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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겨울E]한겨울 밤의 꿈

2007.01.30 13:21

핑크팬더 조회 수:844 추천:9

extra_vars1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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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눈이 쉴새없이 떨어지던 한밤중 이었다.


 


은은히 퍼져나오는 노란 불빛 사이로 한 남자는 앞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 남자의 차림새를 봐서는 제국 휘하의 기사 같았지만, 그것도 과거의 한때였는지 현재는 빛이바랜 갑옷을 착용하고 한쪽 허리춤에는 녹이 슬어 살짝만 긁어도 가루가 떨어질것만 같은 큰 칼을 차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길을 걷고 있었다. 등 뒤에는 여기저기가 찢어진 망토<헝겊처럼 보였다.>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 망토의 아래에는 동그란 나무방패를 어깨서부터 허리까지 오는 가죽끈으로 단단하게 묶어두고 있었다. 남자의 눈은 매우 파랗고 생기가 넘쳤지만, 그의 얼굴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어딘가 모르게 몰골이 매우 초췌하고 없어 보였다.    초췌한 남자를 마을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기사는 충분히 괴상했고 그런 그를 이상하게 보는 마을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주위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땅을 바라보며 묵묵히 앞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동안의 여행이 매우 길었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강철부츠가 반쯤 닳아없어져서 기사는 어색하게 기우뚱 기우뚱- 하며 걸었다. 한참을 걷고 있을때, 옆에서 한 신사가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그쪽은 여행자요?.”


“…….”


 


그 말에 기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사는 신기한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기쁨과 놀라는 표정을 같이 지어보이며 자신의 턱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신사는 오른손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정색 지팡이를 쥐고 있었고, 신사다운 정장에 검은 중절모까지 쓰고 있었다. 검은 정장사이로 살짝 삐져나온 타이는 신사의 이미지를 조금 깍아내렸지만, 기사는 그런것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참동안 기사를 이리저리 훑어보던 신사가 살짝 미소지어 보이며 기사에게 무언가를 건냈다.


 


“자, 이거 받으시오.”


“…….”


 


신사의 손에서 기사의 손으로 전해진 물건은 다름아닌 성냥이었다. 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신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듯 신사는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기사에게 설명해 주었다.


 


“성냥이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요?. 그대의 모습을 잘 보고 있자니 지금껏 힘들었던 여행이 눈에 훤히 비춰서 말이요. 내가 당신에게 준 이 성냥은, 무시하지 않고 내 물음에 응했던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여행도 힘내라는 뜻의 표시이기도 하지요.”


“…….”


 


기사는 말없이 신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신사는 중절모를 살짝 들어보이더니 미소를 띄우며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 갔다. 신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짚고 가려고 했지만, 지팡이의 길이가 짧아서 땅에는 닿지 않았다. 기사는 신사의 모습이 어둠에 가려져 안보일때 까지 뒷모습을 봐주며 배웅했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시 묵묵히 앞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자 마을 이곳저곳에 피어있던 불빛도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부지런히 나와서 가로수에 불을 대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긴 장대에 물을 묻히고 와서 가로수에 켜져있는 불을 끄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집에서 흘러 나오던 불빛도, 이제는 시간이 시간인지라 대부분 꺼져 있었다.  하지만 기사는 빛에 연연하지 않고 땅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었다. 기사가 생각하기에 타인의 집에 불이 꺼지던, 가로수등에 불이 꺼지던 자신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였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이번에는 마을의 시장쪽에 닿을 수 있었다. 매우 큰 마을이었기 때문에<도시라고 보는것이 적당하다. 하지만, 기사는 도시라는 말을 모른다.>기사는 오랜시간 동안 마을내부를 걸어야 하는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처럼 묵묵히 걷는 기사지만 시장에서 만큼은 두 눈이 휘둥그레 질 수밖에는 없었다. 기사는 언제나 배가 고팠고, 그에게 선뜻 음식을 나눠주는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기사가 망토를 뒤척이더니 3골드를 꺼냈다. 아마도 그것이 현재 기사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잔금 같았다. 3골드라면 겨우 사과 하나를 살 돈이지만 기사에게 사과 하나는 너무나도 소중한 식량 이었다. 과일가게를 찾은 기사는 주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사과를 하나 집었다. 그런 그가 가엾게 보였는지 길을 재촉하던 기사를 잠시 멈춰서게 해서, 과일가게의 주인은 사과 세쪽을 더 얹어주었다. 물론 공짜였다. 기사는 주인에게 머리를 조아린후 다시 묵묵히 길을 향했다. 주인은 아쉬운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다가 다시 가게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기사가 얼마나 더 걸었을까?. 드디어 그의 눈에 마을 동쪽 외곽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걸음을 좀 더 서둘렀다. 더이상 마을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였다. 마음속으로 감사하단것을 기사는 물론 느끼고 있었지만 그 미안함과 부담감이 없지않아 있었던 것이다. 한손에 쥔 사과를 한입 베어물은 기사는 어느새 거대한 성벽에 다 다라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통행증을 꺼낼때였다. 성벽 옆에서 몸에 다 헤진 천 쪼가리를 덮고있던 여자가 기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기사는 가지고 있던 돈이 없었기에 배낭에서 사과 두개를 꺼내 여자에게 주었다.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조아렸고, 기사는 한번 끄덕이며 뒤로 돌아섰다. 내심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기사에겐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벽 가까이 가자,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병사 열댓명이 기사를 멈춰세웠다.


 


“통행권을 보여주시겠습니까?.”


“…….”


 


기사는 말없이 망토를 뒤척이더니 통행증을 꺼냈다. 병사들은 횃불을 비춰서 그것이 통행증이 맞는지를 판별했다. 확인이 끝나자 망루 위에 있던 병사 다섯이 성문을 열어주었고, 아래에 있던 병사들이 통행증에 나뭇잎을 찢어서 색을 넣었다.<나뭇잎을 이리저리 씹어서 색을 통행증에 찍다.> 기사는 그 통행증을 다시 돌려받고 길을 재촉했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간간히 보이던 불빛조차 완전히 사라져 버려서 앞을 분간할 수 조차 없는 어둠을 만나게 되었다. 더군다나 마을밖은 온통 숲지대라, 여기저기 나무에 긁혀서 상처가 났다. 한참을 고민하던 기사는 신사에게 받았던 성냥을 꺼내서 불을 붙였다.                    하지만 눈이 내려서인지 성냥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꺼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기사는 몇번이고 계속해서 빛을 비췄다. 행여나 발을 헛 디뎌서 굴러떨어지게 된다면 죽을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눈발은 더욱 거세졌고, 새캄한 어둠속에서 온몸으로 추위를 느껴야 했다. 성냥도 거의다 떨어져 버려서 기사는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과거엔 이것보다도 더 혹독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며 버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돌덩이 만한 눈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기사는 더 버티지 못하고 쉴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에 버려진 집이나 모두가 묵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움막 같은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이 신은 기사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산자락 끝에 위치한 곳에서 조그마한 움막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움막은 매우 낡고 헐어서 자칫 잘못하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지만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받쳐 주고 있어서 무너질 걱정은 없었다. 기사는 두말할것 없이 그 움막으로 들어가 짐을 풀어놓고 갑옷도 벗었다. 빛바랜 갑옷과 같이 헝겊같은 망토, 방패 등등을 가지런히 모아놓고 그는 편한 복장으로 배낭에 있던 모포를 꺼냈다. 겨울을 생각해서였는지 배낭에서 모포는 다섯장이나 나왔다. 기사는 세장을 바닥에 깔고 두장을 자기 자신이 덮었다. 오랜만에 편히 누워보는 것인지 그는 지금까지 축적되어 있던 피곤함과 졸음이 한번에 몰려와서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기사는 꿈을 꾸었다. 자신의 머리 위에서 천사들이 빙글빙글 돌며 나팔을 불어주었고, 연보라빛 하늘을 바라보며 그는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천사들은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고 기사는 천사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천사들은 하나같이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기사는 그 모습에 심취하여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다. 잠시나마 여행을 잊게 된 것이다.


 


휘이- 휘이이이-


 


그가 잠에서 깨었다. 모든 것은 시끄러운 소리 때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그의 눈에 보인것은 문이 반쯤 열려서 눈보라를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사는 얼른 일어나서 문을 닫았고, 문을 닫자 주변이 너무나도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그때 기사는 한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잠을 청할때 분명히 현관문에 고리를 걸어놓았었다. 다시 말해서 바람이 문을 절대로 열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은 열려있었고, 기사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왔다간 것일까?.)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이 시간에 이곳에 올 사람도 없었고 겨울 산, 그것도 폭설이 내리는 이런 겨울 산속을 걷고 있을 정신나간 사람은 없다. 기사는 자기 자신이 산을 탔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도 인정하려 하지 않으니까. 넋이나간 그는 엉거주춤 서있다가 한번 더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눈보라만 매섭게 닥쳐올뿐 사람의 발자국이나 인기척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기사는 이상했지만 조금 더 잠을 청해야 하기에 문을 닫고서는 확실히 고리를 걸었다. 그후 고개를 뒤로 돌렸을때 그는 놀라서 자지러질뻔 했다. 자신의 모포위에 가녀린 소녀 하나가 해맑은 눈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는 다시한번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 정신없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소녀>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전혀 알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정을 보아도 구멍이 난 곳은 없었고, 창문과 현관역시 안에서 잠궜기 때문에 저런 작은 소녀가 들어오기에는 무리가 있다.<성인이라면 위쪽으로 손을들어서 현관문을 열 수 있다. 하지만 어린 소녀는 키가 작기 때문에 불가능 하다. 그것은 어린 남자아이라도 마찬가지다.> 기사는 찬찬히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소녀는 기사가 가까이 다가가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리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지 기사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멀뚱히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매우 밝았다. 제대로 말하자면 몸에서 창조주<신>의 빛 같은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파란색의 빛이었는데, 눈웃음을 칠때나 조금씩 몸을 움직일때 마다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기사는 그럴때마다 살짝 눈을 움츠렸고, 소녀는 계속해서 빙그레 웃을 뿐 이었다.


 


“너, 넌 누구니?.”


 


기사는 친절하게 물었다. 하지만 소녀는 대답없이 기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소녀가 먼저 기사의 볼을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따뜻할 것 같은 느낌 이었지만 매우 차가와서 기사는 몸을 뒤로 뺏다. 소녀는 놀랐는지 손을 슥 집어넣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서 기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엷은 미소를 띄었다. 소녀도 그런 기사에게 포근함을 느꼇는지 살짝 웃으며 기사의 품에 안겼다.       


기사에게는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나무라지도 않았고 꾸짖지도 않았다. 그저, 포근히 감싸줄 뿐 이었다.


 


“편안해.”


 


소녀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기사는 소녀의 몸에서 나오는 파란빛의 광채와 같은 파란색의 눈으로 소녀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설마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소녀의 촉감이 그대로 느껴졌고, 그녀<소녀>의 목소리도 생생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기사는 옆으로 널부러져 있던 모포를 손으로 잡아서 소녀에게 덮어주었다. 소녀는 싱긋 웃으며 그 모포를 자신의 목까지 뒤 덮었다. 둘은 한참동안 서로에게 안겨있었다.


 


“넌 어떻게 온거니?.”


“그냥, 왔어.”


“그냥 어떻게?.”


“나도 몰라, 하지만 그냥 왔어.”


“그렇구나…….”


 


기사는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소녀가 조금 곤란해 하는 것 같아서 였다. 아마도 방금 질문은 소녀에게 만큼은 실례 였던것 같았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소녀에게 환히 웃어주었다. 소녀도 금새 다시 밝아졌다. 아직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이 한밤중의 기사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는 피곤함도 가시었고, 졸음도 가셨다. 가지고 있는 생각은 오직 앞에 있는 소녀에 대한 것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소녀는 졸린지 눈을 깜빡깜빡 했다. 기사는 눈치를 채고 모포를 한장 더 덮어주었다. 소녀는 누운채로 손을 뻗어 기사의 볼과 촘촘히 난 수염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 재밋는 얘기 알아?.”


“재밋는 얘기?.”


“응, 나 얘기 좋아해. 듣고 싶어.”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아저씨는 재밋는 이야기를 몰라.”


“그치만 아저씨한테 듣고싶어. 아무거나 얘기해줘. 조용히 들을게.”


 


기사가 손을 내저었지만 소녀는 막무가내로 기사가 얘기해 줄것을 원했다. 기사는 오랜시간 동안 말을 해본적이 없었기에, 말을 하는것이 조금 서툴렀다. 끊어서 말해야할 부분이 아닌데도 끊어 읽는가 하면 앞뒤가 전혀 맞지않는 얘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소녀는 재밋게 들었다. 그것이 아무리 어색하고 바보같이 보여도 자신이 듣고싶어 했었던 기사의 이야기 였기 때문이다.


 


한참을 소녀에게 이야기 해주고 있을때, 기사의 뇌리속으로 과거 오래전에 들었던 얘기하나가 떠 올랐다. 기사는 자신이 지어내서 아무렇게나 말해주던 얘기를 도중에 어설프게 끝내버리고는 소녀에게 물었다.


 


“재밋는 이야기가 하나 생각났는데, 해줄까?.”


“응 듣고싶어, 아저씨는 재밋으니까.”


“좋아, 그럼 해줄게.”


 


기사는 소녀에게 팔베게를 해주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조용하고 듣기 좋았냐면 얘기를 시작하는 순간 소녀에게 참을수 없을만큼의 졸음이 밀려올 정도였다. 이상하게도 이 얘기를 할때의 기사는 말을 더듬거나 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 옛날이었단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살았지. 둘은 너무나도 사랑했어. 하루에 한번이라도 서로를 보지 못하면 입에 가시가 돋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이었어. 기분좋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지. 여자와 남자는 그 눈에 심취해서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구경했어. 하늘은 연보라빛으로 아름답게 수놓았고 눈은 곧 천사가 되어 이리저리 날아다녔지.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너무도 행복하게 해 주었어. 그 둘의 사랑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하지만 그들에게도 시련이 있었어. 그것은 나라를 새로 다스리게 된 국왕 때문이야. 새로 나라의 살림을 담당하게 된 그 국왕은 성격이 매우 포악했어. 높은 사람들에게는 절절매고 웃음을 자주 보여주었지만, 자신이 가진 또 다른 이면에는 아주 잔인한 모습이 있었지. 국왕은 자신의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세금도 10배나 늘려버렸어.”


“나쁜 사람이네?.”


 


얘기를 재밋게 듣고 있던 소녀가 잠시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기사는 화내지 않았다.


소녀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이며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응, 아주 나쁜사람이지. 세금을 10배로 늘린 이후에는 또 마을에 있는 남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자신의 군대로 만들었어. 그 일때문에 여자와 남자는 헤어지게 되었지. 남자들은 나이먹은 노인이고 아이고 할것 없이 모두 끌려가서 강제로 군인이 되어야 했어. 국왕의 흉폭한 성격은 거기서 끝나질 않았지. 여자들을 겁탈하고 재산을 약탈했으며, 자신의 나라인지도 모른채 불을 지르곤 했어. 그는 마을에 불을 질러놓고서는 불꽃축제라며 휘하에 있던 간신배들과 축배를 들었지. 그러던 중, 국왕의 딸이 여자가 사랑하던 남자에게 첫눈에 반했어. 국왕은 억지로 남자에게 자신에 딸과 교제를 하라고 명했지. 남자는 거절했지만 어쩔수 없었어. 국왕이 그렇지 않는다면 여자를 죽이겠다고 했거든. 결국 둘의 교제는 시작 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여자는 실의에 빠져서 발버둥 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어. 남자도 여자의 자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이야기는 여기 까지야.”


“하나도 재미없어. 그것은 무서워.”


“그래?, 나도 솔직히 무서워. 국왕과 그의 딸같은 사람들은 이 땅에 있어선 안될 존재들이거든.”


“국왕과 딸 둘다 나빠. 하지만, 남자와 여자도 바보같아.”


“응, 둘은 바보야. 대적하지 못했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에게 반란한번 일으키지 못했으니 말이야. 모두다 바보야.”


“흐응-.”


 


소녀는 숨을 내쉬더니, 기사의 볼에 입을 맞췄다. 기사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모포에 그녀를 눕혔다. 소녀는 금새 잠들더니 새근새근- 숨소리까지 내었다. 기사는 그런 소녀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고나서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그도 잠에 빨려들었다.


 


* * *


 


눈을 떠보니 기사는 자신의 갑옷에 등을 배고 엉성하게 누워 있었다. 아니, 그것은 누워 있는것도 아니고 앉아 있는것도 아니었다. 쓰러지다 만것처럼 어색한 모습을 하고 기사는 단잠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순간 소녀가 생각나서 기사는 모포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모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녀가 있었던 흔적도, 또 열려서 덜컹거렸던 문 역시 처음 들어왔을때 그대로 닫혀 있었다. 모든것은 기사의 꿈 이었던 것이다. 연보라빛 하늘에서 나팔을 불던 천사도, 갑작스레 움막으로 들어와서 기사를 놀래켜주었던 그 창조주<신>의 빛을 가진 연약한 소녀도. 모든것이 다 하룻밤의 꿈 이었다.


 


기사는 아쉬웠지만 아직도 소녀의 광채와 그 눈웃음, 그리고 그 향기를 잊을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에 미소를 띄고있던 기사는 문으로 다가가 고리를 뺀후 창문을 열었다. 벌써 새벽인지 찬공기와 같이 군청색 하늘빛이 움막의 실내를 비췄다. 어느새 을씨년 스러웠던 겨울 숲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나뭇잎 하나하나에 이슬이 맺힌 천국이 되었다. 심하게 내리던 눈도 그쳐 있었다.


 


* * *


 


그는 숲의 나무들 너머로 아침해가 뜰때까지 창문에 걸터 앉아서 수 십 년 만에 느껴보는 여유를 온몸으로 안아 들었다. 여기저기서 새들이 지저귀었고, 찬바람이 움막의 실내와 기사의 몸을 감쌋지만 기사는 신경쓰지 않았다. 불이 하나둘씩 꺼지던 마을을 걸어왔을때 처럼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실내는 더욱더 환해졌고, 색이 바랫던 구리빛 갑옷도 미세하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녹이슨 칼은 아직도 가루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여느때 보다도 빛나보였다. 그것이 기사의 착각 이었는지 아니면, 아침햇빛을 받아 번뜩인건 지는 모르지만. 기사는 그 소녀의 광채를 빌린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 전날밤은 어두워서 눈치를 못챗던 기사였지만 새벽녘 창문을 보면서 알아낸것이 하나 있었다. 외곽성벽 망루에서 나오는 자그마한 횃불이 이곳 산자락 맨 끝에 있는 움막만을 비춰주고 있는 것을 말이다. 기사는 이 움막에서 많은 것을 느꼇다. (여유, 이야기, 사랑, 진실, 이유, 근원)


 


이른아침에 기사만큼 행복한 시간을 보낸 자들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소녀와의 만남도 기사에게는 평생 잊을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아침해가 높게 떠서 찬찬히 위치를 이동하고 있을때 기사는 자신의 갑옷과 무기들을 꾸려서 다시 언제가 끝일지 모르는 여행을 시작했다. 움막에는 소녀를 위한 모포를 아직도 깔아놓고 있었고, 하나 남았던 사과도 차지않게 모포속에 감춰두었다.


 


겨울 숲길에 발자욱을 남기며 입김을 날리고, 새소리와 같이 맑은 이슬과 여행을 떠나는 기사의 뒷모습은 초췌하지도 또한 초라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제 여유를 가진 여행자가 된 것이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창문너머로 주시하던 소녀는, 파란빛의 광채를 뿌리며 눈웃음을 쳤다.


기사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소녀는 물방울을 휘날리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녀의 옷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고, 마을을 건너 저 높은 세계로 사라져가는 소녀의 모습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을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가로수에 불을 켜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시장도 분주했다.


 


* * *


 


이내 소녀는 하늘 높은 곳으로 사라져 버렸고, 움막 모포 밑에 숨겨져 있던 사과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소녀가 흘리고간 물방울은 숲으로 떨어져 이슬이 되었는데, 그 이슬에서는 독특한 사과향이 퍼져나왔다.


 


 -겨울 단편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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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 기사 , 소녀 , 겨울 , 풍자동화


 


 


 


Ps. 단편제용 소설을 처음에 날려먹고 잠깐 실의에 빠져있다가 아바타를 시원하게 지르고 나서 다시 용기를 내어본 핑크팬더 였습니다. 아 그리고, 이곳에서 풍자한것은 사회의 관직에 따라 약자와 강자가 판단되는 것이고, 연예인들의 자살건... 오르는 집값 등등 입니다.


 


연보라빛 하늘에 천사들이 나팔을 불었다는 것은, 곧 기사가 파란광채를 띄는 소녀와 만날것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