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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꿈꾸는 마녀] 마녀의 탄생

2008.12.11 08:26

misfect 조회 수: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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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졸린 눈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두꺼운 커튼이 쳐진 어두운 방, 모니터 화면만 홀로 발광한다. 문서 작성 창 흰 바탕 위에서, 커서는 몇 시간째 깜빡이며 대기 상태다. 어디까지 했지? 잠에서 덜 깬 정신으론, 아무리 들여다본대야 제자리를 잃고 뒤죽박죽된 단어들만 보일 뿐이다. 문장은 낯선 대다 주제를 잡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져 있다. 자기가 쓴 그 문장들의 집합을, 여자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대뜸 ‘마녀에 태초가 있었다.’라니, 이게 무슨 소리람. 어젯밤 쓰던 서평에 이런 문장이 들어갈 이유는 없다. 아무리 해석의 범위를 넓게 봐줘도 여자가 읽은 책은 평범한 직장 여성 연애담일 뿐인걸.
 안되겠어.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아직도 정신이 알딸딸하다. 앞머리를 쓸어 올려 정돈한 후, 여자는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앞에 놓은 컴퓨터용 책상. 오른쪽 구석 책장, 그 옆에 화장대 겸용으로 쓰는 진열장, 다시 구석에 옷장, 방문, 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싱글 침대, 창문, 다시 책상. 그리 넓지 않은 방 곳곳엔 온갖 잡지며 베스트셀러 소설, 영화며 공연 팸플릿에 만화책 따위가 여기 약간, 저기 약간 하는 식으로 널브러져 있다. 불면증과 씨름하던 몸부림의 흔적들 위로, 커튼 새로 새어든 한 줄기 햇빛이 드리워진다. 어젯밤엔 잠이 들긴 했었나. 머릿속은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여전히 뒤죽박죽인 문장들 사이에서 여자는 우연히 거기에 시선이 꽂혔다. 명백한 오류다. 인용하려던, 사도 바울의 유명한 말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였지. 커서를 옮겨 문장에 블록을 씌우고, 여자는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읽어본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너희를 진리케 하는 자유. 나를 진리케 하는 자유. 백스페이스를 누르려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런 게 과연 가능할까. ‘진리케 하는 자유’란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없는 게 당연하지. 잠에 취한 뇌가 지껄인 헛소리일 뿐인걸.
 그래도 혹시나 있다면, 여자는 그 ‘진리케 하는 자유’란 걸 단 한 번이라도 맛보고 싶었다.
 부르르르.
 책상 가장자리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한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튕기듯 폴더를 열었다. 낯익은 이름이 보낸 문자가 크지 않은 액정 위에 가득 띄워졌다.


 ‘시간 괜찮으면 점심 같이 하실래요. -안’


 안은 소개 팅에서 만난 남자 이름이다. 젊고 능력 있는 잡지에디터로, 이번까지 벌써 네 번째 만남이다. 인물 훤칠하고 성격마저 좋은 그와 사귀는 것을 부러워않는 사람은 없다. 여자 본인을 제외한다면. 매번 안을 만날 때마다 유심히 그의 얼굴, 몸짓, 목소리 하나하나까지 관찰했지만, 여자는 그에게서 어떤 감동이나 두근거림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인상이나 느낌만 가지고 연애하기에 스물아홉이 좀 부담스런 나이던가.


 ‘얘, 여자는 귀여워해줄 남자 있을 때가 한창이다.’


 특히나 부모님은 딸이 서툴게 유행을 따라 독신으로 서른 살을 맞도록 보아 넘길 분들이 아니었다. 이래저래 평소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답장해 약속 시간이며 장소까지 받아냈을 텐데,


 ‘좋아요. 어디서 만나’


 휴대폰 문자판을 누르던 여자 손이 멈칫거린다. 눈은 계속해 모니터에 뜬, 블록 씌운 구절을 보며 어딘지 마뜩찮은 표정을 짓는다. 자유. 진리. 자유.
 여자 손이 다시 움직여 문자를 완성한다. 아주 잠깐 주저한 끝에 문자는 결국 남자에게로 보내진다. 여자는 하아, 깊은 한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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