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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공포 미믹(Mimic)

2006.08.01 22:26

아야메블랙번 조회 수:222 추천:2

extra_vars1 식인상자 
extra_vars2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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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를, 붙잡고, 있는, 두, 시꺼먼, 손.]


*

시계를 본다. 오후 5시.

나는 속으로 욕지기를 하며 저 멀리 언덕 쪽에 있는 도로를 노려보았다. 사고가 난 것 같았다. 그냥 차도 아니고 엄청나게 큰 트럭 두 대가 서로 얼굴을 갖다 박은 채로 도로 한쪽에 쓰러져 있었다. 그것들 때문에 내가 가려고 하는 방향의 도로는 물론이고 반대 방향의 도로 일부분까지 통행 불능이 되었다. 견인차가 와서 저 빌어먹게 무거운 트럭들을 끌고 가고, 경찰들이 와서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며 신나게 싸우고 있는 트럭 운전수 두 명을 경찰서로 끌고 가려면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가.

하필이면 이런 때에.

생각이 난 것은 오후 2시 반쯤이었다. 그 지역에 있는 상사하고 같이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부대찌개를 해먹고 있을 때였다. 그가 사업이든 지부에 있는 여자 사원이든, 아무튼 어떤 이야기를 지껄이든, 나는 냄비 위의 내용물을 국자로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현수가 했던 얘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상자 이야기. 1.8미터짜리 거대한 상자.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은데 색깔이 거무튀튀해서 무진장 기분 나쁘다는 것. 거기에 플러스로 표면에 괴상한 얼룩이 져 있어서 더 기분 나쁘다는 것. 전화를 통해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어느 괴팍한 동기 혹은 선배 아니면 대선배가 매우 사랑스러운 후배를 골탕 먹이기 위해 장난을 친 거라고, 그렇게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였다. 나도 비슷한 종류의 장난을 받아봤고 또 직접 장난을  쳐보기도 했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녀석이 플라스틱 폭탄 얘기를 했을 때는 속으로 웃기까지 했다.

“아, 형!”

“왜?”

“그...형 옛 애인 말인데요. 돌아왔나요?”

녀석이 이런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전화를 끊고 오랜만에 떠올려봤다. 이름은 지수. 사실 대학교 3학년까지만 해도 그녀와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같은 과이기는 했지만 술자리에서든 MT 때든 그냥 대화만 몇 마디 나눴을 뿐이었다. 이름이 ‘지수’라는 걸 안 것도 그 날 이후의 일이었다.

그 날. 어느 겨울의 비오는 날 밤이었다. 현수하고 다른 녀석들과 호프집 가서 술 좀 마시고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발에 뭐가 툭 걸리면서 몸이 기우뚱 하더니 얼굴이 흙탕물로 직행해버렸다. 어느 미친놈이 발을 걸었구나 싶어서 ‘씨발! 어느 개새끼야!!’라고 욕을 하며 일어서서 옆을 봤더니, 미친놈도 아니고 어느 개새끼도 아니라 웬 여자가 벽에 기대고 쓰러져 있었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빗물 때문에 착 가라앉아 있었고 검은 눈은 초점이 없었으며 흙탕물에 더럽혀진 코트를 입은 몸 전체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술이 팍 깼다. 얼른 그녀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기고 내 코트를 입혀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들어서 빗길을 마구 뛰어갔다. 병원에 데려가야 된다는 생각, 병원에 데려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벌써 밤 1시다! 라는 생각, 야간 병원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나는 모른다! 라는 생각 등 별별 잡생각을 다 하면서도 나는 내 집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몸을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 침대에 눕혔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무슨 생각을 먹고 그렇게 대담한 짓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옆에서 그녀의 이마에 수건을 덮어주면서도 온갖 잡생각이 다 떠올랐다. 역시 병원에 보내야 했다, 니가 무슨 의사냐, 여기까지 여자를 끌고 와서 뭘 어쩔 작정이냐 같은. 그러다가 흙탕물에 처박히고 일어섰을 때 본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술자리나 MT 때나, 아무튼 전에는 몰랐었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천장을 보고, 새로 갈아 입혀진 옷을 보고, 옆에서 반쯤 졸고 있던 나를 보았다.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이 옷은 뭔지, 나는 또 누군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술을 먹고 집으로 가고 있는데 당신이 완전히 맛이 가서 쓰러져 있더라, 그래서 당신을 데리고 미친 듯이 집으로 달려왔다, 씻겨주고 옷 갈아입히고 침대에 눕혀서 밤이 새도록 간호했다, 뭐 이렇게. 씻겨주었다, 옷 갈아입혔다 하는 대목에서는 나도 그녀도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대충 나의 사정 얘기가 끝나고 나서 나는 왜 이런 추운 겨울날에 맛이 간 채로 비 맞으며 쓰러져 있었느냐, 정말로 맛이 간 거 아니냐 등의 푸념을 약간, 아주 약간 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가만히 있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차였다고 한다. 1년 동안 사귄 애인한테. 그래서 너무 충격을 먹어서 그런 것 같다고, 그렇게 말했다.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등만 토닥여 주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 일을 계기로 해서 점점 친해지다가 마침내 애인 사이가 되었고 약혼까지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나갔으면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하고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아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대로 나갔으면.



그녀는 실종되었다.

역시 어느 여름의 비오는 날 밤이었다. 시계는 거의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 방송국에서 틀어주는 외화 시리즈를 다 보고 나서 이제 슬슬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띠리리리리. 천둥소리와 함께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지수였다.

“어, 지수야. 무슨 일 있어?”

내 물음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 너머로, 뭔가를 두려워하는 듯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지수야?”

“......”

“지수야, 지수야! 무슨 일이야!?”

계속되는 침묵에 불안해진 내가 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떨리는 목소리로 지수가 겨우 대답했다.

“...모르겠어. 오늘 아침에 신문 가지러 문 밖으로 나갔는데, 웬 상자가 앞에 놓여 있었어. 딱 내 키 정도에 나무로 만들어진 건데, 나한테 온 건가 싶어서 일단 집 안으로 들여놨었어. 그 때는 너무 가벼워서, 그냥 들어서 거실 바닥에 놨었어. 그런데...”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나한테 온 게 아닌 것 같아서 맞은 편 집 아줌마한테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움직이질 않았어! 전혀, 전혀! 아무리 힘을 줘도 움직이질 않는 거야!! 그렇게 가벼웠던 게 전혀!!”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도. 하지만 그 정도로 지수가 이렇게 무서워하고 있는 건가.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진정해, 진정해, 지수야!”

하지만 패닉 상태에 빠진 건지 전혀 먹히질 않았다.

“그, 그 때는 그냥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였어...그래...괜찮다고...그렇게 생각했었어...그런데 물건 좀 가지러 잠깐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려는데 거실 쪽에서 소리가 나는 거야! 뭔가가 부러지고 씹히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였어!! 비명소리도 들렸어! 개 비명소리였어!! 마이크의 비명소리였다고!!”

마이크. 그녀가 기르는 2살짜리 개의 이름.

“그래서 거실로 달려가서 내가 본 게 뭔 줄 알아? 응? 태일아, 내가 본 게 대체 뭔 줄 알아!?”

그녀가 말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만 같다는 투로.

상자가, 1.6미터 정도의 그녀의 키보다 아주 약간 크고 거무튀튀한 나무 상자의 위 뚜껑, 그래, 아무튼 위쪽의 나무판자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너무 시꺼매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안에서 올해로 2살 먹은 개 마이크의 비명소리가 들렸으며 상자 주변은 온통 개의 피와 뼈, 그리고 그녀가 부드럽다며 자주 만져주었던 마이크의 털이 피범벅이 된 채로 여기저기 흩어져 난장판을 만들고 있었다고.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자 안이 조용해졌어. 천천히, 천천히 상자가 돌아갔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를 향해서!! 난 뒤로 도망쳐서 방으로 뛰어 들어갔어! 그리고 문을 잠갔어! 문을 닫기 직전에 그 시꺼먼 상자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어, 보였다고!!”

“내 말 좀 들어 지수야!”

“무서워! 무서워, 태일아, 너무 무서워!! 아직도 밖에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내가 나오면, 내, 내가 나오면!!”

“지수야!!!”

온힘을 다해 외친 내 목소리에 놀란 듯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았어, 지수야. 내가 금방 그 쪽으로 갈게. 넌 그대로 방 안에 있어, 알았지?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 절대! 절대로 내가 오기 전까지 밖으로 나오지 마! 알겠지!”

“안돼! 오지 마, 오지 마!”

“지수야!!”

“잡아먹힐 거야! 오면, 오면 저 상자가 튀어 나와서 잡아먹을 거야!! 태일아 무서워!! 무서...치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투둑. 삐...삐...삐...]

어째서인지 잡음과 함께 전화가 갑자기 끊겨버렸다. 나는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슬리퍼 신고 밖으로 나왔다. 반년 전 그녀를 안고 달렸을 때와는 다르게 잡생각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오직 공포로 벌벌 떨며 이야기하던 그녀의 목소리만 귀에서 맴돌고 있었다. 전철도 끊겼다. 버스도 끊겼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도착한 것은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였다. 숨을 헐떡이며 초인종을 눌렀다. 반응이 없었다.

계속, 신경질적으로 초인종을 눌러대었다. 한번 눌러 댈 때마다 마음속에 있는 불안함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고 문고리에 손을 댔는데,

끼익.

문이 열렸다, 아무 저항도 없이.

불안함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급하게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

조용했다. 기분 나쁜 고요함이었다. 들어가 보니 거실 바닥은 깨끗했다. 지수, 그녀가 전화로 말하던 얘기와는 달랐다. 피도, 뼈도, 부드러운 개털도 없었다. 아주 깨끗했다. 하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다. 그녀가...

그녀는? 그녀는 어디에 있지!?

그제서야 방에서 절대로 나오지 말라고, 그렇게 그녀에게 말했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방은 화장실을 제외하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달려가서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지수야! 지수야!!”

쾅쾅쾅!!

“대답해, 지수야!!”

대답이 없었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내가 올 때까지, 그래, 아주 금방 도착할 테니까, 절대로 방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그녀에게 큰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도중에 전화가 끊어졌지만, 분명히, 분명히, 정말로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만약...

방 문고리로 향하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을 같이 두려워하는 것만 같았다.

만약 그녀가 방문을 열었다면.

철컥.

방문은, 아주 쉽게,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녀는 실종되었다.

아니, 살해당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경찰에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현수를 포함한 다른 녀석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집으로 와보니까 없더라고, 그렇게 말했다. 너무나도 황당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아무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내 입을 가로 막았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전철을? 버스를? 두려움에 미쳐서 방문을 열어버린 그녀를?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하필이면 재수도 없게 그녀의 집을 방문해서 그녀와 그녀의 개 마이크를 잡아먹어버린 그 증오스러운 나무 상자를? 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것도 탓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몇 달간 나는 정신이 나가 있었다. 취업 활동도 관두고 운동도 안하고 매일 술만 퍼마시고 먹다 자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지도 알 수 없었던 암울한 나날이었다. 그녀 얼굴만 떠올랐다. 비에 젖은 맛 간 얼굴부터 나한테만 보여줬던 그 환한 미소까지 전부. 어느 대선배가 그런 나를 보고 뭐라고 했지만, 들리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또 시간이 지났다. 생활은 그나마 정상으로 돌아와 취업 활동도 다시 시작했다. 운 좋게도 대기업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상사가 웃으며 내주는, 죽을 것 같은 업무량에 정신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지부로 파견 와서 또다시 일하고. 주위 녀석들은 내가 지수를 잊어버렸다고, 평소에 뭐 잘 잊어먹듯이 그녀를 잊어버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말대로 였다. 나는 그녀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정말, 뭐 잘 잊어먹듯이 그녀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걸 깨달을 때마다 속으로, 내 자신에게 욕했다. 이 개같은 자식아, 니가 어떻게 그녀를 잊어버릴 수가 있어.

이 개같은 자식아.

부대찌개를 국자를 휘젓다가 그녀를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속으로 욕지기를 퍼부었다.

상자.

그녀를 죽여 버린 그 빌어먹을 상자.

그 상자가 돌아온 것이다.

나는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뛰쳐나갔다. 상사가 뭐라고 큰 소리로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녀를 안고 달릴 때와 같이, 잡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이대로라면 현수가 위험하다 라는 생각, 언제쯤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 자동차는 어디에 있지? 자동차 키는? 라는 생각, 그리고.

상자를 부숴버릴 생각.

내 차의 뒷좌석에는 길이가 거의 1미터 가까이 되는 전기톱이 있다. 지사 창고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다.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내가 입사한 이 회사는 토목과 종이 제조 같은 분야에서는 상당히 이름 있는 회사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뛰는 지사의 창고에는 사람 세 명이 둘러싸도 모자를 정도의 두께의 나무라도 무 썰듯이 베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전기톱이 쌓여 있다. 게다가 어디에 코드를 꽂을 필요도 없다. 그저 스위치를 켜고 신명나게 손잡이 부위에 달려 있는 줄을 두세 번 당겨주면 되는 거다.

잡생각을 하는 사이 빌어먹을 트럭 두 대와 빌어먹을 운전기사 두 명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없어졌다.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현수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전화로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아마도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잡음 때문에,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잡음 때문에 내 말 소리가 끊겼을 것이다.

반년 전에도 그랬다.

그녀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들렸던, 잡음.

상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다.

나는 엑셀을 힘껏 밟았다.



현수가 살고 있는 집은, 지수와 살았던 곳과 같은 타입의 아파트이다. 각 층마다 두 가구의 집이 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면 두 가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그런 종류의 아파트이다. 아파트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입구 앞에 섰다. 시간은 이미 밤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핸드폰은 배터리 부족으로 꺼져있었기 때문에 왼쪽 손목에 달린 전자시계로 시간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는 조용했다. 몇 가구를 제외하고는 어느 곳도 불을 켜놓고 있지 않았다.

현수가 살고 있는 12층의 양쪽 집도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늦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양손으로 길이 1미터, 톱날 70센티미터의 강력전기톱을 손에 들고 천천히 아파트 입구로 들어갔다. 나는 현수에게만 볼일이 있는 게 아니었다. 아직 저 12층 왼쪽 집에 남아있을, 나는 아직 보지도 못했지만 내가 아는 소중한 두 사람을 집어삼켜버린, 엄청나게 크고 엄청나게 기분 나쁜 빛을 띤 나무상자에게 볼일이 있는 것이다.

반년 전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전기톱의 전원을 켜고, 손잡이에 달린 줄을 당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엄청난 소리와 함께 톱이 고속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설사 강철이라 하더라도 여기에 스치기라도 하면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될 것만 같았다. 과연 우리 회사를 대기업의 반열로 올려준 장본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들은 얘기이지만 이 톱을 사용하다 실수로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도 꽤 된다고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떨리지 않도록 애써 힘을 줘서 꽉, 붙잡았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온통 암흑이었다. 나는 내려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몇 초 정도 기다려 보았지만 역시 대답이 없었다. 현수가 죽었다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초인종을 계속 눌렀다.

띵동!

왜?

띵동!

반년 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띵동!

반년 전에 내가 하지 못했던 일을 끝내기 위해서.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쾅!!

문고리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려서 뒤편의 소방도구함에 부딪쳤다. 엄청난 소리가 났다. 문 안쪽으로 보이는 것은 복도보다 더 어두워서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반년 전과 똑같은 기분 나쁜 고요함이 고속으로 돌아가는 전기톱의 소리도 어둠 속에 파묻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저 안 쪽의 어딘가에 상자가 있는 것이다. 왠지 알 수 있었다. 아니다. 어둠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들어오라고,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신중하게, 현수의 집이었지만 이제는 주인이 없는 어둠의 집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역시 어두웠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어둠은 점점 짙어졌다. 거실 쪽으로 발을 옮기려고 했을 때 뭔가가 내 발 밑에서 부스럭 거렸다. 허리를 약간 숙여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워서 자세히 보았다. 약간 누런 종이 쪼가리였는데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매일신문.

현수가 누누이 말한, 매일매일 배달 와서 매일매일 챙겨본다는 그 매일신문의 쪼가리였다. 그런 게 내 발 밑에 셀 수도 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현수가 찢어버린 걸까? 아니면 그 상자가? 모르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다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거실은 녀석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보았던 풍경 그대로였다. TV가 있고, 맞은편에 푹신푹신한 소파가 있고. 약간 다른 점은 거실 중앙이 텅 비어 있다는 점과, 소파 위에 있어야 할 TV 리모컨이 TV 바로 앞에 놓여 있다는 점.

부스럭.

뭔가 또 소리가 났다. 신문 쪼가리를 밟아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부엌이었다. 거기에서 샛노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전기톱을 잡은 손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주었다. 그에 맞추어 전기톱의 속도가 점점 올라가는 것 같았다. 신문 쪼가리를 밟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전기톱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며 천천히 부엌 쪽으로 다가갔다.

냉장고가 열려 있었고, 딱 내 키 정도 되는 검은 색 나무 상자가 그 앞에 처박혀 있었다. 상자 안에 있는 ‘뭔가’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이나 음료수 같은 걸 꺼내서 껍질째로, 페트병 째로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러 개의 시꺼먼 손들이 그런 것들을 상자 안으로 운반하고 있었는데 대략 네 개 정도는 되어 보였다.
소리가 멈추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팔들도 사라졌다.

천천히, 천천히 상자가 돌아갔다.

팔들 중 하나가 툭 튀어나와서 냉장고 문을 닫았다.

탁.

그 소리와 함께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며 상자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럴 줄 미리 알고 있었던 나는 생각했던 대로, 준비했던 대로 높게 치켜 올렸던 전기톱을 아래로, 그 빌어먹을 상자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사람 세 사람이 둘러싸도 손을 잡지 못하는 두께의 나무도 무 썰 듯이 베는 강력전기톱. 줄을 세 번 당겼을 때부터 엄청난 박력을 선보였던 강력전기톱! 이 빌어먹을 나무 상자도 두 동강 내줄 강력전기톱!!

죽어라 이 개자식아!!



까가가가가가가가가!!!



나무를 자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무보다 몇 배는 더 단단한,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지수와 현수는 한 가지 자그마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강철’ 상자를 ‘나무’ 상자로 생각한, 아주 사소한 착각을.

그 아주 사소한 착각이 지금의 내게는 아주 결정적인 착각이 되고 있었다!

상자의 옆면에서 네 개의 팔이 뻗어 나와 내 팔과 다리를 붙잡았다. 내 팔을 잡은 시꺼먼 팔이 팔을 마구 흔들고 쥐어뜯어서 전기톱을 놓게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지만 녀석의 팔 힘이 너무 셌다. 톱이 날아가 소파 위에 떨어져 안쪽으로 처박혔다. 내 손에서 떠났지만 전원이 꺼지지 않은 탓에 톱날이 계속 돌아가 소파를 갉아먹고 있었다. 한편 다리를 잡은 검은 팔은 나를 상자 안쪽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힘에 못 이겨 내 몸은 점점 상자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상자 안은 어두웠다. 그리고 뭔가가 있었다. 뭔가가 보였다.

악마.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나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지수의 비명이 떠올랐다. 잡아먹힐 거야! 잡아먹힐 거야!! 니가  오면, 오면 저 상자가 튀어 나와서 너를 잡아먹을 거야!! 나를 잡아먹은 것과 같이! 마이크를 잡아먹은 것과 같이!! 뼈를 발라내고 피를 튀기면서 너를 하나하나 분해해 버릴거야!! 웃으면서, 아주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뼈를 부러뜨리고 피를 여기저기 뿌리면서!!! 죽여 버릴거야! 죽여 버릴거야!! 너를 죽여 버릴거야!!!! 지수가 웃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어둠 속에서, 눈알을 뒤집으며, 미친년처럼 깔깔깔 거리며 나를 상자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꺼져! 꺼져 이 미친년아!!!!”

발을 붙들고 있는 손을 마구, 인정사정없이 짓밟아 버렸다. 녀석도 고통스러운지 살짝 손을 뒤로 물린다. 그 틈을 타서 상자로부터 도망가려는데 팔을 잊었어 태일이 형!! 현수가 말한다!! 술 마시자! 술 마시자! 우리 모두 술 마시자!! 태일이 형을 안주삼아 우리 모두 술 마시자!!! 팔도, 발도, 거시기도, 그리고 뇌도!!! 태일이 형을 안주삼아 우리 모두 술 마시자!!!!! 현수가 웃는다! 컵라면만 계속 처먹어서 뒤룩뒤룩 불어난 배를 두들기며 신명나게 노래 부른다!!!“닥쳐 쓰레기 자식아! 닥쳐!!!”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서 그 재수 없는 시꺼먼 팔을 겨우 뿌리쳤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방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 들어갔다. 쾅! 하고 문을 닫아버리고 문을 잠가버렸다. 들어와서 보니 현수의 방이었다. 창문 같은 것도 없이, 있는 문이라고는 내가 지금 기대고 있는 문밖에 없는 그런 방이었다. 밖에서는 그 나무 상자, 아니, 그 강철 상자에서 나온 손들이 문을 쾅쾅 두들기고 있었다. 질리지도 않고 두들겨 대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밀려들어오는 두려움 때문에 끝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살아날 수가 없다. 저런 것에 빨려 들어갔다가는 순식간에 잡아먹힐 것이다. 나는 그제야 지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그녀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미안해, 지수야. 나는 네 원수도 갚지 못했어. 그것뿐만이 아니라 너한테 미친년이란 소리까지 했어.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미쳤었어. 정말 미안해. 정말...미안해...

아니, 복수는 못 해도, 살아남을 방법이 있기는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끝까지 여기서 버티는 것이다. 며칠이 지나면 신문 배달원이든, 아니면 경비원이든, 아니, 누구라도 좋다, 아무튼 며칠만 이렇게 있으면 누군가가 이 집의 이변을 알아챌 것이고 여럿이서 이 집에 들어올 것이다. 그럼 나는 그들의 구조를 받으면 된다. 그래, 그 이전에 저 상자 쪽이 물러나주면 더 좋고...

한 가지, 잡생각이 떠올랐다.

최악의 상황에 대한 것.

어느 새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멈춰 있었다.

멀리서, 소파가 있을 거실 쪽에서, 전기톱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내가 지방 지사 창고에서 가져온, 세 사람이 둘러싸도 손을 맞잡지 못하는 정도의 두께의 나무도 무 썰듯이 잘라버리는 강력전기톱. 인부 몇 사람이 잘못 사용해서 팔 다리가 병신이 되었다는 그 강력전기톱. 원래대로라면 저 악마 같은 상자를 두 조각으로 만들어버려야 했던 바로 그 강력전기톱.

톱날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문을 만져보았다.

차갑지 않은, 아주 부드러운 감촉.

전기톱으로 자를 수 있는 것.

첫째가, 사람의 팔과 다리.

그리고 둘째가, 지금 내가 만지고 있는.

나무.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치게 만드는 톱날 소리가 바로 문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도 평온하게 문에 기대어서 잡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다. 미친 걸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로 미쳤다. 입에서는 웃음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 밖의 상황을 상상하고 있다. 딱 내 키만한 높이에 정육면체 모양, 그리고 기분 나쁜 검은 광택의 ‘강철’, 그래 ‘나무’가 아니라 빌어 처먹을 ‘강철’ 상자에서 네 개의 팔이 뻗어져 나와 있다. 손은 모두 전기톱의 손잡이를 잡고 있다. 세 개의 손은 손잡이에, 한 개의 손은 손잡이에서 삐져나온 줄을 신명나게 수십 번을 잡아당기고 있다. 천장까지 높이 치솟아 오른 전기톱의 날은, 죄수의 목을 0.1초에 잘라버리고 1초 만에 죄수의 의식을 아주 상쾌하게 날려버리는 단두대의 날이었고,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뼈째로 썰어버리는 제이슨의 악마 같은 전기톱 날이었다.

나는 웃었다. 상자도 웃었다.

미믹(Mimic)의 웃음이었다.



콰드드드드드드우드드드드드득!!!!



*



시계를 본다. 새벽 5시.

나는 어느 집 앞에서, 신문을 깔아뭉개고 서 있다.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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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단편제에 이걸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심사 사항 중에,

'주제'

가 있어서 그냥 여기다가 올립니다.
주제가 없거든요, 이게.
그냥 공포물이지, 뭔가 말하고 싶어서 쓴 게 아니지 말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참 곤란하군요. 새로 쓰고 있긴 한데 말입니다.

후기는 제 블로그

http://ssaiass3.egloos.com
블랙번 교육적지도촉진위원회

에 오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 보셨습니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아야메블랙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