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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꿈꾸는 마녀] 마녀의 탄생

2008.12.11 16:00

misfect 조회 수: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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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안이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바라본다. 여자는 전날 기억을 떠올리며 힘없이 웃는다. 아뇨, 괜찮지 않아요. 밤새 뒤척이며 이런 책, 저런 책을 보다가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든 자각도 없이 새벽을 맞은 걸요. 그러나 가족도 아닌 남한테 그런 얘길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순 없다.


 “실은 불면증이 생겨서요.” “왜 갑자기?”


 그게 갑자기가 아니라, 일이 주 계속해 시달렸단 걸 알면 이 남잔 어떻게 생각할까. 여자는 문득 마주앉은 안을 바라본다. 걱정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며, 혹시라도 시험해보려 했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진다. 이 자상한 남자를 차마 걱정시킬 수 없어, 여자는 거짓말을 한다.


 “저녁에 마신 커피가 너무 진했나보죠. 이제 괜찮아요.”


 사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요. 목구멍까지 기어오르는 말을 여자는 겨우 삼킨다.


 “그래도 걱정되는 걸.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 쉬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여자 대답을 듣고서도 안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다. 그럼에도 더 이상 묻거나 강요하지 않는 건, 그 남자의 천성이었다. 여자는 안을 여태껏 만나본 남자 가운데 가장 편하게 대해 준다고 느꼈다.
 


“이건 뭐예요?”


 뭔가 떠올린 듯 안이 자기 가방에서 웬 CD를 꺼내 내밀자 여자가 물었다. 안은 멋쩍은 듯,


 “전에 그랬잖아요. 꼭 들어보고 싶다면서요? 그래서 가져왔어요. 나중에 시간나면 들어요.”


 라고 말하지만, 글쎄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여자는 도통 기억해내질 못했지만,


 “고마워요.”


 예의상 생긋 웃자 안의 얼굴도 환하게 펴진다. 경박하지 않고, 표현이 지나치게 부족하지도 않은 그의 표정은 항상 그녀를 감탄하게 한다. 자신도 기억나지 않는 세세한 것까지 마음써주는 자상함이, 그럼에도 결코 내세울 줄 모르는 겸손함이 그녀를 감탄하게 한다. 그녀에게 있어 안은 매번 감탄이다.


 “낙희, 최낙희.”


 


 그런 남자가, 연신 제 이름을 발음해 주는 것만으로도 여자는 붕 떠오르는 아찔한 기분에 빠진다.
 


 “이름 뜻이 뭐예요.”
 “살면서 즐겁고(樂), 기쁜(喜) 일만 많으라고 지어주신 이름이래요.”


 유치하죠? 여자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말끝을 흐리며, 혹시나 싶어 남자 안색을 살폈지만, 안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얼굴로, 좋은 이름이네요,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럼 낙희 씬, 지금껏 살며 행복했어요?”


 


 살며 행복했냐고? 글쎄요, 얼버무리며 생각해 보지만, 특별히 인생이 즐겁고 기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재수를 했고, 대학 지망 시엔 원하는 학교보다도 한 단계 낮춰 원서를 올렸지만 이차에 아슬아슬 붙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도 몇 번 고배를 마신 끝에 겨우 입사했었지. 그리고 안을 만나기까진 얼마나 많은 남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차였던가.


 ‘넌 말이야, 가만 보면 무서운 데가 있어. 겉보기엔 천사 같은데, 속엔 뭐랄까, 그래 마귀할멈이라도 웅크려 있는 거 같아.’


 헤어지잔 얘기를 듣고도 아무런 감흥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 진저리치며, 어떤 남자가 해준 말이다. 그럼 어떡해. 싫다고 떠나가는 사람 붙잡고 내가 눈물이라도 흘렸으면 좋겠어? 그전까지 너무 울어 메마른 눈에선 눈물 한 방울 짜낼 수 없는데? 차라리 그렇게 울부짖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헤어지자던 남자보다 더 매몰차게 등을 돌려 떠나가는 낙희를 보고, 남자는 ‘마녀’라고 했다.
 이런 얘길 하면 안은 농담조로, ‘왜 이런 여잘 차는지 몰라요.’ 웃어넘길 거다. 낙희는 확신한다. 이 남자와 만난 바로 지금이, 자신에겐 생애 가장 행복한 시기일 거라고.


 “낙희 씨.”


 다시 안은 그녀 이름을 불렀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어질 말에 대한 그녀 기대가 충분히 달아오르기까지 침묵을 한껏 활용한다. 그러면서도 너무 오래 입을 다물어 타이밍을 놓치는 일은 없다. 낙희는 그런 안이 사랑스럽다.


 “제가 낙희 씰 즐겁게 해줄게요. 왜 좀 더 일찍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을까, 후회할 정도로요.”


 


 오, 세상에! 안이라면 분명 그렇게 만들어 줄 거다. 너무도 달콤한 제안에 낙희는 전율한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해서, 낙희는 고개를 숙여 식탁보를 내려본다. 갑자기 머리가 띵해오며 눈앞이 핑핑 돈다. 맙소사, 하필 이럴 때! 잠을 못 잔 후유증인지, 식탁보 복잡한 패턴이 제멋대로 뒤섞여 낯익은 문자를 이룬다.


 ‘자유가 너희를…….’


 순간 그녀는 감전된 듯 흠칫 놀라 탁자를 탕, 두 손으로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거웠던 머리는 다시 거짓말처럼 홀가분해지고, 시야도 이상 없다. 조금 전 사랑에 빠진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건 물론이고. 대신 차가운 조소를 담은 얼굴로 낙희는, 놀란 안을 똑바로 응시한다.


 “죄송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안은 분명 좋은 남자지만, 그렇다고 절 행복하게 해줄 순 없을 거 같네요. 오해마세요. 실은 어떤 남자라도 그렇게 해줄 순 없을 테니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가 말리려 일어서는 것도 본채 만 채 낙희는 가게 문을 나선다. 어안이 벙벙해진 안은, 이내 허탈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는다. 쫒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창 밖으로,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섞인 낙희의 모습을 바라본다. 벨트가 달린 검은 코트를 단단히 여민, 콧날 또렷한 그녀가 굽 높은 부츠를 신고서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꽤 멀리, 사람들 틈에 섞여든 그녀를 안은 의외로 어렵잖게 알아보았다. 유난히 등이 곧은 그녀, 한결 부담을 버린 듯 가벼운 걸음과, 자신을 향해 지어보인 냉소어린 그 시선. 그녀를 떠올리며, 안은 뭔가를 떠올렸다. 왜 갑자기 그런 게 떠올랐을까. 안은 어이없어 헛웃음 짓는다. 요즘 세상에, ‘마녀’라니.


 낙희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 건, 안과 헤어진 지 한참이 지나서다. 칙칙한 겨울 빛 거리 어디서나 말 그대로, 파도를 연상시키는 인파를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 밀려나고 저리 휩쓸리며 어디론가 향한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낙희는 조금도 온기를 느낄 수 없단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껏 자신은 사람들이 그리운 온기를 쫓아 모여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학교로, 직장으로. 최소한 거기 있는 동안은 함께 있는 그들과 온기를 나누고 있다 착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내딛어도 남는 건 어중간한 소속감과 진짜 따뜻함에 대한 갈망뿐.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 느꼈을 때 낙희는 지루해졌다.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 그녀는 거리 한가운데서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세상 모두가 무안해하리만큼, 그래서 스스로 완전하다 믿는 세상 자체의 자존심에 상처 입히려고 크게 깔깔대고 낄낄대고 키득거리며 조롱한다.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이 불쾌한 낯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낙희는 오히려 더 크게, 자신을 본 사람들이 스스로 발가벗겨져 속살까지 드러난 것처럼 느껴 부끄러워할 정도로 그들을 비웃는다. 손가락질하며 지나가는 겁쟁이들은 두렵지 않아. 다만 조롱할 세상이 사라지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지.
 세상은 내내 침묵했다. 막 태어난 마녀에게 경외를 표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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