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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수필 [단편] 놀이터

2006.03.01 11:19

갈가마스터 조회 수:192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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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우울하게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기타학원을 가기 위해 남색 작은 우산을 하나 집어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복도로 나서자마자 한쪽 벽면에 길게 늘어선 먼지 낀 창문 너머로 온통 회색에 얼룩진 세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물안개로 흐릿하게 보이는 녹색 동산과 축 늘어진 전깃줄 사이로 보이는 회색 아스팔트 언덕이 특유의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분명 서울 사람들은 시골이라고 부르며 인상을 찌푸리는 후미진 광경일테지만 자칭 낭만주의자인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더 없이 아름답고 푸근한 광경이었다. 우리 집은 4층 복도 끝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느긋하게 그것을 감상하며 계단 옆 엘레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우산을 펼쳐들며 현관을 나서는데, 문득 내가 사는 건물을 올려다보고 싶어졌다. 잦은 빗방울이 바지를 적시는 것을 묵과하며 나는 고개를 들어 아파트 옥상 쪽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옅은 핑크빛의 8층짜리 아파트. 이 오래된 콘크리트 탑은 동 개념도 없이 단지 혼자서만 우뚝 서있는 20년도 더된 퇴물로서, 지금은 죽어가는 고목나무마냥 피부에 금이 쩍쩍 가버린 위태위태한 건물이었다. 애초에 이름이 ‘OO맨션’이니 이걸 아파트라고 부르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맨션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괴상망측한 건물인 것이다. 회색 하늘에 그림자가 져서 더 없이 우울해 보이는 늙은 거탑(巨塔)을 바라보며 나는 왠지 모를 추억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아무리 늙고 다 무너질 듯 보이는 퇴물이라도 내 20년 인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추억의 산물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철거 작업이 한창인 주공 아파트 단지처럼 재건축을 하자고 그러는데, 난 웬만해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기주의다. 분명 이 아파트를 재건축하면 집값도 오르고 무너져가는 우리 동네의 상권도 되살아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내 마음의 평온을 위해 재건축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히 이기주의인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걸 감출 수 없었다. 나는 힘없이 아파트에서 눈길을 돌려 기타학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난히도 오늘은 우울한 하늘빛처럼 깊은 감상에 젖어드는 것 같았다. 우산을 때리는 작은 빗방울들의 선율도, 검은 아스팔트 위로 흐르는 물줄기의 유(柔)한 아름다움도, 오늘만은 블루노트의 재즈연주가 되어 내 마음의 침울함을 더해줬다.

  아스팔트로 되어 있는 낮은 언덕길을 올라 그 정상쯤에 다다르면 철제 빔과 하얀 천이 마치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주공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3개의 동에 걸쳐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주공 아파트 단지’는 벌써 20년도 넘어 금방이라도 무너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낡은 곳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 주변 상인들이 힘을 모아 청주시를 상대로 철저항쟁을 펼친 결과 비로소 재건축을 감행하게 되었는데 아직은 관상용 나무를 뿌리 채 뽑거나 유리창들을 떼어내는 등의 기초 작업만 진행하고 있었다. 분명 위험한 길이었지만 이곳을 빼고 기타 학원으로 가는 지름길은 없는데다가 평소에도 늘상 이곳을 거쳐 지나갔기 때문에 나는 거리낌 없이 그곳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을씨년스러움이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어우러져 극에 달한다. 이미 사람들은 모조리 빠져나가고 마치 유령도시와 같이 아무런 인적도 없는 그 광경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쓸쓸하고 공허했다. 여기저기 뿌리 채 땅에 쓰러져 있는 나무들과 차창이 모조리 깨져 있는 고물 자동차, 잘근잘근 밟히는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는 유리조각들. 너무나도 우울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끝없는 슬픔에 코가 시큰해질 지경이었다.

  우울한 마음을 가슴에 안고 나는 건물들의 무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빨리 이곳을 통과해서 기타학원으로 갈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길을 걷는 중, 문득 나는 과거 놀이터라고 불렸던 작은 공간에 도착했다. 움직이던 발걸음이 그 속도를 늦춰 이윽고 완전히 정지한다. 경악했다. 그곳은 그야말로 처절하게 난도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도착하면 늘 날 반겨주던 토끼모양의 노란 간판과 녹색 울타리. 철봉과 그네는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조각조각 진흙바닥에 누워 있었고 시소는 그 길쭉한 판자조차 깡통처럼 짓이겨져 있었다. 미끄럼틀에 와서는 아예 그 원형조차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을 지경이었다. 눈시울이 시큰거린다. 우울함이 극에 달해 어쩐지 울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곳은 내 추억을 담고 있던 타임캡슐과도 같은 곳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늘 축구공을 빼어들고 뛰어놀던 곳이었다.
  ‘얼음땡’과 같은 술래잡기를 할 때면 늘 엎치락뒤치락하며 진흙투성이가 되던 곳이었다.
  그네를 타고 누가누가 더 높이 날아가나 내기를 하던 곳이었다.
  우리 집 근처에 하나밖에 없던 놀이터였기 때문에 이곳은 더욱 각별한 곳이었다.

  그것이 이렇듯 처참하게 무너져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난 막연하게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후우.’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놀이터를 통과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땅과 도로가 진흙과 물웅덩이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노란색 토끼 간판과 놀이기구의 잔해를 밟고 그곳을 통과해야 했다. 그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마치 죄를 짓고 있는 듯한 그 느낌에 눈시울이 또 다시 시큰해졌다.

  놀이터를 지나 기타 학원을 향하는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무너진 미끄럼틀과 그네, 시소, 그리고 내가 밟은 노란 토끼 간판이 계속해서 눈에 밟혀 기분을 더 없이 착잡하게 만들었다. 이 가라앉는 기분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추억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슬픔? 아니면 내 자취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 기억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 퇴색 되어가는 내 시간에 대한 그리움? 알 수 없다. 그러나 계속해서 고민했다.

  슬픔, 이것만은 확실했다. 확실한 이유를 알 수는 없어도 아마 위에 쓴 저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얽혀진 것이 분명했다. 내 가슴 속에 묻어둔 추억들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아 슬펐고 내가 남긴 인생의 한 자취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을 생각하니 더 없이 슬프고 아쉬웠다. 그리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간절한 그리움에 슬프고 아쉽고 애절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착잡한 기분에 나는 더 없이 깊은 사색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이래서 난 재건축이 싫다. 내 추억이 얽혀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싫고 더 나아가 변화가 두렵다. 이것이 나 혼자만을 위한 이기주의라 욕해도 싫은 건 싫은 것이다. 사람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가구를 옮긴다거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만 나는 졸업앨범과 내 과거의 글과 그림들을 정리하며 기분을 푼다. 이 과거에 대한 집착과 애증 때문에 나는 내 물건을 절대로 버리지 않고 버리는 것은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나 몰래 처리하시는 것이다. 내가 낡아 비틀어진 우리 집을 사랑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며 끈질기게 이사를 반대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가족들은 이런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싫은 건 싫은 것이다.

  비록 나는 변화에 익숙하지 못한 인간이지만 일단 변화하게 되면 그것에 적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변화가 두렵지만 필요에 따라 변화를 기꺼이 수용할 수도 있는 인간이다. 창조도시가 리뉴얼 됐을 때 처음엔 짜증나고 싫었어도 나중엔 그것을 받아들이고 지금은 별 다른 생각 없이 완벽하게 적응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향수를 완전히 저버리진 못했으며 지금도 이전 게시판을 들락날락거리며 내 자취를 보고 웃곤 한다. 아마 그것까지 사라져버리면 나는 아마 창조도시를 떠날 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말해왔듯 난 내 손 떼가 묻어 있는 것들에 대해선 결코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달갑지도 않은데다가 이렇듯 새 것에 적응하는 내 모습을 보면 어느새 두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특이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으며 추억이 사라지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 없이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교(母校)를 찾는 사람들만 봐도 그것은 알 수 있으며 자신이 다녔던 학교가 철거된다고 할 때 그곳을 찾고 씁쓸하게 웃음 짓는 사람들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추억들이 건물들과 함께 무너지고 재건축이 이뤄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보다도 이익을 더 중시하는 것만 같아 그 각박한 현실에 씁쓸함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다수의 이익은 소수의 슬픔따위 생각지도 않는다. 나 같아도 다수의 이익을 위해 다른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에 손을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내가 된다면 억울하다고 호소할지언정 들어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내 고민은 그런 것이다. 나 혼자만의 고민, 그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내면의 문제.

  ‘후우.’ 또 다시 한 숨을 길게 내쉬며 나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으며 이렇듯 푸념을 늘어논들 변화하는 강의 흐름을 되돌려 놓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종말을 향해 치닫는 그 유수같은 흐름을 나 같은 송사리 혼자선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다. 재건축이 완료되고 건물들에 사람들이 들어차면 또 다시 부서진 놀이터의 모습은 내 가슴 속에만 머물겠지.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나만의 추억을 가슴 속에 안고 언젠가는 망각의 저편으로 밀어 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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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우울합니다. 정말로 우울해요.

과거의 추억이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을 푸념 섞어 글로 옮겨보았습니다.

여튼 릴레이 소설도 이젠 심혈을 기울여 쓸 필요가 없어졌고(너무 늦게 깨달았심.) 제 글이나 쓸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