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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단편] 아빠는 붉었다

2010.06.21 01:52

핑거프 조회 수:434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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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순수


 


<아빠는 붉었다>


 


 


 


포도는 아냐. 좀 더 짙은 색깔이고 그것보다는 작아. 뭐야 그게? 블루베리라고 알아? 아니. 이게 블루베리야.


 


 


그렇게 난 블루베리라는 과일을 처음 보았다. 유리구슬마냥 동그랗게 생겼는데, 연약하게 생긴게 꼭 산딸기 같다. 원영이 한 움큼 펴보인 남색 구슬을 손가락으로 마냥 짓누르니 그가 손을 꼭 닫아버린다. 남색이었는데, 짙은 핏빛이 손에 남았다. 원영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조막만한 손을 만 채 그는 내 곁을 떠났다.



아직도 블루베리라는 이름이 낯설다. 일상 속에서 다가온 적도, 다가가지도 않았던 그 이름. 사과나, 배, 심지어 포도조차 밀어내지 못한 그 외래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원영이 나에게 주려 했던 그 과일의 값이 무척이나 비싸다는 걸 스무살 무렵, 이제서야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나와 거리가 먼 과일인가? 원영은 그 날로 저 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 나에게 블루베리의 붉은 색만을 남긴 채.
갑자기 유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순전히 엄마 탓이었다. 업을 가정 주부로 삼으며 소일거리를 찾던 엄마가 어느 날 그, 보라색 과일을 한 보따리만큼 집에 들여왔다. 포도도 아닌 그 풋풋한 냄새가 원영이를 생각나게 했다.


 


"엄마, 원영이 알아?"
"원영이? 남자친구야?"
"아니, 왜 우리 천안서 살 때 서울로 전학갔다고 했던 애 있잖아. 우리집 자주 놀러오던 아이."
"너 좋아하던 아이 말하는거야? 그 조그맣던 아이 말하는거지?"
"응."
"걔는 왜? 연락이라도 왔어?"
"아니."
"요즘 걘 뭐하고 산다냐? 그 아이 엄마는 참 싹싹하고 좋더라마는."
"잘 모르겠어."



원영이는 지독히도 나를 쫓아다녔다. 꽤 사는 집 아이었던 그는 틈만 나면 나에게 온갖 과일을 가져다 주었다. 그 과일은 내 책상에서 날파리를 꾀이며 진물을 내뿜기가 일쑤였고, 그는 그것을 보며 울상짓기가 일과였다. 일부러 그랬던 게 아니다. 항상 내가 먹을 수 있는 양보다 몇 갑절을 가져오는 그가 문제였다.


난 그것들을 치우지 않았다. 치우지 않아도 그 다음날이면 으레 내 책상은 깨끗해져 있었으니까. 하루는, 그 썩은 것들을 치우는게 정말 원영이인가 하여 학교가 파한 후 교실 구석에 숨어 있었다. 역시 원영이었다. 과일을 보는 그의 표정은 참 슬퍼보였다. 그렇게 내가 못먹는 게 싫으면 애초에 적당한 양만을 가져오던지! 소리내서 말할 수는 없었다. 원영이는 비닐봉지에 썩은 과일들을 담더니 교실을 나갔다. 따라나갈까, 했지만 숨어있었다는 걸 들키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저 작아져가는 발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다음날도, 며칠 뒤도, 원영과 나의 방과 후 조우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장마가 제 열을 있는 힘껏 냈던 그 해 여름에도 원영이의 과일 공세는 계속되었다. 그 날은 참 신기한 과일을 주었다. 포도도 아닌 것이, 조막만한 그를 닮아 유리 구슬보다 작은 것. 블루베리라 하였다.


 


"새로웁지? 우리 아빠가 처음 심은 거야."
"포도새끼야?"
"포도는 아냐. 좀 더 짙은 색깔이고 그것보다는 작아."
"뭐야 그게?"
"블루베리라고 알아?"
"아니."
"이게 블루베리야."


 


그 단단해 보이는 양이 막 다뤄도 되는 과일인줄 안 난 집게 손가락으로 쿡쿡, 사정없이 알을 눌러제꼈다. 공기빠지는 소리가 바투 내 귀를 에워쌌다. 한 알이 깨지고, 그렇게 서너 알이 으깨질 때 원영이가 손을 접었다. 내가 아무리 과일을 버려도 늘상 파란 얼굴이나 지을 줄 알았던 그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그 더운 날, 그의 열 때문에 날은 더 무덥게 느껴졌다.


 


"함부로 하지 마."
"갑자기 왜 이래? 너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상관 안 쓰잖아."
"이건 안 돼."
"왜? 포도보다 작은데, 이렇게 단단하게 생겼는데, 내가 눌렀는데. 왜 안돼? 니가 준 거 내 맘대로 하는데 뭐가 안돼?"
"안 돼. 너, 나쁘구나."
"화났어?"
"이거, 우리 아빠야. 아빠라고. 근데 왜 이렇게 함부로 해."
"과일이 아빠라고? 이제보니 너, 아주 미쳤구나?"


 


원영이는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내 손에 붉은 흔적만을 남긴 채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날 후 더 이상 내 책상엔 과일이 올라와 있지 않았고, 우리는 말 없이 지냈다. 그리고 원영이는 서울로 전학을 가 버렸다.


 


"엄마."
"왜?"
"생각해보니, 나 어렸을 때 무지하게 나빴던 것 같다."
"너 그 원영인가 뭔가 하는 애한테 못되게 했었냐?"
"응."
"걔네 엄마도 참 안됐지. 싹수 좋고 참 성실하던 사람이었는데 일이 알게 뭐람. 남편이 그렇게 된 후로 연락도 안 하고. 사람이 참 변하기가 일순간이야?"
"남편이 왜? 원영이 아버지, 무슨 사고 당했었어?"
"너 몰랐냐? 어이고, 나쁜 계집애 맞네. 고 집 널널한 과수원에 큰큰한 집 놔두고 서울로 간 이유가 다 뭐야. 걔네 아버지 새로운 농작물 심다가 비명횡사해부렀잖아. 고 큰거 감당할 능력 안 되니까 쫓기다시피 가 버린거지."
"그랬구나."


 


물살이 깊게 뇌를 파고들었다. 윙윙 울리는 머리에 더해서 휴대폰 벨소리도 크게 울렸다.


 


"연락 되면 함 알아봐라. 그나저나 이거 좀 젓고 있을래? 미숙이 이모 전화왔네."
"어? 어. 알았어."


 


내가 젓고 있는 건 블루베리였다. 그 잼 위로 원영이의 얼굴이 보글, 끓었다 사라지고, 톡, 튀었다 없어져갔다. 몹쓸 짓을 한 자책감이 거품처럼 들끓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미묘한 붉은 죽에 유년시절 내 손바닥의 흔적이 겹쳤다. 아빠야, 라고 외치던 그의 붉은 입 안이 떠올랐다.


 


"어?"


 


왜, 블루베리인데, 잼 색깔은 붉은 색이지? 블루베리, 파란색 과일. 근데 속은 붉다. 잼도 붉어. 원영이가 열을 내던 그 날도 붉었고, 그의 입 속도 붉었다. 아, 한순간 머리를 통과해 무언가 지나갔다. 그렇구나, 그래서 블루베리가 아빠구나. 파랬는데, 붉어서. 유리구슬이었는데, 내 손가락으로 짓눌러서. 그렇게 강해 보이던 아빠였는데, 그만큼 파랗게 강해 보이던 아빠였는데 이렇게나 붉은 속을 가지고 있었구나. 이렇게나 약하고 여린게, 따뜻한 게 블루베리구나.


 


"이리 줘라. 미숙이 이모가 말야, 토요일날 모임하잰다.너 그 날 시간 되지? 그나저나 니 아빠는 왜 이렇게 늦니? 하긴 매일 술마시고 떠들다보면 집은 집도 아니겠지? 얘, 듣고 있니?"


 


 


이미 난 전화기를 붙들고 수화음을 듣고 있었다.


 


 


"여보세요,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