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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기타 Fiction에서 작가와 독자의 관계

2009.10.27 04:42

윤주[尹主] 조회 수:356 추천:5

extra_vars1 창도 10주년 문예제에 바치는 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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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tion에 의한 작가와 독자의 관계>


 


 영화 <그린 마일> 중에 이런 장면이 있다. 사형 집행일을 앞둔 한 사형수가, 그때까지 감방에서 돌보며 길들인 쥐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장면이다. 한 간수가 자신이 키우겠다고 말한다. 사형수는 내키지 않는 듯 반응한다.
 그때 다른 한 간수가 쥐 마을에 보내자고 말한다. 사형수가 흥미를 보이자 그는 즉석에서 다른 간수와 말을 맞추어 있지도 않은 쥐 마을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인다. 플로리다 어딘가 있다는 커다란 천막 마을. 수많은 쥐들이 거기 살면서 방문객들을 위해 매일 공연을 펼치는 곳. 어른은 10센트, 아이는 2센트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걸 보면 입가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띄워진다. 죄수는 조금 걱정을 던 눈치다.



 눈치라 하니까 말인데, 평소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산다. 문학동에 거주하시는 여러분,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쓰기 시작한 당신의 글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고민해본 적 있을까? 힌트는 위에서 말한 간수와 사형수의 대화에 있다.



 많은 경우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가지만 우리가 쓰는 글들은 모두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태어난 것이다. 흔히 ‘동기’라고 이야기하는 그것은, 실제론 주변 환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제의식을 우연히 잡아낸 결과 태어나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쥐는 누가 돌보지?’라고 묻는 사형수의 문제의식처럼.



 물론 모든 문제의식은 글로 이어지지 않는다. 글보다 훨씬 쉬운 해결 방법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콜라 한 병을 사기 위해 A4 반 페이지 글을 쓰기보단 그보다 훨씬 작은 천 원짜리 지폐 몇 장만 있으면 된다. 사형수가 키우던 쥐 역시 간수가 돌봐주는 게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현실적이란 것은 어떤 측면에서 가장 쉬운 방법이란 말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떤 경우, 우리 주변의 누군가는 그 현실적인 제안을 불분명한 이유로 거부한다. 사형수는 간수에게, ‘대장님 집은 숲 속에 있잖아요.’ 라면서 그가 쥐를 돌볼 수 없을 거라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나는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그가 말한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안 좋은 머리는 급하게 생각을 짜낸다. ‘아마 말하지 않은, 모종의 다른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이를테면 미련 같은.’ 그래, 사형수는 사실 쥐를 돌봐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죽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사형수는, 잘 이해되지 않는 논리로 현실적 대안을 거부한다. ‘독자’라 불리는 인종들을 비롯해 세상 대다수 사람들이 이 사형수와 같다. 프로이트의 생각처럼, 사람들은 자아 아래 이드의 시커먼 늪지대를 하나씩 가지고 드러내지 않는다.
 ‘쥐 마을’은 그런 사람들에게 던지는 환상적 대안이다. 실존하지 않는 그것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작가’란 이름의 간수는 금새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마치 실재하는 것인 양 포장한다. 명심하라. 거짓말이지만 잘 꾸며 사실처럼 보이지 않으면 ‘독자’란 이름의 사형수를 안심시킬 수 없다.



 물론 아무리 완벽한 거짓말을 짜냈다 하더라도 환상은 환상, 사형수가 ‘쥐 마을’이 실존하지 않는 거짓임을 모를 리 없다. 물론 내가 스티븐 호킹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의 순진무구한 사형수는 그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세상에 순진무구한 사람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그 사형수 역시 ‘쥐 마을’이 거짓이란 건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에 그가 안도한 것은 그 이야기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 아니라, 실은 이야기를 해준 간수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는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독자는 결코 순진하지 않다. 그들이 이야기에 대해 열광하는 건, 이야기가 너무나 ‘리얼’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본 작가의 면모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①문제 제기가 일어나면 ②현실적 대안이 제시되고, 많은 경우 해결되지만 ③어떤 이는 대안을 거부함으로써 현실 이외 욕망을 드러낸다. 이 욕망을 잘 붙잡은 누군가가 ④환상적 대안을 제시, 많은 이가 관심을 보이면 그제야 이 환상적 대안을 발전시킨 ⑤이야기가 등장하고 ⑥독자와 작가의 소통이 일어난다. 이야기의 등장 전까지의 과정은 대개 현상으로 드러나거나 보이지 않는 과정이기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은 이를 무시하고, 일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부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모를까. 자기 삶과 관련 없는 이야기란 있을 수 없단 사실을.



 21세기 오늘날, 어떤 이는 이렇게 묻는다. 소통 수단으로서 소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TV며 인터넷, 휴대전화 등등 온갖 소통 수단이 발전한 이 세상에 활자 텍스트가 그 다른 모든 소통 수단들과 어떤 다른 장점이 있기에 살아남는지. 많은 이론이 있지만 나는 이런 의견을 선호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관음증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관음증이란 남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 세상 어떤 소통 매체보다 더 관음증에 호소한다. 창도 시민들에게 물어보자. 3인칭은 관찰하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이며, 1인칭은 그 내면까지 파고들고자 하는 욕망의 반영이다. 새로 산 책 냄새를 맡는 페티시가 있다고도 하더라. 이미 텍스트를 넘어서 그 텍스트를 제공한 이들에 대한 욕망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라면 원서와 번역서, 재판 등등이 모두 내용만 같지 물리적 성질이 동일하지 않을 텐데 애서가라고 굳이 냄새까지 맡아볼 이유가 없으니까. 이러한 욕망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작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의 변형이다. 작가는 노출증 환자란 말도 있으니까. 인터넷 야동이 이렇게 다양한 관음증을 만족시켜주던가? 이러한 관점에서 소설은 세상 어떤 소통 수단보다도 더 강력하다.



 <그린 마일>의 사형수 일화가 제시하는 바는 두 가지다. 첫째는 소설의 역할이 당장의 현실 문제 이상의 무언가를 해결하는 것이란 점이다. 혹시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소설은 늘 현실 문제 이상을 내다보아왔다. 많은 분들이 좋아한다는 이상의 <날개>도 그렇고, 조세희 씨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발은 땅에 딛고서 치열하게 살아오는 인물들을 그렸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눈만은 항상 하늘의 달을 향해 있었다. 운동권, 비운동권, 사회주의, 보수주의 어떠한 사상 논리 아래 쓴 소설이라도 상관없다. 모든 글은 현실 문제 이상을 바라본다. 글 쓰는 이들이여. 우리는 늘 현실 이상의 무언가를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둘째는 판타지 소설이 앞으로 감수해야 할 역할이다. ‘쥐 마을’ 이야기처럼 지극히 환상적 대안 바탕으로 썼다 할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은 항상 현실이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욕망을 찾아 제시하려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환상적 대안 속에서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 또한 요구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중세 판타지에서 이세계 소환 판타지, 최근의 게임 판타지로 이어지는 취향 변화 추세를 보라. 판타지에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져 감을 알 수 있다. 아직 나오지 않았단 포스트 한국 판타지의 대표주자는 리얼리티성이 극도로 강조된 현실 배경 판타지일 거란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게임이란 구조 내에서만 환상적 대안과 안도를 얻을 수 있는 게임 판타지 한계에서 벗어나 일상 속에서 색다르게 체험할 수 있으면서도 현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현실 기반 판타지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지 않을까 생각하는 탓이다.



 판타지는 ‘환상적 대안’을 어느 소설보다 강하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동시에 리얼리티는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추구해야 할 대상이다. 창도 시민으로서 바라는 건, 창도 분들이 이런 글들을 많이 써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또 글에 대한 각자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서로 치열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어떤 분은 이것이 공론이라고 이야기하실지 모르겠다. 리얼리티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추구해야 할 리얼리티가 무언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건 침묵해야 하기 때문인가?



 변명을 조금 하자면, 리얼리티의 추구 방향이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황석영이 생각하는 리얼리티와 이문열이 생각하는 리얼리티의 차이가 두 사람의 삼국지를 그렇게나 다르게 만들었다. 작가가 리얼리티에 대해 어떻게 정의내리고, 어떻게 리얼리티를 추구해나가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가 보는 ‘자신 내면의 거울’일 것이며, 동시에 독자가 보는 ‘작가를 향한 작은 유리창’이 될 것이다.


 


2009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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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 이벤트 파이팅입니다!!


상금이나 평가단 문제만 아니면 정기 이벤트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참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응원용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