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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I'm The Last Romantic Girl

2009.07.13 08:03

소나무 조회 수:707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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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까지만 해도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사랑’이었다. L정부가 2010년대에 급히 파 놓은 운하가 너무 많은 말썽을 일으켜서 다시 묻는 공사를 하느라 나라 경제가 휘청이고, 통일 후의 급격한 사회 변화 탓에 하루가 멀다하게 폭동과 시위가 터지고, 심지어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며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철저히 착취당하던 그 와중에도 그들은 꿋꿋하게 사랑을 노래했다. 홍대 앞의 인디밴드도, 수십만 명의 팬들을 몰고 다니던 아이돌 그룹도, 아직 앳된 티를 내며 열심히 글을 쓰던 20대 신인 작가도, 심지어 취업이다 뭐다 하며 토익 책에 파묻혀 있던 아주 아주 평범한 학생도, 이제 갓 사회에 진출해서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다니는 청년도,


사실 마음 한 구석에는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비록 여자 친구와의 달콤한 키스 대신 씁쓸한 담배가 그들의 가진 전부였고, 애인과의 뜨거운 밤은커녕 영어, 영어, 영어, 취업!(공대생들의 경우에는 리포트, 리포트, 실험, 수학, 등으로 약간 레퍼토리가 달라졌다)들이 쫓아오는 꿈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지만 말이다. 삭막한 세상이었건만, 슬프고 절절한 로맨스 영화가 상영되는 날에는 영화관에서 넋을 놓고 우는 여인들도 이따금 보이고, 햇살 좋은 날에는 사랑의 환희와 기쁨에 가득 찬 청년들이 가슴에 꽃다발을 한 아름씩 안고 거리 이곳저곳을 거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어.”


윤우씨는 매정한 말투로 툭 내뱉고는 피식 웃으며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어. 국제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문제는 그뿐이니, 급격히 진행된 지구온난화 때문에 결국 우리는 모두 화성에 가서 살아야 할 판이라고. 게다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 냈던 로봇들은 이제 저들끼리 손을 잡고 인간들을 지배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고.”


“……그래서요?”


“그래서요, 라니.”


윤우씨는 당황한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역시, 이래서 어린애들은 안 된다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현대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비합리적이고 불필요한 감정이란거지. 이미 ‘사랑’자체가 허상에 불과한, 다시 말해 ‘안전한 번식과 양육을 위해 여성 집단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기제’에 불과하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을 통해 밝혀졌어. 이제 그건 한 인간을 끝없는 우울과 자기 비하로 몰아넣고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이끌어가는 끔찍한 감정에 불과하다고.”


예의 그 지적인 미소를 슬쩍 지어보이며 윤우씨는 흠흠, 하고 말을 끝맺었다.


“세상에 사랑 말고도 걱정해야 할 문제가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데. 좀 더 생산적인 걱정을 하지 그러니.”


“쳇, 바보.”


나는 입술을 뾰죽히 내밀었다. 늘 이런 식이다. 윤우씨라고 다를 거라고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꺼내면 나는 마치 선사시대에서 온 사람인 것처럼 바보 취급을 당한다. 이제는 더 이상 시인들도 화가들도 가수들도 내 편이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이 밝혀지고, 그에 관여하는 수십 가지 호르몬들이 철저히 분석되고, 사실 사랑이란 보여 지는 것만큼 낭만적인 감정이 전혀 아닌, 철저히 동물적 본능에 의한 일종의 환각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이 알게 되었을 때,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은 지성을 가지고 있었고, 효율성과 합리성을 추구했으며, 따라서 사랑이라는 비효율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감정은 마땅히 사라져야만 했다. ‘사랑 퇴출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수상한 슬로건을 내건 이 운동은 결혼한 지 몇 년 만에 배우자에게 질려버린 20대와 30대 유부남·녀들을 주축으로 하여 급속히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막 풋풋한 사랑에 눈뜨기 시작해야 할 열다섯 살 중학생들마저 그에 동참했을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있었다. 이 운동의 핵심 주장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현 인류의 가장 소모적이고 무가치한 감정인 사랑을 몰아내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변화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지성을 가진 로봇들이었다. 이제는 이미 지적능력에서나 물리적 능력에서나 자신들보다 훨씬 하등한 인간들이, 별 거 아닌 감정인 ‘사랑’ 하나가지고 로봇들을 무시하고 냉혈한 취급하며 심지어 불쌍히 여기기까지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우 가소로웠던 것이다. 인간들은 그들의 마지막 보루를 스스로 불태우려 하고 있었다. 로봇들은 ‘인류의 또 한 번의 진화’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척 하면서, 이제는 그들을 정말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며 축배를 들었다.


 


사랑을 할 때 사람의 뇌는 마치 마약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연구 논문이 ‘네이처’지와 ‘사이언스’지의 표지에 실렸다. 맙소사, 마약이라니. 그런 비이성적인 상태를 현대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시인들은 탄식을 하다 가족을 데리고 깊은 산골로 들어가 버리거나, 더 이상 사랑에 대한 시를 쓰지 않았다. 소설가들은 그들보다는 좀 더 저항적이었다. 저마다 독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를 써서 이 시대에도 진정한 사랑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이야기를 읽지 않았다. 대신에 ‘20대, 주식에 미쳐라’, ‘우주적 경쟁시대에서 성공하는 7가지 방법’, ‘부자가 되기 위한 처세술 103’같은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아이돌 가수들은 이제 사랑에 대한 노래를 부르는 대신 아프리카에 있는 불쌍한 아이들의 사연을 담은 애절한 발라드를 불렀다. 인디밴드들은 예전처럼 똑같이 기타를 때려 부수고 드럼을 뒤엎으며 더러운 사회를 욕했다. 다만 달라진 점은 어느 누구도 감히 사랑노래를 부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이다. 친구들은 나를 볼 때마다 가엾다는 표정을 짓고, 언제쯤에야 정신을 차릴 거냐고 묻는다. 나의 사랑을 거절했던 세 명의 남자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물론 그들은 좀 더 매정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아아, 슬프도다, 외로운 로맨티스트의 기구한 운명이여.



 


“바보는 무슨, 아직도 사랑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너야말로 가장 한심한 거라고. 무슨 살아있는 구시대의 유물이냐.”


“그래도 아저씨는 몰라.”



 


한참동안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마침내 윤우씨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내 볼을 주욱 잡아 늘어뜨린다. 볼은 아프지 않은데 마음이 저릿저릿 아프다. 이렇게나 다정한 손길인데, 사실은, 어떤 애정도 담겨있지 않은 거겠지.


하지만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다. 나는 얼른 까치발을 해서 윤우씨의 볼에 쪽, 하고 기습뽀뽀를 해버렸다. 윤우씨는 굉장히 난감해진 것 같다.


 


“아, 곤란한데. 꼬맹이 주제.”


두고 봐요, 꼭, 반하게 해 버릴 거야.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윤우씨. 어쩜, 저런 모습도 멋있어 보일까. 난 절대 포기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