주먹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 한대 칠 듯한 기세. 그것으로 지금의 디에노스에 대한 표현이 맞아떨어졌다. 자, 이쯤 되어서 나는 드디어 그에게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를 잡았다라고 생각하고, 더이상 숨어서 지켜보기만 하는 짓거리를 그만 두었다.


"그만 하시오!"


나는 저 벽에 숨겨왔던 몸을 드러내고, 그들이 있는 교탁 앞쪽으로 걸어나왔다.


"... 댁은 누구시오?"


나의 등장에 놀란 것은 아마 빌록쉬스 뿐일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구면이던가?


"디에노스를 데리러 왔소."
"아, 형사님이신가 보구만. 빨리 데려가시오. 이거 원, 야간 수업 준비를 할 수가 없잖소."


뭐, 사실은 아니지만, 어차피 저들이 있는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기는 싫었을 뿐더러, 아무리 내 존재에 대해 설명해 봤자 저들은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네, 그렇게 하지요."


라고 하며, 어이없는 얼굴과 풀려버린 동공, 축 늘어진 몸을 한 디에노스의 손을 붙들고, 거의 끌다시피 해서 그 교실에서 끌어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처음에 그는 내가 디에노스의 아군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허나 일이 이렇게 되니, 그 또한 착잡했을 것이다. 그는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빌록쉬스가,


"가 버리게.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겠네.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 썩 물러가게!"


라는 결정타를 먹여버림으로서, 조금 더 쉽게 그를, 옥상까지 끌고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교실에는, 노기를 띠며 책을 다시 들여다보는 빌록쉬스와, 흠, 우리 치안대에 저런 형사가 있던가. 하며 궁금해하다, 알게 뭐야. 라며 스승에 대한 간단한 인사만을 나누고 떠난 노키메부스만이 남았을 분이다.



7.
"이런 옥상에는 왜 데리고 온 거요?"
"그들 앞에서는 왠지 이런 말을 하기 께름칙 했기 때문이오."


학교의 옥상, 더 높은 곳에는 가까이 가면 굉음으로 들릴,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는 은은한 종소리로 들릴 동종을 걸어둔 탑이 있을 뿐, 시원한 바람이 내내 불기로, 나는 이런 곳을 현실에서도 매우 좋아하였다.


"그래, '그것'은 알아내셨소?"


부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다만 내가 안 것은, 당신은 미치광이요, 당신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는 것 뿐.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 뿐입니까?
당신이란 자가, 나에게 와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바람에, 나는 학교 선생도 부모도 의지하지 못하게 되었소!
이제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나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나로서는 필사적으로 그를 구제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일은 거기까지 이르렀다. 그때야 사실, 나도 '그것'이 왜 만들어졌는지조차 모르니까, 그 쪽 방면으로의 연민 같은 것은 전혀 생기지 않았지만, 이제서야, '그것'이 생겨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알아내었소."


이 말에 또 그는 어느 사이에 바보같은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의 앞에는, 그래, '그것'만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아주 가느다란 실타래 같은 희망, 그것이 보였던 모양이다, 부질없게도.
나는 그것이 더욱 안타까워, 무심한 나의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것' 이 무엇입니까?"
"... 알려줄 수 없소."


그러자 그의 눈에는 아까 보았던 증오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당신도, 당신도 또..."


그는 옥상의 난간에 올라가려 했다. 안돼, 그만은 살려야 한다.


"아니, 내 이야기를 들어보게..."
"듣기 싫소! 당신도 이제, 나에게 '그것'을 알았다고 재고 다닐 거요?
'그것'따위 판치는 세상, 이젠 살기 싫소!"


그는 난간 위에서 흥분해서 계속 빠른 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는 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그래, 당신이 신이오? 당신이 이 세계를 만들었소?
이 더러운 세계를? 이 '그것' 따위의 괴뢰들만 판치는 이 세계를?! 만약 정말 그렇다면..."


나는 이어질 그의 말에, 노키메부스와 빌록쉬스의 말에서 느꼈던 울컥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당신 따위는 차라리 이 세계와 함께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좋을 거요."


나는 참을성이 그리 좋은 사람이 못된다. 한번 폭발하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렇게, 나는 내 세계의 사람에게 세번씩이나 빈정거림을 당했다는, 그런 일에 울화가 치밀어 노키메부스로부터 받은 국서를 그에게 집어던졌다.


"이걸 똑똑히 봐 두라고, 이 멍청한 자식아.
네가 그것을 알 수 있을 지 없을 지, 이 양피지 조각 따위가 알려 줄 테니까!"


이제 나는 이 대목에서 그 국서와, 모든 일의 내막을 디에노스와 이 글을 보는 모든 독자들에게 다 폭로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 서

제 32-8안에 대한
가트 3세 국왕 폐하께서 친히 우민들에게
쓰시는 국서이옴.


친애하는 나라의 우민 여러분.
여러가지 잔 소리를 자르고 말하겠습니다. 현 정부는 근 왕국력 308
년에 태어난 자들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던 중, 12-7구역 학교의 교사
빌록쉬스의 신고에 따라 교육법 제 63조 2항에 의거,

·일탈 행위가 심하여 더이상의 학습을 기대할 수 없는 자
·피신고자의 능력으로 사회의 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되어진 자
·'그것'에 대한 인지 능력이 부족한 자

를 발견하였기에, 제 32-8안을 상정시키고 조치에 들어갑니다.
이에 적극 협조를 부탁드리며, 비협조시 정신개조 이상의 강력한 처벌
을 받을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상.


-제 32-8안의 내용-

상기 32-8안은 특정 1인 혹은 다수에 발동되며,
32-8안 발동의 이유는 다른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니
그것을 먼저 참고하시기 바라옴.

·위 사람이 이 문서를 절대 알지 못하도록 할 것.
·위 사람을 회피할 것.
·위 사람과의 접선 및 접촉 행위는 더러우므로 피할 것.
  피하기 힘든 경우에는 욕설로 대응할 것.
·위 사람을 알려고 하지 말며, 위 사람 이외의 사람이 물어볼 경우
  상기의 문서를 전달할 것.
·위 사람에게 행하여지는 불법 행위 중 일정 수위 이상은 당분간 합법
  으로 인정함.



이외 그와 만났을 때에 행해야 할 지침과 그의 신상명세가 국서에 쓰여 있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국가가 나서서 한 개인을 파멸시키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마음대로 한 사람을 따돌린 것이다. 그들 마음대로 그를 판단하고, 그가 사회의 위험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안 나머지, 그들은  결국 이런 방법으로 그를 거의 죽여버리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되는 것이라면, 그냥 불러서 뎅겅 베어버리면 될 것을, 32-8안이나 교육법 제 63조 2항 따위의 복잡한 법칙들을 이용해서, 그것도 아주 시일이 오래 걸리는-디에노스의 경우에는 23년 쯤이다-방법으로 파멸시키기로 한 것일까?
해답은 노키메부스에게서 찾았다. 그래, 정부와 그 집단에 속한 관료들을 통틀어서 이 나라 사람들은 '엘리트'라 불렀다. 원래는 정부에 속한 고위 직책이 '엘리트'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높으신 분들이라고 하면 '아, 엘리트시군' 이라면서 칭송해댔다. 전에, '그것' 없는 사람의 탄생이 모든 사람에게 충격이었겠다 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받은 충격이란 단지 죽을 사람이 생겼다는 것과, 어째서 이런 사람이 생겨나는 것일까에 대한 놀라움일 뿐이었다.
그를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엘리트'들이었다. 사실 빌록쉬스는 디에노스라는 한 천재 아이를 찾았을 뿐이다. '그것'을 모른다고 인지되는 것은 늦더라도, 천재라는 것은 일찍 찾게 된 것이다. 허나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 아니라 불행이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까지 그들의 지식이란 다 배운 것에 지나지 않아서, 개인 능력차가 별로 없는 이곳에서는 거의 비슷비슷했다. 그러나 이건 상황이 틀리다. 자기의 위치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그를 죽이기 위해 32-8안이란 걸 굳이 만들어서 집행한다. 물론, 그들도 처음엔 이 32-8안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냥 끌고 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면, 어지간한 지식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허나 18세쯤, '그것'을 모른다고 판단되어지는 나이이면 이미 자기 주장이 가능해진다. 그 이후가 되면, '그것'을 모르는 것이 위험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 이후에 죽이기에는 조금은 버거워지는 면도 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마음을, 천천히, 야금야금 죽여가는 것이다.

우선, 국서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했으므로 엘리트들이 먼저 솔선수범하기로 한다. '엘리트 다운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로, 같은 학급의 친구였다는 노키메부스가 자청한다. 그 지역의 사람이기도 하고(나라가 꽤 넓으니까)사실 어릴 적, 잘난 디에노스에게서 당했던 모욕의 복수 차원에서의 자청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노키메부스는 면전에서 그를 욕보이고, 내 앞에서 국서를 한장 던져 주고, 그를 무자비하게 몰아붙인 것이다.
빌록쉬스, 그 영감도 한패였다. 엘리트 다음으로 이 지식인의 나라에서 존경받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지식을 전달해 주는 보고, 선생들이었다. 그렇기에 국가는 선생을 많이 이용해 왔다. 언젠가 디에노스가 빌록쉬스를 만났다는 이유로, 빌록쉬스는 '정신개조'라는 명목의 고문을 당한 적이 있었다.
아마 디에노스는 자기 스승이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겠지만, 빌록쉬스는 단지 고육지계를 쓴 것 뿐이다. 물론 뒷주머니로 들어오는 매우 두둑한 상금과 함께. 어쨌든 제일 가까웠으니까, 접선이 제일 쉬운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도 이렇게 당했다 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은 일단 민심을 공포로 휘어잡아 놓은 것이다.



"그 목적은, 자네의 자살일세."


그는 천재이다. 아마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는 천재일 것이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두뇌도, 까짓 엘리트들이 뒤에서 이런 일까지 벌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예측만 하고 있었지, 실제로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천재의 맹점이기도 하다. 또한, 이미 조금 자랐을 때부터 그렇게 당하고 나니, 정말로 세뇌가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는 바보야' 라고.
그는 체념한듯 혹은 오기를 부리려는 듯, 비식비식 웃으며 말을 뱉어놓았다.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그 또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나 보다.
일단 그의 말에 대답을 하자면, '아니다'. 설마, 고작 '그것' 하나 모른다는 것 정도로 처벌받는다면, 이 나라의 숱한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다.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마음에 기꺼이 할 리가 없다.
아니, 지식인이라고? 그들은 지식인이 아니다. 단지 국왕이 그들을 부르는 대로, 어리석은 백성, 즉 '우민'일 뿐이다. 그들이 지식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공공연히 벌어졌음에도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싶다.
정신 나간 것은 엘리트들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이 엘리트라는 것도, 결국 운좋으면 양반, 운나쁘면 상놈이라던 그 옛날의 조선시대 신분계급 같은 한 계급에 불과하다.
처음엔 나라를 효율적으로 운영해 보겠다고 해서, 수재들을 모아 정치를 시킨 것이 엘리트들이다. 허나 이 수재들이 돈 맛을 보고, 그들의 마음에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이다. 그들은 되도록이면 이 재물과 권력이 영원해지길 바라는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아들을 일부러 수재로 바꾸어 엘리트로 만든다. 허나, 밑으로 내려갈 수록 똑똑한 사람은 보기 드물어지고, 단지 돈이 많은 사람들이 엘리트가 된다. 그러나, 능력은 떨어져 가도 그간에 진짜 '엘리트'들이 한 일이 있으므로 그 기능을 의심삼는 이는 없었다. 적어도 이름은 '엘리트'니까, 허울 좋은 엘리트.
그가 태어났을 당시의 가트 3세 체제에서는 그, 엘리트들, 특히 고위 엘리트들의 밥그릇 싸움이 극에 달해 있을 시절이었다. 왕을 바꾸느냐, 바꾸지 않느냐의 문제로, 엘리트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서로 실갱이와 몸싸움을 일삼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가운데에서 천재는 태어난 것이다. 그것은 엘리트와 친한 선생의 입을 통해 그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싸움을 멈추고 잠시 생각한다. 영웅이라는 것은 지금 당장은 천재 쯤으로 치부될지는 몰라도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우리들을 위협할 것이다. 허나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다. 아마 여기에서의 선생들도 그런 부류중 하나였을 것이다. 엘리트가 살아야 자신들도 조금씩이나마 살 수 있을 테니까.
디에노스는 그의 말대로 엘리트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개혁을 해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과 같이 똑똑했던 몇몇 사람들을 엘리트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다가 그는 쫓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 없다. 그는 또 다시 천재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엘리트인 이상 '그것'을 들어 탄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트 3세를 보필하며 나라를 위해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래... 내가 되고 싶던 것도 그런 일이었지."


그것이 이득이 되냐고? 천만에! 라는 대답이 지금의 엘리트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들의 권력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이 몇대 째 엘리트 직위를 전해 오면서 생긴 재물은? 직위는?
그것은 선생들에게도 똑같이 이어진다. 그동안 엘리트의 뒤에서 우민들에게 지식을 전해주면서, 백성들에게는 환호를 받고 엘리트들에게는 뇌물을 바치고 더 좋은 직장으로 옮겨오거나 하는 등등의 혜택을 받아온 사람이 선생이다. 그러나 만약 위와 같은 상황이 들이닥친다면? 부패한 사람은 다 쫓겨날 텐데? 찔리는 게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막으려 들 것이다. 그리고, 빌록쉬스가 그러한 겁쟁이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천재였다. 내가 이제야 국서 한장을 보고 이해하게 된 일을, 그는 예측이라도 하고 있었다. 그의 속에는, 나의 것과는 전혀 딴판인, 그야말로 이상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이제 그것을 마음 속에 묻어두어야 한다니......


"그렇군. 결국 내가 '그것'을 안다고 해도, 별반 소용이 없으려나..."


그렇다. '그것' 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디에노스란 천재가 이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났으나, 사회는 그를 말살시키기로 하고 바보로 만들어간다는 것 뿐이었다.


"그럼, 내가 이 세상에 한 일은 다 한 셈..."
"무슨 짓이지?!"
"난, 이제 돌아가겠소. 어둠으로."
"?!"


그리고 그는 몸을 기울이려 했다.


"잠깐, 기다리시오!"


그 말에 그는 기울이는 몸을 간신히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들의 원을 들어줄 셈이오?"


그는 이제 자살을 택하려 한다.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그였다. 아니, 정확히는 누구도 그가 기대어 쉴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마련해 주지 못하였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나란 사람도, 이제 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과 저 자를 끝가지 도와야 한다는 마음이 부딪혔다. 구제를 위해 이 곳에 왔지만, 결국 나는 그를 비참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죄책감마저... 내 마음 공간에 가득 차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자살만은 절대로 옳지 못하다!! 그가 죽어서 기뻐할 저 엘리트들의 면상을 보고서라도. 그리고, 그가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애도할 사람 따위는 그의 부모 외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현실을 보고서라도. 사회는 이미 그를 그러한 존재로, 사람의 마음을 마비시키는 사회의 현실을 보고서라도. 내 마음 속의 비참한 현실, 누구도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 현실을 보고서라도.
그는 그것을 개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천재가 죽었으나 단 한 사람이 살아있다면.


"이것이, 내가 '그것'에 보내는, 내 마지막 의지의 저항이 될 겁니다."
"그 의지로, 살아갈 순 없겠나?"
"...!"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그러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자살충동을 느끼게 마련이다. 특히, 나에게도, 의지의 억압으로 인해 절망 속에 기거하였을 때에, 자살을 택하려고 했던 적이 있지 않던가.
그러나 그때마저도 나를 붙잡은 한 마디가, 그 의지로 살아라, 라는 것이었다. 현실은 그렇게 매정했다. 내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의 죽음은 1분에서 3분 가량의, 지나가는 짧은 뉴스로 나올 뿐이다. 나를 대수롭게 보지 않았던 이들은 계속해서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다시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나는 그러한 결과를 위해,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 독한 마음으로 나는 세상에 부딪혀 살아갔고, 그래서 내 손금의 명줄도 난잡하지만 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디에노스에게 나같은 일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이 바깥에도 사람이 살 만한 공간이 있다고."


끊어져 가는 필라멘트에 대고 불어보는 마지막 외침이었다.


"...싫습니다."


나는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라 안에서도 이 모양인데 바깥에서는 얼마나 더 심하겠냐고. 어쩌면 더 위험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더 무서운 것은, 그 사회마저도 '그것'을 대고 그를 배척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든 도피는 적절한 선택이 아니다. 설령 그가 무인도 같은 곳으로 간다고 해도, 그의 사람 향기 묻어나는 곳에 대한 그리움은, 어떻게 할텐가?
나는 그를 보내기로 했다. 그러기로 한 것에는, 나의 머릿속에 있는 조조 맹덕의 한 마디 구절이 영향을 주었다. 조조 맹덕이 여백사를 죽이고 나서 놀란 진궁에게


'내가 세상을 저버릴 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진 않게 하겠다.'


라는 말을 한 것. 그것이 떠올라, 이제 세상을 저버리려는 그를 놔 주기로 한 것이다. 진짜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었다라는 비정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으나.


"그대가 떨어지기 전에 한 마디만 해 두겠네. '그것'은..."


나는 목이 메어 차마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죽음을 앞에 둔 디에노스도 그리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그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곤 해도, '그것'은 이미 그에게 크나큰 짐이었다. 그 내용물을 아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지 짐일 뿐이다.
결국 그는 자유 낙하하였다.



8.
불이 꺼졌다. 나는 그가 땅바닥에 떨어져 뼈가 으스러지기 전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몽상에서 깨어났다. 꿈... 그것 뿐이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점심을 먹으라고 하는 소리이리라. 벌써 시계바늘은 정오를 넘어 1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만큼은 아직도 그 세계를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세계 따위를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묻어두기로 하였다. 우선 노키메부스부터 거꾸로 묻어두고, 언제나 그랬듯이 기억을 잠깐동안 지우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 세계를 마음속에 묻어버렸다. 그 뒤에 일어날 꼴들을 나는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나의 머리는 창 밖의, 아직 싱그러운 하늘 빛을 띈 푸른 하늘의 상을 받으며 계속 굴러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이 나의 상상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디에노스는 당장에 모두를 때려눕히고 진정한 영웅으로서 나라를 살려야 할 것이 아니었는가. 또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에서야 끝을 맺은 것이다. 중간의 점심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자. 밥맛이 없었을 뿐더러 반찬도 변변찮은 데다가, 어머니께서 여러 소리를 늘어놓으신 탓이다. 나는 쓴 글을 이리저리 들여다보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이거 순전히 내 이야기만 써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물론 나라를 상대로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만도 볼 일 못 볼 일 다 보며 힘겹게 살았다. 왜 그랬는지는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지만, 이번 부분에 대해서도 나도 '그것'이 없는 자로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홀로였다. 다만 홀로이고 싶어 홀로였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그것'을 모를 뿐이었고, 포용력 없는 자들, 특히 강자들은 나를 소외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사람과의 대화를 위해, '그것'을 알려달라고도 햇었고, 내 스스로 '그것'을 알아내려는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천성이 이런데 어쩌려나.
창가에 기대어 생각을 계속해 본다. 내가 쓴 시가 생각났다.


세상 모진 비바람을 다 견뎌내고,
황혼에 세상 빛 으스러지는 그 날,
낙엽은 슬픈 곡선을 그리다.

바람에 떨어진 낙엽아 울지 마라,
이 시리도록 추운 가을이 가고
몸조차 펼 수 없는 겨울이 오더라도,

그 다음에는 다시 새 순이 돋으며
힘찬 잎을 뻗어냄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아느니.


그러나 올해는 눈이 해도 너무 많이 왔다. 살다 살다 이렇게 눈이 많이 쌓인 걸 보는 것은 처음일 정도로. 눈이 오던 날, 나는 하루 종일 몸을 움츠리며 침대 속에서 누워있어야 했다. 그 눈때문에 얼어 죽어버린 나무도, 잔디도, 죽음을 면했다 하더라도 두꺼운 눈의 무게때문에 가지가 부러져버린 나무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눈 쌓인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노라면, 누군가 저 밖에서 따스한 목소리로 '어이, 이봐.' 라며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 그렇게 해 주면, 그 누군가가 나에게 '그것'에 대한 것을 알려 주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누군가는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디에노스나,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