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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역사 클레멘테의 수첩

2007.10.04 04:27

키투스 조회 수:751 추천:3

extra_vars1 <아말피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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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숙소라... 그 곳이 아말피에 있는지 아니면 도시 밖에 세워진 건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가 편지로 지겹도록 칭송하고 띄워준 사람이 내가 사는 곳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니 이토록 특이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를 만난다는 건 기대가 되기도 했고 걱정이 들기도 했다. 파비안의 말대로 나의 연구와 몽상으로 이루어진 인생을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지만 반대로 나의 사랑스런 친구와 그가 존경하는 기사단무리, 그리고 그들의 주인장과 함께 나란히 피를 줄줄 흘리며 주님이 계신 하늘이나 불타는 지옥이 묻힌 대지를 바라보며 몸통아리가 천천히 식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어찌할까! 친구의 부탁을 이제 와서 거절할 수도 없고! 영원히 헤어질 뻔했던 오랜 친구를 만났고 또한 그의 기뻐하는 표정을 당분간 계속 보게 될 것이니 나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의 응어리도 풀어낼 수 있으니 개인적으로 나쁘게 볼 것도 아니다. 파비안이 기뻐하는 모습만 많이 볼 수만 있다면야.


단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기사들의 행위에 동조하는 꼴이 되었으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의 바램뿐 이겠지만 기사들이 길가는 죄 없는 주민들을 죽이지만 않았으면...




앞으로의 계획이 급박하게 바뀌어버린 점심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친구의 주인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위해 곧장 집으로 갔다. 옷을 갈아입고 여행에 필요한 도구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집 안 풍경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바뀐 것이 없었지만 파비안은 새 집으로 온 것처럼 마냥 신기해하며 즐겁게 이리저리 돌아봤다. 내가 위층으로 올라간 사이 물건을 조심스럽게 만지는 그의 성격답게 내가 쓴 문서들과 자료들을 멀리서 살짝 지켜보며 나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물건 정리는 나도 도와줄게!”




좀 전까지 몸에 걸친 허름한 천을 집어치우고 잠시 알몸이 되었다가 제법 나름대로 ‘내가보기에 멋있어 보이는 긴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파비안은 똘망똘망한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그런 옷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더욱 멋있어진 것 같아!”


“고마워. 옷차림으로 칭찬받는 건 네가 처음인 것 같군. 별로 가져갈 것은 없지만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챙길 물건은 별로 없었다. 더러워진 옷을 대신할 여벌의 옷과 매일 쓰는 수첩, 들고 다니기 편한 이세계를 기록한 작은 책 몇 권뿐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책들은 파비안에게 보여주며 서로 얘기할 거리였다.


“앞으로의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닥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말하는 것들이 너에게 즐거움을 줄 테니 걱정하지 마.”


“호오호~! 설마 네가 기록한 것이야!? 벌써부터 기대되는 걸! 주인님께서도 경외의 눈으로 읽을 것이 틀림없어!”


글로 되어있는 것뿐만 아니라 삽화와 설명글이 들어있는 양피지서적도 건네줬다. 친구는 전보다 더욱 즐거워하며 봉제 인형을 선물 받은 소녀처럼 발을 굴렀다.


“차가운 달 표면을 걷는 달나라의 기병대! 우거진 숲을 휘젓는 무거운 짐승을 탄 새머리의 조련사! 거기에 서쪽의 미지의 땅에 사는 나무로 이루어진 사람과 땅속에 사는 아름다운 빛의 요정까지! 우와아! 우와아! 우와아아앗!!”


마치 삽화 속의 존재들을 만난 것처럼 정신없이 좋아하는 파비안을 뒤로 한 채 나는 잠시 구석에 있는 보자기를 쳐다보았다.




날이면 날마다 보던 물건이라서 무시하던 물건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따라 그 것은 나를 애타게 부르는 것 같았다. 단순히 내 키의 반 정도 높이인 물체였지만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놓고 떠나기엔 어떤 존재가 계속 나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엔 나도 모르게 구석에서 갑작스럽게 풍기는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보자기를 향해 걸어갔다. 그 것 앞에 도착하자마자 끈을 풀고 안을 휘젓다 양 손에 잡힌 두 물체를 꺼내들었다.




“가위와 열쇠라...”


내가 꺼낸 물건은 얼핏 보면 장신구 같기도 했고 길가다 재수 없으면 대면하게 되는 산적무리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호신용품 같기도 했다. 왼손에 잡힌 건 칼날이 아래쪽에 나있는 가위형태였고 오른손에 있는 건 긴 주둥이에 끝엔 두개의 칼날이 붙은 열쇠형태였다. 옆 집 아주머니는 생김새대로 자르고 잠긴 문을 여는 물건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들은 분명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검이었다.


두 검 모두 오랜 세월이 지나 색이 바래버렸지만 과거엔 찬란하게 빛이 났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표면엔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장식과 무늬,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다. 프랑크인들의 서쪽과 그리스인들의 동쪽, 무어인과 사라센인들의 남쪽조차 아닌,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이 검들은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또 두 검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만들어진 것이리라.




신비로운 두 검은 내 몸에서 절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이들을 두고 갈수는 없다고 생각난 것일까? 이들이 내 목숨을 구해줄 것 같은 유치한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결국 미지의 검들을 옷 안 주머니에 살며시 놓았다. 여전히 파비안은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지도 모른 채 삽화가 그려진 서적을 들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물건들. 누가 전해준 것이었더라? 그렇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검들을 전해준 당사자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으니까 말이다.




“마를로군! 마를로군! 아직도 집에 없는 겐가!?”


박력 있지만 부드러운 기분이 들게 만드는 목소리. 나를 찾아오는 몇 안 되는 귀한 분이셨다. 큰 소리에 놀란 파비안을 뒤로 한 채 재빨리 문을 열어 바깥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을 정중히 모셨다.


“어이쿠! 며칠 안 지나서 다시 오셨군요! 파비안, 인사드려. 세만 경이셔.”


“네... 아,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파비안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짙은 초록색이 곁들여진 단아한 옷을 입었으며 약간의 턱수염이 난 강직해 보이는 사내였다. 를 보자 친구는 손에 든 책을 등 뒤로 가리며 수줍게 인사했다. 바쁜 듯이 찾아온 사람 역시 우리를 부드럽게 맞이했다.


“어허, 자네는 뭘 그렇게 부끄럽게 대답하는가? 내가 뭐가 대단해서 말이지!? 클레멘테, 자네 상큼하게 생긴 친구가 있었구먼.” 남자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친구에게 악수를 청했다.


“보헤미아의 로스틱 세만이네. 잘 부탁하네.”




이 분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사람들을 돕고 사시는 세만 가문의 일인자인 로스틱 자작이시다. 이렇게 존칭을 쓰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황당할 수 있지만 이 사람과의 관계는 나와 파비안의 사이만큼이나 깊다.


파비안과 헤어 진지 3년 정도 흘렀을 때 길거리 책상에서 글을 쓰던 중 만났다. 귀족의 지위로 이웃을 돕는 이 세상의 몇 안 되는 사람이오니 이런 자들이 수 십 명만 되었어도 세상은 더욱 찬란히 빛났을 것이다. 내가 만나는 파비안의 주인이란 분도 이런 사람이길 바랬다.




무엇보다 믿기지 않겠지만 세만 가문은 200년 전부터 보헤미아와 하인리히의 제국(난 솔직히 말해서 비잔티움의 황제를 진정한 로마황제로 생각하기에 게르마니아의 황제는 로마황제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을 누비며 주변을 어지럽히는 기괴한 존재들을 수없이 무찔렀다는 것이다. 그들은 육체의 한계를 거뜬히 뛰어넘었으며 가문에서 전해져 오는 신비로운 물건으로 기적을 일으켰고 위기에 처한 마을 전체를 구하기도 했다. 세만 가 사람들이 겸손한 건지 아니면 교회 당국의 쓸데없는 의심을 받기 싫은 것인지 ‘마물’들을 퇴치하는 일은 철저히 비밀리에 벌여졌다. 덕분에 사람들은 마물이라 불리는 이상한 존재들을 물리치는 것은 잠시 동안 지상에 강림한 성령이나 천사였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보자기에서 꺼낸 희한한 검들도 로스틱 경이 나에게 건네준 물건들이었다. 물론 세만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물건은 아니었다. 이들이 행방에 대해선 나중에 쓰도록 하겠다. 그것보단 이 분에게 친구와 함께 시작된 여정을 말하는 것이 급선무이니깐.




파비안과의 우연한 만남, 그의 추천으로 인한 시작되려는 여정을 로스틱에게 빠짐없이 전했다.


“저도 이렇게 빠르게 상황이 흐를 줄은 몰랐습니다. 세만 경.”


“흠. 너희들, 이건 굉장히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수도 없이 볼 수도 있다고.”


“주님의 백성을 지키는 사람들의 용감한 모습만 볼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 할 수 있어요.”


파비안은 무엇이든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친구의 표정이 얼마 못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로스틱은 나에게 다가와 천천히 되물었다.


“정말 갈 생각인가? 아무리 특이한 일을 한다하더라도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일은 장담할 수 없어.”


“세만 경. 전 제 친구와 오래 있고 싶은 단순한 이유뿐만 아니라 내가 쓴 글과 그림들을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생활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세만 가 사람들의 활동이 전 아깝다고 생각해요. 세상 사람들이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의 존재들을 알게 된다면 세만 경의 행동도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겁니다. 전 파비안을 믿습니다. 그의 주인은 분명 절 도와줄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의 황제도 서방의 황제도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일개의 백작이 널 도와 세상을 바꿀만한 힘이 있을까? 교황님과 추기경님들이 너의 행동을 보고만 계실까? 자칫하면 나쁘게 보여서 비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에 대해서는?”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도 살아남았습니다. 냄새나는 물고기 뱃속의 요나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죠. 하느님이 기적을 내리신 것처럼 좋은 일이 벌어질게 분명합니다. 달나라와 넓은 대륙, 땅속과 물속 나라에도 사람이 살았다면 그거야 말로 위대하신 주님의 힘을 알 수 있는 척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로스틱은 몇 시간 전의 나처럼 착잡해지며 내 얼굴과 바닥을 번갈아보는 것을 반복하다 몇 초 동안 눈을 감은 후 조용히 파비안에게 말했다.


“파비안이라고 했나? 자네의 주인 마티우스 백작의 숙소는 얼만 큼 가야 하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진 않지만 약간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자 나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인은 곧바로 나의 오른손을 잡고는 천천히 말했다.


“자네와 같은 특별한 이웃을 홀로 보낼 수는 없네. 나도 같이 떠나지.”


난 얼떨결에 입술을 살짝 올렸고 파비안은 홍조를 띈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