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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추리 사립탐정 안석진

2006.12.08 09:47

Mr. J 조회 수:283 추천:5

extra_vars1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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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처음 만났던 곳은 시내에 있던 한 헬스장이었다. 서른 둘이 될 때까지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해오던 나는 얼마 전 대학교에 정식으로 채용된 후 그 동안 시간에 쫓기며 돌봐오지 못했던 나의 부실한 육체를 좀 단련시키기 위해(혹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헬스장을 세 달씩이나 끊었다. 어깨가 나의 두 배쯤 벌어진 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나는 런닝머신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주로 하였고, 헬스장은 일이 끝난 뒤 집에 가기 전 들르는 코스목록에 추가가 되었다. 그날도 트레이닝을 마치고 목이 탄 바람에 안에 구비된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마시고 있었다.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헬스장을 둘러보았는데, 그때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그건 빨강색 더미(dummy)와 그것 앞에서 검정색 권투 글러브를 끼고 복싱연습을 하고 있던 한 남자였는데, 그 남자는 덩치가 매우 컸다. 근육질이라서기 보단, 둥글둥글하게 살이 쪄 덩치가 컸다. 하여간 그가 내 시선을 잡은 이유는 단순히 그의 덩치 때문이어서가 아니었고, 그 둔해 보이는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주먹의 위력 때문이었다. 그의 원투 스트레이트는 그다지 재빠르진 않았지만, 한방한방에 묵직한 인간 형 샌드백, 아니 워터백이 덜컹덜컹 거리며 마치 오뚝이처럼 좌우, 혹은 앞뒤로 세차게 움직였다. 마치 그 광경은 어린아이가 오뚝이를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밀쳐 요동치게 하며 노는 모습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아이가 나쯤은 가볍게 깔아뭉갤 것 같은 덩치의 남자이고 오뚝이가 수십 킬로그램은 족히 나가는 더미라는 것뿐.


 


캔 아래쪽에 조금 남은 음료를 마저 마시는 것조차 잊은 채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덩치는 숨이 차기 시작하는지 턱까지 끌어올렸던 그의 두 주먹을 내리고 숨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슬쩍 돌아본 그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의 두 눈은 산돼지의 그것 같았다. 그는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시선이 꽤나 신경에 거슬린 모양이다. 하지만 이럴 때 눈을 돌리면 저 사람의 분위기에 눌려 패배한 것이 된다. 나는 그의 사나운 두 눈에 시선을 맞추고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들어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형씨, 음료수 한잔 하겠수?


 


그가 뭔가 툴툴거리는 소리를 내며, 옆에 걸어 놓은 수건을 들고 내가 앉아있던 테이블로 다가와서는 내 앞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는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자판기에서 내가 마셨던 것과 같은 것을 한 개 더 뽑았다. 덩치는 오른손으론 연신 수건으로 그의 이마에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왼손으론 내가 내민 음료수 캔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 뭔가 허무함을 느꼈다. 아니 실망감이 더 어울리는 말일까. 나는 그 덩치에게서 깊숙하고 굵직한 목소리로 잘 먹겠수 라던지 으음 이라던지, 심지어는 넌 뭐야 같은 시비 성이나 협박이 묻어 나오는 대답을 은근히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고, 또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사나운 사람은 아닌 듯 했다. 선입견이란 것이 이토록 사람을 썩게 만드는 것인가! 내가 그 꽉 막힌 골통을 스스로 쥐어박으려 하는데, 순식간에 음료를 들이킨 그가 빈 캔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펀치가 장난이 아니시더군요?


 


나는 깡패인줄 알았던 그에게 내세웠던 거만한 태도를 걷어 치워 버리고 공손하게 나가기로 하였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간에 이 대화, 이 만남은 내가 시작한 것이었으므로 내가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그의 점잖은 말투는 좋았지만 그의 야무진 두 눈, 산돼지 같은 그 두 눈이 슬슬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뻣뻣하게 꼬인 두 밧줄처럼 나를 옭아매어 내 숨통을 조르고 있었다.


 


예에 예전에 복싱을 좀 했습니다.


 


그가 내 눈을 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본래 대화할 때엔 상대방의 눈을 정확히 보며 하는 것이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 하니, 이 사람은 상당히 예절을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다. 마치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 흐리멍텅하고 편견으로 가득 찬 눈동자들을 꿰뚫고 내 시신경을 타고 올라가 스포랑지움에서 퍼져 나오는 씨앗들처럼 나의 뇌 속에 떠다니는 잡다한 생각들, 사념들을 엿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말도 안되지만, 역시 불안한 그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대화를 이어나갔다.


 


복싱을 하셨다니, 굉장하군요.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뭘 하시는 지 여쭈어 봐도…”


 


제길, 또 멍청한 짓을 해버렸다. 막무가내로 머릿속 생각을 지우려고 터진 입에서 아무거나 꺼낸 말이 결국 대화를 깊게 만들어 버렸다. 그의 직업을 물어보다니, 이 무슨 실례이며 실수냐. 하지만 내가 느끼는 것만큼 그는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그는 말없이 입고 있던 반바지 주머니에서 명함(모서리가 구겨진)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헬스장에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라니, 그것도 지갑 안도 아니고 운동복 반바지 주머니에 말이다. 그는 분명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일 것이다. 샐러리맨은 아닐 것 같고, 복싱 선수는 아닐 테지. 자동차 거래원이나 될까나? 내 삼촌 중 이 사람과 비슷한 덩치를 가진 분이 계셨었는데 그는 알아주는 기업에서 나오는 자동차를 기름이 좔좔 흐르는 혀로 과대 포장하여 팔아 넘기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가장 빨리 개인 주택과 벤츠를 손에 넣은 사람이었다. 뭐, 심장병 때문에 그것들을 두고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말이다. 그가 지옥에서 염라대왕한테 불 바퀴 달린 마차를 팔고 있을지는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이 명함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었다.


 


명함엔, 탐정 이라는 검은 글씨가 쓰여 있었고, 그 아래에 안 석 진이라는 이름 석자가 크고 굵은 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세상에, 그는 탐정이었다.


 


사립이지만 말이죠.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슬슬 이 안석진이라는 복싱에 소질이 있고, 자동차 판매원 같은 외모를 가지고선 예의가 바른 사립 탐정에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술 한잔 하자며 저녁식사 함께 하기를 제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