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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퓨전 또다시 엇나간 이야기

2008.10.05 07:46

LiTaNia 조회 수:843

extra_vars1 위험한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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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 우리 집으로 같이 가. 윤민이를 초대하고 싶어."


뭐야. 오늘 약속이 없다고 해도, 이거 너무 갑작스럽잖아. 또 전에처럼 윤화가 컴퓨터갔다 징징대면 어떡하라구.


"너무.. 갑작스럽지 않아?"
"전부터 윤민이를 우리 집에 부르고 싶었는데, 그동안 얘기를 못 했던 것 뿐이야. 같이 갈 수 있지?"
"안될 건 없지만.."


어차피 오늘 다른 약속도 없다. 밑져야 본전인데. 집에서는 유정이가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학교 끝나고 기다릴께."


다행히도 서연이는 멀리 있어서 그런가 유정이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한 것 같다. 만약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한다는 말을 서연이가 들으면 둘이 또다시 스파크를 튀기겠지. 아니, 전에 내가 조퇴했을 때 둘이 그나마 좀 사이가 괜찮아져서 그 정도는 아니려나?


에이, 모르겠다. 어제 나래라는 애 달래느라 힘들었지. 학교에서 아무 일이 없었더니 학교 끝나고 나서 그런 애를 만날 게 뭐람. 오늘은 그냥 조용히 있어야지.


오늘도 지루한 수업이 한참 이어지고 나서 어김없이 찾아온 점심시간. 유정이는 식당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교실에 있고, 서연이랑 함께 식당에 가려고 했는데..


"기다려."


내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혜인이였다.


"어.. 혜인이네. 우리반엔 웬일이야?"
"지금.. 밥 먹으러 가는거야?"
"응. 식당가는 중이야."
"괜찮다면.. 나도 같이 가면, 안될까?"


하긴 혜인이 주변에 친구가 없으니, 식당에 가게 되더라도 밥을 혼자 먹고 있겠지.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내가 혜인이의 '첫 친구'가 되려고 했고.


"안될 건 없잖아? 혜인이랑 얘기도 할 겸."
"윤민군. 고마워.."
"잠깐."
"응?"


혜인이가 같이 가려고 하는데, 서연이가 갑자기 혜인이를 저지했다. 혜인이에 대한 편견이 아직 남아있는걸까.


"민군. 이런 애랑 같이 가는 건 반대야."
"왜?"
"미니한테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니까, 불안해."
"혜인이는 친구가 필요한 애야. 서연이도 편견을 갖지 말아줬으면 해. 사람을 겉보기로 판단하면 안돼."
"미니 생각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지금 필요한 것은, 다른 애들이 혜인이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것이라고 본다. 혜인이도 얘기를 해 보면 나쁜 애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겉보기에 좀 안 좋아 보인다고 사람을 따돌리기 때문에 아직도 왕따가 많이 생기는 것을 다른 애들은 알고 있으려나.


그래서일까, 식당에서 서연이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다. 역시 편견을 고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닌 것일까. 혜인이는 여전히 무표정이고. 아무리 혜인이가 마녀라고 해도, 혜인이도 친구를 사귀고 싶어하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 아닐까.


"민군."
"왜?"
"민군 요새 왜 나랑 얘기 별로 안 하는거야?"


맞다. 요새 서연이랑 얘기를 별로 못했구나. 언제나 학교 같이 가는 것 외에는 서연이랑 있을 일이 없어지다보니 그렇게 된 건가. 그것도 이번주에는 내가 주번이라서 서연이보다 집을 일찍 나선 데다가 지금 내 옆자리에도 지금 서연이가 아닌 유정이가 앉아있으니까.


"미안. 요새 하도 일들이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곘어."
"칫. 민군. 삐질꺼야."
"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면, 미안."
"아냐. 혜인이는 잘못 없어. 내가 서연이한테 잘 못해준 것 뿐이니까."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오늘도 어김없이 점심방송은 들리네.


"1학년 3반의 정다솜 학생의 사연입니다. 저한테는 친구가 있어요.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별로 만나지 못했죠. 그 친구한테는 좋아하는 오빠가 있었어요. 그 오빠가 전학을 가고 나서 헤어질 수 밖에 없었죠."


잠깐. 사연 신청자가 다솜이인데다 다솜이한테 친구가 있고 그 친구가 좋아하는 오빠가 있다면, 내가 어제 봤던 그 애 얘기인가.


"제 친구가 좋아하는 오빠를 다시 만났을 때, 그 오빠한테는 이미 다른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그 여자친구는 그 오빠한테 어울리지 않는데. 하지만 그 오빠는 다른 여자친구랑 갈 데까지 갔고, 생일케익을 전해준다던가 하는 것만 봤어요. 하지만 제 친구는 언젠가 그 오빠가 친구한테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 오빠의 여자친구라는 사람한테 그 오빠가 홀려있을 뿐이라구요."


이 방송 내용, 뭔가 제대로 위험하다. 저거 호진선배 얘기잖아. 정다솜, 그렇다고 저런 내용으로 신청하면 어떡하냐.


"민군. 밥 먹다가 왜 그래?"
"지금 방송에 나오는 얘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같아서."


우리학교에 아무리 호진선배랑 희연선배가 전설적인 커플로 알려졌다고 해도, 그 두분이 내가 어제 만났던 나래랑 얽혀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지.


"신청곡으로, 가이즈의 You mean everything to me를 틀어드리겠습니다. 이거 언더밴드 노래라서 찾기 힘들었어요."


--
너에게 내가 보이지 않아도 다가가 너를 안을 순 없어도
내 곁에 비춰진 아득한 달빛을 기적같은 이 밤에 흘려보네
잃어버린 슬픔에 흐려진 말들도 오늘만은 너에게 다 전할 수 있게
you mean everything to me 멀어진 꿈 속에
so if I 갈 수 있다면
you mean everything you mean everything to me
커져만 가는 빛 속에 everything
저 하늘에 그려진 너에게
--


부디 호진선배랑 희연선배가, 이 사연이 나래 얘기라는 것을 눈치 못 채길 바랄 뿐이다. 내가 다솜이랑 나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사연이 나래가 호진선배 얘기를 한 것을 눈치챘지만.


"도대체 어디서 들어본 얘긴데, 민군."
"어제, 호진선배랑 전에 사귀었다는 '나래'라는 애를 우연히 만났어."
"호진선배? 그 전설적인 커플이라는 호진선배?"


호진선배랑 희연선배가 우리 학교에서는 이미 전설이기 때문에 서연이도 모를리가 없겠지. 서연이랑 혜인이한테 어제 만난 나래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그 애.. 너무 심하잖아. 지금 호진선배는 다른 여자친구 있는데. 불쌍하기도 하고."
"그러게.. 집착을 좀 버렸으면 좋겠는데 말야."
"미니한테도 그렇게 집착하는 애가 있을까.. 무서워."
"걱정마. 내 주변에는 나래같은 애는 없겠지."


혜인이는 우리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혜인이한테는 낯선 얘기들이라서 그런걸까.


"혜인이는.. 뭐 하고 싶은 얘기 없어?"
"아직은.. 없어.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 나래라는 애. 불쌍해."


나래한테도 언젠가 나래한테 맞는 짝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나도 아직 짝 못찾은 주제에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식사가 끝나고 나서, 혜인이는 자기 반 교실로 돌아갔고 나도 서연이랑 같이 우리 반 교실에 도착하니, 어떤 선배가 나를 찾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윤민군.. 맞지?"


누구더라. 이분 잘 기억나지 않는데. 아. 이 안경쓴 분이라면.. 누군지 알 것 같다.


"어.. 안녕하세요, 효선선배."
"아름이가 윤민이한테 이 쪽지 전해달라고 해서, 온거야. 요새 아름이가 윤민이 별로 안 괴롭히지?"
"요새 아름선배 못 본지가 꽤 됐어요."
"아름이도 윤민이 많이 보고싶어하는데, 그럼 올라가볼께. 누가 괴롭히면 나한테 말해."
"안녕히 가세요."


효선선배는 정말 아름선배와는 달리 제대로 '선배'라는 느낌이 드는 분이랄까. 그런데 무슨 쪽지인걸까.


이런. 누가 이거 쓴 사람이 아름선배 아니랄까봐 글이 아주 휘황찬란하네.


'To. 귀여운 윤민쨩☆
이 누나가 지금 감기몸살에 걸려서 윤민이랑 못 놀아준거 미안해~☆
학교를 조퇴할수밖에 없었어~☆
빨리 나아서 윤민이랑 같이 놀자~☆
윤민이도 감기 조심하구~☆
From. 아름누님께서☆'


나름대로는 예쁜 글씨체로 쓰시느라 수고하셨는데, 제가 보기엔 이게 '예쁜' 글씨체가 아니라, '악필'이예요. 그리고 내용도 뭔가 너무 이상하구요.


어쩐지 요새 아름선배가 안 보이더라니, 그러길래 환절기 감기는 조심해야 한다. 나는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비껴났지만. 문제는 아름선배 병문안 가려고 해도 아름선배 집을 몰라. 에이. 괜히 가봤자 아름선배한테 이상한 꼴이나 당할 게 뻔한데. 당분간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학교 생활이 되겠구나.


"윤민아, 무슨 쪽지야?"


유정이는 또 왜 이걸 궁금해하는거야.


"아름선배 감기몸살로 조퇴래."
"와! 그 선배 자꾸 윤민이 괴롭히더니, 쌤통이다. 히힛."


난 유정이가 저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유정이를 본 지 얼마 안되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는 사이에 그렇게 길지는 않은 점심시간이 끝났고, 나머지 수업 시간도 평소같이 지나갔다. 요새 봄이다보니 안 졸릴수가 없다. 그것도 밥 먹고 나서인가 더더욱.


에이. 그래도 겨우겨우 버티고 수업을 들으니까 수업이 끝나네.


"기다리고 있을께. 윤민아."


이번주에는 주번이라서 학교가 늦게 끝나는데, 유정이는 내가 끝나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런데 밖에서 유정이 목소리 말고 다른 사람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은데.


"윤민이..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그쪽은 왜 끼어드는거야."


딱 보니까 혜인이네. 내가 지금 주번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 뭐라고 끼어들지는 못하겠지만, 애들이 혜인이에 대한 편견을 줄여야 할텐데.


"윤민이.. 나 같은 애랑도 친해지고 싶다고 하니까. 좋은 애같아."
"윤민이가 좋은 애는 맞는데, 그쪽이 끼어들 상황은 아니잖아."


유정이가 너무 강하게 나섰는지는 몰라도, 결국 혜인이는 유정이한테 말을 제대로 못 붙인 채로 돌아가버린 것 같다.


주번활동이 끝나고 나니, 이제 남은건 기다리고 있던 유정이랑 같이 유정이네 집에 가는 것인가.


"윤민아. 아까 그 여자애, 누구야?"
"아까 그 여자애라니?"
"그 초라해보이는 애 말야. 도대체.. 윤민이랑 무슨 사이야."


혜인이 얘기인가. 혜인이가 마녀라는 얘기라던가 '수호천사'라는 얘기는 하면 안되겠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그 애도, 내 친구 중 하나야. 편견을 갖지 말아줘."
"윤민이한테 이상한 짓을 하면 어떡해."
"그건 편견일 뿐이라니까. 사람은 다양하게 사귀어야 되는데."
"나.. 다른 애 필요없는거 알잖아. 나한테는 윤민이만 있으면 돼."


역시 위험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는건가. 유정이라는 애. 정말 TV화면 속에서밖에 못 볼만한, '얼짱'의 수준을 넘어선 미녀인데, 이런 애가 왜 나한테 붙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유정이랑 한없이 안어울리는 보통 남자애일 뿐인데.


"유정이는.. 왜 내가 좋은거야?"
"그냥, 첫눈에.. 반했다고 생각해줘. 윤민이가 나 구해줬을 때.. 윤민이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이 유일고등학교로 전학온 거니까."


아무래도 지금 말할 것은 아닌가보다. 유정이랑 계속 걸어가다보니 뭔가 학교랑은 상당히 멀리 온 것 같다.


"아직.. 멀었어, 유정이네 집?"
"여기야."


유정이네 집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수수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공간이 넓어보이는, 그래서 유정이같은 애랑 어울린다는 느낌이랄까.


문을 열고 유정이네 집에 들어와보니, '여자애'가 사는 집이란 이런거다라는 것이 보인다. 뭐 서연이같은 경우는 자주 들르니까 익숙해졌고, 윤화는.. 말을 말자. 뭔가 공기부터 달라.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라, 지금 집에 안 계셔."
"유정이네 방에, 잠깐 들어가도 될까?"
"여자애 방은 함부로 누구 보여주는게 아니지만, 윤민이니까, 보여줄께."


유정이의 방에 들어가보니, 정말 제대로 깔끔한 모습을 보여준다. 가정교육 하나는 제대로 받았구나. 같은 여자애면서 도대체 내 동생인 윤화랑 왜 이렇게 다른거야.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그리고 벽에 포스트잇들이 보이는데, 전부 학교에서 배운 각종 과목들의 요점정리가 적혀 있는데, 그 중에 뭔가 색깔이 다른 포스트잇이 하나 보였다. 거기에 써있는 말인즉..


'나의 은인한테는 라이벌이 너무 많아. 하지만 그런 애들한테 내가 질 수가 없잖아. 안유정, 힘내라. 사랑은 쟁취하는 자의 것이야.'


나. 뭔가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구나. 어제 나래라는 애 얘기가 강 건너 불 얘기가 아니었구나. 거실로 나와보니, 피아노 한 대가 보였다.


"유정이.. 피아노 잘 쳐?"
"어렸을 때 조금 배웠는데.. 요새는 칠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래도.. 윤민이가 왔으니까, 연주 한번 해볼께."


유정이는 악보를 하나 꺼내서 피아노 위에 올려놨다.


"이거.. 강남에 있을 때 산 악보인데, 쿠보타 오사무라는 피아니스트의 avant-guerre라는 곡이야.(주1) 연주해보니까, 마음에 들어서 자주 쳐."


아방게르. 전전파라고 하지. 사전에서 찾아보면 제 2차 세계 대전 전의 사상, 생활 태도, 가치관 따위를 따르려는 예술 유파라고 하던데.


조용히 눈을 감고 들어보니, 이렇게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의 연주를 들어보는 것도 보기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내가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축제에 놀러왔을 때 밴드부 반주를 들어봤는데, 그 때 밴드에서 키보드 연주하던 분도 장난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나중에 알고보니까 그게 희연선배였고. 그런데 그건 밴드 키보드였고, 이건 피아노니까 또 느낌이 달라.


연주가 끝나고 나서, 이건 박수를 안 쳐줄수가 없다. 유정이도 쑥스러워하는 표정이지만, 기분이 좋은지 웃고 있었다.


"고마워, 윤민아. 많이 서투르지?"
"아냐. 멋진걸."
"윤민이한테 내 연주가 좋게 들려서 다행이야. 주스 가져다줄까?"
"응. 마침 목도 말랐는데."


유정이가 가져온 주스는, 이 색깔로 봐서는 오렌지주스로 보이는데. 요새 몇몇 분들이 오렌지가 아니라 어린쥐라고 하지. 하긴 어린쥐가 원어발음에는 좀 더 가까우니까.


"고마워, 잘 먹을께."


이거, 오렌지주스는 아니고, 감귤쥬스인건가. 맛이 오렌지랑은 좀 달라. 유정이는 내가 주스를 마시는 것을 보고 말없이 웃고 있었다. 그런데, 주스를 다 먹고 나니까, 왜 이렇게 졸린거야. 남의 집에, 그것도 숙녀의 집에서 이렇게 졸아버리면 안되는데.. 너무...졸려. 에이.. 유정아, 미안.


...


눈을 떠보니, 분명 아까전에 거실에서 쓰러진 것 같았는데 여긴 유정이 방 침대? 내가 언제 여기로 옮겨진거야.


"윤민아. 잘 잤어?"
"미안.. 깜빡 잠들어버렸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후훗."


유정이 얘 어느새 옷을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네. 유정이의 미소가 뭔가 불길해. 아까전에 밝게 웃는 모습하고는 또 달라. 왜 그런거지.


"윤민이를.. 오늘 내 것으로 확실히 점찍어야 하니까."


그리고 유정이도 내 옆에 다가와서 누웠다.


"유..정아?"
"무서워 하지 마. 나.. 윤민이가 좋아서 이러는거니까."
"부모님.. 오실 시간 되지 않았어?"
"오늘 두분 다 당직이셔.. 집에 안 오셔."


유정이 부모님은 그렇다쳐도 분명히 윤화가 집에서 징징대고 있을 것이 뻔한데.


"같은 학교에 들어와서.. 윤민이의 짝이 되었지만, 윤민이 주변엔 경쟁자들이 너무 많아. 그래서 윤민이를 손에 넣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거야. 윤민이는.. 우유에다 두부경단 말아먹을 것 같은 애라서. 내가 손을 안 쓰면, 다른 여자애가 가져가버려. 그러면.. 안되잖아?"


뭔가 무서워. 지금 이 자리를 빨리 빠져나가야 하는데. 유정이가 이렇게 있는데 이 자리를 벗어나도 뭔가 일이 생겨버릴 것 같다. 그냥 지금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하지만 깨달은 것은 늦었다. 이미 유정이는 입술을 내 입술과 겹쳤고, 그와 동시에 내 입 안에 뭔가가 들어왔다. 나.. 유정이한테 키스를 당한건가. 전에 윤화가 가끔 나 이상하게 깨울 때랑, 혜인이가 '수호천사' 상태로 우리집에 올 때 키스를 당해보긴 했지만, 이건 뭔가 본격적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느낌이 비릿하지. 유정이가 이렇게 하니까, 나도 유정이한테 할 수밖에 없는건가. 나도 유정이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혀와 혀가 얽힌지 한참만에, 유정이는 혀를 내 입 밖으로 뺐다.


"나도.. 남자애한테 정말로 해 본건 처음이라, 많이 부끄러운데."


문제는 내가 첫키스가 아니라는 것을 유정이가 알면 어떡하지.


"하지만 상관없어.. 윤민이는 내 곁에 있는걸. 부끄러움따위야."
"앗.."


어느샌가 유정이는 나를 껴안은 상태다. 나, 지금 이런 상태로 유정이한테 벗어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윤민이한테는.. 경쟁자가 너무 많아. 그 서연이라는 애라던가, 윤민이 괴롭히는 그 아름선배라던가."
"아름선배가.. 경쟁자?"
"그 선배.. 단순히 윤민이를 괴롭히는 게 아냐. 그 선배도.. 아마 윤민이에 대해, 나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거야."


그럼, 만약 아름선배한테 계속 끌려다녔다면, 아름선배도 나를 이렇게 만들 거라는 얘긴가.


"그리고 아까 전에 초라해보이는 여자애라던가.. 심지어 윤민이 여동생까지도, 전부 나한테는 경쟁자로 느껴져."
"혜인이는 그렇다쳐도.. 윤화는 내 동생일 뿐인데, 왜 경쟁자?"
"윤화 그 애가.. 카스테라를 나한테 먹인 것을 보고 알았어.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걸 느꼈어. 그 애도.. 나를 윤민이한테서 떼어내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지금 윤민이는 내 곁에 있는걸."


몰라. 나 지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정신이 아주 안드로메다 바깥으로 탈출을 한 것 같아.


"그 애가.. 윤민이를 지켜줄 수 있는건 자기뿐이라고 했잖아. 하지만, 윤민아, 이거 알아? '근친'이라는 건, 범죄라는걸."
"내가 근친같은걸.. 할 리가 없잖아."
"윤민이가.. 둔해서 못 느꼈지만, 그 윤화라는 애.. 가만히 놔두면, 그 범죄를 저지를것 같아."


나 뿐만 아니라 윤화도 위험해지는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빨리 빠져나가야.. 하는데, 뭐야. 지금 기분이 왜 이렇게 이상한거야.


"후훗. 슬슬.. 시간이 되었네, 윤민이."
"무슨.. 시간?"
"아까전에.. 내가 키스할 때, 뭔가 이상한 거 못느꼈어?"
"뭔가.. 비릿하긴 했는데. 뭐야?"
"눈치챘구나. 이거.. 미약이야. 내 짝을 찾으면 먹이려고 간직했던건데.. 찾았으니까."


유정이.. 나를 손에 넣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나.. 벗어나야 해. 이건 뭔가 진짜 마녀인 혜인이보다 더 마녀같아.


"나도, 윤민이를 다른 애들한테 뺏기기 싫으니까. 이렇게라도 해 본거야. 비겁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내 이성은 이미 본능에 패배한 지 오래였다. 유정이는 나한테 미약을 먹였고, 그것 때문에 나도 유정이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미 난 내가 입은 모든 것을 벗을수밖에..


(검열삭제)


"윤민이, 처음이 아니구나?"
"..."


내가 수호천사.. 아니, 혜인이랑 이미 (검열삭제)를 한 것을 눈치챈건가. 나도 지금 이런 상황을 원하진 않았단 말야. 하지만.. 미약 때문인지, 아니면 유정이가 미녀라서 그런건지.. 확실히 지금 기분이 '황홀'하긴 하다.


(검열삭제)


"상관없어. 먼저번에 누구랑 했는가는. 윤민이는.. 내꺼니까."


(검열삭제)


그리고, 나는 정말 내 안의 '모든 것'을, 유정이한테 분출해버렸다. 이거.. 범죄행위 아닐까. 괜히 이랬다가 유정이가 미혼모가 되기라도 하면..


(검열삭제)


"뜨거워.. 하지만, 좋아. 그 누구도 아닌 윤민이가 내 속을 채웠으니까."


유정이의 표정은 지쳐보였지만, 정말로 기뻐하는 듯 했다. 나도.. 미약때문에 그런건가, 많이 지쳐도 황홀하긴 하니까.


창밖은 이미 깜깜해진지 오래. 이제 집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 너무 늦었다. 이제 옷을 걸쳐입고 작별인사를 해야지.


"유정아, 집에서 동생이 기다리니까, 나 이제 가봐야 하는데."
"그래? 어쩔 수 없지.. 윤민이는 내일 학교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
"그럼, 내일 학교에서 봐."


벌써 땅거미가 짙게 깔린 바깥. 같은 유일동인데도 여기는 처음 와봤는데 도대체 우리 집으로 통하는 길이 어디야. 그런데 이 키가 작은 숏컷 남자애.. 어디서 많이 봤는데.


"오랜만이예요, 윤민이형."
"너.. 권밝힘?"
"권밝힘 아니예요, 권! 밝! 음! 이예요!"


자기가 여자를 밝히면서도 권밝힘이라고 부르면 싫어하는 권밝음녀석이다.


"후아.. 고등학생 되면, 애인 사귈 수 있겠죠? 윤민이형 지금 애인 있어요?"
"애인.. 없는데."
"윤화는 요새 잘 지내요?"
"걔 너가 걱정 안해도 잘 지내고 있다."


권밝음 이녀석. 아직도 윤화한테 미련을 못 버린건가.


"형 교복보니까 유일고같은데, 그 호진이라는 분 다니는 학교 맞죠?"
"맞아."
"저도 거기 가서 애인 꼭 사귀고 말 거예요."


이봐. 애인사귀는게 니 말처럼 쉬운게 아니라구.


"너 요새도 애인사귀고 싶은거냐."
"네. 그래서 가끔 학원에서 얘기 했다가 맞아 죽을뻔 한 적 있어요."


당연히 맞아죽지. 공부하라고 보낸 학원에서 애인 사귀고 싶다는 얘기 왜 해.


"키부터 좀 크고 그런 얘기 해라."
"저도 자라기 싫어서 지금 이런게 아니라구요."


넌 아직 중3이잖아. 자기 관리 잘 하면 좀 더 클 수 있다구.


"그럼, 나중에 봐요, 윤민이형."
"잘가라, 권밝힘."
"권밝힘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권밝힘녀석은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그러면 여기가 그 권밝힘녀석하고 가까운 곳이라는 건가. 유정아. 권밝힘을 조심해야 해. 하긴 유정이 정도면 권밝힘은 신경도 안 쓸지 모르겠다.


길을 한참동안 헤메서 집에 갔는데, 시간을 보니까 벌써 10시.


"오빠. 왜 이렇게 늦은거야?"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전화 한참동안 했는데 전화도 안 받고."
"휴대폰 밧데리가 다 나가서.."


변명이 아니다. 정말이다. 오늘 날짜로 딱 밧데리가 다 소모됐네. 이거 정말 윤화한테 미안한걸. 유정이가 나한테 미약을 먹이고 일을 치른 지 시간이 한참 되었으니.


"오빠. 늦은 죄로 벌이야. 내가 만든 카스테라 다 먹어야 해. 안 그러면 오늘 밤에 잠 못자. 불 다 켜놓을거야. 노래도 계속 틀거고."
"..."
"희정이 보내고 나서 오빠 기다리느라 엄청 심심했단말야."


그러고보니 유정이가 했던 얘기중에 윤화를 가만히 놔두면 근친을 저지른다느니 하는 얘기가 있었지. 하지만 이런 상황을 보면 근친은 무슨 근친.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해도 되지. 하지만 그 맛없는 카스테라를 다 먹으라니..


겨우 다 먹긴 했지만.. 이건 지옥이야. 집에는 제때제때 들어와야겠어. 윤화한테 다 먹은 걸 보여주려고 했지만, 이미 윤화는 자기 방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쿨.."


나, 헛짓한건가. 에이. 빈 접시를 윤화 책상에 놔두고, 나도 어서 자야지.


- 다음회에 계속 -


주1. 쿠보타 오사무라는 피아니스트의 avant-guerre라는 곡이야. : 사실 이거 비트매니아 IIDX 15 DJ TROOPERS에 나온 수록곡입니다. 게임 수록곡 중에 유일하게 '피아노 연주로만' 이루어진 곡이죠.


18. 권밝음 : 16살. 남자. 종암중학교 3학년 재학중. 키가 작은 '쇼타'. 남자로서 키가 작다는 것에 컴플렉스를 상당히 가지고 있다. 과거에 윤화랑 같은 학원에 다녀서 알고 지냈으며, 여자애를 상당히 밝힌다는 이유로 '권밝힘'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정작 권밝음 본인은 그 별명을 엄청 싫어한다.


네. 이번 회는 정말 영락없이 유정한테 '먹혀버린' 윤민군이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혜인이 역시 같이 식사하는 멤버로 끼긴 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어색하고, 점심방송에 다솜이가 나래 얘기를 신청해서 놀라버린 윤민. 그리고 유정이네 집에 초대를 받고 수면제 탄 주스 먹고 잠들다가 일어나보니 지못미 윤민군. 밤이 너무 늦어버려서 윤화는 한참동안 걱정했고, 겨우겨우 벌을 받고 방에 가서 잠이 드는 것으로 기나긴(?) 하루는 마감합니다. 다음 날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