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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수필 어느 노동자

2006.01.21 18:50

MiXuK™ 조회 수:196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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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창한 가을 오후.
전공서적을 사러 서점에 가는 길이었다.
문대에서 중앙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허름한 옷을 입고 때묻은 모자를 쓴 중년의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저...학생 부탁 하나만 하겠는데 좀 들어줄 수 있겠는가?"

나에게 말을 건 그 남자에게 나는 귀를 막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긍정의 표시를 해 보였다. 남자는 길가에서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공대 캠퍼스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가다이며, 현재 임금이 체불되서 밥값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지금 돈이 없어 점심을 굶게 생겼다며 밥값을 좀 얻을 수 없을까 라는 것이 그의 말의 요지였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나는 구걸하고 있는거지, 그런데 어쩔 수 없어. 나도 학생들한테 이렇게 구걸하는 거 싫지만, 돈이 없는 걸. 아 뭐 학생이 돈을 주기 싫고 기분 나쁘다면 그냥 가도 되."

나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어 내가 가지고 있던 잔돈 3000원을 그 남자에게 건넸다.

"하하하하. 학생, 고마워. 바쁜데 길 잡아서 미안하고."

그러면서 그는 한참을 웃으며 내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그 남자의 마지막 웃음소리가 자꾸 내 마음에 걸렸다. 그 웃음소리는, 한끼를 해결했다는, 그런 기쁨의 웃음소리가 아닌 자조적인 웃음소리였다. 자신의 아들,딸 뻘되는 학생들에게 구걸하여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사실만큼 그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남자의 심정. 하루 종일 몸을 팔아 일을 해도 그에게는 자장면 한그릇 값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OECD가입국인 대한민국의 음지라고나 할까?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노동자의 인권이나 노동처우의 개선이 아니라, 내가 만난 그 노동자에게 느낀 개인적인 감상같은 것이다. 나는 사실, 노동자의 인권이니 비정규직 타파니 하는 노조의 목소리에는 크게 귀기울이지도, 관심도 없다. 오히려 길가면서 들리는 그들의 시위소리에 눈살을 찌푸리기 일수이다.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맑스의 실패한 실험의 공허한 외침인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은 허공에서 흩어져버릴 목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요, 또 그런 무지막지한 시위나 선동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이룩한 것은, 높은 지위에서 고고한 모습을 뽑내는 사람들이 아닌, 내가 만난 노동자와 같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조금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아무리 노동자들이 냉혹한 수요-공급곡선이 지배하는 시장지배의 논리에 따라서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없었으면, 갤러리아 명품관도, 부의 상징인 타워펠리스도, 또 고급 승용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무슨 권리로, 그 노동자들의 거룩한 손을 욕하고 짓밟는가? 단지 그들이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또 우리가 먹물좀 먹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당신들이 누리는 그 "사치스런" 삶도 없었을진대, 우리는 오늘도 그들의 고마움을 잊고, 현재의 자신의 위치는 마치 자신만이 이룩한 것인 양 행세하고 허세를 떤다.

그들에게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을 권리조차도 우리는 박탈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노동탄압이라든가, 노동환경개선같은 문제는 솔직히 관심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자.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같은 "평범한 노동자"들의 고귀한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