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판타지 The Magic < S.S >

2008.03.11 09:38

Rei 조회 수:825

extra_vars1 100707-1 
extra_vars2
extra_vars3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No. 6 Half Blood




이제는 낮아진 창틀에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팔로 지탱한 채 밤하늘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한쪽 눈을 가렸다. 뗐다.


“재수 없는 달이야.”


시에나는 자신의 속마음과 반대말을 중얼거렸다. 빨갛게 녹슨 달빛이 가득 매운 하늘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감상은 정해져 있었다. 숨소리가 약간 거칠어지는 미약한 흥분, 누군가(대개는 미카) 한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의 폭력성, 이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약간의 상실감, 그보다 조금 큰 그리움, 그리고 달콤한...


‘피 따위 마시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했지만 몸은 정직했다.


“퇫.”


시에나는 입안에 고인 침을 뱉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이후 몇 번인가 침을 뱉던 시에나는 창틀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드러누웠다.


칙칙한 적갈색의 달빛밖에 비치지 않는 방이지만, 시에나의 눈엔 대낮처럼 환하게 보였다. 10년 가까이 지내온 방은 이제 낡을 대로 낡아서 처음의 향수를 느낄 수 없었다.


“난 그대론데 주변은 자꾸 낡아 가는거 같아, 벽도, 침대도 장롱도 그리고 오빠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기억들이 점점 퇴색되어 갈 때 마다 시에나는 안타까움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무사하니까.


나는 행복하니까.


나는...


“나는, 정말 나쁜 동생이야... 오빠가 살아 있다면 날 잊지 않았을 텐데. 봐봐, 언젠가 부터 난 오빠 얼굴도 기억이 안나.”


시에나는 울적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




며칠인가 지난날의 정오. 할 일이 없어 마을을 산책하던 시에나는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곤 호기심이 동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중앙어귀의 넓은 공터에는 커다란 우리가 널려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할 일도 잊은 채 우리안의 동물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와! 저것 좀 봐, 저렇게 흉폭하게 생긴 멧돼지는 처음 보는데? 멧돼지가 맞긴 한가?”


“나도 마찬가지야. 그나저나 저건 무슨 새지? 처음 보는 동물인데... 히익! 저 혀좀봐 혹시 괴물 아냐?”


“낸들알아? 아무튼 대단한 녀석들인걸?”


시에나는 사람들을 몇 명인가 헤치고 들어가 까치발을 들고 앞을 가로막은 어른의 어깨 너머로 구경을 했다.


십여마리정도 되는 동물과 괴물의 경계에 선 녀석들이 우리에 갇힌 채로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중에 몇몇은 우리를 부수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지만, 무슨 이유인지 나무와 쇠창살로 만든 평범한 우리를 부수지 못한 채 기력만 소진하고 있었다.


한동안 사람들 틈에서 구경을 하던 시에나는 모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가자 그들 틈에 섞여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때를 기다리며 시시한 표정으로 페르바슈와 함께 개암과 호두를 까먹던 시에나는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미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시에나, 마을에 굉장한 구경거리가 들어왔어!”


“아~아~ 그 괴물인지 동물인지 헷갈리는 녀석들?”


“어? 알고 있었어?”


미카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시에나 옆자리에 동석했다. 시에나는 가라는 말 대신 콰득 소리가 날 만큼 세게 호두를 까부수며 미카를 노려보았다.


“와! 그거 나주려고 깐거야? 잘 먹을게!”


“개새끼...”


시에나는 페르바슈가 듣지 못 할 만큼 낮게 중얼거리며 까놓은 호두를 입에 털어 넣었다.


노을이 짙게 깔릴 무렵이 되어 찾아온 저녁시간의 화제는 단연 오늘 마을에 들린 정체모를 동물들과 그 주인이었다.


“아마도 수도로 말을 납품하러 가는 상인의 선물이겠지. 아니면 말 이외의 특별 상품이거나.”


“에엑? 저따위 것들을 선물이랍시고 가져간단 말이에요?”


시에나는 독특한 표정으로 페르바슈의 말을 부인하며 되물었다. 페르바슈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엔 말이다. 꽤나 독특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거든, 특히 수도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선.”


“칫, 나 같으면 저런 이상한 것들 거저 줘도 안 갖겠다.”


미카도 시에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저런 동물인지 괴물인지 모를 입맛 떨어지는 혼혈괴물이 곁에 있으면 생각만 해도... 악!”


미카는 급히 정강이를 감싸 쥐며 자신의 다리를 걷어찬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이 개새끼야! 너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시에나는 눈을 부릅뜬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음 같아선 왼손에 쥔 포크로 미카를 찍어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게 거의 입술만 달싹이며 몇 마리 중얼 거린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사춘기인가? 요즘 들어 애가 좀 이상해진거 같아.”


한동안 정적에 휩싸인 탁자 위에서, 페르바슈는 어이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 소시지를 향해 포크를 놀렸다.




‘어떻게 하지... 사과해야하나?’


저녁을 다 먹은 후 시에나의 방 앞에서 서성이던 미카는 몇 번인가 문고리를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아냐, 따지고 보면 내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한거도 아니고... 충분히 그런 말 정도는 할 수 있는 상황이었잖아? 그래! 내가 잘못한건 없어!’


“...그래도 사과는 해야겠지?”


미카는 우울한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작년쯤인가 성인식을 앞두고 불안해하던 시기와 유사한 느낌이라, 지금 어긋나면 평생 시에나와 말을 못 붙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시에나 안에 있지! 나 들어간다!”


미카는 소리를 치는 동시에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들어오...! 씨발... 그냥 들어와!”


시에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미카를 맞이했다. 미카는 곧장 시에나에게 다가가지 않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같은 집에 살고 있지만, 시에나의 방에 들어 와 본건 손으로 꼽을 수 있을정도였다. 방 안은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라기 보단, 정리할 물건 자체가 별로 없었다. 여벌의 옷을 보관하는 장롱과 작은 책상, 그 위에 몇 권인가 가지런히 쌓인 책들, 제대로 된 의자 하나와 간의 의자 하나. 방구석에 치워진 화로 낡아 빠진 침대와 침대 맡에 비스듬히 세워진 칼. 오싹할 만큼 필요한 물건들로만 채워진 방이었다.


미카는 간의의자를 끌어다가 시에나 곁에 앉았다. 시에나는 멀뚱히 미카를 올려다보며 말을 재촉했다.


“어... 저기... 그러니까, 아까일 말이야...”


“괜찮아, 잊어 버렸으니까.”


“으응? 어? 어...”


“할 말은 그걸로 끝?”


“아? 응... 일단은 그렇긴 한데...”


“볼일 끝났으면 나가.”


단호한 시에나의 말에 미카는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저,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


“이 개...!”


시에나는 중간에 말을 끊고 눈을 부릅뜬 채 미카를 노려보았다. 한동안 시에나의 눈빛을 버티던 미카는 곧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카가 끝까지 저항을 하자 노려보기를 관둔 시에나는 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씨발놈, 쓸데없는 근성만 좋아가지고.”


‘주... 죽는줄 알았어’


미카는 소매로 식은땀을 닦으며 무늬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는 시에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 이후 계속된 침묵동안 주저하던 미카는 뭔가 이야기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시에나의 관심을 살 수 있을만한 주제를 생각하던 미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버렸다.


“저기, 난 말이야 예전에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미카는 한마디를 끝내고 시에나의 눈치를 봤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역정을 내지 않는 무관심덕에 자신감을 얻은 미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누나랑 나랑은 나이차가 나서, 어릴 땐 누나가 날 많이 챙겨줬거든. 그래서 나도 동생이 생기면 누나처럼 잘 해 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


“지금은?”


“응?”


시에나는 당황한 미카를 무시한 채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지금은 어떤데.”


“그, 글쎄... 나이를 먹다 보니까, 동생이 생기면 오히려 귀찮을 거 같기도 하고... 그때랑 달리 이것저것 챙겨 주는게 보통일이 아닌 거 같으니까... 시에나도 나보다 어리긴 하지만 동생같은 느낌은 그다지 안들고...”


미카의 말을 들은 시에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며 말을 꺼냈다.


“내 오빠와 나랑의 관계는... 뭐랄까 엄마, 그러니까 엘렌과 너랑은 좀 달랐어. 내가 어릴 때는 끔찍했으니까... 오빠는 항상 날 지켜주려고 애썼어.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겁에 질려 있으면 마치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이야기해서 내 대신 맞고... 일이 있을 때 마다 나한테 까지 불똥이 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던거 같아... 그런데 난 참 비겁하게 몇 번인가 오빠가 내 대신 맞으면서 지켜주니까, 그게 당연한 것처럼... 언젠가 부터 모든 걸 오빠한테 미뤄왔어. 치사하게, 비겁하게, 수수깡으로 만든 것처럼 약한 사람이었는데, 난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강철로 만든 사람인 것처럼 취급했어. 그러면... 내 죄책감이 좀 덜어질거 같아서 그랬을까. 오빠 당신은 맞은 데가 너무 아파서 잠도 못 자는데, 난 그저 춥다고, 덥다고, 무섭다고 투정만 부리고... 오빠는 자기가 신음소리라도 내면 혹여 내가 잠을 제대로 못 잘까봐 아픈걸 억지로 참으면서 밤을 지새우는데 나는 괜찮으니까, ‘오늘은 오빠가 맞아서 나는 괜찮아.‘ 라고 생각하면서 편하게 한 장밖에 안 되는 모포를 뺏아서 자고, 내가 맞아서 아플땐 어떻게든 날 달래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멀건 수프 몇 숟갈과 빵 부스러고 배를 못 채워서 칭얼대면 기꺼이 자기 껄 내주고... 항상 그런식 이었어 오빠는 언제나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않고, ’시에나 나 때문에 맞아서 아프지? 미안해‘, ’시에나 배가 많이 고프지? 다 나 때문이야 미안해...‘, ’시에나가 이렇게 아픈데 난 아무것도 해줄게 없어 정말 미안해.‘ 언제나 시에나, 시에나, 시에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자기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어. 난 도무지 상상도 안 돼,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그 악마 같은 인간 앞에서 얼마나 맞을지 알면서도 내 잘못을 대신 덮어쓰고, 무슨 짓을 당할지 알면서도 내가 아프면 약을 사달라고 부탁하고, 자기가 아플 땐 그저 이를 악물고 참아내기만 할 뿐이면서, 난 그저 오빠에게 갈취해갈 뿐이었어. 몸도 마음도 생명도...”


시에나는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느라 잠시 말을 끊었다. 미카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에 경악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때의 한심스런 내 모습보다 더 참을 수 없는건 이렇게 편하게 지내다 보니까 잊어버리고 있다는 거야.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게 누구 때문인지 아는데, 이젠 얼굴도 기억이 안나. 기억이 나는 건 한슨이 언젠가 내다 팔거라며 억지로 기르게 했던 칠흑 같은 머리칼과 나처럼 못된 동생과 달리 맑고 선하던 예쁜 빨간 눈동자...”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닫은 시에나는 그 이후 침묵을 지켰다. 한동안 물기어린 시에나의 눈을 바라보던 미카는 뭔가 착잡하면서 끔찍한 기분을 느끼며 방을 나갔다.


나라면 할 수 있을까? 나라면...


“못해 그런거....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 같은 건 없었는데, 왠지 사기 치는 기분이야.”




다음날 아침, 시에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식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변함없이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아침을 다 먹은 시에나는 가볍게 소화도 시킬 겸 밖으로 산책을 나섰다.


한 시간 가량 유유히 마을을 걷다가 돌아온 시에나는 곧장 방에서 검을 가져와 뒤뜰로 향했다. 미카는 어디론가 갔는지 없었기에 시에나는 편한 기분으로 검술 연습을 했다.


간단한 기본기부터 복잡한 응용기술까지, 땀에 흠뻑 젖을 때 까지 연습을 하던 시에나는 멍한 기분으로 나무 그늘아래 주저앉았다.


“오늘은 벌써 끝?”


언제 왔는지 페르바슈가 물 컵을 들고 서 있었다. 시에나는 고개를 흔들며 페르바슈가 내미는 물컵을 받아 들었다.


시원한 우물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뱃속을 싸하게 식혀주는 기분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이 있었다.


페르바슈는 싱긋 웃으며 시에나 옆에 앉아 시에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나무에 기대었다. 정말이지 머리칼과 눈동자의 색깔만 닮았더라면 부녀지간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모습이었다.


“요즘 뭐, 힘든 일이라도 있어? 기운이 없어 보인다.”


“아뇨... 그냥, 이것저것...”


“뭐든지 말해보렴. 아직까지도 익숙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네 아버지니까. 딸의 고민정도는 들어 줄 수 있어.”


시에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페르바슈를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시에나는 작게 실소하며 나무에 기댔던 등을 미끄러뜨려 바닥에 누운 채로 페르바슈에게 말했다.


“옛날 일들이 잊혀지는 것도 무섭고, 앞으로 뭘 하게 될지 생각하는 것도 힘들고... 에, 그러니까 아빠. 보통의 내 또래의 여자들은 손에 물집 잡힐 만큼 칼 들고 연습하고 그러진 않잖아요?”


“음, 뭐 그야 그렇지. 칼 대신 바늘을 쥐고 있겠지. 아니면 몸단장 할 물건이라던가. 네 나이대는 외모 같은데 관심이 많잖니. 뭐, 넌 그런데 신경 안 써도 될 만큼 예쁘긴 하다만.”


“칫,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아무튼 말이에요. 지금쯤 오빠는 뭘 하고 있을까? 살아 있기는 한걸까? 그런데 오빠가 어떻게 생겼더라... 기억이 안나. 나는 나중에 뭘 하고 있을까? 계속 아샤에 살다가 늙어 죽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 때문에 머리도 어지럽고, 우울한거 같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별거 아닌 일에 과민반응 할 때도 있고.”


“사춘기구나?”


페르바슈는 한마디로 시에나의 상태를 정의했고, 시에나는 입을 삐죽이며 토라진 얼굴을 지었다.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요. 아빠. 전 나름대로 심각하다니까.”


“심각할게 뭐있니? 다들 겪는 일인데. 넌 몸만 컷지 아직도 정신은 어린애잖니? 16살이나 먹어서 아빠, 엄마 이러고 말이야.”


“에엑?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 이러는 건 너무 징그럽잖아요.”


페르바슈는 씩 웃으며 누워있는 시에나의 이마를 톡톡 쳤다.


“아무튼 뭐든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네 오빠도 뭐, 너도 이렇게 잘 있는데 건강하게 잘 살고 있겠지. 앞날도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다보면 어느새 만들어져 있는게 인생이라는 거니까. 나도 그랬고 말이야.”


“그건 아빠가 너무 무책임한 거에요. 이렇게 제멋대로인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거 자체가 레트인의 기적의 증표인데.”


“하... 하... 뭐, 그래도 나름대로 착한일도 하고 열심히 살아 왔으니까, 레트인께서도 날 귀엽게 봐주는 거겠지.”


시에나는 말도 안 돼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그 이후 페르바슈와 시에나는 쓸데없는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며 즐겁게 오전을 보냈다.


한참동안 입씨름을 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안으로 들어갔고, 엘렌은 짐작이나 하고 있었다는 듯 이미 점심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시에나는 손을 씻는둥 마는둥 하며 점심 먹기에 급급했다.


즐겁게 점심을 먹고 있는 사이 미카가 ‘난 대단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얼굴에 써 붙인 듯한 표정으로 뛰어 들어왔다.


“시에나! 말장수가 데려왔던 동물들 중에 한 마리가 우리에서 탈출했데! 지금 그것 때문에 마을이 발칵 뒤집어 졌어! 굉장히 흉폭한 놈이라던데? 벌써 몇 명인가는 당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고, 아무튼 비상사태야 오늘은 집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말라고 하더라.”


항상 늦은 소식이나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물어오는 미카 답지 않게 꽤나 중요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시에나는 미카가 한 이야기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기에 ‘응응’ 거리며 대충 흘려들었다.


“아, 잘 먹었다. 그럼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 어딜 가는 거야?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지금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니까.”


“너 뭐라고 했었냐? 음식 먹는데 옆에서 시부렁대니까 무슨 말인지 못 듣는게 당연하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리 비켜.”


미카는 당황한 얼굴로 휙 하니 나가버린 시에나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집밖에 나온 시에나는 마을 사람들 몇몇이 무장을 한 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칼이라도 들고 나올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집으로 다시 들어가려니 미카가 있는게 껄끄러워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 어때, 별일이야 있겠어? 사람도 이렇게 많은데.”


오전동안 페르바슈와 이야기를 하며 조금은 마음이 풀어진 탓일까?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던 시에나는 묘한 냄새를 맡았다.


끊어질듯 하면서도 가늘게 풍겨오는 냄새는 분명히 피 냄새였다. 하지만 달콤한 향기가 아니라 비릿한 느낌이 나는 것이 동물의 것임이 분명했다.


시에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냄새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동안 집중해서 걷다보니 어느새 마을 구석의 공터까지 와 버리게 되었다.


“뭐야 저건?”


정신이 번쩍 든 시에나는 공터 구석에서 뭔가를 뜯어먹고 있는 말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말은 개처럼 동물을 뼈째 씹어 먹고 있었다.


‘보통 말이 육식을 하던가?’


그 의아함도 잠시, 시에나는 경악스런 표정으로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서, 설마 저놈이 미카가 말했던 그 도망친 녀석?’


시에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공터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말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움직이는 사이, 개를 다 먹어치운 말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시에나를 발견했다. 시에나는 말이 자신을 발견 했다는 걸 눈치 채자마자 온힘을 다해 공터를 벗어났다.


“사람살려!”


시에나는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붐비는 곳으로 달렸지만, 검은 말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시에나를 따라잡았다. 어느새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말을 본 시에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발이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으으으... 아아아아!”


시에나는 주저앉은 채로 말을 피해 뒤로 물러났지만, 말은 비웃듯이 이를 드러내며 웃곤 피가 흥건한 혀로 간이라도 보듯 시에나의 볼을 핥았다. 시에나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말을 올려다보았다.


황갈색으로 빛나는 말의 두 눈은 마치 자신이 얼마나 맛있는지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다.


“히익! 시, 싫어! 저리가! 가란 말이야!”


시에나는 생사가 오락가락 하는 짧은 순간, 언젠가부터 알고 있던 한 가지 방법이 번뜩이듯 떠올랐다.


시에나는 최대한 진정하려 애쓰며, 말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언젠가부터 알고 있던 뱀파이어들의 특기인 매료안(魅了眼)을 사용하려 한 것이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시에나의 머리를 씹어 삼킬 것 같았던 말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연신 푸륵거리며 시에나의 눈싸움에 응수했다.


그리고 잠시간의 대치동안 시에나의 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거의 절정에 달했을 때 시에나의 눈빛에 요사스런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말은 고개를 숙였다. 어둠에서 태어난 자식들 중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일족의 기운이 느껴지자 블랙유니콘의 피가 흐르는 말은 그 본능대로 복종을 한 것이다.


시에나는 당장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헐떡이며 비실비실 일어나 집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너도 왜 저 괴상한 말이 널 따라다니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페르바슈의 질문에 시에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바슈는 곤란한 눈빛으로 상인을 바라보았다. 상인은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개탄하며 시에나를 따라 다니는 말을 잡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할 뿐이었다.


상품을 납품해야 하는 날짜가 빠듯하게 다가 왔기에 상인은 눈물을 머금고 말의 매각을 제안했다. 페르바슈는 별다른 선택이 없는 상황이어서 한숨을 푹푹 쉬며 말 값으로는 말도 안 되는 고액을 지불했다.


상인이 집을 떠나자 페르바슈는 허탈한 표정으로 말의 주둥이를 쓰다듬고 있는 시에나에게 말했다.


“시에나 너, 내 기억으로는 말을 싫어 했던거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이 녀석은 말도 잘 듣는데다 말 같지도 않잖아요. 고기 먹는 말이 대체 어딨다고.”


‘그게 더 문제야. 사람 먹을 고기도 없는데 대체 어디서 말 따위가 먹을 고기를 구해온단 말이야?’


페르바슈는 뭐라 한마디 해주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제법 밝아 보이는 얼굴로 말을 쓰다듬고 있는 시에나를 보니 그러한 기분은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그래... 뭐, 이미 사버린 거니 어쩔 수 없다만, 너 그 말 이름은 생각해 뒀니?”


“물론이죠! 하프(half)로 할 거에요!”


“하프?”


“네, 음... 그러니까. 이놈이나 나나, 둘 다 완전히 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까... 하프 블러드(half blood)를 줄여서 하프로 할려고요. 어때요 괜찮죠?”


 


-----------


 


오랜만에 한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562 귀향(歸鄕) Zan 2008.07.24 832
7561 안녕하세요 여신입니다! [5] しろいつばさ 2009.07.27 831
7560 곰인형 만드는 곰인형 [4] idtptkd 2009.04.08 831
7559 A Tale That Wasn't Right [2] LiTaNia 2007.08.11 831
7558 지구멸망 카르고의날개 2008.08.12 829
7557 단테 백작 [2] 다르칸 2008.07.06 829
7556 Mutant Astral [납치] [1] 유도탄━┏▶™ 2007.06.23 829
7555 기억의 약속 file 희망과꿈 2007.11.22 827
7554 신세계(新世界)의 구름 [1] さくらざき せつな 2007.09.25 826
7553 [단편] 바나나우유와 담배 [1] Mr.럭키맨 2007.07.18 826
7552 그것이 나의 인생, [2] 치코♡ 2007.06.09 826
7551 수수께끼 [2] 물망초 2009.07.27 825
» The Magic < S.S > [3] Rei 2008.03.11 825
7549 § Last Soul § -설정- 일렌 2007.10.14 825
7548 [대사]죽은 사람의 일기 [14] 감자는칩이다 2008.01.17 824
7547 The gate of the end - 03 [4] 에세카 2007.04.23 823
7546 그가 떠나기 5분 전 [8] Bryan 2008.07.14 822
7545 32bit [1] Sharone 2007.10.13 822
7544 미식가 - 2 냠냠냥냥 2007.07.20 822
7543 늑대의 공주님 -2 영원 2005.05.30 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