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어느 20대의 소설

2008.11.29 00:38

Mr.럭키맨 조회 수:687

extra_vars1 107043-1 
extra_vars2
extra_vars3
extra_vars4
extra_vars5  
extra_vars6  
extra_vars7  
extra_vars8  
 

  가고 싶지 않았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바쁘고 추웠다. 너무나 바빠 어디 여행갈 처지가 되지 못하였고 몹시도 추워 어딜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친구도 내버려두고 프로젝트에만 몰두했는데 프로젝트가 끝나니 마침 대학 친구, 영준에게서 같이 스키나 타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가고 싶지 않다고 단언에 거절했지만 그는 회사까지 찾아와 가자며 졸랐다. 결국 억지춘향으로 나는 그와 휴가를 가게 되었다. 여자친구와도 어디 가지 못했는데……. 지금은 겨울이 끝나가고 있는데…….


  타고 싶지 않았다. 스키용품 렌트점에 가서 자연스럽게 스키를 고르니 영준은 나의 스키를 뺏고 대신 스노보드와 부츠 그리고 바인딩을 넘겨주었다. 스노보드를 못 탄다며 자리에 놓으려 했지만 땅에 닿기도 전에 영준은 이게 유행이라며 다시 내 품에 안겨주었다. 그리고는 비용을 지불하고 혼자 나가 버렸다. 보드를 바라보고, 유리문을 통해 차에 오르고 있는 영준을 보며 화를 낼까, 아님 혼자라도 스키로 바꿀까 뭘 할지 생각하다가 그냥 영준을 따라가 버리고 말았다. 보드, 정말 한 번도 타본 적 없는데…….


  오르고 싶지 않았다. 영준의 약간의 보드 강연을 듣고 나는 당연히 중급자 코스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영준은 중급자는 애들이나 타는 거라며 나의 점퍼를 잡고 고급차 코스를 향해 끌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상급자 코스를 한 번 올라다 보았다. 도저히 안 될 거 같아, 중급자 코스 한 번 갔다 온 뒤 가겠다고 말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화를 내려는 찰나 그가 먼저 도리어 화를 냈다. 놀러왔으면서 자꾸 분위기 망칠 거냐며…….


  리프트를 타고 가며 나는 어이가 없어 그에게 질문 했다.


  “몇 살이냐?”


  그는 웃으며 가볍게 답변했다


  “너와 같은 서른한 살.”


  참 안타깝고 말도 안 되지만 진실이었다.


  리프트에서 내리고 영준은 자기가 데려왔으면서 책임감도 없이 혼자 휑하니 자취를 감추었다. 정말 순간 사라졌다고 생각할 만큼 그는 나에게 말도 없이, 소리 소문 없이 조용하고 빠르게 코스를 내려갔다. 서울에 살고 중소기업에 다니는, 게다가 보드를 잘 타지 못하는 서른 한 살의 한 남자는 스키장 상급자 코스 꼭대기에 버려지고 말았다.


  조심조심히 보드를 탔다. 일부로 가속은 내지 않고 천천히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돌며 내려왔다. 마치 토끼들 사이 거북이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억지로 어색한 기본자세를 유지하며 조금씩 코스를 내려왔다. 상급자 코스를 내려오는 보통의 여느 ‘상급자’들은 보드도 처음 타본 놈이 이런 곳에서 뭐하는 거냐며 짜증 섞인 야유소리와 비웃음 소리를 상급자 코스의 ‘이방인’에게 은근히 부었다. 이방인은 사라져가는 상급자들을 잘 보지도 못했지만 그들의 야유소리와 비웃음 소리는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저 아래에서 함께 비웃고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드-는 저 빌어먹을 친구 놈이 멀리 보이자 참아왔던 화가, 아니 부족하다, 열불이 터졌다.


  처음부터 나는 이곳에 오고 싶지도 않았다. 억지로 끌려오긴 했어도 스키를 타고 싶었고 백보 양보해서 보드를 탔다고 해도 이렇게 무리하게 상급자 코스에 올라와서 타고 싶진 않았다. 가슴속 깊이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래, 한 번 가보자. 가는 것 같지도 않던 주행을 멈추고 빗면과 보드가 일직선이 되도록 보드를 조작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보드는 내 몸무게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내 모든 무게에너지는 속도에너지로 전환되었다.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나의 속도도 상급자들 사이에서 그 어떤 이질감 없이 다닐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어떠한 컨트롤도 없는 속도는 부작용을 초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상급자들 조차 나에게 뒤쳐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화가 났었다고 하지만 속도가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속도가 되니 겁이 번뜩 났다. 강한 바람과 초가 다르게 가까워지는 저 코스의 끝은 나에게 두려움을 선사하기 충분했다. 두려움이 커져갈 수록 나의 몸의 밸런스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흔들리자 보드도 함께 흔들렸다. 결국 무너져 버린 내 몸을 대신해 보드는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잘 들을 수 없었다. 내 비명소리에 묻혔기에.


  마치 미쳐버린 단말마처럼 드라이버 잃은 자동차처럼 내 몸과 보드는 어디를 갈지도 모르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보드는 코너를 향해 달렸고 코너에는 땅 깊숙이 박혀있는 발목만한 돌이 존재했다. 돌과 충돌한 보드는 멈추고 싶어 하였지만, 운동보존의 법칙에 의하여 내 몸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나는 앞에 막이와 부딪치고 말았다. 쾅! 이라는 식상한 소리와 함께…….




  -가끔은 그랬다. 내가 하고 싶던 일의 결과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고, 결코 내가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의 결과가 의외로 좋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세상은 결코 생각대로만 되지 않았고 때로는 그게 나쁘기만 하지도 않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렸다. 처음엔 눈 속으로 빛이 들어왔고 그 다음 천장이 들어왔으며 천장이 완전히 인식되기도 전에 영준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다행이다!”


  영준은 이미 크게 떠버린 눈을 다시 확인하더니 천장을 향해 소리쳤다. 그렇게 포효하고 기뻐한 뒤 그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기 시작했다. ‘미안해’라는 말을 정말 지겹도록 들은 후에야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미안한 건 알았어. 알았는데, 여긴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병원이지.”


  “병원? 왜!”


  난 진심으로 크게 놀랐다. 그러나 영준은 믿어주지 않았다.


  “야, 진짜 미안하니까 그런 장난 치지마.”


  “뭔 소리야. 뭐가 장난이라는 거야. 내가 왜 병원에 있냐고.”


  “너 좀 세게 나온다? 그렇게 나오면 걸릴 거 같지?”


  가슴을 탕탕 쳤다. 정말 답답했으니까.


  “그래, 장난이라고 치고! 장난 맞으니까! 내가 여기 왜 있는데?”


  그제야 그는 내 말이 거짓이아니라는 걸 믿기 시작했다.


  “정말……기억 안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긍정의 끄덕임을 보였다.


  “스키장에서 사고 난 것도? 하나도?


  “사고 났어? 어떻게 났는데?”


  “너 어디까지 기억나? 몇 살이야?”


  “스물여덟……. 왜?”


  그는 놀라며 손을 뻗고 뒤에 문에 턱 기댔다. 그리곤 소리쳤다.


  “지금 사고 나서 깨니까 기억상실증이라는 거야? 마치 드라마처럼?”


  그의 마지막 말에 나도 소리쳤다.


  “지금 자고 일어나니까 내가 기억상실증이라는 거야? 마치 드라마처럼?”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긍정의 끄덕임을 보였다.




 나의 마지막 기억은 삼년 전. 그러니까 스물여덟.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기억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어머님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아버지가 출근하시는 걸 배웅하고 백수답게 집에서 핑핑 놀다가 대학로로 아르바이트 하러 가고. 저녁에는 여자친구 나영을 만나서 함께 영화보고 데려다주고 집에 와서 발 닦고 잠이나 잔, 정말 도무지 이게 마지막 기억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마지막 기억으로 세월은 흘러 3년이 지나 있었다. 정신적 내상만 가지고 있고 외상은 없기에 병원에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운전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영준이 운전대를 잡았다.


  “네 이름은 기억나지?”


  “알어. 임선아. 다 기억난다니까? 물론 3년 전 일에 한해서지만.”


  3년 만의 영준이었다. 내 마지막 기억에 의하면 영준은 쾌활하고 말 많고 시끄러우며 무엇보다 굉장히 유치한 놈이었다, 나와 비슷할 만큼. 그런 그가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한 마디도 안 하며 가고 있었다. 3년 사이에 혹 그에게 뭔 일이 생겨 성격이 달라져 버린 걸까?


  “영준아, 너 이혼했니?”


  “아니?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아직까지 5년전에 결혼 했던 미영이랑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아니 그렇잖아. 네가 결혼을 했으면 왜 나랑 스키장을 가. 네 부인이랑 가야지. 그렇게 좋다고 둘이 여행 다녔으면서, 내가 얼마나 불평했는지 넌 너무 먼 기억이라 기억 안나니? 게다가…….”


  “게다가?”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이런 놈 아니었잖아? 난 또 실연의 상처라도 겪어서 성격이 변했는지 알았지.”


  나는 달리는 차 앞 유리를 보았다. 영준의 눈빛이 순간 바뀌어 앞에 뭐라도 나타났나, 해서였다. 허나 그저 텅 빈 도로가 계속될 뿐이었다. 영준은 바뀐 눈빛을 유지한 채 말했다.


  “어디서 말해야 될지 고민돼서. 그래서 말을 않고 있었어.”


  “너 뭔가 변하긴 변했어. 네가 생각하고 말하는 타입이었냐?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타입이었지. 아니, 그것도 아냐. 말하고 생각할 때가 더 많았지.”


  내가 정말 사람 옆에 있는 건 맞는 건지. 혼자 떠드는 건지. 그는 내 말을 듣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앞에 있는 표지판이 몇 번 바뀌고 신호등을 몇 번이나 지나친 후에야 그는 닫았던 입을 열었다.


  “선아야. 내 말 잘 들어라. 너의 기억에 없는 3년간 세상은 참 많이 변했어. 그리고 너도 그 세상 속에서 살았으니까 너 또한 그 변화를 피해갈 수 없었지. 아니, 어쩌면 세상보다 네 주위가 더 많이 바뀌었을지도 몰라.”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기 힘든 사실이 나올 것 같았다.


  “각설하고 본론만 말해. 그러니까 내 주위에 뭐가 바뀌었다는 거야?”


  “너희 부모님 돌아가셨다. 집안도 예전처럼 부유하지 못해 이사 가고. 그리고 네 여자친구도 예전의 그 여자친구 나영씨가 아니야.”


  이번엔 내가 말이 없어졌다. 겨우 3년 이었다. 그 사이에 뭔 일이 그렇게 많이 일어난 걸까. 28년간 함께 살아왔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10년간 살아왔던 집에서 이사를 갔다. 4년간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 오랜 시간동안 함께했던 것들이 3년이란 시간에서 부서졌다. 3년 그 사이 나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준은 나의 반응을 힐끔 한 번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넌 취직을 했어. MP3를 만드는 중소기업이야. 중소기업이라지만 꽤 큰……”


  “잠깐! 내가 취직을 했다고?”


  “어, 넌 그곳에서 많지 않은 나이에 과장을 맡고 있고. 이래봬도 꽤 괜찮은 회사야.”


  그는 더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거기까지만 말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 인 것 같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도 되는데 웬만하면 네 힘으로 알아봐. 그게 맞는 거 같아.”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침묵했다. 차는 지금 내 집 앞이라는 곳 앞에 세워졌다. 4층 빌라였다. 나는 2층에 살고 있었고. 영준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아무 말 없이 가버렸다.


  들어가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어느 열쇠가 어디 열쇤지 몰랐으니까.


  내 집을 구경했다. 혼자 살기엔 퍽 부족함이 없는 집이었다. 아니, 꽤나 좋은 집이었다. 집이 망했다지만 크게 망한 것 같지 않았다. 방도 두개에 화장실, 거실, 배란다. 모든 방을 보고 나서야 난 내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결국 찾지 못했다.


  나의 그림들. 이제야 깨달았다. 아까부터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그 무언가를.


  부모님의 죽음. 달라진 집. 헤어진 여자친구.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내가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 만큼 작은 일이라는 게 아니었다. 그것들은 과거의 일이었다. 과거의 슬픔이었다. 그렇기에 나의 심장은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취직을 했다는 영준의 말에 난 크게 놀랐다. 그것은 과거에 한정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아직까지도 짊어지고 있는 슬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직도 가슴이 아픈 것 같았다.


  내 꿈은 화가였다. 나의 기억 속 어제까지 그러니까 현실로 치자면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낮에는 대학로에서 사람들 초상화 그려주는 알바를 하였다. 남는 시간엔 공모전을 준비하며 살았다. 그저 사람들이 하늘에 그리는 그런 꿈이 아니었다. 잡을 수 있는 꿈이었다. 그렇게 믿었다. 28살의 백수생활은 백수생활이라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꽤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고 그리 놀거나 지내진 않았다. 잡을 수 있는 꿈이라 믿었다.


  그런데 취직을 했다니. 나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가장 나를 마음 아프게 하는 건 배신감이 아니었다. 상실감이었다. 중학교 때부터였다. 난 화가가 될 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될 거라 믿었다. 화가는 나의 꿈이었고 천직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취직을 해버렸다. 그것은 마치 중학생부터 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자아에 대한 상실, 그것이었다.


  침대에 대(大)자로 누워버렸다. 고독감이 턱까지 밀려왔다. 나 자신의 모든 게 부서졌다는 느낌이었다. 상실감으로 몸부림 치고 있을 때 나의 일기장이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게 없을 때, 나에게 있던 자신감, 꿈 따위가 사라져 가는 게 느껴질 무렵부터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었다. 나의 일기는 보통의 일기처럼 하루의 일과를 제재를 정해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좀 더 예술가다운 일기를 쓰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일기엔 하루의 행위보다는 하루의 감정이 들어가 있었다. 하루하루 내가 겪고 느끼는 감정. 그것이 나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다. 아직도 쓰고 있을까? 책상으로 가 서랍을 뒤져보았다. 여러 서류뭉치 종이들. 헤집고 헤집어서야 일기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 같았다. 역시 일기는 3년 전보다 이따금씩 쓰고 있었다. 마지막 일기는 11월 말이었다.




  -지겹고 나른하다. 매일을 힘겹게 버티며 살아간다. 간신히 삶의 끊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삶의 끊을 잡고 있는 나의 손이 안타깝고 처연하다. 그리고 가끔은 몹시 한심해 보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을까?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었을까? 지금 처해진 나의 삶의 모습은 내가 이제껏 살아온 삶의 결과물일까? 이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나는 혹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휴대폰이 떠올랐다. 휴대폰을 열어 통화목록을 보았다. 최신 통화목록에서 가장 많은 횟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황예나.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누구일지 더 짐작이 갔다. 무작정 그녀에게 통화버튼을 눌러버렸다. “여보세요” 연결음이 채 네 번 울리기 전에 그녀가 받았다. 그녀가 받자 뭐라고 말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발신인이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말을 어쩔 수 없이 결국은 내뱉고 말았다.


  “실례지만 누구세요?”




  황예나라는 이름의 사람은 전화로 판단하였을 땐 굉장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상당히 우울했던 나의 마음을 예나씨와 대화하며 많은 부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예나씨의 존재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래저래 해서 우리는 다음날 만나기로 하였다.


  3년이란 시간은 평범한 한국인을 간첩으로 몰아버리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느 하나 안 바뀐 게 없어 사람들에게 이게 무엇이냐고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볼라 치면 그들은 마치 나를 간첩 보는 냥 쳐다보곤 했다.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내가 그런 세상을 살아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아침엔 두려웠던 번화가였다. 새로운 패션, 새로운 문명,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느긋이 앉아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시각의 차이였다.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을 어떤 이는 두려워 하지만 어떤 이는 그것을 신기해하며 즐긴다. 나는 맘 편히 후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그저께의 내가 아무 일 없이 보았을 풍경을 신기해하며 보고 있을 때 어느 새 누군가 내 옆에 와있었다.


  “선아씨.”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엔 하늘색 롱가디건을 입고 하얀색 면바지를 입은 웬 아름다운 처녀가 내 옆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내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재끼고 있었다.  예의 없게 내 이름 불려지기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아, 당신이 예나씨 인가요? 아, 거기 앉으세요.”


  그녀는 우아한 자세로 내 앞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마자 종업원이 와서 새로 주문을 받아갔다. 나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을 날렸다.


  “그런데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인데, 어떻게 그렇게 내 말을 한 번에 믿을 수 있어요? 솔직히 황당하잖아요. 기억상실증이라니. 어디 삼류 드라마도 아니고. 원래 그렇게 사람을 잘 믿어요?”


  그녀는 테이블 아래를 보고 큭큭 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답변을 듣기 위해 나는 잠시 기다려야 했다. 잠시 기다린 후에 나온 답변은 내가 기다린 답변이 아니었다.


  “되게 재밌네요.”


  “네? 뭐가요? 제가요?”


  “처음부터 그런 질문을 할지는 몰랐어요. 아무대화도 안 나눈 상태에서 나에겐 아니지만 선아씨에겐 제가 분명 초면일 텐데 그런 질문부터 나오다니…….”


  “몹시 궁금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답변은 뭔데요?”


  그녀는 테이블에 팔을 얹고 얼굴을 내 쪽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기억이 돌아오면 알게 될 거에요.”


  그녀가 말괄량이 같이 웃자 나도 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초면이었지만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만약 내 마지막 기억이 군대였다면 재밌었을 거 같지 않아요?”


  “왜요? 나이 많이 먹어서 슬플 거 같은데?”


  “나이 먹는 게 문제에요? 자고 일어나니까 바깥세상이라는 게 중요하지”


  이런 이야기들로 시작해서 내가 초면인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하는 패턴의 내 과거 이야기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친구랑 팽이치기하다가 싸워서 해리포터보다 먼저 생긴 내 이마의 상처 이야기, 성인이 돼서 달고나 한 번 오랜만에 먹고 싶다고 소란부리다가 집안 태울 뻔 한 이야기, 계곡에서 물장구 치고 놀다가 물장구에 벌이 맞아서 엉덩이 쏘인 이야기 등. 그녀는 나의 과거이야기를 깊은 눈으로 즐겁게 경청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니 시간의 흐름도 잊을 만큼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시간이 몇 시간 정도 지나서야 내 입에서 ‘이제 일어날까요?’ 라는 말이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내 정수리를 비추던 태양은 이제 미간을 내리 쬐고 있었다. 따뜻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정류장에서 그녀는 물었다.


  “차, 안 가져왔어요?”


  “나한테 차가 있었어요?”


  하긴 지금은 직업도 있고 게다가 과장이니 차 한 대 쯤 없을 리가 없었다.


  정류장은 멀지 않았다. 정류장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정말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라서 잠시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러다 나를 다시보고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담배 폈었어요?”


  그녀의 말에 나도 놀랐다.


  “어? 그럼 저, 안 펴요? 끊은 거예요?”


  “제가 아는 3년 동안은 그래요.”


  “어쩐지 어제 처음 필 때 좀 속이 안 좋다 했어.”


  4년 동안 전 여자친구 나영이 그토록 끊으라고 하지만 결국 끊지 못했다. 힘들 게 끊었을 텐데 기억을 잃자마자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나에겐 담배를 끊은 기억이 없으니까. 지금 나에겐 담배가 절실했다. 담배를 한 모금 들이키고 뱉은 뒤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많이 조용한가요?”


  “네? 그렇게 말을 하고선 조용하단 말이…”


  “20대의 ‘나’ 말구요. 지금에 30대의 ‘나’요.”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해요?”


  약간의 침묵을 두었다. 생각을 잠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예나씨는 제가 기억상실증이라는 말을 하자 곧장 믿었어요. 한 치의 의심 없이. 그리고 예나씨를 만나자마자 저의 약간 오버스러운 질문에 예나씨는 웃었죠. 커피숍에서 말한 저의 과거 이야기들, 저거 사실 제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언제나 말하는 에피소드들이거든요. 예나씨는 그 이야기들을 마치 처음 들은 이야기인양 들어주었어요. 거기까지 오자 내가 현 여자친구에게 이 이야기들도 안 했나, 그렇게 말을 안하는 과묵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으로써 이제까지 예나씨의 행동도 생각하게 되었죠. 그러니 결론은 그거더군요. 현재의 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고 장난스러운 거짓말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죠.”


  예나씨는 내 이야기를 환한 미소와 함께 들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머리를 한번 뒤로 넘기고 답했다.


  “선아씨 추리소설 좋아했어요? 되게 재밌네요.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요. 무뚝뚝하고 말없고, 그런 재미없는 사람은 저도 별로 안 좋아해요. 물론 20대의 선아씨보다는 말 수가 많이 준 거 같기는 하지만 30대의 선아씨는 충분히 재밌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건 맞아요. 30대의 선아씨는 함부로 장난스러운 거짓말 하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농담은 했지만 그런 거짓말은 안했죠. 그리고 또 과거를 떠벌리고 다는 사람도 아니었어요. 좀 더 현실에 충실했다고, 할까요?”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장난스레 내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말하게 하다니, 생각보다 선아씨 눈치가 빠른데요? 뇌 회전도 3년 전으로 돌아간 거 아녜요?”


  그녀의 말의 끝남과 맞춰 버스가 도착하였다. 작별인사를 하려고하자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처음에 제가 선아씨 말 듣고 웃은 거요. 선아씨 말이 웃겨서도 그랬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사실 선아씨가 저에게 존댓말을 하는 게 어색하고 재밌어서 그랬어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을 들으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는 나를 보며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다음에 만날 땐 말을 낮춰 주겠어요? 그 때는 좀 더 편하게 반말로 말해주지 않을래요?”


  그녀의 말소리가 버스에 오르는 나에게 들렸지만 버스에 이미 타버려서 당장은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버스에가 빈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고 그녀에게 외쳤다.


  “노력해 볼게요!”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미소를 지어주었다.




  정말 영준은 그 뒤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드디어 회사에 출근을 해야만 하는 월요일이 되었는데도 난 내 회사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도대체 내 차는 뭐야? 그 전 날까지도 왜 그런 걸 미리 생각해 놓지 못했는지 나는 영준에게 아침부터 전화하여 모든 걸 물어봐야 했다. 영준은 자신이 공대 졸업생이라는 걸 나에게 확신시켜주며 하나하나 차근차근 말하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진 단어의 나열들을 나에게 말해주고는 회사에 찾아가라고 했다. 그래도 꽤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해서 그런지 그럭저럭 출근을 하였고 대충 늦지는 않은 것 같았다.


  굉장히 걱정되었다. 처음 하는-3년 전까지의 내가-회사 생활도 그랬지만 더욱 걱정되는 건 회사 사람들이 나의 기억상실증을 믿어줄까 하는 거였다. 얼마나 황당할까. 회사 사원이 휴가를 마치고 월요일 날 출근하더니 기억상실증이라며 이제까지 배운 거 다 까먹었다고 말한다면. 나라도 안 믿어줄 것 같았다.


  디자인부. 나는 어색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물론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제일 높아 보이는 남자를 찾았다. 저기 부장의 룸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생각보다 모든 일은 술술 풀렸다. 나는 부장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내가 이제까지 겪은 이야기를 모두 말 했다. 스키장 간 것부터 사고가 나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것까지. 아니 아무리 거짓말을 잘 안 하던 성격이라도 기억상실증이라고 주장하면 의심할 만 한데 마치 예나씨처럼 부장님도 내 말을 말한 그대로 믿었다. 30대의 나는 그토록 믿을만한 남자란 말인가. 나 조차 놀라웠다.


  부장의 도움으로 나는 내가 기억상실증이라는 걸 우리 부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알릴 수 있었다. 사실 부장을 처음 봤을 땐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중 턱에 찢어진 눈매 둥근 코 내려간 입 꼬리. 마치 비리 정치인과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표정도 무뚝뚝해 보이고 해서 굉장히 사납고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일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는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나에게 웃으면서 나긋나긋하게 대해주었고 그 덕분에 많이 어색할 뻔한 회사생활을 조금만 어색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디자인 부 사람들은 내가 믿을만한 놈이라기 보다 부장까지 나서서 내가 기억상실증이라는 걸 확인시켜주니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믿는 눈치였다. 그래서 부실 사람들은 간간히 나에게 정말 기억이 안 나냐며 물어보기도 하였다. 나는 웃으며 친절히 ‘그렇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물론 나는 그를 모르지만.


  아침은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일을 배우느라 후다닥 지나갔다. 힘든 점이 있다면 부장이 나를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 과할 정도로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독할 것만 같은 째진 눈에 안 어울리는 친절한 미소는 누가 봐도 참 이질적이었고 심지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였다.


  점심시간에 거의 다가올 무렵 회사에서 보여서는 안 될 사람이 회사에서 보였다. 예나씨였다. 순간 우리가 혹시 사내커플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잠깐 해보았으나 예나씨의 복장을 보고 그녀는 출근하러 온 게 아니라 나를 보기위해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래도 현재 신입사원의 기분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예나씨가 오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실 사원들 표정을 보니 이게 낯선 일은 아닌 듯 싶었다. 나는 예나씨에게 달려가 어떻게 왔냐고 묻자 그녀는 당연한 듯이 ‘자가용으로 왔어요.’라는 썰렁한 유머를 서슴없이 하였다. 그리고는 같이 밥 먹을 사람이 더 있으니 데리고 오겠다면서 이 곳에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부실 사원들이 모두 점심을 먹으러 인사하고 나가, 나는 혼자서 부실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그녀와 은근하게 어딘가 닮아 보이는 한 중년 남성과 부실에 찾아왔다. 그 남성은 중년의 나이였지만 머리는 촌스럽지 않은 7:3 가르마를 부드럽게 탔고 무테안경에 입가엔 짙은 주름이 있었으나 그 주름이 늙어 보인다기 보단 중년 남성의 성숙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그런 주름이었다. 나이는 50대 중반정도로 보였다. 옷은 회색 정장으로 회사에 출근한 듯한 복장이었다. 그녀가 기다리라고 하고 얼마 안 되어 돌아왔으니 나는 그 분은 그녀의 아버지이고 이 회사 직원일 것이다, 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을 옆에 세우고는 말했다.


  “선아씨, 잊어버렸죠? 그럼 옆에 보이는 이 사람을 다시 소개할게요. 이 분은 저희 아빠에요. 인사하세요.”


  나는 얼떨결에 인사했다. 그도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런데 복장을 보니 이 회사 직원이신 거 같은데요, 아버님?”


  ‘아버님’이란 어색한 단어가 내 입에서 나왔다. 아무래도 정말 어색했다. 그녀의 아버님에게 질문한 것이지만 답변은 그녀가 해주었다.


  “아! 그 소개를 아직 덜 했네요. 말했다시피 이 분은 우리 아버지이구요. 이 회사에 다니세요. 직책은 사장이에요.”


  “네……. 네? 사, 사장님이시라구요?”


  그녀는 나의 당황한 표정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왼팔엔 사장님 팔짱을 오른팔엔 내 팔짱을 끼더니 서둘러 가기 시작했다.




  식사는 당연히 어색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나에겐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단지 나는 다른 생각을 혼자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예나씨와 사장님에겐 어색함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선아씨, 어색해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그녀가 말하고 사장님이 헛기침을 했을 때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네? 뭐라고 했죠? 아, 어색하냐구요……. 아, 아니, 그게 조금…….”


  “왜 그렇게 어색해해요. 선아씨 우리 아빠랑 얼마나 친했었다구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 빼놓고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던데요? 근데 기억 잃었다고 찬바람이 부냐.”


  나는 그녀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사장님이랑 친했었어요?”


  “네, 그럼요. 선아씨가 그렇게 말을 안 하니까 아빠도 어색해하시잖아요.”


  나는 사장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아니, 아버님. 전에 제가 어땠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제가 낯을 좀 가립니다.”


  사장님은 인자하신 표정으로 “이해하네.”라고 답하였다.


  그럼으로써 식사는 조용히 먹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예나씨는 사장님에게 애교를 부리며 나와 함께 좀 더 있다가 가겠다고 말하였다. 사장님은 예나씨를 귀여워하며 알았다고 그래도 점심시간에 너무 늦지는 말라고 당부하였다. 우리는 둘만의 시간이 생겼다. 둘만의 시간이 생겼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예나씨는 나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놀란 건 맞는 거 같은데, 화도 같이 났어요? 말 안 해서?”


  “예나씨에게 화 난 거 아니에요.”


  나의 말은 너무 딱딱하지 않았고 너무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냥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그럼 우리 아빠한테 화났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까와 같은 톤으로 대답하였다. 예나씨는 ‘치.’ 하고 콧방귀를 흘기더니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저번에 부탁했던 건 안 들어줄래요?”


  “무슨 부탁이요?”


  “너무한다. 그새 잊어버렸어요? 기억상실증이 아니라 알츠하이머 아녜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곰곰이 전 만남을 생각해 보았다.


  “아, 반말이요……?”


  “네, 자꾸 존칭어 쓰니까 어색해서 그래요. 저도 선아씨라고 자꾸 부르는 것도 어색하고.”


  “그게… 힘드네요.”


  “제가 어색해서 그러는데, 안돼요?”


  나는 그냥 한 번 웃고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점심시간 끝나겠어요. 먼저 들어가 볼게요.”


  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로가에 지나고 있는 택시를 잡았다.


  “괜찮아요. 아빠한테 조금 늦겠다고 말하는 거 아까 봤잖아요.”


  난 택시 문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저한텐 그래도 나름 오늘이 첫 출근인데 제 시간에 들어가야죠. 먼저 가볼게요.”


  내가 택시에 타려 하자 그녀는 급하게 소리쳤다.


  “잠, 잠깐만요! 선아씨, 그럼 내일 저녁에 만나요.”


  “내일저녁에는 약속이 있어요.”


  “에이 거짓말. 선아씨 친구 영준씨 빼고 별로 없잖아요. 누구랑 약속인데요?”


  “있어요. 3년 전 친구…….”


  나는 그 말을 끝으로 택시에 탔다.


  택시를 타고 혼자 있자 드디어 사색에 빠질 수 있었다. 나는 분명 화가 나있었다. 하지만 화의 대상은 예나씨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장님도 아니었다.


  그 대상은 나였다. 나는 나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남부럽지 않은 꽤 부유했던 집안, 그런 집안이 몰락했다. 그리고 그 집안의 내외가 모두 사망했다. 이제 집안에 남은 거라곤 화가가 되겠다는 꿈밖에 없던 20대 막바지의 청년. 그는 취직을 해야 했다. 뭐, 생각해보면 여기까지는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보자 청년의 직위는 말단 사원이 아닌 과장까지 올라와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고 빠르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 부장은 아래 사원인 과장에게 과할정도로 친절하게 대했다. 그래도 청년이 열심히 일해서 그곳까지 올라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부장도 생긴 것 답지 않게 본디 친절한 성격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청년은 어느새 여자친구가 바뀌어 있었다. 전 여자친구가 운명의 여자라고 생각했다. 자리만 잡으면 그녀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뀌었다. 더 이상 청년의 여자친구는 전 여자친구가 아니었고 다른 여성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여자친구는 괜찮은 여자였지만 그렇다고 전 여자친구보다 크게 잘날 것 없는 여자친구 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가 크게 달랐다. 새로운 여자친구의 집안 문제였다. 그녀는 현재 다니고 있는 기업 사장의 딸이었다.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새로 나타난 기분이었다. 새로운 용의자의 관점에서 모든 상황들은 딱딱 맞아 들어갔다. 집은 망했으나 꽤 괜찮았던 청년의 빌라, 적은 나이에 차지한 과장, 보수적으로 생긴 부장의 과한 친절함, 사장 딸 여자친구를 원인으로 집어넣으니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속이 울렁거렸다. 택시는 회사에 도착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회사로 들어갔다.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나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양변기에 점심에 먹었던 것들을 모두 쏟아냈다. 사장과 함께 먹었던. 모든 걸 토하고도 더 토하고 싶었다. 나 자신이 몹시 역겨웠다. 움직일 수 없었다. 한동안 양변기에 내 몸을 기대고 쉬었다.


  점심시간이 꽤나 지난 시간에야 돌아갔지만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부장은 지금 왔냐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나도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으니까.


  오후는 흘러갔다.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나는 그럭저럭 적응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단 말인가. 하루가 끝나갈 무렵 나는 혼자 나 자신을 무시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그냥 나는 회사에 적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부장은 내게 다가와 미처 말을 못했는데 오늘은 회식 날이라고 말해주었다. 이제 일 마무리 하고 회식 갈 준비하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1차 밥을 먹고 이어진 2차 룸살롱은 정말 가관의 장면을 연출해내었다. 술에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부장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더 가관인 건 부장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나의 비위까지 맞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부장과 내가 노래 부를 땐 다같이 일어서서 춤추고 내가 술을 마실 땐 함께 술을 마셨다. 내가 이런 곳에서 살아왔다는 건가.


  노래를 좋아하는 나지만 노래 부를 기분이 아니라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내가 테이블에서 술을 들이키니 많은 사람들이 내 주위로 와 술을 함께 마셨다. 그리고 내 왼편에는 부장이 있었다. 술을 자꾸 들이키자 나의 행동은 무언가를 놔버렸다. 부장이 주는 술을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받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장 딸의 애인이라지만 이래도 되는 건가, 라고 생각하는 표정이 부장의 얼굴에서 그대로 들어났다. 하지만 무언가 놔버린 나의 행동은 행동으로 그치지 않았다.


  “부장님 자식 있어요?”


  부장은 애써 표정을 숨기고 웃으며 말하였다.


  “아, 자네는 모르겠군. 딸 하나 아들 하나 이렇게 둘 있어. 딸 사진 보여줄까?”


  그는 그러며 지갑에서 딸 사진을 꺼내 보였다.


  “생각 외로 진짜 예쁘네요? 몇 살이에요?”


  “고2야. 공부도 상당히 하고. 어떻게 나한테 그런 애가 나왔는지 나조차 놀란다니까?”


  그는 말하면서 딸 생각에 절로 얼굴이 흐뭇해 졌다.


  “그럼 나 좀 소개시켜줘요.”


  “그, 그게…….”


  “왜요? 제가 별로에요? 이정도 스펙이면 꽤 괜찮은 거 같은데?”


  그는 극도의 당황을 감추지 못하였다. 애써 화난 모습만큼은 감추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위 사원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자넨 애인이 있잖나…….”


  “요즘에 세컨드 하나 쯤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몸매도 좋고 얼굴도 반반하니 괜찮네요. 제 세컨드로.”


  그는 참지 못했다. 그의 오른 손이 나의 왼쪽 뺨을 강타한 건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경쾌한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룸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조용한 분위기에 난 소리를 지르며 박차고 일어섰다.


  “아니 장난 좀 쳤기로 서니!”


  주위 사람들이 말리기 시작했다. 나는 금방이라도 그에게 달려들 기세를 보여주었다. 한 사원은 참으라는 소리와 함께 나를 말리며 구석으로 몰았다. 부장은 화난 표정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번엔 당황한 표정이 화난 표정 깊숙이 숨어있었다.


  그렇게 그날 회식은 파투가 났다. 사람들은 화해를 권유하였지만 -부장은 거기에 마음이 있는 듯 보였지만- 나는 화해하지 않았다. 한 사원은 부장을 위해 대리 운전을 불렀다. 부장을 위해 대리운전을 부른 사원은 나에게 자신의 차에 타라고 했다. 그는 술을 못 마시는 건지 아니면 나를 위해 안 마신 건지 술 한 잔 안 한 것 같았다. 나는 당연한 듯 그의 차에 몸을 실었다.


  그의 입은 차 안에서 쉬지 않았다. 거의 듣지 않았지만 대부분 부장을 욕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피웠다. 담배 연기가 차 안을 메웠다. 운전석의 그는 여기에 털라며 종이컵을 넘겨주었지만 나는 그걸 받고도 차안 바닥에 담뱃재를 털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나 참 유치하다. 유치해서 봐줄 수가 없다.




  30분 늦은 출근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도착하자 온 사원들이 나를 쳐다보는 건. 나는 30대의 나이에 조금은 안 어울리는 후드티와 밖에는 캐쥬얼한 자켓을 입고 있었다. 양복들 사이에서 물론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은 채 곧바로 부장에게 갔다.


  분명 부장은 양복을 갖춘 채 장소와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도 나보다 그가 더 어색해 보였다. 그가 더 어색해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그 놈의 술이 말썽이죠.”


  그는 나의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당연히’ 받아주었다.


  “그래, 술이 말썽이지 정말 자네가 본심으로 그런 말을 했겠나. 나도 때린 것도 있고 하니……”


  “그래서 말인데……”


  나는 그의 말을 일방적으로 끊고 말했다.


  “회사 그만 두겠습니다. 여기 사직서입니다. 아무리 술 때문이었다고 해도 저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네요.”


  그에게 준비한 봉투를 주었다. 그는 경악한 표정으로 사직서를 보고 나를 보았다. 몇 번을 번갈아 보고 나서야 단호한 표정으로 그는 봉투를 나에게 다시 밀며 말하였다.


  “나는 받을 수 없네.”


  “왜 받을 수 없다는 거죠? 일개 과장이 사퇴를 하려고 사직서를 내려는데 부장이 받을 수 없다면 그럼 누구에게 내야 되죠? 직접 사장에게 까지 가야합니까?”


  그는 말없이 분노한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고 들어내었다.


  “어쩔 수 없이 자르셔야 될 겁니다. 저는 여기서 무단조퇴를 하고 갈 거거든요. 뭐 안 자르시고 월급만 계속 주신다면야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는 이만.”


  인사를 90도로 깍듯이 하고 나는 퇴장하였다.




  회사에서 나온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예나씨에게 전화가 왔다. 나의 사퇴가 그녀의 귀에까지 들리게 된 것일까? 그녀가 전화한 벨소리는 급박하게 들렸다. 벨소리가 한동안 울리다가 끊어지고 다시 울리다가 끊어지고 그러기를 대여섯 번을 해서야 이 분이 포기할 생각 없다는 걸 깨닫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영준에게 현황 보고도 하고 이리저리 달라진 길거리도 걸어보았건만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어제 하루 회사에서 참고 보낸 시간보다 더욱 더디게 흘러갔다.


  결국 해가 아직 질 생각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약속장소에 와버렸다. 겨울, 평일 낮의 공원은 한산했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어린아이,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러 나온 아주머니, 어찌된 영문인지 학교엔 안 있고 농구공을 가지고 왔다갔다 거리는 학생들, 이런 부류가 몇몇 지나칠 뿐이었다. 풍경은 지루하였으나 의미 없이 걸을 때보다 빠른 속도로 시간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뜨면 뜰수록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땅거미가 지고 가로등이 켜짐을 느꼈을 때 그녀가 내 앞에 와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출근 하고 바로 왔는지 그녀는 하얀 코트에 안에는 검은색 조끼 그리고 셔츠를 입고 긴 치마를 입은 단아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었다. 영준이 내가 기억상실증이라고 말하지 않고 만났다면 몰랐을 만큼 그녀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나영아.”


  “했던 말 또 말하기 싫거든?”


  그녀는 시작부터 상당히 차갑게 말해왔다. 난 그 차가움에도 기분이 좋아 웃으며 말했다.


  “일단 앉아. 앉아서 얘기하자.”


  아무 말 없이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잠시 침묵한 뒤에 앞을 바라다보며 조용히 말을 꺼내었다.


  “기억나?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장소가 이곳인거?”


  그녀는 비웃었다.


  “우리가 헤어진 장소도 이곳이었지.”


  “…….”


  여기서 헤어졌었다니. 말을 잘못 꺼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나 아직도 가지고 있다. 네가 사 준 핸드폰. 이젠 잃어버려도 누가 쳐다보지도 않을 고물이 되었는데 버릴 수가 없더라.”


  “네가 사준 내 핸드폰은 네가 부셨었지. 헤어지는 날. 바로 이 곳에서.”


  “…….”


  이게 아닌데. 자꾸 이야기는 틀어졌다. 나는 다급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 그거 기억나. 나 되게 아팠을 때 있잖아……”


  그녀는 참을성이 다다랬는지 끝까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버럭 소리쳤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데! 지금 와서 옛날이야기 다시 꺼내서 뭐 어쩌자는 건데! 뭘 말하고 싶은 거야! 3년 전에 너한테 차인 거? 차이고 나서도 미련 버리지 못해서 내가 이 장소에서 너한테 매달린 거? 그러자 당신이 전화하지 말라며 내 핸드폰 뭉개 부셔 버린 거?”


  그녀의 말엔 조금씩 울음기가 섞여 나왔다. 그의 흥분을 가라앉혀야겠다는 생각에 끼어들려고 했지만 그녀의 마지막 대사에 난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당신도 영준씨에게 들어서 알 거 아냐! 내 입으로 말해줄까? 나 다음달에 결혼해! 그런데 이제 꼭 한달 남았을 때 나한테 찾아와서 뭐 어쩌라는 거야!”


  멍 해졌다. 결혼이라니.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남자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사랑했었으니까. 하지만 다음 달에 결혼이라니…….


  난 정신을 차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돌아오라고.”


  그녀는 문자 그대로 무척이나 차갑게 냉소를 지어보였다.


  “장난해, 지금? 니 여자친구 아빠가 사장인 회사에서 짤리기라도 한거야?”


  “그게, 사실……. 어. 오늘.”


  다르게 말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미친놈.”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뒤 돌아 가버렸다. 나는 가방을 한번 붙잡아 보았지만 그는 신경질 적인 뿌리침으로 내 손을 내쳤다. 쫓아가고 싶었지만 쫓아갈 수 없었다.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머리가 정말 물리적으로 지끈지끈 아파왔다.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 울었을까? 어두운 방안, 눈물 한 방울 쉽게 보이지 않던 내가 그동안 모아놓은 눈물을 모두 쏟아내어 베게를 적셨다. 자꾸 나영의 말이 내 머리에서 울렸다. 나영의 말이 울리면 울릴수록 기억은 뒤집히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내 머리는 잠잠해 졌다.




  “어떻게 된 거야?”


  카페에 내가 들어서는 것을 보자마자 예나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음표인지 느낌표인지 구별을 하기 힘든 강한 어조로 그녀에게 처음 듣는 반말과 함께 물어왔다.


  “앉아요.”


  나는 그녀가 있는 테이블에 가 먼저 앉으며 말하였다. 그녀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어투로 입을 오물거리며 다시 말하려 하였다. 하지만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할 말 있어요.”


  나의 느리지만 강한 말에 그녀는 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들을 자세를 취하였다. 그녀의 이질적인 차분함을 보고 나는 말을 시작하였다.


  “사실 있잖아요. 어제……”


  “들어줄게. 대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말부터 놔.”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어제 나요, 전(前) 여자친구를 만났어요.” 이 말을 시작으로 나는 오늘 아침부터 준비해왔던 나의 말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조심히 꺼내기 시작했다.


  “참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군요. 세 걸음만 나가도 모르는 것 투성이라 간첩이라 불릴 만큼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는데, 그녀만큼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었어요.


  지금 거울을 보면 제 모습이 퍽 어색해요. 3년이란 세월 속에 묻혀버린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낯설게 느껴져요. 그녀가 아닌 저는 세월이란 걸 그대로 받아들였나 봐요. 좀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하기라도 해봤으면 한데 말이죠.


  생각해보면 그 세월 속에 변한 건 내 겉모습 뿐은 아닌 것 같아요. 눈가에 주름이 생길수록 배에 살이 붙을수록 걷는 게 힘들어 질수록, 나의 마음 또한 함께 노회한 것 같았던 거 같아요. 3년이란 세월 속에 노회한 것들, 얼굴 뱃살 뼈 등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 마음이 노회했다는 사실이 너무 서글퍼지네요.”


  나는 숨을 고르려 잠시 말을 쉬었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은 처연하게 느껴져 왔다.


  “말 놓으라니까……. 말 놓고 말해도 돼.”


  “예나씨가 그랬죠? 제가 과거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좀 더 현실에 충실했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건 아니에요. 저에게 과거란 쉽게 포기할 만한 것이 아니에요. 힘든 일이 있었던 과거 때문에 회상하기 싫다면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되죠. 저는 그렇게 쉽게 과거를 놓아줄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예나씨에게 과거이야기를 안한 건 이런 이유이었을 거예요. 과거에게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거죠. 과거를 언급하기에 너무 지금에 내가 부끄러워서, 그래서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예나씨를 처음 만났을 때는 몰랐어요. 그냥 사람이 변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닌 거 같아요.


  예나씨는 제가 다니는 회사의 따님이었고. 3년 전까지 백수였던 나는 과장이 되어있고. 상당히 괜찮은 집에 살고 있고. 그제야 알았어요. 제가 왜 예나씨에게 과거이야기를 안 했는지, 아니, 할 수 없었는지. 죄송해요 예나씨.”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가려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까 이야기하며 슬쩍 촉촉해진 눈망울을 보았다. 그럼에도 단호하게 말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이 괴로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만드는 침묵을 참을 뿐.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억지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집어는 듯 했다. 그래서 더욱 그녀의 눈은 뜨겁게 충혈 되었다. 붉은 눈으로 그녀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말 놓으라는 말은 안 할게.” 숨을 한 번 뱉고 이어 말했다. “내 이름 한 번만 불러줄래? 존칭어 붙이지 않고. 그냥 내 이름만.” 내 얼굴을 바라보며. “불러줄래?”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협상은 이루어졌다. 마치 30대의 나처럼 친근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예나야. 황예나.”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들게 막고 있는 눈물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남은 것들은 시간이었다. 남는 게 시간이었다. 다시 백수 때로 되돌아갔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으나 주어진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집안 잡일과 아르바이트. 다시 마로니에 공원으로 가 초상화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를 나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직 겨울이 끝나기 전이라 사람들은 밖에 많이 보이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수입도 그리 크지 않았다.


  해가 진 뒤에는 무얼 할까 고민을 해보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에게 남은 시간에 해야 할 주어진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안 그래도 추위에 떨며 그녀를 기다렸건만 나영의 어조는 시작부터 차가웠다.


  “이거 주려고.”


  장미 꽃 한 송이. 그녀에게 붉게 오른 손으로 나영에게 꽃을 내밀었다. 나영은 나의 손을 무시한 채 유유히 자신의 집 앞으로 향했다. 난 무시당한 손이 무안하여 무시당한 자세로 잠시 가만히 있다가, 나영이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있을 때 나영 어깨에 있는 우편함에 손을 뻗어 장미꽃을 꽂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일도 여기에 둘게.”


  그녀는 짜증을 넘어 분노를 했다.


  “다음 달에 내가 결혼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래?”


  그녀의 사자후에 한걸음 밀려난 상태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결혼할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나보다 한 살 많고, 직업은 공무원이야.”


  “불행한 사람이구나?”


  “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뒷걸음치며 그녀에게 말했다.


  “헬렌 켈러의 말. 장님으로 태어난 것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시력은 있으되 꿈이 없는 사람이다. 나 말야, 나를 뒤엎을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네가 결혼할 때까지 나, 최대한 포기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각오하고 있어.”


  “‘최대한’ 포기 하지 않는다니. 넌 그런 남자야. ‘결코’가 아니라 ‘최대한’을 선택하는!”


  “알았으니까, ‘결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세상에 섞여 살다보면 ‘결국’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이젠 알았으니까. ‘결코’라는 말 함부로 쓰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만큼 최선을 다 할 거야. 내일도 우편함에 꽃 놓고 갈게 잘 자.”


  그녀를 등지고 뛰었다. 바람이 차다. 소리는 낮다. 달은 하늘에서 비춘다. 여러 가로등에 여러 그림자가 생긴다. 사람은 많지 않다. 조용하다. 그리고 가슴은 설렜다.




  지구는 그리도 고대하던 온난화에 진입한 것 같았다. 아니면 봄이 되어가고 있거나. 이유가 무엇이든 어쨌든 날씨는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다. 기온이 오르니 사람들은 당연한 듯 공원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 나는 하루가 조금 더 바빠지고 수입도 조금 더 늘어났다. 삶이 조금씩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친구와 함께 온 여자의 얼굴은 그려주고 계산까지 완벽히 마치자 곧 바로 다른 여성이 나타나 의자에 앉았다. 조금 쉬고 싶었는데.


  “저도 초상화좀 그려주세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 예나씨.”


  그녀는 밥을 먹고 왔다고 하였으나 나는 몹시도 배고팠다. 우리는 결국 의견을 절충하여 던킨도너츠에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도넛을 입에 구겨 넣으며 물어봤다.


  “영준씨가 가르쳐 주던데요?”


  “아, 그 입 싼 자식.”


  “제가 온 게 싫어요?”


  “농담이에요. 밥 혼자 먹었어야 됐는데 고맙네요. 그건 그렇고 이번엔 왜 왔냐는 뜻에서, 어떻게 왔어요?”


  그녀는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살짝 요염한 얼굴로 몸을 앞으로 빼었다.


  “억울해서 왔어요.”


  “억울해서……요?”


  그녀는 몸을 뒤로 빼고 머리를 뒤로 묶으며 말했다.


  “네, 억울해서. 그것보다, 선아씨, 기억 돌아왔죠?”


  프라이팬으로 맞은 뒤통수. 뒤로 돌아보니 프라이팬 따윈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이건 영준이도 모르는 건데.”


  “선아씨가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묘하게 익숙했어요. 마치 30대의 선아씨가 저를 불러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한 마디로 알아채다니, 대단하시네요.”


  “사실 저도 설마 했어요. 맞았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기억 돌아왔으면 더 쉽겠네요. 그러면 이제 하고 싶은 말 할게요. 제가 억울했던 일. 재밌는 일.”


  나는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그녀도 자신의 말에 집중한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었다.


  “저는 그래도 제가 꽤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얼굴부터 성격 몸매 그리고 집안까지. 애인이 있는 남자라도 10분이면 넘어오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3년 전이라면 나이도 어리고. 그런데 선아씨 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처음엔 분위기 좋았죠. 제가 선아씨 지갑 찾아주고 선아씨가 밥을 사고. 선아씨 미소가 참 예뻤어요. 그래서 그냥 관심 좀 표현한 건데. 어떻게 그렇게 질색을 해요? 저도 선아씨한테 큰 관심은 없었거든요? 지가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까지 하대해,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재밌는 이야기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제부터 재밌어 질 거예요. 잘 들어봐요. 그렇게 차인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죠. 한 달 뒤, 선아씨에게 전화가 오더군요. 자기와 진지하게 만나보지 않겠냐고. 그런데 저, 생각보다 쉽게 수락하지 않았어요? 네, 복수하고 싶었거든요. 선아씨는 마침 백수였겠다, 우리 아버지 회사 취직시키고 되게 후계자 될 것처럼 몇 년간 우리 회사에서 높여주고 처절하게 차버리자, 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예나씨 무서운 사람이었네요.”


  “좀 그렇죠? 이제 점점 다와가고 있었는데 복수에 시간이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렇게 차이다니……. 선아씨, 생각해보세요. 억울하겠어요? 안 억울하겠어요?”


  “억울하겠네요. 저라도 많이 분통했겠어요. 그런데 말예요, 예나씨 그거 알아요?”


  “뭐요?”


  “제가 예나씨를 처음 만났을 때 질색을 했던 건 예나씨의 관심부터가 아니었어요.”


  그녀는 궁금한 눈초리를 보내왔다.


  “예나씨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자꾸 본인의 집안을 드러내고 싶어 했어요. 아마 그것 때문이었던 거 같아요. 그냥 거절의 표시를 할 수 있었는데 질색을 했던 건. 예나씨는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당신의 집안이 없어도 말이죠. 그거 하나만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답변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응시했다.


  “선아씨의 지금 그 미소가 좋았는데. 나와 함께 있을 땐 별로 보지 못한 거 같네요.”


  “그런가요?”


  “영준씨한테 듣자하니 선아씨 전 여자친구 남자친구도 있다던데 다시 저랑 잘해보는 거 어때요?”


  그녀는 교태어린 표정으로 나를 유혹해왔다.


  “그래놓고 복수하려구요? 됐네요.”


  교태어린 그녀의 미소는 천진난만한 미소로 바뀌었다.


  “들켰네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았고 해서도 안 될 거 같았다.


  “예나씨, 저는 이만 가볼게요. 여기에 더 있다간 진짜 예나씨에게 넘어 가겠어요.”


  “그러세요. 잘가요. 전 여기 조금 더 있다가 갈게요.”


  문을 향해 걸었다. 걸음이 갈수록 빨라졌다. 두려워졌다. 나도 모르는 새 나의 마지막 말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 안주하고 싶은 기분이 있다는 걸 느꼈다는 그 사실에 놀랍고 두려웠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과연 나의 진심이 또 그녀에게 들켜버릴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두려울 것 없었다. 어차피 그녀와 다시 만날 일은 이제 없을 테니까……


  집에 가는 길. 문득 그녀의 말이 진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낯선 이에게 한 번 차였다고 3년이란 시간을 복수를 위해 투자했을까? 복수가 못한 게 아쉬워서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말하였을 때 그리 눈물을 보였을까?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예나씨를 만나고부터 부쩍 삶이 힘에 부쳤다. 매일 돌아와 그림을 그리고 있긴 했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밤을 몸서리쳤다. 정말 예나씨를 포기한 게 잘한 일일까, 라는 후회를 매일 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같은 상태라도 3년 전에는 그래도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세월에 지나며 자신감이 희석된 것 같았다. 나를 지탱해 줄 게 필요했다.


  매일 매일을 벼텨 가는 동안 어느새 그녀의 결혼식까지는 열흘이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나의 행동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매일 나영의 집 앞 편지함에 장미를 두고 집에 왔다. 그 날도 똑같은 날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날은 나영이 밖에 나와 있었다.


  “나 기다렸어? 좀 따뜻해지긴 했다. 그치? 그래도 고맙네. 나 가능성 있는 건가?”


  “그만해.”


  날씨는 이렇게 따뜻해지고 있건만 그녀는 그대로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나는 그녀를 무시한 채 편지함에 꽃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왜 이렇게 유치해! 도대체 몇 살이야!”


  “네가……” 힘들었다. 들어내지 않으려 했지만 자연스레 표정에 모든 나의 감정을 들어내 보여주고 말았다. “나를 사랑한 건 몇 살의 나였어?”


  그녀는 흠칫 놀랐다. 그녀의 말문이 막혔다. 이 기회를 틈타 나의 입은 터진 물길처럼 말이 줄줄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음속 담아두었던 게 터져 나왔다.


  “이제야,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어. 내가 지어야할 모래성을 버려두고 이상한 모래성을 짓고 있었어. 3년이 지나서야 잘못된 모래성이란 걸 깨닫고, 전 모래성 터를 발견해서 다시 지으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정말. 전에 짓던 모래성은 이미 터만 남아있어. 다시 세우려 노력했지만 모래는 그동안 너무나 메말라서 쌓아 올릴 수가 없어. 나 혼자론 안돼. 습기가 필요해. 물이 필요해. 나말이야, 네가 필요해. 돌아와 주지 않을래?”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의 과한 욕심이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이제 포기해야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미안. 너무 내 생각만 했지? 나도 알고 있었어. 안 된다는 거. 하지만 20대의 나의 기분으로 돌아가 보고 싶었어. 그러려면 네가 필요했어. 너를 보지 못하더라도 너에게 꽃을 주면 너와 함께하는 기분이 들었어. 그러면 자꾸 용기가 나고 그랬어. 이기적이라는 거 아는데 자꾸 이러게 되네. 놓아줄게. 이젠. 나, 너 한번 안아 봐도 될까?”


  그녀는 여전히 침묵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살포시 안았다. 그리고 놓았다.


  “이런 말하면 네가 유치하다고 할까봐, 싫어할까봐 안 하려고 했는데, 해야겠다.


  나영아, 행복해야 돼.”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억지로 나영이 볼 때까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나영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온 몸의 힘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다리를 뻗고 앉은 상태로 벽에 기댔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하늘을 보며 몹시도 좌절하였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는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분위기에 취해서 혼자 괜히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그녀를 놓아주고 말았다. 괜한 폼 때문에 여자를 놓아주다니 아,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가끔 나는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후회되고 후회하였지만 그렇다고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날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폼 잡으며 놓아주겠다고 말했는데 다시 나타난다니……. 생각만 해도 정말 쪽팔리고 부끄러울 일이었다. 그렇다고 놓아주긴 또 싫은데 정말 이틀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혼자 딜레마에 빠져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왕 쪽팔린 거 한 번 제대로 쪽팔려 보자는 것이었다.




  온 몸이 불편했다. 붉은 곱슬머리의 가발에 밤탱이 코. 커다란 나비넥타이. 마지막으로 붉은 멜빵바지. 제대로 쪽팔리는 거랑 제대로 유치한 거랑 헷갈린 게 아니냐고 혹자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렇게 말하면 나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였고 나영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임펙트를 줘야 했다. 이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그녀의 회사에서 그녀가 동료들과 함께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커다란 신발을 신고 실룩거리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짜잔, 나영님!”


  나영이 나를 보았다. 물론 동료들도 나를 보았다. 장미 꽃 한 송이와 풍선 다발을 그녀에게 나눠주며 장난스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나영님의 파혼을 기원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경악을 했다. 물론 그 중 나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의 충격발언은 이어졌다.


  “나영님의 파혼을 기원하며 제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초상화를 무료로 그려드립니다. 이 티켓을 받으시고 마로니에 공원에서 선아를 찾아주세요. 제 시간에 오세요. 안 그러면 티켓 사용 못하세요. 꼭 제 시간에 오셔야 돼요.”


  여기서 포인트는 나영이 화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고는 도망갔다. 솔직히 너무 쪽팔렸다. 그녀는 티켓을 보고는 나에게 혼자말을 했으나 뛰어가는 나에게 까지 들릴 정도로 컸다.


  “날짜가…나 결혼하는 날이잖아? 시간도 딱 결혼할 시간이고?”




  최후의 도박. 승산이 없는 도박이었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은 승산이 없는 곳에 모든 것을 걸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최후의 기회라면 더 더욱 그랬다.


  시간이 지나는데도 나영에게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나한테 전화를 해서 화를 내거나, 아니면 나에게 돌아오고 싶다고 하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어찌 이렇게 감감 무소식일 수가 있는가.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설레는 마음으로 보면 언제나 영준이었다. 이 녀석이 내가 그런 짓을 한걸 아는지, 요즘 일부러 더 전화를 많이 하며 장난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은 흘러 그녀의 결혼식 날이 왔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씻고 몸단장을 하고 나갈 준비를 하였다. 두꺼운 코트를 입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밖에 나오자 너무 더웠다. 세상은 이미 완연한 봄으로 진입을 완료한 상태였다. 나는 집에 돌아가 다시 입을 옷을 고민해야했다.


  완벽하게 다시 입고 거울을 한 번 보고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며 공원으로 출발하였다. 시간은 여유롭다는 표현이 많이 부족할 정도로 남고 남았었다. 하지만 일찍 가서 그녀를 기다리는 기분을 오랜만에 맛보고 싶었다. 비록 오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날씨가 따뜻해서 그런가. 주말이라서 그런가. 참 그 날은 운수가 좋았다.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 날은 공원에 사람이 많다 못해 넘쳐흘렀고 그것은 잠재 고객이 많다는 걸 의미했다. 내 주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그 잠재고객들 중 일부가 고객이 되어 그림을 그려주어 돈을 받고 있건만 나는 오늘 예약손님이 있으니 받을 수 없다는 말로 모두 정중히 돌려보냈다. 정중히 돌려보내려 했으나 정중히 돌아가지 않는 고객들도 있었다. 왜 자기한테 그림을 그려주지 않냐는 둥 사람 차별하냐는 둥. 성질같아선 콱 싸우고 싶었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기에 최대한 사과를 하며 돌려보냈다. 절대 그의 팔의 우락부락한 근육을 보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날씨는 화창했다. 공원에 노점상들이 내가 처음 왔을 때보다 눈에 띄게 늘어난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사람이 늘어났으니 장사치들도 늘어나야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따라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경제 정치 세계사 등등. 자꾸 이것저것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세상을 한탄해보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하며 세상은 아직 아름답다고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시간은 어느새 몇 시간이 지나 있었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게 두려워 재미없는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빠르게 흘러갔다. 정말 지루하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게 맞나? 문득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제 발로 온 손님들을 쫓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니 시계는 이미 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의 결혼식은, 아마도 2시였다.


  시계 가지고 오지 말걸. 핸드폰도 가지고 오지 말걸. 시간을 아니까 이렇게 슬퍼지잖아. 고개를 떨구었다. 어차피 예상하고 있던 사실 아닌가. 혼자 자책해보았지만 예상한다는 것과 경험한다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그림으로만 그려졌던 좌절이 나에게 이제는 현실도 다가왔다.


  내가 좌절을 맛보며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꼭 찾아와서 초상화 그려달라는 눈치 없는 손님, 꼭 한 명씩 있었다.


  “저기 초상화 그려주시나요?”


  “오늘은 안 해요.”


  “오늘 안 해요? 무료로 그려준다고 해서 티켓도 들고 왔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았다. 역시나 그녀였다. 나영이었다.


  “정말로……왔어?”


  “티켓까지 줬으면서 그런 말 하기야?”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예쁘게 그려줘.”라는 그녀의 말에야 정신을 차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얼굴 윤곽선을 잡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기억은 다시 돌아왔어?”


  연필을 멈췄다.


  “어떻게 알았어?”


  “영준씨가 가르쳐 주던데?”


  “아, 그 입 싼 자식.”


  그녀는 사랑스럽게 웃었다. 할 말이 있었는지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에게서 담배냄새가 났어.”


  나영을 바라보았다. 나영도 나를 보고 싱긋거리며 웃어주었다.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네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를 안았을 때, 너에게서 담배냄새가 났어. 네가 나와 헤어지고 담배 끊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다시 나를 찾기 시작했고 너의 몸에선 담배 향이 났어. 네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다시 돌아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영준씨에게 물어봤어. 너에게 무슨 일 있냐고.”


  이번엔 내가 답변해주어야 할 차례였다.


  “참 아이러니 하다. 네가 참 싫어하던 담배인데 역설적이게도 너를 다시 찾아주다니. 기억이 돌아왔냐고 물었었지? 어, 사실 돌아왔어. 너와 오랜만에 다시 만난 날, 그 날이었어. 애써 무의식이 감춰왔던,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3년의 기억들을 너와 만나고,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무의식은 기억을 다시 내줄 수밖에 없었어. 다시 기억은 돌아왔지만 감성까지도 다시 3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뭐 회사에서 사고치고 나와서 그럴 수도 없었지만 말야.”


  그녀를 그리며 일 주일간 불안했던 기억들을 회상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올 거였으면 연락이라도 한 번 하지. 얼마나 불안하고 힘들었는데. 연락이라도 한 번 해주지…….”


  “네가 우리 집에서 찾아왔을 때, 너에게 담배냄새가 났을 때, 그때부터 사실은 마음이 조금 흔들렸었어. 그래서 영준씨에게 너에 대해 물었었고. 그리고 네가 회사로 찾아왔을 때 결심했어. 너에게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사실 그 때부터 파혼을 준비했었어. 신랑 될 ‘뻔’ 했던 사람에게 선언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다 연락 돌리고, 우리 집에도 말하고. 그리고 오늘을 기다렸었어.”


  난 그리던 손을 멈추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연락 안했어. 괜히 걱정하고 있었잖아”


  “네가 좋아했던 나는 몇 살의 나였어?”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나를 좋아했던 시기도,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 시기도 모두 20대의 서로였으니까. 나는 웃었다.


  “우리 참 유치하다. 우리 정말 30대 맞아?”


  그녀는 나에게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나, 아무리 그래도 경제력 없는 남자는 싫어. 네가 언제나 이 자리에 있는 다면 언젠간 내가 너를 버릴지도 몰라.”


  “걱정마. 기대, 저버리지 않을게. 후회하게 하지 않을게.”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도화지로 옮겨갔다.. 그녀의 얼굴을 그리다 나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과연 그녀의 저 아름다운 얼굴을 제대로 그릴 수 있을까? 그녀의 미소는 모나리자보다 신비로웠고 그녀의 얼굴은 비너스보다도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