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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역사 4월 29일(지난 이벤트 출품작)

2007.03.30 07:07

금강배달 조회 수:363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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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품의 인물들의 연대는 실제와 다소 어긋날 수 있습니다.


 



4월 29일, 이 날은 일제 점령기 당시 일왕의 생일이다. 또한 이 날은 한 청년이 세계만방을 향하여 대한의 독립의지를 외친 날이기도 하다






  “어머니, 담이입니다.”


  문 밖에서 열한 살 난 아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들어 오거라.”


  여인은 나지막이 아들을 불렀다. 아직 천진난만한 웃음을 가진 아이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 가까운 곳을 달음질 하여 어미 곁에 와 절을 했다.


  “형은 어찌하고 혼자 돌아왔느냐.”


  “학교에서 공부를 더 하고 온다 합니다.”


  여인은 말없이 흐뭇한 얼굴이 되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담이는 배시시 웃는다. 가을이 깊어가고 추수할 날만 기다리는 여인의 손에는 거친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여인은 둘째를 방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선선했다. 꼭 누군가 부르는 듯이 몸에 감기는 바람이었다. 여인의 눈은 북쪽을 향했다. 사랑하는 남자가 죽은 뒤 여인은 매일같이 북쪽을 보며 서러워했다.


  ‘잘 계시는지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그렇게 여인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 1930년 -




  “이제 내일이면 나는 떠나오.”


  “서방님...!”


  우의는 하루하루가 갈등과 고뇌의 시간이었다. 이제 그의 나이가 스물 셋, 나라는 주인의 자리를 저 섬나라에 빼앗겨 피 끓는 나이에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이 나이가 다 되도록 공부를 하여 모르는 것이 없는데 정작 해야 할 일은 머릿속에 있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을 위해 온갖 운동을 벌이고 야학에서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아무리 사람을 가르치고 민족을 위한 운동을 펼친다고 해도 독립군이 싸움에서 지면 결국 무지에서 벗어난 이들도 일본의 손바닥 위에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생각 한 것이 스스로 독립 운동에 뛰어드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을 벗어나야 했다.


  지금의 조선은 조선이 아니었다. 일본 땅이었다. 일본 땅에서 벗어나지 않고 어떻게 조선의 독립을 준비할 수 있겠는가. 몇 번이고 하늘을 보며 이치에 맞는 길인지 묻고 또 물었다. 이제야 제 할 일을 찾았다고 책을 구석에 치웠지만 그 뜻을 감히 가족에게 말하는 데는 또 긴 시간이 필요했다. 독립군과 접선이 되어 떠날 계획이 세워지고 나서야 아버지와 아내를 앞에 두고 처음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아버지는 다 큰 아들을 손바닥으로 마구 때리고 아내는 울었다. 그러더니 후에 아버지도 소리 내지 못하고 울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내는 한사코 우의를 말렸다. 그러나 우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독립군에 들면 죽을 때에도 사지가 멀쩡하지 못하답니다. 잡히지 못하면 싸우면서 고생하고 잡히면 온갖 고초를 다 겪고 죽는다는데, 돌아오지 못하실 길을 어찌 가신답니까.”


  아내는 이내 울음이 터졌다. 시아버지는 무엇을 하는지 깜깜한 밤에 창호지를 통해 벽에 기대어 앉은 그림자만 비추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것이 아니라, 목이 너무 메었다. 우의는 아내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리다가 강보에 쌓인 아기들에게 눈이 닿았다. 가여운 것들, 이제 아비 없이 자라야할 가여운 것들.


  ‘나는 어찌하여 이런 시대에 태어나 너희를 낳았느뇨.’


  우의는 별안간 가슴이 아파왔다. 통탄할 일이었다. 나라의 황후가 이웃나라 깡패들 손에 죽임을 당하고 처녀들이 전쟁터로 끌려 나가 노리개가 되고 장정들은 남에 나라 일터에서 피똥을 흘리며 일을 하는, 그런 시대에 그가 있었다. 환인님이 이를 보고 계신다면 나라를 팔아먹은 오적 놈들을 무간지옥에 떨어뜨리고 왜놈들을 영영 불에 태울 것이었다. 촛불 위로 아내의 눈물과 자는 아이의 숨결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다음날 우의는 철마 위에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신시대를 여는 것이라며 조선을 위해 봉사하는 것처럼 입에 발린 거룩한 말들을 뱉어대었으나 이것은 일본의 전쟁을 위한 철도였다. 무거운 쇠 레일들을 바닥에 까는 데에는 또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강제로 동원되었으리라. 그 중에는 더러 독립군에 있다가 잡혀와 평생 그 짓을 하게 된 이도 있을 것이다. 우의는 자신이 그리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쓸 대 없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조선인인 사실은 들키지 않았으니 이제 철마에서 내려 중개인만 만나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래, 어서 중국에 닿아라.’


  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 내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어머니!”


  멀리서 첫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책보를 오른쪽에 둘러매고 달려오고 있었다. 여인은 뒤 돌아서 급하게 눈물을 닦았다. 아이가 코앞에 왔을 때는 이내 깨끗이 웃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공부를 하고 온다더니, 일찍 돌아왔구나.”


  이유를 묻는 듯 말했으나 이미 다 아는 답이 나올 것이 뻔했다.


  “제가 남아있는 것을 보시고는 선생님이 내쫓으셨습니다.”


  여전히 나라는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고, 칼을 찬 일본인 교사들은 명분을 세워 돈을 받아낼 뿐 가장 기초가 되는 것 말고는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 외에 가르치는 것이라 봐야 자기네 천황을 찬양하는 것들뿐이었다.


  “집에서 공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일찍 왔습니다.”


  여인은 말없이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남편은 공부를 많이 했었다. 항상 책을 옆에 두고 살았으며 읽은 책을 수 없이 다시 읽곤 하였다. 그런 남편이 공부하기 좋아하는 아들 옆에 없다는 생각에 여인은 또 다시 서러워졌다. 아이는 문을 열더니 동생과 몇 마디 나누고는 책보를 펴 제일 위에 있는 책을 내려놓았다. 동생 담이도 어느 세 쪼르르 옆에 붙어 같이 책을 보았다.








- 1932년 -




  남편과는 소식이 끊긴지 오래였다. 몇 달 전 중국이 일본과 싸워 졌다고 하기에 그저 불안해하고만 있었으나, 아직까지 한인애국단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남편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는 듯 했다.


  첫째는 이제 아장아장 걸으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몇 마디씩 옹알거리고는 하였다. 아들을 중국에 보낸 후 시아버지는 하루도 웃은 날이 없었다. 손주들 자라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을 법도 했는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오히려 눈시울을 붉히는 이유를 용순을 알 것도 같았다.








- 4월 26일 -




  “자, 이제 누가 가느냐만 남았소. 누가 가겠소?”


  의장의 말에 수근 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분명 좋은 기회였다. 일본군의 수뇌들이 한 자리에 모일 것은 자명한 일이고, 외신기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그들을 죽이면 조선민족의 억울함을 외칠 수 있을 것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단원들의 눈이 한곳에 모였다. 손을 들고 외친 청년의 눈동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이름은 우의, 이제는 윤봉길이었다. 중국 땅에 들어서면서 그는 민족의 복을 가져다 바치는 이름으로 윤봉길 세 글자를 심장에 새겼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 야채를 팔며, 1년간 김구와 함께 곳곳을 떠돌며 이름 그대로 민족을 위한 싸움에 몸을 바쳐왔던 그였다. 그러나 아직 스물다섯의 나이가 너무나 젊었던 것일까. 일부 반대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었다.


  “자네는 너무 젊으이!”


  “성실하고 정직한 것은 알고 있으나 이 일은 진짜 목숨을 거는 일이 아닌가!”


  봉길은 말이 없었다. 품에 손을 넣어 담담히 칼을 빼었다. 그의 절친한 단원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든 적을 만나면 싸우다 죽을 셈으로 항상 칼을 품고 자신을 가다듬곤 하였다. 칼집에서 날카로운 날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제히 시선은 그곳에 꽂혔다. 봉길은 칼을 위로 들고 의장 앞으로 나가 단상에 섰다. 김구도 곁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봉길은 바닥에 손을 대더니 높이 들고 있던 칼을 내려 손가락 위에 올렸다. 단원들은 웅성거렸다. 김구의 눈도 놀란 빛을 띠었다.


  “이잇!”


  이를 악물고 지른 비명소리가 보는 이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나간 봉길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얼굴은 타는 듯 붉게 되어 악문 턱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질어나 김구의 앞에 섰다. 손을 위로 들어 선서 자세를 취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 하나이다!”


  더 이상 수군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원들 중 일부는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와들와들 몸을 흔들고 있었다. 고통을 참기 위해 씩씩거리는 봉길의 숨소리가 낮게 깔리었다.




  다음 날, 그는 홍커우 공원에 있었다. 그가 선 자리는 이제 얼마 후면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릴 터였다. 벌써 몇 번째 주변을 빙빙 돌고만 있었다. 빈 공터였으나 이미 그의 눈에는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일본의 수장들과 카메라를 들고 둘러선 기자들이 보였다. 공원을 내내 돌면서 폭탄을 던지는 순간을 수 없이 머릿속에서 연습했다. 이제는 바닥에 있는 돌멩이 하나하나의 자리마저도 기억 날 정도가 되어서야 그는 한인 동포의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김구는 아직 오지 않았다. 결코 실패는 없어야 한다며 윤봉길 혼자 상해로 떠난 것이었다. 손가락을 잘라 선서를 한 이후부터 그는 하루 3시간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집에 들어간 후에도 누워만 있었을 뿐 눈은 뜬 채였다. 그렇게 누워있는 시간도 불안하여 몇 번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동지, 조반 드십시오.”


  봉길은 박 씨가 몸을 흔드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상 위에는 이미 그가 먹을 음식이 간소히 차려져 있었다. 박 씨는 큰일을 해야 할 사람에게 당연 한 것이라며 집에 있는 음식은 되는 대로 그에게 가져다주었으나 봉길은 항상 미안하고 고마워했다.


  아침을 먹고 몇 시간이 지나자 오랜만에 변이 나왔다. 원래 규칙적으로 생활하던 사람이 그러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으나 불안에 떠는 봉길에게 그것은 마치 앞으로 일이 잘 될 것이라는 무슨 징조인 냥 느껴졌다.


  “또 나가십니까?”


  문 앞에 선 봉길을 보고 박 씨가 물었다.


  “예, 아직 준비가 부족해서요.”


  봉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조심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박 씨의 앞에서 나온 말은 중국어였다.


  2시가 되어 도착한 공원은 어제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직사각형의 대형으로 상들이 늘어서 있고 각 자리에 푯말이 붙어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큰 성과가 있었다.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해군 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의 자리를 파악한 것이다. 그 외 그들의 측근들이 앉을 자리도 파악 할 수 있었다.


  ‘내일이면 놈들은 피를 뒤집어쓰고 죽게 되리라.’


  봉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머릿속에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민중들의 한이 풀리는 환호 소리와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의 넘어지고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히 들려왔다. 잠시 후 도착한 온갖 미사여구가 가득 담긴 전승축하 현수막들은 그의 눈에 단지 흉물일 뿐이었다. 내일 일본의 수장들을 볼 때에도 이와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다섯 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는데 그 곳에는 김구 단장이 와 있었다.


  봉길은 경례를 했다. 김구의 눈에는 아직 손가락이 잘린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것이 보였다.


  “성과는 있었는가?”


  “사령관들이 앉을 자리를 알아내었고, 투척을 하기에 좋은 자리를 찾아 두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인파가 모이기 전에 나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김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을 간단히 먹은 후에 곧장 침대에 가 누웠다. 내일 거사를 망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억지로라도 피로를 풀어야만 했다.








- 4월 29일 11시 40분경 -




  오줌이 마려웠다. 이미 아침 8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투척을 하기로 한 자리에 서서 석상마냥 자리에 붙어 있었다. 어깨에는 가죽 끈이 달린 물통을 매고, 손에는 양은으로 곽을 씌운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폭탄이었다. 일본인들은 연회장이나 행사에 참여할 때 자기가 먹을 수통 하나와 도시락 하나를 준비한다. 그 사실을 단체에서 미리 알아내어 수통과 도시락 모양으로 폭탄을 제작했고, 몇 일전에 병공창의 병기주임 김홍일(金弘壹)장군이 사람을 보내어 김구에게, 김구가 지난 밤 윤봉길에게 전달했다.


  일본인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중앙의 식단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 관민 수십이 둘러싸고, 그 앞에는 일본 학생, 좌우로 일본의 해군과 육군, 그 뒤로는 경비병 십여 명이 이중 삼중으로 몇 미터 간 차이를 두어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이른바 총알받이 같은 것이었다. 봉길이 선 자리는 그보다 더 뒤의 일반 군중이 서는 곳이었다.


  식단에는 중앙에 시라가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이, 그 좌우로 일제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駐中公使) 시게미쓰(重光葵), 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貞次), 주중(駐中)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 민단 간부 도모노(友野盛) 등이 정렬하여 앉아 있었다.


  20분 전에 관병식을 하고 지금은 일본의 국가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있었다. 봉길은 천천히 도시락 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수통을 어깨에서 풀어내려 뚜껑을 열어 폭파시킬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문득 두려워졌다. 그런데,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지막의 순간이 되니 전신이 떨려왔다.


  ‘이것을 던지고 곧장 도망만 치면 그래도 목숨을 구하지 않을까? 아니, 이대로 포기하여 도망가면 살 수 있지 않은가?’


  등에 식은땀이 흐르더니 문득 열한 살 나이에 깨달은 비참한 조선인들의 삶이 눈을 스쳐간다. 끌려가는 딸을 붙잡다 매를 맞고 쓰러지는 늙은 아비, 괴롭힘을 당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길거리에서 버젓이 가진 것을 털리는 힘없는 조선의 백성들.


  ‘돌아오지 못하실 길을 어찌 가신답니까.’


  그리고 아내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그래, 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는 선택하지 않았는가. 깨끗이 죽기 위하여 폭탄을 두 개나 준비하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망설이다니! 윤봉길, 무얼 하느냐! 수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가락이 잘려간 자리가 아찔해 졌다.


  이를 악물고 핀을 뽑았다. 앞에 선 남자를 제쳤다. 한발, 두발, 세발, 빠른 걸음으로 달리는 듯 걷는 듯 나아간다. 끝없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 던져라 윤봉길, 어서 던져라!


  힘껏 팔을 뒤로 젖혔다. 이윽고


  “대한 독립 만세!”


  우렁찬 외침과 함께 역사에 남을 불꽃을 피우기 위하여 물통에 든 폭약과 쇳조각이 하늘로 나부낀다.




  펑!




  잠시 후 사태를 파악한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 서로 부딪혔다. 사람들이 옆으로 흩어진 다음에야 윤봉길은 결과를 볼 수 있었다. 터진 배를 움켜잡고 쓰러진 자, 눈을 먼 것인지 얼굴을 감싸고 오열하는 자, 이미 숨을 쉬지 않고 바닥에 엎드린 자. 이름을 적어 놓은 상 위의 푯말들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하늘에 날려서 이미 사라졌다. 폭탄은 노무라와 시게미쓰의 얼굴에 연거푸 부딪힌 후에 땅에 떨어지며 폭발했다. 성공을 확인한 봉길은 바닥의 도시락 곽을 들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핀을 뽑고 바닥에 힘껏 던졌다.


  ‘아뿔싸!’


  2초가 지났는데도 폭탄이 터지지 않는다. 불발탄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공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심상치 않은 느낌으로 앞을 보았더니 개머리판이 날아와 머리를 내리쳤다.








  1개월 후, 남편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용순은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마을 사람들은 가슴이 아파 차마 그가 고문을 당했더라는 소문은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그의 시아버지는 늙은 나이에 철 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저녁들 먹고 공부 하거라.”


  용순은 상을 들고 부엌에서 돌아왔다. 찬도 없이 그저 멀건 죽이었다. 아이들이 아침이나 낮에 배가 많이 고플까 하여 저녁은 8시가 다 되어서야 먹이곤 했다. 책을 옆에 치우고 밥상 앞에 아들 둘과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강보에 쌓인 모순과 담에게.”


  첫째 아이가 뜬금없이 오래된 편지글의 첫 머리를 읊었다.


  “모순아, 오늘도 읊으려느냐.”


  어머니는 애틋한 눈으로 아이를 보았다. 아이들은 밤이 되면 저녁을 먹기 전에 항상 그 편지를 외워서 읽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스스로를 가다듬기 위해 매일 그 편지를 외우고 또 외웠던 것이었다. 분명 반일 하는 글이였는데, 남편이 지켜주는 것인지 그저 밤이 깊은 탓인지 항상 무사히 지나갔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급히 죽을 먹으려던 담이도 수저를 내려놓더니 형을 따라 읊기 시작했다.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기발을 높이 드날리고...






...태극의 기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육으로 성공하기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 1932년 12월 19일 -




  겨울날의 하늘은 묘한 매력이 있다. 공허한 듯 높으면서도 그 안은 무겁고 중후한 것이 가득 차있다. 오늘은 하늘이 말라 해가 뚜렷이 빛을 토하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여행을 떠나기에 너무도 좋은 날씨였다.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 동포여!




  오사카의 교외 한 작업장에 조선인 남자가 십자가에 팔을 묶이고 눈을 헝겊으로 가린 채 꿇어 앉아 있었다. 남자의 앞으로 두 사람의 일본 군인이 엎드린 자세로 미간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우편에 선 일본인이 말했다. 남자는 숨을 한번 내쉬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향하더니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내렸다.


  “남아로서 당연히 할 일은 다했으니 만족하게 느낄 따름이며, 아무런 미련도 없다. 다만 어린 혈육들이 측은하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조준-!”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탕!




 


 


 


 




- 4월 29일, 거사 당일 새벽 -




  “이것이 무엇인가?”


  시계를 받아 드는 김구가 물었다.


  “제 시계는 선서를 한 후에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단장이신 선생님께서는 2원짜리를 쓰고 계십니다. 이제 저에게는 한 시간 밖에는 소용이 없으니 선생님께서 제 것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이것.” 윤봉길의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푼이 나왔다. “거사를 준비하며 쓰고 남은 것입니다. 이것도 이제 필요치 않으니 선생님께서 쓰셔야 할 곳에 보태십시오.”


  “윤동지!”


  김구는 눈물을 흘리더니 윤봉길을 끌어안았다.








  매헌 윤봉길, 고인의 시신은 일본에서 박열(朴烈)・이강훈(李康勳) 등의 주선으로 광복 1년 후인 1946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의사의 아내 배용순 여사는 의거 후 56년 후인 1988년, 드디어 사랑하던 고인의 품으로 떠난다. 지금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는 그의 정신을 기리고자 매년 4월 29일 매헌문화제를 열고 있다.


  세계인들이여, 이 사내를 보라! 한국인들이여, 이 사내를 보라! 이토록 위대한 희생을 택한 용기 있는 사내를 기억 하라!








......“비록 지금은 우리나라의 힘이 약하여 일본의 손아귀에 있으나 세계 대세에 의하여 반드시 대한은 독립한다. 지금 너희 일본이 열강에 속하여 있지만 그 날이 오면 시든 나뭇잎처럼 항복할 것이다.”


















“그 날은... 반드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