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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단편]MonoDrama -

2008.01.30 01:11

여름거미 조회 수:617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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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o Drama -


 


 


 


─우리는 과연 무엇인가?
무의미한 삶을 택하고, 무의미한 죽음을 택하고, 무의미한 태어남을 택하는 우리는 대체 무엇인가?
녹슨 거대한 수레바퀴를 돌리고 양 손바닥의 혈흔을 바라보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에서 내리는 붉은 빗줄기에 부식되어가는 그 거대한 수레바퀴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자신의 과오와 비굴한 삶을 짊어 살아가면서도, 지극히 단순한 '죽음'이라는 절벽을 보고도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잿빛 하늘 아래를 걷는 우린,
─대체 어디까지가 자신인 것인가?


 


 


 


─영롱한 빛의 무언가가 세상을 투영시키는 자신의 몸뚱아리로 세계를 일그러뜨리고 있다. 대지를 향해 쇄도하던 그것은 곧 한 사람과 부딪히며 그 투명한 피로 물들게 만들고 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시원시원한 분위기, 그리고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은 찢겨져 나간 대지의 살점이 양 손바닥에 뭍은 것도 모른채 털썩─주저 앉은 채로 영롱한 무언가에 일그러진 허공너머의 검은 존재를 바라보고 있다.
탁한 밝음을 지닌 푸른 달은 검은 존재의 얼굴을 지워 그곳에 짙은 그림자와 두 개의 빛을 수 놓았다. 호박색의 그 빛은 창공에서 떨어지는 영롱한 무언가보다 더 맑은 색으로 검은 그림자 속에서 빛나고 있다.


 


「그대는 내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허공을 응시하던 검은 존재는 고개를 돌려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호박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동공의 크기를 더욱 더 줄여갔다.
어느새 검은 존재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창공으로부터 푸른색 섬광이 쏟아져 내렸다. 만물을 찢어내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일순 밝아지는 세계 속에서 검은 존재의 모습이 뚜렷히 보인다.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보여질 정도로 체구가 작고 얼굴에 상당히 어린티를 지니고 있다. 혈색이 없어 백색으로 보이는 피부, 그 색에 모순되는 검은색 정장이 세상을 투영시키는 무언가를 집어삼키고 있다. 그 안에는 헝클어진 붉은 넥타이가 섬뜻한 분위기를 풍긴다.
검은 존재는,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나는 내 존재 자체를 숨기고 있으니까 말야. 하지만 굳이 나의 존재 자체를 완벽하게 숨기는 것에도 어느 정도는 잘못이 있을 것이다. 허무맹랑한 희곡에서의 조연처럼, 알게 모르게 만물의 순리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공기처럼, 나의 존재성은 희미하면서도 강경하면 그 뿐인 것이니까.」


 


옷 매무새를 고치며 청년을 향해 느릿느릿─하면서도 무거운 긴장감을 동반한채 다가간다. 검은 존재의 왼쪽 손에 들린 은빛의 무언가는 붉은 무언가와 창공에서 떨어지는 수 많은 요정들에 의해 본래의 빛을 잃어버린 것이 보인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를 찌르거나 베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은 아니지. 하지만, 인간의 지식이란, 모든 사물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으로 만들어내게 된다. 단순히 과일을 먹기 좋게 자르기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이것도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어버린 것이야.」


 


검은 존재는 은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져있는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창공의 요정들로 인해 녹아내린 붉음은 세상을 반쯤 투영시키는 액체로 변하여 검은 존재의 흰색 장갑을 물들이고 있다.
─청년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허공으로 옅은 신음을 내고 있다.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투명한 무언가는 그 소리마저 짓눌러버리며 대지를 향해 하염없이 투명한 육신을 터뜨리고 있다.
청년을 향해 시선을 거둔 검은 존재는,


 


「그렇다면─」


 


냉소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의구심이 가득찬 어조로 붉음이 서린 말을 하였다.


 


 


 


─밝은 햇빛이 커텐을 물들이는 환한 방…. 흰색과 연두색을 위 아래 절반으로 도장해놓은 방에는 소녀가 앉아있는 침대와 흰색 수납장, 그리고 의자 하나 뿐이다.
그 방 안에 한 소녀가 창 밖을 바라보며 침대 위에 앉아있다.
옅은 하늘색의 환자복을 입은 소녀는 10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앳된 외모 때문에 얼핏보면 10대 중반으로 까지 보여질 동안이다.
방 안은 옅은 바람과 바깥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만 들릴 뿐, 소녀는 입을 다문채 정적에 심취해있는듯 했다.
나무 한 그루의 갈색 낙엽의 수를 세며 우두커니 앉아 있던 소녀는,


 


「──아, 오셨어요?」


 


삐걱─거리며 열리는 방 문 소리를 듣자 밝은 표정으로 그 쪽을 바라봤다.
힘 없는 걸음으로 들어온 40대 후반의 두 남녀가 소녀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소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은,


 


「그래, 몸은 좀 어떠니?」


 


침대 앞의 의자에 앉으며 안부를 물었다.
소녀는 빙긋─웃으며 「많이 괜찮아졌어요.」라고 대답했지만, 그에 반해, 희미하게 보이는 양 팔의 경련은 그 모순을 확실히 자각시켜놓았다.
일절 내색하지 않는 소녀를 바라보며 소녀의 어머니는 깊은 한 숨을 쉬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항상 조심하는거 잊지말고.」


 


소녀는 여전히 미소 지으며 「예.」라고 대답했다.
─여전히 소녀의 어머니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교통사고 후엔 후유증이 일어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구나.」


 


걱정스런 눈빛으로 소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저도 이젠 다 컸는 걸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소녀가 뺨을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손을 꼭─쥐며 말하였다. 그제서야 약간이나마 안심이 되는 듯,
소녀의 어머니는 미소 지었다.
─그 사이 소녀의 아버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예, 사장님.──예 곧 가겠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소녀는 안타까운 듯한 톤으로 말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은 미소 지은채 였다. 그리고는「날씨도 추운데, 몸 좀 녹이고 가세요.」라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구나, 회사에 일손이 모자라서 이만 가봐야한단다.」


 


소녀의 아버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흔들며,


 


「으응, 아니에요. 제 걱정 때문에 많이 피곤하실테니, 몸조심하세요.」


 


오히려 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를 응원하였다. 소녀의 아버지는 「그러마.」라고 대답하여 따라 미소 지었고, 소녀의 어머니는 소녀에게 몸조심해라, 밥 잘먹어라, 무슨 일 있으면 불러라 등을 말하고서도 못내 아쉬운 듯 소녀를 한 번 꼭─껴안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소녀는 끝내 방을 나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 잔뜩─들뜬 소녀는 얼마있지 않아 그 기분을 가라앉히며 다시 창 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적이 일었던 때 세었던 다섯 장의 나뭇잎이 어느새 다 떨어지고 한 장만 위태롭게 흔들리는 모습이 보인다. 소녀는 왠지 아쉬워하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애인인지, 남매인지 모를 사이의 여자가 남자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다정한 모습, 병원에서 나가는 남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가족들, 그리고 몇 분 후에는 소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소녀는 그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였다. 그런데 그 시선을 알아챈건지, 어머니는 소녀의 병실을 돌아본다. 소녀는 보이지도 않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시야 속의 작은 어머니도 작은 동작으로 손을 흔들고는 병원 밖으로 나갔다. 부모님이 완전히 모습에서 사라지는걸 보고난 뒤에야 소녀는 흰 이불을 턱까지 덮어쓰며 침대에 누웠다.
─몇 분이 지나도 소녀는 잠이 안 와서 수어번을 침대 위에서 뒤척였다. 그리고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뒤척이는 그 행동이 몇 십분간 계속되자, 소녀는 베시시─한 얼굴로 일어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 옷걸이에 걸린 베이지색 가디건을 환자복 위에 주섬주섬─껴입고는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던 마지막 나뭇잎은 바람이 휙─하며 심술을 부리자 팔랑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밖으로 나온 소녀는 방금전 병실에서 봤던 풍경의 사람 중 한명이 되어 병원내 분수대로 걸어갔다.
그 사이 위에서 자신이 봤던 모습을 직접 실감하였다.
그 날따라 응급환자가 없어서 병원내 공원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근심이 가득찬 목소리만 들릴 뿐, 녹색 빛을 발하는 사이렌 소리와 의사들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하면서도 평온한 아침의 기분을 만끽하며 걷던 소녀는 어느새 분수대 근처까지 걸어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분수대는 제 일을 못하고 있었지만, 그 앞에서 옹기종기─모여있는 비둘기들 덕에 최소한 휑─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 때 마침,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가면서 소녀의 머리카락을 흔들고는 지나갔다. 그 것을 신호삼아, 푸드득─거리며 뿌연 하늘로 날아올라간 비둘기들은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으며 먼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그 모습을 눈으로 쫓던 소녀는 헝클어진 옆머리를 귀 뒤로 쓸며 다시 분수대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곳에는───


 


 


 


─약간의 채광과 약간의 암흑이 조화를 이루는, 흡사 낡은 형광등 하나를 켜 놓은 듯한 밝기의 약간 좁은 방이다.
창문을 가운데 끼고 양쪽 수납장에는 일반 대학생들조차 읽기 어려운 철학 소설들이 즐비했고, 개중에는 『신』이나 『악마』와 같은 신학 관련 도서도 간간히 보였다.
창문을 등지고 탁자 앞,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흰색 와이셔츠 위에 상아색 조끼를 입은 그는 외모에서부터 그가 60대 후반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연륜이 느껴진다.
마른 체형에 꽤 높은 도수의 안경을 끼고 있는 그는 여느 대학교의 늙은 교수의 이미지와도 전혀 이질감 없이 느껴질 법 했다.
그의 반대편에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20대 중반, 혹은 그 아래로 보이는 그는 시원시원한 외모와는 달리 초조함에 얼굴을 잔뜩─굳힌채 상념에 빠진 듯 하였다.


 


「도미닉 윌슨씨, 혹시 신학에 대해 관심 있으십니까?」


 


탁자 위의 두꺼운 도서들을 한 쪽으로 치우며 60대 노인이 물었다. '늙은 교수의 이미지'와는 달리 낮은 목소리와 부드러운 어조였다.


 


「깊이 파고들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청년은 노인의 질문에 당황하는 기색은 보였지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였다. 그렇다고 건방지다거나 냉소하지 않은 검소한 말투였다.
탁자 위의 책들을 모두 치운 노인은,


 


「그럼 혹시, '악마'라는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발 밑에 떨어진 마지막 책 한 권을 집으려 허리를 굽히며 말하였다.
노인의 두번째 질문에 다시 난감해진 청년은 약간 망설이면서도, 곧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노인은 마지막 한 권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한쪽 손으로 턱을 궤며,


 


「이론적으로 악마라는 존재는 사후의 세계에 내려온 인간들에게 형벌을 내리는 존재, 혹은 희대의 살인마를 빗대어 말할 정도로 극악무도한 존재로 두각되어있습니다. 제가 살던 미국에서는 다소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만, 이 곳 영국에서의 악마라는 존재는 부패, 약탈등의 부정적인 측면, 혹은 후자에서 더 깊이 들어가, 살인, 테러등의 상징적 존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약간 심각한 어조로 말끝을 흐리며 말하였다. 청년은 노인을 주시하며 마지막 말을 되물었다.
태양을 가로막는 창공의 구름에 의해 밝음과 어두움이 균형을 맞추던 것이 일순간에 기울어졌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은 완전히 어두워져 희미한 햇빛만이 그 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인은,


 


「만약에 그런 존재가 현계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그 존재를 보게 될까요?」


 


─다소 어둠이 깔린, 그리고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때 마침,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가면서 소녀의 머리카락을 흔들고는 지나갔다. 그 것을 신호삼아, 푸드득─거리며 뿌연 하늘로 날아올라간 비둘기들은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으며 먼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그 모습을 눈으로 쫓던 소녀는 헝클어진 옆머리를 귀 뒤로 쓸며 다시 분수대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곳에는 한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느릿느릿─하고 걸어오고 있었다. 같은 또래로 보이는 10대 소녀…. 옅은 금빛의 긴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옷차림까지…. 모든 것이 소녀와 일절 다를게 없는 '소녀'였다.
여전히 '소녀'는 소녀를 향해 느린 박자로 걷고 있다.
천천히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기분 나쁜 웃음 소리, 일체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아닌 기이한 형태,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존재….
이미 '소녀'는 상식 속의 환각을 벗어나 제 2의 소녀로써 소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던 소녀는 동공을 줄이며 '소녀'를 눈동자 속에 담아내고 있었다. 몸은 흡사 마비된듯, 방금전까지 있던 양 팔의 미미한 경련조차 없었고 입술이 떨리는 것 조차 없었다.
─주위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새들의 지저귐도 없는 흡사, 강제적인 입막음으로 이루어진 부자연스러운 침묵이었다.
어느새 소녀와 가까워진 '소녀'는 입을 열었다.


 


「너는 나, 나는 너…. 너와 난 다를게 없는 하나야….」


 


희미한 미소를 짓는 '소녀'는 소녀를 향해 손을 뻗는다. 창백한 피부의 팔은 천천히 소녀의 얼굴로 다가간다.
소녀는 동공 속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자신의 손을 아무 반항없이 묵시만 하고 있다.
그 사이, 어느새 '소녀'의 손은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쥔 주먹을 차츰 펴기 시작했다. 흡사, 이름 모를 백색 꽃의 잎이 열리듯, 서서히 그 안의 모습을 드러낸 손바닥 안에는 상처와도 같은 선이 그어져 있다.
극히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선이 아닌, 그 이상함이 뚜렷한 선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상처가 벌어지 듯이 위 아래로 점점 그 폭을 넓혀가던 그 곳에선,
──붉은 눈동자가 눈을 떴다.


 


─침대 위의 소녀가 눈을 뜨며 일어났다. 사방은 온통 어두운 세계였다.
흰 시트의 침대도, 하얗게 도장한 벽도, 바닥도, 모두 남색빛에 물들어 묘한 광경을 자아냈다.
소녀의 이마에는 식은 땀이 맺혀있다. 그 중 하나가 새하얀 피부를 따라 턱 끝으로 모아졌다.
남색 빛으로 물든 시트 위에 소녀의 식은 땀이 하나씩 떨어지면서 색을 더 짙게 만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소녀의 시야 속 창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공원의 가로등 몇개가 의자 위를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소녀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꿈이었구나.」


 


짧막한 한마디로 조용한 정적을 깨놓았다.


 


 


 


─아직 태고의 빛이 세계를 밝히기 전의 연푸른색의 세상 속 사람들은 수많은 것들과 마주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신은 한 개의 정도(正道)와 천 개의 사도(死道)를 내려주었다.
병 속에 빠진 개미의 머리 위로 술을 붓듯, '유희'라는 것은 그들의 숨을 조이고, 어리석은 그들은 자신의 이마에 금못을 박아놓고도 시야 밖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붉은 피를 보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다.
신 조차 고개를 돌린 그들은 술잔 위로 퍼지는 자신의 피를 마시며 냉소와, 위선을 가르키는 서로의 모순된 손가락을 베어내며, 양 손과 양 발이 타들어가는 고통 조차 모른채 목에 그어진 붉은 선혈과 그 붉은 눈물로 몸을 적시면서도, 자신을 천사라 하면서도, 끝끝내 죽음 앞에 들어서고나서야 자신이 악마였다는 것을 자각하는 '후회'와 '고해'를 되풀이하며 구원을 위해 꾸며낸 투명한 눈물을 흘린다.
─그런 모순된 인파 속에서 소녀의 아버지가 보인다. 깔끔한 정장차림에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과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표정까지 일반적인 직장인과 별반 차이가 없다.
─똑같은 복장과, 똑같은 걸음과, 똑같은 표정을 지은 분주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일 뿐인 그를 신호등 위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는 새가 보인다. 검은 부리와 검은 깃털 색을 지닌 그 새는 고개를 좌우로 틀면서도 눈동자는 그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검은 색을 띈 동공 속에 담아져 있는 것은 오로지 소녀의 아버지 뿐, 길거리의 다른 이들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비춰지지 않았다.
─검은 새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갔다.


 


 


 


창문 밖으로 푸른 하늘이 보이는 오후, 소녀는 한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쌀쌀한 바람과는 달리 따뜻한 햇살 때문에 하얀 커텐은 연노란빛으로 물들었다.
푸근한 이미지의 외모와 뚱뚱한 체형은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로 보인다. 하지만 흰 가운을 입어서인지 그런 이미지를 확실히 깨놓았다. 의사는 옆에 있던 간호사가 건네준 진단서를 넘기며 자상한 미소로,


 


「아리나씨, 몸은 많이 괜찮아지셨죠?」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나즈막하게 「예.」라고 대답하며 따라 미소지었다. 의사는 한 쪽 손으로 소녀의 팔과 다리를 가볍게 쥐면서 상태를 보았다. 일전보단 경련이 많이 줄어, 왼쪽 팔이 간간히 떨리는 것을 제외하곤 제법 완치된 듯하다.


 


「이제 퇴원하셔도 괜찮습니다. 뭐, 간혹 왼쪽 팔에 미미한 경련이 일어날테지만, 일반적인 생활을 하는데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예, 정말 감사합니다.」


 


소녀는 자세를 가누면서 답하였다. 의사는 주의사항을 말해주고는 간호사와 함께 병실을 나갔다. 커텐 사이로 햇빛이 소녀의 금빛을 비추며 그림자를 희롱하듯 비춰지고 있다.
옅은 미소와 함께 그 빛은 소녀를 밝게 비추었다.


 


─짙은 남색 하늘과 백색 가로등이 어울리지 않는 거리 위,
그 곳도 갈색 낙엽이 콘크리트 타일 위를 수북히 쌓을 만큼 완연한 가을의 모습을 보인다.
한 달전과는 달리 이젠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코트를 난폭하게 흔들며 지나간다.
낙엽들이 이리저리─뒹굴며 거리 위에서 춤추고 있다. 바람이 멈추자 맥이 빠진 듯 낙엽들은 잠자코 다음 바람을 기다리며 다시 무도장 위를 갈색으로 수놓았다.
─많지도, 그렇다고 극히 적은 수도 아닌 인파 속에서 소녀가 걷고 있다.
옅은 금빛 머리카락을 살포시 덮는 빵모자와 베이지색 코트, 청바지를 입고 어깨에 작은 가방을 멘 소녀의 옷차림새는 병원 안에서의 환자복과는 확연히 다른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어둠이 베어있던 표정은 환희로 충만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소녀의 기분처럼 흘러가듯, 같은 길을 걷는 다른 이들의 표정도 밝게만 느껴진다.
─빵과 과일이 담긴 봉투를 안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소녀는 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길가에 도착했다. 왼쪽엔 연인과 노인 한 분이 벤츠에 앉아 있는 작은 공원과 모자를 쓴 아이가 자동 판매기를 누르는 모습이 있었고, 그 오른쪽으론 꽤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 한 그루와 비좁고 지저분한 골목길들이 있었다. 소녀는 그 풍경을 차례로 바라보며 길을 걷다 어느 한 집의 문을 두드렸다.


 


「엄마, 저 왔어요.─엄마?」


 


여러번 두드려봐도 반응이 없자 소녀는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철커덕─하는 둔탁한 소리와 작은 흔들림만 있을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쇠를 찾기 위해 가방의 지퍼로 손이 가던 소녀의 머리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일정한 템포로 떨어지던 물방울은 어느새 빠른 템포의 소나기가 되어 쏟아졌다. 당황한 소녀는 허겁지겁 가방을 열어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빠, 집에 계세요?」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소녀는 머리와 코트의 물기를 털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거실에 불도 안켜진 것을 본 소녀는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침묵을 실감하며 거실의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틱틱─하며 맑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형광등은 조용히 어둠 속에 침채 되있었다. 어리둥절한 소녀는 창문으로 빛이 새어들어오는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서 다시 한번 소녀가 조심스레 불렀지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더듬더듬─거리며 집 안을 방황하던 소녀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매우 어두운 밝기 속에서 계단의 삐걱─거리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약간 긴장하며 천천히 이 층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맞은 편에 보이는 창문에는 어느새 굵은 빗줄기들이 창문에 몸을 부딫혀 무색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창문 아래로 누군가가 보였다. 거리의 가로등 불빛조차 2층이라 들어오지 못하는 그 곳에선 전신이 검게만 보일 뿐이었지만, 그가 소녀와 눈이 마주친 것만은 확실하였다. 소녀는 얼굴을 보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며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발 끝에서 물 밟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아래로 떨군 소녀는 질척한 무언가가 발걸음에 닿은 걸 느꼈다.
검으면서도 아주 희미하게 붉은색을 띄는 액체는 어디론가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을 천천히 눈으로 쫓자, 그 붉은색 줄은 창문 아래의 '누군가'의 밑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시 한번 소녀와 시선이 마주친 '누군가'는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손으로 보이는 곳에서 은색 무언가가 희미하게 반짝였고, 다리로 보이는 곳은 거동이 불편한거 같으면서도 곧 잘 균형을 잡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택의 대문과 검은 차를 사이에 두고 20대 청년과 60대 노인이 대화를 하고 있다.
노인의 어깨너머로 고딕풍의 조형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저택이 보이고 그 뒤로 남색빛에 물든 녹색 숲이 보였다. 정원은 비교적 좁은 느낌이지만, 멋드러진 저택으로 하여금 웅장함이 가득 베어있었다.
청년은 다시 한번 그 저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바쁘실텐데, 오랫동안 붙잡아둬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런 진지한 상담을 하러 온 손님이 드문지라,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 할 정도입니다.」


 


노인은 청년을 향해 미소를 띄며 정중히 인사를 하였고, 청년도 뒤따라 노인에게 인사를 하였다.
─허리를 굽힌 청년의 목덜미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차가운 느낌에 고개를 든 청년의 얼굴 위로 다시 한번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한바탕 떨어질거 같군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비는─」


 


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청년에게 노인이 붙잡듯 중얼거렸다. 청년은 그 의도를 알아채고는 의아해하며 노인을 바라봤다.


 


「비는 수 많은 것을 잠재우면서도, 남 몰래 수 많은 것을 불러 일으킨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신이라는 존재도 그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노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선을 사랑하면서 굳이 악마라는 존재를 만든 이유는 대체 뭘까요?」


 


노인을 주시하던 청년은 동공의 크기를 약간 줄이며 선회를 멈추었다. 말을 끝낸 노인은 청년의 등을 밀어내며,


 


「이거 참, 너무 오랜만의 손님이라, 자꾸 붙잡게 되는군요. 이 늙은이의 고리타분한 지식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신학에 관한 거라면 언제든 물으러 오십시요.」


 


긴 목례를 하였다. 청년은 노인의 알 수 없는 기세에 밀려 차에 타고는 시동을 걸어 짧은 목례와 함께 대문 안의 웅장한 풍경 옆을 지나가며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운전을 하면서도 청년은 상념에 빠진 듯 멍한 눈으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그림 위로 물감을 흘리는 것 같은 차창 밖의 풍경은 빠르게 지나가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뚜렷하게 나타내며 현실적인 그 이미지를 자각시켰다.
재미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차를 몰던 청년은,


 


「…만약에 그 신이 변덕쟁이라면 엄청 역겨운 녀석이겠군.」


 


냉소적인 톤으로 노인의 말의 대답을 매듭지었다.
차가운 느낌의 빗방울들은 짙은 색으로 세상을 적셔가며 울적한 기분을 자아냈다.


 


 


 


──다시 한번 소녀와 시선이 마주친 '누군가'는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손으로 보이는 곳에서 은색 무언가가 희미하게 반짝였고, 다리로 보이는 곳은 거동이 불편한거 같으면서도 곧 잘 균형을 잡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에 푸른색 빛이 번쩍─였고 이어서 웅장한 천둥소리가 집을 뒤흔들듯이 들려왔다. 청광에 의해 창문 앞의 누군가의 얼굴이 비쳐졌지만, 극히 적은 양의 밝기라 잘 보이진 않았다. 허나, 다음 청광이 번쩍─였을 땐 그 '누군가'의 얼굴이 뚜렷하게 비쳐졌다.
금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소녀와 닮은 얼굴의 남자였다.


 


「…아빠?」


 


소녀의 동공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며 그 시선이 붉은 줄이 이어진 곳으로 향하였다. 다시 한번 청광이 번쩍─이며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비추었다.
금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소녀와 닮은 얼굴의 여자였다.
흰색 가디건은 붉은 무언가로 인해 핏빛을 띄고 있었다. 흰자위 안에 그 붉은 무언가가 떨어져 흰색을 물들이고 있었다.
팔과 다리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난도질을 당한 상처로 도배 되어있었고, 그 눈에선 고통을 토해내는 붉은 눈물들이 바닥을 흥건히 적셔놓았다. 붉은 눈물 위로는 잔인하게 찢겨져 나간 손가락 마디와 반쯤 베어진 팔의 손목, 수 많은 상처 위로 구멍이 뚫려있는 다리도 보인다.
─소녀는 잔혹하게 찢겨져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작은 동공의 크기를 더욱 줄였다. 직시하고 있는 모순으로 가장된 진실을 바라보는 소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며 경직되었다.
'살인마'는 히죽─웃으며 저돌적인 걸음으로 소녀를 향해 걸어갔다. 붉은 형체의 무언가로 만취 되어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살인마'를 바라보던 소녀는 은색 무언가가 반짝─이자 정신이 들어 재빠르게 계단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느새 소녀의 등 뒤로 다가온 '살인마'는 소녀의 몸을 거칠게 끌어안았고, 몸을 틀며 필사적으로 반항하자 창문쪽으로 거세게 밀어 넘어뜨렸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시야 속의 붉은 존재를 바라보던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격노와 공포가 베인 그 소리에 미간을 찌푸린 '살인마'가 소녀의 팔과 다리를 힘으로 제압한 뒤 손에 쥐고 있던 은색 무언가를 들자 청광은 붉은 액체가 뭍은 나이프의 모습을 비추었다.
살기 시린 미소로 소녀를 노려보던 '살인마'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그 것을 소녀의 이마를 향해 허공을 갈라내었다.
─붉은 무언가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마로부터 쏟아지던 무언가가 소녀의 얼굴을 적셨다. 붉은 공기를 갈라 날카로움을 자아냈던 은빛 나이프는 일전의 살기를 숨긴채 소녀의 이마 위에서 멈추었다.
잠시 경직되있던 소녀가 기겁을 하며 밀어내자 '살인마'와 함께 나이프는 힘 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숨을 몰아쉬던 소녀는 이마가 깨끗이 뚫려 붉은 무언가를 뿜어내는 '살인마'를 바라보다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 곳에서 누군가가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와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옅은 금빛 머리카락, 그리고 똑같은 푸른 눈동자를 지닌 '소녀'였다.
한 쪽 손에 장갑을 낀채 쥐고 있던 검은색 권총에는 기름내가 섞인 화약 냄새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손을 한참동안 주시하던 소녀가 이상한 감촉에 자신의 손을 보자 '소녀'가 끼고 있는 똑같은 장갑과, 똑같은 권총을 쥐고 있었다.
소녀는 경직된 표정으로 기겁을 하며 쥐고 있던 권총을 떨어뜨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눕혀진 권총을 바라보는 소녀의 코트에는 '소녀'와 똑같은 붉은 얼룩이 뭍어 있었다. '소녀'는 짓궃을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무엇을 두려워하는거야? 걸레처럼 찢겨진 어머니? 살인마로 돌변한 아버지? 이면의 절망감?」


 


소녀를 향해 물었다. 그 사이에도 놀란채 굳은 표정의 소녀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은 벙긋─거리거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눈을 돌리지 말고 나를 봐. 너와 나는 같은 존재야. 그러니까──」


 


'소녀'는 그 모습을 무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빗방울이 창문을 시끄럽게 두드리며 세상을 투영시키는 피를 흘려보내고 있다.
대지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그 투명한 피들은 견고한 방패를 녹슬게 만들고 있다.
소녀가 아무 말 없이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소녀'도 아무 말 없이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소녀'는,


 


「날 믿어.」


 


소녀에게 가녀린 손을 건네었다.


 


 


 


─한적한 오후의 병원…. 보통 이맘 때 쯤이면 사람들이 꽤나 북적일거 같거늘, 무슨 연유인지 흰색 가운을 입은 의사들과 연두색 계통의 간호복을 입은 간호사들만이 간간히 지나다녔다.
일이 없는 몇몇 의사들은 자동 판매기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 중에서 안경을 낀 의사가,


 


「─도미닉 윌슨씨, 그 환자 요즘 어때요?」


 


농담이 섞인 어투로 20대 의사에게 물었다.
시원시원한 이미지에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청년은 가운을 입지 않는 이상, 유명 연예인으로 보일 법한 외모의 미남이었다. 안경을 낀 의사의 물음에 그 청년은,


 


「아리나 로벤슨씨 말인가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되물었다. 안경 낀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청년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참 희안한 일이에요. 분명 검사 결과로는 매우 심각하게 나타났지만, 병원내에서의 생활을 관찰해보면 일반적인 사람들하고 별반 차이 없을 정도로 매우 양호합니다.」
「으음─」


 


안경 낀 의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관심 있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반응은 영 재미없어 보였다.
그래도 청년은,


 


「어찌보면 이런게 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솔직히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내심 두렵습니다. 저러다 갑자기 발작이나 발광을 일으키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참 난감하거든요.」


 


계속 말을 이어가면서도 커피를 마셨다. 어느새 컵 안의 내용물은 절반의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청년을 바라보던 안경 낀 의사는 키득─거리며,


 


「기왕에 맡게 된거, 남는 기간 동안 잘 보살펴주세요. 그게 의사의 일 아니겠습니까?」


 


쓰레기 통에 다 마신 종이컵을 던졌다. 그리고 호출을 받고 병실로 향하였다.
청년은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며 나른한 오후의 병원 분위기에 한껏 빠져있었다. 어느새 웅성웅성─거리던 병원 안은 싸늘할 만큼 조용해졌다.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다 마신 종이컵을 쓰레기 통에 던졌다.
─모서리에 맞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이 안오는 듯, 몸을 뒤척이는 사람이 보인다.
옅은 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와 10대 중반 정도로 보일 동안을 지닌 소녀였다. 병실 침대 앞에는 아리나 로벤슨이라는 이름이 적혀있다.
한참을 시름시름─하면서 수십번은 뒤척였을 소녀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초점없는 시선으로 창문을 바라봤다.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똑같은 풍경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바람 소리 하나 없는 적막하고도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턱을 타고 내려온 무언가가 소녀의 이불을 짙게 물들였다.


 


「무서워….」


 


금방이라도 소리내며 울 것 같은 슬픈 표정으로 감상에 심취해있는 소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마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듯, 그 톤은 매우 낮았다.


 


「이제 더 이상 내겐 남은 것이 없어….」


 


소녀는 머리를 움켜잡으며 짙은 눈물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소녀의 옷도 짙은 색을 띄어가고 있다.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는 소녀는,


 


「누가…. 누가, 나를 구해줘….」


 


아무도 없는 공허한 그 곳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시울이 붉어진 소녀의 앞에 누군가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와 똑같은 모습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소녀'로, 실감나는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그 사이 소녀는 '소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러자 '소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가슴팎의 소녀를 감싸안으며,


 


「나는 너, 너는 나…. 난 널 배신하지 않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녀의 귓가에 말하였다. 소녀가 눈물을 멈추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달빛과 하늘의 흑빛이 조화를 이루며 '소녀'를 비추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는 '소녀'의 음성을 묻어버렸다.


손님도, 관계자도 없는 병원 카운터 앞에서 한 숨 돌리고 있는 청년이 보인다. 20대 중반 쯤의 꽤나 미남인 청년의 흰색 가운의 가슴쪽에 주머니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작은 집게로 고정 되있는 명찰엔 도미닉 윌슨이라 적혀있다. 아무도 없이 달랑 혼자뿐이어서인지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오자 청년은 몸을 부르르─떨며 코 아래를 두어번 비볐다. 그 때 청년의 휴대폰이 울렸다.


 


「도미닉 윌슨씨? 저 데니 코너입니다.」


 


전화를 받자 60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고령자라고 하기엔 톤이 꽤 높게 들린다. 그래도 낯익은 목소리였기에 청년이 미소 지으며 대답하려고 하자 노인은 어쩐지 무시하는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만나서 긴히 말씀 드릴게 있습니다. 지금 당장 런던 항구로 와주십시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번에도 청년이 대답하려고 하자 어느새 노인은 제멋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 한번 그 노인의 이미지를 되새겨보던 청년은 불평을 부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푹─쑤셔넣고는 홱─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는 바람은 비명을 지르다 이내 싸늘한 기운을 풍겨냈다. 그러다 잠시 상념에 빠진 청년은 다시 홱─돌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살을 에는 듯한 날씨 속에서 청년이 런던 항구에 도착했다. 저녁 배도 뜨지 않은 조용한 그 곳에서 청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왼쪽으로 검은 안개가 흩뿌려진 남색 바다 위로 등대의 황금빛이 쓸고 지나갔다. 오른쪽으로는 작은 배 한 두 척이 미동하는 파도의 움직임에 몸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한 소녀를 목격하였다. 어깨를 살포시 덮는 옅은 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소녀였다. 10대 중반으로 보여질 동안에 귀여운 외모는 매력적이게 느껴지지만 다소 어두운 모습으로 하여금 대조적인 이미지도 풍겨온다. 흐릿한 안개 속에서 청년은 무언가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은빛 무언가를 잡고 있는 소녀의 양 손과 그 소녀의 목을 노려보며 살기를 뿜고 있는 나이프가 보였다. 그걸 보자마자 청년은 허겁지겁─뛰어갔다. 그리고 소녀의 팔을 가볍게 제압하여 들고 있던 나이프를 뺏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고함을 지르며 소녀의 양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체념한듯 아무 저항도 않던 소녀는 청년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는 큰소리로 울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청년이 소녀의 등을 토닥이자, 소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청년의 손에 들린 나이프를 바라보고는 저돌적인 몸부림으로 뺏으려 하였다. 청년은 당황하여 뒷걸음을 치다가 뒤에 있던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고, 이번엔 소녀가 청년을 가뿐하게 제압했다. 알 수 없는 소녀의 기세에 눌린 청년은 동공을 줄이면서 소녀가 높이 치들고 있는 나이프에 시선이 갔다. 청년은 시야 속에서 순식간에 은색 빛이 사라지는걸 보고는 옆으로 굴러서 얼굴을 향해 쇄도해오던 나이프를 피했다. 질척한 땅에 박힌 그 것은 은색 빛을 잃은채 갈색만을 띄우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나이프를 거칠게 빼려는 소녀를 강하게 밀쳐 낸 청년은 소녀가 넘어진 사이에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소녀는 자세를 가다듬고 청년을 향해 걸어간다.


 


「나는 내가 아냐.…. '나'도 내가 아냐….」


 


초점도, 생기도 없는 눈동자를 지닌 소녀는 어둠에 가려진 시야 속에 청년을 담은채 영롱한 무언가를 눈 끝에서 흘러보냈다. 감정마저 투영시키는 영롱한 무언가도 청년을 담은채 달빛을 비춰내고 있다.


 


「그는 나를 찾아줘. '그'는 나를 어지럽혀….」


 


─짧은 호흡 소리와 가늘게 흘러 내리는 식은 땀이 교차하면서 청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모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듯, 천천히 걸어오는 소녀도, 청년이 쥐고 있는 나이프의 떨림도 느리게 흘러갔다. 그리고─


 


「당신은─어느 쪽?」


 


붉은 청년이 흰 색 소녀를 물들인다.
─흐릿한 소리와 함께 붉은 눈물이 소녀의 배를 적셔 나갔다. 조금씩 흐르던 붉은 눈물은 어느새 소녀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
양수를 쏟아내듯, 신발을 적셔나가는 붉은 눈물은 질척한 땅을 물들여갔다.
나비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어내듯이 소녀는 달빛의 차가운 빛을 받으며 뒤로 쓰러졌다. 소녀는 흡사, 미치광이 같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공허한 청년의 생각과, 검을 만큼 조용한 풍경 속에서 청년은 갑작스레 주저 앉았다. 그리고 붉게 물든 손과 붉은 귀신에게 잡아먹힌 은색 빛을 번갈아 바라보던 청년은 머리를 쥐어짜며 기겁을 하였다. 그 때,


 


「─무엇을 두려워 하는거지?」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 저음의 목소리에 호쾌한 면이 있는 톤이었다. 청년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그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다. 흰색 가운을 걸쳐 언뜻 의사로 보이기도 하지만 의사 보단 유명 연예인 쪽이 더 어울릴 법한 미남인 '청년'이었다.


 


「소녀? 실책? 쾌감?」


 


태평하게 계속 말을 이어가는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의 동공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기교한 울음 소리와 함께 흐릿한 세계 속을 방황하였다.


 


「눈을 돌리지 말고 나를 봐. 너와 나는 같은 존재야.」


 


청년의 시야 속 세계는 어느새 분별이 안 갈 정도로 흐릿해졌다. 선명함과 흐릿함이 일정한 박자로 반복되어 가는 가운데 무엇이 창공이고, 대지고, 사물이고, 사람인지 마저 모르게 모든 것이 비오는 날의 수채화처럼 분명한 경계선 없이 뒤섞여져 있다.
─검은 안개로 뒤덮힌 창공의 달빛이 자욱한 흰색 안개를 희롱하듯, 옅은 금빛을 피워내고 있다.
죽지 않은 청년의 귓속으로 '청년'의 목소리는 소용돌이를 통과해 자두빛 음성으로 바뀌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니까, 날 믿어.」


 


─'청년'의 눈동자는 호박빛으로 물들었다.


 


 


 


자네, 그거 알고 있는가?
인간들은 자신을 유명한 오페라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된 마냥,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내려 한다네.
실제로는 조촐한 일인극의 주인공일 뿐이면서 말야.
자신을 꾸미고 치장해서 '다른 사람'이 되어도, 그 부속물들이 사라지면 결국 '자신'이 될 뿐이지.
'허세를 닮은 기세는 바람 앞의 천 조각'이랄까?
문제는 그들이 그 점을 모른다는 거라 근심이 가기 마련이네만, 한 편으로는 가만히 있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고 싶은 어린 아이들처럼 영악한 만큼 멍청한 그들에게 심술을 부리는 것도 꽤나 재밌다네.
만약 그게 문제라면 그 쪽은 내 취향상의 문제겠지만….
─아, 자네 혹시, 신학에 대해 관심 있는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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