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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역사 친일

2007.04.01 00:50

흑룡 조회 수:376 추천:1

extra_vars1 이완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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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합방'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 은사금, 총리퇴관금 등과 함께 일본 귀족으로서 백작 작위와 그것에 따르는 응분


 의 대우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가 다시 그 부의장이 되었다.


 이후 '내선인친목회'를 발기하고 '조선귀족회' 부회장이 되어 일본을 드나들면서 일본 국왕을 만나는 등 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고종이 죽고 그 장례를 이용하여 3*1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에 걸쳐 『경고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수도 한양에서 멀지 않은 곳의 집에서는 발칵 뒤집혀 지기 시작했다.


하인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면서 앞의 중년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 , 독립 만세라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너도 나도 할 거 없이 뛰쳐나와 운동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퍽』




화가 난 중년인이 말했다.




"그게 무슨 운동이야! 폭동이지! 이거 정말 큰일이군…….합방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다니…….


 천황 폐하께 무슨 면목으로 뵙는 단 말이냐……."




고민에 빠진 중년인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하인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종이와 붓 가지고와! 당장!"




하인은 또 맞을까 두려워서 뛰어가서는 잽싸게 붓과 종이를 가지고 왔다.




"이런…….일단 시도는 해봐야 되겠지."




『경고문


 조선 독립 선동은 허설이요 망동 이다. 일제 당국이 이 운동을 '무지몰각한 망동'으로 보고 관대하게 회유하지만 ,


 그래도 자각하지 못하면 필경 강압 책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인들의 이완용에 대한 비판은 더욱 더 거세어지기만 했다.




"흥 , 상관없다. 천만인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경고의 효과가 적지


 않은 것이다."




이완용이 쓴 경고문을 조선총독부에서 게시했지만 분노한 민중들은 모두 찢어버리고 말았다.


이완용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금 경고문을 쓰기 시작했다.




『3*1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서의 민족자결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조선과 일본은 고대 이래로 동종동족 ,


 동종동근이어서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에 부적당한 것이다. 또한 한일'합방'은 당시의 국내사정이나 국제관계로 보아 역사적 자연


 의 운명과 세계 대세에 순응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그리고 3*1운동에 참가하여 '경거망동'하는 사람은 조선 민족을 멸망시키고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는 우리의 적이다.』




그러나 그의 경고문은 오히려 민중들의 분노를 더욱 더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이후 이완용은 후작으로 승작됐고 (1921), 아들 항구도 남작을 받았으며 손자 병길 , 병희등도 모두 귀족으로서 일본에 유학하는 등 영화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만년에 집에 함께 기거하던 일족 이 영구에 의하여 암살되려다가 미수 에 그쳤다는 소문이 퍼진 후 서울 옥인 동 자택에서 와석종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알 수 없는 노릇이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