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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시 기록보관소

역사 붉고 하얀 깃발

2007.02.27 10:20

MAR!N3 조회 수:162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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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헤어졌지만 난 딱히 갈 곳이 없었다. 평소같았으면 바르샤바의 고풍적인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명상에 잠겼겠지만 사방에 폭탄이 떨어지는 지금은 도저히 그럴만한 상황이 못되어보였다. 결국 일찍 집으로 돌아가서 라디오 뉴스나 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선전포고를 한 지금, 나 역시 전황이 굉장히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군이 이미 지크프리트 선을 넘었을까? 아니면 영국 공군이 지금쯤 베를린을 박살내고 있을까? 언제쯤 서방 연합국의 군대가 폴란드에 도착하여 폴란드를 지켜줄까? 그러나 비록 프랑스와 영국이 폴란드를 구해준다고 나서긴 했다지만 막상 우리들 일상은 달라진게 없었다. 오히려 폭격의 강도만 더욱더 강해진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우리집 근처에 폭탄이 떨어진 경우는 없었지만 잠에 들려고 침대에 누우면 묵직한 폭격음과 시끄러운 급강하 폭격기의 사이렌 소리, 그리고 콩볶는듯한 기관총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과연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걸까?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걸까? 지금쯤 독일 국내의 상황은 어떠할까?


 바르샤바가 비록 일시적인 혼란과 혼돈에 휩싸이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는 모두들 희망을 놓고있지는 않았다. 바르샤바 시민들은 지금은 이렇게 폭탄을 맞고 있을지어도, 몇일 후에 반드시 영국과 프랑스군대가 폴란드를 구원하리라 믿고있던것이다. 물론 모든 바르샤바 시민들이 저렇게 낙관적인 생각을 품은건 아니었다. 당장 내 친구인 안드르제이만 살펴보아도 그는 전쟁 발발 전에 내세웠던 자신의 "전쟁은 절대 발발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갈아치우고, 폴란드는 곧 독일 점령하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으로 보았을때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 스스로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바쁘지 폴란드까지 신경쓸 상황은 아니란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안드르제이의 주장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의해 비판당하고 조롱당하였다. 결국에는 안드르제이가 말한 사실이 맞다는걸로 판명되었지만.


 어쨌든 다시 집으로 돌아올때, 나는 전차 안에서 이웃집에 사는 로젠펠트씨를 만날 수 있었다. 로젠펠트씨는 비쩍 마르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의사였는데, 우리 집안 가족들과 상당히 친하게 지내곤 했으며 종종 무료로 진찰해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의사로써 언제나 청결하고 단정한 모습을 한 그였지만 오늘, 전차안에서의 그의 모습은 평소때의 그가 아닌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단정한 머리는 제대로 빗질도 안했는지 엉망으로 되어있었으며, 집에 있는 옷을 아무거나 챙겨입고 나온듯 승마바지에 셔츠에다가 의사 가운을 걸친, 옷차림도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의 양 손에는 묵직한 여행가방이 들려있었다.


 불안한 듯이 사방을 둘러보다가 나를 발견한 로젠펠트씨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에게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로젠펠트씨.」


 「오랜만이야. 라빈. 아니 레빈이었던가?」


 그는 멋쩍은듯이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내 이름을 잘못 말했던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블라디노프 레빈(Wladynov Lewin). 그래, 그래. 블라디노프. 지금 어디 가는 중인가?」


 그는 아까의 실수를 무마하려는듯이 내가 미처 내 이름을 정정해 줄 틈을 주지도 않은채 빠르게 말하였다.


 「집으로요.」


 내 대답을 들은 로젠펠트씨는 갑자기 나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특유의 빠르고 재치있는 말투로 나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이봐 이봐. 지금 집으로 갈 상황은 절대 아닐텐데? 혹시 가족들때문에 못떠나는거야? 전황소식 못들었어? 지금 독일군이 바르샤바로 다가오고 있다고! 그렇게 여유부리면서 집으로 갈 상황이 절대 아니야.」


 「방금전에 라디오 발표 못들으셨나요? 로젠펠트씨?」


 「라디오 발표?」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어요」


 내 말을 들은 로젠펠트씨는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나를 응시하였다. 내가 당황해서 그에게 해줄 다른 말을 찾고있을 동안 갑자기 로젠펠트씨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하하! 그거 말이야? 형식상으로 선전포고 해준거? 프랑스와 영국이 정말로 폴란드를 도와줄거라 믿어? 자기네 국민들이 다칠까봐 무서워서 체코를 히틀러에게 팔아넘긴 영국놈들이 정말로 폴란드를 도와줄거라고 믿어?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이봐 정신좀 차려.」


 그렇게 말하고는 로젠펠트씨는 창 밖을 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난 바르샤바에서 탈출할거야. 지금 이런상태로 가다가는 바르샤바는 포위당할게 뻔해. 난 산채로 죽을수는 없다고.」


 난 그 때 로젠펠트씨를 보면서 분명히 그가 미쳤거나 나사가 빠졌다고밖에는 생각할수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들이 바르샤바에 남아서 겪은 고초를 생각해보면 로젠펠트씨의 선택이 분명 옳지 않았나 생각을 한다. 어찌되었건 로젠펠트씨는 이제 자기는 스위스를 통해서 미국으로 갈 예정이라고 말하였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는 한 번 미국에서 만나보자고 말했다.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본 로젠펠트씨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들은 소식이지만 로젠펠트씨는 핀란드와 스웨덴, 그리고 노르웨이를 거쳐 영국으로 간 뒤 미국으로 가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건 잘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주위의 있는 몇몇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유태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차에서 내려서 집으로 가던 도중, 난 갈림길 앞에 섰다. 난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만약 오른쪽 길로 간다면 분명 집으로 빨리 갈 수 있을것같았지만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난 결국 왼쪽길을 통해서 거리를 우회해서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로 옆에 마부역시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왼쪽길로 가려는걸 보자 마부 역시 왼쪽길로 가기로 결심했는지 빠르게 마차를 몰아서 거리로 들어섰다. 그 순간, 굉장히 익숙한 휘파람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전쟁 첫 날 느꼈던 느낌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공습경보는 울리지도 않았다. 워낙 자주 폭탄이 바르샤바 시내에 떨어지기 때문일까? 운이 나쁜 마부는 폭탄을 직격으로 맞았고 나는 그저 얼이 빠진채로 산산조각난 말과 마부의 시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나는 그걸 보고 있을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냅다 오른쪽길로 들어가 집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걸 보았다.


 어쩌면 나때문에 사람이 죽은 걸지도 몰랐다. 난 죽음의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으로 한 순간 패닉상태에 빠졌다.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공황장애인가? 그 때 내게 정상적인 사고란 도저히 무리였다. 끔찍할 정도의 공포심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덕분에 바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한동안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전쟁이란 이런건가?


 집으로 돌아오자 마리아는 걱정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꼭 껴안았다. 어머니 역시 우시며 나를 안았으며 형은 화난 얼굴로 나를 보고만 있었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단다! 오늘 너가 돌아오던 시간대에 대대적인 폭격이 있었잖니? 너가 돌아오지 않길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단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내가 살아 돌아온건 기적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길거리를 마구 헤매고 다녔음에도, 폭탄을 맞지 않고 멀쩡히 걸어다녔다는건 그저 행운의 여신이 내 편이라고 말할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난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정상으로 돌아왔고, 그제서야 내가 그동안 뭘 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


 갑자기 반쯤 미친데다가, 필사적인 모습으로 바르샤바를 탈출했던 로젠펠트씨가 떠올랐다. 분명 이 곳에 머물러 있는건 위험한 일이다. 그건 확실하였다. 나 역시 진지하게 바르샤바에서의 탈출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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