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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엔트로피의 우주

2005.05.29 07:51

kalay 조회 수:117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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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더운 날.
어제까지 온 비에 심통이 난 듯 태양이 모래밭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체육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명의 학생도 운동장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어째서 바람이 불지 않는 거야! 바람이 없으니까 구름이 태양을 가려주지 못하잖아!"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금방 일사병으로 쓰러질 것 같은 햇볕을 피해 그늘에 웅크리고 있던 학생들 중 하나가 짜증스레 외쳤다.
"아니. 그것보다도. 하늘을 봐. 구름이 하나도 없어. 하루 종일 바람이 불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만....저건...."
대답을 하듯, 혼잣말을 하듯 한 소년이 던진 말에 학생들은 숨어 있던 그늘에서 우르르 몰려 나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제길."
처음에 짜증을 냈던 소년이 도저히 힘이 나지 않는다는 듯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림과 동시에 학생들은 각자 한 마디씩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높디 높은 곳에 펴 놓은 파란 비단처럼, 하늘은 한 조각의 구름도 없이 맑디 맑았다.


인간의 힘에 의해 뜨거워져야 할 곳.
화락 발전소에는 지금 비상이 걸렸다.
연료를 태워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발전용 터빈을 돌려야 하는데, 연료에 도무지 불이 붙지를 않는 것이다.
발전소를 관리하는 발전소장은 초조한 듯 빼어 문 담배를 질겅질겅 씹었다.
앞니, 송곳니에 이은 어금니의 공격에 담배의 필터는 걸레가 되었지만 아침부터 무슨 일인지 라이터의 기름에도 불이 붙지 않는 것이다.
지난 밤 숙직을 했던 그는 알지 못했지만, 직원들은 자동차 역시 단 한 대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그거 이상하네. 불의 신이 노하기라도 한 건가?"
아무리 부싯돌을 튕겨도 불이 켜지지 않는 지포라이터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며, 소장은 중얼거렸다.


같은 시간, 방송국의 기자들도 초조한 마음에 담배를 씹거나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라이터에 불이 켜지지 않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취재를 나가려 해도, 차는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카메라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들은 방송국 건물 안에 앉아서 이렇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만 있는 것이다.
기자실의 형광등이 갑작스레 꺼져버리며 기자들이 말을 잃은 지도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에이, 제길."
한 시간여에 이르는 정적을 꺤 것은 마치 전형적인 아랍 테러리스트처럼 얼굴이 검고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남자 기자였다.
다른 기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두 꽂히자 그는 무안한 듯 조그만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래. 발로라도 뛰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아야 할까나..?"
그가 사라진 문 쪽을 빤히 바라보며, 한 여기자가 말했다.


지하에 위치하고 있어 안 그래도 어둡던 연구실은 전기가 나가자 그야말로 암흑천지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연구소 안에 홀로 있는 청년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어둠 따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세계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모두 무시하고 비웃은 그의 이론이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상황 모두 청년이 그의 이론에서 예견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전혀 기뻐하고 있지 않았다.
대항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존에 휩싸여, 청년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던, 또 믿기 싫었던 이론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그의 이론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알려야 한다고 청년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것은 파멸을 앞당기는,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으니까.
청년은 연구실에서 나가는 최단 루트를 따라 조심스레 몸을 옮겼다.
청년이 연구실의 문을 여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거칠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검은 얼굴에 긴 수염, 방송국의 기자 일을 하는 청년의 친구였다.
그는 청년이 자기 이론을 말해 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비록 표면적인 것 뿐이었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 청년은 친구에게 자신의 이론을 더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이봐!"
친구의 외침은 연구소의 강철 문이 벽에 부딪쳐 발생시킨 거대한 음파에 밀려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학교에선, 시끄럽게 떠들고 놀던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선생님들도 기뻐할 순 없었다.
모든 것이 정지해버렸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소장과 직원들은 수동으로라도 발전기를 돌릴 듯한 안타까운 표정으로 멈춰 있었다.
그리고 이 정지는 영원히 계속되었다.

기자들은 더 이상 마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남자 기자가 나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본 채로, 여자 기자의 몸은 아주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것,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였다.

연구소는 정적에 휩싸였다.
철문은 벽에 붙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청년의 놀란 얼굴과, 친구의 화난 얼굴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영원히.
연구소 책상 한 쪽에 놓인 종이뭉치는 미동도 않은 채 그 표지만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것이야말로 세계 멸망 - 에너지의 고갈 (부제 : 열역학 제 2법칙의 마수)』

지구는 자전할 에너지를 가지지 못했다.
태양도 더이상 불타지 못한다.
우주는 침묵에 휩싸였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것이 한 순간에 찾아왔다는 것이리라.
영원히 정지된 침묵의 우주 속에는
죽음조차도 허락받지 못한 생명체들이 수없이 많이
'멈추어' 있다.
그들에게는 죽음을 맞을 에너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엔트로피의 바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