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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에스프레소

2007.08.29 06:42

파가니니 조회 수:546 추천:4

extra_vars1 쇼팽 소나타 2번 1악장 -b flat mi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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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건반에서 손을 떼어냈다. 아쉬운 듯한 그의 고귀한 손길에 동정심마저 들 정도였으나 어차피는 이것 역시도 위선이 가득한. 결국은 순백색의 생명을 노리는 흑빛의 섬광이였다. 모든 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것만 같았다. 심지어는 이름 모를 우수한 마리오네트 인형에 의해 모든 것들이 연출되어있는 것만도 같았다. 그와 그녀는 은막이란 이름을 가진 아니,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조금은 가벼운 모습을 가진 악기라는 이름 위의 아름다운 배우와도 같았다, 몇가지 정형화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던 외설적인 비밀의 음표였을까. 비밀스럽게도 죽어버린 것 처럼 두개의 음표는 어느샌가 호흡마저 거두고 있었다.


 


금기와도 같은 손놀림에 그녀는 조금씩 그의 손 끝에 이끌려 멀어져만 갔다. 나락과 추락… 어쩌면 어울릴법도한 두 가지의 단어는 마치 한 잔의 브루고뉴처럼 관능적이게도 연주되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그 날의 공중 정원은 그렇게 열 여섯번째의 카드와도 같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 시뮬라크르. 그것은 비단, 순간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던 두 남녀를 말하고 싶었던 단어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조금은 더 가깝고 조금은 더 순수한 도나텔로의 조각처럼 완벽하게 정제된 그것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락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한도 끝도 없는 지하로 날아가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그는 「과연 추락의 미학이구나―」라며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조금씩, 그리고 점점 죽음의 그림자에 덮혀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그녀의 아름다움과도 너무나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는 이것들을 죽을때까지 잊지 않게끔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죽은 뒤의 미래건, 죽기전의 과거건 그녀는 항상 아름다워지고 싶어했으니까 말이다. 지금 하는 행동은 그 어떤 행동보다 그녀를 위한 길이고 어쩌면 이것이 그녀에게있어선 가장 로멘틱한 사랑의 프로포즈이니까 말이다.


 


큰 비가 쏟아져 내린 후의 진한 커피는 평소보다는 조금 더 달콤하다, 단순히 사랑스럽다거나 값비싼 금액을 지불한 뒤에 맛보는 쓴 맛은 아니지만은 그런 것들과는 다른 의미로 기존의 모습과 연계했을때 한 차원 더 얕은 맛을 느껴낼 수 있었다. 스스로도 확실히는 정의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나는 이런 것을 좋아했고 즐겼다. 썩 부유한 집안은 아니였기에 귀족스러운 푸른 정원이나 지금 당장이라도 물방울이 떨어질듯한 우거진 관목은 없었으나 몸 하나 기댈만한 베란다가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난 그것에 만족하곤 했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였으나 비가 오는 날이면 바깥의 세상을 바라봤고, 비가 그치는 날이면 지금처럼 아이들은 입에도 못댈 만큼 쓴맛의 블랙을 억지로 마시고 있었다. 물론 몇퍼센트 안되는 천재들처럼 스스로 깨달아서 커피를 시작한 것은 아니였다. 그건 아주 우연하고도 평온한 어떤 의미로는 운명적인 시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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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주세요.」


깔끔한 외모에 잔뜩 젖은 교복을 입은 학생의 첫 마디였다, 대개 이런 곳이 다 그러했겠지만 학생에게있어선 제법 부담이 가는 가격이라는 점에서 테이크 아웃 커피를 사러오는 학생은 보기 드물었다. 몇명 없으니까 희귀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신경이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쪼그려앉아 읽고 있던 손바닥만한 팜플릿을 휴지통에 버리고는 주문을 받았다.


 


「에스프레소요?」


조금 놀랐다. 대개 이런 것을 주문하는 손님은 몇 없으니까, 아니 순전히 커피 원액이나 다름 없는 하나도 맛 없는 커피를 한낱 고등학생이 마시려한다는 것 자체로 충분히 놀랐다. 어차피는 단맛으로 마시는 녀석들이 전부였고 적어도 내가 여기서 받은 주문 중에는 에스프레소는 처음이였으니까 말이다. 'first' 그리고 'unique' 늘 그렇듯, 두 글자는 항상 여자를 설레게 한다. 몇 손님없는 커피 전문점에서 가위바위보에 져놓고 더군다나 카운터까지 비우고 어디론가 잠깐 없어져버린 파트너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에스프레소는 미묘하게 괴롭다. 순수한 커피의 그 자체, 에스프레소는 순수하고 솔직하다. 그리고 그 만큼 쓰다. 마시기 괴로울 만큼 말이다. 이건 진실과 공통점이 많다. 진실보다 더 듣기 싫은 말은 없다. 그렇기에 나는 달콤한 커피를 즐겼다. 우유나 설탕으로 쓴 맛을 감춘다는 점에서 달콤한 커피는 나와도 같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진실말이다. 늘 그렇듯 그건 매력적이다, 아마도 카사노바는 달콤한 커피를 처녀의 순결처럼 느낄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히 그것을 몰락시킬 것이다. 승리감에 도취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건 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한낱 시뮬레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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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할만한 내용은 아니지만은 본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하루하루 느긋하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그날의 누나는 다음날 이후로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설탕이 가득 들어간 에스프레소와 같았다, 그녀가 퇴근하길 기다렸다. 나는 비가 오고 있던 바로 그 날… 그녀의 가녀리고도 하얀 목을 두 손으로 철저하게 유린했다. 살인은 약탈이다, 생명을 거두는 빼앗아버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 더 잔인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약탈이다. 그쯤은 알고 있었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할수 없는 해서는 안될 것은 매력적이다.


 


그냥 순수하게 빼앗아버리고 싶었다. 보잘 것 없고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은 제 3자의 눈, 혹자는 그것을 매너리즘이라고 정의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자살의 원인은 매너리즘이다. 할 것이 없으니까 존재가치를 잃었으니까


본능적으로 사라져주는거다, 친구의 생일이였지만 깜빡하고 생일선물을 주는 것을 잊었다던가 그 친구와 별로 친하지않다면 슬그머니 일찍 집으로 가도록 하는 정도의 예의말이다. 이미 그런 것들은 인간이 6억마리의 정자일 시절부터 학습되어있는 기초적인 예의이다. 아무튼, 이유는 지루했으니까 죽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