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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단편]죽이다

2008.02.12 18:28

과자 조회 수:666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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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다 - '죽다'의 사동형]


 검은색 도화지 같은 하늘. 별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온통 암흑뿐이다. 인류가 이룩한 혁명이라며 떠들어대는 과학의 대가가 이것인가. 붓에 샛노란 물감을 묻혀 찍으면 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인류가 자랑하는 과학은 점 하나 찍어주지 못한단 말인가. 눈앞의 도화지에 별을 그려내는 것은 이토록 쉬운데. 아름답구나 아름다워.


 14인치의 TV 안에서는 형형색색의 ‘물체’들이 움직이고 있다. 브라운관 속의 꼭두각시처럼 정해진 각본에 따라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실에 묶여 조종당하는 게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을 쩍 벌리고 웃어댄다. 웃는다. 웃는다. 하지만 기쁘지가 않다.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다.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다. 저들은 인간인가. 저들은 사람인가. 저들은 살아있는가. 알 수 없다. 알고 싶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생명’은 없는가.


 소파에서 일어난다. 검은색 천연 가죽으로 만들어진 소파. 가죽 냄새가 진하게 풍겨온다. 정상이 아니다. 여기저기 찢겨서 스프링이 삐져나와 있다. 무언가 불만에 가득 찬 것처럼 끼익거린다. 끼익끼익.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조용한 거실에 소리가 채워진다. 채워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었던 방 안에 무언가 채워지고 있다. 아아, 이게 아니다. 이건 아니다. 어울리지 않는 소리. 공기와 융화되지 못하는 부자연스러움. 부조화. 비정상.


 자리를 옮긴다. 부엌이다. 오랫동안 치우지 않았기 때문에 설거지할 접시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파리가 날린다. 접시에 붙어 있는 찌꺼기에 달라붙는다. 음식과 찌꺼기의 차이는 무엇인가. 먹고 남은 찌꺼기. 남은 음식. 결국 음식이다. 찌꺼기는 음식이다. 파리와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먹이에 달려드는 파리. 맛을 찾아 헤매는 인간. 결국 같다. 인간은 파리다.


 부엌 한 쪽에 커다란 냉동고가 자리 잡고 있다. 차가운 색이다. 손잡이를 잡는다. 냉동고의 차가움이 느껴진다. 손끝의 감각점을 통해 차가움이 전해져 온다. 그럼 나는 인간인가. 모르겠다. 모르겠다. 냉동고의 문을 연다. 그와 동시에 부엌 전체에 역한 냄새가 풍겨온다. 코를 막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역한 냄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강한 냄새다. 냉동고를 들여다본다. 온통 빨간색이다. 눈이 아프다. 불꽃이 날아와 눈을 찌를 것만 같다. 잠시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냉동고 안으로 시선을 돌린다. 피다. 새빨간 피가 냉동고 벽에 굳어있다. 냉동고 안쪽으로는 피가 묻어 있는 살점들이 보인다. 보기 좋도록 얇게 썰린 게 아니라 톱으로 썰린 듯이 투박하게 찢겨져 있다. 이건 무엇인가. 인간이다. 아니, 인간이었던 것. 인간이었어야 했던 것.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형태가 없다. 정리를 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이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시 모르겠다.


 계란이 놓여 있어야 할 구멍에는 원래의 주인이 없다. 동그란 것. 흰색으로 둘러싸인 검은색. 그 뒤의 빨강. 눈알이다. 역시 인간의 것이었어야 할 눈. 지금은 한낱 질퍽한 구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이거다. 이게 죽음이다. 생명을 잃고 하나의 ‘물체’로 환원되는 것. 간단하네. 인간의 죽음이라는 건 별 거 아니군. 칼로 찌른다. 찌르고 또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찌른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피가 흘러나온다. 칼이 들어갔던 틈으로 피가 흘러나온다. 피가 흘러 강을 이룬다. 이기적인 것들. 내가 고생해서 파놓은 구멍을 이용하다니. 기분이 나쁘다. 어디 한 번 당해봐라. 살점에 새겨진 틈새로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손을 집어넣는다. 손목을 집어넣는다. 물컹물컹한 느낌. 내장이다. 창자를 잡아보고 소장을 잡아보고 대장을 잡아본다. 아아, 부드럽구나 부드러워. 감상은 여기까지. 이젠 복수의 시간이다. 몸속으로 들어간 손의 방향을 틀어 몸속에 걸친다. 그리고 동시에 있는 힘껏 당겨버린다. 틈새가 벌어진다. 간격이 가까운 틈들은 힘에 못 이겨 찢겨진다. 피가 쏟아진다. 찢어진 살들 사이로 피가 쏟아진다. 피가 쏟아져 폭포를 이룬다. 손을 들어 본다. 피에 물들어 새빨갛다. 세상은 빨간색이구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온통 까맣다. 별은 보이지 않는다. 끝없는 어둠만이 가득 차 있다. 뭐야, 세상은 어둠인거야?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피의 강. 피의 폭포. 아아, 뭐야 역시 세상은 빨간색이잖아. 내가 맞아. 내가 맞는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지고 왔던 자루를 연다. 피의 망망대해 위에 떠있는 조각들을 집는다. 미지근하다. 따뜻했던 살들이 식어가고 있다. 차가운건 싫다. 빨리 넣자. 시간이 없다. 손이 바빠진다. 빨간 손으로 빨간 살들을 자루 속에 집어넣는다. 살들을 건져낸 뒤에 남은 것은 조금씩 출렁이는 피의 바다. 잠시 동안 피의 수면을 바라본다. 어둠 속이라서 그런지 빨간색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인상을 찌푸려 본다. 미간에 주름이 진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은 후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한다. 죽음의 완성이다.


 정신을 차린다. 눈앞에는 차가워진 살들이 보인다. 냉동고 안에 가득 차있는 살들. 깜빡 졸았나보다. 고개를 흔들고 다시 냉동고 안으로 시선을 돌린다. 위아래 모두 살이다. 배가 고파진다. 인간의 고기는 맛있을까? 아직 해본적은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다음에 한 번 시도해봐야겠군.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본 다음 냉동고 문을 닫는다.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켠다. 온 몸이 뻐근하다. 뼈에서 우드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가 좋다. 난 살아있다는 증거잖아. 킥킥. 냉동고를 지나쳐 부엌 안쪽으로 들어간다. 피가 달라붙어 있는 식탁위에 칼 한 자루와 군데군데 날이 빠진 톱이 놓여져 있다. 한참을 들여다 본 다음에 칼을 집어 든다. 칼에도 역시 피가 묻어있다. 칼을 품속에 집어넣고 현관 쪽으로 걸어간다. 신발장 옆의 못에 깨끗한 포대 자루들이 걸려있다. 오늘은 뭘로 할까. 현관 앞에서 오랫동안 고민을 한다. 아, 저게 좋겠군. 색이 맘에 들어. 살색에 가깝잖아? 못에 걸려있는 자루 하나를 빼낸다. 현관으로 나간다. 자동으로 불이 켜진다. 정육점에서나 볼 수 있는 빨간색 빛이 내리 쬔다. 손도 발도 얼굴도 빨간색으로 물든다. 역시 세상은 빨간색이야. 신발을 싣는다. 자물쇠를 연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다.


 자, 가자. 오늘도 죽이자.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인간은 나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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