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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공포 미믹(Mimic)

2006.08.01 22:18

아야메블랙번 조회 수:232 추천:1

extra_vars1 식인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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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본다. 새벽 5시.

요즘은 하는 일도 없는데 가끔씩 쓸데없이 일찍 일어나곤 한다. 대학을 졸업한지 벌써 2개월이 지났는데도 제대로 된 직장 하나 구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대학 졸업하고 나서 자리 구하면 되지’하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4학년 때 같은 과 애들 열심히 일자리 구하는 걸 보면서 뭘 그렇게 서두르나 하면서 다른 친구들이랑 술만 퍼마신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기는 하다. 결국 대학 졸업 후 아직도 취업하지 않은 사람은 나와, 같이 술 마시고 논 친구들밖에 없게 되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현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백수인 나도 신문 정도는 꼼꼼히 챙겨보기 때문이다. 신문 배달원이 언제 우리 집 앞으로 왔다 가는지는 모르지만 뭐, 5시도 넘었고 하니 왔다 갔겠지 하며 문을 열었다.

문이 뭔가에 퉁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시 문을 열었다. 퉁.

문 뒤에 뭐라도 있는 건지 중간까지밖에 열리질 않았다. 하지만 힘껏 문을 밀자 문 뒤에 있는 뭔가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났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칠판 표면을 긁는 듯한,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내 힘에 그 뭔가가 뒤로 밀려나는 것 같았다.

문을 완전히 열었다.

커다랗고 시꺼먼 뭔가가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깜짝 놀라서 무의식적으로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그것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분명 여느 때와 같이 신문이 차가운 돌바닥에 놓여 있었다. 매일매일 배달오고 매일매일 챙겨보는 매일신문. 곱게 접힌 그 신문을 한 상자가 깔아뭉개고 있었다. 사람 몇 명은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대략 1.8미터 정도로 보이는, 아무래도 나무로 만든 것 같은데 표면이 짙은 갈색에 여기저기에 얼핏 봐서는 모를 것 같은 거무스름한 얼룩이 져 있어서 뭔가 기분 나쁜 그런 상자였다.

대체 뭐지? 이것도 신문 배달원이 가져다 놓은 건가? 사은품 비슷한 건가? 축하합니다, 고객님! 2년 동안 저희 신문을 구독해주신 고객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무지막지하게 크고 무지막지하게 기분 나쁜 나무 상자를 선물로 드립니다? 그럴 리가 없다. 무지막지하게 타산적인 이 시대에 이렇게 큰 사은품을, 그것도 타산적인 걸로는 따라올 신문사가 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매일신문에서 나 같은 백수에게 건네주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로또 당첨 확률보다도 적을 것이다.

그럼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일단 안으로 끌어다 놓고 생각해보자. 나는 상자 반대편으로 돌아가 손을 대고 밀어보았다. 크기가 커서 무게도 무거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밀렸다. 어쩌면 안에 아무것도 없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아무것도 없진 않겠지. 내용물이 가벼운 걸 거다. 안쪽에 놓인 운동화가 거치적거렸지만 무시하고 상자를 힘껏 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볍게 거실까지 상자를 밀어놓고 문을 닫았다. 새벽이라서 그런지 소리가 상당히 크게 들렸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서 상자를 살펴보았다. 신문사 사은품 얘기는 집어치우고, 누군가가 보낸 소포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나에게 이 정도 크기의 소포를 보낸 녀석이 누구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진수? 태일이 형? 창민이?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아는 친구들 중에 이렇게 커다란 걸 보낼만한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어제 잠자리에 든 게 대략 12시 정도였다. 그렇다면 12시에서 5시 사이에 이 기분 나쁜 상자가 배달되었다는 소린데, 보통 그렇게 늦은 시간에 배달이 오진 않는다. 설령 배달이 왔다고 해도, 배달원이 말도 없이 집 앞에 놓고 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너무 말도 안돼서 그 가설도 집어치우고, 다시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며 생각하다보니 벌써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결국 다 때려 치고 TV를 켰다. 뉴스가 나왔는데, 청년 실업 문제에 관한 소식이 튀어 나왔다. 대학 졸업생 취업률이 해가 가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현재 직장을 가지지 못한 채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대학 졸업생 수가 몇만 몇천 명이다 뭐다 하면서 떠드는 아나운서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면서 짜증이 치밀어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바꿨다.

역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 같은 소리를 지껄이나 싶어 다시 바꾸려고 했는데, 사건 사고 소식 코너였다.

[...최근 서울 곳곳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실종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주일 전부터 서울 신설동에 사는 27살 김 모씨, 삼성동에 사는 28살 최 모씨 포함하여 총 5명이 자택에서 갑자기 실종되었습니다. 모두 20대 중반에서 후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자택에서 나간 흔적은 없었으나 모두 하나같이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창문을 통해 침입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MBC 뉴스...]

원인을 알 수 없는 실종.

태일이 형이 해준 얘기가 떠올랐다. 그는 지금 어느 대기업 신입사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지금의 나와 같이 일자리 없는 백수였다. 당시 3학년이었던 나는 학교 근처 술집에서 친구들과 같이 한참 맥주 시키고 안주 시키고 니가 돈내니 내가 돈내니 그러고 있었는데 왼손에 소주병을 든 그가 갑자기 술집으로 찾아와서 뜬금없이 한 말이,

“사라졌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던 우리는 더 자세히 말해보라고 했다.

사라진 것은 그가 반년 동안 사귀고 있던 애인. 주말 새벽에 태일이 형은 애인의 집으로 찾아갔었다고 한다. 무슨 이유에서 갔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초인종을 눌렀는데도 대답이 없어서 현관문을 잡아 당겼더니 힘없이 열리더라는 거다. 원래는 닫혀져 있었어야 하는 건데. 그녀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주인인 형 애인은 물론이고 그녀가 기르고 있던 2살짜리 개도 같이. 형은 경찰에 신고했지만 밖으로 나간 흔적은 물론이요, 안으로 누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짐은 전부 집안에 그대로 있고. 문은 열려있고. 밀실 살인도 아니고 밀실 실종이었다.

거기서 형은 말없이 술을 마시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유쾌했던 분위기가 싹 가라앉았다. 걱정마라, 기다리면 분명히 돌아올 거다, 여자는 자고로 밖으로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때가 있는 거다 등. 주위에 있던 내 친구들은 그렇게 형을 위로했다. 나도 그랬고.

그리고 몇 달이 지나자 형도 그녀를 잊었는지 어쨌는지, 열심히 취직활동 해서 제법 이름 있는 대기업에 들어갔다.

1년이 지났다. 그의 애인이 돌아왔다는 소리를 나는 아직까지도 듣지 못했다.

TV에서 나오는 광고를 쭉 보고 있는데 문득 떠올랐다.

신문.

매일매일 배달 와서 매일매일 챙겨보는 매일신문.

문 닫기 전에 가져왔던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다.

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없다.



친구들에게, 그리고 대학 졸업한 후에도 잘 만나고 있는 선후배들에게도 전화를 했다. 진수, 창민이, 태일이 형 등. 내가 물어본 질문은 단 한 가지. 나한테 뭐 택배 보낸 거 있냐, 혹은 있습니까? 대답. “없는데?” “없는데요.” “없어.” 그리고 “왜?”. “왜?”라는 질문에 나는 이 기분 나쁘게 크고 기분 나쁜 색깔을 띠고 있는 나무 상자의 특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대답. “그런 거 안 보냈는데.” “뭐야 그게. 암튼 난 모른다 그런 거.” 그리고 잠시 침묵. 마지막은 한반도에서 거의 최남단에 있는 지역으로 파견 나간 신입사원 태일이 형이 보인 반응이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은 침묵이었다.

“태일이 형?”

“음...미안하다, 생각이 잘 안 나네.”

“예? 그럼 태일이 형이 보낸 거예요?”

“아냐, 난 그런 거 안 보냈어. 애당초 내 생일 때 선물 하나 안 사준 놈에게 내가 뭘 주겠냐?”

“그거에 한 맺혀서 제게 열면 터지는 플라스틱 폭탄을 보냈다든지.”

“야 임마, 평범한 회사원이 그런 걸 어디서 구하냐.”

“그럼 뭐예요, 그 생각이 잘 안 난다는 게?”

“몰라. 아무튼 뭔가 생각나면 다시 전화할게.”

“아, 형!”

“왜?”

“그...형 옛 애인 말인데요. 돌아왔나요?”

“......”

“형?”

“안 돌아왔어. 그럼 전화 끊는다.”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다시 상자를 돌아보았다. 정육면체의 그 나무상자는 거실의 중앙에 턱하니 버티고 서있었다. 내 키를 약간 넘어서고 있지만 까치발을 하면 상자의 윗부분을 볼 수 있다. 거무스름한 얼룩은 주로 이 상자의 옆면에 있었는데 마치 상자의 윗부분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위에는 아무런 얼룩도 없다.

뭐 아무렴 어떠랴. 내용물을 보면 어찌된 영문인지 알게 되리라. 나는 상자를 열어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디를 열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정육면체인 데다가 어디가 뚜껑인지 표시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위가 뚜껑인가 해서 봤더니 손가락을 넣을 틈도 없었다. 그것은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말이 안 되었다. 틈이 없으면 열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까치발을 들어 윗부분을 살펴보던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건 물론 틈이 아니었다.

윗부분의 나무판자가 살짝,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아주 살짝, 상자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갑자기 흔해빠진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아무리 문을 잡아당겨도 안 열리는데 문에 써져있는 말, ‘미시오’.

살짝 판자를 아래로 밀어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뭔가 느낌은 있었다.

상자에 있는 내용물이 위 뚜껑을 막고 있는 것이다.

손을 떼고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해보았다. 아침에 상자를 옮길 때 느꼈듯이 상자의 내용물은 상당히 가벼운 편이다. 그런데 위 뚜껑이 막혀있다는 점과 판자의 기울기를 생각해보면 내용물은 상자의 크기만큼 크거나 상자 높이만큼 기다랗다는 것이 된다. 대략 1.8미터 정도에 상당히 가벼운 물건. 이렇게 큰 나무상자에 넣어서 보낼 필요가 있는 물건.

뭐가 있을까.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었다.

띠리리리리.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갑작스럽게 울린 전화벨 때문에 깜짝 놀랐다.

가서 받아보니 어머니였다. 한달만의 전화였다.

어머니께서 말한다. 취직은 했니?

나는 대답한다. 아뇨.

그리고 그 이후로 어머니가 하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한달 전에도 그랬다. 아직 취직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나이도 드신 분이 기차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해가며 빽빽 소리를 질러 대시는 거다. 돈이 어쩌니 결혼이 어쩌니 가문이 어쩌니 대대손손이 어쩌니, 심지어 취직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까지 끌어온다. 거의 천 마디는 넘는 그 잔소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아직도 취직 안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알았다고 한마디 하고 툭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쩌라고. 누군 취직 안하고 싶어서 안하나?

신경질이 나서 거실 중앙의 그 빌어먹을 나무상자의 옆면을 발로 힘껏 찼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앞꿈치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발가락들을 움켜쥐고 비명을 질러댔다. 너무 아팠다. 뼈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조금 고통이 가라앉자 다시 상자를 올려다보았다.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일어서서 상자를 힘껏 밀어봤다. 틀렸다. 몸 전체를 상자 표면에 갖다 대고 밀었는데도 상자는 거실 바닥에 뿌리를 박은 듯 아예 미동조차 하질 않았다. 이상했다. 아침에 그것을 안으로 들여다 놓을 때만해도 이렇게 힘껏 밀지 않아도 잘 움직였는데. 상자 안의 내용물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어쨌든 이제는 상자를 밖으로 다시 내놓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발로 찼을 때의 느낌, 그리고 몸을 상자 표면에 가져다 대었을 때의 느낌. 도저히 나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상자가 나무 상자라면 표면이 그 정도로 차갑지는 않을 것이다. 밀 때 표면에 얼굴을 가져다 대었는데, 나무가 아니라 마치, 도마뱀의 표피에 얼굴을 갖다 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불길한 감촉이었다.



오후 4시 30분 즈음에 태일이 형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로 보아 차에 타고 있는 듯한데 전화 건너편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심상치가 않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잡음 때문에 간간히 전화 목소리가 끊기기도 했다.

“여보세요?”

“다행이다!...치칙...아직...치지지..구나!”

“여보세요?”

“나 태일인...직..그 상자 아직도...거기칙...있냐!?”

“어, 형! 상자 그대로 있어요!”

“...치지지지지지...려!!!”

상태가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었다.

“예?”

“버려! 당장 어디다 갖...치지직..리라고!!...치지..위이이이이잉...!!”

“안돼요! 아까부터 상자가 움직이질 않아요!”

“치지지지지지!!..어!?”

“안 움직인다고요! 꼼짝도 안해요!!!”

잡음 때문이 아니었다. 잠시 동안 형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치칙!! 거기에서 꼼짝말고 있어!! 위이이이잉!! 지금 올라가고 있으니까!!!!”

“네? 올라오신다고요?”

“알았지!! 아, 아니다...아니야! 안돼!! 안돼!!! 거기에 있으면...치지지직!! 너 빨리 어디로...치지지지지지지지지직!!!!”

[삐...삐...삐...]

전화가 끊겼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집에 있는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웠다. 아무래도 오늘은 늦게 잠자리에 들 것 같아서 일부러 저녁을 늦게 먹었다. 태일이 형이, 올라온다고 했다. 그와 직접 얼굴을 마주보는 건 아마 반년만일 것이다. 취직한 이후 그는 나와 만나지 못했다. 괴로울 정도로 많은 업무량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 갓 취직한 신입사원에게 반쯤 장난으로 한 사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을 부과하는 것은 어느 기업에서나 있는 관례 같은 것이라고, 40살 먹은 대선배한테서 술자리에서 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애인을 잊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덕분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올라온다고 한다. 최남단에서 올라오는 거니까 새벽 정도에 도착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 대선배가 태일이 형을 보고 뭐라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형이 애인을 잃은 슬픔으로 넊이 나가서 취직 활동도 하지 않고 있던 그런 때였는데, 그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새마을 때였으면 넌 벌써 감옥에서 썩고 있었을 거다.”

왜 여기서 ‘새마을’이 나오는지 몰라서 물어보자 그가 말하기를, 박정희 시절,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 새마을 운동이 한참 일어나고 있던 때에는 다들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그런 시절에 대학까지 나와서 일도 안하고 먹고 마시고 자는 건 크나큰 죄악으로 간주되었다, 최고 윗대가리인 박정희는 물론이고 아래의 국민들까지 전부 그런 분위기였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옳은 말이라고, 아직 취업 걱정이 없었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TV를 보려고 하는데 상자가 방해가 되었다. 소파 맞은편에 있는 TV 화면을 거실 중앙에 있는 그 빌어먹을 상자가 죄다 가려버리기 때문이었다. 소파를 옮겨버릴까 하다가 그냥 내가 상자 앞으로 움직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TV에서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그 박정희 시절이나 지금이나, 드라마는 별다른 발전이 없는 것 같다. 나오는 인물들의 타입이나 주변 환경은 다를 지도 몰라도 다루고 있는 주제는 하나같이 똑같다. 사랑. 고정적으로 나오는 인물은, 결혼에 반대하는 부모와 그 부모의 뜻에 맞서는 커플. 순탄하게 결혼하는 스토리가 재미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렇게 발전이 없을 수 있을까, 게다가, 아무리 전 인류적인 주제 1위가 ‘사랑’이라지만 이렇게 많이 써먹으면 지겹지도 않나 등등의 온갖 불평불만을 속으로 꿍얼꿍얼 거리면서도 나는 상자에 축 늘어져 그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곧 드라마가 끝나고 스탭 롤도 끝나고 나서 검은 TV화면에 비추어진 것은 약간 졸린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나와 그 정말 기분 나쁘게 짙은 색에 감촉이 이상한 1.8미터짜리 빌어먹을 상자와



내 머리를 붙잡고 있는 두 시꺼먼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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