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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일반 기묘한 이야기-Repetition(반복)

2010.08.02 02:13

악마성루갈백작 조회 수:264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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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단편 <기묘한 이야기>와 <마음을 읽는 소녀>와 약간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이야기를 안보신 분들이라도 내용 이해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0-그녀의 시점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작품 중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등은 전부 가공의 것으로, 현실의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은 바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 룬 언그알레이


 


 


 


이것은 꿈이다. 정신이 들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다. ※명석몽(明晳夢).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꿈을 꾸는 현상.


 


아아, 나는 이 꿈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변함없이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리란 것도. 이 앞에 펼쳐질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그걸 봐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눈은 전혀 감기지 않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눈은 ‘그것’을 직시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액체가 흥건하다. 거대한 웅덩이를 이루는 붉은 액체. 그것은 선홍색의 아름답다고 하면 아름답고, 불쾌하다 하면 불쾌하다고 할 수 있는,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의 붉은색을 띠고 있다. 모든 것이 선홍색으로 물들어져 있다. 역시 피다. 하지만, 자신의 피는 아니다. 내가 모르는 타인의 피. 새빨간 색의 끈적끈적한 피로 점칠 된 공간. 주위는 피로 물들어 있다. 그것도 오래되지 않은, 조금 전까지 무언가가 이곳에서 ‘일어났다.‘라는 증거이면서 앞으로 일어날 무언가에 대한 조짐일지도 모른다.


 


약하게 통증이 가슴을 죄어온다. 보통사람이라면, 미쳐버리거나 토하거나, 제정신이 아니야 할 광경을 보고 있었지만, 나는, 나의 몸은 그렇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고개를 돌리는 것 정도가 전부. 손가락도 발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육체는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강하게 구속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편에 누군가가 서 있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유 모를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심장이 터질 듯이 고동친다. 아마도 이것은 예감이며 확신. 불길함이라 불리는 독. 그러나 손을 뻗어도 그 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 이 자리에 꼼짝없이 멈춰선 채 그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윽고 서로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오고선 그 이상 앞으로 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너무나 기이한 모습이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가, 팔이, 다리가, 온몸이 흔들려 보인다. 흔들리고, 희미해지면서 그 모습을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희미하게…. 확실히, 가까이에서 보이는데 희미하게 보인다. 비틀어진다. 그의 모습이 똑바로 보이지 않는다. 몸이 멋대로 물러나려 하고 있었지만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등을 돌리는 것도, 눈을 피하는 것도 할 수 없다. 유일하게 선명한 것은 소름끼칠 정도로 새까만 두 눈동자뿐.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그것을 보고 있다.


 


우리는 희미한 눈길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어? 라는 말을 선뜻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나와 그는 묵묵히 침묵을 유지할 뿐. 이곳을 감싸는 것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정적.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원히 그대로 시간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던 침묵을 깨버리듯이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또 이렇게 만나게 되었군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그 한 마디만을 내뱉고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라는 객체를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나에 대한 생각도, 부정도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시선은 차가운 것은 아니었지만, 따스한 것도 아니었다. 마치, 그저 하나의 풍경과도 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시선처럼. 길가의 자갈을 향하는 것과 같은 시선. 쓰레기통의 빈 깡통으로 향하는 것과 같은 시선. 그의 안에서 나의 존재 가치는 그것들과 동급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나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찾을 수 없다는 듯이. 어째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거죠?


 


“하지만, 이건 언제까지고 몇 번이나 계속 될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만이 나를─


 


그는 내가 뭐라 말을 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아주 자연스럽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한 치의 망설임도, 찰나의 주저도 없이 손에 쥔 나이프로 목을 단칼에 베었다. 이윽고 날카로운 칼날이 살을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붉은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꽃잎처럼 떨어지던 핏방울은 바닥에 닿자마자 기존의 핏물과 섞여 더욱 진한 붉은빛을 남겼다. 그가 쓰러지던 순간, 나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을 때, 나는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어째서 언제나 이렇게 되는 거지…?


 


그의 행동에선 전혀 진심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노리고 한 일인지, 무엇을 생각하고 한 일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로 돌발적으로 착란 상태에 빠져서 충동적인 행동으로 나왔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반쯤 잘린 그의 목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붉은빛을 띠는 그의 피는 지면에 흡수되고 끝없이 주위로 펴져 나갔다. 그제야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모든 게 늦어버린 지금에 와서야.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비틀거리는 다리로 겨우 그의 곁으로 다가간 나는 결국 균형을 잡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며 무너지듯 쓰러졌다.


 


나의 소망은 그저 당신이 살아있길 바랐던 것, 조금 더 긍정적으로 살아주길 바란 것. 그것밖에 없었는데, 당신은 언제나 나를 배신한다. 쓸데없이 죽음을 바라고, 쓸데없이 목숨을 끊는다. 언제나 나를 내버려두고 혼자서 자기 멋대로 죽어버린다. 의미 없이 흩어지던 대화처럼 결국엔 원점이다. 어째서 나의 외침은 언제나 당신에게 닿지 않는 걸까…?


 


나는 정신없이 손을 뻗어 딱딱한 그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반쯤 뜬 희미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할 뿐, 나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손에 닿는 것은 식어버린 미지근한 핏물과 딱딱하게 굳은 몸뿐이었다. 그의 숨은 진작 멎어 있었다. 울면서 양팔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눈물이 그의 붉게 젖은 얼굴을 스치고 떨어졌다. 한참 동안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난 결국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아아아아아악!!!!!!!!”


 


제발 나를 배신하지 말아줘요. 어제처럼 상냥하게 대해줘. 제발 죽지 말아줘.


 



 


크게 외치는 목소리에 감각을 지각하는 신경 모두가 뒤흔들리고 의식에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진다. 비명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다소의 경과를 필요로 했고, 그다음에는 공백, 그 후, 사고는 찰나의 동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완전히 셔터를 마감한 뇌 세포는 생각하는 것 자체를 방해했고, 뇌리는 검게 닫힌 세계에 색을 옮긴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새하얀 천정. 이마에는 물처럼 투명한 땀이 흐른다. 하루를 꼬박 굶고 거리를 헤맬 때처럼, 식은땀을 후줄근히 흘린 뒤의 한기와 현기증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다. 가슴에 손을 대고 잠옷을 꽉 쥐었다. 호흡을 반쯤 억지로 진정시키고 나서, 이마에 싫을 정도로 붙어 오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깨달았다. 꿈에서 깨어난 것이라고. 한 손으로 얼굴 반을 눌러서 구토감마저 일으키는 불쾌감을 참는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관자놀이를 눌러 두통을 조금 참아보지만, 더욱 두통은 심해져 왔다. 최악의 기분이다. 맹독을 바른 손톱으로 정신을 찢기고 능욕 된 뒤와 같은 기분이 울컥거려 온다. 나는 상체를 일으키고 눈을 비볐다. 침대 옆에 나 있는 커다란 창문. 창밖에서 따스한 햇볕이 들어온다. 오늘도 변함없이 아침을 맞이한다.


 


“꿈, 이었던 거지…?”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생생한……이라기보다 뒤죽박죽이군. 시야가 조금 흐릿해서,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떴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악몽에 내 정신은 일종의 공황상태에 있었다. 눈앞의 평온한 현실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환상처럼 덧없이 느껴진다.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공포로 굳어버린 희미한 시야를 억지로 움직여 나는 다급히 그를 찾았다. 허공을 방황하던 눈동자가 소파 위에서 잠든 그의 얼굴을 찾고, 안심하곤 길고 긴 한숨을 내뱉을 때까지의 시간은 짧지만 길었다. 나는 내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괜찮아. 살아있어.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중얼거리면서 떨리는 마음을 달래었다. 바보. 오랜만에 자기 집에 왔는데도 나한테는 같이 잘 수 없으니 자긴 땅바닥에서 자니 어쩌니 말해놓고선 잘도 자는군요.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도 모르면서. 투덜투덜 불만을 꿍얼거리며 입을 삐죽 내밀어 버렸지만 나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금세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그래도 다행이라는 마음뿐이었다. 이마를 적시는 땀을 닦고 난 뒤의 순간, 새로운 땀이 흘러 떨어진다.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한 뇌 세포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악몽의 단편을 긁어모아서 재구성한다. 플래시백이 된 검은 꿈의 기억을 뇌리에 새기고, 저절로 구토기를 느껴버렸다.


 


한없이 새빨간 공간. 그곳에서 목을 베고 죽어버린 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 하지만, 순간의 찰나. 불과 한순간. 그는 확실히 웃고 있었다. 칼날을 생각하게 하는 엷은 얼음의 차가운 엷은 미소. 잠깐 정도의 순간에 엿본 그 미소가 왜인지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본들 알 수 있을 리는 없겠지만. 꿈속에서 그는 언제나 너무나 쉽게 목숨을 던져버린다. 자신의 목숨에 가치를 느끼지 못한 걸까? 그거야말로 바보다. 이 세상에 죽어도 좋은 사람 같은 건 없어. 그런데도 당신은 계속해서 죽는다. 반복의 반복. 단순히 변덕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끔찍하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의미 없는 상상을 떨쳐 내버리듯 꾹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나는 전에 그가 목을 베기 전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죽지 않고 또 내 앞에 나타난다면, 다시 자신을 죽이겠다고 했었다. 몇 번이고, 아마도 내가 그를─. 입술을 꾹 깨물며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모습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 앞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 꿈을 다시 꾸게 되면 분명히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을 베겠지. 제대로 죽을 때까지. 결국, 매번 이렇게 원점이 되어버리는 걸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세면실로 걸어갔다. 입을 헹군 후 물을 얼굴에 묻힌다. 시원한 물이 얼굴을 때리고 멍해 있던 정신은 일통되어 이제는 정신이 나가 있지 않게 된다.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는 수도를 잠그고 근처에 놓여 있던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나갔다. 문득 고개를 들자 세면대 앞의 거울이 보였다. 그 거울에 비추어지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각인된다.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다.


 


“…얼굴이 말이 아니네.”


 


왠지 모르게 헛웃음만 나온다. 이게 뭐야. 별로 아침에 약한 것도 아닌데 이 볼썽사나운 꼴이라니. 얼굴은 새하얗지, 눈은 반쯤 감겨 있고, 무슨 백혈병 환자도 아니고 이건 아니잖아? 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려나. 그는 잠꾸러기라 아직 자고 있을 테고, 슬슬 깨우러 가볼까. 잠든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그러나 세면실 문을 연 순간 눈에 들어온 그의 모습에 난 짐짓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키가 약간 크고 갸름한 얼굴 선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귀찮다는 듯이, 동시에 시시하다고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동자. 갖추어진 얼굴 생김새는 미려하다고 평할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칼날 같은 인상을 준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남자치고는 마른 체격의 청년. 잠이 덜 깬 모양인지 조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가? 하지만,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설마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럴 리가…. 우연이겠지.


 


“벌써 일어났어요?”


 


“뭐,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안색이 나쁘군요. 또 그 꿈을 꿨습니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괴기스럽기 짝이 없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내 눈앞에서 목을 베어 자살하는 것이다. 하지만, 죽는 대상이 그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꺼림칙하기도 했고, 혹시라도 그가 정말로 죽는 것을 원하는 게 두려웠으니까. 그는 아주 약간 눈썹을 곤혹스러운 듯이 찌푸리며 나에게 말했다.


 


“정말 의사에게 안 가봐도 괜찮겠어요?”


 


“아뇨, 정말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얼핏보면 무심함을 가장한 그 눈에는 알게 모르게 고뇌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는 것에. 마음 씀씀이는 고마웠지만 괜한 걱정을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을 너무 험하게 하고 상처를 잘 입는 타입이라 어지간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자신에 대해선 무관심에 가까운지라 아무렇지 않게 상처 입혀도 된다는 버릇이 있어서 언젠가는 나를 구하고자 자신을 희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것이 때로는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조금은 자신을 소중히 해도 될 텐데….


 


“억지로 참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면 저에겐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겁니까?


가끔씩 제가 신뢰받는 건지 어떤지 상당히 미묘한데….“


 


약간 토라진 것 같은 얼굴로 그는 말했다. 설마 이 정도로 삐친 건가요? 어휴, 이런 점은 영락없는 어린아이로군요. 난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신경이 놀랄 만큼 섬세한 건지, 아니면 자신이 신뢰받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는 걸까? 정말이지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뭐든지 적당한 게 좋은 법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아침 식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므로 적당히 남는 식빵을 이용해 토스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한국인의 주식은 밥으로 결정되어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 집의 주인은 그렇게 부지런한 성격이 아니라 밥솥조차 없는 황당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식사는 제대로 하고 다니는 걸까? 참으로 걱정된다.


 


거기서 아침은 굳이 안 먹어도 상관없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당신… 여태껏 아침은 매일 걸러왔던 겁니까? 곧바로 응, 이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살이 안 찌는 거라고! 제발 인간으로서 필요 최저한의 식사는 하고 살자. 삼시 세 끼도 제대로 안 하니 살이 찔 리가 있나, 이 바보야. 이 사람은 자신이 체중미달이란 자각도 없는 걸까?


 


처음에는 우리가 사귀는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근사근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무뚝뚝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보니 그와 내가 어느 정도 친한 것인지 아무도 가늠하지 못한다. 간혹 이렇게 하룻밤 정도는 자고 가긴 해도 엄연히 지킬 선은 지키고 있다. 굳이 관계를 말로 표현하자면 친구, 일까. 세상에선 흔히 친구 이상 애인 미만이란 단어로 지칭하는 것 같지만, 그것과도 조금 거리가 멀다고 해야겠다. 어떤 의미론 보호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군요. 뭐, 워낙 이 사람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니까 옆에서 내가 챙겨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지만.


 


좋았어, 잼은 없지만, 이 정도면 먹을 만하려나? 우유와 빵만으로 과연 식사가 될까 싶지만, 우선은 궁여지책이니까. 왠지 모르게 한쪽 면이 타버린 듯한 느낌이 들지만… 뭐, 괜찮겠지? 그는 굳어버린 표정으로 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하하. 음, 그래도 완전히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닐 텐데. 어쨌든 조금은 불안한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나와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손에 쥔 것을 우물거리고, 씹고, 삼키기만 했다. 미각이 둔해졌는지 맛이 텁텁한지 눅눅한지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다지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 분위기는 필연적으로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어떤 사건’ 이후로 사이코패스란 단어가 자주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는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서론도 없이, 은근슬쩍 당연하다는 것처럼 뜬금없는 물음을 나에게 던졌다.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터였다. 그렇다곤 해도 아침부터 꺼낼 화제는 아니지만. 다른 화제도 있었을 텐데. …어쩔 수 없네요. 모처럼 만에 이 사람이 먼저 말했으니 어울려주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반쯤 체념한 상태로 나는 대화를 속행했다.


 


“한 달 전에 일어난 연쇄 납치 살해 사건 말이군요?”


 


“예, 개인적인 측면에선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입니다.”


 


누군가 범인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가족에게조차 연락을 끊은 것으로 보아 믿기 어렵지만, 범인은 혼자서 전국의 경찰과 국민의 이목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그자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는 7명이었다. 범행수법이 교묘했기에 현재까지 마지막 피해자인 7명째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지도 모른다. 경찰은 자택에서 발견된 수첩으로 충동적인 범행이 아닌 계획 살인으로 단정 지었다. 언론 측에선 7명이나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라는 사실에만 주목하는 모양이지만, 사건 발생 직후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편지가 K 방송사에 발송된 점에 무게를 두는 네티즌들도 있었다. 그러나 경찰을 조롱하고, 유족에게 모욕을 줬다는 이유로 전문이 공개되진 않았다. 대충 어떤 내용일지 상상이 가긴 하지만.


 


그렇기에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사이코패스만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논리가 너무 비약된 감이 없지 않다. 그 외에도 7명이 각각 다른 사람에게 살해되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으며, 순식간에 방송 3사를 석권한 살인범을 숭배하는 카페가 유명포털사이트에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이번엔 단순 호기심이 아니라 정말 예술가나 혁명가를 바라보는 시선이었기에 발견 즉시 블라인드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일련의 작은 사태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하지 못한 행동을 실행한 범인에게 대리만족하는 것이라고. 반대로 말하자면, 누구나 잠재적인 범죄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번 사태는 ‘특수한 부류’가 표면으로 올라온 것에 지나지 않다면서.


 


“하지만, 이 나라의 경찰들도 무능하진 않으니까 곧 잡히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자가 어이없는 실수만 안 한다면 미해결 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범인이 잡히길 바라는 유족들에겐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겠군요.”


 


그러나 그의 얼굴에 ‘유감스럽다.’라는 생각은 드러나지 않았다. 손에 든 토스트와 우유 이외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다는 듯, 전혀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투였다. 하기야, 마음만 먹는다면 깊숙한 산속에 들어가서 몇 개월은 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숨어지내는 것‘만이라면. 무엇보다 식량을 구하기도 쉽지 않을 테고. 가장 큰 문제는 아무런 기초지식도 없이, 어떤 문명의 이기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단 혼자 산속에 수개월을 사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런 점을 봤을 때 과연 경찰이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을지는 의문이다.


 


“언론에선 범인을 잡으면 동기를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만, 과연 그 사람의 동기가 군중을 이해시킬지는 모르겠습니다. 단, 저지른 죄와는 별개로 그자의 과거는 동정할 여지가 있지만.”


 


“이해시킬지 모르겠다는 건 무슨 뜻이죠?”


 


무감각하게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런 논리도, 이유도 없이 그저 죽이고 싶어지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이코패스’는 타인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능력이 없는 인간을 가리킨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는지, 원래 그런 식으로 태어나는 건지는 모른다. 위험한 점은 그런 사람들이 정체를 숨기고 평범한 인간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라는 테두리 속에서 우리와 같은 생활을 영위하면서 어느 순간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범죄는 사회조건과 환경조건, 그리고 광기 어린 한때의 마음의 진폭으로 성립한다고 한다. 과거에 유아 학대를 받은 많은 사람이 그 인생에 큰 상처를 입는 경우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되진 않는다. 계기만 없었다면 ‘그자‘도 인생을 평온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런 지식을 어디에서 알게 된 걸까.


 


“예를 들어 한 여름날 옆집 사람이 시끄럽다는 이유로 살해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보통은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고함까진 칠지언정 사람을 죽이진 않겠죠. 하지만, ‘그들‘은 그런 이유만으로도 누군가를 쉽게 죽입니다. 그 점에서 사이코패스는 뭐랄까, 안전장치가 풀린 놀이기구와 비슷하군요.”


 


“그저 인간에게 있어 당연히 가져야 할 자제력이 결여되었을 뿐이란 뜻인가요.”


 


“그렇죠. 만일 그자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저는 놀라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이 그걸 믿어줄지는 둘째 치더라도.”


 


그의 눈에 담겨 있는 것은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약간의 ‘희열’이였다. 정말이지 이런 쪽의 화제엔 열의를 보이면서 어째서 다른 대화엔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는 걸까. 그는 언제나 인간의 어두운 면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보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밝은 면은 일부러 안 보려고 눈을 돌리는 것 같단 말이야. 그것이 나에겐 조금 불만이었다. 이때의 나로선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약간은 알 것 같지만, 아침 식사에서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가요? 불쾌하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그냥 갑자기 떠올라서요.“


 


모르는 사람이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그러나 이 사람은 장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뇌리에 떠오른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이라고 늘 말해왔지만, 어쩌면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지도 모른다. 그저 옆에 내가 있었기 때문에 말했을 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이런 말을 하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쭉 지켜봐 왔지만, 특별히 나를 제외하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론 여겨지지 않는다. 그 점에 한해선 기뻐해도 되는 걸까? 고개를 숙인다. 이 사람은 정말로, 같이 지낼수록 머릿속을 더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한 식탁에 있으니 그가 한번 죽었던 때가 바로 어제라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 꿈속에 보았던 광경이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 믿기어 지지가 않았다. 마치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혹시 이쪽이 꿈이고 저쪽이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지만….


 


'하지만, 정말로 그건 꿈이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고 되살아나는 현실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 그전에, 그것이 현실이라면 그거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악몽이지.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이없는 생각을 해버린 것 같다. 난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걸까? 아무래도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네. 아침부터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이런 뒤숭숭한 화제는 내 전문 분야가 아닌데.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 여름 어느 버스 정류장 앞이었다. 그때 그가 보인 눈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 그저 하나의 풍경을 바라보듯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 시선. 어쩌면 관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그 시선. 감정이 없고, 무기질 적이며, 그러면서도 꿰뚫는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은 나에게 있어 ‘죽음’이란 단어를 쉽게 연상시켰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그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말을 건네면 기본적으로 대답은 해준다. 하지만, 말을 건 사람은 좀 더 다른 반응이 보이기를 기다리지만, 그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는다. 따라서 말을 건 대부분의 사람은 거만하다거나 무뚝뚝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본인의 입장에선 말을 건 사람을 무시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그와 대화를 하게 된 뒤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대화하는 게 귀찮다거나 싫은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가 이야기를 걸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래?’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자기와 다른 사람 사이에 있는 접점을 찾지 못하고, 그 말 이외에는 떠올리지 못한다. 물론 이건 내가 멋대로 한 상상일 뿐, 실제로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표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타입이 아니라서 좀처럼 감정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러고 보면 그가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는 장면을, 나는 그 나름대로 길다고 생각하는 교제 중에서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가끔 내 앞에서 띄우는 곤란한 것 같은 웃는 얼굴 정도. 그것이, 가면과 같이 단지 붙이고 있을 뿐인 것에 지나지 않으면 깨달은 것은 언제였을까, 그것을 부술 수 없는 걸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무래도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가 사색에 들어간 모양이다. 때때로 그는 이렇게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한편으로는 멍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표정을 짓곤 했다. 이런 상태의 그에겐 무슨 말을 걸어도 소용없다. 내가 모르는 어떤 것으로 고민하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한테 걱정시키기 싫어서 일지도 모른다. 혹시 신경 쓰는 걸까? 그래서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땐 그저 정적인 분위기가 싫어서 TV나 보자고 생각했으니까.


 


-어젯밤,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 자신은 마주 오던 기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름은 김○○씨(2X 세) 유족들은 김 씨의 싸늘한 시신을 영안실에서 봐야만 했습니다.


 


어느새 그는 차갑고, 공허하며, 메마른 눈으로 TV 화면을 보고 있었다. 언제 명상에서 벗어난 걸까. 그러나 체념으로 가득 찬 얼굴에는 헛수고라는 것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낙담, 혹은 실망이었을까? 그 시선은 달관하는 것 같기도 했고, 이미 달관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으로서의 상냥함이나 따스함 같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감정을 잊어버린 것 같은 차가움을 겸비한 시선.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나로선 이해할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에겐 희로애락 같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있을 이유 대부분이 아무런 의미조차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단지, 그 순간, 순간 느낀 대로 느끼고 행하는 대로 행할 뿐.


 


-그래도 우리 아들이 죽기 전에 좋은 일을 하고 죽어서 다행이에요.


 


유족들의 인터뷰가 끝나고 구해진 취객의 가족들이 하나같이 비통한 표정으로 청년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사람의 죽음은 슬픈 것도, 하물며 화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차가운 눈동자로 바라보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흔히 있는 삼류 드라마를 흘려 보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이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다. 둘 다 안 좋지만 가능하다면 후자였으면 좋겠다. 제멋대로인 바람이지만.


 


“처음 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인정을 베풀다 죽다니, 소용없는 짓을 했군요. 저 사람.”


 


“당신답지 않게 심한 말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은 도를 넘어선 게 아닌가요?”


 


“당사자야 최소한의 충족감을 가지고 죽었겠지만,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생각해보면 답은 뻔하죠. 죽은 다음의 명예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그가 저런 모습을 보인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진심으로 죽은 사람을 비웃고 있는지,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하고 현실을 비뚤어진 시선으로 풍자하는 심경에 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착각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때때로 그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의 반응은, 대부분은 내가 바라고 있던 대응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 같은 것뿐이었다. 마치, 눈앞에 놓인 거울이 자신의 이상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런 감각에 사로잡힌다. 바라면 바라는 대로 대답해 주지만, 바라지 않으면, 모르는 채. 아무것도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어쩌면 이렇게 나와 함께 있는 것도 사실은 전혀 즐겁지 않은 걸까.


 


-오늘 전국의 날씨는 대체로 맑을 것으로 예상하며 아침 기온은…


 


이윽고 기상해설자가 오늘 날씨를 설명하는 화면으로 넘어가자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한없이 냉정한 시선은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고를 돌아보는 것은 아닐까, 그런 식으로 느껴지게 한다. 어쩌면 여기가 아닌 좀 더 먼, 어딘가 다른 장소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사안, 사색하고 있어? 이상하게 여겼지만, 특별히 이 사람에게 물어볼 이유도 없어서 침묵을 지킨 채로, 시선만을 그에게 고정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보는 것일까? 의문이며, 동시에 흥미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는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