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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역사 벙어리

2005.06.02 20:30

책벌레공상가 조회 수:190 추천:3

extra_vars1 안녕하세요? 저 벙어리 아니거든요? 보세요. 조선말 이렇게 잘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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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3월 21일]

그날은 날씨가 꾸리했다.
나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국민학교에 갔다. 그리고 교실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잠시 후에 기무라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오늘도 늘 언제나처럼 제복에 칼 차고 있는 폼 다 내고, 알아듣지 못할 일본말로 교탁에 서서 나불나불 내셨다. 평소에도 있는 일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한쪽귀로 흘려 보냈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이다.
그런데 내 옆에 앉아있던 민석이가 나에게 조선말로 이렇게 말하였다. 참고로 민석이는 조선말과 일본말에 둘다 능통하다.
"앞으로 국어(일본말)만 사용해야 한대. 조선말 쓰면 반 죽인대."
라고 말하였다.
어쩌라고 기무라 선생. 난 일본말 모른다고. 라고 생각하였다.
난 일본말 모른다. 일본어는 하나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일본말 가르치면 난 언제나 잤다. 일본어로 수업하는 황국....거 뭐시기 하는 과목 시간에도 난 잤다. 그래서 학교 성적이 별로 안좋다. 그래서 시험 때마다 기무라 선생님에게 혼난다. 그래도 뭐 상관은 없다.
그런데 이상한건 우리 아부지가 내가 학교 성적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시험치고 돌아온 날이면 날마다 날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무튼 난 일본말 모른다. 조선말 밖에 모른다. 이건 나에겐 말 하지 마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오늘은 아무 말 안하고 가만히 있었다. 조용히 있었다.
뭐 내일일은 내일 생각하고, 오늘은 일찍 잤다.

[1936년 3월 22일]

오늘도 어김없이 국민학교에 갔다.
그런데 오늘따라 나카이로가 나에게 알아듣지도 못할 일본어로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무슨 욕인것 같다. 무슨 '삐가아로' '삐가아로'를 연발하는게 신경에 매우 거슬렸다. 대꾸하고 싶지만 대꾸할 수가 없었다. 일본말을 아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선말로 대꾸한다 해도 나카이로가 알아들을수 있을리는 만무하고, 선생님한테 조선말 썼다고 혼날테니 말이다.
그렇게 나카이로는 한참을 지껄이더니 그냥 갔다. 민석이가 나에게 슬며시 조선말로 말하였다.
"야, 나카이로가 너더러 자꾸 '어이, 조선인, 너 벙어리지? 너 벙어리지? 바보녀석.' 하고 놀려대고 있어. 넌 그런 소리 듣고도 가만 있을거야?"
난 벙어리가 아니다. 난 벙어리가 아니란 말이다. 나도 입이 있고 말을 할수 있는 사람이다. 나카이로는 그것도 모른다.
내일은 나카이로에게 내가 벙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
오늘은 일찍잤다.

[1936년 3월 23일]

오늘도 어김없이 국민학교에 갔다.
어제에 이어서 나카이로는 나에게 일본말로 시비를 걸어온다. 민석이가 일러준 대로 이건 분명히 '어이, 조선인, 너 벙어리지? 너 벙어리지? 바보녀석.' 이라는 뜻일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참을수가 없었다. 나카이로가 알아 들을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대로 조선말로 큰 소리로 나카이로에게 외쳤다.
"난 벙어리가 아니야!"
갑자기 큰 소리에 나카이로는 움찔했다. 헤헤. 무슨 소린지는 못 알아들을테지만 적어도 내가 벙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머리속에서 각인이 되었을테다.
그런데 복도 너머에서 기무라 선생님이 날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날 선생님 기숙소(맞나 모르겠다. 선생님들이 잔뜩 있는 곳이니까. 선생님들이 각각 책상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곳인데 그 곳의 방에 달린 문패가 일본어라서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로 불러냈다.
......그래서 오늘 기무라 선생님께 무지 혼났다. 아마 조선어를 썼다고 혼내시는 건 갑다.
그일 이후로 국민학교에서 시무룩해져서 종일 아무 말 안하고 지냈다. 나카이로는 계속 나에게 일본말로 시비를 걸었다.
오늘 하루 괴로웠다.
집으로 돌아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아부지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부지께서는 날 끌어안으시더니 조선말로 이렇게 말하였다.
"잘했다. 오늘 애국 하나 했구나."
애국? 애국이 무슨 뜻이지? 난 어려서 애국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짐작해 보건데 애국이란 조선말로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것 같다.
마침 오늘 큰형이 몰래 돌아왔다. 큰형은 기독교 장로회의 선교활동을 맡고 있는데 예전에는 직접 미국에 여러번 갔다온 적이 있기도 한 사람이다.
나는 오늘 큰형에게 커다란 눈깔사탕을 담보로 부탁을 하나 했다.

[1936년 2월 24일]

오늘도 어김없이 국민학교에 갔다.
나카이로 녀석이 또 나에게 일본말로 시비를 걸어온다. 하지만 어제 만반의 준비를 해 뒀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어제 그토록 준비했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캔유 스피크 잉글리쉬?!!"
역시 나카이로 녀석은 아무 말도 못했다. 하하하! 통쾌하다! 눈깔사탕을 투자하여 큰형에게 미국말을 배운 보람이 있었다. 이건 분명 조선말도 아니고 일본말도 아니므로 기무라 선생님도 날 어쩌지를 못할꺼다. 그리고 난 더이상 벙어리인 채로 지낼 이유도 없으니까 시원하다.
오늘은 정말 즐거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