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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공포 피와 뼈 2. 대결(代決) (1)

2007.07.20 21:13

페이스리스 조회 수:532 추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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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결(代決)




교문을 통해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부분이 즐거운 표정으로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몇몇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이 목격하거나 누군가에게서 들은 사건 현장의 참혹함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진철이가 죽었대. 어머 어머? 그 악마 선생이? 어떻게? 칼로 얼굴을 무참히 후벼 팠나봐.


 


누가?


 


내가 어떻게 알겠니.


 


교문 옆에서는 한 여자가 주차되어 있는 경찰차에 기대고 서 있었다. 20대 후반, 많으면 30대 초반일까, 목선을 살짝 드러내는 검은 단발머리에 타이트한 검은 여성용 정장을 입은 그녀는 날카로운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치 사냥을 위해 풀숲에 몸을 웅크린 퓨마처럼. 그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주위에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청성경찰서 강력계의 박지영 형사는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녀는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사건의 개요를 다시 한 번 정리했다.


 


체육 교사이자 학생 주임이었던 박진철 선생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채 양호실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시각은 수업이 막 끝난 오후 5시 20분. 얼굴 쪽이 날카로운 뭔가에 의해 심하게 난도질당했고 사인은 과다출혈 혹은 쇼크사. 피의 응고 정도와 사후 경직 정도로 보았을 때 사망 시각은 오후 4시 40분에서 5시 10분 사이로 아직 수업 중이었다.


 


중요 참고인은 총 4명.


 


사망 시각에 자리에 없었던 양호 선생 박수형.


 


사망 시각에 양호실 침대에 있었던 여학생 성민희.


 


사건을 제일 먼저 보고한 선도부원 유명훈.


 


그리고 시체를 제일 먼저 발견한….


 


“웅…….”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를 싸매고 한참을 생각하던 지영은 결국 포기하고 학교 안에서 취조 준비를 하고 있는 동료 전대근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왜 지영아? 애들 다 빠져 나갔어?”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뭐 좀 물어보려고요.”


 


“뭘? 아, 잠깐만.”


 


수화기 저편에서 ‘야! 농땡이 피우지 말고 책상 빨랑빨랑 옮겨! 거기 출석부 뒤적거리면서 여자 사진 보고 있는 새끼들 뭐야!! 죽을래!!’라고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 미안. 어디까지 얘기했지?”


 


“뭐 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


 


“뭔데?”


 


“시체 제일 먼저 발견한 학생 있잖아요. 이름이 뭐죠?”


 


“이름? 에 어디 보자….”


 


대근은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다시 전화를 받았다.


 


“상진. 신상진이야. 근데 그건 왜?”


 


“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 나서요. 중요 참고인 이름은 몇 번이고 외워뒀는데….”


 


“하하, 그것 때문에 전화 한 거야? 성격 한번 참 꼼꼼하네. 그럼 취조 준비 다 되면 전화할게. 수고. …야! 출석부 보지 말랬지 이 자식들아! 엉!? 쳐맞고 싶….”


 


“수고.”


 


뚝.


 


지영은 전화를 끊었다.


 


어쨌든 학생들이 모두 학교에서 나가는 대로 이 중요 참고인 4명의 취조를 시작할 것이다. 원래 방음 장치가 되어 있는 경찰서 취조실에서 취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곳을 다른 사건 팀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있는 교실 한 곳을 빌려 임시로 취조실을 만드는 중이었다. 방음은 기대할 수 없지만 취조를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난리로구먼.”


 


“네, 난리예요.”


 


옆에서 기척도 없이 소리가 들렸는데도 지영은 태연히 대답했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는 갈색의 후줄근한 정장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목에는 오래된 카메라를 걸고 정장에 달린 주머니에는 수첩과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시대를 지나도 한참 지난 신문기자의 모습이었다. 지영은 그 복장을 볼 때마다 그가 진심으로 그런 복장을 하고 다니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장난삼아 그러는 건지 궁금했지만 왠지 그 질문조차 우스워져서 직접 물어보진 않았다.


 


“오늘은 어떤 분으로부터 정보를 얻어서 오셨죠?”


 


“경찰서에 있는 어느 착한 순경으로부터라네.”


 


“정확한 이름을 말씀해주시면 다시는 정보 누출 같은 어리석은 짓을 못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에 글쎄, 이름이 뭐였더라…. 이 늙은이가 원체 기억력이 없어서 잘 기억이 안 나는구먼, 껄껄껄.”


 


하아. 지영은 속으로 한숨 쉬었다. 그와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그가 능글맞은 태도로 질문을 넘겨버리면 묻고 있는 그녀 쪽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내부인(內部人)입니다.”


 


내부인?”


 


“이 학교는 교문을 제외하고 주위가 전부 높다란 방음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벽돌로 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맨손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학교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이 교문뿐입니다.”


 


“오호.”


 


“그런데 학교 수위에게 물어봤더니 사건이 일어난 시간에 학교 안으로 들어간 외부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더군요. 그렇다면 범인은 내부인, 즉 학생과 선생 둘 중 한 곳에 있을 겁니다.”


 


“과연 그렇군. 하지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안으로 잠입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그 부분도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애당초 오늘 학교 안에 들어간 외부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범인은 내부인일 수밖에 없죠.”


 


“흠흠.”


 


“다행히도 이 학교는 수업 중에 교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범인이 학생이라면 출석부를 조사해서 그 시간 수업에 없었던 학생을 골라내는 것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겠지요. 그리고 범인이 선생이라 해도 그 방법은 유효합니다. 선생이 없어서 출석 자체가 되어 있지 않은 반을 골라내면 되니까요.”


 


“명쾌한 추리일세. 도움이 되었어.”


 


“예?”


 


노인은 어느새 수첩을 들고 지영의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


 


정신없이 말하던 지영은 순간 아차 싶었다.


 


또 말려들었구나.


 


“허허허, 이래서 자네가 좋단 말야, 박지영 군.”


 


“지금 거, 다 받아 적으신 겁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적었네.”


 


“…아직은 기사화하지 말아주십시오. 정식 기자회견 때나 밝힐 내용이니까요.”


 


“그럴 수야 없지. 한물 간 이 늙은이도 기자로 채용해준 고마운 사장님을 위해서라도 말일세. 그 분한테는 항상 감사하고 있어서 적어도 퇴직하기 전까지는 열심히 일해서 그 은혜를 갚고 싶단 말이야. 허지만….”


 


노인은 지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좋아하는 지영 군이 애걸복걸을 하니 무시할 수도 없군 그래.”


 


누가 애걸복걸했다는 거야, 이 영감탱이가!


 


지영은 속으로 그렇게 외쳤지만, 그 외침이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노인의 눈을 보고 그가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영에 비해 노인은 경험이 풍부했다. 수사 쪽이든, 인생 쪽이든.


 


“기사화하진 않겠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보니까 이제 곧 취조를 할 모양인데, 나도 그 내용이 궁금하군.”


 


“그래서요?”


 


노인은 씨익 웃었다.


 


“나도 그 취조에 참석하게 해주게.”


 


“안됩니다!”


 


지영은 단호했다.


 


아무리 노인이 과거에 형사였다고 해도 일반인은 일반인이다. 게다가 기자이기도 한 그를 취조에 참석시킨다는 건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원칙이, 법이 어긋나는 일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안 들여보내주면 자네가 말한 걸 내가 기사화할 텐데?”


 


“안됩니다!”


 


“기사화하면 자네가 정보 유출했다는 사실이 동네방네 퍼질 텐데?”


 


“그, 그래도 안됩니다!”


 


“자네가 안 들여보내준다 해도 난 밖에서 엿들을 텐데?”


 


“그, 그래도….”


 


“이 늙은이가 애걸복걸하는데도 안 되겠는감?”


 


“…….”


 


지영이 마음속으로 원칙의 준수와 세상과의 타협간의 전쟁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핸드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김대근 형사였다.


 


“지영아 난데, 이쪽은 취조 준비 모두 끝났어. 그쪽은 어때?”


 


교문은 이미 텅텅 비어 있어서 근처에 지영과 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쪽도 끝났어요.”


 


“그래? 그럼 올라와. 3층 2학년 5반 교실이야.”


 


“알았어요.”


 


“어 그래. 끊어. 야! 거기 누가 일 끝났다고 출석부 보래!! 너희는 밖으로 나가….”


 


뚝. 이번에는 그쪽에서 먼저 끊었다.


 


노인은 이미 교문을 지나 저 멀리 올라가고 있었다.


 


지영은 속으로 다시 한숨을 쉬었다.


 


원칙이 어긋나는 건 싫다.


 


하지만 세상에 좋은 일만 일어나란 법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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